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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의 입출력, 곽이브와 윤향로의 사례>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각종 스마트 미디어와 매개된 사용자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가늠하지만, 물리적인 현실의 토대 자체는 그만큼 유동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기반의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의 티저 영상에서 (스마트폰 디바이스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한 채) 현실과 고스란히 합성된 게임 인터페이스로 각종 포켓몬들을 포획하는 장면은1), 굳이 발매 이후 실제 플레이의 감도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해당 영상을 접한 대다수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을 증강현실의 확장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증강현실이라는 수사는 현재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동기화한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부연하는 데 어느 정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단 이때의 증강은 현실감을 교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디스플레이의 형태가 아니라, 스마트 미디어가 현실의 풍경을 포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사용자의 내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오작동에 가깝다.


무엇이 어떻게 오작동하는가, 라는 뒤이은 질문은 디지털 환경을 의식하거나, 그것을 나름의 표준으로 삼거나, 포스트 디지털이라는 모호한 담론 속에서 공회전하다 튕겨져 나온 파편들을 뒤늦게 재료로 주워섬기거나, 설사 열거한 사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더라도 다중적인 사용자 계정들과 연계된 채 두서없이 전개 중인 이미지-서사와 병행하는 일련의 미술 작업들의 접점을 암시한다. 당대의 미술을 통해 굳이 그러한 오작동의 징후를 가늠하려는 이유는 내가 사용자인 동시에 작업의 생산자 또한 어쩔 수 없이 사용자를 겸하기 때문이다. 미술이 여전히 무언가 재현해야 된다면, 이는 사실주의의 오래된 규약에 따라 웹상에 유통되는 가난한이미지를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거나 열화한 이미지 자체를 프레임 삼아 쳐다본 현실을 반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용자(이자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의 단위를 모색해나간다. 앞선 오작동의 정체는 그러한 시도들의 느슨한 교차범위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은 결국 특정한 이미지가 가상의 인터페이스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이를테면 여타의 편집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각적 패러미터는 원본 이미지에 투영된 실제 구성물들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표면상에 각종 효과를 적용할 뿐이다.2) 그런 의미에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마법소녀물의 특정 장면에서 주인공이 방출하는 에너지 효과를 줌인해 일부만을 발췌함으로써 원본 아니메나 해당 시퀀스의 맥락 등은 모두 소거한 채 오로지 표면으로부터 불거진 듯한 산란한 시각적 패턴만을 유사 회화로서 제시한다. <스크린샷>의 패턴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전사前史도 추론해낼 수 없다. 이러한 선택은 마치 이제 더 이상 이미지가 생산된 실제 맥락이나 의도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그것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적어도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 기계에게는 부재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샷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며, 방출되는 에너지는 스샷의 우발성과 다름없다.


<스크린샷> 연작이 일관되게 고수하는 미시적 레벨은, 일단 디지털의 권역에 속한 이미지는 원본의 위상과 무관하게 레이아웃 상에서 다양한 배율로 조절하거나 일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유동적인 시점 변환의 과정에서 이미지 자체가 얼마든지 픽셀 차원에서 망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윤향로는 편집 툴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는다. 작가가 확보하고 있는 사용자의 권한은 이미지 자체를 부러 관통하지 않는 표면상에서의 제한된 전개가 어떻게 이미지를 왜곡하고 때로는 의미론적 가치마저 무시하는지, 무엇보다 이러한 수순들이 열화의 한 방식이라면, 기꺼이 열화함으로써 어떻게 회화와 유사한 순간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때의 유사 회화라는 전제는 미국 코믹스나 일본 고전 만화와 같은 낯익은 대중문화 레퍼런스들을 재료 삼은 이전 작업들에서도 주지되는데, 이때의 회화적 화면은 커버 이미지에서 인물들을 소거함으로써 미장센을 강조하거나 만화의 동작선들을 발췌해 재조합하는 등, 이미지에 개입하고 있는 사용자의 존재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혹은 이때의 사용자는 편집 툴을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 <스크린샷> 연작에서는 사용자와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이 혼선되며, 앞선 거리감이 일순 무효화된다.


윤향로, Screenshot 3.02.24-1, 2017, Acrylic on canvas, 116.8 x 80.3 cm


<스크린샷>에서 사용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에 얼마간 몰입하거나 최대한 밀착함으로써,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이미지-표면의 세부에 천착한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방출 에너지를 과도하게 확대하고 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포토샵 브러쉬처럼 번진 망점과 궤적들, 두서없이 중첩된 레이어들의 위계와 같은 디지털의 질감이다. 윤향로는 이를 재차 회화로 옮김으로써 디지털과 매개된 당대의 조건에 수렴할 만한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결과가 실제 편집 툴에서 작동하는 효과들과 얼마만큼 유사한 지 대질해볼 필요는 없다. 일련의 작업들은 편집 툴에 열거된 패러미터의 세목들을 일일이 고려해 얻어낸 정교한 결과값이 아니라, 유사 회화를 맹목적으로 지향하며 열화를 거듭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동기화한 사용자는 디지털의 조형성에 통달한 전지적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인터페이스의 역학에 순응함으로써 우발적으로 망가지는 이미지의 목격자에 가깝다. 이러한 수동성이 원본을 유사 회화라는 자의적인 이미지로 희석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인 지, 작업과 별개로 대다수 사용자에게 보편적으로 그어진 한계인 지는 불분명하다. 어찌됐든 우리는 전자의 결과를 통해 후자의 조건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스크린샷>이 디지털의 권역을 불안정하게 활공하다 임의로 정한 기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본질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구간이다. (물론 이는 윤향로를 포함해 디지털 환경을 작업의 토대로 삼거나, 각종 편집 소프트웨어를 작업 도구로 삼아 전시공간을 점유해야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내리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작가는 사용자로서 목격한 이미지의 표면을 회화적 오브제를 연출하듯 캔버스 위에 빈틈없이 도포함으로써 디지털의 질감을 불완전하게나마 물성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 회화의 이미지를 카페트처럼 직조하거나 라이트 박스로 조립하는 등, 원앤제이+에서의 개인전 이전에 선보인 <스크린샷> 연작의 일부는 자연스레 동일 이미지를 다양한 물리적 판본으로 리부팅시키는 모의실험처럼 독해된다. 이 모두는 결국 (작업을 매개로 새로운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듯) 회화 차원에서 전개할 만한 새로운 조형적 단위를 모색하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단순히 캔버스에 투사된 추상적인 평면이 아니라 캔버스를 감싸고 있는 표면으로 외화하고, 디지털 질감과 결코 일체화될 수 없는 아크릴 물감의 이질성은 이미지-표면이 현실로 이전됨으로써 두드러지는 (초평면의 관성과는 대비되는) 굴곡으로, 캔버스라는 오브제는 현실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해 오작동하는 일종의 물리적인 인터페이스로 전유된다. <스크린샷>은 일련의 편집 툴에서의 시각적 패러미터가 오로지 표면상에만 관여한다는 전제를 고수한 채, 발췌한 이미지-표면에 회화를 매개로 한 질감과 중량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샷의 결과물들은 단순한 낱장이 아니라 현실의 중력을 수용하며 랜더링을 거친 일련의 캔버스 오브제로서 혹은 묵직한 표면으로서 나열된다.

 

한편 취미가 2층에서 진행한 곽이브의 <역할 part> 프로젝트는 결국 하나의 회화로 압축해낸 <스크린샷> 연작과 달리 이미지들이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 자체를 제시한다. 각각 다른 그래픽 이미지가 출력된 A1사이즈의 프린트들은 바닥에 무방비하게 놓여있거나, 액자 속에 담긴 채 진열되거나, 공간 중앙에 놓인 장방형의 구조물에 일정한 군집을 이룬 채 달라붙어 있는 등, 뚜렷한 규칙 없이 배분되어 공간 속에서 느슨한 얼개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한 풍경은 얼핏 그림 카드들의 무작위한 배열 속에서 우연찮게 들어맞는 조합을 찾아내는 게임 같기도 한데,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프린트들 사이의 관계를 억지로 작도해서 게임을 단판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프린트가 낱개로 놓여있든 일정한 군집을 이루고 있든 간에 어떠한 유의미한 이미지 조합도 형성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름, 커튼, 유리판, 그리드와 그물망 패턴, 그 외의 기타 자재들은 (실사의 부분적인 캡쳐본에 가까운 구름 이미지를 제외하고) 최대한 단순화한 그래픽 이미지로 번안되어 프린트 상에 압착되어있다. 도시적 건축의 표면이나 유리창 같은 자재들을 은유하는 납작한 이미지를 출력해 제시했던 작가의 <면대면> 연작의 맥락 속에서 고려해보면, 앞서 열거한 프린트들의 목록은 결국 취미가라는 공간을 작가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이미지의 시점으로 포착하거나 연상해낸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미지가 출처 삼은 공간의 특정성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모호해지는데, 이는 작가가 대면한 실제 공간이 순전히 프린트라는 레이아웃이 부과하는 관성에 부합하게끔 도식화됨으로써 현실의 정보값을 잃어버린 채 몇 가지의 단면들로 파편화됐기 때문이다. 곽이브는 이처럼 이미지의 시점을 경유해 주어진 단면들을 독자적인 단위로 삼아 원본으로서의 물리적 공간, 이를테면 취미가의 한 구간을 점유해나간다. <스크린샷>에서의 스샷혹은 원본의 (과도하게 확대된) 단면이 결국 현실을 향해 특징적인 회화적 오브제로 외화했다면, <역할 part>는 그보다 가벼운 중량을 지닌 채 역으로 현실을 이미지 차원에서 수렴하는 동시에 무력화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단면들은 공간 속에서 작가의 자의에 따라 군집하거나 무방비하게 흩어지며 나름대로의 조형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역할 part> 프로젝트 전경, 취미가 201호 


