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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미술, (괄호)로부터의 호명>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세대 미학, 미술 주체

 

최근 세대 미학, 혹은 세대 주체라는 명제가 재차 거론되고 있다. 이것은 지난 2014년 교역소에서 개최됐던 좌담회 <안녕 2014, 안녕 2015?>*1) 이후 대두된 청년관 문제에 대해 기성 세대일부가 내놓은 나름대로의 응답이기도 하다.*2) 관련한 글에서 강수미는 청년관 문제에 대해 혹시 선배가 제시해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청년관 신설이라는 이슈를 복창하면서 정작 미술은 손 놓고 있지 않은가?”라고 자문하며, 소위 청년 세대라고 호명되는 이들이 스스로 자발성을 지니고 이슈를 점화하거나 견인해가고 있지 못한 상황에 대해 염려한다. 이는 청년관을 비롯한 특정한 사회적 이슈가 촉발될 때 당사자들이 이슈에 의해 대상화됐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외부에 의해 견인 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낙인찍는 성급한 일반화에 다름 아니다.

 

청년관에 의해 재차 주목되는, 혹은 말 그대로 대상화된 청년 미술인들은 바로 그 대상화의 시선을 자발적으로 간취해냄으로써 자기비판에 대한 도구로 삼을 수는 없는가? 강수미는 이러한 논지 자체를 차단하며 외려 세대 주체 자체를 성립 불가능한 무언가로 격하시킨다. 청년관은 그것이 실제로 관철되건 그렇지 않건, 혹은 그러한 문제설정 자체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그로 인해 형성된 논의의 틀 속에서 세대라고 호명됐던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벼리고 있는 과정에 있다.

 

정작 강수미의 글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설사 청년관 문제를 괄호 치더라도 본격적으로 미술계 안에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다양한 청사진을 그리며 그 속으로 자연스레 편입될 수밖에 없는 청년들이 과연 기성 미술을 전복할 수 있을 만한 작업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대목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에 대해 곧바로 정작 발화도, 행동도, 무엇보다 세대 너머 체재를 전복할만한 야심 찬 작업도 직접 수행하지 못한 채 이슈로 서로를 묶는 이들이 잉여 상태에 빠져있다는 식의 견해를 내놓으며 또 다시 문제를 성급하게 매듭짓는다. 그러나 청년관이 담지 하고 있는 내 작업이 정당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플랫폼에 대한 요구와 그것을 복창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지니고 있는 작업적 역량(혹은 그것을 기반으로 생산되는 실제 작업들) 사이의 간극은 그렇게 손쉽게 무시될 수밖에 없는 처지인가?

 

*1) <안녕 2014, 안녕 2015?>

이 좌담회는 커먼센터의 청춘과 잉여전시가 끝난 후 부대행사로 마련된 자리였지만 해당 전시를 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2014년 한 해 동안 한국 현대미술이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는지를 묻고 확인하는 자리였다.

*2) 강수미, <세대 미학, 미술주체의 문제>, 월간미술, 20152월호 참고.

 

 

이슈화된 공간너머로

 

<안녕 2014, 안녕 2015?>에 패널로서 참석한 이들이 운영하고 있는 대안공간들은 90년대 후반에 성행했던 대안공간들과는 결이 사뭇 다르다. ‘미술계 키드로서 상징되는 90년대 후반의 대안공간들이 키드 이후의 키드들을 재생산하기 위한 일종의 인큐베이팅 구실을 했다면, 2010년대 이후의 대안공간들은 일군의 젊은 작가들을 특정한 전시 담론 안으로 소급해내더라도 그 이후의 경로에 대해선 제도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상태다. 이를테면 앞선 좌담회에서도 언급됐던 커먼센터의 개관전인 <오늘의 살롱>에 참여한 69인의 젊은 작가들은 동시대 회화의 지형도를 그리기 위해 유의미하게 헤쳐 모였지만, 그에 대한 (제도적 차원에서의) 비평적 응답은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가?

