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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버링 Hovering스케치 - 폐허의 유령이 실은 오늘의 슬기로운 젊음


황재민

 

2009년 열렸던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세대적인 것The Generational'이었다. 로렌 코넬Lauren Cornell과 로라 홉트먼Laura Hoptman, 그리고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기획을 맡았던 이 트리엔날레의 이름은 예수보다 젊은Younger Than Jesus으로,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진 나이인 33세 아래의 나이로 한정된 작가들이 총 50명 참여했다. 이 전시에 설정된 유일한 조건이 단적으로 표현하듯,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젊음, 그리고 그 젊음을 바탕으로 한 범주로서의 세대였다. 현대적 미술을 인양해온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젊음은, 이 트리엔날레를 통하여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용되어 그것이 가능케 하리라 기대되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움을 구현한다.

 

젊음이 전시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축이었던 만큼, 전시에서 다루는 세대적인 것이란 세대라는 개념을 폭넓게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젊은) 세대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세대란 2009년 당시의 청년 세대, “밀레니얼Millennials"이라고 지칭된 세대를 말한다. 젊음이 현대적 미술이 갱신해온 현재를 지칭하는 하나의 요소라면, 그 젊음의 구체적인 내용인 밀레니얼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랜 선에 매개되어 세계화된 세상으로부터 나고 자란, 의인화된 새로움이 되어 나타난다. 전시의 콘셉트에 맞추어 보자면, 그들이 가지는 새로움은 세계화된 지구촌Global village’이 갖는 새로움과 동등한 셈이고, 이들을 조망하는 것은 결국 세계를 관찰하는 것 - 어떤 세계관이 아니라 정말로 지구촌을 관찰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누군가 꿈꾸고 믿었던 유토피아적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를 앞에 두고, 전시는 젊음을 채집하는 일로 하나의 세계상을 표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보다 젊은이 포섭한, 25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군은 미지의 새로움으로 이동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고 표현된다.1) 젊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세대를 빌어, 젊음과 새로움은 이렇게 연관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움이 내포하는 의미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확실히 밀레니얼은 전지구화와 디지털 기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첨단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밀레니얼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경제 위기와 기대감소의 시대에 따르는 시대적 정서이다. 밀레니얼은 축소된 욕망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나아가 축소된 경험에 대해서 익숙하다. 그러므로 밀레니얼은 더 이상 발 디딜 바깥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또한 익숙하다. 전지구적 젊음의 특징은 불행하게도 전지구적 경제 위기에 근원하는 전지구적 가난과, 전지구화된 공간 아래 통합된 지역성이 선사하는 마이너스-경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보다 젊다는 사실이 지칭하는 것 중 특정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로서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삭제되어야 한다. 젊음에게는 신성함이 없고, 가능성에게는 한계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이 이제 젊음은, 바깥은,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자인한다면, 그 모양은 무엇과 같을까? 한국의 서울의 영등포의 2/W에서 개최된 전시 호버링Hovering이 제시하는 화두는, 어떠한 측면에서 이런 문제들과 맞닿는다.

 

<호버링Hovering> 전시 포스터(http://www.90apt.com/hovering.html)

 

평론가 권시우와 90APTNNK(윤태웅)가 기획하고 김동용, 김효재, 류수연, 서민우, 오연진, 전예진, 정완호, 지호인 등 8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호버링은 기획자와 작가 뿐 아니라 전시 리플렛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이너부터 음향 테크니션에 이르기까지 전시의 모든 참여자가 90년대 출생자로 이루어진, 예외적인 구성의 전시였다. 그러나 호버링이 전시 경험으로써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 파릇파릇한 것,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 아니라 마이너스-경험으로부터 비롯하는 마이너스-세계상을 근간으로, 주어진 공간과 형태에서 적절히 작동하는 무엇을 어떻게 적절히 펼쳐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에는 청춘의 끓는 피가 자아내는 흥분이나 신선함이 거할 자리에 맥빠짐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이 자리를 잡는다. 나아가 호버링에서 제약은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전시에 따르면, 오늘의 젊음은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이 신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적 폐허라는 제약을 겪을 뿐 아니라 또한 (보통 80년생이 주도한 미적 경향이라고 통용되는) ‘신생 공간이 동일한 난관을 맞아 사용했던 폐허 대상의 전략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과거의 성취가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세대는 다르지만 상황은 여전히 같기 때문에, 호버링하는 90년생 미술가들과 신생 공간했던 80년생 미술가들의 관계는 묘연하다. 80년생이 맞닥뜨리고 고생했던 문제가 90년생에게도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때, 90년생 미술가들은 근과거와 강제로 단절된다. 비로소 이것은 맨 땅, 좀 더 고색창연하고 좀 더 어울리는 표현으로 대신하자면 폐허이다. 폐허를 기반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호버링, 좀 더 잘 움직이기 위하여 폐허에 어울릴 만한 존재 형태를 창작한다.

 

“(...)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재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 (...) (이들은) ‘이전의 플레이어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채 아직 정주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하기 시작한다.”2)

 

젊음이 유령이 될 때, 젊음은 삶의 생동감을 포기하고 죽음의 고요한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저승의 존재로서, 유령은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놀래주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로서 포착을 비껴간다. 폐허와 잘 어울리는 유령 시점의 비유는 나아가 전시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주제 혹은 방법론으로 확장 되는데, 이 비유와 얽혀 정당화되는 것은 레이어링Layering"이라는 기획의 형태이다. 호버링에서, 각각의 작업들은 2/W 건물의 1층과 4층을 오가며 뒤섞이고 층 내부적으로도 선형적 관람이 어렵도록 하나의 풍경으로 엮인 모습으로 연출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서문에서 유령 서버라 명명된 여러 겹의 폐허, 분별하자면 전시 공간으로서 2/W가 지니고 있는 외적 형태와 그에 얽혀있는 하나의 시간으로서 공간 커먼센터라는 폐허, 또 폐허에 가까운 비전형적 공간을 미술-전시-공간으로 설정하고 자조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전 세대와는 차별되는, 유의미한 모양의 미학적 시공간을 펼쳐냈던 신생 공간의 전략, 또 이렇게 겹쳐지되 겹쳐지지 않는 근과거를 벗어날 수 없는 배경으로 두는 지금과 그 지금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플레이어의 오늘 - 어디로 가든지 폐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 이 다층적으로 겹쳐지는, 폐허-폐허-폐허-폐허의 공간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전시 형태처럼 보인다. 이런 반응의 결과, 공간 전체를 아우르며 레이어링되는 전시 연출은 개별성과 총체성을 오가며 합선되는 한 편 작가 간 협업 구조를 활성화하며 유령 시점의 자유도라는 가설적 표현을 실제 공간 위로 구현해낸다. 더하여, 공간을 무대 삼아 작업을 레이어링하는 전략은 기획을 맡은 평론가 권시우의 비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권시우는 계간 시청각의 지면을 통하여 압축과 팽창(CO/EX), 그리고 김동희의 작업을 엮어 해설하며 공간 인터페이스라는 임의적인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권시우가 제시한 개념어인 공간 인터페이스란 애플의 매킨토시가 스크린 내부의 공간에 데스크톱 메타포를 설정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운용을 원활하게 했듯이, 몇몇 작가들이 디지털 환경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작업 매체와 공간3)을 오늘의 시각성에 맞추어 소화하기 위하여 미술 작업이 놓이는 공간을 마치 데스크톱 위에 아이콘과 중첩 윈도우를 배열하듯 다루는 상황을 해설하기 위하여 동원한 개념이다. 호버링에서 78개에 달하는 작업들이 서로 겹쳐지고 멀어지며 공간을 빼곡하게 점유할 때, 전시의 공간 인터페이스는 클릭, 드래그, 나아가 터치에 이르는 사용자의 능동적 인터랙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도록 제어하며 관람을 굴절하는 효과를 낸다. 어쩌면 이것은 레이어링의 또 다른 쓸모가 되는데, 호버링이 작업을 이렇게 저렇게 서로 겹쳐내면서 전시를 볼만한 것으로 연출할 때, 그것은 또한 (‘볼만한 것이라는) 최소한의 성취를 위하여 작동하지만, 그와 함께 선형적인 관람을 망가뜨리면서 내부적으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블랙박스를 구축하는 역할 또한 선점한다. 그에 따라, 전시의 관람자 혹은 사용자는 전시를 자세히 살필수록 그것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를 보기 위해 2/W에 입장한 관객이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오연진의 그리드다. 48개의 액자와 그에 각각 담긴 이미지로 이루어진 오연진의 <Trade-off>는 서로 거의 유사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노출값을 조정하며 반복한 뒤 그 변화된 양상을 늘어놓은 작업이다. <Trade-off>를 이루는 이미지들은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 인화되어 있는데, 미디엄 자체가 아날로그 흑백 사진의 인쇄에 자주 쓰이는 만큼 관객은 작업을 첫 대면한 뒤 자연스럽게 이것을 사진으로 살펴보게끔 된다. 그러나 인화되어 있는 이미지는 명확하게 인식 가능한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패턴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화소값 이상으로 확대되어 불균질한 시각적 질감을 나타내므로 <Trade-off>는 디지털 이미지를 인화한 것인지, 혹은 디지털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연출한 사진인지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만약 이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라면, 그 광경은 한때 아날로그 현실의 재현에 쓰였던 프린트를 디지털 이미지를 담는 데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포섭한다는, 관습적인 재매개 개념의 이해를 유희하는 셈이다. 작가가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는 대립적 관계의 요소들이 이루는 균형을 뜻하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는 제목으로 작업에 비유적 관계를 설정할 때, 그것은 노출값과 (이미지의) 정보값 간의 균형, 노출값이 조정될수록 백색 혹은 흑색으로 희미해지는 형상의 정보값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이 비유는 또한 현실을 매개하는 두 가지 요소로서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를 포괄한 채, 노출값과 정보값을 조정하는 것으로 두 매개체 간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작업적 구조를 짜 보여줌으로 디지털-리얼리티와 아날로그-리얼리티가 서로 충돌 혹은 절충하며 현실과 관계하는 새로운 조건을 표면을 통하여 시뮬레이션한다. <Trade-off>를 첫 번째 프린트부터 시작하여 선형적으로 읽는다면, 하나의 유사-형상적 추상 이미지가 기본값으로 반복되며 특정한 설정을 조정할 때, 흑색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재현적 사진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해 포스트-디지털 조건 하에서 새로이 작동하는 혼합 현실의 시뮬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과다노출 되어 백색으로 희미해진다.

