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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 북 리뷰 ‘당신은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 :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언니모자

 

가해자 이익, 2차 가해자 이자혜, 피해자 A로 구성된 이 사건1)이, 피해자가 미성년자였으며 가해자가 성인이라는 맥락에서, 당시에 피해자-가해자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적절한 개입을 하지 않고 방관, 묵인 및 동조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건을 구성하는 현재와 당시의 시간차를 놓고 볼 때, 성관계와 성폭력 사이 미세한 차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대응하기 어려웠다고 해도, 여전히 미성년자-성인간의 나이차는 권력의 차이로 존재한다. 또한, 피해자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한 이래로 법적인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미학적으로 잘 꾸며진 2차 가해자 측의 탄원서가 출판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편집자 노트와 서문, 각자의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의 짜임새의 삐걱거림은 부록에서 절정을 맺는다. 말미를 차지하는 ‘부록: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사건일지’의 문제적인 부분은, 예술계 각 생태계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많은 부분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일지는 ‘여성예술인연대(약칭 AWA)’와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약칭 WOO)’,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약칭 두영찍)’의 출범과 활동을 언급하지 않았고,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의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해쉬태그와 관련 운동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여성주의저널 ‘일다’에서 다루어진 #부산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해쉬태그와 관련 운동을 언급하지 않았고, ‘씨네21’에서 열 한 번이 되도록 특집 시리즈로 진행된 [영화계 내 성폭력] 주제의 좌담 또한 언급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예술가’이자 ‘우리의 친구’인 이자혜의 복귀를 갈망하는 탄원서로서의 이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은 양효실이 대표로 쓴 서문이다. 서문에는, 편집자 노트에서 언급된 ‘가장 첨예한 주제인 페미니즘을 다시 한 번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필자들의 절실함’2)이 있었다면 당연히 드러났어야 할 여성주의적 쟁점의 제기가 없다. 서문은 양효실의 이자혜에 대한 개인적 인연과 일화, 사적인 연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1) 고발자 A는 웹툰 <미지의 세계>의 작가 이자혜가 A가 고등학생일 때 이자혜 작가의 친구인 성인남성B를 A에게 소개시켜줬고, B는 A를 강간했다. A는 어려서 그것이 강간이라고 명확히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성인남성과의 성관계에 대해 이자혜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자혜는 이 대화를 ‘피해사실에 대한 고발과 요청’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히려 조롱했고, A와 B에게 각각 서로와 성관계할 것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A는 <미지의세계>를 비롯한 몇몇 만화에서 이자혜가 A와 B가 등장하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재현했다고 주장하며, 그 역시 지금까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A는 자신이 B에게 당한 것이 강간이라는 점을 인지했으며, 이자혜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에 있어 2차가해자임을 깨달았음을 명백히 했다. 무엇보다 현재 이자혜가 페미니즘 공론장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화두에 오르고 있는 것과, B가 A 자신에게 사과도 없이 연락을 끊고 결혼해 잘 살고 있다는 점을 볼 때, A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이상은 피해자가 2016년 10월 19일 에버노트에 작성한 글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며, 이에 대해 이자혜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A의 고발이 “주작”이라며 부정했다가 삭제했고,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자 모든 것에 사죄한다는 내용의 짧은 사과문을 남겼다가 삭제했으며, 최종적으로 A의 피해사실에 대한 이자혜 자신의 무책임은 반성하되, 자신이 미성년자 강간을 사주·모의했다는 혐의 및 자신의 작품들이 피해사실을 재현한 범죄의 산물이자 범죄 그 자체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해명문(2016. 10. 21)을 남겼다. 주석 64, [문화예술계 성폭력의 특수성과 ‘2차가해’ 담론- 웹툰 <미지의 세계>사태를 중심으로] 오혜진(문화 연구자), 토론회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의 발제문 중 주석. 135쪽.

2)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양효실, 박수연, 박연아, 이나라, 이미래, 이연숙, 이진실, 이춘식, 허성원 지음. 현실문화 펴냄. 15쪽.

 

양효실은 본문에서 이자혜를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입장은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인용을 빌어 ‘강간’이라는 개념의 본질 자체를 가부장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로부터 탈주를 제안한다. 그러나 성폭력의 현실적인 사건들을 눈앞에 두고, ‘강간이라는 개념의 ... 개념의 ... 개념’ 따위의 추상적 전제를 거부하라는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부장제로부터 발원한 개념과 폭력, 즉 강간이라는 지배의 방식을 거부하면 성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실제로, 피해자들이 자책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할 때, 가부장제가 심어놓은 여러 관념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데 큰 몫을 한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몸속으로 이물질이 삽입되는 경험은 신체적으로 다가오며, 그러한 총체적인 경험을 단지 정신적인 태도만으로 무화하기란 어렵다. 양효실의 제안은 실제적으로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고통의 실체를 외면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될 수 없다. 심지어, 이 글은 ‘여성의 경험만으로 충분한가’는 소제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성의 경험을 빼고 나면, 성폭력에서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가부장제가 양산한 폭력과 싸워야 하는가?

