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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시간들이여, 시간은 없구나>

 

이양헌

 

*퍼블릭아트 8월호 특집 미술수업에 게재된 글입니다.


<오 친구들이여친구는 없구나> 전시 전경

 

2009옥토버(October)가을 호에서 할 포스터(Hal Foster)는 현대미술을 전공하는 구미지역의 다수의 비평가와 큐레이터들에게 동시대성’(The contemporary)에 관한 설문을 실시한 바 있다. 그랜트 캐스터(Grant Kester), 권미원(Miwon Kwon),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 등이 참여한 이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공통적으로 현 상황을 예술실천과 이론이 봉착한 일종의 교착상태로 상정하고 있으며, ‘동시대미술이 가지는 범주의 역설에 주목하였다. 동시대성은 그 이질성으로 인해 역사적 규정이나 개념적 정의, 비평적 기준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이론화되지 않는 핵심적인 가치로서 오늘날 미술계 구석구석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성, 나아가 동시대미술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히 현재’(The present)라는 시간 축으로 군집화 된, 지금 이 순간 만들어지고 있거나 오늘날 제작된 모든 미술을 배제 없이 포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가장 새롭고 최신의 것인 동시에 지금여기(Nowhere)와 시차 없이 조율된 시간성에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최근 한국 미술계에서는 이러한 동시대성을 선취하려는 열망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데, 이는 젊은작가들에 대한 큐레이터들의 깊어지는 열병, ‘최신예술담론을 향한 이론가들의 강박, 무엇보다 가장 동시대적인것과 공명하려는 제도권의 욕망으로 두드러진다. 이제 막 문을 연 포스트-신생공간부터 가장 보수적인 국립기관까지 컨템포러리(Contemporary)한 자장 안에서 자유로운 곳은 없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브랜드 헤리티지를 통해 주요 제도권의 위치를 선점한 아뜰리에 에르메스가 80년대 이후 출생한 작가들을 호명한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6년 개관 이후 1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는 김민애, 김윤하, 김희천, 박길종, 백경호, 윤향로라는 이미 젊음혹은 신진으로 상징화된 작가 군을 불러 모아 공간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한다. 전시 서문에는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를 현재로 불러내어, 작가들을 통해 각자의 현재와 대면시키고, 아직 실현되지 않는 서로의 미래로 투영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결국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혹은 과거와 연접을 통해 미래를 산출해내는 동시대적 지금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질문을 바꾸어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취해야 할 동시대성은 어떤 시간인가? 작가들을 매개해 동시대적인 것에 머물거나 이를 포착해내는 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선 분절된 기표, 파편화된 텍스트가 부유하는 김민애의 <파사드>에 가로 막힌다. 불투명한 가벽으로 둘러싸인 미로는 동선을 제한하는 동시에 기입된 구문들을 독해하게 하면서 전시장과 작가 사이의 중첩된 과거사적 지층, 그 시간의 궤적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과거를 통하지 않고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듯이 김민애가 수집한 하이퍼텍스트는 오래된 지표로 쓰여 진 이정표라는 점에서 대상이 남긴 기억과 역사를 수집해 동시대를 전사해내는 크로노스적 시간관 혹은 기념비로서의 현재와 같다.

 

이러한 시간-감각은 김윤하와 박길종, 백경호의 작품에서도 각각 발견되는데,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과거에서 추출한 단상을 주관의 알레고리로 재구성한 김윤하는 당구 큐대, 대걸레, 플라스틱 의자, 테니스공 등을 비정형의 모뉴먼트(Monument)로 쌓아올려, 전시장의 10년을 경유했던 작가들을 일별해냈다. 일종의 안티-오마주로서 이 트로피들은 과거를 기념하는 동시에 무화시키기도 하지만 각각의 사물들은 지난 10년을 현재화하는 성좌로 기능하면서 회고를 통해 동시대에 내려앉는다. 반면, 박길종은 공간의 흔적 혹은 물성의 기억을 통해 지난 시간들을 불러들이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대를 반영하거나 개척해 낸 재료들의 집합은 <내 친구의 친구들은 내 친구들이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에르메스를 거쳐 간 작가들의 것이면서 길종상가와 박길종 자신의 것인 동시에 시대 안에 귀속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재료를 참조해 현재를 번안해 내는 제작자의 시도는 과거를 불러들여 현재를 대질하려는 전시의 기획과 정확하게 포개져 있다. 무엇보다 과거를 경유해 현재에 당도하려는 시도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작업은 백경호가 제시하는 다섯 명의 인물(혹은 회화)들인데, 다층의 레이어와 혼성화로 이루어진 화면은 그것이 회화의 역사를 경유했음에도 종국에 동시대적 풍경으로 수렴된다는 점에서 기념비로서의 현재를 전면화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선형적 시간 속에서 가산(加算)의 역사를 강조하는 한편, 과거의 총체로서 현재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전시장에 놓인 또 다른 시간은 현재주의(Presentism)’비동시성(Asynchronism)’이라는 상이한 대립에서 찾을 수 있다. 미소녀 변신물 애니메이션에서 에너지가 방출하는 장면을 캡처하고 몇 개의 프로그램으로 재매개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인터넷 분기 이후 세계를 인지하는 새로운 시각장의 알고리즘 혹은 열화와 초평면에 의해 지지되는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론 사이에서 독해될 수 있지만, 특정한 순간을 이미지로 결빙해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이 유사회화는 시간의 과잉적 낭비라는 차원에서 현재주의에 연동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부정과 과거와의 거리두기에 참여하는 현재주의는 지금의 순간을 사고의 지평이자 종착지로 간주하면서 동시대의 지루한 지속을 드러내는데, 데이터가 언제나 현시적으로 실행되는 것처럼 인터넷을 통해 에르메스의 지난 10년을 대면하는 윤향로의 경험도 그 자체로 현재적인 시간 안에서 순환하고 있다.

