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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환희 개인전 <Gambit> 리뷰


황재민

 

이환희 개인전 <Gambit> 전시 전경 (http://fanheelee.com/works.html)


이환희는 활용하는 매체의 한계나 법칙에 몰두하는 종류의 작가다. 이전 세기의 추상 미술에 있어 추상을 하나의 매체로 정의하고 법칙을 재설정하는 행위는 추상의 궁극적 형태를 위한 비평적 소실점을 가지고 있었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평면성이라고 정의내리고 설명한 그 소실점은 추상 미술의 역사에 있어 제약이자 동력이었고 지지를 받은 만큼 비판/극복되었다. 지금도 그린버그의 평론 활동은 추상 미술이라는 매체에 대한 논평 중 가장 인상깊은 것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환희가 추상을 전개하며 사용하는 몰두는 이미 지나간 개념을 굳이 재활용하는 듯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환희의 실험은 어떤 비평적 개념이 아닌 전혀 다른 소실점을 향하고, 회화와 조각과 같은 전통적 매체의 지난 역사가 제안하는 요구들을 그림에 쓰이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지침으로 오용한다는 점에서 과거를 재활용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동시대성의 시대에 포스트-프로덕션의 논리와 구조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이 부여하는 형식적 틀과 겹쳐지며 발생한 미적 미디엄의 추상화는 경험의 영역에 힘을 싣는 것으로 전시 공간에서의 미학적 행위를 다시 썼다. 사물과 이미지, 그리고 그 속에 집적된 세계 혹은 그냥 환경을 기호화하여 조작하는 행위가 지배적이었던 지난 시기의 미술에서 자연스럽게 미술의 수공예적 속성은 퇴색의 길을 걸었다. 이 과정에서 수공예적 기반을 가졌던 전통적 매체, 특히 조각과 회화는 과거의 역사와 단절되었고 보통 이미지나 담론을 투사하는 장으로서 다시 읽혔다. 그러나 사물이 세계를 압축하거나 상징한다는 생각이 점점 무딘 것으로 닳아감에 따라 이제 껍데기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이, 전통적 매체에게는 어째서 매체인가?’라는 질문이 갑작스럽게 주어졌다.

이런 질문의 배경엔 컨템포러리 아트의 유효성이 다한 때와 초 단위로 축적되는 디지털 아카이브가 역사를 평면화하기 시작한 때와의 공교로운 만남이 있고, 그 때문에 껍데기의 효용에 대한 고민은 시각성의 변환을 추적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이유를 갖지만 그만큼 좀 난처한 것 또한 된다. 시각성과 얽힌 큰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들이 드문 반면 전통적 매체는 그것이 갖는 불시착한 느낌, 시간과의 서먹함을 해명하라는 요구에 갑작스레 직면한다. 이와 같은 과도기에서는 매체의 법칙이나 역사를 비평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 반면 관습적 차원에서 손과 눈을 통해 해결되는 문제 또한 있고, 이환희가 두 번째 개인전 <Gambit>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 또한 어쩌면 이런 중첩과 관련이 있다.

 

<Gambit>의 첫 번째 작업은 <Katana>라는 이름으로, 이것은 폴리우레탄 고무와 레진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조각이다. 제목을 따라서 바라보자면 카타나’, 무언가 검의 형상을 시각화한 것인가 느껴지기도 하고 혹은 검에게 베어진 단면에 대한 생각도 떠오르지만, 전시장을 둘러볼수록 진입과 동시에 만나게 되는 이 조각이 거친 표면의 질감을 유사-캔버스의 형태로 보여줌으로 회화적 평면과 조각에 관한 농담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 순서를 따르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작은 화면들(<Cure>, <Call It Gala>)은 붓질과 화면의 구획, 알키드 레진의 도포 따위를 통해 장식적 화면을 만들고 그것은 법칙과 역사, 한계와 전통이 교차하는 이상한 논리의 장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아마 그때 관객은 스스로가 매체 양식의 게임장으로 입장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어 캐스팅된 알루미늄 조각(<Plaster>)울 지나치면 전시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큰 회화인 <Gala>가 보이는데, 처음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터치로 메워진 중앙 양측 화면에서 작가가 물질성을 구현하는 방식에 시선이 끌리지만, 뒤로 물러나 화면을 전체적으로 보다 보면 알키드 레진과 물감이 교차되어 발린 화면 상단의 구획으로 눈이 향하고, 이어 그 구획을 캔버스 하단의 구획과 대조하여 보게 된다. 상단의 것이 물감과 알키드로, 또 평평한 면과 물감이 뭉친 입체적인 면으로 잘게 나뉘는 반면 하단의 것은 세 부분으로 조용하고 크게 나뉘어 대비되는 느낌을 주고, 이런 상단과 하단의 비교는 같은 화면 안에서 병치되며 통일성을 방해하는 데 쓰인다. 또 중앙 화면의 붓질이 만드는 격렬한 효과를 따라 <Gala>를 다시 보면 붓질의 이상한 사용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림 상단부 점점이 발려서 길게 늘어지는 붓질과 그와 달리 둔하게 뭉쳐 이어지는 하단부의 물감이 마치 어떤 테두리처럼 보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모양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물감을 뭉개거나 평평하게 바르지 않고 쌓고 집적시켜 입체를 형성, 결국 어딘가 조각적인 효과를 주는 붓질의 이런 사용은 <Gala>를 비롯한 작가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데, 이에 따라 매체의 관습에 대한 비평은 평면 위로 입체를 쌓아올리는 것과 교차하여 펼쳐진다. 평면 위에서 전개되는 이런 적층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매체를 같은 층위로 포섭하면서 매체의 법칙 - 습관적 역사라는 차원에 대해 하나의 논평으로 작동한다.

 

붓자국을 조각화하는 것, 우연적 감흥을 조장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러한 충동을 일으키리라 짐작되는 기법을 시늉하는 것, 이렇게 무언가 통제되는 느낌은 그림에 비평적 효과를 투여하기에 주요한데, 이런 감상은 이어지는 회화를 보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나아가 <Reverse Sweep>으로 시작하여 <Certainty of Yours and Mine>를 거쳐 <Ancient Chinese Maneuver>로 마감되는 전시장의 한 쪽 구석은 마치 그런 종류의 회화적 논평을 드러내는 전시장 속 전시장으로 쓰이는 듯 보이기도 한다. <Reverse Sweep><Gala>에서 사용된 날카로운 터치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한 편 화면에 양식적 구성을 집어넣는 식으로 그게 우연성이나 암묵지의 숙련된 아름다움에 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Certainty of Yours and Mine>는 가로로 길게 늘어지는 화폭을 따라 격렬한 구성을 만들지만, 실상 그 곳에서 작가가 보이는 화면은 어딘가 악랄한 연극의 무대에 가깝다. 화면 중앙 빈 캔버스를 연기하고 있는 물감의 밀린 자국과 그 주위를 폭발적으로 에워싸는 붓자국 혹은 울퉁불퉁 패인 매스는 잠깐 보면 어떤 감정을 자아내려는 듯 보이지만, 물감의 위와 사이사이 틈새로 도포된 폴리우레탄 고무의 사용은 그 폭발이 세심하게 꾸며진 결과물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 결국 그림을 통해 뜨거운감정을 자아내려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이제 여기서 찾아볼 수 없는 무엇이라고 잘라내는 것이다.

 

<Gambit>에서 화폭의 가로 길이는 종종 비평적 용도로 이용된다. 이것은 앞선 <Certainty of Yours and Mine>에서도 보이는 사례지만 <Lancer>의 경우 가로 길이는 마치 각자 다른 평면의 연결처럼 꾸며지면서 실험적 효과를 배가한다. 작가는 <Lancer>에서 물감과 알키드 레진을 바르고 밀어내는 식으로 평면을 구획하기도 하고 모티브를 반복하기도, 또 붓질을 전시하며 단순히 색채나 재료의 사용을 연습하기도 한다.

이어 볼 수 있는 <Marauder>에서, 관객은 모노크롬 풍의 색채가 지배적인 전시장에서 예외적인 색의 사용을 구경할 수 있고, 또 젊은 작가의 (때 이른) 자기복제에 대해서도 농담 같은 단편을 찾아볼 수 있다. <Marauder>의 상단 중앙 작게 도포된 살색 물감은 이환희의 지난 개인전 <Fanhee Lee Solo Exhibition>에서 지배적으로 사용되었던 색채이며, 또 그 위, 좀 더 작은 물감 혹은 입체는 작가의 이전 작업인 <Gargoyles>를 연상토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Marauder>에서 드러나는 자기복제적 경향에 대한 유희는 이환희가 한때 작업을 만드는 방법론에 이름 붙이고 사용했던 클라우드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Gambit>에서 잠시 얼굴을 내미는 이런 흔적, 기억의 미니어쳐는 실존하지 않는 클라우드의 데이터 센터로부터 저장된 모티브를 다운로드하여 사용하면서, 유사-알고리즘으로서의 작가가 스스로의 선택을 어떻게 제어하는가와 같은 문제를 돌이켜보도록 만든다. 모티브의 사용을 두고 보았을 때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과 첫 번째 개인전은 <Marauder>에서의 농담을 통하여 연결되지만 그 고리는 무척 가늘고, 가상적 클라우드의 임의적인 운용을 통하여 이환희는 어느 정도 전반적인 작업을 동기화시켜 사용하지만 알고리즘을 운용하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자의성을 띈다.

 

<Marauder>를 지나 전시장의 두 번째 공간으로 넘어가면, 우선은 조각인 <Mediocre Porn>에 시선이 자연스레 향한다. <Gambit>에서 사용된 조각들, <Mediocre Porn>을 비롯해 <Katana><Plaster>, 그리고 <Understatement><Portrait Of A Website Recently Bought>에 이르기까지 - 이번 개인전에 전시된 이환희의 조각은 어딘가 빈 공간에 놓여 매스의 재미를 주며 아이캔디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역할을 맡기 위해 덩어리는 표면을 지탱하는 용도로 쓰이고, 그에 따라 3차원을 배신하고 평면적 효과를 띄는데, 이는 캔버스 평면 위에서 물감이 입체적으로 쌓아지며 만드는 덩어리진 느낌과 조각의 매스 위에서 크게 덧칠되고 말라 오히려 회화적인 감상을 주는 표면을 다시 조각과 회화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매체 사이로 꿰맞추면서 아이러니컬한 교차를 만들어낸다.

<Mural Pattern>은 색채라는 측면에서 가장 예외적이고 또 아름답다. 이환희는 마냥 균일하거나 평평하게 색을 바르지 않고 언제나 돌출되고 튀어나오도록 물감을 사용하므로 색채에 집중할 때에도 보는 즐거움은 입체적이다. <Mural Pattern>과 더불어 걸린 두 점의 대형 회화(<Booty Calls>, <Redemption>) 또한 구획을 나눈 뒤 그것을 의도와 비의도가 맞닥뜨리는 순간으로 연출하고, 이런 연출을 감독하기 위해서 작가는 물감을 일그러지게 바르고 쌓는 붓질을 계획한다. 이 같은 붓질은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만지고 따져보는 즐거움을 주고, 즐거움이 회화의 크기와 결부되면서 <Booty Calls>에서 <Redemption>을 거쳐 <Mural Pattern>으로 끝나는 이 라인은 작가의 그림이 갖는 수공예적 속성을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구간으로 작동한다.

