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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 더 그레이쉬 미러 비트윈 블랙 앤드 화이트>


박정우



M.칼리니스쿠는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Five Faces of Modernity(1987)에서, 오스카 와일드의거짓의 시대Decay of Lying(1889)’를 인용하며 모더니티와 키치의 관계를 비평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때 자연이 예술을 모방했고, 마치 어떤 일몰은 코로Corot의 그림처럼 보이게 되었다면, 오늘날 자연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워지고자 대량생산된 복제화를 모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이다. 풍경을 감상하는 수용자의 관점에서 실재와 재현의 매개 관계를 뒤집은 이 역설법은 디지털이 시각적 경험에 관한 모든 프로세스를 하이퍼리얼하게 재매개한 현재의 시점에 적용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발생시킨다. 디지털이미지는 이미지로 하여금 무엇을 모방하게 만드는가?

 

장다해는 디지털 드로잉을 기반으로 회화, 설치, 영상작업 등을 병행하고 있는 미술가이다. 그가 드로잉의 주된 수단으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인그림판 MS PAINT Microsoft corporation의 대표적인 OS Windows 시리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저용량의 래스터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이며, 1995년 출시된 Windows 95부터 2009년에 출시된 Windows 7 이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일관된 인터페이스를 유지했을 정도로 매우 원초적인 기능만 제공하였다. 2D 이미지 제작을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Adobe Systems Photoshop, Illustrator등과 비교하면 대부분의 디테일한 설정이 불가능하고, 해상도가 낮으며, 타블렛을 사용하더라도 필압이 감지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점은 레이어 구조로 이미지를 편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임의의 형태를 직접 드로잉 하거나, 혹은 프로그래밍된 도형 템플릿을 화면 위에 올려두더라도, 일단 다른 종류의 형태와 겹쳐지고 나면 앞과 뒤를 분리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형적 단위들 사이에 시공간적 질서가 부재하는 셈이다. 당연히 과정의 일부를 별도로 수정하거나 재구조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지나간 과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회화의 물리적 제약과 직관적으로 유사하지만, 결과는 이질적이다.

 

작가는그림판을 통해 아날로그 드로잉의 섬세함을 가장하기보다는 인터페이스가 강제하는 제약에 따라 다소 조악하거나 둔탁할 수 밖에 없는 조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만나거나 엇갈리는 외곽선들의 관계, 화면에서 색면들이 차지하는 시각적 무게감 등을 긴장감 있게 조율하여 조형적 질서를 구성한다. 그런데 아무리 섬세하게 다듬는다고 해도, 색감이나 윤곽의 형태에서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그림판스러움, ‘페인팅을 디지털로 재매개하는 초기 과정의 기술적 한계가 번들 소프트웨어라는 이유로 꾸준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하이퍼매개적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장다해는 디지털 드로잉에 기반한 조형감각에 인터페이스-특정성을 부여하고, 이를 회화, 영상, 꼴라쥬 등 각 형식의 지지체가 일종의 모듈이나 템플릿으로 여겨지는 상황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매체특정성을 전유한다.

 

그렇다면 정작 회화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어떠한가? 첫 개인전 제목인 <Built-in>은 회화에 대한 인식을 인테리어의 개념으로 약호화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작가는 황재민 비평가와의 인터뷰에서빌트인옆면의 문제를 다루는 단어라 생각했다고 함축적으로 답변하는데, 이는 벽면의 일부가 된 사물들의 평면적 상태와, 벽면으로부터 돌출된 캔버스 두께의 인식론에 대한 미술사적 함의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 마찬가지로가변형 벽체라는 제목 역시 벽 표면의 가변성과 벽 자체의 가동성을 동시에 상기시키면서, 입체이면서 평면이고, 물질이면서 이미지인, 회화의 양가성을 진동하게 만든다. 또한 인테리어의 맥락 안에서 회화가 갖게 될 위상이 어떠한가를 생각해보면 결국 <Built-in>이라는 제목은 회화의 처지를 약간은 자조적으로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그리는가, 무엇을 그리는가, 어떻게 인식하는가, 어떻게 제시하는가, 이 각각의 단계와 맞물려 있는 일련의 조형적 알고리즘은, 언뜻 보기에 투명해 보일 정도로 명확한 재귀적 구조를 형성하는 탓에,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 외부의 질서가 작품 내부의 질서에 종속되어 보이는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장다해의 작업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에 놓여진 거울의 회전운동 같은 것으로서, 깨끗하고 단단하지만, 결코 투명한 것은 아니다.



Posted by jipdanochan

역사를 관통하는 ''

 

이양헌

 

*아트인컬쳐 2018 8월 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위대한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인간이 만든 가장 특수한 개념체로서, 그것은 원래 시작과 끝이 정해진 닫힌 텍스트였으며 그 결말에는 언제나이 설정한 궁극의 구원이 쓰여 있다고 전해진다. 이 예정된 섭리는 계몽주의와 실증주의 사관이 등장한 이후에도 소거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낙관적인 그러나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로 투영되어 세속화된 채 구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보를 향한 이 목적론적 매개-고리가 끊어진 건 아마도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구축되었던 사회주의 체제가 베를린 장벽과 함께 완전히 무너진 이후일 것이다. 역사가 이미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그리고 대사건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믿음 사이에서 바야흐로역사의 종말이 선언되었다.