 

그 뒤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객이 마주칠 만한 작업은 아마도 지호인의 회화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5>일 것이다.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은 보통 작은 체리 형상이 군데군데 반복되어 프린트된 데님을 캔버스 천 대신 삼은 뒤 표백제를 물감처럼 원단 위로 올려내고, 또 그 위에 붓질의 존재감이 드러나도록 희거나 검은 젯소를 몇 획에 걸쳐 수차례 바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이때 작업은 데님 서포트(표백제)-체리 프린트-젯소 순으로 구분되는 개별 재료의 서로 다른 층위를 침범하거나 배제하면서 레이어 구조를 형성한다. 이 레이어 구조에 있어 표백제의 사용은 흥미로운데, 재료는 서포트에 개입하지만 적층되는 바 없이 서포트로 직접 스며들지만, 붓질이라는 조형적 단위를 참조하므로 데님 서포트에 온전히 융합되지는 않는다. 지호인의 회화는 20cm 남짓의 작은 크기로 제한되고, 나아가 이모지Emoji 같은 체리 형상이 주요하게 쓰이므로 결과물은 대개 화사하고 귀염성 있다. 지호인은 2/W의 폐허-폐허-폐허-유령 서버의 공간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회화적 레이어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폐허라는 전시 공간의 물리적 배경을 포섭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에서는 회화 측면의 색채를 공간 배경의 색과 조응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연작에서는 작업 뒤편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PVC 비닐 캔버스를 이용, 폐허로 호명된 전시 공간을 서포트의 일종으로 적극 전용하는 방법으로 나타난다. 호버링은 전시 공간을 하나의 무대 장치 삼아 작업을 전시하고 포섭하는 이상한 전시이므로, 지호인의 이런 방법은 필연적으로 공간에 대하여 장식성을 띄게 된다. 그 때문에 만약 관객이 지호인의 회화를 신경 쓰지 않고자 결정한다면, 그의 회화는 이 전시 연출 내에서 가장 희미한 작업으로 남을 것이다. 허나 한 편으로 지호인의 이런 장식성은 또 다른 성질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회화를 2/W1층과 4, 나아가 두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 통로에까지 넓게 퍼뜨려 걸고 이때 장식성은 또한 편재성을 뜻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누군가가 지호인의 작업이 전부 삭제된 호버링을 관람한다면 누군가는 지호인의 작업이 전시 공간 전반에 넓게 걸쳐 기능하는 호버링을 관람할 테고,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존재하는 독립적인 채널을 레이어링-공간에 펼쳐냄으로써 호버링을 일종의 개인전으로 남용하는 셈이다.


지호인의 회화는 무척 의도적인 설치의 결과물이자 작업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론 또한 섬세한데, 이를테면 1층 군데군데 흩뜨려진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 중, 데님 서포트-젯소-체리 프린트 위로 백색 젯소를 붓질이 드러나는 올-오버 화면으로 칠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검정색 젯소를 같은 방식으로 칠한 4층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과 짝을 이루는 작업으로, 작가는 이 두 작업을 1층과 4층에 떨어뜨려 거는 것으로 두 공간을 연결한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여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이 20x20cm로 동일한 크기를 갖는 것에 비해 24.2x24.2cm의 크기로 비교적 큰데,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또 다른 연작 중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의 크기가 마침 24.2x24.2cm의 크기이므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과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을 연결하는 역할 또한 도맡는 셈이다. 보통 화면 구성이 조촐하되 난리법석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의 성격과는 차별되는, 단일한 두 색의 올-오버 화면을 가장 바깥의 레이어로 배치함으로써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회화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려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작업은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18개에 달하는 페인팅을 이리 저리 섞어 연결하는, 어떤 의미에서의 하이퍼링크 혹은 가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한편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작업 중 가장 과시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업은 1층에 걸린 <비리디안, 네온 핑크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인데, 관객의 눈높이 윗 편으로 올라가도록 높게 놓인 이 작업은 전시된 작가의 작업 중 유일하게 측면의 길이가 표기되어 있기도 하고, 또 캡션이 캔버스가 아니라 혼합매체로 표기된 예외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회화적 물체가 아닌, 어떤 다른 혼합된 것으로 공표하는 <비리디안, 네온 핑크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1층 공간 전반을 성상적 시점에서 조망하여 전시 전체를 장식 차원에서 매개하고자 하는 작가의 야심을 화사한 형광 핑크의 몸체로 표상한다. 지호인이 호버링에서 개인적 채널을 설치한 뒤 얻어내는 것은 화이트 큐브에 최적화된 매체라고 여겨지는 회화를 폐허의 조건에 얽어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인데, 작가는 이런 배치를 통하여 하나의 이미지-표면으로서의 회화가 현재 가질 수 있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 폐허를 정면으로 마주본 상태에서 재검토한다.

 

이어지는 김효재의 <난 마돌 : (Nan madol : season 1,2017)>(이하 <난 마돌: >)은 진공관 형태의 유사 인큐베이터 속에서 끊임없이 회전 중인 세 점의 작은 '유물' 연작과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포스트-시네마로서 <난 마돌: >은 디지털-‘평평한지금을 적도 부근 미크로네시아에 현존하는 난 마돌이라는 이름의 해상 유적에 비유하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서사 속에서, 근과거의 문화적 생산물과 역사적 기록 따위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하여 고해상도로 복원되고, 오늘의 시점에 이국적 현상으로 재생산되고 재배치되어 오늘에 적합한 오늘의 창작력을 소진시킨다는 미학적 문제는 혼합적 시공간에 근거하며 종종 현재의 시간에 침투하는, 가상적 유물의 형태를 빌어 나타난다. 영상의 설명에 따르면, ‘난 마돌이라는 이름의 이 유물은 보통 납작하고 반짝이는 파일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손바닥 한 뼘 크기의 유물들은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올드미디어화한, 뉴 미디어 디바이스에게 가장 잘 포착된다. 구세대 핸드폰, 전자사전, 영상 재생이 가능한 MP3, CRT 모니터와 오래된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난 마돌연작에서 이 디바이스의 종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관객은 4층에 위치한 <난 마돌: (Nan madol : season 2, 2017)>(이하 <난 마돌: >)를 이 디바이스들을 통하여 관람할 수 있다. 호버링에 전시된 난 마돌연작의 경우, <난 마돌: >이 비교적 선형적이고 그래서 설정한 서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 상영된다면, 4층의 <난 마돌: >는 서사 진행을 파악할 수 없도록 조각조각 편집된 영상이 나열되는 방식으로 상영된다. 반면 난 마돌연작 중 가장 마지막에 관람이 가능한 <[JW J 후기] 난 마돌 다큐멘터리 시리즈 6분만에 보기>(이하 <난 마돌 후기>)는 개 중 서사 진행을 따라가기가 가장 수월한데, 이 영상을 통하여 김효재는 이전의 난 마돌연작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던 특정한 사실들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설하고, 그를 통하여 이전의 두 작업을 포괄하며 마무리 짓는 역할을 부여한다. ‘난 마돌연작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각각의 영상이 각자 다른 형식으로 상영되며 서로 다른 형식적 벡터에 근거한다는 점인데, 김효재는 이 벡터를 <난 마돌: >-<난 마돌: >-<난 마돌 후기>로 이어지는 선형적 관계 안에 배치하며 서로 다른 작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보증하고 보충할 수 있게끔 늘어놓는다. 이 중에서도 <난 마돌 후기>의 쓸모는 중요한데, 유튜브 리뷰 영상의 통상적인 형식을 본따 가져온 <난 마돌 후기>는 점차 한국인의 외재화된 정신으로 변모하고 있는 유튜브 플랫폼의 한 조각으로 변모하여 난 마돌연작을 새로운 층위에서 조망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어 유튜브 플랫폼은 가짜 뉴스와 연예인 가십 등 검증되지 않은 저해상도의 정보를 자막의 형태로 정리한 뒤 무의미한 배경음악, 그리고 짤방및 스크린 샷 이미지 등과 함께 송출하는 특징적 형태의 영상 정보가 마구 나도는, 이상한 포털로 변모하는 중인데, <난 마돌 후기>는 이 플랫폼의 일부로 숨어듦으로 이렇게 다중 생산되는 영상 형태의 허구적 리얼리티 혹은 리얼리티적 허구를 모방하고, ‘난 마돌연작에 지시성을 가설한다.

난 마돌연작을 통하여, 작가는 난 마돌이 물리적 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서사 내에서 난 마돌이라는 가상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미래라는 과거의 동력을 잃어버린 미술이 (근과거에 의하여 침범되는) 오늘날 의미를 갖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호버링에서 작가는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를 유물이라 명명하고 파편으로 잘라 소환해내는데, ‘유물연작으로 표기된 이 작업들은 증명사진 크기의 작은 사진이 되어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이 모양은 우습기도 괴상하기도 불쌍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크기가 조촐하고 작아 진공관에 담겨있지 않는다면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한다. <난 마돌 후기>에서, 3자 시점의 화자는 난 마돌시리즈의 매력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꼽는다. 특정 이미지 및 영상을 인용하는 유튜브 영상은 보통 저작권 침해 사례로 판단되어 금방 삭제되곤 하지만, ‘난 마돌시리즈는 어떤 이유에선지 끝까지 유튜브에 잔존하고 있는 일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정보가 수없이 업로드 되었다가 수없이 사라지곤 하는 디지털 생태계의 임시적인 성격은 거기-있음이라는 현실의 근원적 속성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치한다. 어쩌면 난 마돌연작이 꾸준히 거기-있을수 있는 이유는, ‘난 마돌이 오늘날 가능할 수 있는 오늘의 형태를 역방향에서부터 되짚어나가 재구축하고자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과물로서 구축된 오늘은 이전의 오늘이 아닐 테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예외적 현상으로 표시되고 작가가 시뮬레이션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이 사라지지 않음은 관람의 중요한 동인으로 위치한다.

 

류수연의 작업은 손 드로잉에서 리소 프린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가 느슨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레이어링을 전시 구성의 방법론으로 채택함에 따라 공간 곳곳으로 산개하는 여타 작업들과 비하자면 류수연의 작업은 비교적 덩어리져있고, 선형적으로 읽힌다. 이처럼 전시의 큰 맥락이 되는 레이어링이 서로 다른 값을 지니는 층위를 합치고 포개는 방법론일 뿐 아니라 합치고 포개어 연결시키는 방법이라고 볼 때 류수연의 작업은 그 연결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으로, 관계를 도형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작업은 주제를 소실점 삼아 다양한 인상으로 벌어지되 서로 비가시적인 연관 관계를 형성하며 겹쳐진다. 항시 혼란한 호버링의 전시장에서 한 가지 주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또한 독립적인 채널을 형성하고 운용하는 일이 되지만, 1층 전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매스가 있는 작업은 다른 입체들과 겹쳐지게 되어있으므로; 류수연의 작업 또한 겹침을 회피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1층에 위치한 류수연의 작업 중 <첫인상>은 천장에서 시작해 바닥까지 늘어진 긴 천 위에 원 도형을 반복하여 프린트한 작업인데, <첫인상>이 구석을 장악하며 뒤편을 가려낼 때 그것은 김동용이 설치한 작은 앰프를 효과적으로 숨기는 역할을 하면서 전시 디스플레이 상에서의 또 다른 겹침을 형성한다. 이 작은 앰프는 참여 작가 김동용의 <Sender : 4th floor>(이하 <Sender>), 이 작업은 4층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신되는 소리를 1층의 전시 공간으로 송신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Sender>를 통하여 김동용은 레이어링이라는 방법론에 가장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작업을 선보이는데, 김동용은 1층과 4층을 아우르며, ‘레이어링이라는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다는 - 어딘지 엔지니어적인 시점을 선보이면서 호버링의 구석구석을 소리로서 점유하고 반응한다.