전시에서 <Portrait Of A Website Recently Bought>이 유일한 구작으로서 구석에 격리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 전시의 실질적인 마침표는 <A Gun Girl><Saucy>의 담당인 듯 하다. 두 그림은 전부 비재현적 이미지를 나타냄으로 시각적, 또 청각적 효과를 갖는데, <A Gun Girl>이 연필선으로 그려진 주제를 붓터치로 재연/확장하면서 앰비언트적인 효과를 만든다면 <Saucy>는 모티브의 반복을 통해서 비트를 형성하고, 이것은 동일한 모티브의 확장 가능성을 점치게끔 한다. 말하자면 이환희의 개인전은 이라는 자막으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 다음 시간에 계속...’ 같은 걸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이환희 개인전 <Gambit> 전시 전경 (http://fanheelee.com/works.html)

 

이환희는 대체로 하나하나의 작업에 대해서 세세한 관심을 유발할 수 있게 만들어진 복잡한 화면 구성을 통하여 작업에 대한 분석적 시선 - 그림을 붙잡고 따져보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시선을 요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이런 화면은 그 자체로 작품의 질quality 개념에 대한 논평이 된다. 다만 이전에 질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대개 예술의 존재에 관한 감동이나 감탄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있었다면 지금은 어디로 어떻게 향하든 현타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 이렇게 현타로 상징되는 감정적 불능의 상태는 그 자체로 새로운 종류의 세계상에 대한 인식으로 활용되기에 흥미로운데, 이환희의 회화적 시뮬레이션 혹은 조각적 붓질은 매체의 관습과 법칙을 재료 삼는 메타적 성질을 가짐과 동시에 작업에 캐릭터를 부여하는 표현적 충동을 기술적 지지체개념으로 활용하면서, 이런 세계상을 반영하는 만큼 또 우회한다.

 

이환희는 작업을 구상하는 이런 저런 모티브를 가상의 데이터 센터에 아카이빙한 뒤 클라우드 컴퓨팅의 논리를 실험하고, 이 과정에서 알고리즘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수공예 기술을 기능적으로 장착한 인공지능의 모습을 꿈꾸는 것일까? 그러나 이런 빗댐은 아직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어찌 보면 제시된 조건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작업의 몸통으로 삼 방법론의 확장/연장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작가가 근거하는 조건은 현실의 온전한 일부를 가장하지 않고, 클라우드가 개인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를 데이터 센터의 데이터로 이동시켜 공유하는 것처럼 현실의 일부 또한 직접적으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가상적 차원에서 구조화된다는 점이 다를 따름이다. 세계는 이제 게임 엔진의 물리 법칙으로 구성되듯이 온전한 파악과 수정이 가능한 자족적 모양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특정 역사의 추상적인 복제를 허용한다.

 

현재 많은 이들이 역사적 매체에 대해 말하면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매체 자체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회화와 조각은 꾸준히 만들어졌고 꾸준히 사용되어 왔으며, 꾸준히 존재해왔기 때문에, 매체를 갑작스레 새로운 것들을 반영하는 예외적 현상처럼 다루려는 것 자체가 호들갑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통적 매체들이 스스로를 유효한 미적 미디엄으로 재-정체화하려고 시도할 때, 오히려 그것은 단단한 역사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역설이 있다. 특히 비교적 젊은 한국의 작가들은 오래된 매체 형식을 통하여 작업을 전개할 때 구체적 역사를 선별하여 지시하는 대신 모호하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큰 틀로서 다루고, 이런 모습은 스스로를 빈 공간으로부터 일으켜 세우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실의 일부를 쪼개 특정성을 부여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엄을 개발하거나 발견하는 일 자체가 무효화된 시점에서, 매체의 널리 알려진 지속성은 오히려 은유적인 속성을 갖고 단절의 매력은 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환희가 작업 세계를 설명할 때 때로 사용하는 게임의 비유는 법칙과 관습을 꼬아 엮으며 유희하는 방법론으로 읽히지만, 나아가 화면과 덩어리 위로 손기술을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매체 형식을 빈 칸으로 만들지 않고 돌파구를 찾으려는 방법론이기도 하고, 이런 종류의 게임이야말로 작가가 <Gambit>에서 염두에 두는 속셈이다.


1) <Weekend: 이환희 작가와의 대화>, https://goo.gl/KYP2Bv

2) 임근준, <제시된 조건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작업의 몸통으로 삼기>, http://chungwoo.egloos.com/3424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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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회화/괴물의 어떤 형태에 대해서 : 심혜린 개인전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 리뷰


황재민


근래 몇 년간 전통적 매체가 부상하고 새로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반응도 뒤따랐다. 이를테면 거기에는 미술의 오랜 형태에 대한 스스로의 애정을, 그리고 지난 동시대 미술의 매체 형식에 적응하지 못했던 자신의 보수적 감수성을 고백하며 귀환한 매체를 환영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런 매체들, 그 중 특별히 추상화가 경매 시장에서 흥행함에 따라 양산되는 추상적 이미지들을 좀비 포멀리즘이라고 부르며 우려를 표했던 의견도 있었다. 새로운 추상이 마구잡이로 양산되며 이미지 차원에서 닳아 사라진다는 문제를 제기했던 평자들은 이와 같은 양적 팽창이 가능한 시대의 스타일을 마구잡이로 섞어 거의 무의미한 것으로 쇠퇴시킨다는 점, 또 시각적 유사성을 드러내는 수많은 추상적 화면들이 인터넷을 통해 마구잡이로 공유/증폭되면서 개중 좋은 작업조차 거의 주목받지 못하게 만든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회화의 귀환에 우려를 표했다.

2017년인 현재 좀비 포멀리즘이 하나의 화두로 제시된 지 3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회화와 관련한 논의는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비슷한 경향을 갖는 회화 작업들이 여기 저기에 등장하고 평가 역시 대동소이하다. 주된 시각적 모티브나 주제는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논자들이 좀비적이라고 정리했던 몇몇 특징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또 작동하고 있다.

 

2013년 워커아트센터Walker Art Center에서 열렸던 전시 <페인터 페인터Painter Painter>, 그리고 2014년 화제가 되었던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회화 전시 <영원한 지금: 무시간적 세계의 동시대 회화The Forever Now: Contemporary Painting in an Atemporal World> 비교적 젊은 작가군의 회화 작업을 대규모로 전시한, 흔하지 않은 사례로서 주목 받았다. 워커아트센터의 <페인터 페인터>가 조작할 만한 미디엄이 다양화된 동시대 미술의 시기에 어째서 작가들은 구태여 회화라는 매체 형식을 선택하고 작업하는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시를 조직했다면, <영원한 지금>은 젊은 작가들이 좀비라는 이름을 얻은 문제적 상황을 조명하고 그에 대해 답하고자 했던 경우였다. 규모와 공신력을 지닌 기관 중 새로운 작가들의 추상 회화를 다룬 전시가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관계로 모마의 <영원한 지금>은 마치 새로이 등장한 추상 회화의 얼굴 마담 같은 것으로 되어 많은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큐레이터인 로라 홉트먼이 새로운 추상을 설명하기 위해 소설가 윌리엄 깁슨으로부터 빌려온 단어 무시간성’, 동시대성이 붕괴하고 모든 시대적 양식과 모티브가 공존하게 된 무질서 상태와 그런 초평면적 시공간 아래 회화가 과연 무슨 역할을 수행하는 지에 대한 내용이 여기저기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시간이 중첩되지 않고 수평으로 무한히 늘어나며 형성된 새로운 시공간이 있으며 젊은 작가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한다는 점은 새 그림들에 좀비라는 이름을 붙였던 논자들이 문제 제기를 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인터넷을 통해 디지털 아카이브가 급격히 팽창하며 가져다 쓸 만한 시각적 모티브들이 많아짐에 따라 과거의 선례들이 역사적 특정성을 잃고 장식으로 전락하는 환경과, 젊은 회화 작가들이 그런 배경을 인식하거나 주체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로 비판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회화는 장식으로, 심지어 하나의 화폐 단위로 바뀌었으며 전혀 긍정적이지 못한 팽창이 계속되고 있다고, 비판적 논자들은 우려했다.

 

반면 <영원한 지금>에서 로라 홉트먼이 정리한 추상의 네 가지 경향은 전부 무시간성을 토대로 삼는다. 전시 서문에 따르면, 재활성화Reanimation, 재연Reenactment, 샘플링Sampling, 전형The Archetype으로 각각 분류된 새로운 추상 미술의 특징은 거대한 아카이브로 화한 디지털 세계를 일상적/예술적 배경으로 갖고 평면화된 과거-현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신경을 쓴다는 점에 있다. 선형적 시간축이 함몰된 이후 도래한 영원한 지금은 이것저것을 가리지 않고 의미의 구별 없이 섞어버리는 식으로 부정적 환경을 증축하지만, 시각을 달리함에 따라 그것은 오히려 과다 공급되는 정보에 의해 하이퍼하게 정체되어있는 포스트-인터넷 환경에 대해 탈출구를 제공한다. <영원한 지금>이 지시한 가능성, 아마추어 역사가로서의 작가들이 모더니즘의 역사를 리믹스해 만들어내는 프랑켄슈타인 같은 ()역사적 양식 또한 그런 종류의 시각 중 하나로, 이런 접근은 시공간 없는 시대의 제약을 역이용 할 수 있는 발판으로 나타난다.

 

밀도 높은 추상적 화면을 전개하는 작가 심혜린은 스스로의 작업을 연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심혜린의 그림에 등장하는 형상은 즉흥적 시도에 의하여 탄생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자생적으로 자라난다. 심혜린은 세 번째 개인전의 제목을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라고 내걸었는데, 이때 촘촘함은 추상적 화면을 만드는 개별 형상들이 즉흥적/자생적으로 파생되면서 밀도 있게 프레임을 메우는 모양을 형상화하며 반짝임은 추상의 관람자들이 크게는 화면을, 좁게는 각각의 형상을 주시할 때 파생되는 의미망에 대한 상상을 형상화한다.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는 심혜린의 세 번째 개인전이고, 화면을 구성/전시하는 이런 방법을 과거의 전시들이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작가의 추상에서 요점은 비스무리하다. 심혜린은 추상을 구상하는 데에 있어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몇 가지 형상으로부터 시작해 밀도를 높여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그것이 가질 수 있는 몇 개의 의미나 그것을 이해하는 방법은 관객이라는 바깥으로 아웃소싱한다.

