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0)
about (1)
notice (0)
project (30)
column (5)
archive (14)

<망가진 이미지, 망가진 공간, 망가진 회화>

권시우


동시대 회화는 어떤 이미지를 출력해낼 수 있을까? ‘동시대라는 수식은 지금의 파편화된 시공과는 부합하지 않으므로 별다른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어찌됐든 당면한 현실이 있고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 회화는 그와 무관하지 않다. 동시대의 어감이 생소하다면, 차라리 막연하게 계속되는 오늘이라고 호명해보자. 국내 미술의 오늘을 재고하기 위해선 2015년 전후의 타임라인을 보다 체계화할 필요가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비평적 개요가 미비하므로 지금 당장은 그로부터 불거진 몇몇 작업적 징후들을 솎아내 대강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신생공간은 일련의 전시와 작업들을 통해 포스트 폐허라 할 만한 환경과 점차 동기화됐고, 그 결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변시켰다. 이를테면 관련한 몇 가지의 질문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 각각의 공간 운영자가 가용했던, 또한 지금도 암암리에 지속하고 있는 다수의 임대 및 유휴 공간은 그것이 노출하고 있는 다소 남루한 외관만으로 단순히 폐허로 호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단순히 폐허가 아니라면, 그 안에서 구현되는 작업은, 무엇보다 한때 자기 완결성의 언어를 빌어 시선의 몰입도를 유도했던 회화는 어떤 식으로 자신이 불시착한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의 지위를 갱신하거나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


바로 앞선 질문을 이어받자면, 한진의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회화에 대한 갱신이라기보다 지속적인 포기의 과정에 가깝다. 반지하B½F(이하 반지하)에서 선보인 전시는 본 연작의 발단이자 말 그대로 일종의 오픈베타라고 할 만한데, 이후 연작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다소 흐릿한 인상의 전투형 미소녀캐릭터1)의 중대형 크기의 걸개 드로잉과 그에 부속된, 다소 얄팍하게 구겨지거나 엉거주춤 선 조각 오브제들이 좁은 면적의 공간에 느슨하게 배치된 모양새다.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잠정적으로 마감된 지금 시점에서 이 전시를 재방문했을 때 흥미로운 점은 한진의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들이 미처 합성되지 못한 채 공간상에 나열되어있다는 것이다.

 

1) 본래 전투형 미소녀 혹은 싸우는 미소녀는 서브컬처 내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써, 다양한 배틀물에 등장하는 말 그대로 미형의 소녀 캐릭터를 지칭한다. 배틀에 최적화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변형되거나 유사 사이보그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능한 전사로 기능함에도 불구하고 모에화한 여성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한진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전투형 미소녀는 본 글에서 후술하겠지만 앞선 서브컬처의 맥락을 얼마간 전유하는 한편, 대개 어딘가를 노려보거나 배틀을 대기하듯 엉거주춤 서 있다는 점, 그리고 드로잉-회화의 맥락에서 무작위로 변형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서브컬처 내에서 통용되는 전투형 미소녀라는 개념과 별다른 접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캐릭터 혹은 인물이 한진의 작업에서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지칭하기 위한 조어로서 미소녀를 사용하기로 한다.


<오르가즈믹 스크랩Orgazmic Scrap>(2014.5.15 - 31) 일부, 반지하 20번째 프로젝트. (http://vanziha.tumblr.com/tagged/project/page/3) 


이후 커먼센터에서 진행한 단체전 <오토세이브 : 끝난 것처럼 보일 때>(이하 <오토세이브>)에서 제시한 작업을 기점으로 작가가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드로잉-회화를 반지하에서의 드로잉과 비교해보면, 후자는 (단순히 드로잉-회화의 밑그림 차원이기 이전에) 그와 함께 배치된 조각 오브제들의 안팎을 구성하는 무작위한 색면들2)과 일시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윤곽만이 존재하는 텅 빈 레이아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일련의 조각 오브제는 화폭으로부터 물리적인 공간상에 추출된, 그럼으로써 망가진 (얼마간 채색된) 평면의 자재들인 셈이다. 물론 이 자재들이 어떤 식으로 접히거나 형상화될 지는 드로잉-회화의 전개에서처럼 순전히 작가의 자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혹은 평면의 자재들은 구겨졌거나 엉거주춤 서 있는 등의 다소 위태로운 상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정 부분 (평면으로서 온전히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의 완력을 견뎌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2) 일련의 오브제는 종이나 비닐 등의 표면 일부를 채색한 뒤 때로는 변형된 미소녀의 입상처럼, 대개는 작업의 부산물처럼 늘어놓았다.