여전히 <역할 part>를 일종의 카드 맞추기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는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배열 속에서 실제 공간의 해상도를 짜 맞추려고 하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원본으로 삼은 공간은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에게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다소 무미건조한 바탕으로 전락한다. 곽이브는 스마트 미디어나 디지털 환경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할 part>가 이미지를 매개로 특정 공간이나 대상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서 일상 풍경의 타임라인을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그리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후자에서 중요한 것은 업로드된 단편들이 사용자가 속한 일상의 전체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한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불연속적인 순간들로 환원시키고 이를 스냅샷의 형식으로 포착해 나열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곽이브가 탈착한 이미지의 시점은 동질적으로 구조화된 특정 공간을 여타의 단면들로 발췌함으로써 현실에서와 다른 맥락을 점하되, 그 결과가 투영된 프린트의 얇은 물성으로 말미암아 인스타그램 이미지와 달리 최소한의 물리적인 접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프린트에 코팅된 매끈한 표면은 관객의 시선을 온전히 수렴하는 대신 공간 내에 밝혀진 조명을 포함한 주변의 잔상들을 은연중에 되비추며, 프린트 외부의 현실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가 불화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유리판이나 커튼이 드리운 창문의 이미지가 단순한 그래픽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가상의 표면은 실제 코팅지의 물리적인 표면과 애매하게 중첩된 채 이미지의 안팎에서 현실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명확해지는 사실은 <역할 part>가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는 출력된 결과물에 불과하며, 어떤 관객이나 사용자도 더 이상 그 너머로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를 매개로 한 물리적인 공간의 편집 혹은 재구성은 프로젝트가 개막한 시점에서 이미 완료됐다. 이미 완료된 게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선별된 내용의 프린트를 필요에 따라 추가로 출력하여 이제는 이미지와 무관해진 물리적인 공간 위에 덧붙이거나 프린트 자체를 독립적인 단위로 삼아 주어진 배열을 바꿔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역할 part>가 점유한 취미가의 한 구간은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그것을 파쇄시킨 이미지의 얼개 사이의 분기점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곽이브와 윤향로가 최근에 선보인 작업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염두하고 있는 평면이라는 개념이 한때 모더니즘의 서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내적인 완결성을 지닌 채 존재했던 회화적 평면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 평면은 그것이 회화의 형태로 반복되든 프린트로 얄팍하게 출력되든 선택한 매체 자체로부터 비롯한 독자적인 특성이라기보다, 현실의 특정한 시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불협화음과 일시적으로 동기화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일종의 레이아웃에 가깝다. 문제는 이때의 레이아웃이 특정 작가가 전제하고 있는 사용자의 경험치 혹은 디지털과 어떤 식으로든 연루된 이미지 재료를 반영하기 위해 조절되는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규약이자 조형적 단위로서의 평면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로 외화되는 순간 부과되는 물리적인 하중과도 일맥상통하며, 디지털의 관성을 미술 차원에서 단순히 의태하거나 모사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 지를 재차 상기하게끔 한다. 어찌됐든 디지털을 시작점으로 해 몇 가지 상이한 차원에 걸쳐있는 이 시각적 다이어그램은 바로 그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전히 어떤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다.

 

반대로 그 어떤 이미지에 의해 부단히 조율되고 어긋나는 과정이야말로 서두에서 언급한 오작동의 정체이자, 어딘지 모르게 망가진 듯한 이미지와 해상도가 재생산되는 이유일 것이다. 설사 특정한 작업으로 외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시점, 이미지를 매개로 한 시점을 탈착한 채로. 미술이 과연 이러한 새로운 영점과 무관할 수 있을까? 반드시 디지털을 소리 내 읊지 않더라도, 어떻게 이에 부합할 것인가?

 

한편 레이아웃으로서의 평면이 현실에서 임의로 제시되는 순간 관객의 시선을 되비추며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자신이 기입된 특정한 매체를 거부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며 불투명한 표면으로 환원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점차 보편화하고 있는 시각적인 오작동이 평면의 질감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표면이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의 징후로서의 이미지를 사용자로서 입력하고 이를 미술의 언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출력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오작동의 지점이자 새로운 평면성이 도출되는 순간이고 주어진 매체를 갱신할 수 있는 여지인 셈이다. <스크린샷> 연작과 <역할 part> 프로젝트 사이의 느슨한 교집합 속에서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편집 도구, 평면, 레이아웃과 같은 단어들의 순차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당대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작가(이자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불화하는 방식 자체다. 이제 표면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 https://www.youtube.com/watch?v=IZ2L2sbYAj8

2) 이케아 홈 플래너 같은 어플리케이션에서 원본의 사진 속에 놓여있는 2d의 사물을 전방위로 조작 가능한 3d 객체로 변환시켜주는 기능 또한 일단 사물 이미지의 표면을 포착하고 사전에 확보한 데이터뱅크에서 그와 관련한 텍스처를 추출해 이를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엄밀히 말해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상해낸 3d 객체인 셈. 이는 캐릭터 피규어가 제작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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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강정석 x 김희천 x ? 유닛으로 질주하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지난 2017.2.1 ~ 2.7 산수문화에서 진행한 <비평실천>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해당 전시는 참여 비평가들의 글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 하에 집단오찬에 게재합니다. 글의 소유권은 필자에게 있고, 전시 이후 휘발되기보다 명시적인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에 일종의 해적판으로 공유하게 됐습니다혹시나 일전에 <비평실천>을 관람했거나, 관련한 내용을 숙지하고 있던 분들은 이를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http://sansumunhwa.com/critic/) 


프롤로그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지도 앱을 참조하며 실제의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리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방위 센서에 따라 지도 인터페이스 상의 유닛1)이 자신의 시점을 ()조정한다. 이를 지표 삼아 내가 걸음을 옮기면 유닛 또한 마찬가지로 납작한 텍스처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유닛은 나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사용자인 내가 위치 서비스를 비활성화시키면 다중 위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방송되는 중인 GPS대역과 나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치 수신기와의 매개는 일단락되며 그로 인해 유닛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달리 말해 유닛과 유닛의 세계의 성립 여부는 오로지 나로 인해 좌우되는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 위에 나와 동기화된 별도의 세계를 투영시킬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

 

나는 유닛과 유닛의 세계에 결코 몰입하지 않는다. 주지하듯 유닛은 내가 참조할 수 있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유닛은 내가 아니되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부속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의 권한, 즉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유닛은 내가 의식하는 만큼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유닛의 경험은 나의 경험의 반영이다. 유닛은 스마트폰 속에서 나와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면상에는 분명 유닛이 전제하고 있는 시선의 방향성이 있다.

 

스마트폰의 위치 서비스를 활성화해 각자의 유닛을 확인해보자.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려 유닛이 쳐다보고 있는 각각의 방향을 가늠해보자.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불능감을 위한 인벤토리

 

유닛의 세계란 결국 어떤 불능감에서 연원한다. 이를테면 강정석은 지난 두산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GAME >의 특별공략에서 이를 비디오게임의 연대기와 대조하며 초기 하드웨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제약은 검은 평면 속에서 즐거움과 동시에 불능감을 발견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불능을 해결하려는 행위가 새로운 불능을 발견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솔루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상술한다. 이때의 솔루션이란 비디오게임의 사용자와 호환되는 각종 주변기기들의 목록으로 구체화된다.2) 달리 말해 CRT모니터 속에서 도트 형식으로 존재하는 캐릭터/아바타와 사용자 간의 간극, 즉 특정 유닛이 나와 온전히 연동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불능은, 도트로부터 폴리곤으로 외형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점차 변화한 컴퓨터 그래픽스의 발전과 별개로 불능 자체를 만회할 수 있을 만한 대리적인 접촉()을 파생시켜왔다.

 

컴퓨터 그래픽스 환경과 주변기기를 임의로 구분 짓고, 후자의 관점에서 게임이라는 매체를 재고해보면 해상도의 문제가 반드시 시각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로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해서 논의할 때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은 실사와 흡사한 대상이 아니라 현실과 별개의 영역에 놓인 독자적인 세계관을 사용자가 운용하는 방식이다. 이때 발생하는 불능감은 양가적이다. 게임 속 세계관이 현실에서의 커브와 맞닥뜨릴 때 사용자는 문득 화면과의 거리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 사용자의 감각과 점차 최적화된 주체가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역으로 계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곧잘 사용자에게 유발되는 정신착란이나 각종 FPS나 전쟁 시뮬레이션 등의 게임 컨텐츠의 윤리성 문제와 같이 동시대의 병리적 증상을 규명하기 위한 상투형의 객관식 문항들로 나열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요한 것은 게임적 리얼리티가 유발하는 일방향의 몰입감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일종의 잔여의 전류일 뿐이다. 실제로 강정석이 <GAME >에서 전개하는 서사는 미처 혼선되거나 증강되지 못한 현실을 사용자의 관점에서 앞지르기 위해, 혹은 지금으로써는 미완일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관점에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해한 각종 트랙들로 구성되어있다.