 

특정한 순간을 지속해 현재에 거주하는 윤향로와는 대조적으로 김희천은 다소 역설적인 방식으로 동시대성에 접근하는 듯 보인다. 시간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멈블>은 웹 2.0과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눈부시게 성장한 이후 도래한 동시대의 풍경 안에서 다중-시간과 유동하는 공간성에 대한 한편의 에세이필름으로 상영된다. 실재와 가상의 이중간섭이 일으킨 현기증은 VR을 착용한 맹인안내견과 기이한 꿈을 말하는 작가의 어머니를 거쳐 공사 중인 가상의 에르메스에서 를 찾아다니는 남성에게로 이어진다. 이미 사라진(혹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개를 부르는 이 남성은 증강현실 안에서 일종의 시간착오를 겪는 듯 보이는데, 마치 급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너무 빠르거나 늦게, ‘이미그리고 아직으로만 동시대를 경험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이것은 아감벤이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로 동시대성을 설명하면서 그 핵심에 어떤 불일치와 단절, 시간적 파열을 상정한 것과 연결된다. 동시대를 바라보는 비동시적 관점은 1년과 7년 사이의 간극처럼 그 시차를 벌려 당대를 반시대적인 위치에서 고찰해낸다.

 

동시대성은 이렇게 균질한 선형시간이거나 정체된 현재로, 혹은 비동시적인 시간들로 우리 앞에 산재해 있다. 작가들이 발산하는 다종의 지금-시간은 우리가 언제나 시간의 겹침과 이접된(disjunct) 관계에서 현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진정한 동시대성이란 복수의 시간들임을 보여준다. 다시 전시의 제목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해지는 인용구, “오 친구들이여, 친구는 없구나을 보자. 그것은 우정의 이중성과 타자의 현존을 말하지만, 가장 현재적인 시간을 욕망하는 이들에게 그 불가능성을 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재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친구들을 부르듯 오직 과거와 미래를 통해서만 온전히 조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동하는 동시대 안에서 우리는 현재를 따라잡으려는 열망 대신 과거의 해결되지 않는 미완의 사건을 매듭짓고, 미래를 비평하면서 현재를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동시대를 정의할 수 있을까? 햄릿의 한 구절을 빌려 그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시간은 그 이음매가 어긋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

 

**이 글에 대한 문혜진 평론가의 메타-비평이 퍼블릭아트 8월호에 함께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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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다 : 북 리뷰 ‘당신은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 : 페미니즘이 이자혜 사건에서 말한 것과 말하지 못한 것’]

 

언니모자

 

