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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여, 예술을 자체로 옹호하라’ - 예술과 노동의 관계에 대하여

정강산

작가 보수제도(이하 아티스트 )에서부터 표준계약서에 이르는, 그리고 '좋은 노동과 나쁜 예술'이라는 식의 작업적 시도와 공장미술제*에서 벌어진 첨예한 적대적 토론에까지- 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재사유하기 위한 일련의 접근들이 예술계 내부에서 어떤 사안보다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하는 요즘, 이에 대한 특정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술과 노동이라는 대립적 항들로부터 나름의 공통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러한 시도들은 주로 젊은 작가들의 집단에서 이뤄지며, 그들은 열악하고 황폐한 예술적 실천의 지속성을 염두에 그와 관련된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오늘날 작업을 지속해나가고 있는 작가들은 어느 때보다 실질적인 곤경에 처해있다.

2013 상반기에 플라토에서 있었던 김홍석의 ‘좋은 노동 나쁜 예술’ .(출처: 플라토 페이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예술과 노동에 관한 논의들을 비판적으로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는 까닭은, 예술가들이 예술과 노동이 접합된 후의 폐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이러한 시도가 예술의 존재론에 관한 토대를 아래에서부터 무너뜨릴 것이라는 판단과, 예술가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일은 다른 방식으로 수행될 있으리라는 확신으로부터 비롯한다. 부디 필자가 개진하는 주장의 배경을 헤아려주길 바라며 글을 시작한다.

*2014 1 10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되었던 4 공장미술제.

화해 불가능한 대립항으로서의 예술과 노동

알다시피 노동과 예술은 본질상 화해할 없는 영역에 있는, 대립적 성질을 가진 것이다. 거친 추상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누군가에게 고용된 삶의 재생산을 위해서 피하려야 피할 없는, 무의식적 강제로 수행되는 신체적 활동으로서의 노동과- 전적으로 자발성에 근거한 자유롭고 의지적인 활동으로서의 작업; (예술)이라는 구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덧붙여 이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영문의 사례를 참고하도록 하자. 양자 모두 신체적 소요를 수반하는 일련의 활동을 일컫는 것이지만, ‘Labor’ 'Work' 라는 단어는 서로 질적 차이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Labor'노동이란 의미를 지니는 반면 'Work'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데, ‘Work’ 뒤에 ‘s’ 붙이면 예술작품을 지칭하는 단어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예술과 노동은 의미론적으로 종합할 없는 간극을 가진다. 예술가들은 이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기에, 그들의 신체적 활동의 과정을 '작업'이라고 칭하며, 결과물 또한작업이라 칭한다. 그것은 노동(Labor) 상품을 만드는 행위이고, 작업(Work) 예술작품을 만드는 행위인 까닭이다. 말하자면 예술가들은 자신의 신체 활동 일반이부과된 것으로서의 노동 구별된 것임을 가정한다.

그도 그럴 것이 노동은 부과된 것이자 일정한 시간 단위로 환원 가능한- 추상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지만, 작업은 자율적인 것이며 시간으로 값을 측정할 없는 구체적인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역사 속에서 모종의 위계적 구도를 연출해 왔다. 노동은 천하고 힘든 것인데 반해, 예술은 고급문화에 속하는 즐거운 일이라는 식의 관념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의 세계, 오늘의 체제, 현재의 자본주의

한편 우리는 항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이를 종합하려는 시도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적 체제의 발전과 동시에 소외된 상태에 처해진 노동을 급진화하여, 그것을 마치 예술가들과 장인들의 작업처럼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노동과 유희의 일치를 역설하는 흐름에서부터, 앞서 얘기한 표준계약서 의무화와 관련된 흐름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스펙트럼은 꽤나 넓고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한 종합의 시도 , 한때 많은 예술가들이 주목했던 사조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술과 (노동) 일치를 역설했던 아방가르드의 움직임이었고, 예술과 노동의 종합이 다른 방식으로 외화 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사례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봐야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그것은 노동과 예술, 혹은 경제와 예술 사이의 위계를 와해시켜 예술의 탈신비화를 꾀하고자 했던 급진적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종합의 제시는 역설적이게도 끝내 반동적인 모습으로 귀결되었다고 있을 텐데, 이쯤에서 오늘날의 경제의 모습을 되짚어보자.

온갖 상품들은 자신이 상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마치 유일무이한 고고한 가치를 내재한 작품인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한다.


