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
about (1)
notice (0)
project (25)
column (4)
archive (14)


[태도상정]전, 태도상정 콤플렉스



태도상정은 2014515일부터 22일까지 갤러리27에서 열렸던 전시의 표제이다. 어찌됐든 집단오찬의 구성원으로써 비평의 운을 태도상정 전으로 떼려니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든다. 태도상정 전은 집단오찬이 선언문을 통해 일종의 비평적 커뮤니티라고 명명되기도 전에 처음 운을 뗀 흔적이며, 나는 그 전시의 기획부터 참여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집단오찬의 구성원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비평의 대상이 비평을 하고자 하는 주체가 이미 소속되어있는 무언가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떨떠름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이 글을 적는 데에 있어서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민망함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민망함 뒤에는 또 다른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과연 내가 소속되지 않은 비평의 대상이란 것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가령 내가 선언문의 내용에 입각해서 비가시적인 대상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자 내 인맥의 변두리에서 먼발치 떨어져있다고 짐작되는 동년배의 작가들에 대해 글을 적는다고 했을 때, 나와 동년배인 그 무명의 작가는 결코 나에게 소속되지 않은 외부의 대상으로써만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맥의 변두리와 무관하게, 그는 나와 동년배라는 점에서 세대적으로 일정 부분 접합되어있고 그가 무명의 작가라면 나 또한 무명의 아무개인 것은 마찬가지다.

 

뒤이어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내가 누구를 작가로써 호명하건 그는 나와 함께 아무개의 전선에 있다, 라고 말을 덧붙인다면 나는 결국 돌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돌은 88만원 세대에게 집어 들라고 요청했던 짱돌이 마침내 던져진 끝에 나 혹은 우리에게 기괴한 포물선을 그리며 되돌아와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88만원 이후의 세대들에게 이미 짱돌과 그것을 집어 들어 던질 수 있는 소위 정치적 전선이라는 윤곽은 일종의 콤플렉스로 남아있다. 한때 정치적으로 조직화 됐던 386이 온갖 경제적 착취의 구조로 피폐화된 지금의 세계에 어디 한 번 던져나 보라고 생색내듯 쥐어줬던 짱돌은 명확한 타격점을 찾지도 던져지지도 못한 채 쉽사리 무효화되었다.

 

세대라는 결속이 과거에 그랬듯 지금의 청년들에게 정치적 구심점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특정한 세대를 막론하고 모두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결속시키고 있는 범자본주의적 질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결과라는 것이 한때 득세했던 세대론 이후 사회가 실제로 우리에게 펼쳐 내보인 손바닥이었다. 여전히 국내에서 최저시급은 형편없고 굳이 청년 세대뿐만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최저시급에 기대 제 일상의 형편없음을 무기한 연장하고 있다. 물론 이는 지금의 현실에 대한 단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에 굳이 세대라는 개념을 대응시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세대는 결코 정치적 구심점으로써 존재하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내 주위에 실질적으로 산재해있다는 것이다.

 