가해자 이익, 2차 가해자 이자혜, 피해자 A로 구성된 이 사건1)이, 피해자가 미성년자였으며 가해자가 성인이라는 맥락에서, 당시에 피해자-가해자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적절한 개입을 하지 않고 방관, 묵인 및 동조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건을 구성하는 현재와 당시의 시간차를 놓고 볼 때, 성관계와 성폭력 사이 미세한 차이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대응하기 어려웠다고 해도, 여전히 미성년자-성인간의 나이차는 권력의 차이로 존재한다. 또한, 피해자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한 이래로 법적인 공방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미학적으로 잘 꾸며진 2차 가해자 측의 탄원서가 출판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편집자 노트와 서문, 각자의 글로 이루어진 이 책의 짜임새의 삐걱거림은 부록에서 절정을 맺는다. 말미를 차지하는 ‘부록: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사건일지’의 문제적인 부분은, 예술계 각 생태계에 만연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많은 부분 삭제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일지는 ‘여성예술인연대(약칭 AWA)’와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약칭 WOO)’,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약칭 두영찍)’의 출범과 활동을 언급하지 않았고,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 페미>’의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해쉬태그와 관련 운동을 언급하지 않았으며, 여성주의저널 ‘일다’에서 다루어진 #부산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해쉬태그와 관련 운동을 언급하지 않았고, ‘씨네21’에서 열 한 번이 되도록 특집 시리즈로 진행된 [영화계 내 성폭력] 주제의 좌담 또한 언급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예술가’이자 ‘우리의 친구’인 이자혜의 복귀를 갈망하는 탄원서로서의 이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은 양효실이 대표로 쓴 서문이다. 서문에는, 편집자 노트에서 언급된 ‘가장 첨예한 주제인 페미니즘을 다시 한 번 논의의 장으로 끌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필자들의 절실함’2)이 있었다면 당연히 드러났어야 할 여성주의적 쟁점의 제기가 없다. 서문은 양효실의 이자혜에 대한 개인적 인연과 일화, 사적인 연민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1) 고발자 A는 웹툰 <미지의 세계>의 작가 이자혜가 A가 고등학생일 때 이자혜 작가의 친구인 성인남성B를 A에게 소개시켜줬고, B는 A를 강간했다. A는 어려서 그것이 강간이라고 명확히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성인남성과의 성관계에 대해 이자혜에게 이야기했는데, 이자혜는 이 대화를 ‘피해사실에 대한 고발과 요청’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오히려 조롱했고, A와 B에게 각각 서로와 성관계할 것을 부추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A는 <미지의세계>를 비롯한 몇몇 만화에서 이자혜가 A와 B가 등장하는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재현했다고 주장하며, 그 역시 지금까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 A는 자신이 B에게 당한 것이 강간이라는 점을 인지했으며, 이자혜는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에 있어 2차가해자임을 깨달았음을 명백히 했다. 무엇보다 현재 이자혜가 페미니즘 공론장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화두에 오르고 있는 것과, B가 A 자신에게 사과도 없이 연락을 끊고 결혼해 잘 살고 있다는 점을 볼 때, A는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이상은 피해자가 2016년 10월 19일 에버노트에 작성한 글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며, 이에 대해 이자혜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을 통해 A의 고발이 “주작”이라며 부정했다가 삭제했고,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자 모든 것에 사죄한다는 내용의 짧은 사과문을 남겼다가 삭제했으며, 최종적으로 A의 피해사실에 대한 이자혜 자신의 무책임은 반성하되, 자신이 미성년자 강간을 사주·모의했다는 혐의 및 자신의 작품들이 피해사실을 재현한 범죄의 산물이자 범죄 그 자체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해명문(2016. 10. 21)을 남겼다. 주석 64, [문화예술계 성폭력의 특수성과 ‘2차가해’ 담론- 웹툰 <미지의 세계>사태를 중심으로] 오혜진(문화 연구자), 토론회 ‘2차가해’와 ‘피해자중심주의’ 의 발제문 중 주석. 135쪽.

2) [당신은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양효실, 박수연, 박연아, 이나라, 이미래, 이연숙, 이진실, 이춘식, 허성원 지음. 현실문화 펴냄. 15쪽.

 

양효실은 본문에서 이자혜를 둘러싼 사건들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입장은 전혀 제시하지 않은 채, 인용을 빌어 ‘강간’이라는 개념의 본질 자체를 가부장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로부터 탈주를 제안한다. 그러나 성폭력의 현실적인 사건들을 눈앞에 두고, ‘강간이라는 개념의 ... 개념의 ... 개념’ 따위의 추상적 전제를 거부하라는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가부장제로부터 발원한 개념과 폭력, 즉 강간이라는 지배의 방식을 거부하면 성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 실제로, 피해자들이 자책적으로 사건을 재구성할 때, 가부장제가 심어놓은 여러 관념들은 자신을 옭아매는 데 큰 몫을 한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몸속으로 이물질이 삽입되는 경험은 신체적으로 다가오며, 그러한 총체적인 경험을 단지 정신적인 태도만으로 무화하기란 어렵다. 양효실의 제안은 실제적으로 피해자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고통의 실체를 외면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될 수 없다. 심지어, 이 글은 ‘여성의 경험만으로 충분한가’는 소제목으로 시작하고 있다. 여성의 경험을 빼고 나면, 성폭력에서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가부장제가 양산한 폭력과 싸워야 하는가?

 

양효실은 ‘베즈 무아’를 인용하며 제안하는 바, “강간의 피해자 서사에 쾌락주의적인 가벼움으로 맞설 것을 요청”3)한다. 가부장제 지배 전략으로서의 강간에 대해 ‘웃어넘기는 것’은 하나의 태도로서 가능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1대 1로 바로 대응 가능한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것이 성폭력인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책하는 시간을 통과한다. 그 사이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는 많은 지지와 연대가 있어야만, 자기 자신의 성폭력을 성폭력으로서 긍정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의 필요성을 건너뛰는 것은 말 그대로 현실과 괴리된 태도이며, 자신이 아닌 다른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일로 보인다.