 

김동용이 사운드를 형체 없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스피커를 숨긴다면, 서민우는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에서 하얗게 칠한 낮은 좌대 위에 스피커를 올리고, 미술 전시 공간 내의 하나의 입체로서 부각하여 소리가 근거하는 레디메이드 몸체를 노출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1층에 위치한 김동용의 <Sender>가 그 몸체만큼이나 작은 볼륨으로 조건적 청취 환경을 조성한다면,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1층 공간 전면에 나서서 일종의 배경음악처럼 행세한다. 서민우의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는 제목에서 엿보이듯 하나의 리믹스, 작가가 리믹스의 대상으로 정한 원본은 참여 작가 정완호가 언젠가 진행했던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이다. 이 퍼포먼스는 호버링에서 관람할 수 없고, 다만 퍼포먼스에서 사용된 작가의 조각만이 1층 공간 중심에 군데군데 놓이는데, 근원을 잃어버린 파편으로서 정완호의 세 가지 조각은 서민우가 전시한 저음 지향의 노이즈 사운드와 얽혀 다소 공허한 모습으로 전시된다.

보이지 않는 층위를 전제하고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 위치하도록 작업을 제시하는 일은, 작업의 진정한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도록 관람자의 경험을 제한하여 당장의 판단을 유보하는 블랙박스를 가설하는 일처럼 보인다. 여기서 스스로의 과거는 전시를 위한 발판이 되고, 협업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호버링에서 정완호의 작업은 (이제는 익숙해진) 비기념비적 형태를 나타내며 급격하게 낡아 보이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처럼 당장의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임시성을 작업의 주요한 주제로 삼고 맥락화하는 방법론 자체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미술이 담론적 장소성개념을 통하여 합의했던 이해, 지금 눈앞에 현존하는 물체가 가시적이고 또한 비가시적인 여러 층위를 지시하는 물질 이상의 개념적 혹은 담론적 벡터라는 이해가 사라지고, 또 작업의 보이지 않는 과거와 층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준비된 비평적 관객성 또한 끝을 맞았으므로, 작업은 이제 무언가 흥미로운 전사前事를 담지한 가상의 구조물이 아니라 미적 물체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호버링에서 정완호의 파편이 나타내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런 종류의 성찰일 것이다.

 

호버링4층은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때문에 4층은 한 사람의 작가가 작업을 집약하여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그런 만큼, 1층 전반의 공간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작업의 양상에 비하면 4층의 광경은 보다 선형적 관람이 가능하도록 연출되어있다. 류수연과 전예진은 이런 공간적 조건을 강하게 활용하는데, 4층에서 그들의 작업은 보다 내재적으로 레이어링 된다. 요컨대 전예진은 전시된 영상 <꺾인 손가락>을 재료 삼아, 영상에서 크롭한 스틸컷을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끌리도록 내려오는 출력물로 변주하고, 또 그 스틸컷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에 표면으로 덮여 공간적 배경에 직관적으로 조응하는 이미지-오브제의 형태를 빌어 장식적 효과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 한 편 4층에서도 사운드는 공간을 포섭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4층 천장 곳곳에 숨겨진 김동용의 작업은 ‘Hovering공중 정지라는, 전시의 주제 이미지를 무언가 반동을 받아 튕겨 나오는 듯한, 스프링 혹은 트램폴린적 소리-질감을 구현하며 비평한다. 4분 간격의 차이를 두고 여기저기서 튕기듯 들리는 김동용의 <Receiver> 연작은 1층을 (청각 차원에서) 지배하는 서민우의 작업에 대응하는 4층의 배경음악으로, 1층에 설치된 서민우의 작업이 앰비언트-지향의 저음을 구현하며 비교적 넓게 트인 공간을 메워낸다면, 김동용의 <Receiver>는 분할된 4층의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마치 유령처럼 뜬금없는 타이밍에 놀래주듯 등장하여 전시 관람에 재미를 준다. 호버링에서, 거의 용역 혹은 사이드 킥과 비슷한 김동용의 보조적인 쓸모는 무척 두드러지는데, 작가가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한다거나 공간 내의 그리드를 새롭게 구획하거나 허물어 나간다는 둥 비유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전시의 목적을 1차원적인 해석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구현해낼 때, 작업은 직해주의적literalism 성격을 띄면서 유머러스하게 읽힌다.

 

호버링은 많은 작업이 산개하듯 펼쳐지는 전시고 앞뒤가 맞거나 선형적으로 정렬되는 것과는 맞지 않는 전시다. 참여한 작가 수에 비해 전시된 작업의 수도 많을 뿐더러, 1층과 4층이라는 공간의 구분은 전시를 전체적으로 훑어 인상을 형성해내는 것을 막아서기도 한다. 게다가 레이어링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전시가 연출되므로, 전시를 마주하는 관람자의 경험 또한 각자 다를 수 있다. 요컨대 누군가 전시장에 입장해 입장료를 지불하고 작업을 볼 때, 처음 마주하는 작업은 순서상 1번이라 명기된 오연진의 작업일 수도 있고 1층 공간 중간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정완호의 작업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는 가장 눈에 띄는 크기로 늘어진 류수연의 <첫인상>을 전시의 첫인상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호버링은 많은 입구와 다양한 샛길로 연결된 전시지만, 이 전시는 하나의 출구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그 출구는 아마 4층의 가장 안쪽, 서민우와 김동용, 김효재와 지호인의 작업이 걸린 방이 될 것이다.

 

이 방에 입장한 관객은 아마도 가장 먼저 벽에 걸린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6><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을 관람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체리 연작을 관람한 관객은 일단 볼륨이 높은 서민우의 작업과 가까이 있어 크게 들리는 김동용의 작업을 뒤로 한 채 김효재의 <난 마돌: >를 관람하게 될 텐데, <난 마돌: >는 여러 기기에 담겨 전시되고 있지만 해당 영상을 시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어폰을 착용해야만 한다. 허나 이어폰을 끼고 <난 마돌: >를 관람할 때 관객은 집중이 쉽지 않은데, 이것은 <난 마돌: >가 이런 저런 영상 정보와 그래픽 파일을 화면 위로 복잡하게 레이어링하며 비선형적 전개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곁에 위치한 스피커를 통하여 서민우의 작업이 <난 마돌: >가 담긴 기기가 제공하는 최대 음량 이상의 볼륨을 구현하며 청취 조건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아가 이 방에서 <난 마돌: >를 관람하는 일은 순전히 생리적으로 꽤 고통스러운 경험인데, 두 겹의 소리가 높은 볼륨으로 청각을 자극할 뿐 아니라 3분 간격으로 반복되는 김동용의 <Receiver: Over the window>가 예의 트램폴린-사운드를 한 겹 더 겹쳐내므로, 관객은 청각을 중심으로 과부하되는 감각 경험을 하게 되거나 혹은 단순히 귀가 아프게 된다. 이렇게, 호버링의 마침표 역할을 하는 이 방에서, 세 명의 작가들은 모의하듯 협업하며 전시를 어떻게든 잊기 힘든 경험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듯이 관람자의 시청각을 집요하고 세게 자극해낸다. 이토록 심란한 관람을 막 마친 관객이 방 건너편으로 넘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관객은 아마도 지호인의 <코발트 터쿼즈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을 마주치게 될 텐데, 폐허-전시 공간의 퀴퀴한 구석에 매달린 이 명도 높은 예쁜 색채는 관객이 방금 겪은 힘겨운 경험을 진정시켜주고, 나아가 전시 전반에 걸친 어떤 부정적 정서들, 이를테면 유령 시점의 우울함, 청년이 청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무력감 같은 것을 완화하거나, 혹은 내려다본다.

 

다시 호버링의 전제를 살펴보자. 호버링이 염두에 두는 미학적 전략으로서의 폐허가 신생공간이라면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폐허는 여전히 콘크리트가 다 드러낸 2/W라는 공간이다. 나아가 호버링의 서문에서, 기획을 맡은 권시우는 2/W의 과거, 커먼센터라는 전사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미술 공간 커먼센터는 서울에 산개한 여러 작은 전시 공간들이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하나의 미학적 경향으로 호명되기 직전의 시점에 처음 문을 열었는데, 이때 커먼센터는 통인동의 시청각과 함께 젊은 운영자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안-대안 공간처럼 비춰졌고, 실제로 커먼센터에서는 어떤 종류의 젊음을 총체화하여 제시하려는 경향의 전시가 다수 운영되기도 했다. 그것은 젊은 층의 회화 작가들을 69명 끌어 모아 전시를 꾸민 개관전 오늘의 살롱이나 스트레이트 포토를 위주로 작업하는 사진작가들이 참여한 스트레이트 - 한국의 사진가 19, 그리고 기대감소의 시대를 맞은 1인 가구의 생존법을 중심 주제 삼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창작자들을 그러모은 혼자 사는 법, 나아가 단체전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201610, 트위터를 통하여 전개된 미술계 내 성폭력 해쉬태그 운동을 통하여 커먼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던 함영준의 권력형 성범죄가 폭로되며, 그가 그간 관여했던 공간을 통하여 전개해온 활동 또한 폐기 처분되었다. 그렇다면, 호버링이 공간적, 또한 시간적 배경으로써 커먼센터를 지지대 삼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어떤 목표를 노리는 것일까? 이미 무덤이 된 커먼센터를 공간의 전사로서 인용했을 때, 호버링이 설정한 과거의 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렉터 함영준의 관여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커먼센터의 전시 중, 서울에서 젊음을 내세워 새로운 영역을 잠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시로는 이를테면 청춘과 잉여가 있었다. 유능사(최정윤, 안대웅)가 기획하고 김시습, 박희정, 윤율 리가 협력 기획으로 참여한 청춘과 잉여는 짝을 맞추어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를 제시하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의 미술을 각각 관통하는 특정한 주제와 경향을 가시화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젊음-새로움을 과거와 엮어내어 하나의 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시도로서, 청춘과 잉여는 기성 작가에게 불충분한 가능성을 젊은 작가로부터 찾고, 또한 젊은 작가에게 불충분한 역사적 알리바이를 기성 작가를 투입함으로 해결한다. 일이 잘 풀렸을 경우, 이것은 아주 매끄럽고 단단한 몸체를 가진 관점으로써 한국 현대 미술이라는 가상의 타임라인에 효과적으로 진입하여 하나의 이상적 새로움을 부각시켰을 것이다. 허나 청춘과 잉여에서 보였던 젊은 작가와 기성 작가의 구도는 당연 완벽할 수 없었고, 짝지어진 작가들은 종종 서로를 견제하고 불화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어쩌면 이런 마찰이야말로 청춘과 잉여가 염두에 둔 효과였을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세대는 합선될 수 없었고 젊음과 새로움이 관계 맺는 구도를 다시금 되살펴 젊음을 역사의 한 축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성립되지 않았다. 어쩌면 호버링이 겨냥하는 것은 이런 구도에 대한 필요성 자체로, 오늘과 젊음은 너무나도 많이 말해지고 가능할 듯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당사자의 시점을 취해,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가정하여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가 주체로 나서 스스로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현명함일 테다.