 

그렇다면 심혜린의 추상은 좀비 같은 것일까, 아니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것일까? 심혜린은 자신의 그림에 연대라는 단어를 쓰지만 그것은 흔히 쓰이는 용례를 따라 사회적인 연대, 바깥과의 연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의미하는 연대는 추상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형상들이 만드는 연대, 밀도를 높이고 프레임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내적인 연대를 말하는 것이다. 심혜린의 그림은 특정한 목표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화면을 시각적으로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의 단순한 규칙을 설정하고 그것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이것은 화면을 구성하는 좋고 편리한 방법이지만 한편으로는 서울에서 살고 작업하는 청년 작가 특유의 빈곤함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심혜린의 추상은 대체로 역사적 양식이나 기존의 평면으로부터 취할 것이 거의 없음을 이야기하고, 또 스스로 창조한 우연적 형상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화면을 빈 곳 없이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 결과 밀도 높은 화면과 선배가 없는빈곤함은 나란히 놓인 채 대조되어 보인다.


<Slipstream>, oil on canvas, 130.3×163.3cm, 2016 

(http://www.gallerychosun.com/cor/exhi/exhi_info.htm?serial=e170709_001)

 

이런 방법은 독창성을 드러내는 게 아니다. 어디로 가든 과거로 끌어당겨질 수밖에 없는 이상한 지금에 있어 이런 방법은 오히려 그런 배경을 모르는 척 하는 것, 기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의도를 가진 행동이기도 하다. 만약 심혜린의 방법대로 과거를 아예 모른 척 한다면 어떤 것이 생겨날까? 스스로가 스스로의 나침반과 이상향이 되는 이상한 구조를 형성한다면 무엇이 나타날까?

 

심혜린의 회화는 종종 회화가 아닌 다른 포맷으로 독립한다. <촘촘하고 반짝이는 연대> 중 추상을 구성하는 개별 형상을 조작해 압축 스티로폼 조각으로 유출한 <얇은 조각> 시리즈나 이전 개인전에서 작가가 선보였던, 하나의 그림을 한 권의 책으로 변환하는 작업인 <BLURAY> 시리즈가 그런 경우인데, 이런 작업은 심혜린이 하나의 추상을 완성하는 방식, 랜덤한 형상이 또 다른 형상에게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꼬리잡기 한 뒤 완성된 화면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을 회화 바깥으로 끄집어낸 것과도 같다. 하나의 포맷은 특정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전혀 다른 매체로 바뀌고, 그래서 고정된 의미나 위치를 갖는다기보다는 분열하고 소모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치 낭비와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이건 소모할 수 있는 재산이 있어야 창작이 가능한 시대에 맞추어 이럭저럭 자력갱생하고자 힘쓰는 일에 가깝다 - 다만 그 주재료가 역사적 양식이 아닐 뿐, 넓게 펼쳐진 초평면적 세계를 부분 부분 짜맞춰 갈 길을 만드는 것은 유사하다. 역사가 단순한 땔감으로 소모되고 과거와 현재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이는 포스트-인터넷 환경의 레트로 현상이 좀비들을 양산하고, 이와 같은 상태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역사적 형태를 긍정적으로 차용하는 방법이 거론되는 한 편, 심혜린은 잘게 흩어진 시간의 파편을 활용하지 않고 순환하는 내적 구조를 만드는 방법을 택한다. 이 방법을 통해 포맷은 분산되고 의미는 유동하며 회화는 유예 공간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작업의 동력으로서 과거를 수용하는 일이 이제 벗어날 수 없는 배경이라면, 어째서 젊은 작가들은 벌써부터 다른 과거가 아닌 자신의 가까운 과거를 동력으로 삼는 것일까? 새로운 무언가를 해내는 게 어렵고 그런 만큼 무얼 하든 존재하는 공간을 분할하여 가상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는 지금, 누군가에게 역사는 너무 희미한 것이고 자신은 비교적 가까운 것이다. 꾸준히 작업하여 만들어 내는 관성은 고립된 상태에서도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기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이고, 또 시대를 견디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하다. 회화는 보통 이런 관성의 전형이고, 그런 만큼 이 영역에서 자신과 쉽게 혼동된다. 이제 미술은 괴물 같은 것이 되어야만 그나마 활동이 가능하지만 또 어떤 종류의 괴물이 가능할 것인가, 그건 아직 널리 알려진 바가 없고 새로운 괴물의 유형이 등장하기 전까지 어쨌든 누군가는 기다려야만 한다. 그때 다시 관성의 필요가 요구될 것이고 심혜린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그런 관성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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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백경호 김정태 진챙총


황재민


이미지가 한때 어딘가에 단단히 혹은 헐겁게 묶여있던, 나아가, 최소한 묶여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인식은 이제 확실히 어딘가로 흘러가버린 것이 되었다. 인터넷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이미지의 동역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선 '약탈'이라는 묘사가 서술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열화된 캡쳐 이미지가 개념적으로 무한한 공간을 쉴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이미지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사용자가 그것을 빼앗아 재맥락화한다는 생각은 이제 분명히 어설프다.


디지털 소프트웨어가 장려하는 투명성에 힘입어(1) 이미지, 혹은 모니터 속의 어떤 것들은 오브젝트로 떼어져나와 어디에든 합성될 수 있는 자유로운, 그렇지만 동시에 어딘가 분열증에 걸린 것처럼 혼란한 형식이 되었다. 이런 이미지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구겨지고 찢긴 형상, 그리고 보는 순간 왠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랜덤’한 상황은 인터넷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여러 글에 의해서 검토되고 때로 옹호되었다.


이런 옹호에는 새로운 것이 새로운 상황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측하는 오해와 호들갑이 자주 엮여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이와 같은 언급이 쉽게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가파른 상황에 이름을 주고 공간을 만든다는 순기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정말로 모든 것이 납작해진 상황이라면, 납작한 공간에게 그곳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온라인 공간에서 이미지라는 매체는, 공간과 조응하는 형식적 특질을 강조하는 언급들이 말하듯, 거의 무한하게 자유로운 재가공의 가능성과 종잡을 수 없는 순환을 통해 레이어를 만든다. 보통 공간이 야기되는 지점은 그 가능성과 유동성 자체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정보량이 자연스럽게 창출하는 글리치 같은 것에 있다. 웹에 대해서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런 에러는, 창의적인 상황을 만들고 보조하지만 동시에 후가공이라는 문제를 초래한다.


가상 공간의 새로운 움직임은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세계를 프린터로 단숨에 출력할 수 있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온라인과 그 속에서 점멸하는 글리치 같은 것은 다양한 논의와 실행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다종 다양한 담화들에게 일정한 한계를 부과했다. 인터넷의 혁명성에 대해 소리 높이는 외침과 진정한 예술은 모니터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낮은 목소리들의 대조는 익숙한 모양의 평행하는 선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적확히 가리키지 않는다.


1. 경건함


9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있었던 백경호의 개인전 <Cast away>에서, 작가는 "캔버스라는 오래된 거푸집"을 통해 이미지를 수집한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의 목록을 기반으로" 긁어모은 이미지들과 미술사적 참조와 도상은 한 화면에서 혼합되며 일상성 그리고 역사성을 서로 교차하도록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백경호는 일상의 풍경을 재현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말하자면 산책자의 그것은 될 수 없다.(2) 작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러므로 목록화라는 방법론은 뭔가를 섞어버리기 위한 도구가 된다. 백경호의 캔버스에서 목록의 역할은 원근법의 정돈된 세계와도 아카이브의 무거운 세계와도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단지 나아가다가 모든 것을 갑작스럽게 그만두어버린다는 단순한 목적을 위한 알리바이다.


이미지를 전유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회화들은 그것의 소재나 성격 같은 것을 맞부딪히고 섞어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미지의 성격이 평평해지고 어처구니 없어진 세상에서, 레이어의 기능은 전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한 상태로, 백경호는 우연한 목록과 역사 따위를 합쳐버리는데, 이제 그 화면은 기호를 독해하고 의미를 읽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독해법을 거부하고 어딘가 투명한 것이 되어 시야 바깥으로 슬그머니 잠적하는 일을 위한 것이 된다. 투명성과 고정성 사이에서, 서사에 빚이 없는 목록들이 만드는 것은 언제라도 수정할 수 있을 것처럼 서로 동떨어진 화면들의 산술적 집합이다. 그 외형으로부터 포토샵 레이어의 비유를 꺼내드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작가 스스로는 소프트웨어를 경유하는 인식론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백경호의 회화들은 새로운 시각성과 새로운 화면을 위한 구성이라기보단 새로운 배경과 배경이 제공하는 혼란상을 자각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는 일을 포기한 결과로 보아야 옳다. 그 결과 백경호의 표면에서 엿보이는 것은 뜨거운 표현의 정서도, 차용의 차가운 거리감도 아닌 미적지근한 ‘현자 타임’의 시간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설명할 때 경건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단어는 사실상 회화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을 괄호 안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어찌 되었든 백경호는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며 인터넷 이미지와 그것의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데, 동시에 역사라는 큰 주제를 회화 안에 어떻게 붙잡아놓아야 하는지, 반드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을 붙잡는 새로운 방법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 이 복잡하고 큰 질문들은, 결과적으로는 미지근하고 텁텁한 정서와 함께 개미지옥인지 "정신과 시간의 방"(3)인지 모를 시공간을 만든다.


2. 속도감


새로운 시공간적 환경이 선사하는 난감함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또한 지난 세기의 유물이라면, 그래서 백경호와 그의 작업이 어딘가 맥이 빠진 방식으로 캔버스를 “오래된 거푸집”이라 표현하는 자각의 정서를 가져가다면, 반대로 인터넷이 초래한 환경에 반가움을 표하려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김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정태는 오픈베타 공간이라는 정체성을 표하는 공간 <반지하>에 설치했던 프로젝트 <현피>와 커먼센터의 <오토세이브>에서 그림으로 공간을 메우려는 듯 물량으로 승부했다. 인터넷의 특정성을 물리적이고 미적인 물건으로 현실화한다는 문제 앞에서, 김정태는 우선 그림을 보조물로 삼아 인터넷 환경을 재연하고자 한다.


백경호에게 회화와 그것의 지지대로서 캔버스가 "오래된 거푸집"에 불과한 반면, 김정태의 그림들은 인터넷의 난잡스럽고 무작위적인 질서와 그 속에서 파열된 이미지들이 만드는 환경과 동기화하기 위한 접속코드로 쓰인다. 김정태는 그림으로부터 해묵고 무거운 것들을 털어내고, 인터넷 이후의 세계가 그 이전과 어떤 방식으로 달라졌는지 직접 시연해보인다.


그 결과, 매체는 분산되고 이름은 사라진다. 작업은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경처럼 멀리 두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된다. 인터넷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고 그것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에게 흔히 화이트큐브가 제공하는 팬시한 진공 포장 상태에 친화적인, 특히 텀블러 같은 데에 올리기 좋은 ‘포토제닉’한 작업을 시도한다는 불평이 쏟아진다는 것(4)을 생각해볼 때, 작가가 인터넷에 호의적인 동시에 포착하기 어려운 하나의 배경처럼 작업을 구성한다는 점은 대조해볼 만 하다.