문제는 앞선 드로잉 레이아웃과 평면의 자재들이 합성됐다고 할 수 있을 드로잉-회화들이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를 자처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미소녀는 흐릿하게나마 형상화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 미소녀의 신체 윤곽은 드로잉에 가까운 붓질에 의해 과장되게 부풀려지거나 축소될 뿐 아니라 주변의 불균질한 색면들과 상호작용하며 거듭 셔플링Shuffling된다. 재빠르기보다 느슨하게 휘갈겨진 듯한 붓질과 그로 인해 모호해진 인물 형상은 일면 작가 본인의 무의식의 반영 같기도 한데, 물론 그러한 고리타분한 독해의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진이 인물의 표정이나 이목구비를 만화적인 관습에 따라 축약해 묘사함으로써 미소녀라는 클리셰를 은연중에 암시하면서도, 그것이 서브컬처 내에서 담보하고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회화의 내외에서 의도적으로 망가뜨린) 평면의 자재들과 결부시킴으로써 편의적으로 변주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한진의 미소녀는 서브컬처에서 관습화된 일련의 기호들과 무관하게, 명확한 소실점을 잃어버린 회화적 스크린이 특정한 이미지를 투영해내는 대신 무분별한 평면의 자재들만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그것들에 최소한의 얼개(혹은 레이아웃)를 부여하기 위한 형상으로 기능한다. <오토세이브> 이후의 작업들을 드로잉-회화라고 호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련의 필치와 색면들이 화폭 내에서 별다른 맥락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전개되고 누적되는 과정이 어찌됐든 앞서 언급한 인물 형상이라는 얼개를 (설사 셔플링되는 와중에 그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하더라도) 묘사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드로잉-회화가 불완전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을 단일한 이미지로 수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얼핏 추상적으로 조합된 듯한 평면은 미소녀 형상에 의해 빈번히 와해되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전시공간 상에 일종의 조각 오브제로서 추출되기 이전에 한진의 평면이 화폭 내에서 이미 한 번 망가진상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오토세이브>의 경우에서처럼 드로잉-회화와 그에 부속된 조각 오브제들이 병치되었을 때, 양자는 불완전한 평면으로부터 분기한 별개의 대상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망가져버린 상태를 공유한 채 서로를 어렴풋이 지시하고 있다. 일전의 반지하에서의 오픈베타 과정에서 등장했던 조각 오브제들이 가상의 화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추출해낸 색면에 그쳤다면, 드로잉-회화의 관점에서 경험하는 조각 오브제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두서없는 역학들, 이를테면 셔플링의 과정을 미처 종결하지 못한 채 화폭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상에 삼투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은 캔버스 상에 그럴 듯한 회화 차원의 이미지를 출력하는 문제를 유보한 채, 회화와 그것이 거듭 재생산하는 (무의미한) 평면의 자재들을 재료 삼아 어떻게 물리적인 공간을 연출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혹은 단순히 허름한 외관이나 노화의 정도로 가늠되는 폐허가 아니라, 전시공간으로서 랜더링이 덜 된 미완의 공간 속에서 회화 자체를 산개하며 나름의 좌표를 모색한다.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전시 전경.(https://twitter.com/commoncenter_kr/status/614315523698917377)


