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
about (1)
notice (0)
project (25)
column (4)
archive (14)

<망가진 이미지, 망가진 공간, 망가진 회화>

권시우


동시대 회화는 어떤 이미지를 출력해낼 수 있을까? ‘동시대라는 수식은 지금의 파편화된 시공과는 부합하지 않으므로 별다른 쓸모가 없는 것 같지만, 어찌됐든 당면한 현실이 있고 모든 매체가 그러하듯 회화는 그와 무관하지 않다. 동시대의 어감이 생소하다면, 차라리 막연하게 계속되는 오늘이라고 호명해보자. 국내 미술의 오늘을 재고하기 위해선 2015년 전후의 타임라인을 보다 체계화할 필요가 있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비평적 개요가 미비하므로 지금 당장은 그로부터 불거진 몇몇 작업적 징후들을 솎아내 대강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신생공간은 일련의 전시와 작업들을 통해 포스트 폐허라 할 만한 환경과 점차 동기화됐고, 그 결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변시켰다. 이를테면 관련한 몇 가지의 질문들을 늘어놓을 수 있다. 각각의 공간 운영자가 가용했던, 또한 지금도 암암리에 지속하고 있는 다수의 임대 및 유휴 공간은 그것이 노출하고 있는 다소 남루한 외관만으로 단순히 폐허로 호명할 수 있는가? 만약 그것이 단순히 폐허가 아니라면, 그 안에서 구현되는 작업은, 무엇보다 한때 자기 완결성의 언어를 빌어 시선의 몰입도를 유도했던 회화는 어떤 식으로 자신이 불시착한 공간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의 지위를 갱신하거나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가?


바로 앞선 질문을 이어받자면, 한진의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회화에 대한 갱신이라기보다 지속적인 포기의 과정에 가깝다. 반지하B½F(이하 반지하)에서 선보인 전시는 본 연작의 발단이자 말 그대로 일종의 오픈베타라고 할 만한데, 이후 연작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다소 흐릿한 인상의 전투형 미소녀캐릭터1)의 중대형 크기의 걸개 드로잉과 그에 부속된, 다소 얄팍하게 구겨지거나 엉거주춤 선 조각 오브제들이 좁은 면적의 공간에 느슨하게 배치된 모양새다.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잠정적으로 마감된 지금 시점에서 이 전시를 재방문했을 때 흥미로운 점은 한진의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들이 미처 합성되지 못한 채 공간상에 나열되어있다는 것이다.

 

1) 본래 전투형 미소녀 혹은 싸우는 미소녀는 서브컬처 내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써, 다양한 배틀물에 등장하는 말 그대로 미형의 소녀 캐릭터를 지칭한다. 배틀에 최적화하기 위해 신체적으로 변형되거나 유사 사이보그화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능한 전사로 기능함에도 불구하고 모에화한 여성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한진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전투형 미소녀는 본 글에서 후술하겠지만 앞선 서브컬처의 맥락을 얼마간 전유하는 한편, 대개 어딘가를 노려보거나 배틀을 대기하듯 엉거주춤 서 있다는 점, 그리고 드로잉-회화의 맥락에서 무작위로 변형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서브컬처 내에서 통용되는 전투형 미소녀라는 개념과 별다른 접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캐릭터 혹은 인물이 한진의 작업에서 주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지칭하기 위한 조어로서 미소녀를 사용하기로 한다.


<오르가즈믹 스크랩Orgazmic Scrap>(2014.5.15 - 31) 일부, 반지하 20번째 프로젝트. (http://vanziha.tumblr.com/tagged/project/page/3) 


이후 커먼센터에서 진행한 단체전 <오토세이브 : 끝난 것처럼 보일 때>(이하 <오토세이브>)에서 제시한 작업을 기점으로 작가가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드로잉-회화를 반지하에서의 드로잉과 비교해보면, 후자는 (단순히 드로잉-회화의 밑그림 차원이기 이전에) 그와 함께 배치된 조각 오브제들의 안팎을 구성하는 무작위한 색면들2)과 일시적으로 분리됨으로써 윤곽만이 존재하는 텅 빈 레이아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일련의 조각 오브제는 화폭으로부터 물리적인 공간상에 추출된, 그럼으로써 망가진 (얼마간 채색된) 평면의 자재들인 셈이다. 물론 이 자재들이 어떤 식으로 접히거나 형상화될 지는 드로잉-회화의 전개에서처럼 순전히 작가의 자의에 의해서 결정된다. 혹은 평면의 자재들은 구겨졌거나 엉거주춤 서 있는 등의 다소 위태로운 상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일정 부분 (평면으로서 온전히 지탱할 수 없는) 현실의 완력을 견뎌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2) 일련의 오브제는 종이나 비닐 등의 표면 일부를 채색한 뒤 때로는 변형된 미소녀의 입상처럼, 대개는 작업의 부산물처럼 늘어놓았다.