 

호버링이 연출하는 레이어링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인식한 채 전시를 관람할 때, 개별 작업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리적으로 작업이 뒤섞여있을뿐더러, 전시의 주제가 작업의 내적 논리와 전개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에 작업은 전시 자체와 여러 차원에서 합선되고 이 합선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때조차 전시와의 연관 관계 안에서 파악된다. 이에 따라 호버링은 작업을 중심으로 꼼꼼이 보더라도 하나의 상황 혹은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 전시가 된다. ‘현자 타임을 보내는 중에 있는 현명한 젊음의 전시이자 하나의 잘 연출된 상황으로서 호버링, 폐허를 보기 지루하지 않도록 메우고자 노심초사하는 웰메이드전시의 업적을 성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모양은 어딘가 무척이나 따분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유령 시점으로 끝맺음 될 수밖에 없는 슬기로움은, 호버링이 복잡한 레이어링을 통해 도달한 곳이 다름 아닌 웰메이드전시의 풍경이듯,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인 방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생각해보자. 젊은이가 유령이 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일까? 사람은 항상 죽지만, 늙은이에 비하여 젊은이는 어떤 통계를 통하여 보아도 항상 현저하게 덜 죽는다.4) 젊은이가 유령이 되어 도달한 저승에서 그는 아마도 수많은 늙은이들이 일종의 선배로서 적층된 광경을 보고 질려버릴 것이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유령 세상에서도 젊은이는 소수자로 남는 셈이고, 제약 안에서 자유롭고자 하더라도 새로운 제약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을 뒤바꿔, 젊은이가 제약의 건설자가 된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청춘과 잉여가 이런 저런 사정을 통해 단행본 메타 유니버스와 느슨하게 연결되면서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을 엿보였듯이, 호버링이 선보인 것들이 이러저러하게 이런 저런 것들과 연결되어 이렇게 저렇게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이 될까? 말이 좋아 유령이지 실상은 하위 주체적 정체성에 가까운 가상의 시점은 폐기되어야 하고, 미완성의 우발적 전시로서 호버링은 폐허를 벗어나야만 한다. 말하자면, 호버링에 복잡하게 걸쳐진 여러 겹의 과거와 상황은 동시에 호버링적 상황이 벗어나야만 하는 일련의 목록이다. 호버링에게는 그런 제약을 전시의 재료로 동원함으로써 구체적으로 가시화한 성과가 있고, 이제 이것은 다른 모습과 형태의 여러 프로젝트들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Lauren Cornell, New Age Thinking, http://mediaspace.newmuseum.org/ytjpressmaterials/PDFS/WHAT_THE_CURATOR_ARE_SAYING/03_Cornell_Essay.pdf

2) 권시우, 「《호버링Hovering전시 서문, http://www.90apt.com/hovering.html

3) 권시우, 공간 인터페이스, ‘압축과 팽창과 김동희의 사례, 계간 시청각, 1(겨울, 2017), 83.

4) 통계청의 2016년 사망원인통계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 수 구성비 중 0-39세의 연령이 차지하는 비율은 3.6%에 지나지 않는다. 자세한 사항은 통계청 2016년 사망원인통계 보도자료참조.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6/2/index.board?bmode=read&bSeq=&aSeq=363268&pageNo=1&rowNum=10&navCount=10&currPg=&sTarget=title&sTxt=

Posted by jipdanochan

시시한 세상의 참된 그림 : 이상훈의 작업에 대하여


황재민

 

이상훈의 평면은 많은 것을 발화한다. 그가 그려내는 각종 도형은 암호와 기호와 정보 사이를 오가며 화면 위로 압착된다. 이 과정에서 그리기와 회화라는 미디엄은 분절되어 다루어지고, 관습과 규칙의 형태로 미디엄을 구성하는 기억 혹은 기준 따위는 쪼개져 화가가 새롭게 리부트해 구축한 시점 아래 ()조망되고 또 정렬된다.

 


<Y TEST>, 2016-2017, Acrylic on stretched pre-sized linen canvas, 78 x 52cm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그러나 한 편, 어떤 회화의 특징을 발화에서 찾는 것은 얼핏 부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지난 시기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법론이 활발히 매체들 사이로 틈입할 때, 전유는 언어가 되었고 확장된 장과 연관되어 펼쳐짐으로써 모더니즘의 한계를 지적했다. “발상이나 기원이 아니라 의미화의 구조2)가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핵심적인 특성이 되면서 회화 또한 메타적 미디어의 차원으로 편입되었고 그 결과 순수한 회화적 평면은 불가능한 이상으로 밀려나와 구태로 남았다. 이제 (말하자면) ‘비순수하게 변질된 회화의 표면은 종종 이미지가 수행하던 기능을 떠안은 무엇으로 이해되고, 그 여러 기능 중 발화 기능 또한 자연스러운 부속이기에, 갱신된 회화의 각종 요소 중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담론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은 어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만약 회화를 이와 같은 모델, 다원화된 미디어 복합체에 기여하는 메타적 형식으로서 파악한다면 이상훈의 그림이 갖는 발화 기능은 작가의 그림에 오로지 특징적인 무엇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편,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난 역사가 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을 가능케 했던, 미술의 전반에 걸쳐 폭발적으로 진행되어 온 확장의 기조 또한 (그것이 무엇이든)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회화 역시 당시 매개되어 가졌던 특징을 일부 잃게 되었다.3) 이제 회화 표면을 담론적 장소삼아 미디어 기능을 수행하던 문화적 방법은 모호하고 흐릿한 것으로 보이고, 회화를 비롯한 미술 매체를 보다 관습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각이 새로이 등장한다. 기호적 지시물 혹은 문화적 매개물이 아니라 인상과 시각적 양식으로서 회화가 다시 관습적으로 이해될 때, 그것은 미적 기술이 도입되는 화면, 나아가 물건으로서 바탕 위에서 표출되는 숨겨진 갈등과 각종 사정 따위를 표면 자체의 저항을 통하여 사라지게끔 한다. 회화의 역할과 작용은 그것이 근거하는 시각적 환경에 따라 유동하고, 그렇다면 이상훈이 회화를 통해 추상적 도상을 마치 설명하듯 전개한다고 해서 그것을 설명이자 발화 행위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일은 잘못일 수 있다. 작가는 시점을 설정하고 규준을 구체화, 법칙을 일반화한 뒤 그것을 정돈된 형태의 도상으로 형상화하지만 그 일은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미적 상황에서 수용자의 위치에 놓이는 누군가의 납득을 위하여 웅변하는 회화-이해-서비스라기보다는 새로이 갱신된 회화의 기능과 담합함으로써 하나의 영역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도를 갖는다.

 

이상훈은 유능사가 기획한 커먼센터에서의 단체전 청춘과 잉여를 통해 처음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청춘과 잉여에서 이상훈은 미디어버스에서 출간한 조영법(造影法) 1: 000-111(2014)을 토대로 책에 실린 다이어그램을 구체화 혹은 각색한 작업을 선보였는데, 당시 전시장에는 내걸린 작업 곁에 책 조영법이 함께 비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적극적으로 관람하고자 하는 관객이라면 책 속 다이어그램과 다이어그램이 전시된 작업물 표면의 정보를 대차대조하며 작가가 연출해놓은 상황을 해석해볼 수 있었다. 조영법은 빛, 윤곽, 그림자, 모양, 또 부피와 같은 요소를 자의적으로 구분, 가시적 대상뿐 아니라 비가시적 대상까지 포괄하는 시각적 인지의 방법을 설명하는 도서로서, 요소가 짝지어지는 경우의 수를 다이어그램 형식으로 설명하면서 회화적 대상이 존재할 수 있는 근본적 조건에 대해 검토해보는, 작가의 비전이 압축된 작업이었다.4) 물론 조영법에 쓰인 공식은 정교한 과학적 서술이라기보다는 작가 개인이 탐구한 결과물을 특정한 시점에 따라 일반화한 지식에 가까웠지만, 전시에서 조영법은 회화에 의해 매개된 방법론적 원천으로써 접근하는 관람자에게 작가의 시점을 주입하는 역할을 했고, 단순한 보조 자료가 아니라 작가의 비전을 수용자로 하여금 납득시키고자 노력하는 적극적인 오브제로 활용됐다.

당시 청춘과 잉여“1980년대 3저 호황을 토대로 문화의 시대를 연 1990년대 청년기대감소의 시대이후 2010년대 중반을 살고 있는 젊은이라는 서로 다른 두 세대를 각기 청춘잉여로 맥락화 했는데,5)청춘으로 설명된 기성 작가와 잉여로 명명된 젊은 작가가 짝으로 묶여 제시되었기 때문에 관객은 기성 작가와 젊은 작가가 보이는 상이한 맥락을 고려하며 전시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전시에서 젊은 작가 이상훈은 기성 작가 박미나와 짝지어지며 당시 미술에 있어 매체의 쓰임과 필요성이 무엇일 수 있을 지에 대해 부연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때 이상훈이 선보인 방법론은 박미나가 회화를 통해 탐구해온 독자적인 영역과 관련되며 오로지 자신이 고안한 규칙을 통해 (관념과 감각적인 것을 포함해) 회화, 아니 이미지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조적으로 재규정해보려는” “전무후무한것으로, 그러므로 어느 정도 고립된 것으로 해석되었다.6) 청춘과 잉여가 당시 미술에 대해 설정한 맥락 안에서, 이상훈의 회화는 서구 모더니스트 회화가 추구했던 정신적 가치에 대하여 얼마간은 패러디의 형식을 통해 접근하며, 6, 70년대 한국 미술의 주먹구구식 형식주의에서 불가능했던 무엇을 진공 상태에서 시도하는 - 3세계적 고립에서 발생하는 역사의 비대칭을 동시대성 이후의 평평한, 탈역사적 시공간에서 재고하고자 하는 실증적 사례로서 다루어졌다.