최저시급이 흔히 삼포세대라고 호명되는 20대에게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어찌됐든 최저시급으로 표상되는 일명 파트타임 잡이 가장 광범위하게 착취하고 있는 대상이 삼포세대 혹은 20대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대학가 주변을 에워싼 일명 큐브라고 일컬어지는 임대 공간들의 무더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굳이 세대라고 선언하지 않더라도 이미 삼포세대는 사회적 착취 구조의 일부로써 혹은 그것의 결과로써 제시되어있다. 경제적 기반의 부재 때문에 미리 선언되는 20대의 연애 포기와 결혼 포기와 육아 포기 등은 지금의 체제가 명확한 타격점을 향해 던진 짱돌에 맞은 삼포 세대의 세대적 외상 같은 것이다. 부모의 터울 안에서 그러한 외상을 얼마만큼 지연시킬 수 있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집단오찬이 누구를 작가로써 호명하건, 설사 그가 미술제도에 가까스로 안착해 바로 그 제도에 의해 집단오찬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가로써 호명되고 있을 지라도 결국 사회가 상정하고 있는 세대적 모델은 동일하다. 태도상정 전에 참여한 작가들이 서로 간에 별다른 접점이 없는 개별적인 미술 작업들을 무려 작업으로써 전시하고 시침 떼고 스스로를 작가라고 자처하며 그러한 작가의 작업들을 토대로 비평에 대한 태도를 상정하고자 모의한 것 또한 분명 그러한 접합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참여자들이 정해진 시간에 전시장 한가운데 모여 펼친 논의는 그 내용의 유효성과 무관하게 그러한 접합관계에서 비롯된,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를 작가로써 민망하게도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비루한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기실 작가라는 정체성을 헤아렸을 때 손에 집히는 것은 작가로써 응집된, 일종의 소구력을 갖춘 물리적인 짱돌이 아니라 (전시 서문에서 언급됐듯) 어느 갤러리에 소속되어있는가 혹은 얼마만큼 전시 경력을 갖췄는가 하는 물적 토대들을 제시함으로써 타자들에 의해 상상되는 일종의 허구적 관념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타자들이 상상했을 때 제시된 물적 토대들이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그러한 관념은 박탈당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체성의 죽음에 대해서 되묻는 것은 너무도 먼 과거에서 도착한포스트모던적인 말장난이지만, 작가라는 관념과 작가의 물적 토대가 어긋났을 때 벌어지는 기묘한 광경들은 여전히 현실 도처에 널려있다.

 

본 전시가 진행될 당시 나름의 화두로써 오르내렸던 아트스타코리아는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비롯된 헛발질인 셈이다. 방송 내부에서 마련된 규칙에 따라 선별된 누군가에게 창작 지원금 1억 원과 유수의 아트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해외연수의 기회 등의 다양한 혜택이라는 물적 토대가 수여되는 광경은 마치 보증인 없이 체결된 계약서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증인은 분명히 존재한다. 방송을 보고 있는 내가 보증인이 아니라 아트스타코리아 내부에 존재하는 갑과 을의 관계 자체가 보증인이 되고 결과적으로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누군가의 작가로써의 지위가 체결된다.

 

아트스타코리아는 작가의 보증인은 얼마든지 유동적으로 뒤바뀔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작가적 보증은 오롯이 작가 개인에게만 귀속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 일종의 징후적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도상정 전은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인 동시에 미술제도의 주요한 기반인 작가-되기의 순간을 서로를 작가라고 눙치는 방식으로 모사해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자기 풍자적 농담이 될 수 없다. 제아무리 작가-되기에 대한 모사를 반복하더라도 그것은 흉내내기에 그칠 따름이며 는 결코 작가가 될 수 없고 는 여전히 제도의 별다른 보증 없이 예술을 연습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는 풍자하고자 하는 대상인 자기가 될 수 없고 제아무리 스스로 보증인을 자처한다한들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자리 바꾸기 게임의 무용성은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삼포 세대의 포기 정서를 일정 부분 반영한다. 짱돌이 굳이 콤플렉스인 이유는 제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외재화되지만 외상을 지연시키는 방식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 제도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데에서 오는 좌절감과 동시에 설사 제도에서 이탈하기 위한 전략을 꾀하더라도 그조차 쉽사리 제도에 대한 모사로 변질되는 패착을 동시에 겪고 있기 때문이다. 태도상정 전이 작가, 혹은 보다 폭 넓게 예술가라는 정의에 대해서 전개한 논의의 틀은 그러므로 논의를 통해서 작가-되기가 태생적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기반에 대한 변별적인 태도를 추출해내지 못하는 이상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태도상정 전은 예상된 실패의 기록일 수밖에 없다.

 

는 왜 작가를 자처하는가. 또한 왜 를 비롯한 세대를 새삼 작가로써 호명하는가. 집단오찬이 이미 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대상을 비평의 의제로 삼은 이상 이처럼 예상된 실패는 앞으로 집단오찬이 실행할 모든 비평들 속에 잠재되어있다. 그에 대해 자연스레 수반되는 민망함은 단순히 비평의 첫 운이 태도상정 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로써의 호명이 단지 지금 작가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수행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작동하는 시스템을 재상연하는 자기 파괴적인 퍼포먼스일 뿐이다. 이때의 자기는 비로소 를 명확히 지시한다.

신고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