 

앞선 트랙들이 지향하는 공통의 소실점은 결국 질주를 거듭하는 스피드러너1인칭 시점 속으로 수렴한다. 스피드런은 기본적으로 최단 시간의 게임 클리어를 위한 것이지만, 오로지 그러한 의도만으로 가늠하기엔 질주의 과정에 너무도 많은 사족이 불필요하게 간섭하고 있다. 일단 영상의 내레이터부터, 스피드런을 중계하는 BJ와 전시에 부속된 특별공략 텍스트 일부를 읊는 익명의 남성과 여성까지 포함해 최소 3명이다. BJ가 게임의 진행과 병행하며 별다른 정보값 없는 중계를 되풀이하는 동안, 다른 내레이터들은 닌텐도 게임보이에서 시작해 게임 <쉔무>가 구현한 절차적 생성이라는 랜더링 방식, 각종 주변기기들, R.O.B의 눈, 2000년대 한국의 온라인 게임, 그 안에서 구현되는 다중적인 시점들, 트와이스 직캠, V(...)에 이르기까지 게임과 가상현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엄밀히 말해 무언가 보고 있다기보다, 스피드러너의 1인칭 시점이 상연하는 질주의 궤적은 앞선 내레이션 트랙들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트랙으로 구실한다. 그것은 텍스트의 각각의 구간이 발화하는 내용/이미지에 따라 때로는 게임보이의 발전형으로, R.O.B의 눈의 연장선으로, 그 외의 모든 것으로 각기 다르게 혼선된 채 인식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1인칭 시점은 스피드 러너의 일사분란한 파쿠르Parkour를 통해 온갖 지형지물들 사이를 넘나들며 시선의 낙차를 조성하지만, 정작 관객은 이 모든 질주의 감각으로부터 차단된 채 단지 화면의 바깥 혹은 표면surface만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이 화면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앞서 언급했듯 텍스트의 각 구간들을 듣거나 읽으며 서사의 얼개를 가늠할 때뿐이다. 이를 방증하듯 혹시 트와이스의 멋진 점이 뭔지 알아요?”라고 되묻는 구간부터 화면상에는 본격적으로 트와이스의 각종 짤방과 face swap 어플리케이션으로 합성한 이미지 등이 하이퍼스레딩 형식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1인칭 시점에는 도통 원근법적인 깊이감이 없거나 이를 자발적으로 무효화한다. 이런 식으로 표면을 쉽사리 뒤집는 방식은 지난 <유명한 무명>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Savior’가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이전 작인 ‘Soulseek/Pegging/Air-Twerking’ 위에 얄팍하게 투영된 것과 유사한 감각을 공유한다. “(...) ‘/Savior’는 감상해야 하는 영상작품이기보다는 그 제목처럼 화면 보호기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설치작업이나 작품을 보조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Savior’는 독립적인 영상 작품이기보다 <뉴 스킨>의 목재 구조물이나 <랠리>에서 텅 빈 커먼센터와 같은 역할에 가까워 보인다.”3) 그렇다면 강정석의 표면은 무엇을 보호하는가?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적 리얼리티)?

 

김희천의 ‘/Savior’는 마우스의 커서를 움직이면 금세 사라지고 말지만, 강정석의 표면은 그 너머로 질주하거나 몰입하기 위한 스피드러너의 관성과 그로부터 재차 밀어내는 표면 자체의 관성이 공존하는 양가적인 공간이다. 그 결과 표면은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트랙(의 절단면)으로 존재하며, 그럼에도 여타의 트랙들과 교차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소한의 하이퍼스레딩을 수렴할 수 있는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준다. <GAME >은 이와 같은 혼선을 유발하는 내레이션을 포함해, 사전에 텍스트로 정리하거나 구축한 특정한 사용자의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특별 공략을 비롯한 텍스트는 단순히 영상의 부록으로 구실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영상이 텍스트에 기반한 하나의 파본으로 제시된 것에 가깝다. 내레이터의 기계적 어조는 얼핏 불능감 이후에 도래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예시하는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한 나름의 촘촘한 서사적 얼개를 지니며 비약의 순간은 단지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현실로 이전되는 말미에 이르러서야 발생한다. 달리 말해 강정석이 스피드러너를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스테이지는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온전히 체감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모호한 접경지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상에 간섭하는 각종 트랙들과 하이퍼 이미지 및 링크들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에 굳이 현실을 기입하기 위한 엇나간 시도들이 빚어낸 파열이다.

 

이처럼 (세계관에 대한)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이라는 역전된 관계는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온전히 재현될 수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되묻게끔 한다. 오히려 명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불능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아바타라는 분신을 통해 시점의 탈착이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점차 현실감이 저하되고 있다(...)고 부추기는 공략 자체다. <GAME >에서의 속도감은 스피드러너의 질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는 특정한 사용자의 조급함에서 비롯한다. 이때의 사용자는 1인칭 시점이나 내레이터들과 등가의 존재가 아니라 정작 화면상에 부재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일련의 트랙들을 조급하게 조율해내고 있는 전지적 작가에 가깝다. ‘는 자신이 망상해낸 불능의 세계를 투사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사실 에게 중요한 것은 불능의 세계를 최대한 실제의 불능감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능이라는 도저히 통제될 수 없는 상태를 독자적인 세계관 속에서나마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든 동기화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은 스마트폰을 대하는 사용자의 관점과 흡사하다. 단순히 굳어있는 표면이 사용자의 헛손질에 의해 인터페이스로 변화하듯, <GAME >에서 제시하는 세계상은 특정한 사용자의 망상과 접촉함으로써 편의적으로 배열되는 와중에 있다. 특정 사용자는 전지적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굽어보고, 조급함 속에서 안도한다.

 

결과적으로 <GAME >의 관객은 앞선 전지적 사용자로부터 괴리된 채 에 의해 조율되고 있는 관성들만이 존재하는 쿠소게4)에 가까운 공간 속에 처하고 만다. 스피드러너는 스테이지를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하기 위해 분주하지만, 계속 루프되는 영상은 정작 스테이지의 명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이로써 질주라는 행위는 표면을 가로지르기 위한 헛발질과 동의어가 된다. 이를테면 표면은 게임 맵을 통해 3d로 복각된 폐쇄회로로서 존재하고 불능감은 1인칭 시점을 경유해 화면 너머로 접속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간 내에서 공회전할 뿐 도통 해소되지 않는다. 기계 인간 혹은 온전한 아바타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도트와 폴리곤의 여하와 무관하게 언제나 표면에 의해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영상의 주변에 일렬로 비치된 스티로폼 박스들과 러닝머신의 발판이 향하고 있는 합성 이미지 속 도트들은 물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서로를 불완전하게 암시하며 동일한 불능의 자장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석이 유년 시절의 기억을 포함해 자신의 일부를 이곳에 백업하고자 하는 이유는 기계 인간을 자처함으로써 표면상에 최적화된 존재로 스스로를 열화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게임적 리얼리티는 현실을 증강하기보다 사용자를 열화하면서 평형 상태를 모색한다. 혹은 스피드런이라는 질주의 궤적을 통해 열화된 자신을 백업할 수 있는 임의의 공간적 틀을 직조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분기한 평행세계

 

<시뮬레이팅 서피스A/B>를 포함해 강정석의 이전 작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동세대의 인물들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영상 혹은 시간이 열화된 클립들로 재구성된 채 유통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듯, 작가에 의해 주지된 무의미한 행동들(반복되는 출근길의 배웅, 고가도로 아래에서 콩알탄을 터뜨리며 주고받는 슬랩스틱, 오늘 하루 일과에 대한 자기고백 등등)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수행하며 자신의 잉여적인 정체성을 표면상에서 기꺼이 상연했다. 그러나 세대라는 사회학적 전제와 표면이라는 데이터 표상을 위한 시각적 인터페이스 사이의 교착 상태5)<GAME >에 이르러 얼마간 유보됐거나 본격적으로 (세계 내 주체와 대치되는) 표면 내 주체를 망상하기 위한 시도들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강정석은 동세대의 인물들을 표면상에서 굽어보는 대신 스스로를 백업시킴으로써 표면 내 주체 이를테면 유닛의 시점으로 바라보거나 유닛이 기꺼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상을 위한 토대를 가설하고 있는 셈이다.

 

동세대라는 전제가 그러했듯 표면의 관성에 의해 열화되기 이전의 주체는 여전히 유년기와 같은 실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세계 내에서 육화된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을 유닛 속에 기입하기 위해선 일단 기억이라는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얼개, 즉 게임적 리얼리티와 그와 관련된 불능감의 서사 및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또 다른 텍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후자는 결국 유닛으로서 현실에 대해 느끼는 불능감으로부터 연역된 일종의 대체 기억이다. 이처럼 강정석이 유닛의 세계를 위한 나름의 전사前史를 구축하기 위해 텍스트라는 형식을 구체적인 토대로 삼는 한편, 김희천은 지난 바벨 3부작을 통해 그저 인터페이스상에서 고스란히 복각했을 뿐인 텅 빈모델링의 세계 속에 이입하기 위한 장치로써 사소설에 가까운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사후적으로 투사해냈다. ‘라는 수신자에게 부치는 서신과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서사적 레이어들은 전사가 부재한 서울의 폐허들, 즉 반드시 철거됐거나 철거를 예비한 허름한 가건물이 아니더라도 CAD와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든지 편의에 따라 임포트되거나 GPS를 포함한 유닛들의 시점을 빌어 재조정될 수 있는 가변적이고 허약한 도시 구조체를 현실의 거울상으로 반영해내기 위한 텍스트적 질감이다. ‘이곳은 기억을 백업하기 위해 모델링됐다기보다 내러티브가 투과할 수 있을 만큼 얄팍해진 데이터 껍데기다.