 

역사와의 절연 혹은역사-없음으로 지루하게 정체된 오늘날, 육근병은 상당히 오랫동안 역사의 형상들을 추적해왔다. 무덤과 심장박동, 탯줄을 닮은 통로, 아이의 울음소리와 같은 모티프들은 그 자체로 동양적인 자연관이나 종교적인 제유로 치환될 어떤 추상적인 당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은 어떠한가? 초역사적인 주체의 자리,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역사의 증인이자 세계를 담지한 극소체로서 거대한 봉분 위의 시선은 복잡한 인과율과 사건의 집합 너머에 어쩌면 부동의 도표가 존재하리라는, 나아가 그것을 읽어낸다면 시대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원리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주의가 파산한 이후 계승할 수 있는 과거와 새로운 미래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서술은 신비주의를 넘어 차라리 반시대적으로 느껴진다.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이미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열두 개의 비디오가 원형으로 배치된 <십이지신상>에서 전면으로 교차하는 스크린들 사이로 역사적 형상들이 출현하고 때때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들은 모두 근대사를 이루는 기념비적인 인물들이며 동시에 지난 세기 가장 강렬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회억의 계기들이라 할 만하다. 붉은 혁명가와 위대한 선지자들, 비극으로 각인된 존재들이 유령처럼 출몰할 때, 순차적이었던 사건의 배열은 공시적인 풍경으로 전환되고 다()시간의 착란 속에서 이곳은 과거를 잊은 자들을 위한 소극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유령-이미지 뒤에서 다시 등장하는과 잠시 잊고 있던 아이의 심장박동이 들려오는 순간, 이 기념비들은 파편화된 기억으로 과거를 호출하는 목가(牧歌)가 아니라 현재주의와 경합하며 보편사를 세우려는 송가(頌歌)였음이 분명해진다. 또 다른 작품인 <생존은 역사다시간 속의 시간 –>에서 인류사의 어두운 기억들을 간직한 사진은 어째서 역사적 아카이브가 전쟁과 폭력, 재난과 같은 트라우마와 자주 연결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병치된을 통해 그것이 망각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였음을 상기시킨다.

 

역사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이질적인 서사를 누락하고 몫 없는 자들을 배제해왔는지 잊지 않았다면, 대문자 히스토리를 복권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탈역사적 냉소주의는 우리를 붕괴된 시공과 세계 없는 세계들, 기한이 만료된 전거들이 흩어진 폐허의 잔해 위에 도착하게 할 것이다. 육근병이 만든 오래된 형상 중 하나인 <풍경의 소리 + 터를 위한 눈>에서 산 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무덤 위로 무구한 아이의 눈이 재생되고 있다.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가? 종결이 유예된 다공성의 역사, 종합을 부정하고 순간으로 파열되는 불연속의 역사 그럼에도 미시사로 환원되지 않는 보편의 범주를 다시 요청하는 역사는 아닌가.


Posted by jipdanochan

예술과 윤리를 나누는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홍양무현(맥주)

 

예술과 윤리를 나누는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20021) 11월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2)가 열렸고, 20032월에 [Anti Araki ]3)이 열렸다. 20084월 김홍석의 전시 [밖으로 들어가기]4)의 퍼포먼스 및 설치 작업 <Post 1945>5)가 공개되었고, 그에 따른 안티퍼포먼스6)가 같은 해 5월에 진행되었다. 안티아라키전의 주체는 영 페미니스트 미술가 연대7), 안티퍼포먼스의 주체들은 민주성노동자연대, 성노동네트워크, 여성주의 지향 블로거 모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 팀, 인터넷 공지를 보고 온 개인 참가자등 다양했다. 영 페미니스트 미술가 연대는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며 비판했고, 안티퍼포먼스 참가자들은 <Post 1945>가 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영 페미니스트 미술가 연대는 일민미술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방식과 대항하는 전시를 갖는 다양한 방식을 취했다. 안티퍼포먼스의 퍼포머들은 김홍석을 찾는 이에게 120원을 주겠다는 피켓을 들고, 성명서를 낭독한 후 내가 창녀다라고 외치며 전시장의 외부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갤러리 측으로부터 30여분간 입장이 저지되었다.

이러한 행동들이 미술이냐 활동이냐를 나누어보는 것보다는, 행동의 수용자-기대 관객-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수용자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다가갔는지의 방법론에 따라 판단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자는 여성 이미지를 대상화한아라키와 전시에 대해 무비판적인 언론과 미학적 논의 외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8) 미술계에 대해서 날을 세웠으며, 후자는 김홍석 작가와 제대로 된 비평 하나 내놓지 않는9) 미술계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흥미롭게도 두 사례 모두 현실과 괴리된 미술계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아라키 사진의 여성 대상화, 포르노적 시선을 지적한 전자의 문제의식에 대응하듯 2017D.S.O.10)는 불법촬영 영상 유포와 성폭행 모의 등의 플랫폼으로 기능했던 웹페이지 소라넷 폐지에 크게 기여했다. 2018년에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모델이었던 카오리로부터 합의없는 누드 사진 촬영과 출판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나왔다. Anti Araki 전 기획팀의 문제의식과 한국의 포르노 산업 및 유통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11로 병치시키는 것은 섣부른 일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여성 신체 이미지를 다루는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여성 피사체를 대할 때 발화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작품 내에서의 거리감을 어떻게 확보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후자도 마찬가지인데, 성노동11)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성착취’, ‘성매매’, ‘성노동등 여러 용어가 쓰이고 있으며, 이에 따른 여러 가지 견해들이 존재한다.12)

 

사실, ‘윤리를 다루며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상찬받는 작업물들의 면면들을 살펴볼 때, 대부분의 작업물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발화자의 위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았을 때 아쉽게도 그다지 파격적이지 않다.