 

양효실은 ‘베즈 무아’를 인용하며 제안하는 바, “강간의 피해자 서사에 쾌락주의적인 가벼움으로 맞설 것을 요청”3)한다. 가부장제 지배 전략으로서의 강간에 대해 ‘웃어넘기는 것’은 하나의 태도로서 가능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1대 1로 바로 대응 가능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것이 성폭력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책하는 시간을 통과한다. 그 사이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많은 지지와 연대가 있어야만, 자기 자신의 성폭력을 성폭력으로서 긍정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필요성을 건너뛰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과 괴리된 태도이며, 자신이 아닌 다른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탄원서가 제기하는 두 번째 주장은 이러하다. 이자혜는 ‘페미니스트’로 세워졌다 ‘안티페미니스트’로 끌려내려진 희생물이라는 것이다. 이자혜가 가진 콘텐츠는 시장에서 여성주의 코드로 소비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페미닌 전사’ 등의 캐릭터를 활용하고, 출판사와 웹플랫폼 등은 여성주의 코드로 홍보전략을 짜고 실행했다. 그러나 이자혜가 본인의 사생활과 관련해 내린 행동들, 지금도 진행 중인 행동들은 여성주의적인 활동과 거리가 멀다. 물론 여성주의적이지 않은 사적 행동들을 지속하는 작가의 작품을 여성주의적으로 판단하거나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생산하는 컨텐츠의 성격과 실제적인 지향성의 이율배반은 적어도 페미니즘 코드를 활용한 소비의 흐름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한 계기가 될 수는 있다. 이자혜의 작품 홍보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막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자혜의 작품이 소비되던 곳에서 작품과 다른 작가의 사생활에 배신감을 느끼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 것 또한 개연성이 있다. 과거에서처럼, 정부와 같이 권력을 확실히 쥐고 있는 위로부터의 검열과 통제라는 방식과는 다르게, 이자혜의 작품을 소비하는 관객들이 돌아서고, 출판사와 웹플랫폼은 이자혜와의 계약을 빠르게 해지했다. 이자혜의 작품을 소비함으로서 여성주의라는 시대정신을 공유한다는 열정과 신뢰감을 나누어 가졌던 관객들이 신뢰가 깨지는 경험을 갖고 절망감을 선사받은 후, 소비를 거두었다는 인과관계를 단순한 ‘도덕주의’로 정리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여성주의는 단순히 사변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여성주의가 체계적인 논리 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주의는 현실 속 여성들의 경험들과 가치관이 뒤섞여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장이며, 여성주의적 관점의 표현은 발화자의 삶의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이자혜의 ‘축출’에 대하여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구도에 기반한 도덕적 순결주의’라고 정의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명의 여성주의자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범주는 그가 생산하는 문화적 기획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가 삶 속에서 내린 결정들과 실천들 또한 포함하고 있으며, 그의 표현물과 현실적 태도의 불일치 때문에 그의 지지자들이 갖는 배반감은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자혜의 창작물이 애초부터 여성주의적 기획이었다는 전제 하에서다. 오히려, 모두가 ‘메타’적이라고 믿었던 <미지의 세계>의 위악은 사실상 창작자의 일상적 태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공분을 샀다. 헌데, 여기서 묻고 싶다. ‘악’과 ‘위악’은 그것을 수행하는 자가 ‘악’임을 자각하고 있으면 곧 ‘위악’이 되는 것인가? ‘악’의 자기고백과 자기혐오는 곧 그의 의도가 ‘선’임을 의미하고, 곧바로 ‘악’에서 ‘위악’으로 전치되는 것인가? 어떠한 성적인, 문화적인, 자본이 없는 주인공이 계속해서 연애관계에서 실패하는, 때로 성공하더라도 무가치한 일로 환원시켜버리는 이 이야기들은 곧바로 ‘우리의’, 또는 ‘여성주의적인’ 이야기가 되는가?

 

<미지의 세계>라는 창작물의 ‘위’악성, ‘메타’성이 <미지의 세계>가 철저하게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 전제되었을 때 기능한다는 믿음은 하나의 안일함으로 규정될 수 있다. 위악과 메타에 대해 <미지의 세계>는 충분한 거리감을 작품 내에서 스스로 갖지 못했다.

 

더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지점은, 이러한 흥망성쇠에 대해 과도하게 자기몰입을 하는 이 책의 필자들의 태도이다. 이춘식 글의 제목 ‘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왕’에서 볼 수 있는 태도라든지, 이미래의 일기 형식의 글은 필자들이 이자혜에게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연아가 말하듯 “내가 뱉는 이야기는 전부 나한테 하는 이야기”이고 “나는 나를 가여워 하면서도 욕밖에 못 하기 때문에”, “거절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침묵하거나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다.”4)라는 단정은 자신의 크기를 약소하게, 세계와의 관계 또한 협소하게 지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곡된 자기인식과 세계 인식에 대해서, 이들은 객관화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자기 연민에 빠진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5) 배우들이 연극 무대에서 하는 혼잣말은 ‘방백’이라고 하며, 방백은 관객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혼잣말이 될 수 없다.6) 이 글이 책으로 출판된 순간, 필자들은 자신과 동료들의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신은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이 노린 바는 사건을 간접 경험하는 제 3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탐구할 필요성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한 제 3자의 태도는 사건에 개입하고 분석하고 자신의 역할을 짊어지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사건을 바로 보기를 회피하고 싶은 ‘나, 우리’의 욕망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로 치환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해서 오히려 묻고 싶다. <미지의 세계>가 양효실의, 박수연의, 박연아의, 이나라의, 이미래의, 이연숙의, 이진실의, 이춘식의, 허성원의 세계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3) 같은 책, 99쪽.

4) 같은 책, 135쪽.

5) 같은 책, 125쪽.

6) 무대에 선 한 명의 배우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독백'과는 달리, 무대에 선 배우들이 서로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대사. 따라서 배우들 간에 진행되는 '대화'와는 다른 속마음이 '방백'으로는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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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