포스트 폐허의 상황이란 다수의 전시공간이 화이트큐브의 근사치로부터 벗어나 당사자들이 당면한 일시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공간 내외에서 선뜻 파편화되기 시작할 때 성립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신생공간들은 최적화되지 않은/못한 공간의 상태를 동시다발적으로 점유하는 와중에, 폐허의 장소성과 무관하게 손쉽게 폐허로 호명되곤 하는 임대 및 유휴 공간의 제한적인 레이아웃과 질감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가상의 화이트큐브와 비교했을 때 축소되고 얼마간 구겨진 듯한 공간(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축소되고 구겨지지 않은 가상의 화이트큐브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을까?)에서 도드라진 물리적인 요철에 임의로 들어맞는 모듈로서의 작업, 혹은 주어진 공간과 그로부터 튀어나온 조건반사적인 작업들 간의 의도치 않은 접면으로부터 마침내 포스트 폐허라는 환경을 망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포스트 페허라는 환경, 그로부터 비롯한 물리적인 토대를 일종의 가설무대로 삼는다. 이로써 회화의 붕괴된 소실점과 이제껏 랜더링이 덜 된, 즉 불균질하게 흩어진 자재와 텍스처를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있는 전시공간이 일련의 작업들을 수렴하는 와중에 파편화한 시점은 한진의 작업 내외에서 미묘하게 혼선된다. 후자의 경우, 신생공간을 경유하며 일변한 공간에 대한 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일정 부분 (회화라는 매체, 그로부터 비롯한 일련의 작업들과 함께) 작가 본인이 불시착한 2015년 전후의 시공에 회화를 매개로 적응해나간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폐허의 장소성이 무효화된 순간 작업이 폐허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것은 도시의 사회적인 네트워크에 유사 서비스업의 형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이를 미술의 언어로 전유해낼 수 있는 여지가 아니라, 그저 얼마간 망가진 공간의 텍스처와 그와 동기화한 채 망가져버린 시점이다. 그러므로 한진은 드로잉-회화 및 평면의 자재들을 활용해 자신의 시점을 고의로 망가뜨림으로써 지금 처해있는 환경에 최적화한다.


결국 한진의 작업과 포스트 폐허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온전히 합성해내지 못하는 각자의 과도기적 상태로부터 불거진 남루한 질감이다. 신생공간 이후에도 젊은 미술 생산자들에게 할당된 대다수의 전시공간은 여전히 중립적이라기보다 무방비하며, 그렇기 때문에 일련의 작업들은 개별 공간이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망가진 면면들을 어떤 식으로든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진은 앞서 언급했듯 자신의 회화가 전제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화폭 너머로 삼투시킴으로써, 회화와 공간의 서로 다른 과도기적인 상태 간에 의도치 않은 접면을 만들어낸다. 혹은 애초에 망가진 공간과 병치해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는 불완전한 평면성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때 의도한 삼투 현상, 즉 화폭 내에서 이루어진 셔플링을 공간의 과도기적인 상태와 동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캔버스의 물리적인 경계에 의해 차단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련의 조각적 오브제는 작가의 개입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불거진 평면의 자재들이며, 앞서 언급한 접면 또한 망상 차원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연출된 풍경은 포스트 폐허 자체를 레벨 디자인 삼아 그에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해낸 듯한 남루한 회화적 얼개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은 회화적인 스크린이 잃어버린 이미지/대상의 빈 칸을 남겨둔 채, 바로 그 유예의 순간을 반복하기 위한 동력을 지금 당면한 현실의 잔해들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폐허의 망가진 텍스처가 그 안에 제시된 개별 작업들에 지속적으로 간섭하며 작업의 해상도를 저하시키거나 무력화하듯, 한진의 회화에서 이루어지는 셔플링 또한 추상의 외연이 미소녀 윤곽에 간섭하거나 역으로 인물 형상이 추상적인 색면에 간섭하는 식으로 식별 가능한 대상/이미지 내외의 경계를 반복해서 허물거나 유예시키고 있다. 결국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과도기적인 상태는 일정한 제약 안에서만 통용되는 유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신생공간의 사례에서 우리는 폐허라는 특징적인 레이아웃을 자처했을 때만 배가되는 공간의 완력을 가늠할 수 있고, 회화 차원에서의 셔플링은 캔버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미처 납작해지지 못하는, 달리 말해 불완전한 평면성을 현실에서의 하중을 견디며 물리적으로 모사해내고 있을 뿐인 유사 조각들을 생산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진의 회화는 공간 특정성에 부합하는 일종의 모듈로서의 기능과 텍스처를 지니고 있고, 공간413에서 진행한 개인전 <OS->(2017527- 610)는 이를 부연하기 위한 사족(이를테면 조각 오브제)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오로지 회화의 아웃풋만으로 앞선 진술을 계속해나간다. <OS->는 남루한 회화적 얼개에 대한 내러티브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는 가정 하에, 그에 기반해 독자적인 회화 작업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각각의 드로잉-회화는 미소녀 윤곽과 추상의 색면 간에 의도적인 혼선을 빚는 유사 드로잉 과정을 갱신해 화폭 내에서의 변별성을 모색하기보다, 여전히 주어진 공간의 텍스처와 상호작용하는 여지를 부각한다. 이는 그간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구성해낸 남루한 회화적 얼개가 이미 내러티브 차원에서 포스트 폐허라는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OS->에서의 드로잉-회화는 그에 부속된 조각 오브제들의 별다른 매개 없이 개별적으로 놓여있을 때조차, 그 자체로 완결되기보다 전시공간의 벽면으로부터 비롯한 얕은 부조처럼 보인다. 이러한 착시는 단순히 벽면에 걸려있을 때보다 부러 어슷하게 기대서 있거나 공간 어딘가에 무방비하게 놓여있을 때 배가된다.