문제는 앞선 드로잉 레이아웃과 평면의 자재들이 합성됐다고 할 수 있을 드로잉-회화들이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를 자처한다는 점이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미소녀는 흐릿하게나마 형상화된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 미소녀의 신체 윤곽은 드로잉에 가까운 붓질에 의해 과장되게 부풀려지거나 축소될 뿐 아니라 주변의 불균질한 색면들과 상호작용하며 거듭 셔플링Shuffling된다. 재빠르기보다 느슨하게 휘갈겨진 듯한 붓질과 그로 인해 모호해진 인물 형상은 일면 작가 본인의 무의식의 반영 같기도 한데, 물론 그러한 고리타분한 독해의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진이 인물의 표정이나 이목구비를 만화적인 관습에 따라 축약해 묘사함으로써 미소녀라는 클리셰를 은연중에 암시하면서도, 그것이 서브컬처 내에서 담보하고 있는 수동적인 성격을 (회화의 내외에서 의도적으로 망가뜨린) 평면의 자재들과 결부시킴으로써 편의적으로 변주한다는 점이다.


그 결과 한진의 미소녀는 서브컬처에서 관습화된 일련의 기호들과 무관하게, 명확한 소실점을 잃어버린 회화적 스크린이 특정한 이미지를 투영해내는 대신 무분별한 평면의 자재들만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럼에도 그것들에 최소한의 얼개(혹은 레이아웃)를 부여하기 위한 형상으로 기능한다. <오토세이브> 이후의 작업들을 드로잉-회화라고 호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련의 필치와 색면들이 화폭 내에서 별다른 맥락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전개되고 누적되는 과정이 어찌됐든 앞서 언급한 인물 형상이라는 얼개를 (설사 셔플링되는 와중에 그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하더라도) 묘사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드로잉-회화가 불완전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을 단일한 이미지로 수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얼핏 추상적으로 조합된 듯한 평면은 미소녀 형상에 의해 빈번히 와해되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전시공간 상에 일종의 조각 오브제로서 추출되기 이전에 한진의 평면이 화폭 내에서 이미 한 번 망가진상태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결국 <오토세이브>의 경우에서처럼 드로잉-회화와 그에 부속된 조각 오브제들이 병치되었을 때, 양자는 불완전한 평면으로부터 분기한 별개의 대상이 아니라, 그로 인해 망가져버린 상태를 공유한 채 서로를 어렴풋이 지시하고 있다. 일전의 반지하에서의 오픈베타 과정에서 등장했던 조각 오브제들이 가상의 화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추출해낸 색면에 그쳤다면, 드로잉-회화의 관점에서 경험하는 조각 오브제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두서없는 역학들, 이를테면 셔플링의 과정을 미처 종결하지 못한 채 화폭으로부터 벗어나 현실상에 삼투한 결과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은 캔버스 상에 그럴 듯한 회화 차원의 이미지를 출력하는 문제를 유보한 채, 회화와 그것이 거듭 재생산하는 (무의미한) 평면의 자재들을 재료 삼아 어떻게 물리적인 공간을 연출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혹은 단순히 허름한 외관이나 노화의 정도로 가늠되는 폐허가 아니라, 전시공간으로서 랜더링이 덜 된 미완의 공간 속에서 회화 자체를 산개하며 나름의 좌표를 모색한다.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 전시 전경.(https://twitter.com/commoncenter_kr/status/614315523698917377)