특히 여성의 목소리가 삭제된, 여성 신체 이미지에 대한 작업물들은 세계관 자체의 구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작업물들을 예술로서 호명하고, 그에 더해 윤리에 저항하는 예술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비평을 풀어놓는 저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 이로운가?

 

'문제적' 의견은 어디서부터 '문제'와 구분되는가?

 

20185월 합정지구에서 미러의미러의미러13)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논의해볼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권용만과 한솔의 영상들에 대해 다루기로 한다.

 

권용만의 영상물 <Mondo Corea:TakeFIVE>5분간 웃어볼 것을 제시하는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두고, 금기시되는 여러가지 일들- 자위, 유아의 욕, 십자가나 성경책의 훼손 등-이 저질러지는 현장들을 담아낸 영상들을 병렬로 세워놓는다. 이 영상물이 만약 흥미로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영상의 내용이 금기와 전복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이미지의 촬영과 편집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낮아졌고, 그에 따라 금기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내용들이 웹-공공- 공간에 공유를 허락하는 방식으로 다수 제시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영상을 보면서 크레딧이 꽤 길 것을 각오했고, 그 뒤에 숨은 개인의 욕망들을 맞대면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권용만은 출처를 밝히고 인용 표기를 해야 할 엔딩크레딧에 모든 영상과 텍스트의 출처는 유튜브14)라고 제시했다. 이 영상이 개개인의 금기에 대한 도전 의지를 보여주며, 사회적 합의의 공고함에 균열을 내려는 자가 바로 당신의 옆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상정하기를 제안한다고 여기기 위해서, 출처 제시와 인용 표기는 구체적으로 드러났어야 한다.

또한 크레딧 말미에 매어달린, 소스로 사용된 영상들을 동의나 추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음이라는 변명은 부적절하다. 시각이미지 작업자라면 자신이 내놓은 이미지가 어떤 정보값으로 다가갈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열어 놓아야 한다. 작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작업노트 등 작품과는 거리를 둔 방식으로 관객에게 제공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의도를 굳이 크레딧에 명시하는 것은 군더더기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한솔의 <메루메루빔>15)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청소년기 때부터 성노동을 해왔음을 암시하는 메루메루의 글을 모사하는 듯한 이 영상은 내가 자살하면은 성노동 혐오자들 때문일까 아님 착취당해서일까라는 불가능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이 불가능한 이유는 성노동 혐오자들착취는 같은 비교선상에 올라올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비슷한 무게로 뒤섞어버리는 것은 개인의 인생사 속에서 한시적으로, 그리고 느낌적으로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한솔은 작가가 응답해야 할 지점을 메루메루라는 당사자성을 지닌 개인에게 넘겨버림으로서 책임을 회피한다.

한솔의 태도는 비도 오고 그래서16)의 가사를 개사하여 사용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원본의 가사 중 인상적인 것은 비도 오고 그래서 네 생각이 났어,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랬던 거지, 별 의미 없지’,‘어차피 이 밤이 다 지나가면은 별 수도 없이, 난 또 한 동안은 널 잊고 살테니까, 내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갈 테니까등이다. 전시장에 게시된 한솔의 작업 설명이 말하는 대로 메루메루를 추모17)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자기연민의 태도와 개념상의 무게균형이 맞지 않는 균열 지점을 메루메루에게 넘기며 회피하는 태도의 한 쌍은 그 의도를 배신하고 있다.18)

 

권용만과 한솔의 영상물들을 작품으로서 화이트큐브에 내어걸었다는 것은, 기획자가 생각한 대로, ‘윤리와 도덕, 사회적 합의에 저항하는 예술이라는 이분법의 세계관이 내놓은 처참한 결과물이다. 하나의 윤리를 상정하고, 그 반대값으로서의 예술을 보여주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윤리라는 범주를 좁게 그어놓는 것이 누구인지, 그 범주화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안타깝게도, 기존의 윤리로부터 한시적으로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자들이 윤리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여성주의 감각이 없는 자가 여성 신체 이미지를 다룰 때, 그는 당사자성을 대상이 되는 여성에게 맡기면서 비판 지점도 함께 떠넘긴다. 이러한 안일함은 쉽게 지적되지 않는다.

창녀일반인(-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대상화를 시도했던 김홍석의 <Post 1945>, “내가 창녀다라는 외침으로 그러한 구분에 문제를 제기했던 안티퍼포먼스의 퍼포머들을 보자. 화자 김홍석은 일반인의 위치에 단단히 자신을 매어놓으며, 따라서 <Post 1945>는 초기 설정부터 화자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그의 자그마한 세계다. 조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정한 비겁함은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미명 아래 감춰진다. 김홍석의 폭 좁은 사회적 범주의 시각화에 대해서 오히려 퍼포머들은 범주화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응했으며, 좁은 질문에 넓은 답으로 다가간 셈이다.

