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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2014, 2015 안녕?’ 청년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지난해 1228일 교역소에서 개최됐던 안녕 2014, 2015 안녕?’ 좌담회를 뒤늦게 복기해보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비록 직접 방문해서 패널과 관객들 사이에 오갔던 얘기들을 경청하지는 못했지만, 좌담회 이후에도 SNS상에서 그에 대한 연장선상의 글들이 단편적으로나마 게재됐던 바, 대강의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대략 2013년 이후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소위 청년 세대들을 주체로 한 대안공간(의 운영자)들과 그러한 판세를 유의 깊게 지켜보던 또 다른 청년 미술인들은, 지난 좌담회에서 비로소 서로의 구체적인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헤쳐 모였다.

 

그것은 이후 쏟아져 나온 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의 평가처럼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이후는 가히 청년들의 변곡점이라 할 만한다. 굳이 미술계만을 볼모로 삼지 않더라도, 오로지 경쟁적 인프라만이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각 세대들은 새삼 세대로서 분할되었고 세대 안에서는 다시금 개인들로서, 그런 식으로 점차 미시화된 일상들 간의 비루한 각개전투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다사다난했던 미술계의 한해를 결산하고 서로의 생사를 확인해보자는 자리는, 시종일관 작동하는 각개전투()에 잠깐이나마 제동을 걸고 연대라는 행위를 연습해보는 나름대로 유의미한 자리였다(라고 추측된다).

 

좌담회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추측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아쉽지만, 분명 좌담회의 외부에는 그간 형성된 논의 구조에 대해 충분히 공감하고 (무엇보다 같은 세대의 연장선상에서) 실제 연루되어있는 나와 같은 관객들이 대다수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더듬거리며 적어보려는 이 추측성의 글에서 나름 주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부분은 좌담회에서 공간에 관한 문제들을 포함해 쟁점을 모았던 소위 연대라는 행위다. 앞서 투박하게나마 언급한 각개전투의 양상은 비단 미시화된 일상을 치르고 있는 개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미술계에 한정했을 때) 제도화된 유수의 미술관이나 갤러리들에만 한정된 문제 또한 아니다.

 

본 좌담회에 패널로서 참석한 커먼센터, 시청각, 교역소, 반지하, 케이크 갤러리 등등의 대안공간들은 공간으로서 구체화되었고 그러한 공간과의 접면으로부터 일련의 흥미로운 전시 및 기획들을 조직해내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그것들은 개별적인 거점()이다. 이를테면 신진이 지속적으로 기성의 공간과 기성의 자본을 껄끄러워하고 비밀기지 같은 전시공간을 꾸려나가는 것은 시간이라는 기회비용을 아끼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창작과 기획은 모두 오브제와 담론을 마주하는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하다.(니문, Next is what? (or where?) 대안공간들의 송년 좌담회 <안녕> 2014/2015,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이처럼 창작과 기획을 위한 절대시간을 긴축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기지는 대안공간으로서의 완결성에 기여하지만, 그러한 완결성만으로 기대감소 운운하는 지금의 시대상을 돌파하는 데에는 분명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안녕 2014, 2015 안녕?’ 좌담회 풍경, 교역소 페이스북 발췌

 

이러한 논의를 보다 극단화하자면 점차 개별적인 대안공간으로서 완결성을 띄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청년 미술인들의 거점이 늘어갈 수록 지금 횡행하고 있는 미시적 개인들의 각개전투의 양상을 자칫 미시적 공간들의 각개전투로서 전유해내는 데에 그칠 위험이 있다. 물론 유능사가 기획한 청춘과 잉여와 같은 전시는 지난 미술계를 관류한 90년대와 00년대를 복기하는 (그러한 좌표 설정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논란의 여지 자체 때문에) 유효한 지표로서 기능한다. 반지하의 오픈베타공간이라는 운영방식 또한 전시 이전의 상태에 있는 작가들의 내부적 지형도를 가늠해본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전략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표와 전략들에 보폭을 맞추거나, 그것들을 수렴하여 청년들의 공통된 언어로서 정제할 만한 (소위 대안공간에 대응되는 개념으로서의) 대안적인 플랫폼은 여전히 부재한 실정이다.