 

탄원서가 제기하는 두 번째 주장은 이러하다. 이자혜는 ‘페미니스트’로 세워졌다 ‘안티페미니스트’로 끌려내려진 희생물이라는 것이다. 이자혜가 가진 콘텐츠는 시장에서 여성주의 코드로 소비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페미닌 전사’ 등의 캐릭터를 활용하고, 출판사와 웹플랫폼 등은 여성주의 코드로 홍보전략을 짜고 실행했다. 그러나 이자혜가 본인의 사생활과 관련해 내린 행동들, 지금도 진행 중인 행동들은 여성주의적인 활동과 거리가 멀다. 물론 여성주의적이지 않은 사적 행동들을 지속하는 작가의 작품을 여성주의적으로 판단하거나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것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생산하는 컨텐츠의 성격과 실제적인 지향성의 이율배반은 적어도 페미니즘 코드를 활용한 소비의 흐름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한 계기가 될 수는 있다. 이자혜의 작품 홍보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막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이자혜의 작품이 소비되던 곳에서 작품과 다른 작가의 사생활에 배신감을 느끼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온 것 또한 개연성이 있다. 과거에서처럼, 정부와 같이 권력을 확실히 쥐고 있는 위로부터의 검열과 통제라는 방식과는 다르게, 이자혜의 작품을 소비하는 관객들이 돌아서고, 출판사와 웹플랫폼은 이자혜와의 계약을 빠르게 해지했다. 이자혜의 작품을 소비함으로서 여성주의라는 시대정신을 공유한다는 열정과 신뢰감을 나누어 가졌던 관객들이 신뢰가 깨지는 경험을 갖고 절망감을 선사받은 후, 소비를 거두었다는 인과관계를 단순한 ‘도덕주의’로 정리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여성주의는 단순히 사변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물론 여성주의가 체계적인 논리 구조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주의는 현실 속 여성들의 경험들과 가치관이 뒤섞여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장이며, 여성주의적 관점의 표현은 발화자의 삶의 경험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이자혜의 ‘축출’에 대하여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구도에 기반한 도덕적 순결주의’라고 정의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명의 여성주의자에게 기대되는 역할의 범주는 그가 생산하는 문화적 기획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가 삶 속에서 내린 결정들과 실천들 또한 포함하고 있으며, 그의 표현물과 현실적 태도의 불일치 때문에 그의 지지자들이 갖는 배반감은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자혜의 창작물이 애초부터 여성주의적 기획이었다는 전제 하에서다. 오히려, 모두가 ‘메타’적이라고 믿었던 <미지의 세계>의 위악은 사실상 창작자의 일상적 태도와 동일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공분을 샀다. 헌데, 여기서 묻고 싶다. ‘악’과 ‘위악’은 그것을 수행하는 자가 ‘악’임을 자각하고 있으면 곧 ‘위악’이 되는 것인가? ‘악’의 자기고백과 자기혐오는 곧 그의 의도가 ‘선’임을 의미하고, 곧바로 ‘악’에서 ‘위악’으로 전치되는 것인가? 어떠한 성적인, 문화적인, 자본이 없는 주인공이 계속해서 연애관계에서 실패하는, 때로 성공하더라도 무가치한 일로 환원시켜버리는 이 이야기들은 곧바로 ‘우리의’, 또는 ‘여성주의적인’ 이야기가 되는가?

 

<미지의 세계>라는 창작물의 ‘위’악성, ‘메타’성이 <미지의 세계>가 철저하게 가상의 세계라는 것이 전제되었을 때 기능한다는 믿음은 하나의 안일함으로 규정될 수 있다. 위악과 메타에 대해 <미지의 세계>는 충분한 거리감을 작품 내에서 스스로 갖지 못했다.

 

더 문제의식을 갖게 되는 지점은, 이러한 흥망성쇠에 대해 과도하게 자기몰입을 하는 이 책의 필자들의 태도이다. 이춘식 글의 제목 ‘우리들의 일그러진 여왕’에서 볼 수 있는 태도라든지, 이미래의 일기 형식의 글은 필자들이 이자혜에게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연아가 말하듯 “내가 뱉는 이야기는 전부 나한테 하는 이야기”이고 “나는 나를 가여워 하면서도 욕밖에 못 하기 때문에”, “거절당할 것이기 때문에, 그냥 침묵하거나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다.”4)라는 단정은 자신의 크기를 약소하게, 세계와의 관계 또한 협소하게 지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곡된 자기인식과 세계 인식에 대해서, 이들은 객관화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자기 연민에 빠진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5) 배우들이 연극 무대에서 하는 혼잣말은 ‘방백’이라고 하며, 방백은 관객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혼잣말이 될 수 없다.6) 이 글이 책으로 출판된 순간, 필자들은 자신과 동료들의 글에 책임을 져야 한다.