그렇지만 작가와 그의 작업은 인터넷과 거리감을 좁히는 동안 그 새로운 환경이 만드는 새로운 약점들에 함께 노출된다. 인터넷과 그 환경을 재연한다는 생각은 작업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물리적인 그림으로 재연한다는 생각과 연결되는데, 이때 그림은 어딘가 점점 어눌해지는 삼차원 세상의 물성에 사로잡히며 모니터 속 jpg 이미지의 완전무결함, 그리고 아직은 그 완벽한 평면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글리치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상기시키며 껍데기가 된다. 이렇게 인터넷의 특정성으로부터 탈신비화되었을 때, 그림은 ‘포스트-인터넷’의 들뜬 야심에서 형식주의의 답답한 굴레로 내던져지며 ‘그냥 그림’이 된다.


3. 진챙총


위의 작가들이 일반 명사로서의 인터넷에 관심을 둔다면, 진챙총은 인터넷의 좀 더 음하고 폐쇄적인 공간에 관심을 둔다. 8월 7일 오프닝과 함께 트위터 타임라인을 박살냈던 첫 개인전 <후죠시 매니페스토>에서 전시되었던 진챙총의 작업은 일단 포르노 이미지이자 표절한/전유한 이미지이자 또 다른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수작업을 통해 정성스럽게 물화한 이미지-오브제이기도 했다.


다소 복잡하고 수고스러운 절차를 통해 물리 세계에 도착한 디지털 이미지-천조각들은 전시와 동시에 스마트폰 카메라로 빨려 들어간 뒤 의식과도 같은 절차를 거쳐 가상 공간에 흩뿌려진다. 이제는 일상적인 이 같은 관람의 방식은 <후죠시 매니페스토>의 선언문들이 어떤 정념의 기호화를 시도하면서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화소를 구체화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새삼 살펴볼 만하다. 작가가 "보석 찍는 초근접 카메라로 촬영"(5)하여 확대하고 인쇄한 화면은 관람객의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다음 LCD 디스플레이의 화소 아래에서 다시 보여지며 화소 따위 없는 것이 되거나 - 화소 밖에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과 형식의 강제적인 단절은 진챙총의 오브제들이 가상 공간에서 하나의 민족정신을 공유하는 인터넷 사용자들을 표상하고 상징하려는 작업으로 독해되는 데에 빌미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그 인쇄된 이미지들은 뭔가를 차용하고 발화한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텅 빈 지점을 겨냥한다.


이미지가 가상 공간에 기반하는 세계 위에 서며 그것을 잡아 늘려 화소를 노출한다는 생각은 무한한 평면처럼 보이는 것에 존재하는 물질적 불균질성을 찾아낸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동시에 그것은 디지털 공간 속에서 이미지가 근원하는 지점을 파악하겠다는 시도로 이어지는데,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시도 속에서 작업물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별안간 공허해진다. 하지만 이 공허가 노출하는 것은 헛소실점을 가리키는/가리키지 않는 분열적인 작도법이 아니라 화면에 놓인 모든 요소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거침없이 수렴하는 1점 투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투시도의 끝에서 소실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작가 자신, 스스로가 적극적인 인터넷의 사용자였을 작가 자신의 축적된 경험 세계다.


소실점이 오로지 작가 본인에게 향하는 작업을 일기장 작업으로 일컫는다면 진챙총이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은 의아한 것일 수 있다. 작가는 여러가지 광학적 필터를 덧입혀가며 이미지를 열화하고 공들여 물건으로 조직하지만 정작 그것은 보기 좋게 실패하기 위한 것이다.(6) 저해상도 이미지를 고품질의 규격으로 물화하는 것은 작가의 개인사적 취미와 분명한 연관성을 갖지만 그것은 단단하고 평평한, 혹은 물렁하고 울퉁불퉁한 디스플레이 아래 흩어지며 동어반복을 만들고 사라진다. 일기장은 보통 서랍 안에 조용히 놓이는 것으로, 과거를 보존하고 글쓴이를 증언한다. 하지만 이 헛수고의 구조는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는다. <후죠시 매니페스토>는 바깥 세계와 격렬히 관계했지만, 정작 그 파열음은 작업과 큰 상관이 없다.


4.


인터넷 이후의 세계와 그 인식론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전시는, 구글 검색창에 몇가지 검색어만을 입력해보아도 싱겁게 찾아진다. 그러나 새로운 것, 새로울 수 밖에 없는 무엇을 향한 거의 의무적인 고양감을 걷어내고 보면 해당 전시들 중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둔 경우는 없었다. 이를테면 2015년 10월 현재 진행 중인 뉴 뮤지엄의 새로운 온라인 전시 <브러시들 (Brushes)>(7)을 대표적인 경우로 삼아 살펴보자. 회화의 역사를 도구로 늘여진 것으로 파악하고 그 파편적 타임라인의 마지막 줄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삽입하는 기획은 이를테면 쉴 새 없이 쌓이고 사라지는 레이어들을 반복하는 140메가바이트짜리 GIF-회화 같은 것으로 뒷받침 되는데, 그 생각은 손으로 잡히고 만져지는 세계와 그 위에서 누적된 역사를 과소평가하면서 성급한 풍경을 연출한다. 이제 납작하고 어설퍼진 물리적 공간은 거기가 세계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디지털 공간과 그것이 꼬아 비튼 개념적 바탕이 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할 때 갑자스레 단단하고 거친 거름망의 지위를 행사한다. 어떤 이야기에 의해서 지지되든, 그 거름망이 거의 천덕꾸러기와 같은 지위를 가질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은 아직 불가능하다.


그 결과 온라인은 오프라인에 꾸준히 패배하여 온 것 같다. 더군다나 '포스트-인터넷'이라는 해설이 곱절의 민망함을 선사하는 한국에서 새로운 인식을 위한 공간은 아직 설 자리를 찾지 못한 것 같고, 그러므로 관련한 담화들을 디딤돌 삼는 일은 맞지 않는 유행을 따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광랜 서비스가 데려온 평평한 지반은 거리감이라는 개념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고 영향을 미치는 경로를 새로이 개발한다. 가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틈과 마주치는 작가들은 이와 같은 변화의 실례로, 신생 공간이라고 정리되는 지금 한국의 미술의 새 발판과 관계하며 전과 다른 역사를 쌓는 데에 기여한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맥락일 것이다.


인터넷 공간은 종종 혼란하여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너무 뻔한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LCD 디스플레이 속에서 표시되는 것들은 납작하고 평평한 지대이지만, 울퉁불퉁하고 난잡하여 쉽게 관계하기 어렵다는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맞지 않는 진술들은 어쩌면 아직 온라인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 할 토대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것은 그 자체가 가상 공간의 성격에 대한 증언록일 수도 있다. 이처럼 어긋나고 미끌거리는 상황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그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작가들은 몇가지 방식을 통해 관념과 물질 사이의 대비 혹은 중첩이라는 문제에 관계하며, 이미 지나간 시간의 틀로는 쉬이 맞추어지지 않는 풍경을 구성한다.


미주


(1): "아마도 1993~1999년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 중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디지털 합성(digital compositing)을 통해 다양한 투명도를 가진 다양한 수준의 이미지를 새롭게 결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 이재현(역),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서울: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360p

(2): 그렇지만 변화한 현실감각을 논하며 회화의 역할을 "'전통적 의미에서의 프레임'", 재현적 프레임으로 한정 짓는 것은 다소 성급한 일이다. 그런 종류의 설명은 회화로부터 뻗어 나온 상이한 역사적 갈래들을 묵과한 채 일상화된 디지털 공간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너무 빠르게 의존한다. 인용은 권시우의 글 <백경호 「Cast away」, 추상이라는 인터페이스> (http://jipdanochan.com/62) 에서.

(3): 정신과 시간의 방은 만화 <드래곤 볼>에 등장하는 레벨업을 위한 장소로, "단 하루로 1년간의 수련을 할 수 있는"(토리야마 아키라(Toriyama Akira), <드래곤 볼 31>, 서울: 서울문화사(만화), 2001, 69p) 서브컬처의 신화적 장소다.또, 그것은 789라는 이름으로 회화 작업을 하는 콜렉티브가 사용하는 장소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곳은 "2015년 4월 1일부터 2016년 4월 1일까지"(http://chillpalgu.tumblr.com/about) 일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전시를 위해 헌정하면서 유예 기간으로서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4): Brian Droitcour, <포스트-인터넷 예술의 위험성(The Perils of Post-Internet Art)>, http://www.artinamericamagazine.com/news-features/magazine/the-perils-of-post-internet-art/

(5): <나일론>의 짧은 인터뷰에서 인용. 링크는 http://www.nylonmedia.co.kr/contents/index_view.html?catecode=40&subbcode=&contnumb=2542

(6): 이런 종류의 헛수고는 또한 9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의 주요한 조형 언어이기도 했다. 이같은 정서를 활용하는 작업들은 유토피아적 승화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 절망의 틈새에서 짐짓 좌절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완성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헛수고-양식들과는 달리 진챙총의 작업물은 동일한 방법론을 집착적 열망을 표시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그러나 이런 독해는 작업이 관련되는 이미지들이 불러오는 착시 현상일 수 있다.

(7): http://www.newmuseum.org/exhibitions/view/first-look-brush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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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그림처럼 생긴 무언가에 관하여 : 황웅태 인터뷰]


# 2015 5 12

 

물어본다 황재민 (이하 ) : 그럼 일단 학교 다닌 이야기부터 해볼까? 아직 졸업은 했나?

 

답한다 황웅태 (이하 ) : 그렇다.

 

: 다녔던 학과가 어디였나?

 

: 아트앤시어터라고... (웃음) 얘기부터 시작하는구나.



: 당신은 그게 독특하니까. 왜냐하면 (계원예대) 아트앤시어터라고 하면... 김성희 선생님이 계셨고. 거기서 주로... 리미니 프로토콜이나, 티노 세갈이나, 이런... 컨템포러리의 후광을 뒤에 업은 퍼포먼스적인 경향을 주로 다뤘으니까. 거기서는 어떤 결과물을 만든 없었나?

 

: 작업을 했었던 ?

 

: 그렇다.

 

: 있었다.

 

: 그건 어떤 종류였나?

 

: 그때는... 한 학년 위의 선배가 김성희 선생님이 예술 감독으로 계셨던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할 기회를 얻었었는데, 퍼포머로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무대가 산이었고 관객석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그 공연에 참여한 퍼포머, 스텝, 관객들과 공연을 재구성했었다. 그거 하나 하고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던 것 같다.

 

: 스스로 작업한 없었나?

 

: 그게 스스로 작업한 거였다.

 

: 퍼포머로 참여한 아닌가?

 

: 퍼포머로 참여한 다음에 경험을 갖고 작업을 만들었었다. 퍼포머의 시점으로.

 

: 그건 과제로 냈었나?

 

: 과제로 만들었던 아니었는데 과제로 많이 사용했다.