김홍석과 퍼포머들의 문답이 보여주듯이, 개인의 표현이 의견으로서 공적 토론의 장에 올라갈 때에는 발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기반이 필요하고, 그 기반은 예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물화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이해- 하나의 이미지가 공적 공간에서 전시될 때에는 공론화에 동의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거친다는 이해를 기본으로, 예술이라는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예술의 맥락을 제공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우리는 윤리의 개념을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다뤄지는 여러 화두들에 직면할 때, 여성주의 활동은 그 이름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여 나간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의견들 또한 움직임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새로운 화두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윤리에 저항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둘러싼 사회 문제들을 다룬다고 할 때, 많은 경우 그 것들은 문제의 핵심을 빗겨나가곤 한다. 예술로서 나타난 의견과 그 방식이 적절했는지 부적절했는지, 혹은 제시한 화두가 지금 이 공간에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우리는 토론할 수 있다.

 

또다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예술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데 벗 혜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에 감사한다. 글 내부의 실패 지점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다.  


1) 2002년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1992년에 벌어진 (고 윤금이 씨를 대상으로 한) 미군 성범죄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해이기도 하다. 고 윤금이 씨의 주검 사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해, 미군의 범죄에 맞서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고인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는 여성 신체 이미지의 사용에 대한 또 하나의 논의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 http://fc.womenlink.or.kr 에서 윤금이씨 주검사진 게재에 반대한다는 것은라는 이름으로 루나(여성노동센터 회원) 의 글을 검색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윤금이씨 주검사진 게재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 네트워크'는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직접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윤금이씨 주검사진 게재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 반미운동이라는 전체 흐름을 균열시키고 '큰 틀'을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공동 적은 미국인데 이렇게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 '우리'에 여성이 포함되었는가.”

2)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 일민미술관. 2002.11.15.~2003.02.23. 관련기사: “섬뜩파격천재 예술성 엿보기”, 주간동아. 전원경 기자. 2002.11.14. http://weekly.donga.com/

3) [Anti Araki ]. 카페 시월. 2003.02.20.~2003.03.02. www.neolook.com/ > 검색어“Anti Araki“

관련기사: “음란물이냐 폭력물이냐, '포르노 정체' 대논쟁”. 한겨레. 강김아리 기자. 2003.02.23.

4) [밖으로 들어가기 In through the outdoor]. 국제갤러리, 2008.04.17.~2008.05.19.

www.kukjegallery.com > EXHIBITIONS > 2008.

5) "혹시 여기 적힌 창녀분?"... "내가 그렇게 보이냐?". 오마이뉴스. 2008.05.02. 김홍주선 기자.

"지금 이곳에는 의도적으로 창녀가 초대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있는 미술 전시 개막행사에 3시간 참석하는 조건으로 한화 60만원을 작가로부터 지급받습니다. 이 순간 여러분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니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이 창녀가 누구인지 찾아낸 분은 작가로부터 그녀를 찾은 대가로 120만원을 지급받게 됩니다. 창녀를 찾아봅시다." 퍼포먼스 이후 120만원이 담겨 있었던 빈 금고와 함께 김홍석이 전시장에 게시한 텍스트.

6) "'창녀찾기' 작가 찾으면 120원 드립니다". 오마이뉴스. 2008.05.19. 김홍주선 기자.

7) “미대생들 안티아라키전만들다”. 한겨레. 강김아리 기자. 2003.02.23.

8) 2)와 같은 출처.

9) 5)와 같은 출처.

10) ‘디지털 성폭력 아웃(Digital Sexual Crime Out·D.S.O) 프로젝트’. ‘소라넷 고발 프로젝트’, ‘여성 리벤지 포르노 아웃(Revenge Porn Out·RPO)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거쳤다. 관련 기사: “국내 최대 불법 음란사이트 소라넷폐지 뒤엔 ‘DSO’가 있었다“, 여성신문, 2017.3.7. 이하나 기자.

11) ‘성매매성노동이라는 두 가지 용어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성매매는 반어적으로 성구매자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며, 성노동은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육체를 활용한 성적 서비스가 감정노동과 엮여 제공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성노동을 사용하였다.

12) ‘우리에게 판타지는 필요없다-한국의 성노동 연구자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해보면 좋겠다. 반성매매인권운동 이룸의 홈페이지 e-loom.org에서 읽을 수 있다. 필자 박혜정의 최근 글은 웹진 집단오찬jipdanocahn.com에서 읽을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13) [미러의미러의미러], 합정지구. 기획 이진실. 참여 권용만, 업체eobchae류성실, 이자혜, 한솔.

2018.5.25.~6.24. http://hapjungjigu.com/mirrors/에서 전시서문을 읽어볼 수 있다.

14) <Mondo Corea:TakeFIVE> 엔딩크레딧의 정확한 내용은 이러하다. [사용된 음악. Hector Berlloz-Symphonia Fantastique. 영웅본색2 OST- 여기는 우리가 살 곳이 아냐. 이강영- 19분간 모든 걸 내려놓아요. 사용된 영상. 요양박사 케어닥의 5분 웃음치료 요법 외 다수. 모든 영상과 텍스트의 출처는 유튜브입니다. 제작자는 본 영상에 등장하는 그 어떤 영상이나 메시지도 동의나 추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권용만의 다른 영상 <페미네이터:재기의 날>은 엔딩 크레딧이 없다.

