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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돌><업로드 유어 데스티니> : ‘유닛의 뒤편은 어디에?(2)

 

권시우

 

유닛이란 어떤 주체가 소위 디지털계와 동기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계정이다. 이때의 계정은 한 가지 모델로 국한되지 않고, 사용자 주체의 편의에 따라 혹은 사용자 주체가 접속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김희천이 <바벨>에서 스마트 워치에 저장된 위치 데이터를 매개로 죽은 아버지의 존재를 사후적으로 가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유추해낼 수 있는 유닛은 한때 아버지와 인터페이스 상에서 일시적으로 동기화됐던 GPS객체다. 다른 한편 강정석은 <GAME >에서 비디오게임의 플레이어가 게임 내 캐릭터 및 세계를 운용하기 위해 활용하는 주변기기에 대해서 언급하며, 게임 내 캐릭터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 게임 외부의 플레이어와 불완전하게 매개된 유닛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외에도 일상 차원에서 우리에게 부속된 무수한 유닛들의 목록을 나열할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중요한 전제는 디지털계에 구획된 어떤 영역에 접근하려하든 사용자는 유닛의 시점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정석은 그 때문에 플레이어가 가상현실에 대해서 느끼는 불능감1)을 호소하고, 김희천은 그러한 불능감을 서울이라는 도시에 투사하며 제 나름의 유닛의 세계, 온갖 데이터 껍데기들이 현실의 파사드를 넘나들며 개인의 실존을 희석시키는 불길한 바벨을 구현해낸다.

 

일련의 작업들은 가상과 현실을 중첩하기보다 양자 간의 미세한 간극을 전경화하고 그 속에 처한 사용자의 과도기적인 상태를 주지한다. 강정석과 김희천은 각자의 상황/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유닛의 시점을 선택해 작업의 내러티브를 전개하지만, 설사 그러한 내러티브가 망상에 가깝게 비약할 때조차 차마 불능감이라는 전제를 무화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고안해낸 내러티브가 본질적으로 현실을 향해 투영된 디지털의 잔영으로부터 도출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종 주변기기를 비롯해 어떤 디바이스와 호환되든 유닛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유닛과의 접촉면을 통해 디지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바로 그 접촉면을 일종의 외상으로 간직한 채 세계를 가늠한다. 이로써 유닛은 디지털과 동기화하기 위한 애초의 목적, 즉 보편적인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계정의 지위에서 벗어나, 어떤 사용자 주체의 외상을 극화한 장면의 목격자가 된다. 강정석-김희천 연속체를 고려할 때 중요한 점은, 이들이 고안해낸 대체 세계/서사가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데이터의 수열성, 특정 사용자의 동기화 여부와 무관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산개한 유닛이 체감하는 속도감을 재연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 모든 역학이 사용자 편의적으로 조율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버퍼링에 의해 운용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버퍼링은 현실과의 타협점이자 사용자 주체에게 각인된 외상의 징후이다.

 

여기까지가 불능감이 전면에 드러난 서사, 이를테면 유닛의 세계관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속한 채 언제까지나 디지털계의 타자일 수밖에 없는가? 유닛의 세계관은 디지털계에 대한 지엽적인 권한, 그로부터 비롯한 외상을 지닌 사용자 주체가 외상의 요인들을 독자적인 규칙으로 환원해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나름의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다. 달리 말해 이때 사용자 주체는 자신에게 각인된 외상을 도저히 해소할 수 없으며, <GAME >에서 제시한 비디오게임 연대기에 따르면 특정 세대, 이를테면 80년대 태생의 개인이 스스로를 사용자(플레이어)로서 정체화하는 과정은 주변기기의 프로토타입이 부과한 불능감, 즉 일차적 외상을 주변기기의 발전 경로를 따라 지속적으로 재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가상 세계와의 관계를 조율해나가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타자로서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불능감을 일차적 외상으로 경험한 적 없는, 애초에 정체화의 발단 및 계기가 상이한 사용자 주체의 모델을 상정해야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밀레니얼 세대에 속하는 일단의 사용자들을 재차 세대적으로 분할해 90년대 태생만의 독자적인 인터페이스 서사를 구축할 필요가 있지만, 본 글은 그에 앞서 최근의 몇몇 작업들을 단서 삼아 새로운 사용자 주체 모델에 대한 여지를 가늠해볼 것이다.

 

김효재의 <난 마돌Nan madol> 시리즈는 폰페이 섬에 위치한 실제 해상 유적지인 난마돌에 착안해 제작한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인데, 작업 내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이미지들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이미지가 아니라 구글, 셔터스톡 등에서 발췌한 일련의 푸티지로 구성돼있다. 본 작업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해 난마돌을 나름의 방식으로 탐사하되, 지금 상연되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난마돌이라는 대상마저 작가의 자의에 의해 재편집된 허구에 불과함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난 마돌 : ( Nan madol : Season 1, 2017)>2)은 실제 난마돌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그것이 현존하는 해상 유적지이자 유물들의 군집이며 현지 언어로 사이의 공간을 의미한다는 사실로 서두를 떼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실제 난마돌과 무관하게) 저작권이 만료된 채 웹상에 데이터베이스화된 이미지들을 과거 시제에 속하는 유물로 호명하고 그것이 현재에 휩쓸린 양상 자체를 난마돌로 유비하고 있을 뿐이다. 난마돌은 정확히 무엇인가? 앞선 질문은 무용한데, 애초에 탐사라는 행위는 난마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과거, 그것을 우연찮게 발견한 사용자가 속해있는 현재, 데이터베이스화된 과거를 무한히 연장함으로써만 가늠할 수 있는 미래라는 가상의 타임라인에 서사적 얼개를 부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떤 세계관인데, 이는 <난 마돌 : ( Nan madol : Season 2, 2018)>에서 작가가 확보하고 있는 두서없는 이미지 아카이브, 즉 일종의 유물들이 모니터 상에서 중첩되고 재배열되는 양상으로 재현될 뿐 서사 차원에서 더 이상 심화되지 않는다. 하편은 작업 내에서 유튜브 리액션 영상의 클립을 사용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단지 상편에서 제시된 난마돌에 대한 동일한 서사를 유튜브라는 미디어 플랫폼의 적극적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소화/반응해본 결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설사 하편의 내레이션이 상편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더라도, 최소한의 얼개만을 유지한 채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일련의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것만으로 어떤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결국 상/하로 구성된 <난 마돌> 시리즈는 실상 공회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요약할 수 있는 빈약한 텍스트를 유튜브 타임라인의 맥락 속에서 증폭시켜 유통 가능한 영상 클립들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방증하듯 ‘<난 마돌> /하 리뷰 영상3)은 유튜브 리뷰 영상 형식을 빌어 이전 작업들의 개요를 요약하는 척하면서 외려 그에 대한 사족들을 덧붙여나가는 식으로 서사의 공백을 부풀린다. 이처럼 일련의 클립들은 추상적인 문장들로 언급될 뿐 명료하게 실체화할 수 없는 어떤 세계관의 서사적 파편들로 기능함으로써, 선형적으로 이어붙일 수 없는 유튜브 타임라인, 파편적으로 산개한 무수한 클립들의 형태로 백업된 시간/서사를 암시한다.

 

<난 마돌> 시리즈를 견인하는 유물이라는 존재는 웹상에 누적된 일단의 데이터 이미지일 뿐, 그것은 현실상에서 흐르는 시간과 무관하게 방부 처리된 채 사용자/화자의 의도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라고 명명된 시간의 하위 폴더들 중 어디로든 분류될 수 있다. 앞선 유튜브 타임라인이 무수한 클립들로 포화된, 전체를 맵핑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잡다한 시간들이 웅성거리는 특정한 플랫폼 형식에서 비롯한다면, 유물들은 사용자가 발췌하고 분류할 수 있는 시간의 단락들로서 플랫폼 내의 포화 상태를 각각의 난마돌들로 군집시키고 정렬한다. 달리 말해 <난 마돌> 시리즈는 유튜브 타임라인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 감각을 증언하면서도, 얼마든지 주어진 플랫폼 내외를 넘나들며 각종 데이터 이미지를 유물로, 유물들의 군집으로, 시간이라는 상위 폴더로 범주화해 사용자의 권한 내에 종속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유튜브 클립의 관성에 따라 제작한 일련의 작업들은 외려 해당 플랫폼의 경제로부터 일정한 거리감을 둔 채, 즉 그 안에서의 유통 가능성을 배제한 채로 독자적인 클립들로 환원된다. 그리고 김효재는 마침내 소쇼룸에서의 스크리닝이나 <호버링Hovering>과 같은 전시에서 <난 마돌> 시리즈를 슬라이드 폰이나 CRT모니터와 같은 구형의 디바이스 상에 저장해 상연함으로써, 이번에는 디지털계에 접속해있는 상태에서 빠져나와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유물을 생산해낸다.


<호버링Hovering> 전시 전경


<난 마돌> 시리즈에서의 유닛의 시점은 유튜브 타임라임의 혼란상에서 시작해 그 외의 디지털 플랫폼들을 경유한 뒤 종내 모니터/스크린 외부의 현실에 다다름으로써 무력화된다. 그 대신 사용자는 앞선 과정을 별다른 불능감 없이 소화하며(유닛의 존재를 미처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재빠른 속도로 각종 인터페이스 사이를 넘나들며, 혹은 개개의 유닛들에 몰입하지 않은 채 다양한 링크로 매개된 유닛들의 경로를 선택적으로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형태의 유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랜더링한다. 애초에 유닛은 현실의 관점에서 대상화되지 않은 채 유튜브 타임라인 내에서 사용자와 충분히 동기화돼있고, 불능감은 작업의 발단이 아니라 역으로 사용자가 체화하고 있는 디지털계의 속도감을 점차 지연시킨 결과로서 최종적으로 관객들에게 가시화된다. 이를테면 <호버링Hovering>에서 <난 마돌 : >는 작업 외부에서 울려 퍼지는 서민우의 사운드 작업과 혼선된 채 의도적으로 몰입을 방해하며 물리적인 차원의 유물로서 동결된 클립들의 상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때 연출된 불능감은 주어진 클립들을 <난 마돌>의 세계관에 따라 얼마든지 현실상에서도 또 다른 형태의 유물로서 사용자/작가에게 귀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 사용자 주체에게 각인된 외상의 반영과는 거리가 멀다. 달리 말해 접속이 불가능한 유물의 상태는 사용자와 디지털계 간의 접촉이 불량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자/작가가 구형의 디바이스와 같은 올드 미디어, 근과거라는 폴더에 일련의 클립들을 일시적으로 분류해둔 결과에 가깝다.

 

이처럼 김효재가 유튜브 타임라인과 현실 간의 낙차를 발생시켜 전자에 속한 클립 형태의 서사적 파편들을 후자를 향해 투사한다면, 업체eobchae의 개인전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는 유튜브 타임라인에서 발췌한 형식/내용을 토대로 가설한 어떤 세계-공간에 안주하며 현실을 향한 모든 벡터들에 훼방을 놓거나 가상의 영역으로 우회시킨다. 업체는 작중에서 디지털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뮤지션, 포스트 프로듀서인 프레카리-아티스트라는 직업군을 상정한 뒤, 그에 속하는 인물들을 자의로 선별해 최종 1인에게 토크쇼 참여나 뮤직비디오 제작과 같은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4)는 본 프로그램에서 최종 선택된 이괴롬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괴롬은 서바이벌의 수순을 거쳐 살아남자마자 외려 현실에서 자연발화돼 죽어버리고 실제로 작중에 등장하는 것은 이괴롬의 데이터를 토대로 형상화한 ()이괴롬이라는 아바타다. 프레카리-아티스트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이괴롬은 업체가 유튜브 타임라인, 무엇보다 그 안에 업로드된 다수의 클립들이 형성하는 소위 K-스러운 정서를 미감의 기준으로 삼는 독자적인 컨텐츠들을 구현 제시하기 위해 철저히 도구화된다. 이를테면 이괴롬의 죽음은 최종 선택의 순간과 동시에 어떠한 인과 관계도 없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단지 자아를 데이터 차원에서 백업시키기 위한, 즉 컨텐츠의 재료로 삼기 위한 의도적인 살해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폭력적인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업체에 속한 실제 인물들 간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역할극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고인이 되기 이전의 이괴롬을 연기하는 인물은 제3자가 아니라 업체의 일원인데, 이로써 착취의 대상은 모호해지고 실제 등장 여부와 무관하게 본 작업에 연루된 모든 인물들이 일군의 프레카리-아티스트로 환원된다. 달리 말해 본 작업의 내러티브는 특정한 프레카리-아티스트, 즉 업체가 대중/관객에게 가시화되기 위한 방편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빙자한 가상의 위계적인 플랫폼을 고안한 뒤 그 안에서 다름 아닌 스스로를 착취한 결과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고 이괴롬은 업체의 자기 살해를 통해 구현된 아바타인 셈이며, 전시장 한편에 VR로 구현된 부산스런 분향소 또한 단순히 피착취자의 죽음을 냉소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업체의 자기 애도를 위해 가설한 또 하나의 무대로 귀결된다. 이처럼 착취-피착취의 행위가 맞물린 자가 생산 구조를 전제한 상태에서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를 독해하면, 본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K-스러움은 오로지 디지털계만을 작업의 근거로 삼는 사용자/작가가 자신이 속해있는 유튜브 타임라인 내에서 번성하고 있는 한국발 스레드의 사용자들을 겨냥해 그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차용하고 과장한 틈새 공략의 결과로 귀결된다. 달리 말해 K-스러운 컨텐츠에 대한 과몰입 상태는 특정 개인에게 체화된 저질 미디어 정서의 발현이기 이전에, 국내의 웹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자기 애도의 과정마저 무대화시키는 프로세스를 추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효과적인 유통인 것이다.


