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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에서 <>까지 : ‘유닛의 뒤편은 어디에?

 

권시우



김희천의 바벨 3부작(<바벨>, <S/P/A>, <랠리>)은 일련의 작업들에 선행하는 거시적인 세계관에 의해 운용된 결과라기보다, 1부인 <바벨>에서 암시하고 있는 파국의 정서를 단서 삼아 이를 토대로 어떤 세계관을 가설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바벨의 세계관은 조건반사적으로 구술해낸 이야기의 구조에 가깝다. <바벨>은 서울의 어딘가에서, 서울을 경험하는 와중에 엄습한 불길함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캐묻는 대신, 그것을 섣불리 파국으로 얼버무리고 이를 내러티브 전개를 위한 발단으로 삼는다. 달리 말해 <바벨>의 내러티브는 서울은 이미 망했다, 라는 성급한 문장으로 서두를 뗀 뒤 ?’가 아닌 어떻게?’를 동력으로 삼아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화자의 사적인 플롯은 서울-어떤 세계의 파국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그에 대한 삽화로서 3d렌더링된 서울의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마침내 서울은 무엇을 투사하거나 백업시켜도 상관없는 다소 공허한 데이터 센터로 귀결된다.

 

우리는 가상의 카메라가 3d모형들 사이, 그것들의 텅 빈 내부, 중력 없는 상공을 배회하며, 어설프게 스캔한 서울의 디테일들을 주지할 때조차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애초에 실제 서울 자체가 렌더링이 덜 된 사물처럼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바벨의 세계관의 발단인 불길함은 여타 사회정치적 맥락과 무관하게, 혹은 상이한 맥락들이 일시에 엉겨 붙은 듯한 K-스러운 외관을 미처 소화하지 못한 주관적인 상태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S/P/A>에서 제시된 각종 3d객체들(경찰 마스코트, 마이클 잭슨, DDP, 서소문교회를 비롯한 각종 서울의 건축물, 행인 캐릭터 등등)의 혼란상, 그것들이 서로 중첩된 양상은 <바벨>에서의 1인칭 화자가 구술하고자 했던 서울에 대한 감상을 대변하는 한편, 미처 문장으로 짚어내지 못한 대목들이 남긴 이야기의 틈새로부터 역류한 시각적인 폐기물이기도 하다. 반면 <바벨>에서 문득 시점을 달리해 조감하는 서울-어떤 세계는 자신의 헐거운 용량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앞선 폐기물, 즉 실재와 맞부딪힘으로써 발생하는 총천연색의 스파크들을 예비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서울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 너머에서 상연되는 서울에 대한 하나의 판본이자 서울로부터 비롯한 하나의 이야기, 허구적인 세계이다. <랠리>에서 등장하는 제2롯데월드를 비롯한 파사드 건물들의 불투명한 유리면(유사 스크린)은 실재하는 서울의 이미지들을 내적으로 수렴하는 대신 난반사시키며 현실과 허구 사이를 모호하게나마 경계 짓는다.

 

중요한 것은 경계를 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계 너머에 가설해놓은 세계관을 화자 혹은 작가가 (동어반복에 가까운 죽음, 파국에 대한 이야기, 그것을 구술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스스로 납득하고, 그 외부에 실재하는 현실감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는 본 트릴로지가 파국을 암시하는 문장들을 스크린 속에서 계속 공회전 시키면서, 더 이상 다음 단계(이를테면 프리퀄이나 시퀄의 형태)로 넘어갈 수 없는 회색지대로서의 시공간을 연출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희천은 굳이 그곳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인다. 3부작이라는 선형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완결되지 않는 이야기의 파편들은 늘 엇비슷한 서두를 떼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척하거나, 유사 서울에 백업된 채 뒤섞일 뿐이다. 이후의 작업들은 주어진 세계관 내에서 반복되는 오작동에 가깝다. 이를테면 <썰매>는 숭례문 서킷이나 롤러코스터와 같은 질주의 이미지를 통해 공회전을 가속함으로써 공간의 폐쇄감을 증폭시키는 한편 바로 그 공간 내부에 상주하고 있을 법한 유튜버의 어투로 경계 밖의 관객들을 비웃으며 현실을 따돌리고, <멈블>은 앞선 질주의 궤적을 맹도견과 맹인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발생하는 혼선으로 유비하거나 유희해내는 일종의 스핀오프에 가깝다.