포스트 폐허의 상황이란 다수의 전시공간이 화이트큐브의 근사치로부터 벗어나 당사자들이 당면한 일시적인 필요와 문제에 따라 공간 내외에서 선뜻 파편화되기 시작할 때 성립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신생공간들은 최적화되지 않은/못한 공간의 상태를 동시다발적으로 점유하는 와중에, 폐허의 장소성과 무관하게 손쉽게 폐허로 호명되곤 하는 임대 및 유휴 공간의 제한적인 레이아웃과 질감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가상의 화이트큐브와 비교했을 때 축소되고 얼마간 구겨진 듯한 공간(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축소되고 구겨지지 않은 가상의 화이트큐브를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을까?)에서 도드라진 물리적인 요철에 임의로 들어맞는 모듈로서의 작업, 혹은 주어진 공간과 그로부터 튀어나온 조건반사적인 작업들 간의 의도치 않은 접면으로부터 마침내 포스트 폐허라는 환경을 망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포스트 페허라는 환경, 그로부터 비롯한 물리적인 토대를 일종의 가설무대로 삼는다. 이로써 회화의 붕괴된 소실점과 이제껏 랜더링이 덜 된, 즉 불균질하게 흩어진 자재와 텍스처를 무방비하게 노출하고 있는 전시공간이 일련의 작업들을 수렴하는 와중에 파편화한 시점은 한진의 작업 내외에서 미묘하게 혼선된다. 후자의 경우, 신생공간을 경유하며 일변한 공간에 대한 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이는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일정 부분 (회화라는 매체, 그로부터 비롯한 일련의 작업들과 함께) 작가 본인이 불시착한 2015년 전후의 시공에 회화를 매개로 적응해나간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폐허의 장소성이 무효화된 순간 작업이 폐허 속에서 대면하게 되는 것은 도시의 사회적인 네트워크에 유사 서비스업의 형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이를 미술의 언어로 전유해낼 수 있는 여지가 아니라, 그저 얼마간 망가진 공간의 텍스처와 그와 동기화한 채 망가져버린 시점이다. 그러므로 한진은 드로잉-회화 및 평면의 자재들을 활용해 자신의 시점을 고의로 망가뜨림으로써 지금 처해있는 환경에 최적화한다.


결국 한진의 작업과 포스트 폐허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온전히 합성해내지 못하는 각자의 과도기적 상태로부터 불거진 남루한 질감이다. 신생공간 이후에도 젊은 미술 생산자들에게 할당된 대다수의 전시공간은 여전히 중립적이라기보다 무방비하며, 그렇기 때문에 일련의 작업들은 개별 공간이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는 망가진 면면들을 어떤 식으로든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진은 앞서 언급했듯 자신의 회화가 전제하고 있는 불완전성을 화폭 너머로 삼투시킴으로써, 회화와 공간의 서로 다른 과도기적인 상태 간에 의도치 않은 접면을 만들어낸다. 혹은 애초에 망가진 공간과 병치해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는 불완전한 평면성을 자처한다. 그러나 이때 의도한 삼투 현상, 즉 화폭 내에서 이루어진 셔플링을 공간의 과도기적인 상태와 동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캔버스의 물리적인 경계에 의해 차단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련의 조각적 오브제는 작가의 개입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불거진 평면의 자재들이며, 앞서 언급한 접면 또한 망상 차원에서 성립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연출된 풍경은 포스트 폐허 자체를 레벨 디자인 삼아 그에 적합한 방식으로 구현해낸 듯한 남루한 회화적 얼개다. 그런 의미에서 <오르가즈믹 스크랩>은 회화적인 스크린이 잃어버린 이미지/대상의 빈 칸을 남겨둔 채, 바로 그 유예의 순간을 반복하기 위한 동력을 지금 당면한 현실의 잔해들에서 찾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폐허의 망가진 텍스처가 그 안에 제시된 개별 작업들에 지속적으로 간섭하며 작업의 해상도를 저하시키거나 무력화하듯, 한진의 회화에서 이루어지는 셔플링 또한 추상의 외연이 미소녀 윤곽에 간섭하거나 역으로 인물 형상이 추상적인 색면에 간섭하는 식으로 식별 가능한 대상/이미지 내외의 경계를 반복해서 허물거나 유예시키고 있다. 결국 양자가 공유하고 있는 과도기적인 상태는 일정한 제약 안에서만 통용되는 유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신생공간의 사례에서 우리는 폐허라는 특징적인 레이아웃을 자처했을 때만 배가되는 공간의 완력을 가늠할 수 있고, 회화 차원에서의 셔플링은 캔버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미처 납작해지지 못하는, 달리 말해 불완전한 평면성을 현실에서의 하중을 견디며 물리적으로 모사해내고 있을 뿐인 유사 조각들을 생산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진의 회화는 공간 특정성에 부합하는 일종의 모듈로서의 기능과 텍스처를 지니고 있고, 공간413에서 진행한 개인전 <OS->(2017527- 610)는 이를 부연하기 위한 사족(이를테면 조각 오브제)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오로지 회화의 아웃풋만으로 앞선 진술을 계속해나간다. <OS->는 남루한 회화적 얼개에 대한 내러티브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는 가정 하에, 그에 기반해 독자적인 회화 작업을 제시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각각의 드로잉-회화는 미소녀 윤곽과 추상의 색면 간에 의도적인 혼선을 빚는 유사 드로잉 과정을 갱신해 화폭 내에서의 변별성을 모색하기보다, 여전히 주어진 공간의 텍스처와 상호작용하는 여지를 부각한다. 이는 그간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이 구성해낸 남루한 회화적 얼개가 이미 내러티브 차원에서 포스트 폐허라는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OS->에서의 드로잉-회화는 그에 부속된 조각 오브제들의 별다른 매개 없이 개별적으로 놓여있을 때조차, 그 자체로 완결되기보다 전시공간의 벽면으로부터 비롯한 얕은 부조처럼 보인다. 이러한 착시는 단순히 벽면에 걸려있을 때보다 부러 어슷하게 기대서 있거나 공간 어딘가에 무방비하게 놓여있을 때 배가된다.