업체eobchae / 보너스 리워드: ()괴롬을추모 / VR 설치 / 가변크기 / 2017

 

우리는 여전히 유튜브 플랫폼 전체를 섣불리 맵핑할 수 없되, 그 속에서 업체와 같은 프레카리-아티스트가 속한 지정학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위치는 모든 사용자가 수용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업체가 유튜브 플랫폼에 대한 간략한 시장조사 끝에 선택한 특정한 소비층의 네트워크다. 디지털계의 특정 구간을 취사선택하고 이를 토대로 어떤 세계관을 망상해낸다는 점에서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는 일정 부분 유닛의 시점에 기반하고 있다. 이를테면 온갖 인터넷 밈, 짤방 등을 동원해 제작한 고 이괴롬의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일련의 컨텐츠들은 특정한 소비층과 매개된 유닛들과 동질화한 업체의 유닛이 체감하는 유튜브 타임라인을 상연한다. 주지하듯 이때 연출된 K-스러운 풍경은 실제 현실의 잔상들을 기워낸 조각보가 아니라, 이미 디지털에 의해 여과된 K-서사의 파편들, 특정한 생산자/소비자들이 방출한 일종의 데이터 폐기물들을 리믹스한 결과다. 다른 한편 업체는 본 전시에서 현실에서의 스트리밍을 명목으로 이괴롬이 제작했다고 상정한(실제로는 업체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해 연성한 재료들인) -음악, 일종의 데이터 폐기물들을 CD-ROM에 저장해 굿즈 형태로 무료 배포했는데, 이는 실제 유통처, 즉 디지털계에 속한 작업의 판촉 이외의 목적으로 현실의 재료를 취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낸다.5) 비록 업체는 앞선 착취-피착취의 자가 생산 구조를 국내의 웹 생태계의 관성에 휩쓸려 수동적으로 선택했지만, 그에 앞서 디지털계는 이들에게 디폴트의 환경이고 그 안에서의 폐쇄적인 생산라인에 자족하고 있다.

 

김효재와 업체의 작업을 대질했을 때 괄목할만한 점은 이들에게 유닛이란 단지 사용자 주체에게 부속된, 얼마든지 편의에 따라 탈착 가능한 다수의 시점, 말 그대로의 계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사용자 주체는 특정한 유닛-시점을 일시적으로 운용할 뿐, 그 안에서의 몰입감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채 여타의 유닛들이나 현실에서의 경험으로까지 연장하면서 굳이 어떤 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설사 단일 스크린 상에 다수의 유닛-시점들이 중첩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것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사용자의 권한, 혹은 사용자가 다시점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전제 자체는 고스란히 유지된다. 이를테면 업체의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나 김효재의 <난 마돌 : >에서 제시된 서로 다른 혼란상은 얼핏 유튜브 타임라인에 압도당한 사용자/유닛이 오작동하는 풍경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작업 유통의 효율성 및 업체라는 브랜드 홍보를 위해 유튜브 타임라인의 특정 구간을 프로듀스한 결과일 뿐이고, 후자는 난마돌의 재료들을 캐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의 면면을 가로지른 궤적의 기록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닛은 여전히 사용자와 동기화하되, 그 과정에는 더 이상 불능감이라는 외상이 개입할 만한 여지가 없다. 일련의 작업들에서 분란하게 움직이는 데이터 이미지들, 그로 인해 가중되는 속도감은 현실과 가상의 간극에서 교환되는 잔여 전류들이 합선된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가상에 임포트된 데이터 재료들이 사용자의 레이아웃 내에서 재배열/재편집되는 과정을 암시할 뿐이다. 이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유닛의 시점을 빌어 불능감의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유닛과 일시적으로 접촉한 순간들을 어떤 식으로든 중첩하거나 클립의 형태로 나열해 동류의 사용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유닛들의 조작감, 즉 사용자 경험 자체다.

 

1) 강정석, <특별공략, GAME 완전분석 매뉴얼>, 전시 텍스트 수록

2)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7RGpdODcPPKUehoQEW2TuZjtIR9aD0pH

3) https://www.youtube.com/watch?v=Rl2BufCB1Do

4) https://www.youtube.com/watch?v=jurwh4Z1fe8&feature=youtu.be

5) 업체는 전시 현장에서 무료 배포한 '()이괴롬'의 음반에 수록된 일련의 트랙들을 별도의 웹 사이트에 공개했다. 음원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청취할 수 있다. (leegwerom.com) 

Posted by jipdanochan

<바벨>에서 <>까지 : ‘유닛의 뒤편은 어디에?

 

권시우



김희천의 바벨 3부작(<바벨>, <S/P/A>, <랠리>)은 일련의 작업들에 선행하는 거시적인 세계관에 의해 운용된 결과라기보다, 1부인 <바벨>에서 암시하고 있는 파국의 정서를 단서 삼아 이를 토대로 어떤 세계관을 가설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바벨의 세계관은 조건반사적으로 구술해낸 이야기의 구조에 가깝다. <바벨>은 서울의 어딘가에서, 서울을 경험하는 와중에 엄습한 불길함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캐묻는 대신, 그것을 섣불리 파국으로 얼버무리고 이를 내러티브 전개를 위한 발단으로 삼는다. 달리 말해 <바벨>의 내러티브는 서울은 이미 망했다, 라는 성급한 문장으로 서두를 뗀 뒤 ?’가 아닌 어떻게?’를 동력으로 삼아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화자의 사적인 플롯은 서울-어떤 세계의 파국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그에 대한 삽화로서 3d렌더링된 서울의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마침내 서울은 무엇을 투사하거나 백업시켜도 상관없는 다소 공허한 데이터 센터로 귀결된다.

 

우리는 가상의 카메라가 3d모형들 사이, 그것들의 텅 빈 내부, 중력 없는 상공을 배회하며, 어설프게 스캔한 서울의 디테일들을 주지할 때조차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 애초에 실제 서울 자체가 렌더링이 덜 된 사물처럼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바벨의 세계관의 발단인 불길함은 여타 사회정치적 맥락과 무관하게, 혹은 상이한 맥락들이 일시에 엉겨 붙은 듯한 K-스러운 외관을 미처 소화하지 못한 주관적인 상태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S/P/A>에서 제시된 각종 3d객체들(경찰 마스코트, 마이클 잭슨, DDP, 서소문교회를 비롯한 각종 서울의 건축물, 행인 캐릭터 등등)의 혼란상, 그것들이 서로 중첩된 양상은 <바벨>에서의 1인칭 화자가 구술하고자 했던 서울에 대한 감상을 대변하는 한편, 미처 문장으로 짚어내지 못한 대목들이 남긴 이야기의 틈새로부터 역류한 시각적인 폐기물이기도 하다. 반면 <바벨>에서 문득 시점을 달리해 조감하는 서울-어떤 세계는 자신의 헐거운 용량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앞선 폐기물, 즉 실재와 맞부딪힘으로써 발생하는 총천연색의 스파크들을 예비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서울 자체가 아니라, 스크린 너머에서 상연되는 서울에 대한 하나의 판본이자 서울로부터 비롯한 하나의 이야기, 허구적인 세계이다. <랠리>에서 등장하는 제2롯데월드를 비롯한 파사드 건물들의 불투명한 유리면(유사 스크린)은 실재하는 서울의 이미지들을 내적으로 수렴하는 대신 난반사시키며 현실과 허구 사이를 모호하게나마 경계 짓는다.

 

중요한 것은 경계를 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계 너머에 가설해놓은 세계관을 화자 혹은 작가가 (동어반복에 가까운 죽음, 파국에 대한 이야기, 그것을 구술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스스로 납득하고, 그 외부에 실재하는 현실감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어찌됐든 우리는 본 트릴로지가 파국을 암시하는 문장들을 스크린 속에서 계속 공회전 시키면서, 더 이상 다음 단계(이를테면 프리퀄이나 시퀄의 형태)로 넘어갈 수 없는 회색지대로서의 시공간을 연출해낸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희천은 굳이 그곳에서 벗어날 의지가 없어 보인다. 3부작이라는 선형적인 전개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완결되지 않는 이야기의 파편들은 늘 엇비슷한 서두를 떼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척하거나, 유사 서울에 백업된 채 뒤섞일 뿐이다. 이후의 작업들은 주어진 세계관 내에서 반복되는 오작동에 가깝다. 이를테면 <썰매>는 숭례문 서킷이나 롤러코스터와 같은 질주의 이미지를 통해 공회전을 가속함으로써 공간의 폐쇄감을 증폭시키는 한편 바로 그 공간 내부에 상주하고 있을 법한 유튜버의 어투로 경계 밖의 관객들을 비웃으며 현실을 따돌리고, <멈블>은 앞선 질주의 궤적을 맹도견과 맹인의 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발생하는 혼선으로 유비하거나 유희해내는 일종의 스핀오프에 가깝다.

 

이로써 실제 서울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일종의 대체 시점이 설정된다. 그러나 이때의 대체 시점은 주체가 맞닥뜨린 풍경을 무수한 레이어들로 분화시키거나 별도의 이미지를 삽입해 실시간으로 재편집하는 AR의 시점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에서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되 그 배후에서 오작동하는 어떤 세계-서울을 의식하고 있는 불안정한 스크린에 가깝다.

 

<>은 바로 그러한 스크린을 매개로 주변을 바라보는 어떤 주체를 실제 서울의 복판에 데려다놓는다. 이번에는 3d렌더링된 세계와 그것의 잔여들로 구성한 현실과 가상의 접경지대, 이야기의 파편들을 공회전 시키기 위한 가설무대가 아니라 서울의 무방비한 상태 그 자체를 배경으로 삼는 한편, 거기에 참여한 주체 또한 보다 또렷한 몸과 눈을 가진 채 서울을 걸어 다니고 무엇보다 자신의 을 응시한다. 이를테면 극중극인 아니메 <->의 순례 스팟들을 찾기 위해 서울을 분주하게 순회하는 <>의 순례자는 바벨의 세계관을 체화한 채 실제 서울에 불시착한 외지인, 혹은 서울의 타자, 타자로서 서울을 감각할 수밖에 없는 이질적인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순례자가 바라보는 서울의 K-스러움은 굳이 그로부터 추출해낸 3d객체들을 임포트시키지 않아도 타자의 시선에 의해 대상화된 채 충분히 혼란스럽고 낯설다. 날것으로 포착한 애국 집회의 풍경, 휘날리는 태극기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노인 군중들의 성난 듯한 외침, 그 와중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기수련단체의 체조 모습 등은 맥락 없는 서울의 내러티브를 상연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바벨과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주지하듯 순례자가 제아무리 스크린을 뒤집어 그것의 배후를 드러내려 해도, 이는 개인의 망상 차원에서 그칠 뿐 실제로 현실의 지형을 왜곡시킬 수는 없다. ‘바벨의 사례처럼 서울을 재료 삼아 파국의 이야기를 도출해낼 수는 있지만, 역으로 공회전하는 이야기의 파편들, 파편들이 공회전하는 양상 자체를 서울 내로 유출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또 다시 엄습하는 것은 어렴풋한 불길함인데, 이전과는 달리 우리는 마침내 어떻게에 앞서 를 캐물을 수 있다. 앞선 불길함은 한 번 바벨의 내러티브를 빌어 일종의 수직 낙하1)를 경험한, 그럼으로써 시점의 레벨을 유동적으로 조절하고 그 과정에서 주어진 세계를 얼마든지 파국으로 전치시킬 수 있는 전지적 사용자의 권한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비롯한다. 순례자는 오로지 1인칭 시점의 제약 속에서 서울을 가늠하고, 이번에는 지면을 딛고 선 상태에서 더 이상 비약할 수 없으며, ‘에 대한 답변,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를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어떤 맥거핀을 만들어내 그 대상을 좇음으로써 줌인과 줌아웃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무수한 시점의 변수들을 1인칭의 분주한 동선으로 만회해야한다.

 

<>의 타임라인을 견인하는 추적이라는 행위는 수직 낙하를 어떻게든 수평 차원에서 확장하기 위해 설정된 헛소실점인 셈이다. <->에서 에리카가 쫓는 할아버지는 실종되기 전에 의도적으로 서울 곳곳에 자신의 위치 데이터를 남김으로써 에리카의 동선을 최대한 산개시키고, 순례자는 이를 토대로 서울을 순회하되 <->의 서사적 전개를 충실히 이행하는 대신 자신의 편의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일련의 순례 스팟들을 찾아다니며, 사실 목표 자체가 무용한, 그러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에리카의 추적을 은연중에 폭로한다.