 

: 그럼 학교 다닐 영향 받은 작가라던가... 관심을 갖고 있던 작가는 있었나?

 

: 그때는 제롬 벨에게 많이 영향을 받았던 같다.

 

: 어떤 측면에서?

 

: 측면이라고 부를 것까진 없는 같고, 특성상, 그리고 학교가 2년제이기도 하고. 역사 같은 것에 대해서 가르치는 수업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수업도 선생님의 주관 같은 무척 많이 들어가 있는 수업이었다. 그러니까... 역사 수업을 때도, 당시의 시점으로서 역사를 서술하는 아니라컨템포러리 시점으로서, ‘컨템포러리라고 설명이 가능한 역사를 다루는 수업이었거든. 그래서 결국 수업이 어떻게 돌아갔냐면, 그냥 작업을 많이 보여준다. 그럼 학생들이 그걸 보고, 작업들이 갖는 공통 분모 같은 것을 시각적으로 체득을 하기 시작한다. 그럼 제일 위험한 그걸 이제, 코드들을 반영하는 작업들을 학생들끼리 대량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때 있었던 특징들을 제일 많이 담보하고 있었던 작가가 제롬 벨이었던 같다. 점에서 내가 영향을 받았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고.

 

: 그럼 그런 수업에선 어떤 작가들을 많이 다루었나?

 

: 제일 많이 다룬 제롬 벨이었고. 티노 세갈은 의외로 많이 다뤘다. 그냥 블랙박스에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 공연들을 많이 보여주고, 화이트 큐브에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들에 대해선 거의 언급을 했던 같다. 의외로. 실제로 졸업 전시를 하는 사람들도 화이트 큐브에는 관심이 없었고.

 

: 그럼... 그런 어떤, ‘컨템포러리 미술을 다루는 수업을 듣고, 그런 교육과정을 거쳤는데, 이후에 집단오찬 이름으로 학교에 전시를 열었을 회화 작업으로 넘어갔었다. 그렇게 넘어간 계기는 무엇이었나?



<메타몬의 워밍업>, 2014, 캔버스에 아크릴, 34 x 44cm


“메타몬은 세포 단위의 변신이 가능한, 무엇이든 있는 어리숙한 괴물이다. 앞에 있는 것으로 변신을 경우에는 놀라운 정밀도의 모방이 가능하지만, 기억에 의존하는 순간 이것저것이 뒤섞여 난잡해지기 일쑤다.

그런 메타몽이 아크릴을 발견했다. 심심해서 캔버스에 들어갔는데 퍽이나 편했다. 그리고 변신과 함께 학습을 시작했다.”

 

: 회화로 넘어간 계기라기보단, 공연 작업을 하면 되겠다는 계기가 있었다.

 

: 설명을 해주면?

 

: 방금 했던 이야기와 연장선 상에 있는데, 선생님들이 작업을 보여줄 도식화해서 많이 보여준다. 많이 언급되는 장소특정성, 아니면 들뢰즈의되기’. (웃음)이런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럼 이제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맥락이랑 연결이 되지 않고, 걔네들만 둥둥 떠있으니까. 이걸 가지고 하면 안되지 않나. 근데 시각적으로 뭔가를 배운다는 굉장히 무서워서,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작업을 하면 진짜로 그런 것만 나온다. 그래서 (배운 것을) 하면 안되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현재로서 있는 대안이, 미술사 공부를 조금이나마 하는 수밖에 없었고, 나에게 제일 접근성이 있었던 매체가 회화였던 같다.

 

: 그럼 회화 작업을 처음 했을 , 말하자면 일본 서브컬처의 영향을 받아서 작업을 만들지 않았나. 작업에 대한 설명을 해달라.

 

: 설명하기 전에, 사실 나는 서브컬처의 영향을 많이 받진 않았던 같다. 작업 자체가 서브컬처와는 연관이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포켓몬스터>에서 메타몽이라는 캐릭터를 참조하기는 했지만, 도상으로도 그렇고, 작업 하면서 <포켓몬스터>라는 콘텐츠 자체를 의식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같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그땐 조금 갈팡질팡 했던 같다. 그러니까, 그때 했던 작업은메타몬이라는 가상의 캐릭터를 설정을 하고, 나는 캐릭터를, 아니 그러니까... 캔버스 위에 칠해지는 물감은메타몬이라는 가정 하에, ‘메타몬 놀이? 아니면 행동 같은 것들을 내가 그림으로써 그렸다, 라는 식의 설정이, 구조가 생기는 건데... ‘메타몬 경우엔 입장에선, 무엇이든 해도 상관 없다는 구실에 가까웠던 같다.

 

: , 그럼 서브컬처적인 요소는 알리바이고, 그냥 어떤... 개인적인 서사화의 장치로 인용을 했다, 그런...

 

: 개인적인 서사화의 장치였던 같다. 서브컬처가 아니라.

 

: 그러면 그냥 정말 그림이었네? 어떤, 특정한 맥락을 스크린에 투과해서 뭔가를 만든다기보다는?

 

: 그렇다.

 

: 그러면 그게, 이야기로 듣기로는, 컨템포러리 미술의 주입식 교육에서부터 (웃음) 탈피하기 위한 개인적인 계기였던 같은데... 그럼 그림 이후에 어떤 생각을 했나? 그림을 완성한 다음에?

 

: 일단 내가 다니던 과에서는 담론의 영향을 되게 많이 받았다. 대표적인 작업 형태가 담론적 장소특정성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었다그러니까 예를 들면, 공연을 기획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 개입을 해가지고, 상황을 리서치하거나 거기에서 어떤 메세지로 도출 가능한 요소 같은 것들을 경험한 다음에, 이걸 공연으로 도식화하는 훈련을 꾸준히 받는다. 물론 그런 것만 있는 아니었지만. 일단 그런 것들을 완전히 놓아버릴 있는 계기는 됐다. 확실히.

 

: 뭔가 깨달음이 있었나? 이런... 컨템포러리 확실히 망했구나... 이렇게 느끼는?

 

: 깨달음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러기 위해서 했었던 같은데. 작업은.

 

: 그럼 작업 다음에 연작처럼 만든 작업은 없나?

 

: 없지만... 없다.

 

: 해보려고는 했었나?

 

: 그렇다. ‘메타몬 아직 내가 포기한 소재는 아니다.

 

: , 연작으로 만들어 계획은 있는 건가?

 

: 그렇다.

 

: 그럼 연작들은 어떤 모양이 같은가?

 

: ... 특별히 하려고 했었던 없고, ‘이걸로는 있는 많겠다라는 생각은 든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나의 경우에는 캔버스에 바를 있는 재료를메타몬으로 설정을 거니까. 활동 장소 자체가 내가 다루는 대상 같은 것들이 되는 거잖나. 일단 여기에서 출발을 하려고 했었던 같다. 저번에 그렸던 그림은 하나고. 그래서그리기라는 자체도 나에게 별로 의의가 없었다.

 

: 그럼 작업 이야길 들어보면, 뭔가 개인적인 서사 충동 같은 있었던 같은데, 그럼 충동을 효과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작업을 했던 것도 있었던 건가?

 

: 서사 충동?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아니다. 이야기를 만드려고 하는 욕구는 없었지만, 거기서 뭔가를 하면은 그게 자연스럽게 서사의 타임라인으로 진행은 되겠지. 그래서메타몬이라는 소재를 내가 쥐었을 , 이게 어떤 방향을 잡기에 괜찮은 소재인 같았다.

 

: 근데 그렇게 되면, <포켓몬스터>라는 매체 안에서 메타몽이라는 캐릭터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의미를 왜곡되고 확장된 형태로 회화로 가져간다고 하더라도, 서브컬처와 연관되는 지점은 어느정도 가져갈 거라는 생각을 한다. 결국 하다보면 <포켓몬스터>라는 미디어 자체와도 많이 연결이 같고. 그런 의미에서 서브컬처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해가 된다. 점을 설명해 있을까?

 

: 사실 그때는 갈팡질팡 했었던 건데, 나의 경우엔 <포켓몬스터> 대해서 엄청난 향수 같은 느낀다. 그래서 <포켓몬>으로 뭔가를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던 같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하려고 했었던 그런 서브컬처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었고. 그래서... 서브컬처에서도 메타몽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회화에 도입하기 제일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선택을 했었던 건데, 이름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연결 지점이 생기지 않나. 그래서이름을 바꿀까라는 생각도 하고 있다.

 

: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세일러 >이라든지 90년대의 미디어들이 미술에서 활용되고 있는 있다. 그런 종류의 어떤, 향수나 레트로적인 감수성이 드러나는 측면이 있는데, 그런 종류의 감수성과도 관련이 되는 있나? 메타몽이라는 소재는?

 

: 없다.

 

: 아예 없나? 그럼 결국 진짜 도구였던 셈이네.

 

: 그렇다. 아무튼 나는 병치 자체가 이상했다. 메타몽과, 발라지는 물감이라는 .

 

# 2015 5 19


: 졸업 작품은... 그게 아크릴을 벽에 발라서, 본을 다음에 캔버스에 붙이는 작업이었나?







< 벽화 시리즈, Untitled 1, 2>, 2014, 계원예술대학교 정보관 8 공통강의실, 비상계산 6층에서 7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배치


: 붙이거나, 아니면 캔버스에 아크릴을 바른 다음에, 벽을 본뜬 것을 캔버스 위에 붙인 다음에 말리는 . 그리고 떼어내는 .

 

: 아크릴의 물성에 관해서 뭔가 작업을 하고 싶었던 건가?

 

: 아크릴의 물성을 가지고 무엇을 있을까, 라는 고민에서부터 출발을 맞다.

 

: 그럼 거기에 벽이라는 개입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 당시에는 일단... 졸업 작품이다보니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내가 기획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업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때 일단은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한 불가능한 지의 여부를 확인을 해야할 단계라서, 공간을 먼저 본떠 보는 것을 시도했었다.

 

: 그럼 본을 뜬다는 아이디어가 처음에 있었고, 본을 대상으로 만만한 골랐다, 정도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회화 자체를 벽으로 취급해보고 싶었던 건가?

 

: 그런 것도 있었다. 일단 공간을 뜨는 것보다는, 그땐 타일이라는 단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이은우 작가 리서치를 과제로 했었는데, 보면서 공통 분모 같은 있지 않나 싶었다.

 

: 공통 분모라는 것을 설명해달라.

 

: 그때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 이은우 작가 작업 중에는... 정보를 어떻게 미술로 만들 것이냐의 문제가 개입을 작업들이 있지 않나. 사실을 어떻게 사실로서 다룰 것이냐, 이런 생각도 들고.

 

 : 그렇다.

 

: 그런 부분에서 영향을 받았던 건가?

 

: 어떤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시각화하는 작업 보다는, ... 스티커 가지고 했었던 작업? 레디메이드 공산품으로서의 단위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모습에서 비슷한 점을 찾았던 같다.

 

: 그럼 회화를 레디메이드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졸업 작품 있었던 건가?