한진 개인전, <OS-> 일부.


앞선 풍경은 주변의 공간적 남루함을 일방적으로 의태한 결과가 아니라, 남루한 회화의 텍스처와 남루한 공간의 텍스처를 병치함으로써 발생한다. <OS->에 비치된 캔버스들은 결코 주어진 공간의 표면을 깎아낸 부조나 그것을 모사하기 위해 물리적으로 변형시킨 캔버스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본 전시에서의 개별 회화들은 마치 오브제인양 캔버스의 무게나 하중을 빌어 벽이나 바닥과 같은 공간의 구조에 얼마간 의지하고 있다. 결국 드로잉-회화는 평면의 자재들을 물리적으로 추출해낸 이후에, 스스로를 일종의 캔버스 오브제로 제시함으로써 현실의 공간 내에 마저 수렴되고자 하는 셈이다. 이러한 과정은 셔플링의 와중에 있는 회화적 이미지라는 전제는 여전히 고수한 채, 그간 회화와 공간 간을 인위적으로나마 매개했던 평면의 자재 혹은 유사 조각들을 생략함으로써 성립한다. 즉 개별 회화와 (폐허로 호명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과도기적인 그리고 큰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러할) 공간이 직접 대면했을 때, 전자를 이미지 차원에서 과시하기보다 후자의 관성에 종속시키고 그에 따라 일종의 오브제로 환원해 공간상에 배열하는 식으로 양자를 재차 동기화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캔버스가 이미지 내외를 구획 짓는 물리적인 경계는 더욱 확고해져 앞서 의도했던 삼투를 차단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개별 작업들은 공간에 종속되는 동시에 독자적인 회화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처럼 한진의 회화에는 이미지 내외에 몇 겹으로 둘러쳐진 경계들이 혼선된 채 존재한다. <OS->를 포함한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은 지금까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 포스트 폐허의 환경과 조응하는 와중에 미묘하게 다른 형태로 주어졌던 각각의 공간들을 회화 차원에서 수렴하고 이를 기반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과정이었다. 결국 망가진 회화는 망가진 공간에 대한 조건반사적인 대응인 셈이며, 망가진 공간은 지금까지 우리가 신생공간을 매개로 축적한 경험치의 물리적인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망가진 공간 자체가 신생공간이라는 경험의 특정성을 유발한 주요한 동인 중에 하나였거나. 그렇다면 마침내 <오르가즈믹 스크랩> 연작을 매듭지은 한진은 이후 어떤 공간을 수렴하고 또 점유할 것인가? 지금까지 남루한, 가난한, 그로 인해 망가진 텍스처들을 합선시킴으로써, 혹은 그것들 사이의 경계들을 중첩시킴으로써 일련의 작업들을 전개했다면, 화이트큐브의 근사치에 가까운 공간에 불시착했을 때 여전히 앞선 전략은 유효할까? 이를테면 신생공간 발 작업과 유사 화이트큐브 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망가진 회화의 시점은 앞선 질문들을 포괄한 채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신고
Posted by jipdanochan