 

‘당신은 가해자입니까, 피해자입니까’라는 이분법적인 질문이 노린 바는 사건을 간접 경험하는 제 3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탐구할 필요성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제시한 제 3자의 태도는 사건에 개입하고 분석하고 자신의 역할을 짊어지고자 하는 욕망보다는 사건을 바로 보기를 회피하고 싶은 ‘나, 우리’의 욕망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

 

<미지의 세계>를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로 치환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해서 오히려 묻고 싶다. <미지의 세계>가 양효실의, 박수연의, 박연아의, 이나라의, 이미래의, 이연숙의, 이진실의, 이춘식의, 허성원의 세계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그에 대답하지 못했다.

 

3) 같은 책, 99쪽.

4) 같은 책, 135쪽.

5) 같은 책, 125쪽.

6) 무대에 선 한 명의 배우가 관객에게 전달하는 '독백'과는 달리, 무대에 선 배우들이 서로에게는 들리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관객에게 전달하는 대사. 따라서 배우들 간에 진행되는 '대화'와는 다른 속마음이 '방백'으로는 들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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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굿-즈#01. 관객 A와 박샤라폽 시계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마침내 A는 박샤라폽 시계의 19번째 에디션을 구입했다. 그러나 마침내, 라며 다소 호들갑스럽게 첫 문장의 운을 띄우기에 시계의 구입은 사실 너무도 우연찮게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의 정황을 조금 앞당겨 서술해보자. 세종문화회관 야외에서 굿-즈의 흔적을 좇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광화문 역 출구의 지척에서부터 컨테이너 형태의 가설 매표소가 건너다보였고 그 와중에 굿-즈의 에드벌룬은 동공을 굴리며 (아마도 관객들로 추측되는) 인파에 합류하기를 망설이는 A를 안쓰런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티켓팅 전의 A가 섰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계들이 진열된 좌대 사이의 거리. 그것은 단번에 잇거나 측정될 수 있는 미터라기보다, A가 구사했던 그날 치의 다소 부산했던 동선들의 다발에 가깝다.


다발을 한 가닥씩 명료하게 추리기 전에, 혹은 그러한 무의미한 추적을 일찍이 포기하며 단번에 A가 최초로 박샤라폽 좌대를 맞닥뜨린 순간을 상기해보자. A는 일전에 일민미술관에서 개막한 뉴 스킨 전을 관람했던 경험이 있다. 1층의 다소 어두운 채도의 전시장에서 목재로 제작된 객석1)에 앉아 <바벨>을 감상했더랬다. <바벨>은 21분 남짓의 영상이었고 박샤라폽 좌대 앞에 멈춰 선 채 불현듯 A의 뇌리를 스친 이미지는 21분 동안 영사된 내용의 파노라마가 아니라, 당시 영상 속 지하철 스크린 도어의 표면을 서슴없이 투과하던 3d로 모델링된 유사 마네킹들이었다. A는 한번 ‘그것’들을 제 머릿속에 무작위로 줄 세워보았다.


1) 전시를 관람한 이후, 뒤늦게 그 객석이 김동희 작가2)가 제작한 나무 구조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A는 자신이 엉겁결에 작품 위에 걸터앉았다는 생각에 괜스레 므흣해졌다.

2) 박샤라폽 시계를 찬 채 주변을 기웃거리다 발견한 김동희 작가의 좌대에서는 작업복의 패치를 판매하고 있었다. A는 제 머릿속에 연상된 ‘구조물’과 대차대조하며 “이건 정말 작가로부터의 ‘굿즈’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어찌됐건 일전에 A가 착석했던 순간은 누군가에 의해 조형된 것이 틀림없었던 것.


하여튼 ‘그것’들은 불길해서 멋지지 않았던가. <바벨>의 내레이터가 읊조리던 내용의 세목들은 역시나 21분의 통째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당시 청각은 꽤 미묘하게 “망해가는 세계”에 반응했다. 마치 90년대생인 A로써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99년도의 세기말을 A의 유년 저편으로부터 무작위로 연성하려는 듯 주문을 읊고 이를 BGM 삼아, 그간 망각돼서 구체인형처럼 뻣뻣해진 인물들이 현실 공간과 마구 겹쳐지는 듯 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A에게 <바벨>은 흡사 강령술의 현장이었다. ‘그것’들을 막상 (가상의) 파노라마에서 끄집어내 (A의 머릿속 가상의) 진공 상태에 병렬로 죽 늘어놓고 보니 각자에게 도무지 개별적인 인상이랄 게 없어서 더 그럴싸한 ‘분위기’가 났다.