 

전시 이후에 쏟아졌던 일련의 글들을 일별해보면 대부분 커먼센터라는 공간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질성에 초점이 모아질 뿐이다. 그러한 글들에서 비평적 성격은커녕 공론화의 여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왜 미술 제도의 변두리에서 커먼센터를 포함한 신생 대안공간들이 그러한 이질적인 모습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전제 자체가 누락되어있기 때문이다. 빈번히 언급되듯 공간들의 운영주체는 대부분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88만원 세대 이후로 구성된다. 그들이 마련한 공간들이 굳이 이질성을 띄는 이유는 단순히 화이트 큐브의 대항체로서 특징적인 성격을 담보하기 때문이 아니라, 화이트 큐브로 상징되는 미술 제도의 관행들로부터 엄연히 튕겨져 나간 상태이기 때문이다. 즉 저가형 임대공간들(의 이질성)은 공간적 특징이기 이전에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차선인 셈이다.

 

현재 대안 공간들은 대부분 임시변통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것들이 애초에 임대공간이거나 유효공간이라는 사실이 운영에 관한 중요한 재정적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지만, 그와 같은 태생적 한계들을 대안으로서 어떻게 독파해나갈지에 대한 장기적 전망을 서로 공유하지 못한 탓도 무시할 수 없다. 각 공간들과 공간들이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에 대해 달리 거론할 만한 비평적 응답이 없다는 사실(물론 이는 비평 모델 자체의 전반적인 침체 상황에서 연원하지만)90년대 후반에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던 대안공간과 기성 미술제도 사이의 연계성이 마침내 완벽하게 종지부를 찍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대안공간들 속에서 밀집된 작가적 풀이 더 이상 제도를 경유하는 선순환 구조를 그려낼 수 없다면, 그들은 어떤 식으로 스스로를 작가로서 재생산해내야 하는가?


<오늘의 살롱> 전시 풍경

 

 

<상태참조>, 반지하 - 은유체계로써의 전략들

 

이 시점에서 교역소에서 개최됐던 <상태참조>는 꽤 흥미로운 준거로서 기능한다. <상태참조>는 엄밀히 말하자면 작가 아닌 이들이 최소한의 여건만을 갖춘 공간에 모였을 때, 외려 어떤 작가적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모의실험에 가깝기 때문이다. 교역소 측은 <상태참조> 자체를 일종의 이벤트로서 정의하고, 그로써 참여 작가들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공간은 일면 그 안에서만 통용되는 인위적인 규칙들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벤트의 외부에서 실제 그것들을 규정하고 있는 임대라는 성질을 작업과 병행하며 의식화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때의 임대는 굳이 <상태참조>가 무대로서 삼은 임대공간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 역시 기성 미술 제도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포트폴리오라는 제도를 경유해야만 하고, 이때 촌각을 다투며 경연 되는 작업들의 개요는 각자가 선점한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태참조>라는 관문을 통해 작가 아닌 이들로 동질화된 참여 작가들은 임대로 분할된 시공간 속에서 최대한 작가로서, 작업으로서 연출되기 위해 릴레이 형식으로 무대에 오른다. 각각의 작업들은 명확한 체계를 갖췄다기보다, 작업 이전에 설정된 규칙들, 의도된 한계들에 대한 기민한 자동기술처럼 구사된다. 이때 그들은 서로의 어떤 상태를 참조하는가? 바로 앞선 규칙들이 암시하는 공통된 임계점을 작업적으로 돌파하거나 외려 함몰되는 모습이다. 이는 시대에 대한 좌절의 알레고리일까, 아니면 순전히 연출적인 자조의 방식일까? 어떤 대답을 내놓든 중요한 것은 <상태참조>가 동시대의 작가적 상황에 대한 나름의 유의미한 은유 체계를 갖췄고 무엇보다 이를 개별 작업들의 총합으로서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은유 체계는 <상태참조>와 더불어 임시변통으로 운영되는 여타의 대안공간들과 일정 부분 상응한다. 일례로 반지하가 표방하고 있는 오픈베타 공간은 아직 전시의 형태로 펼쳐지지 못한 작업들을 협소한 공간 안에서나마 시뮬레이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를 통해 작가가 공간에 대한 자율권을 온전히 획득했을 때 과연 얼마만큼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범위가 제시된다. 더불어 그러한 전시 이전의 상태는 작가들 사이의 상이한 작업적 개요에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반지하라는 일관된 공간 안에 지속적으로 누적되고 있다. 반지하를 경유한 익명의 작가들이 제 작업의 배치를 통해 은연중에 획득했을 임대적인 공간감은 반지하 이후에 어떤 식으로 변주될 것인가? 반지하를 포함, 각각의 대안공간 안에 누적된 연습들은 애초에 한계 설정된 공간을 탈주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스스로의 작업적 몸체를 전략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교역소 <상태참조> 일부