<취미가와 취미관 이후의 굿즈’>

권시우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 전경. 취미가 트위터 공식계정(@tastehouse_info)에서 발췌.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은 유리 진열장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을 미술가들에게 제공합니다. 이 진열장은 축소된 전시공간이기도, 상품을 장식하는 투명한 큐브, 한 사람이 선택한 미감의 파편이 되기도 합니다.” _취미가 트위터 공식계정(@tastehouse_info) 트윗 중


취미가에서 1013일부터 1110일까지 진행한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이하 <취미관>), 표제에서 유추할 수 있듯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유통하며 미술을 이야기1)한다는 전제 하에 특히나 작업의 유통 방식에 초점을 맞춘 취미가라는 공간과 연속선상에 있다. 공간 운영진과 행사 기획진의 멤버 구성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떠나, 이를테면 <취미관>은 취미가가 굿즈라는 형식을 빌어 작업에 대한 대안적인 소비 경험을 창출하고자 한 의도를 해당 공간 내에서 극화시킨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굳이 극화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그간 달리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정체돼있던 취미가의 운영 프로세스를 <취미관>이 참조한 일련의 레퍼런스를 기반으로 변주함으로써 앞선 소비 경험에 특정성을 부여하고, 그 결과 취미가를 일종의 무대로 삼아 <취미관>을 연출해낸 셈이기 때문이다.


1) 취미가


그렇다면 애초에 작업에 대한 대안적인 소비 경험이란 무엇일까?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소비란 결국 작업의 생산과 판매, 유통 등의 수순들과 맞물려 있으므로, 취미가의 대안은 기존의 미술 시장과 별개로 일련의 작업들을 유통시킬 수 있는 변별적인 방식과 창구로서의 기능, 무엇보다 그에 부합하는 작업의 모델(이를테면 굿즈’)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얼핏 시장 경제의 논리에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취미관> 이전의 취미가의 정체 상태는 단순히 작업의 상거래가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전에 짚어야 할 대목은 취미가가 관객들에게 판매 혹은 유통시키고자 하는 것이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완결된작업이 아니라, 운영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굿즈라는 형식에 조응하는 작업이라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자연스레 불거지는 의문은, 그렇다면 굿즈로서의 작업과 미니어처로 제작됐을 뿐 굿즈는 아닌 작업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취미가는 과연 앞선 의문에 적절한 방식으로 대응했을까? 정체의 원인을 그러한 대응의 부재로부터 찾는다면 어떨까?


본래 서브컬처에서 연원한 굿즈는 특정 아니메나 만화와 같은 컨텐츠의 능동적인 소비자들이 원본을 재료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2차 창작한 결과물을 뜻한다. 이제는 오타쿠 문화에 한정되지 않고 아이돌이나 배우와 같은 유명인에 대한 팬심을 적용한 각종 팬시한 오브제로까지 영역을 넓혔지만, 어찌됐든 취미가와 지난 2015년의 <굿->, 지금은 폐관한 교역소나 반지하B½F와 같은 신생공간이 미술 차원에서 전유해 활용했고 지금도 활용 중인 굿즈 형식의 주요한 특징은, 그것이 판매 및 유통에 용이한 상품인 동시에 작업에 대한 일종의 부산물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간의 취미가는 (‘정금형의 배달 서비스2)와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상품으로서의 편의성에 적당히 부합하는 작은 스케일의 작업이나 소량의 에디션을 위주로 위탁 판매했다. 다른 한편 그러한 굿즈로서의 작업은 2차 창작이라는 굿즈의 또 다른 전제에 얼마만큼 부합하는가? 이를테면 2차 창작은 원본을 기반으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미술의 맥락에서 원본이란 특정 작가의 작업 혹은 조형 및 담론 차원에서의 방법론을 전개해나가는 와중에 자연스레 형성되는 일종의 작업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파생한 부산물들을 굿즈로 호명한다면, 굿즈란 결국 앞선 맥락에서의 원본을 암시하는 일종의 단서들이거나 본래 단일 작업만으로는 온전히 제시할 수 없는(굳이 그러한 무모한 시도를 감수한다면 설명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독자적이면서 광범위한 세계관을 전략적으로 (이를테면 상품을 의태한 형태로) 압축해낸 결과인 셈이다. 앞선 가정은 한때 반지하에서 진행한 일련의 전시 프로젝트들이 느슨하게 공유한 오픈베타라는 형식을 연상하게끔 한다. 이를테면 실제로 반지하 구조의 건물인 협소한 전시공간으로부터 비롯한 각종 제약들을 오히려 본격적인 전시 이전의 오픈베타, 즉 물리적인 공간상에 각자의 작업들을 임시로 비치하거나 제시해보는 일종의 모의실험을 위한 토대로 삼은 결과, 설사 개별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소 모호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개별 작업이 아니라 부려놓은 요소들의 얼개를 통해 작업적 세계관을 유추해보는 일이다.