15) 한솔, <메루메루빔>, 단채널 영상, 332, 2018. ‘메루메루빔메루메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트위터 계정주@candle_daze의 죽음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고인을 추모한다며 돌았던 해쉬태그이기도 하다. <메루메루빔>메루메루의 기록들에 디테일한 부분들까지도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메루메루의 블로그 글에서 언급되었던, 돈을 벌어 산 물건이 텀블러와 외장하드 등이라는 세세한 부분의 언급까지 같다.

16) 헤이즈 (Heize) - 비도 오고 그래서 (You, Clouds, Rain). 20176월 발표되었다.

17) 한솔의 작업 설명 전문은 이러하다. ‘2018.4.2. #메루메루빔. 나는 메루님의 얼굴을 영정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 나서야 쓸데없이 상황에 경도되어 그녀의 블로그 글과 트위터를 뒤적여 본다. 이 모든 일들이 이기적일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의 이기심과 맞먹는 살아있는 사람의 이기심을 발휘해 그녀를 슬픔의 대상으로 삼아보려 한다. 메루메루의 명복을 빔.’

18) 사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오히려 한솔의 [obstacle race] 등의 다른 작품이 당사자성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한솔의 다른 작품을 다른 시점의 전시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jipdanochan

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박혜정

반성착취 운동가, 자유기고가


https://twitter.com/hapjungjigu/status/1009013568950362113?s=19 


얼마 전 메루메루라는 트위터 이용자의 자살로 트위터가 떠들썩했다. 메루메루는 21살의 여성으로, 생전에 저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본인 블로그에 올렸었고 트위터 상에서 자살해서 트위터계의 아이돌이 되고싶다라는 말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올해 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퀴어방송이라는 팟캐스트에서는 4월에 제 96화에서 메루 추모 특집을 방송했고 작가 한솔은 최근 <미러의 미러의 미러>(이진실 기획, 합정지구)라는 전시에서 <메루메루빔>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작품을 전시했다. 나는 반성착취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처음 듣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사건을 둘러싼 현실 및 담론 지형과, 이 사건을 다룬 전시에 대한 활동가로서의 생각을 풀어내고자 한다.


나는 10여년 간 반성매매단체에서 일하며 집결지, 룸살롱, 안마, 다방, 휴게텔, 오피, 조건만남 등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유형의 성산업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나왔다. 그 과정에서 약물과다복용 또는 자살, 질병 및 건강 악화로 인한 죽음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여성들에게 법률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성착취 남성과 포주들도 많이 만났다. 내가 현장에서 목격한 성산업은 섹스를 사고 파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여자의 몸을 능욕할 권리를 5만원, 10만원 주고 사는 행위는 정당한 거래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성착취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해당 여성이 동의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 사회는 돈이 없는 여자는 몸을 파는 게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남에게 심어준다. 자원이 없거나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황의 여자를 팔 벌려 환영하는 성산업과 남자들의 수요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해당 여성이 그 행위에 얼만큼 동의했는지를 먼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성산업을 만들어내는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 성착취 남성과 알선자를 처벌하고 성을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 노르딕 모델(스웨덴, 프랑스,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이 채택)을 도입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사이 일부 여성계와 소수자 운동, 좌파 운동 쪽에서 상업화된 성착취를 성노동이라 칭하며 성산업의 완전 비범죄화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성노동또는 성노동자라는 용어를 쓰는 일반인들이 모두 이런 성노동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성노동자라는 단어가 성매매 여성등의 단어보다 더 당사자를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언어를 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성착취를 성노동이라고 부를 때, 성착취할 권리를 돈을 주고 산 사람을 고객또는 서비스 이용자, 남의 몸을 팔아서 수익을 취한 포주를 사업가또는 운영자로 정당화해주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산업 속에 있는 여성들을 피해자화하지 않기 위해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활동가들이 있는데, 성산업 속에서 착취당하는 여성을 피해자로 보지 않겠다는 것은 곧 가해자와 가해 세력이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으며, 엄연한 피해가 발생하는 착취 현장에 눈감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성노동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착취 현장에 눈감는 것을 넘어서, 여성들이 당하는 피해를 주체적인 행위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한 예로, 많은 성착취 피해여성들이 심리적 해리현상을 경험한다. ‘해리는 반복적으로 폭력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들이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몸의 감각에서 의식을 분리시키는 대응기제로, 성착취 피해여성들은 흔히 내 몸은 거기 있었지만 내 마음은 창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라거나 정신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착취 피해자에게서 모두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해리는 당장의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게 해주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현실인식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내 몸이 죽어있는 느낌까지 들게 되기 때문에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을 칼로 긋는 등의 자해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성노동론자들은 이런 의식 분리 현상을 장려하며, 이것이 성노동자로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주의 성노동자단체인 RhED는 성착취 피해 여성들에게 배포하는 성폭력 예방 매뉴얼에서 통제를 가지는 것이 여러분이 잘 하는 일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일입니다. 가면을 쓰고, 앞에 스크린을 세우고, 여러분이 되고 싶은 사람인 척 하세요.”라고 권고한다. 여성학자 문은미는 소외나 거리두기, 가장하기 등을 성노동이 여성에게 착취적인 노동의 한 증거로 볼 것이 아니라 이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하고1)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 여이연’)의 사미숙은 성노동자가 오르가즘을 피하거나 또는 거짓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것은 고객과의 거리두기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성노동자에게 있어 자기 상실이나 섹슈얼리티의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