그리고 지금 여기, A의 앞에 진열된 박샤라폽 시계들이 있다. 굿-즈가 개막하기 전 SNS를 떠돌던 프리뷰의 내용3)으로 추측컨대, 이 시계 안에는 3D로 모델링된 박샤라폽이라는 인물의 재촬영된 이미지가 삽입되어있다. 도대체 박샤라폽이 누구일까? 얼핏 페이스북 뉴스피드에서 동공으로 스캔한 이름 같기도 하다.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마침 작가는 좌대를 잠시 비운 상태였고 A는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대리인을 통해 19번째 에디션을 구매했다. 대리인은 시계를 한 장의 프린트와 함께 포장지에 동봉한 채 거슬러주며 이 프린트에 적힌 좌표를 통해 박샤라폽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A는 박샤라폽을 곧바로 다운로드 받는 대신 일단 시계부터 포장지에서 꺼내 착용했다. 정작 시간은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굳이 표준시에 맞춰 조정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날 치의 동선을 주워섬기며 계단을 오르던 와중, A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머물던 풍경이 유난히 움푹 팬 것처럼 보였다. 세종문화회관의 예인홀 일대는 마침 지하에 위치해있어 A를 스치는 주변의 인파는 자발적으로 그런 “싱크홀”과 바깥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덕분에 행사장 한편에 염치없이 눌러앉은 한 거지의 남루한 행색은 별다른 이질감 없이 그 자리에 방치됐다.4) A의 소비에 원동력이 된 <바벨>은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조악한 3D의 텍스처 속으로 함몰되며 “실제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에 대한 역상”으로써의 도시-이미지를 가리켰다.5) 그렇다면 현재 굿-즈가 겹쳐짐으로써, 혹은 2015년 10월 14일 발 성황리에 진행됨에 따라 파생된 공간은 무엇의 역상일 수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굿-즈는 작가들의 페어인 동시에 신생공간들 일부가 작품 유통의 경로를 따라 일시적으로 집적된 순간이기도 하다. <바벨>이 구글 맵 상에 납작하게 펼쳐진 표면 중 화자의 사적인 경험과 연루된 일정한 범위를 애써 3D로 복각함으로써 좌절된 형태의 ‘공간’이라면, 굿-즈는 결코 물리적으로 한데 엮일 수 없을 만큼 산개한, 그러므로 지도상에서만 간신히 조감될 수 있는 신생공간의 개별 구간들을 총체적 경험으로써 일순 복각시킨 결과나 다름없다. 후자는 결코 디스플레이 너머에 투사된 3D가 아니기에 섣불리 좌절의 텍스처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굳이 표면상의 흠을 찾자면 각자가 임대로 외화 했을 때보다 눈에 띄게 쪼그라든 시간일 것이다. 어찌됐든 덕분에 우리는 무려 현실에서 굿즈들을 플레이 중이다.


A를 포함한 모두에게, 이는 결국 최초의 피날레가 될까? 하여튼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A는 일단 박샤라폽의 시계를 19번째로 구입하여 그 중 한 귀퉁이를 떼어갔다. 그리고 귀가하면 마침내 자신의 데스크톱에 박샤라폽을 다운로드 받을 것이다. 다시 광화문 역사의 지하층으로 기어 들어가 이번에는 조금 다른 층위의 낙차감을 느끼며, A는 문득 그렇다면 다른 49인은 어떤 식으로 박샤라폽 시계를 소장하게 되었을지 궁금해졌다. 관련한 소식을 좇기 위해 곧바로 스마트폰을 켰고 마침 지하철이 도착하며 스크린도어를 투과한 빛에 시야가 흐렸다. 그 순간 A의 좌표 또한 명멸한다.


3) http://goods2015.com/artist_24.html

4) http://goods2015.com/artist_13.html

5) 인용된 대목은 고스란히 권시우의 글 <뉴 스킨 : 본뜨고 연결하기>, 납작함과 납작화 (http://jipdanochan.com/6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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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이제 아름다움은 더 이상 금지되지 않을 것이다.”1)

언니모자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여성 성기를 생각할 때 자궁을 포함한 골반 부위의 해부학적 절단면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남성 성기와는 달리, 여성 성기의 외양은 그다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 차이는 명확하다. 여성 성기는 생식을 위한 장소로 여겨질 뿐, 감각을 느끼고 움직이며 생동하는 실체로서 제시되지 않는다. 여성 신체의 시각적 재현물은 철저하게 남성의 시선을 의식2)하면서, 가부장적 관념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된다. 이러한 형식과 경로들은 여성 신체를 바라보는 여성 자신의 시선3)까지 구속하며 재생산해낸다.