 

김희천이 ‘/Savior’를 통해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제 작업을 표면의 더께로 삼은 것은 사용자의 시선이 표면상에서 차단될 것이란 전제를 얼마간 의식함과 동시에, 3부작에 포함된 여타 작업들과 달리 별다른 내러티브가 부재한 ‘Soulseek/Pegging/Air-Twerking’을 오로지 데이터 껍데기들만이 범람하는 몰가치한 질료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Savior’는 작가가 습관적으로 촬영한 각종 스냅 영상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파운틴 푸티지 조각들은 그것이 발췌한 실제 일상의 타임라인을 대변하며, 화면 보호기 이면에서 별다른 얼개 없이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데이터 껍데기들과 질료 차원에서의 대비값을 조성한다. 이를테면 <랠리>에서 데이터와 혼선된 세계상을 은유하는 유리 파사드의 공간은 ‘/Savior’‘S/P/A’의 시공이 대치하는 가상의 경계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희천은 현실과 가상, (경계로서의) 파사드를 데이터에 의해 포화된 유사 디스토피아를 연출하기 위한 개별적인 전제들로 나름대로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다. 그러나 이제껏 현실의 패러미터는 파사드적인 공간 속으로 이접되기 위해 언제나 내러티브라는 자장 내에서 조절되어왔다. ‘/Savior’가 예외적인 이유는 그것이 데이터 껍데기와 별도의 영역에서 수집 나열됨으로써 내러티브와 함께, 조절 가능한 패러미터 자체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희천은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을 모색한다.

 

지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썰매>에 부여된 서사적 레이어들은 여전히 서사를 빙자하되 단순히 데이터 껍데기를 투과하기보다 공간의 폐쇄감을 북돋기 위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속도감의 방언을 터뜨린다. 중요한 것은 수신자를 향한 발화가 아니라, (작중에서 등장하는) VR기기를 뒤집어쓰고 서로의 데이터 자아를 자살시켜주는집단자살클럽처럼 데이터 차원에서 열화한 자아와 정보와 가십과 그것들 각각의 구분이 무화된 세계를 엄연한 현실로 인식한 상태에서 한층 배가되는 망상의 부피감이다. 달리 말해 한때 세기말의 정서와 대응되며 어쩐지 불길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파국의 정서는 <썰매>에 이르러 마침내 기정사실화된다. 앞선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은 결국 이처럼 파국적이고 뒤죽박죽인 세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모 레이싱 게임에서 빌려온 숭례문 서킷의 이미지는 레이싱카의 1인칭 시점이 숭례문 주변에 구획된 도로를 질주하며 점차 가속하고 이는 실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중력을 잃은 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굽이치는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의 1인칭 시점과 분할 화면을 통해 무한루핑되는 롤러코스터 장면 등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암시되는 속도감은 강정석의 <GAME >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능을 전제하되, 이미 현실로부터 차단됐기 때문에 주어진 표면 너머에서의 자율성을 동력으로 삼는다. <썰매>는 표면 너머로 신속히 미끄러지며 불능의 서사 및 내러티브를 헝클어뜨리는 이미지 잔상이다.

 

김희천은 <썰매>의 말미에서 face swap 어플을 통해 행인들의 얼굴 위에 덧씌운 자신의 얼굴을 빌어 화면 속에서 우리(가 속한 이편)를 응시한다. 이제 속도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자살을 거듭할 수 있는 가 속해있는 세계가 단지 영상 클립의 일부, 즉 열화된 시간의 절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정석과 김희천은 표면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지금의 모호한 현실을 재고하고 있다. 전자가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서사를 발판 삼아 자신이 조작하고 있는 불능의 세계가 투영된 표면을 향해 밀착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문학적 내러티브로 조형한 데이터 파사드 속에 이미 상주한 채 표면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냉소하고 있다. 이때 질주라는 행위는 각자가 점유한 세계관을 오작동시킴으로써 가시화하는 서로 다른 계기로 작용하되 관객의 시점에서는 동일하게 불능하다.

 

이상한어둠 혹은 파국과 대면하기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에서 주인공의 시선과 얼마간 밀착하여 심도가 흐릿해진 화면을 항구적인 위급함의 감각, 언제나 다른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강제를 수렴함으로써 작중 배경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잠식한 어둠 혹은 파국의 한가운데에 있기를 자처하는 이미지-패닉으로 정의한다.6) 그에 반해 스마트폰이나 게임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구현되는 휴먼 스케일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대상에 대한 심정적인 거리에 따라 화면 심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파국에 의해 추동되는 질주란 얼마만큼 패닉을 수반하는가? 이를 재고하기 위해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이라는 전제를 끌어와 각종 사회정치적 현안들에 무감한, 즉 패닉 없는 사용자 주체를 커스터마이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앞선 작업들에서 등장하는 질주라는 행위가 단순히 오래된 외상의 태엽을 감아 어딘가로 달려감으로써 파국의 감각을 활성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에 기입된 명시적인 계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도래한, 어찌됐든 가 감수해야만 하는 정체모를 파국에 대한 나름의 윤곽을 가설해나가는 과정이자 결과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에 대한 위화감 혹은 유닛에 대한 불능감은 불현듯 당도한 세계를 대면하는 감각이다. 유닛의 시점에 이입함으로써 표면 내외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한순간의 냉소와 체념에 그치기보다 최소한 가 제어할 수 있는 파국의 범위 내에서 불능의 상태를 응시하고자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유닛의 시점을 활성화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단일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제는 유닛이 쳐다보는 방향성을 현실과 연루된 다중적인 세계상으로 연장하기 위해서 어떤 망상이 필요할 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유닛은 망상을 투영해냄으로써 유사 주체의 시점을 탈착한다. 이러한 유닛들이 산개한 세계는 파국의 계기가 없는 현재형의 파국을 각자의 서사로 대질해볼 수 있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비록 자아는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거나 편의적으로 백업할 수 있을 만큼 열화되진 않았지만, 유닛의 슬롯은 새로운 프로필과 그에 기반한 일종의 대체서사이자 독자적인 타임라인을 예비하고 있다. 나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패닉은 차라리 응시할 만한 대상을 계발하는 와중에 동원되는 서로 다른 밀도의 텍스트 사이의 낙차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전사前史들은 점차 패닉을 데이터적인 자기조형성의 과정으로 뒤섞는 동시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패러미터의 관계 내에서 굳이 어떤 서사적 얼개를 식별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유닛으로부터 비롯한 다수의 대체서사들을 서로 엮어냄으로써 파국의 불확실한 정체를 헤아리기보다, 서사성을 변화하는 스케일에 따라 재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재확인하는 일이 우선이다.

 

혹은 일련의 작업들이 부러 파국의 계기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떨까? 각자의 불능감을 통해 유지하는 소위 세계와의 등거리는 굳이 그 이면을 뒤집어볼 필요가 없는 지엽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달리 말해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세계를 압축/상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과 연계된 각종 사회정치적 전제들을 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는 단순히 정치적 감수성의 부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어쩌면 2008년 이후 한때 미술계를 포함해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성했던 동시대성의 전제가 와해되고 더불어 중산층이라는 신화가 대대적으로 붕괴함으로써 일련의 물적 토대를 잃어버린 주체들은 이제 자신의 현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매개를 주기적인 와해와 붕괴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순환적인 메커니즘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데이터의 권역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항구적인 위기감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계 내 주체는 결국 항구적인 위기 자체를 자양분으로 삼는 데이터 생산물에 자신을 투영해냄으로써 표면 내 주체로 적응해나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기계 인간이나 아바타가 아니라 굳이 표면이라는 전제를 부각하는 이유는 데이터에 대한 적응력을 발휘하는 순간마저도 여전히 불능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주변기기는 지금으로썬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데이터를 표상할 뿐인 표면상의 이미지를 쳐다보고 그와의 간극 속에 각자의 서사를 기입할 수 있을 뿐이다.

 

표면으로부터의 차단과 소외를 만회하기 위해 그 내외에 기입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주변풍경의 잔해들을, 무엇보다 자신의 잔해들을 에둘러보는 것. 이것이 지금 나에게 부속된, 그러나 얼마든지 다르게 번안될 수 있는 유닛의 전사다. 표면은 차단함으로써 불능감의 분기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다시 한 번,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1) 유닛은 본래 특정한 단위 혹은 단위체를 의미하지만, 나는 이를 GPS좌표와 게임의 캐릭터/아바타, SNS의 계정 등을 포함해 주체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가상의 객체를 의미하는 조어로 사용한다.

2) “(...) 네트워크를 통한 멀티플레이, 전자총을 이용한 사격, 레이싱 휠을 사용한 비디오 드라이빙, 유압식 모션 제어를 이용한 오토바이 경주, 시뮬레이션 체어, 센서를 이용한 제스처 기반 컨트롤러 등 오늘날 익숙한 플레이는 모두 초기 게임에서 선보여졌습니다. 가능성은 무한했지만, 충분히 가속되지 않아 다소 열화된 모습으로 도착한 결과물입니다.” 강정석, <특별공략, GAME 완전분석 매뉴얼>, 전시 텍스트 수록

3) 이기원, <모델링, 화면보호기, 셀카_플러그인으로서의 김희천>, 보고 쓰고 분류하기, 2016, 89p

4) “일본에서는 '쿠소 게임(クソゲーム, ゲーム)', 줄여서 '쿠소게(クソゲー, ゲー)'라고 부른다.[1] ', 쓰레기, 젠장'이라는 뜻의 'くそ'와 게임을 합친 것. 북미권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Shitty Game'이라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 그러나 강정석이 연출한 공간을 언급하며 사용한 쿠소게라는 표현은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졸작 게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능감을 암시하는 영상의 표면과 도트에 대응되는 각종 이미지들을 함께 나열함으로써 현실상에서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상태로 굳어버린 데이터 객체 혹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을 가리킨다.