 

이후 2017, 313아트프로젝트에서 이상훈은 첫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청춘과 잉여이후 약 3년 만에 치러진 개인전에서 작가는 다시 스스로 구축한 설정 아래 단일하게 정렬된 그림을 늘어놓았다. Two Tables라 이름 붙여진 본 전시에서 이상훈의 관심사는 여전히 회화를 구성하는 근본적 조건 및 요소들을 특정하고 분할하여 구체화하는 데에 있었지만, 조영법이 빛과 그림자, 윤곽과 모양 등 다양한 구성 요건을 포괄적으로 고찰함으로써 회화의 존재와 그 조건에 대해 성찰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첫 번째 개인전에서 작가는 색상과 윤곽이라는 두 가지 요소에 대해서 관심을 한정하고 집중했다. 전시에서 회화의 조건, 또 요소로써 색상 그리고 윤곽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작가가 정립한 체계는 채석장이라 명명된 가상적 공간으로 시각화되었는데, 청춘과 잉여에서 이상훈이 시각적 인지의 체계와 회화의 조건에 대한 스스로의 비전을 납득 가능한 무엇으로 제시하기 위해 책 조영법을 일종의 매개물로써 제시했다면 Two Tables에서는 채석장이라는, 비유적이고 무엇보다도 가상적인 공간이 조영법의 역할을 대신하는 듯이 보였다. 당시 조영법이 독립된 실체로서, 하나의 작업으로서 전시된 것에 비해 Two Tables에서 채석장은 어디까지나 작업 뒤편에 전제되어있는 세계관으로 존재했는데, 이 때문에 채석장을 필터 삼아 작업을 재구성하는 방법은 조영법과 비교해보아 조금 더 비가시적이고, 조금 더 암시적이며, 그러므로 조금 더 어려웠다. 이상훈이 구축한 채석장과 그 작동 방식 또 논리 등은 블록 단위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하여 단순하고 직선적인 전개로 형상화됨에도 얼마간은 그와 같았다. 이 때문에 채석장을 구경하려는 작업-수용자와 채석장의 감독관7), 작업-제공자 사이의 이해에는 불일치함에 따른 간극이 발생했고, 어쩌면 작업의 논리를 전제하고 소개하는 상상적 공간으로서 채석장의 쓸모 중 하나는 이런 이해의 틈을 형성하는 것에 있었다.

 


<QUARRY>, 2016-2017, Acrylic on stretched pre-sized canvas, 86 x 140cm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Two Tables에 있어, 채석장은 관람 경험을 좌우하는 필터 역할을 맡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이해의 불일치를 형성함으로써 회화 관습의 조건을 고찰하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관념과 물질의 개념을 매개/연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작가는 채석장이라는 공간을 고안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서 안료의 원형이 결국은 돌가루라고 할 때 어떤 채석장이란 것이 존재 할 수 있겠다는 상상으로부터 출발8)했다고 부연하는데, 작가의 상상을 따라갈 때 (안료의 원형으로서) 돌가루와 (색상의 원형으로서) 선험적 지각은 채석장을 경유해 원형적 형태로 회귀하고 만나 가상적, 나아가 서사적 차원에서 매개되는 셈이다.9) 한 편 이와 같은 접근은 Two Tables, 그리고 그 주요한 주제로 나타난 채석장 내부에 한정된 방법론이 아니라 이상훈이 이끌어온 작업 세계 전반에 연관되는 무엇으로, 작가는 관념적인 무엇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옮기고 나타내고 싶다는 욕망을 회화의 형태를 빌어 표출하는 일에 언제나 주저함이 없기도 하다. 이상훈이 회화의 조건을 일반화하는 식으로 특정한 영역을 설정하고 그것을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마감의 시각적 도상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일면적 이해를 넘어서는 시각 언어에 대한 낡아 사라진 희망과 그것이 차출했던 영속적 가치에 대한 관심 혹은 믿음이 있다.

 

이상훈의 작업을 볼 때, 수용자는 축적된 기술적 노하우를 짐작케 하는 남다른 디테일과 완성도를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하드 엣지 페인팅의 형식을 빌려와 바른 아크릴 물감의 도포 상태를 볼 때에도 의식이 가능하지만 특히 바탕Support10)의 모양을 볼 때 더욱 잘 볼 수 있는데, 이런 구조는 작업의 완성도와 시각적 해상도를 높이는 데에 적극 기여하기도 하지만 나아가 하나의 방법론으로써 회화의 요소를 해체하여 재구성함과 함께 표면의 문제 이상을 지적하기도 한다이를테면 전시의 서문에서, 작가의 작업은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와 조건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빛과 그림자 같은 광학적인 요소나, 색상이나 윤곽과 같은 조형적인 요소들”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포함하지만, 나아가 “서포트를 구성하는 프레임과 캔버스 천 같은 구조적인 요소들 까지도 포괄”11)한다고 평가받는다. 회화에 있어 빛과 그림자, 또한 색상에 이르는 요소들이 표면이 재현적/비재현적 형상을 매개하거나 표상할 때 도드라졌던 주제라면 윤곽을 조형적 차원으로 포섭하고, 또 회화 구조와 관련된 요소로서 프레임과 캔버스 천에 이르는 바탕의 문제를 지적할 때 회화는 표면의 매개물 이상, 측면과 후면까지 포괄하는 온전한 물건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상훈이 영속적 가치에 관심을 갖는 시대착오적 작업을 전개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해석은 역설적인데, 물건은 무엇보다도 회화를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끌어내린 주범으로 악명이 높기 때문이다.

 

작가는 종종 작업의 논리를 풀이하며 유클리드 기하학 혹은 관념적 색상 체계와 같은 지당한 옛 지식을 인용하곤 하는데, 이것은 회화를 규준화하여 나눌 수 있는 미술의 참된 표본 같은 것으로 상정하고 그 표본을 개념적/물질적으로 탐구함으로써 특정한 가치를 생산하고자 하는, (필연적으로 회화를 옛 지식 체계 중 하나로 상정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작업 세계를 정당화하는 일과 관련되는 듯 보인다. 비판적 담론과 개념적 장소로서 기능했던 미술이 한때 형성했던 연결이 와해되고 유의미한 지식 체계가 재설정 되는 때와 맞물려, 이상훈은 작업이 비롯하는 배경의 소실점을 흐릿해질 때까지 뒤편으로 잡아당겨 해석이 어려운 블랙박스를 구축한다. 향하는 목표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 가상의 소실점은 기실 지난 시기 미래라고 호명되었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차후의 시간에 대한 기대가 공통 감각으로 잔존하며 창작의 동력으로 작용했던, 관념 형태 혹은 시대감각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는다. 특정하기 어려운 앎의 배경이 감각과 함께 변화할 때, 소실점을 잃어버린 개인이 가상적 상황을 재구축한 뒤 그것을 외피 삼는 것은 창작의 한 방법론이자 수신守身을 위한 방책이기도 한데, 이를테면 기고가 노정태는 문득 시시한 곳으로 전락해버린 어제-오늘에 대해 감각 차원의 무기력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게 된 개인을 둘러싸는 배경을 탄탈로스적 부조리라고 비유한 적이 있다.12) 그에 따르면, ‘탄탈로스적 부조리에 시달리는 탄탈로스적 주체는 주어진 상황을 긍정하고 새로운 종류의 인식론을 발명하기 위하여 원초적 형태의 사회화 과정으로써 모방 개념을 전용轉用해 소실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때 드리워지는 소실점의 종류는 역사적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의 예수처럼13), 적극적 오해와 논리적 추상화를 통해 신성함에 버금가는 내면적 깊이를 가상적으로 구현할수록 좋다. 빗대자면 이상훈은 회화의 형태를 경유하여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하고 반응하는 셈으로, 작가의 블랙박스 안에서 가상적 소실점은 모더니스트 회화의 내적 구조와 논리를 모방 및 재정의하여 등장하되 물건이라는 몸체를 직시하고 긍정하면서 회화를 둘러싼 여러 견해와 서사를 재설정하고, 이를 통하여 임의적 세계관을 형성한 뒤 가능 공간을 확보한다.

 

다시 이상훈의 회화를 회화, 아니 이미지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구조적으로 재규정해 보려는14) 시도로 돌아본다면, 이때 역시 작가의 회화는 특정한 미디엄이라기보다는 문화 구조 내의 이미지에 가까운 것으로, 그 중에서도 형식주의와 관련한 담론적 은유로 표상되었던 셈이지만, 이제 회화의 역할은 담론을 은유하기보다는 관습을 은유하는 일에 더욱 가까워보인다. 담론이 표면의 영역에 한정되는 무엇이라면 관습은 손기술에 의하여 매개되고 나아가 물건의 영역을 점유하기도 한다. 실상 표면은 이제 더 이상 주요한 화두가 아니고, 몇몇 작가들은 측면과 후면을 표면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서 부각함을 통해 회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이끈다.15) 관습이 주요한 층위로 활용되면서 매체는 미지의 외부를 매개하려는 확장된 장이 아니라 형태와는 상관없이 추상적 역사를 대표하는 연속체로 이해되고, 그에 따라 다층적 장소를 설정하더라도 더 이상 흥미롭지 못한 외부를 지향하기보다는 매체 내부의 논리로 수렴한다.