 

그러나 추적은 탐정 혹은 순례자가 그와 연관된 지난한 과정들을 모두 소화한 뒤 마침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추적의 와중에 발생하는 워프를 통해서 급작스럽게 마감된다. 에리카가 끝내 옥상에서 투신해 죽었다는 사실이 순례의 서두에서 밝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가 재편집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추적은 계속되며, 최소한 <>의 타임라인 내에서의 진엔딩은 워프라는 비약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순례자, 에리카, 할아버지, 이하 <>에서의 등장인물들 모두가 경험하는 워프는 선형적으로 흐르던 날것의 시간, 추적의 얼개가 서울의 맥락 없는 내러티브와 합선됨으로써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서사의 종결부, 즉 일종의 블랙아웃임과 동시에, “이 도시의 핵을 이루는 어떤 공백이자 언제나 과거에 홀려 있는 서울, 조상님들의 혼령과 아직 쌩쌩한 할아버지들이 점령한 도시, 자신의 정당성과 안전을 확신할 수 없기에 끊임없이 더 거대하고 강력한 것을 희구하는 허약한 성채의 텅 빈 중심2)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핵이자 공백이자 중심인 이곳은 미처 아니메풍으로 트레이싱해 미화하지 못한 서울의 이면, 순례자의 1인칭 시점이 진입할 수 없는 폐쇄된 공간, 보다 구체적으로는 3D렌더링으로만 구현 제시될 수 있는 전 대통령의 사저 내부이다. 오로지 비약을 통해서만 맞닥뜨릴 수 있는 폐쇄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바벨의 세계와 유사하다.

 

3d렌더링된 사저 내부에서 가상의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1인칭 시점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지면이라는 토대를 잃고 부유하듯, 마치 명료한 몸과 눈을 잃은 유령처럼 공간 구석구석을 배회한다. 이는 비약으로 인한 현기증의 상태, 맥거핀으로서 존재하던 목표마저 잃어버린 채 이 도시의 공백 속에서 희석될 뿐인 추적의 동선을 반영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배후로 접속하기 위한 일종의 준비 동작이기도 하다. 부유하는 가상의 카메라는 자신의 을 계속해서 우회해나가며 응시의 순간을 유예한다. 에리카에게 실제 서울을 비롯한 현실은 가 없는 세계이고, 순례자에게 탐정물이란 무수한 를 만들어내는 장르인데, 결과적으로 <>에서 에리카와 순례자와 무엇보다 관객은 1인칭 시점 위로 포개진 세계의 앞면만을 포착할 수 있을 뿐 세계의 뒷면은 언제나 스크린이라는 장막에 가려져있다. 장막을 걷어내 이 모든 사건들, 그것들을 추동해낸 서울의 실체를 응시할 수 없다면, 서울을 아니메풍으로 트레이싱해 오로지 앞면만이 존재하는 편평한 이미지로 만들거나, 배후의 공간을 망상해 렌더링으로 구현함으로써 그 속에서 다시금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김희천은 탐정질과 순례를 반복하며 서울의 앞면, 편평한 이미지만을 응시하는 대신, 워프를 시도함으로써 1인칭 시점으로부터 낙하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지면 위에 묶어둔 중력의 타래를 조금씩 느슨하게 풀어헤친다. 마침내 바닥이 없어지면, 역으로 비약을 위한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은 실제 서울에 불시착한 어떤 주체 혹은 타자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분주히 몸을 움직이며 자신이 맞닥뜨린 풍경들을 <->라는 대체 서사로 엮어보려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한때 속해있던 세계의 관성에 압도되고 마는, 그래서 결국 또 다른 망상으로 침잠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결국 일종의 튜토리얼 게임3)이라면, 우리는 튜토리얼이 끝날 때 즈음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를테면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해 바벨의 세계로 역행할 것인가, 경계 너머에 또 다른 세계관을 가설할 것인가? 아니면 이전보다 조금 희박해진 몸과 눈으로 다시 순례의 루프로 뛰어들 것인가? 선택을 유예한 채 실종을 자처함으로써 또 다른 누군가의 표적이 될 수는 없을까? 등등. 순례자는 유별난 개인이 아니라, “당신은 어디에?あなたはどこに?”라고 거듭 되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불안정한 스크린상에 상연되는 이미지들로 감각하는 무수한 타자로서의 유닛4)들을 대변한다. 가상의 시점을 빌어 문득 줌아웃을 시도해보면, 각자의 유닛들은 납작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며 서로 다른 순례의 궤적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누군가의 유닛은 어떤 선택으로 말미암아 비활성화되어 위치 데이터의 흔적만을 남긴 채 이 도시에서 사라질 것이다. 서울은 그런 식으로 개인들의 망상을 먹어치우며 무수한 를 만들어내고, 그렇지 않은 다수의 에서 온갖 껍데기들로 둘러친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동안 갈수록 불길해진다.

 

1) 히토 슈타이얼은 자유낙하-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 프레스, 2016, 김실비 옮김)에서, 모더니즘을 경유하며 선형 원근법이 와해된 이후 항공사진, 구글 맵, 3d영화, 감시 파노라마와 같은 미디어들을 매개로 다변화한 시점 환경을 시각의 수직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고찰한다. 이를테면 수직적으로 구획된 시점의 레이어들을 편의적으로 오가며 주체는 일종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결국 시간은 탈구되어, 우리는 인지할 수 없이 자유낙하하는 와중에 빙글빙글 떨어지면서 더 이상 자신이 주체인지 객체인지 알 수 없게 된다.”(32p) 본 글에서는 줌인/아웃을 양극 삼아 유동적으로 조절되는 시점의 레벨을 강조하기 위해 편의상 수직 낙하로 표기한다.

2) 윤원화, 서울 미스테리 투어, 미술세계 1월호

3) “(...) 이것은 가상 현실에서 실제 현실로 넘어온 것이 아니다. 그가 실제 또는 가상의 카메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또는 유리판 너머로 더듬던 세계는 이미 언제나 현실이었다. 결국 김희천이 자기가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어낸 경우는 별로 없었다. 서정적인 포켓몬 음악으로 시작과 끝을 여는 <>은 그런 현실로의 초대장이자 그 속에서 동선을 확보하고 걷는 법을 연습하는 일종의 튜토리얼(Tutorial) 게임이다.” 윤원화, 서울 미스테리 투어, 미술세계 1월호

4) 유닛이란 사용자가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현실을 감각하는 와중에 일시적으로 몰입하는 가상의 계정이자, 맵핑된 세계와 현실의 중력을 동시에 감내하며 오작동하는 사용자 자신이기도하다. <>의 순례자는 비교적 명료한 몸과 눈을 지녔지만, 그와 별개로 (극중에 등장하는 스마트폰이 암시하듯) 순례자와 연동된 (GPS) 유닛은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단속적으로 활성화되며 순례의 궤적을 기록하고, <->의 등장인물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서사적 레이어로 분리돼있지만 각자 표적으로 점지한 유닛을 쫓는 와중에 얽히고설킨다. 에리카가 추적하는 것은 할아버지인가, 할아버지의 유닛인가? 순례자가 지정한 순례 스팟들은 에리카가 다녀간 장소인가, 에리카의 유닛이 활성화됐던 좌표인가? 에리카는 어떻게 그 유닛이 할아버지임을 확신하는가? 유닛으로 익명화된 할아버지는 사실 순례자이거나, 군중 속의 누군가가 아닐까?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등등. 이처럼 유닛은 <>의 서사적 레이어들을 넘나들며 내러티브의 선형적인 전개를 방해하고, 누군가가 유닛을 비활성화시키는 순간 좌표 상에서 사라지며 다소 허무하게 이야기의 구두점을 찍는다.

Posted by jipdanochan

<망가진 이미지, 망가진 공간, 망가진 회화>

권시우


동시대 회화는 어떤 이미지를 출력해낼 수 있을까? ‘동시대라는 수식은 지금의 파편화된 시공과는 부합하지 않으므로 별다른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어찌됐든 당면한 현실이 있고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 회화는 그와 무관하지 않다. 동시대의 어감이 생소하다면, 차라리 막연하게 계속되는 오늘이라고 호명해보자. 국내 미술의 오늘을 재고하기 위해선 2015년 전후의 타임라인을 보다 체계화할 필요가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비평적 개요가 미비하므로 지금 당장은 그로부터 불거진 몇몇 작업적 징후들을 솎아내 대강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신생공간은 일련의 전시와 작업들을 통해 포스트 폐허라 할 만한 환경과 점차 동기화됐고, 그 결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변시켰다. 이를테면 관련한 몇 가지의 질문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 각각의 공간 운영자가 가용했던, 또한 지금도 암암리에 지속하고 있는 다수의 임대 및 유휴 공간은 그것이 노출하고 있는 다소 남루한 외관만으로 단순히 폐허로 호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단순히 폐허가 아니라면, 그 안에서 구현되는 작업은, 무엇보다 한때 자기 완결성의 언어를 빌어 시선의 몰입도를 유도했던 회화는 어떤 식으로 자신이 불시착한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의 지위를 갱신하거나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


바로 앞선 질문을 이어받자면, 한진의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회화에 대한 갱신이라기보다 지속적인 포기의 과정에 가깝다. 반지하B½F(이하 반지하)에서 선보인 전시는 본 연작의 발단이자 말 그대로 일종의 오픈베타라고 할 만한데, 이후 연작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다소 흐릿한 인상의 전투형 미소녀캐릭터1)의 중대형 크기의 걸개 드로잉과 그에 부속된, 다소 얄팍하게 구겨지거나 엉거주춤 선 조각 오브제들이 좁은 면적의 공간에 느슨하게 배치된 모양새다.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잠정적으로 마감된 지금 시점에서 이 전시를 재방문했을 때 흥미로운 점은 한진의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들이 미처 합성되지 못한 채 공간상에 나열되어있다는 것이다.

 

1) 본래 전투형 미소녀 혹은 싸우는 미소녀는 서브컬처 내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써, 다양한 배틀물에 등장하는 말 그대로 미형의 소녀 캐릭터를 지칭한다. 배틀에 최적화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변형되거나 유사 사이보그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능한 전사로 기능함에도 불구하고 모에화한 여성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한진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전투형 미소녀는 본 글에서 후술하겠지만 앞선 서브컬처의 맥락을 얼마간 전유하는 한편, 대개 어딘가를 노려보거나 배틀을 대기하듯 엉거주춤 서 있다는 점, 그리고 드로잉-회화의 맥락에서 무작위로 변형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서브컬처 내에서 통용되는 전투형 미소녀라는 개념과 별다른 접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캐릭터 혹은 인물이 한진의 작업에서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지칭하기 위한 조어로서 미소녀를 사용하기로 한다.


<오르가즈믹 스크랩Orgazmic Scrap>(2014.5.15 - 31) 일부, 반지하 20번째 프로젝트. (http://vanziha.tumblr.com/tagged/project/page/3) 


이후 커먼센터에서 진행한 단체전 <오토세이브 : 끝난 것처럼 보일 때>(이하 <오토세이브>)에서 제시한 작업을 기점으로 작가가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드로잉-회화를 반지하에서의 드로잉과 비교해보면, 후자는 (단순히 드로잉-회화의 밑그림 차원이기 이전에) 그와 함께 배치된 조각 오브제들의 안팎을 구성하는 무작위한 색면들2)과 일시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윤곽만이 존재하는 텅 빈 레이아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일련의 조각 오브제는 화폭으로부터 물리적인 공간상에 추출된, 그럼으로써 망가진 (얼마간 채색된) 평면의 자재들인 셈이다. 물론 이 자재들이 어떤 식으로 접히거나 형상화될 지는 드로잉-회화의 전개에서처럼 순전히 작가의 자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혹은 평면의 자재들은 구겨졌거나 엉거주춤 서 있는 등의 다소 위태로운 상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정 부분 (평면으로서 온전히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의 완력을 견뎌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2) 일련의 오브제는 종이나 비닐 등의 표면 일부를 채색한 뒤 때로는 변형된 미소녀의 입상처럼, 대개는 작업의 부산물처럼 늘어놓았다.