 

이러한 가운데 자궁도 질도 아닌 보지를 재현의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는 여성의 성기가 태아가 머무르기 위한 장소도, 남성이 성감을 느끼기 위해 자신의 자지를 밀어넣는 구멍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이 자신의 성에 있어서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여성 스스로 자신의 성에 대해 직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의 성 기관은 신비에 싸여 있다. (…) 어린 소녀는 자신의 성기를 탐험해 보거나 성기를 이루고 있는 조직의 이름을 알아보거나, 또는 점액 분비나 발기 작용을 이해하도록 격려받지 못한다.”4)

 

여성주의 미술은 전략적으로 여성 신체에 대해 탐구함으로서 여성성에 대한 대안적 상을 만들어내려 시도했다. 여기서 보지의 이미지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구보티 시게코 <성기 그림Vagina painting>,1965년 / 캐롤리 슈니먼 <내밀한 두루마리Interior Scroll>,1975년


1965년 구보타 시게코가 성기 그림Vagina painting’, 1966년 니키 드 생팔이 hon’, 1968년 모니카 스주가 출산하는 신God giving birth’, 1971년 주디 시카고가 붉은 깃발Red Flag’을 발표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각각의 작품들이 소개되는 공간에서 큰 논란과 마찰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3, 주디 시카고와 미리엄 샤피로는 자신들이 설명하고 있는 이미지를 단순히 질 혹은 자궁의 미술로 보지 말고,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진행된 여성 신체의 평가절하를 전복하기 위한 틀을 제공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5) 1972, 한나 윌케는 자신의 작품 S.O.S에 대해 사람들은 여성의 기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한다.’라고 진술했다.6) 1975, 캐롤리 슈니먼이 자신의 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어 여성 작가에게 가혹한 예술계에 비판적인 내용을 읽어내려간다.7) 1976년 바바라 해머는 다중적 오르가슴에서 자위 행위 중에 있는 보지의 모습과 동굴 내부의 이미지를 병치시켜 보여준다.8) 1979년 캐서린 엘웨스가 월경Menstruation’을 발표하는 등, 보지 이미지는 출산과 월경 및 여러 가지 신체 작용들과 병행되기도 하고 여성성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도 활발하게 시각화된다. 19924회 카셀도쿠멘타에서 존 리어나드가 무제Untitled’ 라는 이름으로 18~19세기의 여성 초상화들 옆에 보지를 클로즈업한 사진을 배치하였고, 2014년 드보라 드 로베리티스는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앞에서 자신의 보지를 열어젖히고 앉아 퍼포먼스를 진행9)하기도 하는 등, 보지에 대한 시각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1970년대 이후에도 보지에 대한 언급은 꾸준하게 있어 왔다.


*1) “메두사의 웃음Le rire de la meduse”, 엘렌 식수Helene Cixous, 1971. (L’arc, 1971) 39~54.

[미술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 미메시스 펴냄. 205~206쪽에서 재인용.

*2)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구경거리가 되어 유심히 주시되고 시선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여성은 전혀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행렬은 여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모든 것은 남성과 관계가 있다.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남근이다. 여성은 남성이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환상을 투사하는 무대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 로라 멀비L.Mulvey. (Screen, 1975) [여성·미술·이데올로기] 로지카 파커, 그리젤다 폴록 지음, 시각과 언어 펴냄, 171쪽에서 재인용.

*3) “여성은 항상 자기 자신을 주시해야 한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이미지에 영향을 받게 된다. 방을 서성일 때 또는 부친의 사망으로 눈물을 흘릴 때, 그녀는 걷고 있는 자신이나 울고 있는 자신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배웠고 설득당해왔기 때문이다. ...남성은 여성을 본다. 여성은 보여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본다. 이것은 남녀간의 관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자신에 대한 관계도 결정해버릴 것이다.” [이미지ways of seeing] 존 버거 지음, 동문선 펴냄. 83-84.

*4) “Sex”,저메인 그리어Germaine Greer, (The Female Eunuch,1970) 48~57. [미술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 미메시스 펴냄. 202쪽에서 재인용.

*5) “여성 이미지Female Imagery”, [여성, 미술, 사회], 휘트니 채드윅 지음, 시공아트 펴냄. 444.

*6) [여성미술사회], 휘트니 채드윅 지음시공아트 펴냄. 454.

*7) “내밀한 두루마리Interior Scroll” ‘...슈니먼은 자신의 질 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천천히 꺼내어 거기 쓰인 글을 읽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동등하게 친구일 수는 있지만 동등하게 예술가가 될 수는 없어나는 이렇게 대꾸했다우리는 동등하게 친구가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동등하게 예술가가 될 수 없다고... > <그가 자기는 여류 조각가와 살아 봤다고 나에게 얘기하기에 내가 물었다그럼 나는 여류 영화감독이 되는 건가아냐그가 대답했다우리는 당신이 댄서라고 생각해.>’[미술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미메시스 펴냄. 82.