 

: 그렇다. 캔버스 자체도 타일과 유사한, 아니면 타일이라는 단위로 포착 가능한 단위로 취급하려고 했었다.

 

: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저번에 서지현 씨와 인터뷰 했을 때는, 분은 무조건그리기 본인이 처한 어떤 상황을 돌파... 돌파는 아니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대충 그런 의식이 있었는데, 당신은 반면에 집단오찬 전시에서는 그리기를 해보았다가, 다음에 졸업 작품을 때는 그리지 않고, 아크릴의 물성을 활용해서 캔버스를 구성하지 않았나. 사이에서 어떤 변환 같은 있었다면 어떤 내용이었나?

 

: ‘메타몬작업을 때도 물성에 대한 관심은 가지고 있었다. 근데 물성이, 그리기로써 묘사가 되는, 포착이 되는 물성이었는데, 그때 내가 설정한 가상의 캐릭터로서의메타몬 무엇이로든 변할 있고 그려진 대상, 그려지는 방식 자체가 메타몬의 변신이었다. 그런데메타몬 경우에는 그리기로 일단 나타났던 거고, 졸업 작품일 경우에는 아크릴의 물성만으로도 구현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일단 그게 연작이기는 하다. 물성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 그러면 작업들도메타몬이라는, 당신이 만든 세계관의 부분으로서 자리하는 건가?

 

: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근데 그게 작업으로 구현되었는지는 모르겠고.

 

: 일단 생각만 해두고 있었던 건가? 나중에 써먹을 만하다 싶으면 써먹으려고?

 

: 그때 졸업 작품을 하면서 내가 물성에 대한 관심이 있었구나라는 연장은 느꼈다. 작업을 하고나서 이것도메타몬이라는 세계관으로 포함시키는 가능한 기법인 같다는 생각을 했고.

 

: 조금만 설명을 해달라.

 

: 되게 나가는 이야기긴 한데, ‘메타몬이란 것은 아크릴 자체였다.

 

: 풀어서 설명해줄 있을까?

 

: ‘메타몬작업할 망상력이 폭주를 해가지고, 그때 적립되었던메타몬이라는 구조 자체가 되게 허무맹랑하기도 하고... 오히려 제약 조건이 없었던 같다. ‘메타몬이라는 설정만 있는 거고. 그래서 아크릴을 통해서 뭔가를 재현할 , 한번메타몬이라는 설정으로, 재현되는 대상을 걸러주는? 그런 기능을 했다. ‘메타몬.

 

: 그럼 당신이 표현하고 싶었던 어떤 회화적인 구성이 있고... 그것에메타몬이라는 필터를 장착한 거고, 거기에 투과되어 나온 것이 아크릴이라면, ‘메타몬 필터로서 작동하는 방식에 당신이 고려해두고 있었던 원리 같은 것은 있나?

 

: 원리라기보다는...

 

(중략)

 

: 졸업 작품때 했었던 작업 같은 경우에는, 아크릴과 유화가 엄청 다르지 않나. ‘뭐가 회화적이냐라고 한다면 나는 유화인 같다. 그런데 일단 아크릴로는 본을 수가 있으니까. 어떤 대상의 양감을 복제한다는 ? 혹은, 대상 자체를 본을 떠서, 대상이 가지고 있었던 양감 전체를 그대로 복사한다는 것은 조각에서 있었던 발상이고... 조각가들이 뭔가를 본을 뜨고 복제를 하듯이, 그런게 아크릴로도 가능하기는 하니까. 그런 생각을 했었던 같다.

 

: 임근준 씨가 일전에 트위터에서 조각적 회화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당신도 그런 염두에 두고 있었나?

 

: 애초에 아크릴에 조각적 성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같다.

 

: 그럼 굳이 캔버스를 사용한 것은 이유가 무엇이었나? 캔버스를 사용함으로서 어쨌든 회화라는 맥락을 인용했는데. 거기엔 어떤 이유가 있었나?

 

: 회화적인 인용했다기보다는, 애초에 아크릴이라는 것은 회화의 기본적인 재료이지않나. 그런데 아크릴 자체가 무언가를 본뜨는 적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조각적인 성격을 인용한 것에 가까운 같다.

 

: 헌데 캔버스라는 서포트로서 확실히 있었다. 아크릴 판을 사용한다던가, 캔버스 자체를 바꾸지 않고 위에 본뜬 것을 부착해서 모양을 만든 데에는 회화라는 맥락과 관련해서, 뭔가 이유가 있을 같다.

 

: 모르겠다. 작업하면서 회화를 인용했다는 생각은 해본 없다.

 

: 그럼 작업을 어떤 생각을 했나?

 

: 일단 조건이 중요했다. 머릿속에서. 회화의 제일 기본적인 도구는 그대로 사용하자라는. 캔버스랑, 아크릴이랑, .

 

: 붓도 사용했나?

 

: 그렇다. 붓으로 본뜨고 붙인 거다.

 

: 위에다 약간 회화적인 터치를 가미한 작업도 있었지않나?

 

: 덧그린 없었다.

 

: 나는메타몬작업을 처음 보고 이건 회화적 회화를 시도한 건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아예 없었던 거네. 그럼 그건 아크릴의 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뭔가 덕지덕지 처바르고 레이어를 만든 것일 , 회화적인 회화라고 말할 만한 바는 없었던 건가?

 

: 회화적 회화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뭐라고 해야 하지? 붓질 하나하나가 굉장히... 생동감이 있잖나. 특히 그런 경향은 붓질 하나하나가 입체적인 유화에서 두드러지고. 근데 나의 경우에는, ‘메타몬그림을 그릴 생겼던 붓질 위에 붓질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식으로, 납작한 이미지로 만들었었다.

 

: 그럼 뭔가 조각적인 방식으로 캔버스를 구현해야겠다는 모티브를 얻은 어디서부터였나? 만약에메타몬작업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전제가 되어있었다면. 아니면 딱히 그런 의식은 없었나?

 

: 있었다. ‘메타몬작업을 때도, 캔버스는메타몬이라는 캐릭터가 놀거나 무언가로 변신을 있는 장소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진짜로 오브제라고 생각을 했었던 같다. 나중에 , 이상한 생각을 때는, 메타몬이 캔버스를 나오는 상상도 했었고.

 

: 그럼 정말 뚫고 나오는 것처럼 이렇게... 부조처럼 튀어나오는 건가?

 

: 그때도 졸업 작품 했었던, 그런 방법을 염두하고 있었는데... 그런 걸 상상했었던 것 같다.

 

: 그러면은, 이전에 서지현 씨를 인터뷰 했을 때는, 레퍼런스를 물었을 김민애 작가와 제니조 작가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당신 같은 경우엔 작업할 레퍼런스로 삼았던 작가들이 있었나?

 

: 없었다.

 

: 이은우 작가 얘기 했었지 않나.

 

: 이은우 작가 이야기는, 아까 얘기 했듯이 작업을 하다가 이은우 작가 리서치를 해보니까, 재현 대상의 성격?  대한 관심사는 비슷하구나 싶었다.

 

: 뭐라 그래야 되나, 물건에 대한 관심사였던 건가?

 

: 아니, 표면에 대한 관심사였다. 그때는 타일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단위에 대해서 흥미가 있었다.

 

: 어떤 방식으로 있었나?

 

: 예측 가능하겠지만, 학교 다니면서 졸업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장소특정적 맥락으로 읽는 사람이 되게 많았다. 근데 사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있는 요소들이 있는 , 작업이 본을 대상을 지시하게 되니까? 그런데, 타일을 포착하고 타일을 재현한다는 것은 공간을 재현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타일이라는 , 공간에 대한 장식적이거나 기능적인 단위인데, 공간의 표면에 진열이 되고, 그걸 내가 본뜬다고 했을 , 이곳과 비슷한 또다른 저곳을 상정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타일 같은 것들은 어디에든지 배치될 있고 어디에든지 가미될 있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장소특정적으로 읽는 사람들이 많았던 같다.

 

: 그런데 그런 전혀 아니었던 같다.

 

(잠시 멈춤)

 

: 이야기가 너무 맥락 없이 오고 가는 같아서 잠시 멈추었다. 아까메타몬이라고 설명했던 단어가, 회화에서 어떤 물성을 상징하는 상징 체계로서의 어떤 세계관이라고 얘기해볼 수도 있을 같은데, 이건 추후의 작업에서도 계속해서 반영이 되는 어떤, 작업의 맥락이 되는 주제인 건가?

 

: 그렇다. 메타몬이라는 소재를 내가 끌고 가는 , 캐릭터 속에서 그리기와 양감을 본뜬다는 , 둘은 결국 완전히 동등한, 수평적인 관계인 같다. 메타몬이 있는 것들 하나인 같다.

 

: “것들 하나”라면, 앞으로도 작업의 방법론이 변할 여지가 많이 있다는 뜻인가?

 

 : 있을 것 같다.

 

: 그럼 지금은, 당신이 말한 메타몬이라는 세계관이 재현되는 방식이 어떤... 물질로서의 아크릴을 반영하는 캔버스, 라는 형태로 많이 재현이 되고있지않나. 부분은 앞으로 얼마나 발전이 한가? 뭔가 형식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두고 있는 있나?

 

: 아크릴이 리넨 천을 대신하게 되는 ? 아크릴만으로 리넨 천의 질감까지 재연할 있으니까, 결국은 아크릴 자체가 천의 모양새가 있을 같다. 만약 (아크릴로) 리넨 천을 본뜬 다음에, 거기에 그리는 식으로 본을 다음에 캔버스에 붙이면 그건 프린팅 것처럼 납작한 이미지가 리넨 천을 대신해서 붙어있는 거지.

 

: 그럼 아래에서 리넨 천을 (아크릴로) 본뜬 모양도 드러나고.

 

: 완전히 드러나고. 표면은 프린팅 것과 똑같이 생겼을 거다.

 

: 프린팅이라고 말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저번 인터뷰에서도 프린팅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서지현 씨의 경우에 프린팅이라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를 프린터로 비유하고, 어떤 경향을 대신하는 수동적인 위치로서의 작가로 자신을 위치시켰는데, 당신의 경우에 프린팅은, 동일하게 비유적인 관계를 가지긴 하지만 어떤 물성을 제시하는 단어이지않나. 그러면 당신은 무언가를 대신해서 발화하는 수동적인 위치로서의 작가... 라는 화두는 주제 삼고 있지 않는 건가?

 

: 듣기로는 비슷한 같다.

 

: 그럼 당신에게도 스스로를 수동적인 위치로 자리해놓는, 그런 있는 건가?

 

: 그렇다. 메타몬 작업은 애초에 그런 맥락이니까.

 

: 당신은 메타몬의 대행자라는 느낌으로. 알겠다.