     유명 신발브랜드의 선전.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단지 '신발' 뿐이지만, 신발은 개인의 열정적인 탐구 끝에 발견된 보석과도 같은 모습으로- 예술성을 담지한 , 우리에게 제시 된다. (출처: 뉴발란스 공식 사이트)

'네팔의 장인이 방글라데시의 고산지대에서 나는 겨우살이 식물의 줄기를 빻아 만든 '이라던가, '미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을 수행할 즐겨 입었던 튼튼한 청바지와 워커'라던가, '영국의 집배원들이 좁은 도로를 누비며 우편물을 빠르게 배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날렵하고 얇은 자전거'라던가 하는 식의 상품광고들은 이미 그들이 스스로 주장하듯 예술의 위상에 속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이미 문화와 역사, 기억과 경험 등의 초월적 가치들을 구매하는 데에 익숙하다. 더불어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을 예술로서 드러내기를 마다치 않는다. 시다바리가 코디네이터 혹은 매니저로, 옷팔이 노동자들이 스태프로, 빵집 아저씨가 파티쉐로, 팔이가 정보통신 컨설턴트로 수식되는 사례들은 심미화된- 예술화된 노동의 표본들일 것이다. 이렇듯 노동은 이미 예술화 오래이며, 이런 식의 노동에 대한 관념의 전환은, 결국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로 점철된 끔찍한 세계를, 꿈과 희망이 가득한- 창조적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각색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 참고.

급진적인 노동? 노동의 이율배반

물론 아방가르드의 흐름이 지금과 같은 세계를 꿈꾸었다고 수는 없겠으나, 결과적으로 예술과 노동을 종합하려는 시도는 이제 자본과 경제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우리는 모습이 얼마나 기이한 광경인지 알고 있다. 이는 노동과 예술의 대립적 성질을 역설하는 주장의 당위가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것이다.

이렇게 경제가, 노동이 끊임없이 예술에 러브콜을 보내는 와중에 반대로 예술가들은 아티스트 피를 비롯한 표준계약서 등을 요구하며 자신의 활동은 본질적으로 노동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아니 동일하다고 까지 주장하는 중이다.

(위에서부터) 2014 말에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한 심포지엄의 포스터, 해당 심포지엄의 개최 현장.

노동하는 예술가, 예술환경의 조건이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예술과 노동을 진지하게 연결 지으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출처: 노컷뉴스 유연석 기자)

이들은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 드러나는 노사관계와 비슷한 수준의 착취와 위계가 미술계 내부에 존재함을 주장하고, 정기적 수입이 없어 고단한 생계를 감내한 예술적 실천을 근근이 벼려내야 하는 예술가들의 처참한 삶의 조건을 성토*한다. 일견 급진적으로 보이는 위와 같은 시도들은, 앞서 우리가 살펴보았듯 실은 예술과 노동을 종합하고 관계시키기 위한 몸짓이 으레 가질 법한 맹점과 한계를 그대로 담지하고 있다.

아티스트 피와 표준계약서에 관한 논의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술이 수행의 정도에 따라 일정량의 화폐가 담보되는 일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보수를 관리하는 기관의 존재를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기관과 예술가가 맺게 관계는 의심할 여지 없는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로서, 이를 통해 예술은 유사 노동과도 같은 지위를 획득한다. 여기서 우리가 묻지 않을 없는 것은 과연 노동의 외부에 있던 신체적, 생리적 활동들이 노동의 내부로 포섭되는 것이 쌍수를 들어 반길만한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시도인가 하는 점이다. 대답은결코 그렇지 않다 것이라는 사실을 쉬이 짐작할 있을 테다.

이에 대한 결론을 시사하는 사례를 참고하자면, 노동(경제) 영역에 포획되지 않았던 주부의 가사노동은 남성 가장이 벌어들이는 월급 수준의 하락으로 인해 197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의 과정에서 완벽하게 노동력 상품이 되는데, 그것은 맞벌이 부부의 급격한 증가와 동시에 '양육' '돌봄' 상품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들에게 현상은 여성의 경제활동으로 인해 여성이 가진 남성에 대한 의존도가 현저히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전체 경제의 구성에서 혹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그것은 여성도 노동을 통해 고용과 피고용의 관계에 포섭되어 자본에 착취당할 권리를 갖게 것이며, 노동력상품의 공급증가로 인한 전반적인 임금수준의 감소와 대규모의 룸펜프롤레타리아(산업역군) 양산을 야기하는 것이자, 주부가 도맡았던 영역의 일들을 시장에 의존하게 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상품수요(도시락, 분유, 고가의 내구재, 파출부와 가정교사) 개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여성의 해방을 가져다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여성의 경제활동증가는, 오히려 여성에 대한노동남성 이중적 속박을 낳았고, 그렇게 안타까운 모습으로 귀결되었다.

이를 통해 직관적으로 감지할 있는 사실은, ‘결국 노동이란 급진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자본의 관성 내부에 존재하는 이라는 점이다. 현실에서 자본과 노동이 맺는 관계를 떠올려 봐도 이는 명백한 사실로 드러난다. 노동운동가들이 으레 겪는 어려움은, 의외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상품의 가치를 높이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에만 급급하여, 노동의 조건 자체를 타파할 상상력과 투지를 보여주지 못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합주의적 관성과 계급적 포퓰리즘을 고수하는 ,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자본의 외부에 있는 자신을 사유할 없다는 것이며- 결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동력이자 상수인 노동력상품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이 자본에 의해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성립되는 조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년간 시도되었던 일련의 움직임들 가장 성과를 내놓은 것이 예술인 복지에 관한 법률 제정일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예술가들의 생계유지비의 보장이라기보다는 예술가들이 주최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에 가깝다.