문제는 앞선 드로잉 레이아웃과 평면의 자재들이 합성됐다고 할 수 있을 드로잉-회화들이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를 자처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미소녀는 흐릿하게나마 형상화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 미소녀의 신체 윤곽은 드로잉에 가까운 붓질에 의해 과장되게 부풀려지거나 축소될 뿐 아니라 주변의 불균질한 색면들과 상호작용하며 거듭 셔플링Shuffling된다. 재빠르기보다 느슨하게 휘갈겨진 듯한 붓질과 그로 인해 모호해진 인물 형상은 일면 작가 본인의 무의식의 반영 같기도 한데, 물론 그러한 고리타분한 독해의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진이 인물의 표정이나 이목구비를 만화적인 관습에 따라 축약해 묘사함으로써 미소녀라는 클리셰를 은연중에 암시하면서도, 그것이 서브컬처 내에서 담보하고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회화의 내외에서 의도적으로 망가뜨린) 평면의 자재들과 결부시킴으로써 편의적으로 변주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한진의 미소녀는 서브컬처에서 관습화된 일련의 기호들과 무관하게, 명확한 소실점을 잃어버린 회화적 스크린이 특정한 이미지를 투영해내는 대신 무분별한 평면의 자재들만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그것들에 최소한의 얼개(혹은 레이아웃)를 부여하기 위한 형상으로 기능한다. <오토세이브> 이후의 작업들을 드로잉-회화라고 호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련의 필치와 색면들이 화폭 내에서 별다른 맥락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전개되고 누적되는 과정이 어찌됐든 앞서 언급한 인물 형상이라는 얼개를 (설사 셔플링되는 와중에 그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하더라도) 묘사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드로잉-회화가 불완전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을 단일한 이미지로 수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얼핏 추상적으로 조합된 듯한 평면은 미소녀 형상에 의해 빈번히 와해되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전시공간 상에 일종의 조각 오브제로서 추출되기 이전에 한진의 평면이 화폭 내에서 이미 한 번 망가진상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오토세이브>의 경우에서처럼 드로잉-회화와 그에 부속된 조각 오브제들이 병치되었을 때, 양자는 불완전한 평면으로부터 분기한 별개의 대상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망가져버린 상태를 공유한 채 서로를 어렴풋이 지시하고 있다. 일전의 반지하에서의 오픈베타 과정에서 등장했던 조각 오브제들이 가상의 화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추출해낸 색면에 그쳤다면, 드로잉-회화의 관점에서 경험하는 조각 오브제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두서없는 역학들, 이를테면 셔플링의 과정을 미처 종결하지 못한 채 화폭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상에 삼투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은 캔버스 상에 그럴 듯한 회화 차원의 이미지를 출력하는 문제를 유보한 채, 회화와 그것이 거듭 재생산하는 (무의미한) 평면의 자재들을 재료 삼아 어떻게 물리적인 공간을 연출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혹은 단순히 허름한 외관이나 노화의 정도로 가늠되는 폐허가 아니라, 전시공간으로서 랜더링이 덜 된 미완의 공간 속에서 회화 자체를 산개하며 나름의 좌표를 모색한다.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전시 전경.(https://twitter.com/commoncenter_kr/status/614315523698917377)


포스트 폐허의 상황이란 다수의 전시공간이 화이트큐브의 근사치로부터 벗어나 당사자들이 당면한 일시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공간 내외에서 선뜻 파편화되기 시작할 때 성립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신생공간들은 최적화되지 않은/못한 공간의 상태를 동시다발적으로 점유하는 와중에, 폐허의 장소성과 무관하게 손쉽게 폐허로 호명되곤 하는 임대 및 유휴 공간의 제한적인 레이아웃과 질감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가상의 화이트큐브와 비교했을 때 축소되고 얼마간 구겨진 듯한 공간(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축소되고 구겨지지 않은 가상의 화이트큐브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을까?)에서 도드라진 물리적인 요철에 임의로 들어맞는 모듈로서의 작업, 혹은 주어진 공간과 그로부터 튀어나온 조건반사적인 작업들 간의 의도치 않은 접면으로부터 마침내 포스트 폐허라는 환경을 망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포스트 페허라는 환경, 그로부터 비롯한 물리적인 토대를 일종의 가설무대로 삼는다. 이로써 회화의 붕괴된 소실점과 이제껏 랜더링이 덜 된, 즉 불균질하게 흩어진 자재와 텍스처를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있는 전시공간이 일련의 작업들을 수렴하는 와중에 파편화한 시점은 한진의 작업 내외에서 미묘하게 혼선된다. 후자의 경우, 신생공간을 경유하며 일변한 공간에 대한 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일정 부분 (회화라는 매체, 그로부터 비롯한 일련의 작업들과 함께) 작가 본인이 불시착한 2015년 전후의 시공에 회화를 매개로 적응해나간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폐허의 장소성이 무효화된 순간 작업이 폐허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것은 도시의 사회적인 네트워크에 유사 서비스업의 형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이를 미술의 언어로 전유해낼 수 있는 여지가 아니라, 그저 얼마간 망가진 공간의 텍스처와 그와 동기화한 채 망가져버린 시점이다. 그러므로 한진은 드로잉-회화 및 평면의 자재들을 활용해 자신의 시점을 고의로 망가뜨림으로써 지금 처해있는 환경에 최적화한다.


결국 한진의 작업과 포스트 폐허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온전히 합성해내지 못하는 각자의 과도기적 상태로부터 불거진 남루한 질감이다. 신생공간 이후에도 젊은 미술 생산자들에게 할당된 대다수의 전시공간은 여전히 중립적이라기보다 무방비하며, 그렇기 때문에 일련의 작업들은 개별 공간이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망가진 면면들을 어떤 식으로든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진은 앞서 언급했듯 자신의 회화가 전제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화폭 너머로 삼투시킴으로써, 회화와 공간의 서로 다른 과도기적인 상태 간에 의도치 않은 접면을 만들어낸다. 혹은 애초에 망가진 공간과 병치해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는 불완전한 평면성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때 의도한 삼투 현상, 즉 화폭 내에서 이루어진 셔플링을 공간의 과도기적인 상태와 동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캔버스의 물리적인 경계에 의해 차단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련의 조각적 오브제는 작가의 개입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불거진 평면의 자재들이며, 앞서 언급한 접면 또한 망상 차원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연출된 풍경은 포스트 폐허 자체를 레벨 디자인 삼아 그에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해낸 듯한 남루한 회화적 얼개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은 회화적인 스크린이 잃어버린 이미지/대상의 빈 칸을 남겨둔 채, 바로 그 유예의 순간을 반복하기 위한 동력을 지금 당면한 현실의 잔해들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폐허의 망가진 텍스처가 그 안에 제시된 개별 작업들에 지속적으로 간섭하며 작업의 해상도를 저하시키거나 무력화하듯, 한진의 회화에서 이루어지는 셔플링 또한 추상의 외연이 미소녀 윤곽에 간섭하거나 역으로 인물 형상이 추상적인 색면에 간섭하는 식으로 식별 가능한 대상/이미지 내외의 경계를 반복해서 허물거나 유예시키고 있다. 결국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과도기적인 상태는 일정한 제약 안에서만 통용되는 유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신생공간의 사례에서 우리는 폐허라는 특징적인 레이아웃을 자처했을 때만 배가되는 공간의 완력을 가늠할 수 있고, 회화 차원에서의 셔플링은 캔버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미처 납작해지지 못하는, 달리 말해 불완전한 평면성을 현실에서의 하중을 견디며 물리적으로 모사해내고 있을 뿐인 유사 조각들을 생산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진의 회화는 공간 특정성에 부합하는 일종의 모듈로서의 기능과 텍스처를 지니고 있고, 공간413에서 진행한 개인전 <OS->(2017527- 610)는 이를 부연하기 위한 사족(이를테면 조각 오브제)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오로지 회화의 아웃풋만으로 앞선 진술을 계속해나간다. <OS->는 남루한 회화적 얼개에 대한 내러티브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는 가정 하에, 그에 기반해 독자적인 회화 작업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각각의 드로잉-회화는 미소녀 윤곽과 추상의 색면 간에 의도적인 혼선을 빚는 유사 드로잉 과정을 갱신해 화폭 내에서의 변별성을 모색하기보다, 여전히 주어진 공간의 텍스처와 상호작용하는 여지를 부각한다. 이는 그간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구성해낸 남루한 회화적 얼개가 이미 내러티브 차원에서 포스트 폐허라는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OS->에서의 드로잉-회화는 그에 부속된 조각 오브제들의 별다른 매개 없이 개별적으로 놓여있을 때조차, 그 자체로 완결되기보다 전시공간의 벽면으로부터 비롯한 얕은 부조처럼 보인다. 이러한 착시는 단순히 벽면에 걸려있을 때보다 부러 어슷하게 기대서 있거나 공간 어딘가에 무방비하게 놓여있을 때 배가된다.


한진 개인전, <OS-> 일부.


앞선 풍경은 주변의 공간적 남루함을 일방적으로 의태한 결과가 아니라, 남루한 회화의 텍스처와 남루한 공간의 텍스처를 병치함으로써 발생한다. <OS->에 비치된 캔버스들은 결코 주어진 공간의 표면을 깎아낸 부조나 그것을 모사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변형시킨 캔버스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본 전시에서의 개별 회화들은 마치 오브제인양 캔버스의 무게나 하중을 빌어 벽이나 바닥과 같은 공간의 구조에 얼마간 의지하고 있다. 결국 드로잉-회화는 평면의 자재들을 물리적으로 추출해낸 이후에, 스스로를 일종의 캔버스 오브제로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공간 내에 마저 수렴되고자 하는 셈이다. 이러한 과정은 셔플링의 와중에 있는 회화적 이미지라는 전제는 여전히 고수한 채, 그간 회화와 공간 간을 인위적으로나마 매개했던 평면의 자재 혹은 유사 조각들을 생략함으로써 성립한다. 즉 개별 회화와 (폐허로 호명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과도기적인 그리고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공간이 직접 대면했을 때, 전자를 이미지 차원에서 과시하기보다 후자의 관성에 종속시키고 그에 따라 일종의 오브제로 환원해 공간상에 배열하는 식으로 양자를 재차 동기화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캔버스가 이미지 내외를 구획 짓는 물리적인 경계는 더욱 확고해져 앞서 의도했던 삼투를 차단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개별 작업들은 공간에 종속되는 동시에 독자적인 회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처럼 한진의 회화에는 이미지 내외에 몇 겹으로 둘러쳐진 경계들이 혼선된 채 존재한다. <OS->를 포함한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지금까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 포스트 폐허의 환경과 조응하는 와중에 미묘하게 다른 형태로 주어졌던 각각의 공간들을 회화 차원에서 수렴하고 이를 기반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이었다. 결국 망가진 회화는 망가진 공간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대응인 셈이며, 망가진 공간은 지금까지 우리가 신생공간을 매개로 축적한 경험치의 물리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망가진 공간 자체가 신생공간이라는 경험의 특정성을 유발한 주요한 동인 중에 하나였거나. 그렇다면 마침내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을 매듭지은 한진은 이후 어떤 공간을 수렴하고 또 점유할 것인가? 지금까지 남루한, 가난한, 그로 인해 망가진 텍스처들을 합선시킴으로써, 혹은 그것들 사이의 경계들을 중첩시킴으로써 일련의 작업들을 전개했다면, 화이트큐브의 근사치에 가까운 공간에 불시착했을 때 여전히 앞선 전략은 유효할까? 이를테면 신생공간 발 작업과 유사 화이트큐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망가진 회화의 시점은 앞선 질문들을 포괄한 채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Posted by jipdanochan

<취미가와 취미관 이후의 굿즈’>

권시우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 전경. 취미가 트위터 공식계정(@tastehouse_info)에서 발췌.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은 유리 진열장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을 미술가들에게 제공합니다. 이 진열장은 축소된 전시공간이기도, 상품을 장식하는 투명한 큐브, 한 사람이 선택한 미감의 파편이 되기도 합니다.” _취미가 트위터 공식계정(@tastehouse_info) 트윗 중


취미가에서 1013일부터 1110일까지 진행한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이하 <취미관>), 표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유통하며 미술을 이야기1)한다는 전제 하에 특히나 작업의 유통 방식에 초점을 맞춘 취미가라는 공간과 연속선상에 있다. 공간 운영진과 행사 기획진의 멤버 구성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떠나, 이를테면 <취미관>은 취미가가 굿즈라는 형식을 빌어 작업에 대한 대안적인 소비 경험을 창출하고자 한 의도를 해당 공간 내에서 극화시킨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굳이 극화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간 달리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정체돼있던 취미가의 운영 프로세스를 <취미관>이 참조한 일련의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변주함으로써 앞선 소비 경험에 특정성을 부여하고, 그 결과 취미가를 일종의 무대로 삼아 <취미관>을 연출해낸 셈이기 때문이다.


1) 취미가


그렇다면 애초에 작업에 대한 대안적인 소비 경험이란 무엇일까?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소비란 결국 작업의 생산과 판매, 유통 등의 수순들과 맞물려 있으므로, 취미가의 대안은 기존의 미술 시장과 별개로 일련의 작업들을 유통시킬 수 있는 변별적인 방식과 창구로서의 기능, 무엇보다 그에 부합하는 작업의 모델(이를테면 굿즈’)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얼핏 시장 경제의 논리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취미관> 이전의 취미가의 정체 상태는 단순히 작업의 상거래가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전에 짚어야 할 대목은 취미가가 관객들에게 판매 혹은 유통시키고자 하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완결된작업이 아니라, 운영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굿즈라는 형식에 조응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불거지는 의문은, 그렇다면 굿즈로서의 작업과 미니어처로 제작됐을 뿐 굿즈는 아닌 작업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취미가는 과연 앞선 의문에 적절한 방식으로 대응했을까? 정체의 원인을 그러한 대응의 부재로부터 찾는다면 어떨까?