 

이로써 실제 서울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일종의 대체 시점이 설정된다. 그러나 이때의 대체 시점은 주체가 맞닥뜨린 풍경을 무수한 레이어들로 분화시키거나 별도의 이미지를 삽입해 실시간으로 재편집하는 AR의 시점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에서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되 그 배후에서 오작동하는 어떤 세계-서울을 의식하고 있는 불안정한 스크린에 가깝다.

 

<>은 바로 그러한 스크린을 매개로 주변을 바라보는 어떤 주체를 실제 서울의 복판에 데려다놓는다. 이번에는 3d렌더링된 세계와 그것의 잔여들로 구성한 현실과 가상의 접경지대, 이야기의 파편들을 공회전 시키기 위한 가설무대가 아니라 서울의 무방비한 상태 그 자체를 배경으로 삼는 한편, 거기에 참여한 주체 또한 보다 또렷한 몸과 눈을 가진 채 서울을 걸어 다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을 응시한다. 이를테면 극중극인 아니메 <->의 순례 스팟들을 찾기 위해 서울을 분주하게 순회하는 <>의 순례자는 바벨의 세계관을 체화한 채 실제 서울에 불시착한 외지인, 혹은 서울의 타자, 타자로서 서울을 감각할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순례자가 바라보는 서울의 K-스러움은 굳이 그로부터 추출해낸 3d객체들을 임포트시키지 않아도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채 충분히 혼란스럽고 낯설다. 날것으로 포착한 애국 집회의 풍경, 휘날리는 태극기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인 군중들의 성난 듯한 외침, 그 와중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기수련단체의 체조 모습 등은 맥락 없는 서울의 내러티브를 상연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바벨과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주지하듯 순례자가 제아무리 스크린을 뒤집어 그것의 배후를 드러내려 해도, 이는 개인의 망상 차원에서 그칠 뿐 실제로 현실의 지형을 왜곡시킬 수는 없다. ‘바벨의 사례처럼 서울을 재료 삼아 파국의 이야기를 도출해낼 수는 있지만, 역으로 공회전하는 이야기의 파편들, 파편들이 공회전하는 양상 자체를 서울 내로 유출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또 다시 엄습하는 것은 어렴풋한 불길함인데, 이전과는 달리 우리는 마침내 어떻게에 앞서 를 캐물을 수 있다. 앞선 불길함은 한 번 바벨의 내러티브를 빌어 일종의 수직 낙하1)를 경험한, 그럼으로써 시점의 레벨을 유동적으로 조절하고 그 과정에서 주어진 세계를 얼마든지 파국으로 전치시킬 수 있는 전지적 사용자의 권한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비롯한다. 순례자는 오로지 1인칭 시점의 제약 속에서 서울을 가늠하고, 이번에는 지면을 딛고 선 상태에서 더 이상 비약할 수 없으며, ‘에 대한 답변,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를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어떤 맥거핀을 만들어내 그 대상을 좇음으로써 줌인과 줌아웃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시점의 변수들을 1인칭의 분주한 동선으로 만회해야한다.

 

<>의 타임라인을 견인하는 추적이라는 행위는 수직 낙하를 어떻게든 수평 차원에서 확장하기 위해 설정된 헛소실점인 셈이다. <->에서 에리카가 쫓는 할아버지는 실종되기 전에 의도적으로 서울 곳곳에 자신의 위치 데이터를 남김으로써 에리카의 동선을 최대한 산개시키고, 순례자는 이를 토대로 서울을 순회하되 <->의 서사적 전개를 충실히 이행하는 대신 자신의 편의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일련의 순례 스팟들을 찾아다니며, 사실 목표 자체가 무용한, 그러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에리카의 추적을 은연중에 폭로한다.