이처럼 반지하의 오픈베타서비스가 (실제로 존재할 수도, 혹은 단순한 망상이거나 도안일 수도 있을) 원본의 맥락을 공간 내에 리부팅하는 과정이라면, 굿즈는 그와 유사하게 작업의 도해를 펼쳐놓고 그 내외에서 작가가 취사선택한 일부를 재료 삼아 만든 작업 또는 그러한 일부들을 재구성한 에디션이나, 명확한 실체로서의 원본이 아니라 앞서 주어진 원본 및 작업의 도해 자체를 압축시킨 결과일 수 있다. 굿즈와 미니어처가 동일한 개념이 아닌 이유는, 전자는 단순히 작업의 물리적인 스케일을 측정하는 단위가 아니라 원본을 자의적으로 표상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앞서 열거한 방식을 준수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식으로 귀결되든 굿즈를 단순히 판매할 수 있는 작업으로만 대하기보다, 원본을 확장된 미디엄으로 삼아 (작가가 전제하고 있는) 굿즈라는 형식에 부합할 만한 조형의 요소들을 모색하고 이를 토대로 제작한 독자적인 부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2) 취미관


앞서 오픈베타와 결부시켜 서술한 굿즈의 모델은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되, 지금 시점에서 굿즈를 지속해나갈 수 있는 여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취미관>은 굿즈에게 축소된 전시공간이기도, 상품을 장식하는 투명한 큐브, 한 사람이 선택한 미감의 파편이기도 한, 즉 진열장인 동시에 다양한 맥락이 교차하는 개념적인 공간이기도 한 유리 케이스를 할당함으로써 또 다른 여지를 발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취미가는 실패했고, <취미관>은 얼마간의 성과를 거뒀다. 실패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선 그간 동원한 관객의 숫자나 실제 수익과 별개로 주어진 총매출과 같은 상업적인 성과가 아니라, 한때 신생공간이라는 플랫폼을 경유한 작가 및 작업들이 <굿->라는 행사를 통해 제시한 굿즈라는 공동의 방법론을 갱신해, 이를 토대로 어떻게 신생공간 이후에도 통용될 수 있는 독자적인 결과를 구현하고 재생산하는지에 주목해야한다.


취미가 2층의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개장한 <취미관>에서 특징적인 풍경은, 일본 서브컬처 중고물품 상점인 만다라케와 아키하바라 일대에서 성행 중인 렌탈케이스형식을 참조해 제작한 유리 진열장들이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투명한 컨테이너 창고처럼 도열해있는 모습이다. 각각의 진열장은 참여 작가들에게 개별적으로 분배돼있고, 당연히 그 안에는 다양한 굿즈들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진열돼있다. 좁은 복도를 따라 유리 진열장의 표면을 시선으로 훑다보면, 마치 진열된 굿즈들의 모둠이 유리 질감의 필터를 끼운 채 캡처한 이미지처럼 보이며 그러한 유사 파노라마를 투영해내고 있는 진열장의 구성이 비교적 명료하고 그 외에 박다함이 선곡한 BGM이나 적당히 조율된 채 수평적으로 흐르는 관객의 동선과 같은 요소들은, 다수의 사진 이미지들을 그리드 구조물에 진열하고 판매했던 일전의 <더 스크랩>3)을 연상하게끔 한다.