나는 2016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주최한 성노동관련 세미나에 갔다가 엄청나게 분노한 적이 있다. 여성학자,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성노동은 무대예술과 같은 예술노동이자 쾌락생산노동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성노동이 무기를 파는 노동보다 나쁘지 않다는 말을 20대의 여남 청중 앞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련 세미나에 오는 젊은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자에게 차별적인 취업 시장과 여성의 외모를 능력의 하나로 보는 풍토, 성희롱과 성폭력이 난무하는 직장 문화 등 여자에게 적대적인 노동 시장이다. 이런 현실을 마주한 이들을 세계 최고의 거대 성산업이 둘러싸고는 잠깐만 괴로움을 참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어서 오라 하는데, 여성학자나 퀴어 활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노동을 주장하며 성착취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상업화된 성착취 현장을 오래 보아온 내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과거에 우리 정부가 기지촌 여성들을 모아놓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 역군이라고 치켜세우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폭력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이야기는 달콤한 마약과 같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아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많은 여성들이 이런 데(성착취 업소)가 없으면 일반 여자들이 강간을 더 많이 당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이 겪는 현실을 정당화해야만 덜 비참하고, 그 곳에서 계속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루메루님이 본인의 블로그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제목은 나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이지만 그 내용은 실상 성착취 현장의 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14살 때 가출했다가 조건만남으로 처음 성착취 피해를 통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 당장 먹을 것과 잘 곳이 궁한 14살 청소년에게 돈을 주고 성착취하는 것은 강간이다. 그는 강간 피해자였고 그 첫 성착취 피해경험 후에도 조건만남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강간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충동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수많은 성착취 피해여성들처럼. ‘메루님 추모특집이라며 방송한 팟캐스트 퀴어방송을 들어 보았다. 고인에 대해 모욕적인 표현들이 사용된 것도 문제적이었지만 이 방송의 진행자는 메루가 청소년기부터 성노동을 했다라고 말하는 데서 어이가 없었다. 성착취를, 강간을 성노동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들은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최근 들어서 성소수자 운동 진영의 활동가들이 성노동론을 주장하는 사례가 많고 어떤 여성학자들은 성판매 여성은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성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 나는 레즈비언으로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일부 퀴어 활동가들이 소수자 정체성으로 매도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 ‘퀴어방송의 진행자도 스스로 성노동을 한다고 방송에서 말하는데, 이런 내용을 퀴어한 것으로 가볍게 다루며 방송하는 것이 이런 방송을 듣는 주 청취자인 10, 20대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는 듯하다.


<메루메루빔>은 노래방 영상 같은 느낌으로 메루메루님의 생전 트윗과 블로그 글 일부를 작가가 촬영한 영상에 노래 가사처럼 입힌 것이었다. “성노동자라서 행복하다”, “난 자랑할 거야 난 섹스로 돈 잘 벌어등의 말들이었다. 노래방 영상 스타일은 고인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기에, 고인을 기리기에 적합한 형식이 아니다. 게다가 그 고인이 14살 때부터 당한 일들로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고 결국 21살의 나이에 자살을 하게 된 사람일 때, 이런 작품은 고인이 겪어온 고통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작가는 작품에 달린 캡션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기적일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의 이기심과 맞먹는 살아있는 사람의 이기심을 발휘해 그녀를 슬픔의 대상으로 삼아보려 한다. 메루메루의 명복을 빔.”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착취 피해자의 자살이 어떻게 이기적인 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술의 범주 아래 고인의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성노동론이 여자들이 몸으로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이를 왜곡해야만 성립 가능한 이론이자 이데올로기이듯, ‘성노동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메루메루님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 또한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을 무화하고 희화시키며 우리에게 거리두기를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런 것이 예술인가? 난 잘 모르겠다.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볍게 다뤄지며 희화되는 한 예로 보일 뿐이다.


1) 문은미, 성노동은 어떤 노동인가? 친밀한 노동으로서의 성노동, /성이론, 2009. 12.

2) 사미숙, 쾌락생산노동으로서의 성노동,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연속간담회 5, 2016. 5.

3) 원미혜, 성판매 여성의 인권탐색을 위한 시론, 비판사회정책,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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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플랫폼은 비평의 대안적 모델>

이양헌

 