 

그러나 추적은 탐정 혹은 순례자가 그와 연관된 지난한 과정들을 모두 소화한 뒤 마침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추적의 와중에 발생하는 워프를 통해서 급작스럽게 마감된다. 에리카가 끝내 옥상에서 투신해 죽었다는 사실이 순례의 서두에서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가 재편집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추적은 계속되며, 최소한 <>의 타임라인 내에서의 진엔딩은 워프라는 비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순례자, 에리카, 할아버지, 이하 <>에서의 등장인물들 모두가 경험하는 워프는 선형적으로 흐르던 날것의 시간, 추적의 얼개가 서울의 맥락 없는 내러티브와 합선됨으로써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서사의 종결부, 즉 일종의 블랙아웃임과 동시에, “이 도시의 핵을 이루는 어떤 공백이자 언제나 과거에 홀려 있는 서울, 조상님들의 혼령과 아직 쌩쌩한 할아버지들이 점령한 도시, 자신의 정당성과 안전을 확신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더 거대하고 강력한 것을 희구하는 허약한 성채의 텅 빈 중심2)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핵이자 공백이자 중심인 이곳은 미처 아니메풍으로 트레이싱해 미화하지 못한 서울의 이면, 순례자의 1인칭 시점이 진입할 수 없는 폐쇄된 공간, 보다 구체적으로는 3D렌더링으로만 구현 제시될 수 있는 전 대통령의 사저 내부이다. 오로지 비약을 통해서만 맞닥뜨릴 수 있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바벨의 세계와 유사하다.

 

3d렌더링된 사저 내부에서 가상의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1인칭 시점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지면이라는 토대를 잃고 부유하듯, 마치 명료한 몸과 눈을 잃은 유령처럼 공간 구석구석을 배회한다. 이는 비약으로 인한 현기증의 상태, 맥거핀으로서 존재하던 목표마저 잃어버린 채 이 도시의 공백 속에서 희석될 뿐인 추적의 동선을 반영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배후로 접속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 동작이기도 하다. 부유하는 가상의 카메라는 자신의 을 계속해서 우회해나가며 응시의 순간을 유예한다. 에리카에게 실제 서울을 비롯한 현실은 가 없는 세계이고, 순례자에게 탐정물이란 무수한 를 만들어내는 장르인데, 결과적으로 <>에서 에리카와 순례자와 무엇보다 관객은 1인칭 시점 위로 포개진 세계의 앞면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 세계의 뒷면은 언제나 스크린이라는 장막에 가려져있다. 장막을 걷어내 이 모든 사건들, 그것들을 추동해낸 서울의 실체를 응시할 수 없다면, 서울을 아니메풍으로 트레이싱해 오로지 앞면만이 존재하는 편평한 이미지로 만들거나, 배후의 공간을 망상해 렌더링으로 구현함으로써 그 속에서 다시금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김희천은 탐정질과 순례를 반복하며 서울의 앞면, 편평한 이미지만을 응시하는 대신, 워프를 시도함으로써 1인칭 시점으로부터 낙하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면 위에 묶어둔 중력의 타래를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헤친다. 마침내 바닥이 없어지면, 역으로 비약을 위한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은 실제 서울에 불시착한 어떤 주체 혹은 타자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분주히 몸을 움직이며 자신이 맞닥뜨린 풍경들을 <->라는 대체 서사로 엮어보려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한때 속해있던 세계의 관성에 압도되고 마는, 그래서 결국 또 다른 망상으로 침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결국 일종의 튜토리얼 게임3)이라면, 우리는 튜토리얼이 끝날 때 즈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를테면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해 바벨의 세계로 역행할 것인가, 경계 너머에 또 다른 세계관을 가설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보다 조금 희박해진 몸과 눈으로 다시 순례의 루프로 뛰어들 것인가? 선택을 유예한 채 실종을 자처함으로써 또 다른 누군가의 표적이 될 수는 없을까? 등등. 순례자는 유별난 개인이 아니라, “당신은 어디에?あなたはどこに?”라고 거듭 되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불안정한 스크린상에 상연되는 이미지들로 감각하는 무수한 타자로서의 유닛4)들을 대변한다. 가상의 시점을 빌어 문득 줌아웃을 시도해보면, 각자의 유닛들은 납작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며 서로 다른 순례의 궤적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유닛은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비활성화되어 위치 데이터의 흔적만을 남긴 채 이 도시에서 사라질 것이다. 서울은 그런 식으로 개인들의 망상을 먹어치우며 무수한 를 만들어내고, 그렇지 않은 다수의 에서 온갖 껍데기들로 둘러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동안 갈수록 불길해진다.