 

Two Tables의 전시 서문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 작업자이자, 연구자이며, 설계자이기도 한 어느 감독관의 작업대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작가의 현재에 대한 관객의 질문이자, 회화의 미래에 대한 작가의 답변일 것이다.”16)

 

그러나 이상훈의 작업은 회화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보여준다기보다는, 회화와 미래라는 각기 다른 개념을 재정의하는 일에 더욱 가까이 관여하는 듯 보인다. 회화에 대하여 탐구하고, 탐구한 결과를 재구성하고, 재구성한 요소를 통하여 논리를 설정하고, 설정한 논리를 기반으로 가상적 소실점을 형성하고, 또 이 전반적 과정을 통하여 제시할 만한 세계관을 구축하는 동안, 이상훈의 방법론은 점차 구체적으로 분절되어 조금 더 특정한 세부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첫 번째 개인전이었던 Two Tables에서 작가가 다룬 것이 색상과 윤곽의 문제였다면, 이제 또 어떤 문제와 요소가 고찰의 대상으로 나타나게 될까? 빛과 그림자, 또 모양과 부피에서 이르기까지 작가가 이전에 회화의 근본적 조건으로 제시한 요소들이 여전히 세분되지 않고 남아있긴 하지만, 회화 매체가 갖추고 나타내는 것들이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기에 이상훈의 회화가 포괄하고 탐구하게 될 새로운 영역 또한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남아있다. 이를테면, 회화-물건 나아가 서포트-조각처럼 보이는 어제-오늘 회화의 형태를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과 시점을 통하여 재해석할 때, 그것은 어떤 양상으로 분절될 것이며 그 표면의 모양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게 될까? 혹은 사그라진 미래와 오늘을 침범한 어제라는 뒤틀린 시간 감각과 그에 매개된 시각성의 문제는 회화의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특정될 수 있을까? 만약 특정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처럼 몇 가지 관습적 문제가 새로이 등장하기에 회화는 여전히 흥미로운 미적 물건이자 미적 상황일 수 있는 것이고, 회화에 기반을 두는 이상훈의 작업 또한 자연스럽게 그런 관심과 함께 한다.


1) ‘시시한 세상’이라는 표현은 노정태의 글로부터 영향 받았다. 노정태, 『탄탈로스의 신화』(워크룸 프레스, 2016), 194쪽. 

2) Douglas Crimp, 「Pictures」,『October, Vol. 8』(Spring, 1979), 87쪽. 

3) 할 포스터는 저서 <콤플렉스>에서 후기 모더니즘 회화의 환영성을 내파한 역사적 사례로 여겨진 미니멀리즘 미학이 실은 환영성을 내재하 고 있었으며, 그것이 ‘조각적인 것’, 또 ‘회화적인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확장에의 의지와 맞물리며 스펙터클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을 지 적한다. 또 그는 후기 자본주의 미술관이 제공하는, 건축 차원에서의 미적 경험이 미니멀리즘 미학에 영향 받아 전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이때 이 ‘미니멀리즘적인 것’은 미술관 건축이 상징하는 ‘모더니즘적인 것’과 혼동되며 결과적으로 얄팍해진다. 여기서 모더니즘 적인 것과 미니멀리즘적인 것의 혼동은 매체의 확장(좋은 시절)과 미술관의 확장(만악의 근원)의 교차를 시사하고, 이 두 가지 사실은 서로 겹쳐 보이며 좋은 확장이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듯하다. 할 포스터,『콤플렉스』(현실문화, 2014), 김정혜 옮김, 197-198쪽, 330-331쪽. 

4) 최정윤, 「조영법의 해제」. https://mediabus.org/1-000-111 

5) 《청춘과 잉여》전시 서문, https://neolook.com/archives/20141120e 

6) 안대웅, 「《청춘과 잉여》기획노트」,『메타 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미디어버스, 2015), 윤율리 편집, 274쪽. 

7) 《Two Tables》전시 서문,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8)《Two Tables》전시 서문 주석에서 참조. 전시를 기록한 313아트프로젝트의 웹페이지에는 주석이 나와 있지 않다. 

9) 그러나 『조영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체계는 여전히 엄밀하지 않다. 옐로우 펜 클럽에 포스팅된 루크의 글「: 채석 장과 컨베이어벨트」에 따르면, “삼원색인 빨강, 노랑, 파랑을 1:1:1로 혼합하면 검정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 법칙으로 인식되는 익숙한 공식 이지만, 실제의 염료 PR과 PY와 PB를 섞으면 어두운 갈회색이 될 뿐 완전한 PBk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루크의 글에 의하면, 전시에서 색채는 도상이 나타내는 시각적 엄밀함에 비해 자의적으로 다루어지며, 이와 같은 자의성을 은폐하는 레디메이드 지향의 화면은 근대적 이 성 주체의 시점을 환기시키며 관객에게 압박감을 선사한다. 루크, 「: 채석장과 컨베이어벨트」 http://yellowpenclub.com/looc/twotables/ 

10) ‘바탕’은 대리석, 나무, 청동, 캔버스 등 미술 작품의 제작에 필요한 기초 재료를 지칭하는 ‘서포트Support’의 이상훈식 번역어이다. 바탕의 구조는 작업 제작에 있어 작가가 기술적으로 항시 관심을 표하는 요소이기도 한데, 작가는 2015년과 2017년, 두 차례에 걸쳐 「단단한 바 탕」이라는 제목으로 바탕의 조직에 대한 강연을 한 적도 있었다. 「단단한 바탕」은 캔버스 천과 회화 프레임, 각종 물감의 종류 그리고 장단점 및 자재별 특성, 나아가 구입처와 브랜드 별 가격에 이르기까지 회화 바탕의 각 요소를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실용 적 성격의 강연이었다. 

11) 《Two Tables》전시 서문,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12) 『오뒷세이아』에 등장하는 인물인 탄탈로스는 저승에서 영원히 충족할 수 없는 허기와 해갈할 수 없는 갈증의 형벌을 받는다. 그의 벌에 있어 중요한 것은 물과 먹을 것이 가까이 있어 볼 수는 있어도 가지려는 순간 그것들이 달아나기 때문에 손 댈 수는 없다는 점에 있는데, 노정태는 ‘진짜-진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어도, 그 ‘진짜-진짜’를 가능하게 했던 경험적 배경이 모두 쇠퇴했기에 ‘가짜-진짜’ 혹은 ‘진짜- 가짜’ 사이에서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경험 세계를 이 ‘탄탈로스의 신화’에 비유한다. 노정태, 『탄탈로스의 신화』(워크룸 프레스, 2016), 198쪽. 

13) 위의 책, 179쪽. 

14) 안대웅, 「《청춘과 잉여》기획노트」,『메타 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미디어버스, 2015), 윤율리 편집, 274쪽. 

15) 이와 같은 경향에 대해서는 한국의 몇몇 젊은 작가들을 거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환희는 거칠게 발린 붓질을 가다듬지 않고 남겨놓음 으로서 표면 위로 불거져 나오는 입체성을 찾아낸다. 이 붓질은 종종 의도적으로 조작/후가공 됨으로서 마치 표면에 달라붙은 조각처럼 보 이는 과장된 질감을 만들어내는데, 이환희는 이런 질감에 특정성을 부여하고 나아가 회화를 구성하는 방법론을 조각 작업과 같은 채널에서 운영함으로서 회화를 조각의 맥락에, 또 조각을 회화의 맥락에 교차시키곤 한다. 한 편, 정홍식은 회화 바탕 위로 색을 입히는 행위를 ‘도색’ 이라고 표현하는 등, 프라모델 제작의 은유를 표면에 적용시키며 회화와 서브컬처 기반의 레디메이드 물건을 동등한 차원의 미적 사물로 엮 어내는데, 2017년의 개인전 《Re-Roll》에서 정홍식은 모더니스트 회화와 미니멀리스트 조각의 역사적 양식을 포괄적으로 인용하면서 새로 운 세대의 시점에서 회화-물건의 위치와 맥락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찰한 작업을 선보였다. 또 김미래의 경우, 작가의 주관적 시점에서 형성된 추상적 이미지 형태를 회화 표면 위로 전사하는 작업을 전개하지만, 해당 이미지는 표면 위에 납작하게 압착되며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 오히려 측면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이환희의 작업은 작가의 웹페이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http://fanheelee.com/works.html) 김미래의 개인전 정보는 네오룩에 아카이브 되어 있 다. (https://www.neolook.com/archives/20170902g) 

16) 《Two Tables》전시 서문, http://www.313artproject.com/exhibition/past-exhibition/2017-exhibition/sanghoon-lee-solo-exhibition-two-tables/

Posted by jipdanochan

미술은 취미가 되어야 하는가? "<취미관>이라는 4주의 시간"1)을 향한 에세이


황재민

 

마포구에 위치한 예술 공간 취미가에서 4주간 진행된 <취미관>은 변칙적 성격을 갖는 전시장으로서 때에 따라 갤러리, 그리고 아트샵이라는 이중적 자세를 취하는 취미가의 운영을 압축/확장하여 제시한 행사/전시였다. 총 서른하나의 작가 및 단체가 참가한 이 전시는 머릿수로 보자면 대규모 기획전을 방불케 하였으나 디스플레이된 모양새는 그렇지 않았다. 보통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는 취미가의 2층은 큰 규모의 전시를 하기에 좁은 공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참여한 작가들은 본인의 작업을 출품하기 위해 정해진 크기의 유리케이스를 배당 받았다. 작가들에게 주어진 공간은 해당 상자의 사이즈로 정해졌고, 작가들은 그곳을 꾸미고 활용하면 되었다. 이처럼 <취미관>이라는 정리 정돈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게 규모와 별로 관련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결국 <취미관>은 무언가를 전시하고 경험하도록 이끄는 일인 동시에, 대안적인 종류의 미술 생산과 소비를 위한 장소이자 무엇보다도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취미가가 유리케이스를 활용한 데에는 비교적 협소한 공간에서 최대의 공간을 쓰기 위한 이유도 있겠지만, 그에 앞서 이것은 미술을 보다 쉽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행사고 유리케이스는 그런 상점의 느낌을 내기에 적격이다. 이 디스플레이는 하나의 비유를 끌어안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 서브컬처 중고물품 상점인 만다라케와 아키하바라 일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렌탈케이스’“2)이다. 취미가가 취미관을 광고하기 위해 쓴 트윗을 직접 인용하자면,

 

중고 상품 유통이 주 업무인 만다라케는 시간을 관장하는 회사라는 목표로 사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떤 물건의 가치가 결정되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달하기까지는 적절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만다라케는 그 시간을 관리하고 있는 셈입니다.

2004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일본관에서는 오타쿠를 특정 인간 군상이 아닌 공간으로 정의하고, 도시와 오타쿠라는 공간의 변화를 함께 탐구했습니다. 아키바 거리의 렌탈케이스를 오타쿠의 방이 선택, 편집, 축소, 밀집, 전시된 풍경으로 설명했습니다.“3)

 

시간을 관리하는 중고상품 유통 전문회사로서 만다라케가 렌탈케이스를 활용하는 방법, 2004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의 일본관에서 도시 공간과 오타쿠의 관계를 살피며 아키바 거리의 렌탈케이스를 차용해 쓴 것, 취미가는 이 두 사례를 끌어다 놓고 시간에 대한 해설을 정당화한다. 만다라케의 유리 혹은 아크릴 상자가 중고 상품의 적절한 배치와 관리를 위하여 시간을 진공 포장하듯, 2004년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일본관의 디스플레이 중 일부가 유리 케이스를 공간 경험의 집약으로서 사용하듯, <취미관>은 밖으로부터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상자 안에 미적/일상적 물건을 배열한다는 주제가 물건을 관람하는 일 이상이 되도록 조율한다.