5) “역설적으로 세대라는 관성은 계속해서 스킨으로서의 무가치함을 방해한다. 동세대 안에 종속된 인물들을 마저 열화시킬 수 없는 강정석은 슬랩스틱의 와중에도 빈번히 그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최소한 스마트폰 1인칭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면 이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복기하고 있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웹진 집단오찬’(http://jipdanochan.com/71)

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리 옮김, 만일, 2016, 49-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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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사진이라는 확장자를 실행시키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우리동네 아트페어 비평·평가>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처음 동대문구 왕산로924에 위치한 빈 건물에서 더 스크랩이 개막한다고 안내받았을 때 자연스레 상기하게 된 풍경은 폐허 속에 가설된 무대였다. 모든 유휴공간이 낡고 해진 폐허의 텍스처를 공유하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공간을 임의로 사용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부분과 드러나지 않는 부분 사이의 긴장을 조율해내면서 공간의 레이어들을 마치 폐허의 자재들처럼 솎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제 폐허는 단순히 낡고 해진 정도로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율되기 이전의 무방비한 공간을 의미한다. 사진을 판매하기 위한 프로세스는 어떤 식으로 앞선 폐허와 이접되며 새로운 경험 혹은 무대를 연출할 것인가? 임대와 유휴라는 물리적인 제약 탓에 도면상의 공간을 재배치하는 식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진 혹은 이미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한 효율적인 매개체로 구실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진이 특정 대상이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선택한 시점이 역으로 그것이 비치될 공간을 경험하는 관객의 시점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더 스크랩은 이처럼 이미지를 여과해 공간을 작도하는 대신 사진을 사는(파는) 경험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가 공간 내에서 조율 가능한 이미지들의 밀도와 개별 시점들 사이의 낙차를 기반으로 한다면, 후자는 보다 명료한 프로세스를 통해 섣불리 범주화할 수 없는 다양한 소속의 (본래 사진 매체를 활용하거나, 더 스크랩을 통해 ‘C프린트 출력과 A4사이즈라는 정해진 규격 내에 제 작업을 투사해볼 기회를 가진) 작가 군과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작업들로 구성된 유사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다. 일련의 작업들에 부여된 익명성이란 전제는 사진이라는 확장자를 공유하는 이미지들이 나란히 배열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연속체적인 감각을 부연하는 한편, 기획팀에 의해 선별된 102명의 작가들의 특정한 조합에 구애받지 않고 관객이 자신이 구매할 작업들을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써 각자의 취향과 기호를 실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임의의 규칙으로 작용한다. 진열된 1000여점의 작업들은 개별적으로 전시되기보다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로 존재하며,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 취합할지의 여부는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반드시 취향과 기호를 준거 삼지 않더라도 데이터베이스를 어떤 식으로 가로지르고 구획할 것인가, 라는 시점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관객 대부분은 비좁은 진열대 사이에서 장시간 머물며 작업과 눈을 맞추기보다 일련의 사진들을 잔상으로 기억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시점과 부합하는 특정적인 순간이 있었는지를 복기하며 구매 체크리스트의 공란을 채운다. 일부는 잔상에 떠밀려 특정적인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개별 작업이나 품번을 각자가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의 내장 카메라로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경은 감상을 유예한 채 이미지를 수집 발췌하기를 거듭하는, 기존 사진 전시의 문법과는 다소 상이한 소비의 경험치를 형성한다. 주지하듯 웹과 SNS의 타임라인 상에 산개한 무분별한 이미지들은 사진의 매체적 속성을 점차 불안정하게 만든다. 사용자는 사진을 포함한 이미지를 의미론적으로 독해하기보다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데이터의 일부로 수렴하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업로드되는 사진들은 더 이상 해상도의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의 일상 속에서 편의적으로 발췌한 별다른 맥락 없는 스냅snap들로 구성될 뿐이다. 더 스크랩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할 만한 사진 매체의 변별력을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개별 작업들이 잔상이나 스냅으로 소비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이처럼 사진의 해상도가 하향 평준화된 와중에 판매/구매라는 명시적인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잔상을 대면하는 경험을 활성화한다.

 

작업을 구매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공간을 가로지르는 경험은 잔상들의 총량 가운데 어떤 지점에서 나의 감식안이 반응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기회다. 더 스크랩에서의 소비는 단순히 상품의 구매라는 통상적인 의미에 그치기보다 이미지의 배후가 아닌 표면만을 준거로 삼아 자신과 동기화시키는 행위를 포괄한다.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 게재하기 위해 특정 대상과 장면을 선택할 때의 맥락 없음은 특정한 인과관계를 미처 의식하기 전에 발휘되는 사용자의 자동화된 감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각별한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 또한 마찬가지로 굳이 이미지로 발췌한다. 스마트폰과 동기화된 사용자는 일상을 장면 혹은 스냅으로 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불연속의 감각을 체득한 채 그에 들어맞는 현실의 단면들을 은연중에 솎아내는 것이다. 더 스크랩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이미지 연속체로 나열되는 와중에 각자의 불연속성을 담보하고 있는 표면상의 특정적인 균열이고, 사용자인 동시에 관객으로서의 감식안을 지닌 참여자들은 자신이 전제한 불연속의 리듬과 합선되는 순간을 맞닥뜨리기 위해 거듭 잔상들을 수렴한다. 그 결과 현실의 단면이 아닌 이미지의 단면들이 누적된다. 데이터베이스의 특정 지점에서 문득 꺼내드는 스마트폰은 기록의 과정인 동시에 사용자의 POV가 특정 장면과 합선되는 명시적인 순간인 것이다.

 

익명성이라는 전제는 익숙한 방법론을 구사하는 작가의 작업과 맞닥뜨리는 순간 무력화되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역된 결과라는 점에서 앞선 소비의 맥락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더 스크랩은 이처럼 각자의 이미지 소비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획해나가면서 공간 내에 다중적인 시점의 레이어를 부여한다. 이는 어떤 POV를 탈착하느냐에 따라 데이터베이스와 대면하는 경험이 관객의 내적 차원에서 서로 다르게 구성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더 스크랩 자체가 사진을 이미지로 감식하기 위해 분기하는 각각의 POV들을 수렴하기 위한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판매의 프로세스는 사용자의 POV를 의식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제한된 목록의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다소 무분별하게 백업된 1000여점의 작업들은 수행적으로 작동하는 소비의 맥락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취합되기를 예비하고 있다. 이때 공간은 폐허의 자재들로 분화되고 스스로를 재구성함으로써 자기조형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경험을 추동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배분된 플랫폼으로 구실한다. 더 스크랩은 데이터의 잔해가 아니라 적절한 조각 모음의 과정을 거친 뒤 물리적 공간 안에 재현한 데이터베이스 공간이며 정해진 출력 방식과 프린트의 규격은 이 모두를 사진으로 포괄한다. 무방비한 공간에서 마침내 사진이라는 확장자가 실행된 것이다.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얼개 속에서 사진은 어떤 효용성을 지니는가? 앞선 질문은 사진의 불안정한 위상을 복권하기 위한 인위적인 시도가 아니라 사진이 기꺼이 이미지로서 소비되기 시작할 때 보다 명료해진다. 더 스크랩은 무수한 잔상들 가운데 사용자가 이미지와 합선되는 순간을 사진과 대면하는 특정적인 경험으로 호명하고 이를 판매한다. 일련의 작업들은 거듭 유통되고 공유될수록 본래의 정보값을 잃어버리는 가난한래스터 이미지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귀속되는 순간 보다 명확해지는 해상도의 프린트로 배분된다. 전자가 이미지의 몰가치함을 예증한다면 후자는 몰가치한 이미지를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어떤 경험을 필요로 하는지를 재고하게끔 한다. 판매 데스크에 내가 취합한 체크리스트를 건네고 작업들이 포장되기까지 기다리는 여분의 시간은 마치 품번의 목록과 잔상들의 조합으로만 존재했던 무형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에 맞게 재조정되고 마침내 물성을 획득하는 랜더링의 과정 같다. ‘사진을 사는(파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용자-관객이 이미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현실과의 등거리 속에 사진을 위치시킴으로써 역으로 사진이 사용자와 일시적으로나마 눈을 맞출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 이를 서로 다른 판본으로 재현하는 과정이다. 대개의 사진은 잔상으로 휩쓸리지만 사진의 표면을 감식하는 POV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최적화된 이미지를 찾아낸다. 이와 같이 표면을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 속에서 사진은 거듭 스크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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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본 글은 미술세계 12월호 특집 '신생공간 그 너머/다음의 이야기'에 게재되었습니다.


WEAVER - SEOUL METRO, (http://weaverhub.blogspot.kr/)

 

신생공간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브하는 엮는자계정의 2015년 하반기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서울 각지에는 총 27곳의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가 존재했었다. 반드시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여타 독립서점, 이벤트 공간, 미팅 룸 등은 앞선 27개 목록의 하위에 따로 분류되어있다. 그러나 이 ‘27’이라는 숫자는 유동적이다. 가장 최근 집계된 결과(2016.10.12. 업데이트)에 따르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는 총 24곳으로 감소했고, 그 사이 새로 개설된 공간 몇몇이 운영 종료된 공간들 대신 목록에 추가됐다. 무엇보다 애초에 신생공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공인된 라이센스가 아니듯 엮는자의 시야에 미처 포착되지 못한 공간들도 다수 존재하며 기존에 분류된 목록들이 공간의 운영방식의 변화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지표 삼아 자연스레 상기하게 되는 의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신생공간이라는 명칭이 SNS상에서 거론되기 시작하고 각종 지면상에서 신생공간 자체를 담론 내지는 이슈로 소급하기 위한 성급한 시도들이 뒤이었을 때부터 제기된 다소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의 요점은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이 정작 공간 운영 주체들로부터 비롯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호명인가? 그렇다면 그 외부는 무엇인가? 이처럼 최초의 발화자를 물색하는 듯한 공허한 소요가 잠시나마 일었지만, 갈수록 명확해진 것은 신생이라는 미심쩍은 명칭과 별개로 개별 공간들이 공통의 플랫폼으로 체감된다는 사실이었다.