 

: 그런데...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프린팅 이미지는 정말로 납작하다. 그리고 이게 프린팅 되었다는 것을 정말로 있다. 내가 만든 것도 그럴 같긴 한데, 그런데 천 질감의 아크릴이니까... 그려진 붓터치 하나하나가 쌓여있다고도, 실제로는 쌓여있는 건데, 그게 납작하게만 드러나는 거니까. 모르겠다. 뭔가 ... 상상만으로는 납작한데 엄청... 뭔가 두껍지 않을까 싶다.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이윤성 작가의 작업을... 본을 뜨는 식으로 내가 그린다면, 그리는 것보다 훨씬 쉽게 구현할 있겠다는 생각? 이윤성 작가가 엄청 납작하게 모에 그림을 그리지 않나. 포토샵으로 그린 것처럼? 근데 그게그렸다 점에서 납작한 물질성들이 강조가 되는데, 캔버스를 본뜬 다음에 위에 그림을 그리는 나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본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 하필 이윤성 작가였나? (그림이) 아름다워서?

 

: 그려서 납작하다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의 공간을 연상케 하는) 차력이?

 

: 그런가. 헌데 납작함이라고 하면은 사실... 일전에 커먼센터의 트위터 계정에서 얘기를 들은 같은데, 지금의 회화들이 갖는 공통된 특성이기는 하다. 그런데 하필 이윤성 작가가 그런, 당신의 새로운 방식에 참여를 수도 있겠다고 망상을 것은, 분이 납작함을 활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기 때문인가?

 

: 그런 같다. 사실 커먼센터의 <오늘의 살롱> 걸렸던 그림들에서 종종 감지할 있었던 납작함은, 뭐라고 해야 하나, 애초부터 해상도가 낮은 대상인데, 그게 재매개되고 열화된 이미지를 다시 한번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 그런데 그럼으로서, 재현한 대상이 재차 열화되고 있다는 느낌? 그런 점에서 이윤성 작가의 납작함과 다른 납작함이 구별되는 것 같았다.

 

: 그럼 최근에... 회화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예를 들어 텀블러 같은 데서 찾아봐도, 정말 회화 작업 밖엔 없다.

 

: 나는 텀블러를 해서 모른다.

 

: 아무튼 외국의 젊은 작가들이 회화 작업을 많이 하는데, 그런 작업을 찾아본 있나?

 

: 없다.

 

# 2015 5 25


: 이번엔 당신이 만들고 유지해나갈 세계관? 그런 것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기로 했다.

 

: 집단오찬 전시에서 했었던 작업일 경우에는... 일단은 그리기로 작업을 했었었는데, 이후에 졸업 전시에서 했었던 작업일 경우엔, 내가 메타몬은 결국 아크릴이다... 라는 식으로, 저번에 되게 투박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졸업 작품은) 구체적인 형태를 얻을 있는... 시도 하나였고, 실제로 거기서 뭔가를 얻어간 같다. 그러니까... 순화해서 얘기를 해야할 같은데, 저번에메타몬은 아크릴이다라고 했던 얘기는 결국에는 내가 아크릴을 써서 메타몬을 그리는데, 그리기로써 내가 집단오찬 작업에서도 대상을 확정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결국에는 캔버스에 발라지는 무언가 자체가...

 

: 어떤 세계관 속의 생물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 그렇다.

 

: 졸업 전시에 걸었던 작품도 동일한 논리고.

 

: 그렇다. 그런데 집단오찬 전시의 경우에는 단순하게 그리기였을 뿐이었니까,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드러나는 없었던 같다. 그래서... 이후에 졸업 전시 얘기로 넘어가면, 아직 메타몬과는 접점이 없었다. 거기에 아직 메타몬이라는 이름도 붙이지 않았었고. 그냥 액상 실리콘을 사용해서 아크릴에 조각과 비슷한, 재현하는 대상의 표면 같은 것들을 따오는 시도를 했었던 건데, 거기에서 앞으로 작업과의 연속성은... 그리는 방식으로, 동시에 아크릴의 조각적인 요소 같은 것을 담보할 있었다는 ? 여기에서 앞으로 비빌 구석 같은 것들을 찾아볼 같다.

 

: 그럼 ... 그리는 것은 계속 사용할 건가? 작업을 유지하는 도구로써?

 

: 그리기라는 말보단 붓질이 적합할 같다.

 

: 그렇다면 회화적 회화를 의태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하는 건가?

 

: 아니, 그런 요소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말로 하니까 좀 복잡한데, 결국 내가 어떤 대상을 본을 뜬 것에, 아크릴을 써가지고, 표면을 재현한 다음에 뜯어내거나 캔버스에 붙인다는 자체가, 본뜬 것에 아크릴을 바르는 일 아닌가. 그걸 바를 때 나는 붓을 사용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이미 그리기, 혹은 붓질이 들어가지.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 뜯어내서 캔버스에 붙여놓았을 때는, 그 본뜬 것의 표면 같은 것이 그대로 따라오게 되지 않나. 그런 점에서 아크릴이 가지고 있는 조각적인 성격이 붓질을 통해서 형태를 갖게 되니까. 그런 의미로 이야기를 했었던 거다.

 

: 직접적으로 들어간다기보다는, 작업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구로 사용된다는 소리인가.

 

 : (직접적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 그럼 작업을 진행해보아야 있겠다.

 

: 하여튼, 그때 집단오찬에서 했었던 작업이나, 졸업 전시에서 했었던 작업일 경우에는 앞으로 안할 같다.

 

: 그럼 앞으로도 작업이 많이 바뀔 같다.

 

: 그렇다. 일단 졸업 전시에선 공간을 본떴으니까...

 

: 이번에는 할지 생각 중인가?

 

: 생각을 하고 있다.

 

: 그럼 , 세계관을 만들어서, 속에서 어떻게 서사화를 시킨다던가? 그게 전부 캔버스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않나. 그럼 이전의 회화와 지금 당신이 하려는 어떤, 그림처럼 보이는 무언가의 사이에 뭔가 단절되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인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인식이... 있었나? 기존의 회화가 성립되는 방식으로 당신의 방법론을 부착시키는 아니고, 약간... 다르게 해볼까, 라고 생각하게 되었나? 아니면 딱히 그런 없었나?

 

: 작업을 하면서 그런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는데, 의식적으로 이렇게 하려고 했었던 아니어서.

 

: 하기는 집단오찬 전시에서도 그리는 걸로부터 출발을 했었지.

 

: 하여튼, 그리기가 아니라 ... 그려진 상태를...

 

: 재연하는 건가?

 

: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 그런 부분을 손댈 있을 같아서?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 아무튼 뭔가를 재연한다는 생각은 있는 거네?

 

: 맞는데, 재연하는 대상과 연결은 안될 같다.

 

: 그럼 어떤 역사적인 지시물을 참조하는 방향으로, 어떤 참조성을 작품에 집어넣어 생각은 없나? 그렇게 하면은 훨씬 뭔가, 어쨌든 회화라는 매체를 가져가는 ... 미술사의 부분을 가져가는 거니까. 그게 당신 작업에 레이어를 집어넣어줄 같다는 생각이 있다.

 

: 현재로선 아직 그럴 생각은 없다.

 

: 그럼 앞으로, 당신이 메타몬이라는 이름으로 아크릴을 여기저기 뿌려대고, 그것을 하나의 서사로 종합해서 묶을 , 그런 역사적인 참조를 하게 수는 있겠네.

 

: 그럴까? 모르겠는데.

 

: 너무 생각인 같다. 죄송하다.

 

: 다른 사람들이 그린 그림의 표면을 가지고 작업을 해보고 싶기는 했었다. 왜냐하면 수집할 있으니까.

 

: 수집이라는 어떤 의미인가?

 

: 양감을? 사람이 내가... 그림의 표면을 액상 실리콘으로 본뜨는 것을 허락만 해준다면. 이건 다른 이야기긴 한데.

 

: 장기적으로 가져가볼 이런 저런 생각들은 있는 같다.

 

: 그렇다.

 

: 그럼 대충 이쯤에서 끝내면 될까?

 

: 그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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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오브제-그리기 : 서지현 인터뷰]


# 2015 3 31

 

물어본다 황재민 (이하 황) : 졸업작품 이야기 먼저 해보자. 사실 처음에 작품을 보고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회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고, 회화를 하는지에 대한 전제 조건이 확립되어야 한다고 느꼈고... 아니 졸업작품 설명을 먼저 해야하나?

 

답한다 서지현 (이하 서) : (웃음)

 

: 그때 졸업 전시를 계원예대 정보관에서 했던 걸로 아는데, 정보관 건물을 님이 베껴 그렸다. 그리고 오브제처럼 배치시키고... 일단 제목이 <좌절하는 오브제>이기도 했고.


<좌절하는 오브제> 2013, 계원예술대학교 정보관 건물 7층에서 8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배치

 

: 그랬지.

 

: 나는 그걸 회화를 오브제화化 시킨다기 보다는... 공간을 베껴 그린다는 ? 거기서 분이 얻었구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생각으로는 약간 장소 특정적 이런 생각도 하긴 했는데 그거랑은 달랐고.

 

: 근데 사실 전시 공간이 학교 옥상이었고. 뭔가전시 하는 화이트 큐브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섞일 수밖에 없었던 같다. 나도 사실은 그걸 베끼는 데엔 이유가 없고 그냥 거기다 전시를 하니까 건물을 베낀 거였는데... 근데 나중에 해놓고 보니까 정말 장소 특정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어버린 거지.

 

: 근데 장소 특정성이라는 맥락이랑은 차이가 있긴 하다.

 

: 전혀 그런 아니었다.

 

: 오히려 현상학적 장소 특정성이라는 미니멀리즘의 전제를 좀비적으로 활용한? 게다가 그걸 진짜로... 손으로 그렸으니까. 그게 약간 의아한 부분이다. 일단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은... 어쨌든 지금 회화는 전부 오브제다. 2D 3D 됐는데, (작업이) 다소 초보적이긴 하지만 그걸 효과적으로 반영하긴 했었던 같다. 공간을 그려서 튀어나오게 다음 오브제로 삼았으니까. 과정에서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 장소성이라는 맥락을 참조하기도 했었고.

 

: 그리고 실제 오브제를 가져다 놓기도 했었고.

 

: 거기 오브제도 있었나?

 

: 그랬다.

 

: 오브제에도 물감 칠하고 했었던 아닌가?

 

: 그렇다.



: 아무튼 회화라는 맥락은 작업에서 중요하게 작용을 했던 같다. 일단 손으로 그렸다는 있었고.

 

: 회화라는 맥락을 강조하기 위해서 물감으로 칠했던 거였다.

 

: 처음에 다니엘 뷔랭의 작업실에 관한 글을 인용하기도 했었다.

 

: 참고를 했었다. 그런데 사실 텍스트는...

 

: 일종의 알리바이였나?

 

: 아니 알리바이는 아닌데... 작업이 작업이 되는 공간? 이라는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거기서 참고를 많이 했다. 왜냐하면... 글에서작업실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작업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같다. 그런 의미에서 회화라는 것은 항상 작업실에서 제작이 되고, 어딘가에 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회화가 오브제가 되면서, 이제 그런 절차는 상관이 없고, 그렇다면 전시 공간에서 만들어져도... 그건 뭐랄까, ‘작업 있게 되었다.