 

전시에 참여한 서른하나의 작가/단체 모두 유리 케이스를 각자의 목적으로 사용한다. 이 목적은 작업의 부산물을 전시하는 경우, 도록 등 전시의 부산물을 전시하는 경우, 작업의 다른 차원으로서 굿즈를 유용하는 경우, 유리케이스를 전시장으로 삼는 경우, 제품을 판매하는 경우 등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상자 안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부각되는 것은 파편으로서의 쓸모다. 서울의 미술이 빈곤과 기회를 미디엄으로 삼았을 때, 그 중 가장 주요한 방법은 시간을 덩어리째 제시하는 것, 그리고 작업의 부산물 혹은 파생물을 병렬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미디엄의 파편화, 비평적 시선을 회피하려는 노력으로 작용했다. 미술 공간으로서 취미가는, 폐허 위에 하나의 스킨을 덮어씌워 환경디자인4)이 되었던 서울의 젊은 미술 위에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자생하려는 시도이자 무화되고 있는 경험에 맞서 조각난 전시 환경을 재구축하고 친밀한 관객을 만드려는 비판적 시도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 그것은 유리 상자로 상징되듯, 지나간 시간의 보존이다.

 

유리 상자 안에서, 보다 활기찬 지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쇠하지 않은 동력으로서 어제를 담으려는 행위와 맞부딪친다. 그리고 이렇듯 모순적인 상황은 그 어제의 대표적 본보기로서 신생공간의 과거와 현재를 연상토록 만든다. 신생공간이 무언가 기반이 되기 전에 힘이 없어진 것은 그 이후가 적절하게 형성되지 못했다는 사실과 어울려 더욱 뒷맛이 썼다. 신생공간의 시공간이 지나간 뒤엔 세대 차원의 이후도 없었을 뿐더러 해당 시공간의 주역들에게도 특별한 이후가 주어지지 않았고,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서울 바벨> 이래 국공립기관에서도 별 일이 없었다. 그 이후엔 단지 몇몇 공간만이 문을 닫고 다른 일을 하러 갔고, 서울이 이전보다 좀 더 좁아졌을 뿐이다. 신생공간의 시기에 주요한 비판 중 하나였던 작업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 또한 단단한 줄기로 엮이지 못하고 흩어졌고, 그 결과 어딘가 애매한 시간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 때문에 취미가는 여전히 제도의 패러디5)처럼 보이고 그 점이 여전히 흥미롭게 또는 좋지 않게 여겨진다. <취미관>이라는 표현은 미술관의 특정 대척점을 자처하고, “취미가미술가개념의 어떤 파열을 자처한다. 이렇기에 위의 연결이 어느 정도 패러디로 작용하는 셈인데, 이 패러디엔 여전히 원본을 지시하거나 참조해 유의미한 맥락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없고, 이것은 분명 이상한 것인 동시에 - 지금의 맥락을 통해 따졌을 때 합리적이기도 하다. 어찌되었든 생긴 것만 반질하지 폐허 내지 나아가 유령6)인 미술관을 향해 맹공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전리품이 거의 없을뿐더러, 나쁜 경우 때리고 싫어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을 때 거울을 통하여 보이는 것 역시 폐허일 것이고, 그 때문에라도 거울은 없는 편이 낫다. 그러므로 <취미관>에서 보이는 것은 순진하거나 들뜬 마음이 아니라 그것보다는 조금 더 사려 깊은 성질의 무엇으로, 제스처로 치자면 어깨 으쓱 Shrug’ 정도로 보여도 여전히 표정은 진지한 것이다. 그래서 <취미관>에서 엿볼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무엇인데, 폐허로서의 폐허와 유령으로서의 제도가 개념적 차원에서조차 더 멀어지기 전에, 차라리 폐허가 제도로 뛰어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우여곡절인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보고 이미 확정된 구획을 공고히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 막상 이 곳은 너무나도 근육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런 지적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소위 신생공간, 혹은 개 중 몇몇 공간의 이상과 기성 제도의 이상은 다양한 노력이 있었음에도 드문드문한 접점을 몇 남기고 서로 동떨어지게 되었으며, <취미관>은 결국 어떤 종류의 제도, 그러나 제도가 될 수 없는 것, 그러므로 특정한 에너지를 길어 올리기 위하여 행사 혹은 축제가 되어야 하는 상황을 실연한다. <취미관>의 참여 작가 목록은 그것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인데, 홍승혜부터 우주 만물까지, 이제 그냥-모이는 것으로는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을 위하여 테두리는 넓고 커진다. 혹은 돌발적인 시간에게도 시간의 선형적 힘은 주어진다.

 

미술이 취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취미가 되고자 자처하는 미술의 사정은 별로 간단하지 않다. 허나 동시에, 이제 미술을 한다는 것이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울에서 살아남기정도로 보이더라도, 서울을 전시 경험에 비등하는 무엇으로 포섭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미술이 미적/일상적 경험의 한 축을 돌출시켜 취미가 된다 해도 오히려 취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 <취미관>이라는 광경은 서로 편안하고 사이좋게 보일까? 예쁘고 귀엽고 신경 쓰이는 것들로 가득 찬 유리 상자가 이른바 병신미의 수동-공격적인 성격과 얼마나 멀든 또 얼마나 가깝든, 취미가, 그리고 <취미관>취미라는 명명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무쓸모하고 무의미한 무엇의 미학화와 관련 있다. 좋게 보아 이것은 훌륭한 자산으로서의 평온함을 암시하지만 여기서 무엇이 나오게 될지는 결국 시간의 큰 힘에 의지하는 측면이 있어, 어딘가 보는 이를 꾸준히 불안하게끔 만드는 면 또한 있다. <취미관>에선 이런 상반된 감상이 계속해서 공존하고, 그것을 빌어 유리 상자에 가지런한 시공은 종합을 빗겨간다


1) 취미가 공식 계정 트윗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33468060692481

2) 취미가 공식 계정 트윗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24974079197184

3) 취미가 공식 계정 트윗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27247521931265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916231380769546240

4) 윤원화, <환경 디자인 또는 신생공간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 프레스, 157p.

5) "그래서 이들의 활동은 유령화된 제도의 불충분한 대체물로서 제도의 그림자처럼, 때로 심지어 패러디처럼 보인다.“ 윤원화, 위의 책, 158-9p.

6) 윤원화, 위의 책, 158-9p.

Posted by jipdanochan

이환희 개인전 <Gambit> 리뷰


황재민

 

이환희 개인전 <Gambit> 전시 전경 (http://fanheelee.com/works.html)


이환희는 활용하는 매체의 한계나 법칙에 몰두하는 종류의 작가다. 이전 세기의 추상 미술에 있어 추상을 하나의 매체로 정의하고 법칙을 재설정하는 행위는 추상의 궁극적 형태를 위한 비평적 소실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평면성이라고 정의내리고 설명한 그 소실점은 추상 미술의 역사에 있어 제약이자 동력이었고 지지를 받은 만큼 비판/극복되었다. 지금도 그린버그의 평론 활동은 추상 미술이라는 매체에 대한 논평 중 가장 인상깊은 것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환희가 추상을 전개하며 사용하는 몰두는 이미 지나간 개념을 굳이 재활용하는 듯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환희의 실험은 어떤 비평적 개념이 아닌 전혀 다른 소실점을 향하고,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적 매체의 지난 역사가 제안하는 요구들을 그림에 쓰이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지침으로 오용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재활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동시대성의 시대에 포스트-프로덕션의 논리와 구조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이 부여하는 형식적 틀과 겹쳐지며 발생한 미적 미디엄의 추상화는 경험의 영역에 힘을 싣는 것으로 전시 공간에서의 미학적 행위를 다시 썼다. 사물과 이미지, 그리고 그 속에 집적된 세계 혹은 그냥 환경을 기호화하여 조작하는 행위가 지배적이었던 지난 시기의 미술에서 자연스럽게 미술의 수공예적 속성은 퇴색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수공예적 기반을 가졌던 전통적 매체, 특히 조각과 회화는 과거의 역사와 단절되었고 보통 이미지나 담론을 투사하는 장으로서 다시 읽혔다. 그러나 사물이 세계를 압축하거나 상징한다는 생각이 점점 무딘 것으로 닳아감에 따라 이제 껍데기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이, 전통적 매체에게는 어째서 매체인가?’라는 질문이 갑작스럽게 주어졌다.

이런 질문의 배경엔 컨템포러리 아트의 유효성이 다한 때와 초 단위로 축적되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역사를 평면화하기 시작한 때와의 공교로운 만남이 있고, 그 때문에 껍데기의 효용에 대한 고민은 시각성의 변환을 추적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이유를 갖지만 그만큼 좀 난처한 것 또한 된다. 시각성과 얽힌 큰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들이 드문 반면 전통적 매체는 그것이 갖는 불시착한 느낌, 시간과의 서먹함을 해명하라는 요구에 갑작스레 직면한다. 이와 같은 과도기에서는 매체의 법칙이나 역사를 비평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 반면 관습적 차원에서 손과 눈을 통해 해결되는 문제 또한 있고, 이환희가 두 번째 개인전 <Gambit>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 또한 어쩌면 이런 중첩과 관련이 있다.

 

<Gambit>의 첫 번째 작업은 <Katana>라는 이름으로, 이것은 폴리우레탄 고무와 레진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조각이다. 제목을 따라서 바라보자면 카타나’, 무언가 검의 형상을 시각화한 것인가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검에게 베어진 단면에 대한 생각도 떠오르지만, 전시장을 둘러볼수록 진입과 동시에 만나게 되는 이 조각이 거친 표면의 질감을 유사-캔버스의 형태로 보여줌으로 회화적 평면과 조각에 관한 농담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 순서를 따르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작은 화면들(<Cure>, <Call It Gala>)은 붓질과 화면의 구획, 알키드 레진의 도포 따위를 통해 장식적 화면을 만들고 그것은 법칙과 역사, 한계와 전통이 교차하는 이상한 논리의 장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아마 그때 관객은 스스로가 매체 양식의 게임장으로 입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어 캐스팅된 알루미늄 조각(<Plaster>)울 지나치면 전시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큰 회화인 <Gala>가 보이는데, 처음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터치로 메워진 중앙 양측 화면에서 작가가 물질성을 구현하는 방식에 시선이 끌리지만, 뒤로 물러나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다 보면 알키드 레진과 물감이 교차되어 발린 화면 상단의 구획으로 눈이 향하고, 이어 그 구획을 캔버스 하단의 구획과 대조하여 보게 된다. 상단의 것이 물감과 알키드로, 또 평평한 면과 물감이 뭉친 입체적인 면으로 잘게 나뉘는 반면 하단의 것은 세 부분으로 조용하고 크게 나뉘어 대비되는 느낌을 주고, 이런 상단과 하단의 비교는 같은 화면 안에서 병치되며 통일성을 방해하는 데 쓰인다. 또 중앙 화면의 붓질이 만드는 격렬한 효과를 따라 <Gala>를 다시 보면 붓질의 이상한 사용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림 상단부 점점이 발려서 길게 늘어지는 붓질과 그와 달리 둔하게 뭉쳐 이어지는 하단부의 물감이 마치 어떤 테두리처럼 보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모양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물감을 뭉개거나 평평하게 바르지 않고 쌓고 집적시켜 입체를 형성, 결국 어딘가 조각적인 효과를 주는 붓질의 이런 사용은 <Gala>를 비롯한 작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데, 이에 따라 매체의 관습에 대한 비평은 평면 위로 입체를 쌓아올리는 것과 교차하여 펼쳐진다. 평면 위에서 전개되는 이런 적층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매체를 같은 층위로 포섭하면서 매체의 법칙 - 습관적 역사라는 차원에 대해 하나의 논평으로 작동한다.