본래 서브컬처에서 연원한 굿즈는 특정 아니메나 만화와 같은 컨텐츠의 능동적인 소비자들이 원본을 재료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2차 창작한 결과물을 뜻한다. 이제는 오타쿠 문화에 한정되지 않고 아이돌이나 배우와 같은 유명인에 대한 팬심을 적용한 각종 팬시한 오브제로까지 영역을 넓혔지만, 어찌됐든 취미가와 지난 2015년의 <굿->, 지금은 폐관한 교역소나 반지하B½F와 같은 신생공간이 미술 차원에서 전유해 활용했고 지금도 활용 중인 굿즈 형식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이 판매 및 유통에 용이한 상품인 동시에 작업에 대한 일종의 부산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간의 취미가는 (‘정금형의 배달 서비스2)와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상품으로서의 편의성에 적당히 부합하는 작은 스케일의 작업이나 소량의 에디션을 위주로 위탁 판매했다. 다른 한편 그러한 굿즈로서의 작업은 2차 창작이라는 굿즈의 또 다른 전제에 얼마만큼 부합하는가? 이를테면 2차 창작은 원본을 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미술의 맥락에서 원본이란 특정 작가의 작업 혹은 조형 및 담론 차원에서의 방법론을 전개해나가는 와중에 자연스레 형성되는 일종의 작업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파생한 부산물들을 굿즈로 호명한다면, 굿즈란 결국 앞선 맥락에서의 원본을 암시하는 일종의 단서들이거나 본래 단일 작업만으로는 온전히 제시할 수 없는(굳이 그러한 무모한 시도를 감수한다면 설명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독자적이면서 광범위한 세계관을 전략적으로 (이를테면 상품을 의태한 형태로) 압축해낸 결과인 셈이다. 앞선 가정은 한때 반지하에서 진행한 일련의 전시 프로젝트들이 느슨하게 공유한 오픈베타라는 형식을 연상하게끔 한다. 이를테면 실제로 반지하 구조의 건물인 협소한 전시공간으로부터 비롯한 각종 제약들을 오히려 본격적인 전시 이전의 오픈베타, 즉 물리적인 공간상에 각자의 작업들을 임시로 비치하거나 제시해보는 일종의 모의실험을 위한 토대로 삼은 결과, 설사 개별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소 모호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개별 작업이 아니라 부려놓은 요소들의 얼개를 통해 작업적 세계관을 유추해보는 일이다.


이처럼 반지하의 오픈베타서비스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혹은 단순한 망상이거나 도안일 수도 있을) 원본의 맥락을 공간 내에 리부팅하는 과정이라면, 굿즈는 그와 유사하게 작업의 도해를 펼쳐놓고 그 내외에서 작가가 취사선택한 일부를 재료 삼아 만든 작업 또는 그러한 일부들을 재구성한 에디션이나, 명확한 실체로서의 원본이 아니라 앞서 주어진 원본 및 작업의 도해 자체를 압축시킨 결과일 수 있다. 굿즈와 미니어처가 동일한 개념이 아닌 이유는, 전자는 단순히 작업의 물리적인 스케일을 측정하는 단위가 아니라 원본을 자의적으로 표상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앞서 열거한 방식을 준수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식으로 귀결되든 굿즈를 단순히 판매할 수 있는 작업으로만 대하기보다, 원본을 확장된 미디엄으로 삼아 (작가가 전제하고 있는) 굿즈라는 형식에 부합할 만한 조형의 요소들을 모색하고 이를 토대로 제작한 독자적인 부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2) 취미관


앞서 오픈베타와 결부시켜 서술한 굿즈의 모델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되, 지금 시점에서 굿즈를 지속해나갈 수 있는 여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취미관>은 굿즈에게 축소된 전시공간이기도, 상품을 장식하는 투명한 큐브, 한 사람이 선택한 미감의 파편이기도 한, 즉 진열장인 동시에 다양한 맥락이 교차하는 개념적인 공간이기도 한 유리 케이스를 할당함으로써 또 다른 여지를 발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취미가는 실패했고, <취미관>은 얼마간의 성과를 거뒀다. 실패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선 그간 동원한 관객의 숫자나 실제 수익과 별개로 주어진 총매출과 같은 상업적인 성과가 아니라, 한때 신생공간이라는 플랫폼을 경유한 작가 및 작업들이 <굿->라는 행사를 통해 제시한 굿즈라는 공동의 방법론을 갱신해, 이를 토대로 어떻게 신생공간 이후에도 통용될 수 있는 독자적인 결과를 구현하고 재생산하는지에 주목해야한다.


취미가 2층의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개장한 <취미관>에서 특징적인 풍경은, 일본 서브컬처 중고물품 상점인 만다라케와 아키하바라 일대에서 성행 중인 렌탈케이스형식을 참조해 제작한 유리 진열장들이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투명한 컨테이너 창고처럼 도열해있는 모습이다. 각각의 진열장은 참여 작가들에게 개별적으로 분배돼있고, 당연히 그 안에는 다양한 굿즈들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진열돼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유리 진열장의 표면을 시선으로 훑다보면, 마치 진열된 굿즈들의 모둠이 유리 질감의 필터를 끼운 채 캡처한 이미지처럼 보이며 그러한 유사 파노라마를 투영해내고 있는 진열장의 구성이 비교적 명료하고 그 외에 박다함이 선곡한 BGM이나 적당히 조율된 채 수평적으로 흐르는 관객의 동선과 같은 요소들은, 다수의 사진 이미지들을 그리드 구조물에 진열하고 판매했던 일전의 <더 스크랩>3)을 연상하게끔 한다.


그러나 앞선 풍경은 좁은 복도에서 관객들에게 떠밀리듯 본 행사를 관람했을 때 특히나 부각되는 일종의 착시에 가깝다. 물론 <취미관><더 스크랩>과 마찬가지로 유사 편집숍을 지향하지만, 비치된 진열장의 개별 칸들은 사전에 정해진 이미지의 규격에 들어맞는 틀이 아니라 입방체에 가까운 공간이고, 도열해있는 진열장은 <더 스크랩>을 지지하는 그리드 구조물과는 달리 보다 입체적으로 불거진 큐브형 오브제이며, 진열된 굿즈들은 사진에 의해 포착된 피사체가 아니라 독립적이거나 공간 내에서 얼마간 산개한 실물의 작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섹션은 유리 표면에 의해 차단된 상태로 관객들을 맞이한다.4) 이처럼 접촉을 삼간 채 오로지 시선을 통해서만 진열장의 내부와 그곳에 진열된 일련의 굿즈들을 가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사 파노라마라는 표현이 마냥 무용하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취미관>의 굿즈들은 정방형의 공간에 비치된 (비록 다양한 매체를 경유해 굿즈화됐지만, 어찌됐든 실제로 사고 팔 수 있는 물리적인 대상이라는 점에서) 오브제인 동시에, 유리 표면에 비친 오브제의 환영인 셈이다.


여전히 유리 케이스가 다양한 맥락들의 교차 지점이라면, 케이스 너머 관객의 시선을 수렴하는 와중에 굿즈의 위상이 다소 모호해졌듯, 우리는 진열장 안의 굿즈라는 과도기적인 상태를 만다라케나 렌탈 케이스와 같은 명시적인 레퍼런스와는 별개의 관점을 적용해 도해해볼 수 있다. 비록 앞서 제안한 굿즈의 모델을 유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취미관>에 속한 몇몇 굿즈들은 그 자체로 완결되기보다 굿즈의 배후나 이면을 암시하는 역할을 자처한다는 점에서 원본의 표상이라는 맥락에 얼마간 부합한다. 이를테면 최고은의 섹션은 가구나 집기류 같은 기성 오브제를 재료 삼았던 이전 작업들과 달리 작가의 신체 일부를 캐스팅한 유리 조각들을 선보임으로써 차후 진행하게 될 연작의 프로토타입으로 기능하고, 노상호는 실물의 드로잉과 별개로 데이터 센터에 jpg파일로 업로드한 드로잉 이미지들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데이터 코드를 판매함으로써 현장에서의 굿즈를 일종의 링크로 대체한다. 즉 전자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작업의 얼개를, 후자는 자신에게 할당된 진열장보다 용량의 제한이 헐거운 디바이스 상에 부려놓은 작업들의 물량(노상호는 물량 자체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활용한다)을 원본으로 삼되, 지금 여기에서의 원본의 부재를 상이한 방식으로 만회하고 또 재현한다.


다른 한편 이전에 작가가 진행했던 전시 및 프로젝트를 유리 케이스 내부에 압축해 일종의 샘플로서의 전시를 구현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굿즈로 판매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김주원, 안초롱 듀오 '압축과 팽창(CO/EX)'은 지난 201791일부터 22일까지 아카이브 봄에서 진행했던 전시인 <허니 앤 팁>에서 사용한 스톡 이미지와 그것을 재료 삼아 만든 랜티큘러 오브제 등을 유리 케이스로 옮겨왔는데, 단순히 판매 목적의 디스플레이에서 그치기보다 실제 전시 당시 주어진 공간을 일종의 왜곡된 그리드 삼아 일련의 이미지들을 재배열한 방식을 적용해 유리 케이스라는 제한된 공간을 점유했다. 즉 이때 진열장 내부에 수납된 풍경 전반은 원본과의 연속선상에서, 원본의 스케일을 최소화해 재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윤성은 조형사와 협업한 헬리오스 캐릭터의 피규어와 피규어 제작과 여타 전시를 위해 그린 일련의 드로잉들을 병치함으로써, 시제품에 가깝게 완성/완결된 피규어를 중심으로 그로부터 파생된 낱장의 도안들이 공회전하고 있는 듯한 양상을 연출했다. 이는 실제 선후관계와 무관하게, 자신의 회화에서 모에화해 제시한 특정 캐릭터를 피규어 형태로 물질화시킨 뒤 이를 역으로 압축 해제한 결과를 원본의 모사품 주변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취미관>에서 제시된 굿즈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사前史 차원의 원본이 존재하고, 오픈베타형 전시와 유사한 맥락에서 굿즈들 간의 얼개가 그것을 암시하거나 표상한다면, 각각의 유리 케이스에 진열돼있는 것은 상품으로서의 굿즈 뿐만이 아니라 그 공간의 규격에 부합하게 축약된 서로 다른 얼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능동적인 관객 및 소비자는 유리 표면에 투영된 굿즈들의 모둠을 시선으로 훑어나가는 와중에 자신과 부합하는 특정 구간을 크롭crop해 마침내 굿즈로서 구체화시키는 동시에 소비하는 한편, 그것이 2차 창작된 과정을 각자의 관점에서 되짚어가며 자신만의 원본을 망상해낸다. 축약된 얼개는 이러한 분기들을 통해 유통되면서 자신의 외연을 넓혀나가는 동시에, 작가가 전제하고 있던 기존의 원본을 독해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소비 행위를 계기로) 발생시킨다. 그 와중에 개별 굿즈는 원본의 부산물이자, 자연스레 또 다른 분기의 시작점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KPS(구동희, 박미나, sasa(44))의 개인 소장품으로 구성된 컬렉션이나, 한진이 자신의 회화와 드로잉 세트와 별개로 제일 밑 칸에 두서없이 진열해둔 일상 용품들은 어떤 분기로 전개되는가? 애초에 그것들은 굿즈로 호명하거나, 굿즈로서 소비할 만한 물건들일까? 물론 일정 부분 작가의 취미나 기호를 반영하는 물건을 소장한다는 의미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낄 법도 하지만(더불어 sasa(44)와 박미나의 경우, 과거의 연작 및 협업에서 일련의 상품들을 나열하고 범주화함으로써 허구적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전략을 구사하긴 했지만), 애초의 의도야 어찌됐건 이들은 작업으로서 쓸모없는 물건들을 굳이 굿즈로 판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술의 유통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다. 흔한 레디메이드나 미술의 범주를 확장하기 위해 상품을 포섭하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시도와 무관하게 단지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을 채우기 위해 동원한 이 쓸모없음, <굿-><취미관>과 같은 행사가 신세대 작가들이 만든 기적5)도 일군의 미술 생산자들의 자급자족을 위한 대안적인 시장 플랫폼의 단초도 아닌, 단지 최소한의 수익을 발생시키며 전개할 수 있는 조형 차원의 모의실험을 위해 부풀린 무용담이라는 사실과 애초에 굿즈가 얼마나 유연한 개념인 지를 은연중에 암시한다.


3) 이후의 굿즈


<취미관>에서의 굿즈가 오브제이자 오브제의 환영이라면, 이때의 오브제는 유리의 표면에 투영된 이미지의 그림자로써 공간상에 드리워져 있다는 식의 기묘한 역설을 넌지시 주장해볼 수 있다. 그림자의 영역으로부터 해금되기 위해선, 상업적인 차원이든 관람의 차원이든 누군가에 의해 소비되어 케이스 너머의 세계로 진입해야한다. 그래야만 마침내 굿즈로 성사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인과관계는 단순히 <취미관>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굿즈의 유연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즉 팬시한 상품의 이미지로부터 꺼내지 않으면 굿즈를 가용하는 주체가 누구든 정체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결국 굿즈를 소비하는 행위는 굿즈라는 형식을 새삼 복기해볼 수 있는 여지를 동반하며,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앞선 여지를 확장하거나 변주해낼 것인가라는 문제는, 굿즈의 생산자든 소비자든 지금 시점에서 취미가와 취미관과 굿즈에 연루된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1) “취미가 趣味家 Tastehouse미술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취미가는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유통하며 미술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미술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취미가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글에서 일부 발췌. (http://www.taste-house.com/about)

2) “정금형 작가의 ‘<퍼폼 2016>한정 포스터가 아직 없으신가요? / 바로 지금, 정금형 작가의 창고에 남아있는 ‘<퍼폼 2016>한정 포스터를 구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드립니다! / 취미가에 <정금형의 배달서비스>가 입고되었습니다. / 정금형 작가가 직접 여러분이 계신 곳으로 포스터를 배달해 드립니다. / 선착순 20분에게 <정금형의 배달서비스>가 찾아갑니다! (...)” (http://www.taste-house.com/program/%ED%94%84%EB%A1%9C%EC%A0%9D%ED%8A%B8-%EC%A0%95%EA%B8%88%ED%98%95-%EC%A0%95%EA%B8%88%ED%98%95%EC%9D%98-%EB%B0%B0%EB%8B%AC%EC%84%9C%EB%B9%84%EC%8A%A4)

3) <더 스크랩>은 지난 20161227일부터 29일까지 진행한 새로운 타입의 사진 전시/판매 플랫폼이다. 103명의 작가/팀이 참여했고, 그들에 의해 생산된 1000여점의 사진은 김동희 작가가 제작한 그리드 형식의 구조물들에 일종의 견본으로 비치됐다. 관객/소비자는 구조물 사이를 돌아다니며 견본 사진을 관람할 수 있으며, 구매는 각각의 견본에 매긴 숫자를 메모해뒀다가 1층의 쇼룸에서 숫자와 책정된 가격을 지불하면, A4사이즈의 C-Print로 인화 출력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http://the-scrap.com/)

4) 물론 예외적인 섹션도 있다. 이를테면 최하늘의 섹션에서는 진열장이 개방돼있어 굿즈 형식에 걸맞게 얼마간 장식적이고 스케일이 작은 조각들을 직접 꺼내서 면밀히 살펴볼 수 있고, 송민정의 굿즈들은 애초에 유리 케이스가 아닌 소형 냉장고 안에 담겨있어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내부를 열람할 수 있다.