 

신생공간은 1세대 대안공간들의 파국 이후에 재차 대안을 가설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정치적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애초에 00년대 초중반의 활황세에 빚진 적이 없거나 더 이상 제도의 부산물들을 가용할 수 없는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마련한 거점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총합이라는 단위는 과정상의 불균질함을 소급하지 못한다.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에 대한 반발 내지는 불편함은 개별 공간들이 생성된 구체적인 맥락과 운영의 방향성 및 정체성의 미묘한 차이들이 플랫폼, 담론, 혹은 호명 방식 자체에 의해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불안정한 현존성은 신생공간이 점유한 2015년이라는 특정적인 시공을 견인한 주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개별 공간들은 SNS상에 개설한 각자의 계정을 통해 각자의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유통시키며 스스로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결과 서로 혼선되는 정보량 자체가 일종의 공론으로 감지되며 플랫폼이라는 착시를 가속화했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자면 결국 각자의 특정성이 데이터 차원에서 희석되며 서로를 임의로 연결 짓는 통로를 열어젖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줌아웃을 해보자. 당장 일별할 수 있는 것은 서울이라는 지정학적인 토대와 그 속에 다소 무작위하게 배열된 신생공간들의 좌표와 그 사이의 간극 혹은 여분으로서의 공간이다. 우리는 연결이라는 행위가 암시하는 것처럼 개별 공간들 사이를 실선으로 잇거나 몇 가지의 계열에 따라 그루핑하는 식으로 공간을 직접적으로 작도할 수 없다. 신생공간 혹은 그곳이 위치한 서울의 변두리를 찾아다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관객들의 GPS유닛은 조감된 화면 위에 어떠한 물리적인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줌아웃과 그로 인한 조감의 시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신생공간 플랫폼을 시각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우리가 신생공간에 모종의 공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실선이 아니라 차라리 그 이면에서 유통시킨 데이터들의 얼개를 작도해야한다.

 

그러나 한때 공론으로 감지됐던 정보량 자체를 뒤늦게 개개의 발화들로 분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형해화된 데이터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 플랫폼을 구성하는 와중에 발생한 일련의 변수들을 어떻게 정보량으로 희석했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SNS의 타임라인 상에서 상연된 것은 가상의 계정들 간에 이루어진 비평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신생공간에 대한 서로의 경험치를 공유하며 동시성의 감각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굳이 대항제도를 자처하며 깃발을 꽂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미술제도로부터 이탈한 채 전시공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생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혹은 반드시 공간을 가설하지 않더라도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미술을 지속하기 위해서 링크의 감각을 활성화한 셈이다. ‘반지하 B½F’가 표방하는 오픈베타공간이라는 정체성처럼 신생공간은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모의실험의 장이었지만, 링크를 매개로 플랫폼이 한시적으로 확장된 이후 바로 그 모의실험을 언제까지 반복하거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재고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모의실험은 그 자체로 작업을 조형해나가는 특정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굿->에 참여한 총 15개의 신생공간과 80여명의 작가들이 현장에 부려놓은 굿즈형식의 작업들은 단순히 아트 마켓에서 판매되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신생공간들이 동기화한 오픈베타의 상태를 경유하며 분절된 조형적인 단위들이다. 원본 작업의 스케일을 축소하거나, 일부를 절삭하거나, 카트리지 케이스에 압축하거나, 디지털 프린트하는 식으로 2차 창작을 거듭한 결과물들은 미처 완결되지 못한 작업으로서 그 이전의 전사와 이후의 전개를 암시한다. 이처럼 오픈베타 형식의 작업들은 신생공간에 속한 당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링크의 감각을 지향하며 어떤 연결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파편으로부터 정확히 어떤 독자적인 경험의 회로들을 개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말 그대로 오픈베타서비스는 계속 연장되고 있다. ‘굿즈에 백업된 각각의 작업을 어떻게 해금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는 개별 공간들이 동시성을 잃어버렸을 때 무엇으로 구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와 유사하다.

 

지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서울 바벨>에서 총 17개의 신생공간이 이합집산한 장면은 개별 공간들이 문득 현실의 중력에 붙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별 공간들은 그간 자체적으로 진행한 전시나 레지던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축적한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각각의 구간을 점유했지만, 정작 열거된 작업들은 공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일정한 범주로 묶이지 못한 채 다소 산란하게 뒤섞여있다. 이는 단순히 신생공간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컨텐츠들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간 공통의 플랫폼이라는 착시 속에서 이들이 어찌됐든 동질적인 대상으로 간주됐으며 그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각자가 잃어버린 접촉면을 암시하거나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서울 바벨>이 마치 신생공간 플랫폼의 물리적인 잔해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성의 감각은 정확히 무엇을 지향했는가? 우리는 이를 선뜻 캐묻지 못한다. 신생공간은 세대교체를 가속화하기 위한 유효한 방편이었을 뿐 그 이후의 대안까지 선취해낸 영구적인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바벨> 전시 전경 일부

 

앞선 <굿->를 통해 신생공간 자체의 동력이 완결됐다고 회자되는 이유는 그간 명시적인 교류가 없었던 개별 공간들이 연계된 채 굿즈라는 조형적인 단위를 공통의 언어로서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일련의 작업들을 재구성하며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신생공간은 여전히 잔존하며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의 목록은 앞으로도 갱신되겠지만 모두가 예감하듯 2015년 자체는 결코 재연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반드시 세워야한다면, 시작점은 다소 모호하되 2015년이 마감된 바로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소성의 압력을 견디며 반복한 모의실험의 잔여들은 신생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징후인 동시에 이후의 시간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지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앞선 정보량은 일종의 경험치로 누적된다. 지도상의 좌표들을 억지로 작도하는 대신 공간을 가상의 계정과 연동시킨 채 서로에게 접속하기를 반복하면서, 물리적인 토대와 중력은 점차 당연한 전제가 아닌 공간에 부속된 레이어로 변화한다. 결국 공통의 플랫폼이 걷힌 자리에서 헛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공간의 위상 자체다.

 

오픈베타 형식의 전시는 단순히 미완성의 결과물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온전히 합성되지 못한 작업의 파편들을 그 자체로 유지함으로써 서로를 가리키는 링크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공통의 플랫폼을 잃어버린 개별 공간들은 링크의 절단면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과 연결된 명시적인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링크의 관성에 따라 현실의 거점에 정주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한 번 정보량으로 희석된 뒤 내뱉어진 공간은 데이터 흐름 속에 휩쓸리며 어긋난 관계들을 일종의 외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랜더링이 덜 된공간은 스스로를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환원한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링크의 방향성은 이제 공간의 내부로 수렴하며 기존의 공간성을 벡터의 관계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공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며 조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 대신 재차 오픈베타를 가동하여 각각의 파편들을 필요에 따라 배치하고 때로는 어긋난 방향성을 유도하며 이전과는 다른 공간 경험을 연출해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더불어 각종 스마트 기기를 이용하여 데이터라는 불가해한 대상을 보다 편의적으로 운용하는 와중에 특정 공간을 포함한 일련의 사용자들이 체득하는, 갈수록 저하되거나 모호해지는 현실의 해상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보 이미지들은 여전히 과잉 생산되는가? 혹은 이러한 과잉은 여전히 사용자 주체에게 과부하와 정신착란을 유발하는가? 지역 괌성유망을 이어붙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월드 와이드 웹을 상상하던 90년대에 비해 데이터의 속도는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증가했지만, 어느덧 우리는 이를 따라잡기를 멈췄다. 더 이상 뉴미디어에서 상연되는 디지털 기반 이미지들의 산란한 풍경에 시각적으로 압도되지도 않고, 하이퍼링크를 매개로 펼쳐지는 페이지들의 관성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속도의 스펙터클 자체에 둔감하다. 과잉 생산은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매개되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뒤섞고 무너뜨리지만 이는 인터페이스 배후의 사건일 뿐, 사용자는 단지 손끝으로 밀어서없애거나 선택적으로 크롭할 뿐이다.

 

결국 산란한 감각은 영점으로 하향되며, 영점의 상태는 바로 우리가 처한 현재를 규정 짓는다. 설사 특정한 레이아웃 상에서 이미지들을 편집하거나 작도하더라도, 그와 연동하는 행위는 오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만 이루어질 뿐 정작 행위를 결정짓는 데이터 알고리즘, 이를테면 배후에 놓인 실재와의 관계는 부재한다. 그리고 이는 점차 굳이 현실을 뒤집어볼 필요도 여력도 없는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으로 귀결된다. 정신착란이 없거나 과잉에 대한 체감을 잃어버린 세계.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재현하는가?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은 인터페이스의 뒷면과 달리 우리와 거리낌 없이 동기화되는가? 그것은 사실 영점에 대한 지속적인 재확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용자는 저하된 해상도에 몰입하기 위해 애꿎은 눈을 비비기보다 차라리 표면 위에 또 다른 경험들을 가설해나가는 편을 택한다. 이제 인터페이스는 무감각이 아닌 표면 자체를 응시하는 새로운 관점과 각도들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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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0) 노상호 개인전 <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시작. 다소 이상한 청탁을 받은 관계로, 오늘 12일부터 본 전시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이나 그로부터 비롯한 두서없는 망상들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노상호의 삽화들은 개별성을 띄기보다, 단지 공간적으로 확장되기 위해 습관적으로 파생된다. 이러한 작업 환경을 과도하게 줌아웃해보면 개개의 삽화는 나름의 정보값을 지니지만 이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한 채 망점의 일부로 수렴한다.