 

붓자국을 조각화하는 것, 우연적 감흥을 조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러한 충동을 일으키리라 짐작되는 기법을 시늉하는 것, 이렇게 무언가 통제되는 느낌은 그림에 비평적 효과를 투여하기에 주요한데, 이런 감상은 이어지는 회화를 보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Reverse Sweep>으로 시작하여 <Certainty of Yours and Mine>를 거쳐 <Ancient Chinese Maneuver>로 마감되는 전시장의 한 쪽 구석은 마치 그런 종류의 회화적 논평을 드러내는 전시장 속 전시장으로 쓰이는 듯 보이기도 한다. <Reverse Sweep><Gala>에서 사용된 날카로운 터치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한 편 화면에 양식적 구성을 집어넣는 식으로 그게 우연성이나 암묵지의 숙련된 아름다움에 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Certainty of Yours and Mine>는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화폭을 따라 격렬한 구성을 만들지만, 실상 그 곳에서 작가가 보이는 화면은 어딘가 악랄한 연극의 무대에 가깝다. 화면 중앙 빈 캔버스를 연기하고 있는 물감의 밀린 자국과 그 주위를 폭발적으로 에워싸는 붓자국 혹은 울퉁불퉁 패인 매스는 잠깐 보면 어떤 감정을 자아내려는 듯 보이지만, 물감의 위와 사이사이 틈새로 도포된 폴리우레탄 고무의 사용은 그 폭발이 세심하게 꾸며진 결과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 결국 그림을 통해 뜨거운감정을 자아내려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이제 여기서 찾아볼 수 없는 무엇이라고 잘라내는 것이다.

 

<Gambit>에서 화폭의 가로 길이는 종종 비평적 용도로 이용된다. 이것은 앞선 <Certainty of Yours and Mine>에서도 보이는 사례지만 <Lancer>의 경우 가로 길이는 마치 각자 다른 평면의 연결처럼 꾸며지면서 실험적 효과를 배가한다. 작가는 <Lancer>에서 물감과 알키드 레진을 바르고 밀어내는 식으로 평면을 구획하기도 하고 모티브를 반복하기도, 또 붓질을 전시하며 단순히 색채나 재료의 사용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어 볼 수 있는 <Marauder>에서, 관객은 모노크롬 풍의 색채가 지배적인 전시장에서 예외적인 색의 사용을 구경할 수 있고, 또 젊은 작가의 (때 이른) 자기복제에 대해서도 농담 같은 단편을 찾아볼 수 있다. <Marauder>의 상단 중앙 작게 도포된 살색 물감은 이환희의 지난 개인전 <Fanhee Lee Solo Exhibition>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던 색채이며, 또 그 위, 좀 더 작은 물감 혹은 입체는 작가의 이전 작업인 <Gargoyles>를 연상토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Marauder>에서 드러나는 자기복제적 경향에 대한 유희는 이환희가 한때 작업을 만드는 방법론에 이름 붙이고 사용했던 클라우드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Gambit>에서 잠시 얼굴을 내미는 이런 흔적, 기억의 미니어쳐는 실존하지 않는 클라우드의 데이터 센터로부터 저장된 모티브를 다운로드하여 사용하면서, 유사-알고리즘으로서의 작가가 스스로의 선택을 어떻게 제어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돌이켜보도록 만든다. 모티브의 사용을 두고 보았을 때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과 첫 번째 개인전은 <Marauder>에서의 농담을 통하여 연결되지만 그 고리는 무척 가늘고, 가상적 클라우드의 임의적인 운용을 통하여 이환희는 어느 정도 전반적인 작업을 동기화시켜 사용하지만 알고리즘을 운용하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자의성을 띈다.

 

<Marauder>를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공간으로 넘어가면, 우선은 조각인 <Mediocre Porn>에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다. <Gambit>에서 사용된 조각들, <Mediocre Porn>을 비롯해 <Katana><Plaster>, 그리고 <Understatement><Portrait Of A Website Recently Bought>에 이르기까지 - 이번 개인전에 전시된 이환희의 조각은 어딘가 빈 공간에 놓여 매스의 재미를 주며 아이캔디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할을 맡기 위해 덩어리는 표면을 지탱하는 용도로 쓰이고, 그에 따라 3차원을 배신하고 평면적 효과를 띄는데, 이는 캔버스 평면 위에서 물감이 입체적으로 쌓아지며 만드는 덩어리진 느낌과 조각의 매스 위에서 크게 덧칠되고 말라 오히려 회화적인 감상을 주는 표면을 다시 조각과 회화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매체 사이로 꿰맞추면서 아이러니컬한 교차를 만들어낸다.

<Mural Pattern>은 색채라는 측면에서 가장 예외적이고 또 아름답다. 이환희는 마냥 균일하거나 평평하게 색을 바르지 않고 언제나 돌출되고 튀어나오도록 물감을 사용하므로 색채에 집중할 때에도 보는 즐거움은 입체적이다. <Mural Pattern>과 더불어 걸린 두 점의 대형 회화(<Booty Calls>, <Redemption>) 또한 구획을 나눈 뒤 그것을 의도와 비의도가 맞닥뜨리는 순간으로 연출하고, 이런 연출을 감독하기 위해서 작가는 물감을 일그러지게 바르고 쌓는 붓질을 계획한다. 이 같은 붓질은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만지고 따져보는 즐거움을 주고, 즐거움이 회화의 크기와 결부되면서 <Booty Calls>에서 <Redemption>을 거쳐 <Mural Pattern>으로 끝나는 이 라인은 작가의 그림이 갖는 수공예적 속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구간으로 작동한다.

전시에서 <Portrait Of A Website Recently Bought>이 유일한 구작으로서 구석에 격리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전시의 실질적인 마침표는 <A Gun Girl><Saucy>의 담당인 듯 하다. 두 그림은 전부 비재현적 이미지를 나타냄으로 시각적, 또 청각적 효과를 갖는데, <A Gun Girl>이 연필선으로 그려진 주제를 붓터치로 재연/확장하면서 앰비언트적인 효과를 만든다면 <Saucy>는 모티브의 반복을 통해서 비트를 형성하고, 이것은 동일한 모티브의 확장 가능성을 점치게끔 한다. 말하자면 이환희의 개인전은 이라는 자막으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 다음 시간에 계속...’ 같은 걸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이환희 개인전 <Gambit> 전시 전경 (http://fanheelee.com/works.html)

 

이환희는 대체로 하나하나의 작업에 대해서 세세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게 만들어진 복잡한 화면 구성을 통하여 작업에 대한 분석적 시선 - 그림을 붙잡고 따져보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시선을 요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화면은 그 자체로 작품의 질quality 개념에 대한 논평이 된다. 다만 이전에 질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대개 예술의 존재에 관한 감동이나 감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있었다면 지금은 어디로 어떻게 향하든 현타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현타로 상징되는 감정적 불능의 상태는 그 자체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상에 대한 인식으로 활용되기에 흥미로운데, 이환희의 회화적 시뮬레이션 혹은 조각적 붓질은 매체의 관습과 법칙을 재료 삼는 메타적 성질을 가짐과 동시에 작업에 캐릭터를 부여하는 표현적 충동을 기술적 지지체개념으로 활용하면서, 이런 세계상을 반영하는 만큼 또 우회한다.

 

이환희는 작업을 구상하는 이런 저런 모티브를 가상의 데이터 센터에 아카이빙한 뒤 클라우드 컴퓨팅의 논리를 실험하고, 이 과정에서 알고리즘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수공예 기술을 기능적으로 장착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꿈꾸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빗댐은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어찌 보면 제시된 조건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작업의 몸통으로 삼 방법론의 확장/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작가가 근거하는 조건은 현실의 온전한 일부를 가장하지 않고, 클라우드가 개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를 데이터 센터의 데이터로 이동시켜 공유하는 것처럼 현실의 일부 또한 직접적으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 차원에서 구조화된다는 점이 다를 따름이다. 세계는 이제 게임 엔진의 물리 법칙으로 구성되듯이 온전한 파악과 수정이 가능한 자족적 모양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특정 역사의 추상적인 복제를 허용한다.

 

현재 많은 이들이 역사적 매체에 대해 말하면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매체 자체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회화와 조각은 꾸준히 만들어졌고 꾸준히 사용되어 왔으며, 꾸준히 존재해왔기 때문에, 매체를 갑작스레 새로운 것들을 반영하는 예외적 현상처럼 다루려는 것 자체가 호들갑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적 매체들이 스스로를 유효한 미적 미디엄으로 재-정체화하려고 시도할 때, 오히려 그것은 단단한 역사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역설이 있다. 특히 비교적 젊은 한국의 작가들은 오래된 매체 형식을 통하여 작업을 전개할 때 구체적 역사를 선별하여 지시하는 대신 모호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큰 틀로서 다루고, 이런 모습은 스스로를 빈 공간으로부터 일으켜 세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의 일부를 쪼개 특정성을 부여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엄을 개발하거나 발견하는 일 자체가 무효화된 시점에서, 매체의 널리 알려진 지속성은 오히려 은유적인 속성을 갖고 단절의 매력은 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환희가 작업 세계를 설명할 때 때로 사용하는 게임의 비유는 법칙과 관습을 꼬아 엮으며 유희하는 방법론으로 읽히지만, 나아가 화면과 덩어리 위로 손기술을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매체 형식을 빈 칸으로 만들지 않고 돌파구를 찾으려는 방법론이기도 하고, 이런 종류의 게임이야말로 작가가 <Gambit>에서 염두에 두는 속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