*8) “다중적 오르가슴Multiple Orgasm”, 1976, 16mm 영화, 6분 30무성. ‘<여자, (뤼스)이리가라이에 따르면 두 개의 음순을 가진 여자는 이미 둘이다그 둘은 계속해서 서로 자극하고 포옹하며 하나씩 따로 분리될 수도 없다너무도 시적인 이 생각은 내 욕망을 더욱 굳혀 주었다. ...>바바라 해머작가의 말, 1990’ [미술과 페미니즘], 헬레나 레킷 엮음미메시스 펴냄. 103.

*9)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Artiste Deborah de Robertis au musée d'Orsay’

 

한국의 경우, 20009월 말,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아방궁 : 종묘점거 프로젝트를 진행하려 했으나 전주 이씨 종친회 등 유림들의 폭력적인 반대로 무산된다. ‘입김은 가슴과 보지 등 여성 신체 부위를 본따 만든 쿠션을 마음대로 껴안고 드러눕거나, 자궁에서 보지까지의 길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거나, 보지와 자지 형상이 새겨진 뽑기를 따 먹어볼 수 있도록 하는 등 여러 작업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유림들은 근엄한 종묘더러운 자궁으로 모독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작품들을 거침없이 훼손했다. 이 상황에 대해 비판은커녕 한국식 페미니즘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한국 페미니스트들에게 왠지 모를 반감을 갖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런 류의 돌출행동"이라며 훈수를 두는 이10)도 있었다.


이후 입김측은 여성단체 및 문화예술단체와 연대하여 1029일 종묘시민공원에서 여성문화축제를 치르고 거리행진을 진행했으며, 이 모든 과정은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다큐멘터리11)로 만들어져 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에서 상영되었다.


'아방궁 : 종묘점거프로젝트' 중 현장의 치마 설치 작품, 2000년

 

"아직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한, 여성이 창조자가 될 수는 없다."12)

 

이와 같이, 보지를 다루려는 시도는 언니모자13)의 작업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언니모자에서는 628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릴 퀴어문화축제에서 보지색칠놀이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보지색칠놀이책에 들어가는 보지 이미지는 여러 방식의 홍보를 통해 실제 여성들이 보내준 사진들을 참고하여 제작되었다. 이러한 프로젝트 진행은 많은 여성들이 보지를 갖고 있지만, 그 생김새는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여성의 보편성과 개별성에 대해서 탐구할 때 보지는 썩 괜찮은 오브제로 작동하고는 한다. 또한 보지 모양의 쿠키를 구워 직접 아이싱 과정을 거치도록 하는 나만의 보지쿠키 만들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등, 언니모자는 보지라는 존재를 여성주의적인 방식으로 시각의 장으로 불러내, 보지를 둘러싼 부정적 함의들을 소거하고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한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보지를 다루면서 흥미로운 점은, 보지를 단지 오브제로만 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보지는 당연하게도 살아 있기 때문에, 그리는 내내 구멍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옴죽거리고, 주름을 움찔거리며, 액과 피를 내보내기도 한다. 한 순간 포착했다 싶으면, 다음 순간 이미 달라져 있다. 이러한 생동성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보부아르가 비판했던 지점과는 또 다르게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하면서,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시사점을 던진다.


여성이라는 범주에 가해지는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여성이라는 범주에 대해 끊임없이 다시 묻고, 갱신하는 것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보지는, 여성 스스로가 자신의 신체를 들여다보면서 다른 여성들과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해보고 더 넓은 여성성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움직여나가는 하나의 기준점으로 작동할 수 있다.


추신) 예술고등학교 미술반, 미술대학, 미술관 등 미술을 다루는 기관 어디라도, 여성주의미술사 강의 정착이 시급합니다. 여성주의미술사 강의 얼른 예산 확보하고 수업안 기획하고 일정 짜고 강사 섭외하세요. 급해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10) “번지수를 완전 잘못 찾았다구요? 당신의 인생에서 여자는 무엇인가” 2000.10.04. 오마이뉴스.

*11)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The Beautiful and Bold Womb”. 김명진, 제미란. 12, 2001.

*12) ‘... 더욱이 버지니아 울프가 우리에게 보여 주었듯이,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엇 등은 외부의 구속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써야 했으므로, 막대한 자유를 지닌 남성 작가들이 출발하는 바로 그 단계에 그토록 숨 가쁘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그 승리로 이득을 취하고 그들을 옭아매는 그 모든 밧줄을 끊을 만큼 충분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2의 성Le Deuxieme Sexe],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피에르 드메니Pierre Demany에게 보낸 편지. 1871515. [미술과 페미니즘] 193-194쪽에서 재인용.

*13) 여성주의 콜렉티브. 가장 빠른 소식을 twitter.com/sisterhat에서 접하실 수 있으며, 연락은 sisterhat@gmail.com으로 부탁드립니다



언니모자 '보지색칠놀이책' 도안 일부, 언니모자 트위터(@sisterhat) 발췌


언니모자 '보지쿠키' 일부, 언니모자 트위터(@sisterhat)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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