*아트인컬처 2018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비평을 하나의 순환하는 계절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것은 비평이 어떤 계절들을 지나왔고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한 철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비평은 적어도 두 개의 계절을 지나왔다. 처음에 그것은 입말의 세계로서, 개인의 음성이 공론을 통해 일반적 의지에 닿을 수 있는 자율성의 공간이었다. 이는 신분과 위계, 정체성을 무화시키는 말의 향연 혹은 열린 공론장으로서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 계절에서 비평은 강력한 엘리트주의 아래 담론의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소수의 비평가가 카르텔을 형성하는 텍스트로서의 비평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하나의 텍스트는 아카데미, 저널, 파라텍스트(paratext)에 의해 비평으로 공인되거나 배제당할 수 있었고, 비평가들이 거수한 만장일치의 판단이 곧 최상의 취미가 되는, 그러므로 대중은 오직 침묵해야만 하는 폐쇄된 메커니즘 안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비평의 카르텔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공신력 있는 등단제도를 통해 비평가를 인증하고 몇 개의 매체가 주요한 지면을 분점하고 있는 상황은 흡사 봉건제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몇몇 영주들이 다스리는, 이 문자와 이론으로 쌓아 올린 성채는 매우 공고한 것이어서 낯선 자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이미 들어간 자들은 문지기가 되거나 성벽을 높이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평은 아직도 두 번째 계절에서 지루하게 정체되어 있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 절기의 끝에서, 그리고 다음 계절의 발흥하는 지점에서 네트워크로 창출된 새로운 비평의 영토를 목도하고 있다. 동시성과 다중접속,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배포를 통해 거대한 데이터의 순환을 이루는 이 가상의 생태계 안에서는 디지털로 축성된 플랫폼들이 세워지고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온라인을 거점으로 하는 디지털 플랫폼들은 대안적 비평모델을 출력하거나 취향의 공동체를 구성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설정해낸다. ‘집단오찬(jipdanochan.com)’은 신생공간 이후 가시화된 일련의 인식론적 전제들, 예를 들어 스마트 디바이스에 의해 불안정하게 동기화된 시각장과 파편화된 시공간, 그리고 이러한 동시대적 타임라인을 스크롤하는 후험적 주체를 상정하고 있다. 일종의 세대론과 데이터 미학이 연동된 이 비평적 가설은 기존의 담론이 포착하지 못한 새로운 실천들을 일별하면서 폐허로서의 세계관 혹은 납작해진 당대의 풍경에 대한 비평적 의제를 공표한다. 반면, ‘옐로우 펜 클럽(yellowpenclub.com)’은 보다 미시적인 대상에 천착하는 동시에 관객이자 플레이어의 시점으로 외부를 응시하고 있다. 세 명의 멤버로 구성된 이 느슨한 비평동인은 미술계 안팎에서 그들이 경험한 사건들을 매우 주관적인 에세이로 발화하는데, 특정한 경향이나 이론에 기대는 형식적 비평의 반대 항에서 일종의 화용론적 글쓰기를 업로드한다. 무엇보다 비평의 첫 번째 계절을 연상시키는 크리틱-(critic-al.org)’은 대안적인 비평 플랫폼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장을 구현하고 있다. 제한 없는 투고와 생산적인 논쟁을 보존하는 이 개방된 공유지에서 비평은 상품화와 전문가주의에서 벗어나 평등주의(egalitarian)라는 동시대 미학의 핵심과 공명을 이룬다.

 

이 새로운 계절에서 디지털 플랫폼들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오프라인을 침공하고 전통적인 비평 매체들과 패권을 다투는 전쟁터 혹은 독자적인 체계를 세운 고립된 갈라파고스 군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곳은 막이 내리지 않는 서사극이 상연되는 극장이 될 수도 있다. 객석과 무대가 매우 가까운, 사실은 거의 구분되지 않는 이곳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동시대의 반짝이는 것들을 무대에 올리고 때로는 조명을 비추면서 그것에 담긴 무성한 플롯들을 엮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험의 서사로 채워진 방백들이 무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극장에 앉아있노라면 아마도 다중(the multitude)이 주체가 되는 비평의 정치학을, 그 또 다른 계절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Posted by jipdanochan

<오 시간들이여, 시간은 없구나>

 

이양헌

 

*퍼블릭아트 2017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오 친구들이여친구는 없구나> 전시 전경

 

2009옥토버(October)가을 호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현대미술을 전공하는 구미지역의 다수의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에게 동시대성’(The contemporary)에 관한 설문을 실시한 바 있다. 그랜트 캐스터(Grant Kester), 권미원(Miwon Kwon),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 등이 참여한 이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현 상황을 예술실천과 이론이 봉착한 일종의 교착상태로 상정하고 있으며, ‘동시대미술이 가지는 범주의 역설에 주목하였다. 동시대성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역사적 규정이나 개념적 정의, 비평적 기준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론화되지 않는 핵심적인 가치로서 오늘날 미술계 구석구석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성, 나아가 동시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히 현재’(The present)라는 시간 축으로 군집화 된,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지고 있거나 오늘날 제작된 모든 미술을 배제 없이 포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새롭고 최신의 것인 동시에 지금여기(Nowhere)와 시차 없이 조율된 시간성에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동시대성을 선취하려는 열망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는 젊은작가들에 대한 큐레이터들의 깊어지는 열병, ‘최신예술담론을 향한 이론가들의 강박, 무엇보다 가장 동시대적인것과 공명하려는 제도권의 욕망으로 두드러진다. 이제 막 문을 연 포스트-신생공간부터 가장 보수적인 국립기관까지 컨템포러리(Contemporary)한 자장 안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브랜드 헤리티지를 통해 주요 제도권의 위치를 선점한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호명한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6년 개관 이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는 김민애, 김윤하, 김희천, 박길종, 백경호, 윤향로라는 이미 젊음혹은 신진으로 상징화된 작가 군을 불러 모아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한다. 전시 서문에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어, 작가들을 통해 각자의 현재와 대면시키고, 아직 실현되지 않는 서로의 미래로 투영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결국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혹은 과거와 연접을 통해 미래를 산출해내는 동시대적 지금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취해야 할 동시대성은 어떤 시간인가? 작가들을 매개해 동시대적인 것에 머물거나 이를 포착해내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분절된 기표, 파편화된 텍스트가 부유하는 김민애의 <파사드>에 가로 막힌다. 불투명한 가벽으로 둘러싸인 미로는 동선을 제한하는 동시에 기입된 구문들을 독해하게 하면서 전시장과 작가 사이의 중첩된 과거사적 지층, 그 시간의 궤적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김민애가 수집한 하이퍼텍스트는 오래된 지표로 쓰여 진 이정표라는 점에서 대상이 남긴 기억과 역사를 수집해 동시대를 전사해내는 크로노스적 시간관 혹은 기념비로서의 현재와 같다.