5) <[기자의 눈] 신세대가 만든 기적 굿-’>, 한국일보, 인현우 기자, 2015.10.18. (http://www.hankookilbo.com/v/fc88daf937704db394744e3e2931fccb)

Posted by jipdanochan

<표면의 입출력, 곽이브와 윤향로의 사례>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각종 스마트 미디어와 매개된 사용자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가늠하지만, 물리적인 현실의 토대 자체는 그만큼 유동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기반의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의 티저 영상에서 (스마트폰 디바이스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한 채) 현실과 고스란히 합성된 게임 인터페이스로 각종 포켓몬들을 포획하는 장면은1), 굳이 발매 이후 실제 플레이의 감도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해당 영상을 접한 대다수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을 증강현실의 확장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증강현실이라는 수사는 현재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동기화한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부연하는 데 어느 정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단 이때의 증강은 현실감을 교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디스플레이의 형태가 아니라, 스마트 미디어가 현실의 풍경을 포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사용자의 내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오작동에 가깝다.


무엇이 어떻게 오작동하는가, 라는 뒤이은 질문은 디지털 환경을 의식하거나, 그것을 나름의 표준으로 삼거나, 포스트 디지털이라는 모호한 담론 속에서 공회전하다 튕겨져 나온 파편들을 뒤늦게 재료로 주워섬기거나, 설사 열거한 사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더라도 다중적인 사용자 계정들과 연계된 채 두서없이 전개 중인 이미지-서사와 병행하는 일련의 미술 작업들의 접점을 암시한다. 당대의 미술을 통해 굳이 그러한 오작동의 징후를 가늠하려는 이유는 내가 사용자인 동시에 작업의 생산자 또한 어쩔 수 없이 사용자를 겸하기 때문이다. 미술이 여전히 무언가 재현해야 된다면, 이는 사실주의의 오래된 규약에 따라 웹상에 유통되는 가난한이미지를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거나 열화한 이미지 자체를 프레임 삼아 쳐다본 현실을 반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용자(이자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의 단위를 모색해나간다. 앞선 오작동의 정체는 그러한 시도들의 느슨한 교차범위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은 결국 특정한 이미지가 가상의 인터페이스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이를테면 여타의 편집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각적 패러미터는 원본 이미지에 투영된 실제 구성물들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표면상에 각종 효과를 적용할 뿐이다.2) 그런 의미에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마법소녀물의 특정 장면에서 주인공이 방출하는 에너지 효과를 줌인해 일부만을 발췌함으로써 원본 아니메나 해당 시퀀스의 맥락 등은 모두 소거한 채 오로지 표면으로부터 불거진 듯한 산란한 시각적 패턴만을 유사 회화로서 제시한다. <스크린샷>의 패턴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전사前史도 추론해낼 수 없다. 이러한 선택은 마치 이제 더 이상 이미지가 생산된 실제 맥락이나 의도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그것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적어도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 기계에게는 부재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샷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며, 방출되는 에너지는 스샷의 우발성과 다름없다.


<스크린샷> 연작이 일관되게 고수하는 미시적 레벨은, 일단 디지털의 권역에 속한 이미지는 원본의 위상과 무관하게 레이아웃 상에서 다양한 배율로 조절하거나 일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유동적인 시점 변환의 과정에서 이미지 자체가 얼마든지 픽셀 차원에서 망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윤향로는 편집 툴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는다. 작가가 확보하고 있는 사용자의 권한은 이미지 자체를 부러 관통하지 않는 표면상에서의 제한된 전개가 어떻게 이미지를 왜곡하고 때로는 의미론적 가치마저 무시하는지, 무엇보다 이러한 수순들이 열화의 한 방식이라면, 기꺼이 열화함으로써 어떻게 회화와 유사한 순간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때의 유사 회화라는 전제는 미국 코믹스나 일본 고전 만화와 같은 낯익은 대중문화 레퍼런스들을 재료 삼은 이전 작업들에서도 주지되는데, 이때의 회화적 화면은 커버 이미지에서 인물들을 소거함으로써 미장센을 강조하거나 만화의 동작선들을 발췌해 재조합하는 등, 이미지에 개입하고 있는 사용자의 존재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혹은 이때의 사용자는 편집 툴을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 <스크린샷> 연작에서는 사용자와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이 혼선되며, 앞선 거리감이 일순 무효화된다.


윤향로, Screenshot 3.02.24-1, 2017, Acrylic on canvas, 116.8 x 80.3 cm


<스크린샷>에서 사용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에 얼마간 몰입하거나 최대한 밀착함으로써,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이미지-표면의 세부에 천착한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방출 에너지를 과도하게 확대하고 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포토샵 브러쉬처럼 번진 망점과 궤적들, 두서없이 중첩된 레이어들의 위계와 같은 디지털의 질감이다. 윤향로는 이를 재차 회화로 옮김으로써 디지털과 매개된 당대의 조건에 수렴할 만한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결과가 실제 편집 툴에서 작동하는 효과들과 얼마만큼 유사한 지 대질해볼 필요는 없다. 일련의 작업들은 편집 툴에 열거된 패러미터의 세목들을 일일이 고려해 얻어낸 정교한 결과값이 아니라, 유사 회화를 맹목적으로 지향하며 열화를 거듭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동기화한 사용자는 디지털의 조형성에 통달한 전지적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인터페이스의 역학에 순응함으로써 우발적으로 망가지는 이미지의 목격자에 가깝다. 이러한 수동성이 원본을 유사 회화라는 자의적인 이미지로 희석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인 지, 작업과 별개로 대다수 사용자에게 보편적으로 그어진 한계인 지는 불분명하다. 어찌됐든 우리는 전자의 결과를 통해 후자의 조건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스크린샷>이 디지털의 권역을 불안정하게 활공하다 임의로 정한 기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본질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구간이다. (물론 이는 윤향로를 포함해 디지털 환경을 작업의 토대로 삼거나, 각종 편집 소프트웨어를 작업 도구로 삼아 전시공간을 점유해야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내리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작가는 사용자로서 목격한 이미지의 표면을 회화적 오브제를 연출하듯 캔버스 위에 빈틈없이 도포함으로써 디지털의 질감을 불완전하게나마 물성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 회화의 이미지를 카페트처럼 직조하거나 라이트 박스로 조립하는 등, 원앤제이+에서의 개인전 이전에 선보인 <스크린샷> 연작의 일부는 자연스레 동일 이미지를 다양한 물리적 판본으로 리부팅시키는 모의실험처럼 독해된다. 이 모두는 결국 (작업을 매개로 새로운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듯) 회화 차원에서 전개할 만한 새로운 조형적 단위를 모색하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단순히 캔버스에 투사된 추상적인 평면이 아니라 캔버스를 감싸고 있는 표면으로 외화하고, 디지털 질감과 결코 일체화될 수 없는 아크릴 물감의 이질성은 이미지-표면이 현실로 이전됨으로써 두드러지는 (초평면의 관성과는 대비되는) 굴곡으로, 캔버스라는 오브제는 현실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해 오작동하는 일종의 물리적인 인터페이스로 전유된다. <스크린샷>은 일련의 편집 툴에서의 시각적 패러미터가 오로지 표면상에만 관여한다는 전제를 고수한 채, 발췌한 이미지-표면에 회화를 매개로 한 질감과 중량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샷의 결과물들은 단순한 낱장이 아니라 현실의 중력을 수용하며 랜더링을 거친 일련의 캔버스 오브제로서 혹은 묵직한 표면으로서 나열된다.

 

한편 취미가 2층에서 진행한 곽이브의 <역할 part> 프로젝트는 결국 하나의 회화로 압축해낸 <스크린샷> 연작과 달리 이미지들이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 자체를 제시한다. 각각 다른 그래픽 이미지가 출력된 A1사이즈의 프린트들은 바닥에 무방비하게 놓여있거나, 액자 속에 담긴 채 진열되거나, 공간 중앙에 놓인 장방형의 구조물에 일정한 군집을 이룬 채 달라붙어 있는 등, 뚜렷한 규칙 없이 배분되어 공간 속에서 느슨한 얼개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한 풍경은 얼핏 그림 카드들의 무작위한 배열 속에서 우연찮게 들어맞는 조합을 찾아내는 게임 같기도 한데,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프린트들 사이의 관계를 억지로 작도해서 게임을 단판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프린트가 낱개로 놓여있든 일정한 군집을 이루고 있든 간에 어떠한 유의미한 이미지 조합도 형성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름, 커튼, 유리판, 그리드와 그물망 패턴, 그 외의 기타 자재들은 (실사의 부분적인 캡쳐본에 가까운 구름 이미지를 제외하고) 최대한 단순화한 그래픽 이미지로 번안되어 프린트 상에 압착되어있다. 도시적 건축의 표면이나 유리창 같은 자재들을 은유하는 납작한 이미지를 출력해 제시했던 작가의 <면대면> 연작의 맥락 속에서 고려해보면, 앞서 열거한 프린트들의 목록은 결국 취미가라는 공간을 작가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이미지의 시점으로 포착하거나 연상해낸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미지가 출처 삼은 공간의 특정성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모호해지는데, 이는 작가가 대면한 실제 공간이 순전히 프린트라는 레이아웃이 부과하는 관성에 부합하게끔 도식화됨으로써 현실의 정보값을 잃어버린 채 몇 가지의 단면들로 파편화됐기 때문이다. 곽이브는 이처럼 이미지의 시점을 경유해 주어진 단면들을 독자적인 단위로 삼아 원본으로서의 물리적 공간, 이를테면 취미가의 한 구간을 점유해나간다. <스크린샷>에서의 스샷혹은 원본의 (과도하게 확대된) 단면이 결국 현실을 향해 특징적인 회화적 오브제로 외화했다면, <역할 part>는 그보다 가벼운 중량을 지닌 채 역으로 현실을 이미지 차원에서 수렴하는 동시에 무력화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단면들은 공간 속에서 작가의 자의에 따라 군집하거나 무방비하게 흩어지며 나름대로의 조형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역할 part> 프로젝트 전경, 취미가 201호 


여전히 <역할 part>를 일종의 카드 맞추기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는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배열 속에서 실제 공간의 해상도를 짜 맞추려고 하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원본으로 삼은 공간은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에게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다소 무미건조한 바탕으로 전락한다. 곽이브는 스마트 미디어나 디지털 환경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할 part>가 이미지를 매개로 특정 공간이나 대상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서 일상 풍경의 타임라인을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그리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후자에서 중요한 것은 업로드된 단편들이 사용자가 속한 일상의 전체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한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불연속적인 순간들로 환원시키고 이를 스냅샷의 형식으로 포착해 나열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곽이브가 탈착한 이미지의 시점은 동질적으로 구조화된 특정 공간을 여타의 단면들로 발췌함으로써 현실에서와 다른 맥락을 점하되, 그 결과가 투영된 프린트의 얇은 물성으로 말미암아 인스타그램 이미지와 달리 최소한의 물리적인 접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프린트에 코팅된 매끈한 표면은 관객의 시선을 온전히 수렴하는 대신 공간 내에 밝혀진 조명을 포함한 주변의 잔상들을 은연중에 되비추며, 프린트 외부의 현실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가 불화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유리판이나 커튼이 드리운 창문의 이미지가 단순한 그래픽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가상의 표면은 실제 코팅지의 물리적인 표면과 애매하게 중첩된 채 이미지의 안팎에서 현실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명확해지는 사실은 <역할 part>가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는 출력된 결과물에 불과하며, 어떤 관객이나 사용자도 더 이상 그 너머로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를 매개로 한 물리적인 공간의 편집 혹은 재구성은 프로젝트가 개막한 시점에서 이미 완료됐다. 이미 완료된 게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선별된 내용의 프린트를 필요에 따라 추가로 출력하여 이제는 이미지와 무관해진 물리적인 공간 위에 덧붙이거나 프린트 자체를 독립적인 단위로 삼아 주어진 배열을 바꿔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역할 part>가 점유한 취미가의 한 구간은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그것을 파쇄시킨 이미지의 얼개 사이의 분기점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곽이브와 윤향로가 최근에 선보인 작업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염두하고 있는 평면이라는 개념이 한때 모더니즘의 서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내적인 완결성을 지닌 채 존재했던 회화적 평면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 평면은 그것이 회화의 형태로 반복되든 프린트로 얄팍하게 출력되든 선택한 매체 자체로부터 비롯한 독자적인 특성이라기보다, 현실의 특정한 시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불협화음과 일시적으로 동기화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일종의 레이아웃에 가깝다. 문제는 이때의 레이아웃이 특정 작가가 전제하고 있는 사용자의 경험치 혹은 디지털과 어떤 식으로든 연루된 이미지 재료를 반영하기 위해 조절되는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규약이자 조형적 단위로서의 평면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로 외화되는 순간 부과되는 물리적인 하중과도 일맥상통하며, 디지털의 관성을 미술 차원에서 단순히 의태하거나 모사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 지를 재차 상기하게끔 한다. 어찌됐든 디지털을 시작점으로 해 몇 가지 상이한 차원에 걸쳐있는 이 시각적 다이어그램은 바로 그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전히 어떤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다.