 

: 아무튼 이제 회화는 뭔가를 담고 있는 스크린이 아니라 자체로 오브제라는 생각은 전제가 되어있었던 같다.

 

: 그랬던 같다.

 

: 나는 그때는 변환을 읽고 있었다.

 

: 그때 나도 확신은 없었다.

 

: 처음 작업을 했을 때는 그걸 그렸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안다. 그걸 그릴 필요가 있는지, 사진으로 찍어서 오브제로 삼아야하는 아닌지?

 

: 그런 질문 많이 받았다.

 

: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었나?

 

: 그런 질문을 사람들은 사실 회화를 이미지의 범주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 같다. 근데 그때 나는 회화가 이미지라는 생각보다는, 회화에 관한 것을 하고 싶어서 작업을 그렇게 했던 같은데... 단순히회화가 오브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회화로 작업하는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었다. 사진으로 찍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는.

 

: 그렇다면 그리는 것은 이전에 행해졌던 그리기라는 행위와는 조금 다른, 그러니까 회화를 인용하기 위한 행위로서의 그리기였나?

 

: 그렇다. 그리고 실제로 전시 장소에서 작업을 만드는 것도 있었고, 전시 장소를 참고하지 않으면 되는 그런 작업이었다. 그러니까 사진으로 찍는 아무튼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비스러웠던 같다.

 

: 그런가? 모르겠다.

 

: 다른 이야기인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리기라는 행위가 약간... 진정성? 이런 느낌? 왜냐하면 제목도 좌절하는 오브제였으니까. 오브제가 좌절하는 회화였잖나. 그래서 그리기에 대한 회한이라고 그래야되나? 회한이라기보다는... 그리기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같은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데 나는 전혀 그런 입장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니게 회화라는 것이 좌절하는 상황... 이었다.

 

: 그럼 좌절이라는 딱히 가치판단이 들어간 단어는 아니었나 보다.

 

: 그렇다. 사실 나도 작업을 하면서 혼란스러웠고. 그래서좌절하는이라는 말이 들어간 같지.

 

: 그럼 이야기를 돌려보면. 그때 회화 작업을 처음인 것으로 안다. 2 동안 학교 생활을 하면서?

 

: 페인팅을 처음이었지.

 

: 그럼 계기 같은 있었나?

 

: 전에는 드로잉을 주로 했었는데, 드로잉을 때는 소주제로 (작업을) 이끌어 나갔었다.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매체적인 고민을 해야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사실 드로잉이라는 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정말그림이잖나. 종이 장이고. 그래서 어떤 매체적인 고민을 하는 작업을 하고, 그리고 그런 형태를 띄려면 어쨌든 캔버스에 해야겠다고 생각을 같다. 왜냐하면... 드로잉은 드로잉이라고 생각하고, 그림은 캔버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잖나. 여기서 말하는 그림은 2차원적인 평면이 아니라... , 캔버스.

 

: 캔버스 자체?

 

: . 오브제.

 

: 오브제에 가까운.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 당시에는 그런 전제가 아니었나 싶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 그러면... 회화를 3D 오브제로 취급하는, 그런 작업적 경향 중에 참고했던 있었나?

 

: 그때 참고했던 분은... 김민애 작가. 조각하시는 분이긴 한데, 형태적으로 많이 참고를 했었다. 그리고 제니조 작가도 참고를 했었고. 근데 뭐가 계기가 됐다거나, 이런 없었다.

 

: 그럼 아까 이야기했던, 회화를 구성하는 방법으로서의 그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사실 회화를 그려서 회화적인 맥락을 차용한 다음에 오브제로 제시하긴 했지만, 그림 자체만 놓고 보면 거의 회화적 회화에 가까운 붓터치를 보였었다.

 

: 붓터치를?

 

: 붓터치는 아닌가? 아무튼. 그걸 그려서 구성하는 방법은 회화적 회화에 가까웠던 같다. 그건 왜였나?

 

: 그건 사실 웃긴데, 내가 유화를 해본 적도 없고... 붓질이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작업에) 아크릴을 사용하기도 했었고.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붓질을 한다한들 그게 회화적 회화가 리가 없지, 라는 생각을 전제로 것도 있다. 그리고 졸업 전시 공간 자체가 옥상이었다. 그런데 회화는 나중에 어디에 전시가 되려면 옮겨다녀야 되지 않나. 근데 그게 만약에 나중에 다른 장소에 갔을 어차피 회화처럼 취급될 거란 말이지.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려야만 했었다.

 

: 그런 점을 보면 작업이 되게 공허한 같기도 하다. 그런 공허함을 그때는 눈치채고 있었나?

 

: 오히려 그런 고민에서 작업이 나왔던 같다. 그때는 회화가 작업실에서 만들어져서, 나한테 작업실은 전시 공간이었지만. 아무튼 만들어져서 나중에 전시가 것까지 전제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브제도 따로 목재로 만들었던 거고.

 

: 그럼 어쨌든 미술가로써 마주하는 현실적인 한계? 그런 것을 그림에 투사하려는 노력이 있었던 거였네.

 

: 그렇지. 오히려 그림에는 투사를 했다. 전시되는 형태라든지, 그런 부분에 투사를 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와 캔버스에 무엇이 그려져 있느냐는 서로 상관이 없었다.

 

: 그림은 지금 보관을 하고 있나?

 

: 집에 보관을 하고 있다.

 

: 딱히 작업실은 없나?

 

: 없다. 그래서 웃기지. 옛날에는 작업실 가지고 고민을 , 작업실도 없고 집에서 작업을 해야하니까. 집안 같은 그리려고 했던 적도 있다. 근데 그건 너무 웃겨질 같아서 관뒀다.

 

: 그럼 공간을 덧그려서, 어떤 공허한 미디엄으로서 회화-오브제를 만들어냈는데. 그걸 다른 곳에 걸면 맥락과 달라지지 않나. 오브제가 아니라 회화가 되는데, 그런 낙차 같은 것은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건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 내버려두는 훨씬 좋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그린 공간이라는 것도 사실 공간감이 없지 않나. 그림 자체만 보면 공간감이 전혀 없는 평면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게 전시가 되었을 때는 오브제로서 작용을 한다고 생각을 했었던 거고. 작업이 장소에 있지 않고, 벽에 걸려있다든지 바닥에 놓여있다든지 했을 경우에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이건 벽이네, 바닥이네생각하는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패턴이라든지, ‘뭔가 평면을 구성했네?’ 라고 생각하길 바랐던 거다.

 

: 그런 점에서는 구세대적인 회화와 연결고리가 아직 있는 같기도 하다. 오브제가 되고, 그리기와 멀어지는 작업을 해볼 생각은 없나?

 

: 사실 나는 그렇게 나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밖으로 튀어나가고 그런 떠나서, 안에서 미묘한 조절을 하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모르겠다.

 

: 그럼 요새 북미에서 유행하는 추상 회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그걸 보면서 저기까진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거지. 바운더리를 정한달까. 근데 사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필요하다기보다는 어쩔 없는 아닌가?

 

: 어쩔 없기도 하고. 나한테 필요하지.

 

: 어떤 방식으로?

 

: 그러니까 뭔가 회화의 범위? 조건? 이런 것을 주제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써.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그게 지표의 일부가 되니까. 거기로부터 어떻게 떨어질 것인가, 아니면 거기로부터 얼마나 멀리 것인가를 결정하는 되게 중요하지. 사실 나는 어떤, ‘ 회화는 이제 이미지가 아니라 오브제구나라는 자각한 이후부터는 그렇게 멀리 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 하든 어쨌든 오브제니까?

 

: 그렇지. 근데 , 사람들이 굉장히 빨리 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고. 내가 거기에 뛰어들기에는 조금.

 

: 그럼 적극적으로 오브제가 되려고 해야 하는 아닌가? 아무리 페인팅을 해봤자 오브제가 된다면, 그럼 결국 2 오브제를 만드는 아닌가.

 

: 그런가?

 

: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약간... 당신이 아직은 지금 지나가버린 회화와 연결되는 지점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같다.

 

: 그런 것도 있는데, 그렇다고 내가 뭔가, ‘회화는 어찌되었든 이미지야 추구하는 아니고... 그게 웃기다는 거지. 여지껏 사람들은 회화를 이미지로 봐왔는데... 그러니까, 뭔가... 모르겠다. 아직은 약간 왔다 갔다 하고 싶은 같다. 어쨌든 회화가 되기 위한 조건은 아직 많이 남아있잖나. 그리느냐부터 시작해서. 그걸 하나하나 조절을 하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 있는 같다.

 

: 지금은 주장해도 말이 되는 시기니까. 괜찮을 같다. 다만 그렇게까지 회화의 오브제화를 거부하고,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약간 자괴적인 같긴 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지에 그렇게 미련을 두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브제화한 회화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어쨌든 이미지를 지향한다는 걸로 밖에 들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 거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사실은... 그걸 오브제라고 생각을 한다면, 나는 캔버스 작업을 하지 않을 같다.

 

: 아예 오브제 작업으로?

 

: 그렇다. 근데...

 

: 헌데 지금의 3D 2D 않나. 아무리 공간감이 있고 밀도가 있고 거리감이 있어도, 그걸 납작하게 인식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 그렇다. 이것도 보면 약간 도피적인 측면이 있는데, 내가 3D 작업을 해봤자 2D 2D 작업을 해봤자 3D라면, 차라리 캔버스라는 굉장히 편리한 도구가 남아 있는데. 그걸 내가 버려야 하지? 이런 생각도 하고.

 

: 하지만 나는 캔버스를 활용하는 방법이 그리기 밖에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근데 당신은 그리기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나.

 

: 그건 아직 모른다. 버릴 때가 되면 버리겠지. 근데 그리기로 해보고 싶은 것들이 약간은 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해상도라든지. 도판으로서의 이미지라든지. 그런 것들이 있었다. 내가 회화적 회화를 하지 못함? ? 으로써 생기는 평면적인 느낌에 대해서도 다뤄보고싶고.

 

: 그런가.

 

: 그리고... 글쎄. 나는 굳이 오브제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정말 오브제를 함께 사용할지언정, 캔버스의 틀을 바꾸거나, 그런 하지 않을 같다.

 

: 어째서? 이유를 알고 싶다.

 

: 그건 그냥 2차원 평면으로 돌아가는 일인 같다. 그건 뭐랄까, 나는 지금 줄타기를 하고 싶은 같다. 지금으로써는.

 

# 2015 4 9


: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가 줄타기 이야기였나?

 

: 아마도.

 

: 그럼 줄을 타는 너무 안전한 선택이라고는 생각하지않나? 그래서 오히려 위험할 같다는 생각?

 

: 그렇다. 그런데 줄타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뛰어내려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뭐가 보이니까.

 

: 어쨌든 그럼 한시적인 전략인 건가?

 

: 일단 그걸 잡고 살아남아야겠지.

 

: 그럼 줄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