 

여기서의 공통된 언어란 굳이 특정한 슬로건을 상정하지는 않는다. 일례로 좌담회 이후에 대두된 청년관을 위한 예술 행동이란 청년들을 배제하거나 갖은 공모와 선발과정들을 경유해 특정 작가, 기획자, 비평가의 모델만을 미술계의 청년으로서 인정하는 기성 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실제 제도의 공간(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안에 청년 미술인이라는 논의를 기반으로 한 공론장을 조성하는 데에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설사 그러한 슬로건의 결과로 청년관이 만들어진들, 지금 현재 운영 중이거나 앞으로 운영될 청년 세대들의 대안공간, 혹은 생산조합, 커뮤니티 등등의 유사 거점들을 위한 구심으로서 작용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흔히 논평하듯 제도 내의 유별난 부산물로 남거나 / 또 하나의 대안공간으로 그칠 것이다. 만약 청년관이 그런 식으로 귀결된다면 애초의 슬로건이 담지하고 있는 문제설정으로부터 한참 어긋난 채로 청년에 관한 공회전을 거듭할 뿐이다.

 

물론 후자의 결과는 청년관이 독립적인 기구로서 작동하고 그 안을 순환하게 될 유효한 작가적 풀을 조직해낸다면 여태까지의 선례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적일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우리에게 유효한 작가적 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가, 혹은 어떻게 선별해내는가? 이후 조성될(수도 있는) 청년관은 그런 지점에서 결코 청년 문제 당사자들의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어찌됐든 나름의 맥락을 거쳐 선별된 이들만이 소위 작가적 풀로서, 혹은 미술계의 청년 세대를 일정 부분 표상하며 그 안을 순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당연한 한계고 굳이 그런 식의 윤리적 문제를 빌미로 청년관 문제에 제동을 거는 것은 무용한 일이다. 예를 들어 오늘의 살롱전이 한국 현대회화를 총망라하기 위해 선별된 69인의 작가 대신, 청년 세대 전체를 포괄하기 위해 수천명의 젊은 페인터들을 한 공간 안에 우겨넣을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하나의 공간은 주요한 순환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결코 하나의 공간만으로 순환의 전체를 자처할 수는 없다는 점은 충분히 곱씹을 만하다.

 

달리 말해 미술계의 사잇공간에서 촉발된 인터페이스들이 나름의 구실을 하고 있다면, 그것들의 총합으로서의 전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마침내 순환시킬 것인지에 대한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그리고 청년관을 위한 예술 행동은 단순히 제도 내부의 특정한 공간을 점거할 목적이 아닌, 바로 그러한 본질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슬로건일 것이다(라고 또 한 번 추측해본다). 지난 공장미술제 사태에서 알 수 있듯, 단순히 작가, 비평가, 기획자 등등에 대한 선별 기준을 청년들의 구미에 맞게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청년 미술인들이 판을 짜는 방식은 소위 미술가, 혹은 예술가로서의 기존 규범들을 갱신해나가는 과정이라기보다, 스스로를 이미 작가로서, 혹은 작가 아닌 누군가로서 의도적으로 눙친 이후에 특정한 공간 속에서 벌이는 일련의 상황들에 가깝기 때문이다(교역소, 반지하). 그러므로 지금 시점에서는 오히려 그런 식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하는 청년 미술인의 거점들은 왜 그 자체로 대항 제도로서 기능할 수 없는가를 되물어야만 할 것이다.


교역소 <상태참조> 일부, 교역소 트위터 발췌

 

전시 공간이 없어서 임대의 형태로 전시() 공간을 마련했다면, 사실 공간 자체가 아니라 임대라는 한시적인 시간성이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임대는 가까스로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청년들이 공간을 점유하는 데에 있어서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동시에, 그러한 전제조건을 공유하는 이른바 전체들을 재차 꿸 수 있는 구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러나 확실히 우리들의 거점과, 거점들 간의 관계망, 혹은 그것들로부터 비롯된 전체의 순환 구조가 단순히 공간의 문제에만 천착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유효한 연대의 전략이 아닐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제도로부터 파생된 규칙들보다 우리의 세대적 습성에 부합하는 공생관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굳이 임대의 얘기를 꺼내며 논리적 비약을 일삼은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것은 연대에 대한, 적어도 우리의 세대적 습성에서 비롯한 하나의 (터무니없는) 판본이다.

 

지난 좌담회를 통해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다면, 더 많은 것들의 생사를, 더 자주 확인해야할 것이다. 그렇게 확인된, 동시에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될 전체를 마침내 하나의 대항 제도로서 제시해내는 것이 이른바 청년들의 전략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단 어떻게 하면 각자의 공간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곳으로부터 탈주할 수 있을 것인가. 뒤늦게 2014년과 2015년에 안녕을 보내면서, 동시에 청년관 문제를 얄팍하게나마 복기해보면서 남은 나의 사적인 물음들이다. 나는 여전히 청년관 자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지만, 그것을 둘러싼 문제설정에 있어서만큼은 청년의 당사자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교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선 물음들이 단순히 사적인 것으로 그칠지 어떨지는 유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