 

이러한 시간-감각은 김윤하와 박길종, 백경호의 작품에서도 각각 발견되는데,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에서 추출한 단상을 주관의 알레고리로 재구성한 김윤하는 당구 큐대, 대걸레, 플라스틱 의자, 테니스공 등을 비정형의 모뉴먼트(Monument)로 쌓아올려, 전시장의 10년을 경유했던 작가들을 일별해냈다. 일종의 안티-오마주로서 이 트로피들은 과거를 기념하는 동시에 무화시키기도 하지만 각각의 사물들은 지난 10년을 현재화하는 성좌로 기능하면서 회고를 통해 동시대에 내려앉는다. 반면, 박길종은 공간의 흔적 혹은 물성의 기억을 통해 지난 시간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대를 반영하거나 개척해 낸 재료들의 집합은 <내 친구의 친구들은 내 친구들이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에르메스를 거쳐 간 작가들의 것이면서 길종상가와 박길종 자신의 것인 동시에 시대 안에 귀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료를 참조해 현재를 번안해 내는 제작자의 시도는 과거를 불러들여 현재를 대질하려는 전시의 기획과 정확하게 포개져 있다. 무엇보다 과거를 경유해 현재에 당도하려는 시도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작업은 백경호가 제시하는 다섯 명의 인물(혹은 회화)들인데, 다층의 레이어와 혼성화로 이루어진 화면은 그것이 회화의 역사를 경유했음에도 종국에 동시대적 풍경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기념비로서의 현재를 전면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선형적 시간 속에서 가산(加算)의 역사를 강조하는 한편, 과거의 총체로서 현재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전시장에 놓인 또 다른 시간은 현재주의(Presentism)’비동시성(Asynchronism)’이라는 상이한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미소녀 변신물 애니메이션에서 에너지가 방출하는 장면을 캡처하고 몇 개의 프로그램으로 재매개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인터넷 분기 이후 세계를 인지하는 새로운 시각장의 알고리즘 혹은 열화와 초평면에 의해 지지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 사이에서 독해될 수 있지만, 특정한 순간을 이미지로 결빙해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이 유사회화는 시간의 과잉적 낭비라는 차원에서 현재주의에 연동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부정과 과거와의 거리두기에 참여하는 현재주의는 지금의 순간을 사고의 지평이자 종착지로 간주하면서 동시대의 지루한 지속을 드러내는데, 데이터가 언제나 현시적으로 실행되는 것처럼 인터넷을 통해 에르메스의 지난 10년을 대면하는 윤향로의 경험도 그 자체로 현재적인 시간 안에서 순환하고 있다.

 

특정한 순간을 지속해 현재에 거주하는 윤향로와는 대조적으로 김희천은 다소 역설적인 방식으로 동시대성에 접근하는 듯 보인다. 시간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멈블>은 웹 2.0과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눈부시게 성장한 이후 도래한 동시대의 풍경 안에서 다중-시간과 유동하는 공간성에 대한 한편의 에세이필름으로 상영된다. 실재와 가상의 이중간섭이 일으킨 현기증은 VR을 착용한 맹인안내견과 기이한 꿈을 말하는 작가의 어머니를 거쳐 공사 중인 가상의 에르메스에서 를 찾아다니는 남성에게로 이어진다. 이미 사라진(혹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개를 부르는 이 남성은 증강현실 안에서 일종의 시간착오를 겪는 듯 보이는데, 마치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 빠르거나 늦게, ‘이미그리고 아직으로만 동시대를 경험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감벤이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로 동시대성을 설명하면서 그 핵심에 어떤 불일치와 단절, 시간적 파열을 상정한 것과 연결된다. 동시대를 바라보는 비동시적 관점은 1년과 7년 사이의 간극처럼 그 시차를 벌려 당대를 반시대적인 위치에서 고찰해낸다.

 

동시대성은 이렇게 균질한 선형시간이거나 정체된 현재로, 혹은 비동시적인 시간들로 우리 앞에 산재해 있다. 작가들이 발산하는 다종의 지금-시간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의 겹침과 이접된(disjunct) 관계에서 현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진정한 동시대성이란 복수의 시간들임을 보여준다. 다시 전시의 제목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해지는 인용구,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을 보자. 그것은 우정의 이중성과 타자의 현존을 말하지만, 가장 현재적인 시간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그 불가능성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친구들을 부르듯 오직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만 온전히 조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동시대 안에서 우리는 현재를 따라잡으려는 열망 대신 과거의 해결되지 않는 미완의 사건을 매듭짓고, 미래를 비평하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동시대를 정의할 수 있을까? 햄릿의 한 구절을 빌려 그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시간은 그 이음매가 어긋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

 

**이 글에 대한 문혜진 평론가의 메타-비평이 퍼블릭아트 8월호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