한진 개인전, <OS-> 일부.


앞선 풍경은 주변의 공간적 남루함을 일방적으로 의태한 결과가 아니라, 남루한 회화의 텍스처와 남루한 공간의 텍스처를 병치함으로써 발생한다. <OS->에 비치된 캔버스들은 결코 주어진 공간의 표면을 깎아낸 부조나 그것을 모사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변형시킨 캔버스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본 전시에서의 개별 회화들은 마치 오브제인양 캔버스의 무게나 하중을 빌어 벽이나 바닥과 같은 공간의 구조에 얼마간 의지하고 있다. 결국 드로잉-회화는 평면의 자재들을 물리적으로 추출해낸 이후에, 스스로를 일종의 캔버스 오브제로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공간 내에 마저 수렴되고자 하는 셈이다. 이러한 과정은 셔플링의 와중에 있는 회화적 이미지라는 전제는 여전히 고수한 채, 그간 회화와 공간 간을 인위적으로나마 매개했던 평면의 자재 혹은 유사 조각들을 생략함으로써 성립한다. 즉 개별 회화와 (폐허로 호명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과도기적인 그리고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공간이 직접 대면했을 때, 전자를 이미지 차원에서 과시하기보다 후자의 관성에 종속시키고 그에 따라 일종의 오브제로 환원해 공간상에 배열하는 식으로 양자를 재차 동기화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캔버스가 이미지 내외를 구획 짓는 물리적인 경계는 더욱 확고해져 앞서 의도했던 삼투를 차단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개별 작업들은 공간에 종속되는 동시에 독자적인 회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처럼 한진의 회화에는 이미지 내외에 몇 겹으로 둘러쳐진 경계들이 혼선된 채 존재한다. <OS->를 포함한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지금까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 포스트 폐허의 환경과 조응하는 와중에 미묘하게 다른 형태로 주어졌던 각각의 공간들을 회화 차원에서 수렴하고 이를 기반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이었다. 결국 망가진 회화는 망가진 공간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대응인 셈이며, 망가진 공간은 지금까지 우리가 신생공간을 매개로 축적한 경험치의 물리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망가진 공간 자체가 신생공간이라는 경험의 특정성을 유발한 주요한 동인 중에 하나였거나. 그렇다면 마침내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을 매듭지은 한진은 이후 어떤 공간을 수렴하고 또 점유할 것인가? 지금까지 남루한, 가난한, 그로 인해 망가진 텍스처들을 합선시킴으로써, 혹은 그것들 사이의 경계들을 중첩시킴으로써 일련의 작업들을 전개했다면, 화이트큐브의 근사치에 가까운 공간에 불시착했을 때 여전히 앞선 전략은 유효할까? 이를테면 신생공간 발 작업과 유사 화이트큐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망가진 회화의 시점은 앞선 질문들을 포괄한 채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