 

청년관이라는 대항제도

 

이처럼 문화적 불모의 상황에서 불모 자체를 의태하고자 하는 작업 양상은 소위 청년세대 미술의 유효한 전제조건이다. 그와 관련한 징후들이 웹상에서, 특히나 SNS의 타임라인을 정보성의 단문으로 타고 흐르는 와중에 청년관은 은연중에 그에 합류했던 젊은 미술인들의 무작위한 교차범위로부터 촉발되었다. 교역소에서의 지난 좌담회는 그러한 교차범위가 현실에서의 대면 방식으로 드러난 선례라고 할 수 있다. 뒤이어 홍대의 여분의 강의실을 점유해 한 동안 청년관에 대한 공론장으로써 구실 했던 727now!은 일련의 강연들과 라운드 테이블을 통해 논의의 연속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한동안 분주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공간 자체가 아니라 역으로 그런 식으로 형성되는 소위 청년 담론들을 공간에 변칙적으로 투사하는 방식인 것이다.

 

임대의 방식이든, 점유의 방식이든 그로써 경험되는 한시적인 공간감은 어느새 세대의 인지적 차원을 구성하고 있다. 앞서 일별한 대안공간들의 운영방식, 혹은 그 안에서 전시된 작업들의 개요를 거칠게나마 기회 특정적이라고 호명한다면, 727now!와 같은 판본은 그러한 세대적 습성과 가장 부합되는 지점에서 마련된 공론장인 셈이다(그런 의미에서 청년관은 이미 당사자들에게 과정상의 형태로 주어져있다). 이제 공간은 한시적으로 주어진 범위로서 가까스로 감각될 뿐, 청년의 현존성과 함께 기꺼이 휘발되어버렸다. 각자의 의제를 통해 범위 안에서 교차해낸 결과가 공간화로 귀결될 뿐이다. 그러한 범위로서의 거점들이 산재한 상황에서 재차 공유될 수 있는 것은 결국 각각의 범위 내부에서 형성된 고유한 타임라인이다.

 

범위들의 총합으로써 물리적 외연을 넓히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책략이라면(임대된 시간들을 한데뭉친다?), 젊은 미술인들의 거점(그것이 대안공간이든, 자발적인 전시 조직체든)에 이제껏 누적됐고 앞으로도 누적될 작가들의 정보를 열람하고 그것들을 재차 전시와 비평의 형태로 조직해낼 수 있는 창구로서의 접점을 만드는 것이 시급하다. 그것이 광범위한 아카이빙의 형식이건, 비평적 커뮤니티의 형식이건, 서로의 작업적 생사를 확인할 수 있는 비평적 조감도를 그려내지 못한다면 결국 지금의 대안공간들은 유의미한 각개전투로써의 풍토를 조성하는 데에 그칠지 모른다. 그러나 2014년을 기점으로 느슨하게나마 형성된 대안공간들의 관계망은 지속적인 대면을 거듭하며, 보다 명확한 대항제도로서 기능할 만한 여지를 갖추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결국, 청년관이란 (설사 그것이 물리적 공간으로서 관철되더라도) 지금껏 경색됐던 작가적 풀을 각각의 범위에서 범위로 순환시킬 수 있을 만한 유기적인 통로를 경유해 구체화된 연대 체계, 혹은 그러한 흐름 자체일 것이다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