 

반대로 그 어떤 이미지에 의해 부단히 조율되고 어긋나는 과정이야말로 서두에서 언급한 오작동의 정체이자, 어딘지 모르게 망가진 듯한 이미지와 해상도가 재생산되는 이유일 것이다. 설사 특정한 작업으로 외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시점, 이미지를 매개로 한 시점을 탈착한 채로. 미술이 과연 이러한 새로운 영점과 무관할 수 있을까? 반드시 디지털을 소리 내 읊지 않더라도, 어떻게 이에 부합할 것인가?

 

한편 레이아웃으로서의 평면이 현실에서 임의로 제시되는 순간 관객의 시선을 되비추며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자신이 기입된 특정한 매체를 거부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며 불투명한 표면으로 환원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점차 보편화하고 있는 시각적인 오작동이 평면의 질감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표면이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의 징후로서의 이미지를 사용자로서 입력하고 이를 미술의 언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출력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오작동의 지점이자 새로운 평면성이 도출되는 순간이고 주어진 매체를 갱신할 수 있는 여지인 셈이다. <스크린샷> 연작과 <역할 part> 프로젝트 사이의 느슨한 교집합 속에서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편집 도구, 평면, 레이아웃과 같은 단어들의 순차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당대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작가(이자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불화하는 방식 자체다. 이제 표면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 https://www.youtube.com/watch?v=IZ2L2sbYAj8

2) 이케아 홈 플래너 같은 어플리케이션에서 원본의 사진 속에 놓여있는 2d의 사물을 전방위로 조작 가능한 3d 객체로 변환시켜주는 기능 또한 일단 사물 이미지의 표면을 포착하고 사전에 확보한 데이터뱅크에서 그와 관련한 텍스처를 추출해 이를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엄밀히 말해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상해낸 3d 객체인 셈. 이는 캐릭터 피규어가 제작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Posted by jipdanochan

<강정석 x 김희천 x ? 유닛으로 질주하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지난 2017.2.1 ~ 2.7 산수문화에서 진행한 <비평실천>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해당 전시는 참여 비평가들의 글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 하에 집단오찬에 게재합니다. 글의 소유권은 필자에게 있고, 전시 이후 휘발되기보다 명시적인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에 일종의 해적판으로 공유하게 됐습니다혹시나 일전에 <비평실천>을 관람했거나, 관련한 내용을 숙지하고 있던 분들은 이를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http://sansumunhwa.com/critic/) 


프롤로그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지도 앱을 참조하며 실제의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리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방위 센서에 따라 지도 인터페이스 상의 유닛1)이 자신의 시점을 ()조정한다. 이를 지표 삼아 내가 걸음을 옮기면 유닛 또한 마찬가지로 납작한 텍스처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유닛은 나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사용자인 내가 위치 서비스를 비활성화시키면 다중 위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방송되는 중인 GPS대역과 나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치 수신기와의 매개는 일단락되며 그로 인해 유닛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달리 말해 유닛과 유닛의 세계의 성립 여부는 오로지 나로 인해 좌우되는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 위에 나와 동기화된 별도의 세계를 투영시킬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

 

나는 유닛과 유닛의 세계에 결코 몰입하지 않는다. 주지하듯 유닛은 내가 참조할 수 있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유닛은 내가 아니되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부속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의 권한, 즉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유닛은 내가 의식하는 만큼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유닛의 경험은 나의 경험의 반영이다. 유닛은 스마트폰 속에서 나와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면상에는 분명 유닛이 전제하고 있는 시선의 방향성이 있다.

 

스마트폰의 위치 서비스를 활성화해 각자의 유닛을 확인해보자.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려 유닛이 쳐다보고 있는 각각의 방향을 가늠해보자.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불능감을 위한 인벤토리

 

유닛의 세계란 결국 어떤 불능감에서 연원한다. 이를테면 강정석은 지난 두산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GAME >의 특별공략에서 이를 비디오게임의 연대기와 대조하며 초기 하드웨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제약은 검은 평면 속에서 즐거움과 동시에 불능감을 발견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불능을 해결하려는 행위가 새로운 불능을 발견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솔루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상술한다. 이때의 솔루션이란 비디오게임의 사용자와 호환되는 각종 주변기기들의 목록으로 구체화된다.2) 달리 말해 CRT모니터 속에서 도트 형식으로 존재하는 캐릭터/아바타와 사용자 간의 간극, 즉 특정 유닛이 나와 온전히 연동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불능은, 도트로부터 폴리곤으로 외형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점차 변화한 컴퓨터 그래픽스의 발전과 별개로 불능 자체를 만회할 수 있을 만한 대리적인 접촉()을 파생시켜왔다.

 

컴퓨터 그래픽스 환경과 주변기기를 임의로 구분 짓고, 후자의 관점에서 게임이라는 매체를 재고해보면 해상도의 문제가 반드시 시각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로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해서 논의할 때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은 실사와 흡사한 대상이 아니라 현실과 별개의 영역에 놓인 독자적인 세계관을 사용자가 운용하는 방식이다. 이때 발생하는 불능감은 양가적이다. 게임 속 세계관이 현실에서의 커브와 맞닥뜨릴 때 사용자는 문득 화면과의 거리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 사용자의 감각과 점차 최적화된 주체가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역으로 계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곧잘 사용자에게 유발되는 정신착란이나 각종 FPS나 전쟁 시뮬레이션 등의 게임 컨텐츠의 윤리성 문제와 같이 동시대의 병리적 증상을 규명하기 위한 상투형의 객관식 문항들로 나열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요한 것은 게임적 리얼리티가 유발하는 일방향의 몰입감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일종의 잔여의 전류일 뿐이다. 실제로 강정석이 <GAME >에서 전개하는 서사는 미처 혼선되거나 증강되지 못한 현실을 사용자의 관점에서 앞지르기 위해, 혹은 지금으로써는 미완일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관점에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해한 각종 트랙들로 구성되어있다.

 

앞선 트랙들이 지향하는 공통의 소실점은 결국 질주를 거듭하는 스피드러너1인칭 시점 속으로 수렴한다. 스피드런은 기본적으로 최단 시간의 게임 클리어를 위한 것이지만, 오로지 그러한 의도만으로 가늠하기엔 질주의 과정에 너무도 많은 사족이 불필요하게 간섭하고 있다. 일단 영상의 내레이터부터, 스피드런을 중계하는 BJ와 전시에 부속된 특별공략 텍스트 일부를 읊는 익명의 남성과 여성까지 포함해 최소 3명이다. BJ가 게임의 진행과 병행하며 별다른 정보값 없는 중계를 되풀이하는 동안, 다른 내레이터들은 닌텐도 게임보이에서 시작해 게임 <쉔무>가 구현한 절차적 생성이라는 랜더링 방식, 각종 주변기기들, R.O.B의 눈, 2000년대 한국의 온라인 게임, 그 안에서 구현되는 다중적인 시점들, 트와이스 직캠, V(...)에 이르기까지 게임과 가상현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엄밀히 말해 무언가 보고 있다기보다, 스피드러너의 1인칭 시점이 상연하는 질주의 궤적은 앞선 내레이션 트랙들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트랙으로 구실한다. 그것은 텍스트의 각각의 구간이 발화하는 내용/이미지에 따라 때로는 게임보이의 발전형으로, R.O.B의 눈의 연장선으로, 그 외의 모든 것으로 각기 다르게 혼선된 채 인식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1인칭 시점은 스피드 러너의 일사분란한 파쿠르Parkour를 통해 온갖 지형지물들 사이를 넘나들며 시선의 낙차를 조성하지만, 정작 관객은 이 모든 질주의 감각으로부터 차단된 채 단지 화면의 바깥 혹은 표면surface만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이 화면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앞서 언급했듯 텍스트의 각 구간들을 듣거나 읽으며 서사의 얼개를 가늠할 때뿐이다. 이를 방증하듯 혹시 트와이스의 멋진 점이 뭔지 알아요?”라고 되묻는 구간부터 화면상에는 본격적으로 트와이스의 각종 짤방과 face swap 어플리케이션으로 합성한 이미지 등이 하이퍼스레딩 형식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1인칭 시점에는 도통 원근법적인 깊이감이 없거나 이를 자발적으로 무효화한다. 이런 식으로 표면을 쉽사리 뒤집는 방식은 지난 <유명한 무명>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Savior’가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이전 작인 ‘Soulseek/Pegging/Air-Twerking’ 위에 얄팍하게 투영된 것과 유사한 감각을 공유한다. “(...) ‘/Savior’는 감상해야 하는 영상작품이기보다는 그 제목처럼 화면 보호기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설치작업이나 작품을 보조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Savior’는 독립적인 영상 작품이기보다 <뉴 스킨>의 목재 구조물이나 <랠리>에서 텅 빈 커먼센터와 같은 역할에 가까워 보인다.”3) 그렇다면 강정석의 표면은 무엇을 보호하는가?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적 리얼리티)?

 

김희천의 ‘/Savior’는 마우스의 커서를 움직이면 금세 사라지고 말지만, 강정석의 표면은 그 너머로 질주하거나 몰입하기 위한 스피드러너의 관성과 그로부터 재차 밀어내는 표면 자체의 관성이 공존하는 양가적인 공간이다. 그 결과 표면은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트랙(의 절단면)으로 존재하며, 그럼에도 여타의 트랙들과 교차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소한의 하이퍼스레딩을 수렴할 수 있는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준다. <GAME >은 이와 같은 혼선을 유발하는 내레이션을 포함해, 사전에 텍스트로 정리하거나 구축한 특정한 사용자의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특별 공략을 비롯한 텍스트는 단순히 영상의 부록으로 구실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영상이 텍스트에 기반한 하나의 파본으로 제시된 것에 가깝다. 내레이터의 기계적 어조는 얼핏 불능감 이후에 도래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예시하는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한 나름의 촘촘한 서사적 얼개를 지니며 비약의 순간은 단지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현실로 이전되는 말미에 이르러서야 발생한다. 달리 말해 강정석이 스피드러너를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스테이지는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온전히 체감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모호한 접경지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상에 간섭하는 각종 트랙들과 하이퍼 이미지 및 링크들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에 굳이 현실을 기입하기 위한 엇나간 시도들이 빚어낸 파열이다.

 

이처럼 (세계관에 대한)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이라는 역전된 관계는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온전히 재현될 수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되묻게끔 한다. 오히려 명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불능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아바타라는 분신을 통해 시점의 탈착이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점차 현실감이 저하되고 있다(...)고 부추기는 공략 자체다. <GAME >에서의 속도감은 스피드러너의 질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는 특정한 사용자의 조급함에서 비롯한다. 이때의 사용자는 1인칭 시점이나 내레이터들과 등가의 존재가 아니라 정작 화면상에 부재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일련의 트랙들을 조급하게 조율해내고 있는 전지적 작가에 가깝다. ‘는 자신이 망상해낸 불능의 세계를 투사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사실 에게 중요한 것은 불능의 세계를 최대한 실제의 불능감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능이라는 도저히 통제될 수 없는 상태를 독자적인 세계관 속에서나마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든 동기화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은 스마트폰을 대하는 사용자의 관점과 흡사하다. 단순히 굳어있는 표면이 사용자의 헛손질에 의해 인터페이스로 변화하듯, <GAME >에서 제시하는 세계상은 특정한 사용자의 망상과 접촉함으로써 편의적으로 배열되는 와중에 있다. 특정 사용자는 전지적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굽어보고, 조급함 속에서 안도한다.