 

2) 그런 의미에서 삽화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 배경을 지니지만, 이를 링크삼아 변별적인 서사들에 일일이 접속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무용하다. 뒤이은 의문은, 애초에 삽화라는 형식은 그와 병행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재현할 수 있는 구조인가?

 

3) 삽화는 이야기를 트레이싱하기보다 이미지를 통해 추상화한 불완전한 단면만을 제공한다. 이는 어쩌면 비유적 의미에서의 망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거시적인 화면의 밀도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로써 충분히 가볍기 때문이다.

 

4) 이처럼 줌/아웃을 넘나들며 서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제야말로, 이미지로 포화한 세계에서 굳이 이야기꾼을 자처한 이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난점인 셈이다.

 

5) 전시 현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일련의 삽화들은 각종 진열대에 품번이 매겨진 채 정렬되어있다. 과연 모든 이미지를 수렴하여 노상호에 대한 명확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는 관객이 있을까? 그런 행동은 무의미할뿐더러 불가능하다.

 

6) 인간은 스캐너가 아니며, 애초에 스캐너 또한 이미지를 열화 저장할 뿐 독해 장치가 아니다. <THE GREAT CHAPBOOK>에 진열/집적된 무수한 삽화들은 단지 시각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소비가 거듭될수록, 망상의 폭은 일시적으로 확장된다.

 

7) 이때 망상의 폭은 마치 각자가 무작위로 일별한 이미지 재료를 나름대로 취합할 수 있는 일종의 레이아웃을 연상케 하지만, 그것이 망상인 한 레이아웃처럼 정교하게 작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재료 이전에 거듭 형해화된다.

 

8) 노상호가 메르헨으로 호명하는 불특정한 이야기들에 반응하며 조건반사적으로 그려낸 삽화들은 특정 서사의 링크로 작용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미지 소비만을 유도하며 정작 링크를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9) 서사와 매개된 링크의 절단면만이 남았을 때, 삽화는 자신의 출처 없음에 대한 외상을 일종의 자기반복성으로 벌충하려한다. 혹은 서사의 깊이감에 대한 소실점이 와해되며 단지 이미지들의 유한한 표면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10) 삽화와 병행하는 일련의 텍스트(http://thegreatchapbook.com/)가 삽화의 오래된 전사인지, 이미 전사를 잃어버린 삽화에 사후적으로 덧붙인 사족인지 불분명해진다. 문제는 메르헨자체가 이미 사족들의 난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11) 그러므로 노상호는 사실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출처 없음의 삽화들에 부합할 법한 픽션을 전개하기 위해 메르헨으로 총칭되는 각종 설화, 경험담, 풍문 등을 수집 나열한다는 역전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12) 삽화라는 형식은 이미지가 서사성과 맺은 일종의 협약이다. 마침내 그것이 무효한 시점에서 삽화의 잔여만을 토대로 삼는 픽션을 납득할 수 있을까? 이제껏 파생된 의사-삽화들이 구성하는 표면적을 픽션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13) <THE GREAT CHAPBOOK>에는 삽화와 (텍스트로 기술되는) 픽션이라는 두 개의 시공이 공존하며, 전자는 후자를 앞지르며 서사가 남긴 추상적인 자재들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단절된이미지들의 총량은 여전히 가볍다.

 

14) 1)에서의 망점의 비유는 유효한가? 노상호는 데이터베이스 기계가 아니므로 개별 이미지들을 망점으로 흐리는 정도의 방대한 표면적을 확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개별성은 여전히 전체상의 밀도 속에서 와해된다.

 

15) 노상호는 지난 <굿->에서 지형과 지물을 비롯한 삽화 속 객체들이 무분별하게 산개한 걸개그림의 일부를 잘라서 관객에게 판매했다. 이제 삽화는 서사의 반영에서 벗어나, 단지 무작위로 크롭됨으로써 하나의 장면으로 성립한다.

 

16) 5)에서 언급한 진열대의 풍경 한편에는, 시야를 압도하는 배율의 걸개그림들이 짧은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나열돼있다. 그 중 하나는 <굿->에서 판매된 그것인 듯, 잘려나간 일부를 방치하거나 재차 드로잉으로 기운 모양새다.

 

17) 사잇공간에서 대면한 걸개그림은 결코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다. 관객은 단지 제한된 시선의 범위를 옮겨 다니며 삽화의 일부들을 마찬가지로 크롭해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는 작가가 제 세계관을 오려 붙이며 2차 창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18) 노상호는 삽화가 지니는 양가성이 분기하는 임의의 장소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미지와 픽션은 각자의 분기 속에서 파생한 객체들을 느슨하게 직조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삽화라는 분기점을 의식한 채 주저하며 자기완결성을 지니지 못한다.

 

19) 이는 열린 공간이라기보다 별다른 체계 없이 열거된 썸네일의 파편들 같다. 전시장의 이미지들은 때로 각기 다른 배율로 확대 축소된 채 종이의 질감에서 벗어나 디지털 프린트되거나 공간의 면면에 설치되지만, 결코 한 데 증척되지는 못한다.

 

20) 그 결과 주어진 것은 일종의 가설무대다. 그러나 무언가 상연되기를 예비하기보다, 아무런 서사도 되비치지 못하는 불투명한 삽화들의 항구적인 대기상태만이 남아있다. 관객은 그 사이를 거닐고, 일별하고, 무엇보다 크롭한다.

 

21) 이로써 표면적을 배회하는 시선은 일시적인 공간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다른 한편에서 이야기꾼은 여전히 무용한 독백을 계속하고 있다. 그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THE GREAT CHAPBOOK>이 보유한 이미지들의 재단선이다.

 

22) 릴레이 텍스트는 여기까지입니다. 웨스트웨어하우스도 전시와 함께 오늘부로 막을 내리게 됐네요. 간혹 발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5)

1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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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메이 어택: --캐스트>, 피규어의 피규어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민메이 어택: --캐스트>에서 전시된 영상의 일부


2d3d, 재차 3d를 현실에서의 오브제로 번역하는 시도가 전제하는 것은 과정상에서 손실되는 본래의 형태다. 앞선 과정에서 2d는 일종의 원본으로써 작용한다. 그것은 납작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점차 물적인 대상으로 구체화되지만, 그로 인한 최종적인 결과물은 ‘2d의 현전이 아니라 오브제의 면면에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투영된 2d의 잔해들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잔해 혹은 파본들을 가상적 차원에서 오려붙임으로써 2d3d 혹은 2d와 오브제 사이의 등가성을 나름대로 유추해낸다. 이는 일정 부분 피규어가 생산 소비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2차 창작 차원에서 생산되는 피규어는 대부분 특정 아니메의 등장인물, 이를테면 돈선필 개인전 <민메이 어택: --캐스트>의 한편에서 상연하는 아야나미 레이와 같은 캐릭터를 지시한 채 현실에서의 다양한 모델들을 파생시킨다. 실제로 에반게리온에서 아야나미 레이의 신체 껍데기는 대량 복제된 채 LCL용액이 담긴 쇼윈도에 진열된다. 작중의 껍데기들은 말 그대로 복제되어 형태상으로 균일하지만, 아야나미 레이라는 2d캐릭터를 토대로 조형한 현실에서의 피규어들은 원본을 암시할 뿐 원본 자체는 아닌 불안정한 상태에 그친다.

 

돈선필은 몇 년 전 K에게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를 선물 받았다. 이후 상연되는 영상의 내용은 마치 <민메이 어택: --캐스트>의 부록처럼 피규어의 전사前事에 대해 두서없이, 그러나 나름대로 성실하게 읊조린다. 작가 본인이 자처한 화자는 어딘가 엉성하게 조형된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해당 모델 품번을 검색 엔진에 기입한 뒤 웹상에서 관련한 정보들을 수집 나열한다. 그것은 가이낙스에서 캐릭터 판권을 구입한 세가SEGA97년도에 제작한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 시리즈 중 하나이며, 신세기 에반게리온 TV26화에서 등교하는 레이의 모습을 크롭한 결과다, 기타 등등. 그러나 해당 영상은 특정 장면의 크롭 과정과 이를 재차 피규어로 만들기 위한 모델링 과정을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K로부터의 선물이라는 전제는 피규어가 화자의 일상에 우연하게 불시착한 결과일 뿐임을 암시한다. 더불어 모델 품번을 통해 이루어지는 웹상에서의 역추적은 명확한 도착지를 상정하기보다,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의 엉성한 조형 상태가 유발하는 모종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과정에 가깝게 전개된다. 그러나 실제로 불편함은 해소되기보다 또 다른 단서로 주어진다. 피규어 신체의 절단면, 단차, 혹은 관절의 움직임, 도색과 같은 구체적 요소들이 오작동하거나 미완의 상태일 때, 사용자/수집자는 은연중에 그것들이 2d작화에서의 (‘등교 중이라는) 동적인 상태가 일순 단일한 형상으로 굳어버리고 무엇보다 아야나미 레이라는 캐릭터를 현실상에 조형하는 와중에 의도적으로 포기하거나 손실됨으로써 주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달리 말해 피규어 제작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엉성한 모양새의 보급형 피규어는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방증하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돈선필이 앞선 역학을 (K를 매개로 한) 사적인 얼개 속에 수렴하고자 할 때, 그는 스스로를 피규어라는 대상의 질감을 순전히 인상 차원에서 대하는 다소 무미건조한 위치에 놓으며 오타쿠 스테레오 타입과 일정 부분 거리감을 둔다. 이를테면 웹 서핑을 통해 열거하는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의 정보들은 (서브컬쳐) 데이터베이스를 체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우연찮게 습득한 사물을 통해 이루어진 우연한 결과에 불과하다. 또한 앞선 역추적의 동력은 모에와 같은 흐뭇한 감정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불편함과 같은 위화감에서 비롯한다. 돈선필은 앞선 전제 속에서 피규어에 일순 집적된 데이터 객체들, 이를테면 그가 <피규어TEXT>에서 부연하듯 캐릭터의 특성을 사물화하여 갖가지 장식과 부가적인 신체 요소들로 분별해 저장한 캐라형식의 데이터베이스를 외면한 채 오로지 피규어로서의 표면과 형태만을 취하고자 한다. ‘캐라가 부재한 피규어는 2d의 파본 혹은 껍데기 그 자체다.