 

1) 히토 슈타이얼은 자유낙하-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 프레스, 2016, 김실비 옮김)에서, 모더니즘을 경유하며 선형 원근법이 와해된 이후 항공사진, 구글 맵, 3d영화, 감시 파노라마와 같은 미디어들을 매개로 다변화한 시점 환경을 시각의 수직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고찰한다. 이를테면 수직적으로 구획된 시점의 레이어들을 편의적으로 오가며 주체는 일종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결국 시간은 탈구되어, 우리는 인지할 수 없이 자유낙하하는 와중에 빙글빙글 떨어지면서 더 이상 자신이 주체인지 객체인지 알 수 없게 된다.”(32p) 본 글에서는 줌인/아웃을 양극 삼아 유동적으로 조절되는 시점의 레벨을 강조하기 위해 편의상 수직 낙하로 표기한다.

2) 윤원화, 서울 미스테리 투어, 미술세계 1월호

3) “(...) 이것은 가상 현실에서 실제 현실로 넘어온 것이 아니다. 그가 실제 또는 가상의 카메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또는 유리판 너머로 더듬던 세계는 이미 언제나 현실이었다. 결국 김희천이 자기가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경우는 별로 없었다. 서정적인 포켓몬 음악으로 시작과 끝을 여는 <>은 그런 현실로의 초대장이자 그 속에서 동선을 확보하고 걷는 법을 연습하는 일종의 튜토리얼(Tutorial) 게임이다.” 윤원화, 서울 미스테리 투어, 미술세계 1월호

4) 유닛이란 사용자가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현실을 감각하는 와중에 일시적으로 몰입하는 가상의 계정이자, 맵핑된 세계와 현실의 중력을 동시에 감내하며 오작동하는 사용자 자신이기도하다. <>의 순례자는 비교적 명료한 몸과 눈을 지녔지만, 그와 별개로 (극중에 등장하는 스마트폰이 암시하듯) 순례자와 연동된 (GPS) 유닛은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단속적으로 활성화되며 순례의 궤적을 기록하고, <->의 등장인물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서사적 레이어로 분리돼있지만 각자 표적으로 점지한 유닛을 쫓는 와중에 얽히고설킨다. 에리카가 추적하는 것은 할아버지인가, 할아버지의 유닛인가? 순례자가 지정한 순례 스팟들은 에리카가 다녀간 장소인가, 에리카의 유닛이 활성화됐던 좌표인가? 에리카는 어떻게 그 유닛이 할아버지임을 확신하는가? 유닛으로 익명화된 할아버지는 사실 순례자이거나, 군중 속의 누군가가 아닐까?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이처럼 유닛은 <>의 서사적 레이어들을 넘나들며 내러티브의 선형적인 전개를 방해하고, 누군가가 유닛을 비활성화시키는 순간 좌표 상에서 사라지며 다소 허무하게 이야기의 구두점을 찍는다.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