 

결과적으로 <GAME >의 관객은 앞선 전지적 사용자로부터 괴리된 채 에 의해 조율되고 있는 관성들만이 존재하는 쿠소게4)에 가까운 공간 속에 처하고 만다. 스피드러너는 스테이지를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하기 위해 분주하지만, 계속 루프되는 영상은 정작 스테이지의 명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이로써 질주라는 행위는 표면을 가로지르기 위한 헛발질과 동의어가 된다. 이를테면 표면은 게임 맵을 통해 3d로 복각된 폐쇄회로로서 존재하고 불능감은 1인칭 시점을 경유해 화면 너머로 접속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간 내에서 공회전할 뿐 도통 해소되지 않는다. 기계 인간 혹은 온전한 아바타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도트와 폴리곤의 여하와 무관하게 언제나 표면에 의해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영상의 주변에 일렬로 비치된 스티로폼 박스들과 러닝머신의 발판이 향하고 있는 합성 이미지 속 도트들은 물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서로를 불완전하게 암시하며 동일한 불능의 자장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석이 유년 시절의 기억을 포함해 자신의 일부를 이곳에 백업하고자 하는 이유는 기계 인간을 자처함으로써 표면상에 최적화된 존재로 스스로를 열화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게임적 리얼리티는 현실을 증강하기보다 사용자를 열화하면서 평형 상태를 모색한다. 혹은 스피드런이라는 질주의 궤적을 통해 열화된 자신을 백업할 수 있는 임의의 공간적 틀을 직조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분기한 평행세계

 

<시뮬레이팅 서피스A/B>를 포함해 강정석의 이전 작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동세대의 인물들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영상 혹은 시간이 열화된 클립들로 재구성된 채 유통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듯, 작가에 의해 주지된 무의미한 행동들(반복되는 출근길의 배웅, 고가도로 아래에서 콩알탄을 터뜨리며 주고받는 슬랩스틱, 오늘 하루 일과에 대한 자기고백 등등)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수행하며 자신의 잉여적인 정체성을 표면상에서 기꺼이 상연했다. 그러나 세대라는 사회학적 전제와 표면이라는 데이터 표상을 위한 시각적 인터페이스 사이의 교착 상태5)<GAME >에 이르러 얼마간 유보됐거나 본격적으로 (세계 내 주체와 대치되는) 표면 내 주체를 망상하기 위한 시도들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강정석은 동세대의 인물들을 표면상에서 굽어보는 대신 스스로를 백업시킴으로써 표면 내 주체 이를테면 유닛의 시점으로 바라보거나 유닛이 기꺼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상을 위한 토대를 가설하고 있는 셈이다.

 

동세대라는 전제가 그러했듯 표면의 관성에 의해 열화되기 이전의 주체는 여전히 유년기와 같은 실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세계 내에서 육화된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을 유닛 속에 기입하기 위해선 일단 기억이라는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얼개, 즉 게임적 리얼리티와 그와 관련된 불능감의 서사 및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또 다른 텍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후자는 결국 유닛으로서 현실에 대해 느끼는 불능감으로부터 연역된 일종의 대체 기억이다. 이처럼 강정석이 유닛의 세계를 위한 나름의 전사前史를 구축하기 위해 텍스트라는 형식을 구체적인 토대로 삼는 한편, 김희천은 지난 바벨 3부작을 통해 그저 인터페이스상에서 고스란히 복각했을 뿐인 텅 빈모델링의 세계 속에 이입하기 위한 장치로써 사소설에 가까운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사후적으로 투사해냈다. ‘라는 수신자에게 부치는 서신과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서사적 레이어들은 전사가 부재한 서울의 폐허들, 즉 반드시 철거됐거나 철거를 예비한 허름한 가건물이 아니더라도 CAD와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든지 편의에 따라 임포트되거나 GPS를 포함한 유닛들의 시점을 빌어 재조정될 수 있는 가변적이고 허약한 도시 구조체를 현실의 거울상으로 반영해내기 위한 텍스트적 질감이다. ‘이곳은 기억을 백업하기 위해 모델링됐다기보다 내러티브가 투과할 수 있을 만큼 얄팍해진 데이터 껍데기다.

 

김희천이 ‘/Savior’를 통해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제 작업을 표면의 더께로 삼은 것은 사용자의 시선이 표면상에서 차단될 것이란 전제를 얼마간 의식함과 동시에, 3부작에 포함된 여타 작업들과 달리 별다른 내러티브가 부재한 ‘Soulseek/Pegging/Air-Twerking’을 오로지 데이터 껍데기들만이 범람하는 몰가치한 질료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Savior’는 작가가 습관적으로 촬영한 각종 스냅 영상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파운틴 푸티지 조각들은 그것이 발췌한 실제 일상의 타임라인을 대변하며, 화면 보호기 이면에서 별다른 얼개 없이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데이터 껍데기들과 질료 차원에서의 대비값을 조성한다. 이를테면 <랠리>에서 데이터와 혼선된 세계상을 은유하는 유리 파사드의 공간은 ‘/Savior’‘S/P/A’의 시공이 대치하는 가상의 경계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희천은 현실과 가상, (경계로서의) 파사드를 데이터에 의해 포화된 유사 디스토피아를 연출하기 위한 개별적인 전제들로 나름대로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다. 그러나 이제껏 현실의 패러미터는 파사드적인 공간 속으로 이접되기 위해 언제나 내러티브라는 자장 내에서 조절되어왔다. ‘/Savior’가 예외적인 이유는 그것이 데이터 껍데기와 별도의 영역에서 수집 나열됨으로써 내러티브와 함께, 조절 가능한 패러미터 자체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희천은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을 모색한다.

 

지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썰매>에 부여된 서사적 레이어들은 여전히 서사를 빙자하되 단순히 데이터 껍데기를 투과하기보다 공간의 폐쇄감을 북돋기 위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속도감의 방언을 터뜨린다. 중요한 것은 수신자를 향한 발화가 아니라, (작중에서 등장하는) VR기기를 뒤집어쓰고 서로의 데이터 자아를 자살시켜주는집단자살클럽처럼 데이터 차원에서 열화한 자아와 정보와 가십과 그것들 각각의 구분이 무화된 세계를 엄연한 현실로 인식한 상태에서 한층 배가되는 망상의 부피감이다. 달리 말해 한때 세기말의 정서와 대응되며 어쩐지 불길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파국의 정서는 <썰매>에 이르러 마침내 기정사실화된다. 앞선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은 결국 이처럼 파국적이고 뒤죽박죽인 세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모 레이싱 게임에서 빌려온 숭례문 서킷의 이미지는 레이싱카의 1인칭 시점이 숭례문 주변에 구획된 도로를 질주하며 점차 가속하고 이는 실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중력을 잃은 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굽이치는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의 1인칭 시점과 분할 화면을 통해 무한루핑되는 롤러코스터 장면 등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암시되는 속도감은 강정석의 <GAME >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능을 전제하되, 이미 현실로부터 차단됐기 때문에 주어진 표면 너머에서의 자율성을 동력으로 삼는다. <썰매>는 표면 너머로 신속히 미끄러지며 불능의 서사 및 내러티브를 헝클어뜨리는 이미지 잔상이다.

 

김희천은 <썰매>의 말미에서 face swap 어플을 통해 행인들의 얼굴 위에 덧씌운 자신의 얼굴을 빌어 화면 속에서 우리(가 속한 이편)를 응시한다. 이제 속도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자살을 거듭할 수 있는 가 속해있는 세계가 단지 영상 클립의 일부, 즉 열화된 시간의 절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정석과 김희천은 표면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지금의 모호한 현실을 재고하고 있다. 전자가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서사를 발판 삼아 자신이 조작하고 있는 불능의 세계가 투영된 표면을 향해 밀착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문학적 내러티브로 조형한 데이터 파사드 속에 이미 상주한 채 표면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냉소하고 있다. 이때 질주라는 행위는 각자가 점유한 세계관을 오작동시킴으로써 가시화하는 서로 다른 계기로 작용하되 관객의 시점에서는 동일하게 불능하다.

 

이상한어둠 혹은 파국과 대면하기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에서 주인공의 시선과 얼마간 밀착하여 심도가 흐릿해진 화면을 항구적인 위급함의 감각, 언제나 다른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강제를 수렴함으로써 작중 배경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잠식한 어둠 혹은 파국의 한가운데에 있기를 자처하는 이미지-패닉으로 정의한다.6) 그에 반해 스마트폰이나 게임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구현되는 휴먼 스케일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대상에 대한 심정적인 거리에 따라 화면 심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파국에 의해 추동되는 질주란 얼마만큼 패닉을 수반하는가? 이를 재고하기 위해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이라는 전제를 끌어와 각종 사회정치적 현안들에 무감한, 즉 패닉 없는 사용자 주체를 커스터마이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앞선 작업들에서 등장하는 질주라는 행위가 단순히 오래된 외상의 태엽을 감아 어딘가로 달려감으로써 파국의 감각을 활성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에 기입된 명시적인 계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도래한, 어찌됐든 가 감수해야만 하는 정체모를 파국에 대한 나름의 윤곽을 가설해나가는 과정이자 결과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에 대한 위화감 혹은 유닛에 대한 불능감은 불현듯 당도한 세계를 대면하는 감각이다. 유닛의 시점에 이입함으로써 표면 내외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한순간의 냉소와 체념에 그치기보다 최소한 가 제어할 수 있는 파국의 범위 내에서 불능의 상태를 응시하고자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유닛의 시점을 활성화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단일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제는 유닛이 쳐다보는 방향성을 현실과 연루된 다중적인 세계상으로 연장하기 위해서 어떤 망상이 필요할 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유닛은 망상을 투영해냄으로써 유사 주체의 시점을 탈착한다. 이러한 유닛들이 산개한 세계는 파국의 계기가 없는 현재형의 파국을 각자의 서사로 대질해볼 수 있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비록 자아는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거나 편의적으로 백업할 수 있을 만큼 열화되진 않았지만, 유닛의 슬롯은 새로운 프로필과 그에 기반한 일종의 대체서사이자 독자적인 타임라인을 예비하고 있다. 나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패닉은 차라리 응시할 만한 대상을 계발하는 와중에 동원되는 서로 다른 밀도의 텍스트 사이의 낙차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전사前史들은 점차 패닉을 데이터적인 자기조형성의 과정으로 뒤섞는 동시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패러미터의 관계 내에서 굳이 어떤 서사적 얼개를 식별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유닛으로부터 비롯한 다수의 대체서사들을 서로 엮어냄으로써 파국의 불확실한 정체를 헤아리기보다, 서사성을 변화하는 스케일에 따라 재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재확인하는 일이 우선이다.

 

혹은 일련의 작업들이 부러 파국의 계기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떨까? 각자의 불능감을 통해 유지하는 소위 세계와의 등거리는 굳이 그 이면을 뒤집어볼 필요가 없는 지엽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달리 말해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세계를 압축/상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과 연계된 각종 사회정치적 전제들을 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는 단순히 정치적 감수성의 부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어쩌면 2008년 이후 한때 미술계를 포함해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성했던 동시대성의 전제가 와해되고 더불어 중산층이라는 신화가 대대적으로 붕괴함으로써 일련의 물적 토대를 잃어버린 주체들은 이제 자신의 현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매개를 주기적인 와해와 붕괴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순환적인 메커니즘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데이터의 권역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항구적인 위기감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계 내 주체는 결국 항구적인 위기 자체를 자양분으로 삼는 데이터 생산물에 자신을 투영해냄으로써 표면 내 주체로 적응해나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기계 인간이나 아바타가 아니라 굳이 표면이라는 전제를 부각하는 이유는 데이터에 대한 적응력을 발휘하는 순간마저도 여전히 불능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주변기기는 지금으로썬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데이터를 표상할 뿐인 표면상의 이미지를 쳐다보고 그와의 간극 속에 각자의 서사를 기입할 수 있을 뿐이다.

 

표면으로부터의 차단과 소외를 만회하기 위해 그 내외에 기입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주변풍경의 잔해들을, 무엇보다 자신의 잔해들을 에둘러보는 것. 이것이 지금 나에게 부속된, 그러나 얼마든지 다르게 번안될 수 있는 유닛의 전사다. 표면은 차단함으로써 불능감의 분기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다시 한 번,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1) 유닛은 본래 특정한 단위 혹은 단위체를 의미하지만, 나는 이를 GPS좌표와 게임의 캐릭터/아바타, SNS의 계정 등을 포함해 주체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가상의 객체를 의미하는 조어로 사용한다.

2) “(...) 네트워크를 통한 멀티플레이, 전자총을 이용한 사격, 레이싱 휠을 사용한 비디오 드라이빙, 유압식 모션 제어를 이용한 오토바이 경주, 시뮬레이션 체어, 센서를 이용한 제스처 기반 컨트롤러 등 오늘날 익숙한 플레이는 모두 초기 게임에서 선보여졌습니다. 가능성은 무한했지만, 충분히 가속되지 않아 다소 열화된 모습으로 도착한 결과물입니다.” 강정석, <특별공략, GAME 완전분석 매뉴얼>, 전시 텍스트 수록

3) 이기원, <모델링, 화면보호기, 셀카_플러그인으로서의 김희천>, 보고 쓰고 분류하기, 2016, 89p

4) “일본에서는 '쿠소 게임(クソゲーム, ゲーム)', 줄여서 '쿠소게(クソゲー, ゲー)'라고 부른다.[1] ', 쓰레기, 젠장'이라는 뜻의 'くそ'와 게임을 합친 것. 북미권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Shitty Game'이라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 그러나 강정석이 연출한 공간을 언급하며 사용한 쿠소게라는 표현은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졸작 게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능감을 암시하는 영상의 표면과 도트에 대응되는 각종 이미지들을 함께 나열함으로써 현실상에서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상태로 굳어버린 데이터 객체 혹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을 가리킨다.

5) “역설적으로 세대라는 관성은 계속해서 스킨으로서의 무가치함을 방해한다. 동세대 안에 종속된 인물들을 마저 열화시킬 수 없는 강정석은 슬랩스틱의 와중에도 빈번히 그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최소한 스마트폰 1인칭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면 이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복기하고 있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웹진 집단오찬’(http://jipdanochan.com/71)

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리 옮김, 만일, 2016, 49-50p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