 

마찬가지로 <민메이 어택: --캐스트>에서 제시된 피규어 조각들은 특정 캐릭터와 연관된 지시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츠네 미쿠, 데빌맨,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캐릭터 형상들은 대개 두서없이 쌓인 포장 스티로폼 박스나 골판지의 잔해들, 혹은 마우스, 게임패드와 같은 소도구들 사이에서 본래의 스케일을 유지한 채 놓여있을 뿐, 이는 해당 작품의 레퍼런스를 물리적으로 재현하는데 실패한 기념비 따위가 아니라 단지 앞선 사물들의 군집을 빌어 조각 비슷한 것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이때 피규어가 지닌 정보값은 그것이 특정 캐릭터를 표상한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여지가 없으며 주변의 얽혀있는 잔해들 중에서 이를 보충할 만한 데이터 흔적을 찾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닫힌 링크를 자처한 피규어는 더 이상 내적 요소들로 분해되거나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개별적인 피규어 사물로 환원된 채 한데 쌓이거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린 민메이가 펼친 민메이 어택을 은유하기 위한 무대장치의 일부로써 어떤 가상의 장면을 축소 스케일로 연출하기 위해 기능할 뿐이다. 전자의 경우 피규어를 포함한 잔해들의 몸체는 단일한 색의 아크릴로 도색되어 후자와 엇비슷한 맥락에서 굳이 조각적 장면을 연출해내려 한다. 혹은 피규어와 사물 간의 불완전한 등가성이 별다른 합선을 이루지 못한 채 마감 처리되어 그 자체로 대상화된다. 그 속에서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지위를 잃은 채 오로지 외연만이 존재하는 텅 빈 피규어들은 수집된 대상으로써 본래의 형태와 스케일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이 되기 위해 일상적 소도구나 파편들을 딛고 오른다. 일련의 피규어 조각은 마치 사물화된 조각적 몸체를 탈환하는 데 실패하는 장면을 포착한 정지화상처럼 보인다.


<민메이 어택--캐스트> 전시 일부, 리캐스트recast된 '민메이 어택'


닫힌 링크는 피규어 신체의 절단면, 단차, 혹은 관절의 움직임, 도색과 같은 구체적 요소들의 총합을 굳어버린 단일 개체로 호명한다. 그러므로 피규어 조각 속 피규어는 본연의 물리적 속성을 유지한다는 대전제 하에 부분적으로 절단되거나 여타의 부품을 추가해 조립할 수는 있지만, 데이터로 환원된 채 가상의 그리드 상에서 유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 피규어는 오로지 피규어로서만 배열될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캐릭터를 표상하며 특징적으로 감지되지만, 그와 별개로 연출된 장면의 일부로 기능하는 순간 주변의 소도구들 사이에서 극도로 배율이 낮아지며 2d적인 파본을 굳이 뜯어볼 필요가 없을 만큼 축소된 대상으로 환원된다. 이로써 순전히 인상 차원에서 수렴하고자 했던 피규어 자체의 형태와 질감은 사용자/수집자의 시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와중에 데이터와 사물 사이에서 고립된다. 달리 말해 피규어는 데이터로 연역될 수도 일상적인 사물로 온전히 중화될 수도 없는 상태로 몰가치해지는 것이다.

 

앞선 화자가 K로부터 선물 받은 레이 피규어는 즉각적인 불편함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얼핏 이수경의 <F/W 16>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서울 도심 속의 혐오스런 남성-노인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수경은 돈선필과 달리 남성-노인과 연계된 링크를 자의적으로 열어버림으로써 자신이 그간 인상 차원에서 수집 저장한 그들의 옷차림을 비롯한 외형적인 요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그 중 일부를 꿰매고 기워서 일련의 페브릭 조각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우연히 맞닥뜨린 특정 남성-노인은 불가해한 혐오 덩어리 자체로 응결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로 수렴되기 위해 스킨 차원에서 편의적으로 도축된다. 결과적으로 본체인 인물 자체는 휘발된 채 그에 부속된 소위 사물의 형상들만이 재조합되어 불균질하되 단일한 조각의 품을 이룬다. 페브릭 조각은 서브컬쳐와 무관하지만 그와 별개로 캐라의 방법론과 흡사하게 인물 자체에 대한 초점을 주변부로 확장하고 이를 혐오에 대한 은유체로 활용한다.1)

 

반면 리캐스트recast된 피규어는 자신의 특징적인 외연을 빌어 어떤 것도 반영하지 못한다. 물성화된 캐릭터 형상은 랜더링과 실제 조형 과정에서 포기하고 손실된 본연의 정보값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점유하고 있는 현실 좌표 상에서만 크롭되고자 한다. 이를 방증하듯 또 다른 영상에서 다중창 형식으로 배열한 클립들의 일부는 원본의 2d캐릭터가 투사된 모니터의 전면에 특정 피규어를 배치하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동일 피규어를 모니터 내외에서 대질시키며 피규어의 전사前事를 물리적 인터페이스 속에 가둔다. 달리 말해 (캐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사물화를 자처한 피규어를 역추적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니터에 가로막힌 채 원본과 연계되지 못하거나 표면상의 가상적인 이미지로 어른거리는 자신의 현재 모습만을 재확인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순수한 사물의 관점에서 데이터 반영성을 차단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에서의 피규어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작은 크기 속에 여러 이미지를 응축시켜놓은 집합체.2) 그러므로 결국 일상을 반영하는 사물로써도 거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2d를 피규어로, 피규어를 재차 사물로 리-리캐스트하려는 추동은 고립 그 자체에 있다. 이때 피규어는 이수경이 페브릭에 투영된 스킨들로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던 바로 그 본래적 형태로 남고자 한다. 돈선필은 고립된 피규어 자체를 자신에게 우연히 주어진/불시착한 (그리고 제작자에 의해 평면상의 캐라가 물질로 구체화됨으로써 이미 완결된) 또 다른 원본으로 삼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변주할 수 있는 여지를 자연스레 포기한다. 이제 피규어는 독립적인 개체다. 그것을 조각으로 귀결시키기 위해선 내적으로 해체-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피규어와 무관한 사물들 혹은 피규어와 절단된 피규어 부품들을 한데 배열하는 식으로 특정 장면을 연출해낼 수밖에 없다. 이로써 2d와 달리 실제의 피규어가 전제하고 있는 360도 전방위의 뷰view<민메이 어택: --캐스트>에서 연출된 피규어 조각의 몫으로 이전된다. 그러나 이때 인식할 수 있는 형태와 질감이란 단지 일상에 불시착한 덩어리가 자신의 자기조형성을 거듭 유예하는 장면에 부여된 혹은 그 위에 끼얹어진 외연에 불과하다.

 

피규어 조각의 범주 안에 동원된 각각의 요소들이 나름대로 각축을 벌이는 동안 피규어가 사물을 의태하려는 관성은 역으로 사물이 피규어를 의태하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양자는 결코 동일한 가치를 매개로 합선되며 조각적 형상을 선취하지 못하지만 어찌됐든 이를 지향하는 정지화상 속에 함께 포착되고 그 자체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규어 조각은 자신의 내적인 역학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한 채 형태와 질감만으로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피규어다. 피규어로 피규어를 재생산하고자 한다. 실제로 피규어 조각은 전시장 내에 배치된 각종 중고가구와 전자제품과 함께 임의의 가격표를 매단 채 진열되어있다. 이러한 풍경을 찬찬히 훑어보면 결국 조각의 외부에서도 엇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군가 피규어 조각 모델 중 일부를 구입한다면 왜 구입할까? 여타의 물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여러 사물들이 이미지를 대신해 응축됐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인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민메이 어택: --캐스트>는 멎어있다. 결국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불편함은 어떤 식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출처가 명확해질수록 피규어는 단지 불편해지기 위해 조형된 대상이라는 사실만이 강조될 뿐이다. 끼얹어진 외연은 전방위로 굳어있고 그래서 선뜻 무효를 선언한다.

 

1)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F/W 16>, 혐오의 오브제 전시하기’, 집단오찬 (http://jipdanochan.com/74) 

2) 돈선필, <피규어 TEXT>, 유어마인드, 2016, 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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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