 배타적 조합주의를 넘어, 예술의 대자성을 담지한 시민으로

반면 예술가들은 자본의 존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과업과 신체활동을 수행하며, 그렇게 사유하고, 살아간다. 예컨대 예술가는 자본의 폭력과 온갖 수탈에 맞서면서도, 한편으로 해고와 자신의 임금이 하락할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노동자들의 이율배반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기적인 수입원이 없지만, 그리하여 경제를 넘어선 비판의식과, 어떤 굴레로부터도 탈주할 있는 자율적 역량을 담지 한다.

하루에 인류가 이틀간 소비 있는 재화들이 생산되지만 세계의 절반은 10달러 미만의 화폐로 자신의 삶을 재생산해야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고 실현하려는 모든 노력을 철저히 무마하는, 생산에서의 착취와 분배과정에서의 수탈로 얼룩진, 상품에 일정한 양의 가치가 내재되어있다는 믿음을 통해 작동되는- 위험천만하고 끔찍한 자본주의적 체제 너머의 세계를 조망하는 임무에 예술과 예술가들은 본질상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원한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노동을 비롯한 여타의 다른 영역들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이며, 예술이 자신의 의의를 갖게 되는 지점일 것이다. 예술은 자체로 독립적이며 자율적이기에, 닫힌 세계로서의 현실 너머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들을 조명하고, 그것을 밝게 비출 있다. 예술이 가진 비판의 도구로서의 성질 또한 본질적으로 이러한 예술의 성질로부터 출현한다. 비록 노동자들과 같이 계급적 단결을 통한 실제적인 정치적 개입은 하지 못하더라도, 현실을 앞질러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의 잠재적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예술의 정치적 개입형태의 특성이자, 매력일 것이다. 그것은 예술에게 부과된 책무이기도 하다.

위와 같이 예술과 노동을 둘러싼 오래된, 풍부한 논의를 염두에 , 나는 기꺼이 예술은 노동의 외부에서, 세계의 모든 것을 관측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거미줄 속에 있는 거미는 거미줄 바깥의 세계를 감지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예술의 의의는 바로 그것이 노동의 외부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드러난다 해서 작금의 예술가들에게 모든 부조리와 비참을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일일 것이다. 2011, 예술가가 지병과 빈곤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자취방에서 스러지게 사건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충격은, 명실상부하게 예술가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개입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끔찍한 사건을 되새길 필요도 없이, 예술계에 발을 딛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한편으로 예술에 얼마나 적대적인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다. 전문 입시학원의 일자리라도 구하면 다행이지만, 여차하면 편의점 등의 점포에서의 간헐적인 아르바이트를 통해 작업을 지속하는 일도 그리 놀라울 것이 없는 것이 우리 주변의 일상적 풍경인 까닭이다.

나는 여기서 감히, 나를 비롯한 동료들, 그리고 한국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노동의 대립 항에 있는 예술의 성질을 긍정하고, 그것을 염두에 삶의 조건들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하라 주문이 바로 그것이다. 모든 비판과 모든 가능성들을 제시 있는 대자성을 반납한 , 자신의 책무를 반납한 예술도 실은 노동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 작업을 수행할 있다. 지금과 같은 배타적 집단으로서의 조합주의적 권리가 아니라, 보편적인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좋은 참고사례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국민에게 일정량의 화폐가 삶을 유지할 수준으로 지급되는 기본소득과 같은 의제에 힘을 실어보는 것도 차선으로 선택해 있는 방안일 있으며(물론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문제적이다) 거시적으로는 복지국가를 뒷받침하는 각종 제도적 요소의 제정(교육에서부터 의료, 주거, 연금 등으로 이어지는) 힘을 보태고, 그와 관련된 정치적 개입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편들은 사안별로 문제적일 있으나, 적어도 예술적 활동 일반이 노동의 영역으로 포섭되는 사태보다는 훨씬 옳다.

예술가들이 아방가르드의 실패를 비판적으로 염두에 두지 않은 표준계약서와 아티스트 피와 같이 예술과 노동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지금처럼 유지하는 , 이내 우리의 모습은주어진 으로서의 경제의 여느 영역에 고용되어- 노역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비참함을 스스로 체화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술가들이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던 세계에 대한 비판의 시선과 자율성을 강탈할 것이다. 이때 우리에게 남게 것이 예술이라고는 없는, 노동만이 주어진 세계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세계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활동 결과물을 들어상품이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을 참고하라.  페처 뷔르거,<아방가르드의 이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54p.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