그러나 앞선 풍경은 좁은 복도에서 관객들에게 떠밀리듯 본 행사를 관람했을 때 특히나 부각되는 일종의 착시에 가깝다. 물론 <취미관><더 스크랩>과 마찬가지로 유사 편집숍을 지향하지만, 비치된 진열장의 개별 칸들은 사전에 정해진 이미지의 규격에 들어맞는 틀이 아니라 입방체에 가까운 공간이고, 도열해있는 진열장은 <더 스크랩>을 지지하는 그리드 구조물과는 달리 보다 입체적으로 불거진 큐브형 오브제이며, 진열된 굿즈들은 사진에 의해 포착된 피사체가 아니라 독립적이거나 공간 내에서 얼마간 산개한 실물의 작업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섹션은 유리 표면에 의해 차단된 상태로 관객들을 맞이한다.4) 이처럼 접촉을 삼간 채 오로지 시선을 통해서만 진열장의 내부와 그곳에 진열된 일련의 굿즈들을 가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유사 파노라마라는 표현이 마냥 무용하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취미관>의 굿즈들은 정방형의 공간에 비치된 (비록 다양한 매체를 경유해 굿즈화됐지만, 어찌됐든 실제로 사고 팔 수 있는 물리적인 대상이라는 점에서) 오브제인 동시에, 유리 표면에 비친 오브제의 환영인 셈이다.


여전히 유리 케이스가 다양한 맥락들의 교차 지점이라면, 케이스 너머 관객의 시선을 수렴하는 와중에 굿즈의 위상이 다소 모호해졌듯, 우리는 진열장 안의 굿즈라는 과도기적인 상태를 만다라케나 렌탈 케이스와 같은 명시적인 레퍼런스와는 별개의 관점을 적용해 도해해볼 수 있다. 비록 앞서 제안한 굿즈의 모델을 유보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취미관>에 속한 몇몇 굿즈들은 그 자체로 완결되기보다 굿즈의 배후나 이면을 암시하는 역할을 자처한다는 점에서 원본의 표상이라는 맥락에 얼마간 부합한다. 이를테면 최고은의 섹션은 가구나 집기류 같은 기성 오브제를 재료 삼았던 이전 작업들과 달리 작가의 신체 일부를 캐스팅한 유리 조각들을 선보임으로써 차후 진행하게 될 연작의 프로토타입으로 기능하고, 노상호는 실물의 드로잉과 별개로 데이터 센터에 jpg파일로 업로드한 드로잉 이미지들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데이터 코드를 판매함으로써 현장에서의 굿즈를 일종의 링크로 대체한다. 즉 전자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작업의 얼개를, 후자는 자신에게 할당된 진열장보다 용량의 제한이 헐거운 디바이스 상에 부려놓은 작업들의 물량(노상호는 물량 자체를 작업의 방법론으로 활용한다)을 원본으로 삼되, 지금 여기에서의 원본의 부재를 상이한 방식으로 만회하고 또 재현한다.


다른 한편 이전에 작가가 진행했던 전시 및 프로젝트를 유리 케이스 내부에 압축해 일종의 샘플로서의 전시를 구현하고,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굿즈로 판매하는 사례도 존재한다. 김주원, 안초롱 듀오 '압축과 팽창(CO/EX)'은 지난 201791일부터 22일까지 아카이브 봄에서 진행했던 전시인 <허니 앤 팁>에서 사용한 스톡 이미지와 그것을 재료 삼아 만든 랜티큘러 오브제 등을 유리 케이스로 옮겨왔는데, 단순히 판매 목적의 디스플레이에서 그치기보다 실제 전시 당시 주어진 공간을 일종의 왜곡된 그리드 삼아 일련의 이미지들을 재배열한 방식을 적용해 유리 케이스라는 제한된 공간을 점유했다. 즉 이때 진열장 내부에 수납된 풍경 전반은 원본과의 연속선상에서, 원본의 스케일을 최소화해 재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윤성은 조형사와 협업한 헬리오스 캐릭터의 피규어와 피규어 제작과 여타 전시를 위해 그린 일련의 드로잉들을 병치함으로써, 시제품에 가깝게 완성/완결된 피규어를 중심으로 그로부터 파생된 낱장의 도안들이 공회전하고 있는 듯한 양상을 연출했다. 이는 실제 선후관계와 무관하게, 자신의 회화에서 모에화해 제시한 특정 캐릭터를 피규어 형태로 물질화시킨 뒤 이를 역으로 압축 해제한 결과를 원본의 모사품 주변에 펼쳐놓은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취미관>에서 제시된 굿즈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사前史 차원의 원본이 존재하고, 오픈베타형 전시와 유사한 맥락에서 굿즈들 간의 얼개가 그것을 암시하거나 표상한다면, 각각의 유리 케이스에 진열돼있는 것은 상품으로서의 굿즈 뿐만이 아니라 그 공간의 규격에 부합하게 축약된 서로 다른 얼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능동적인 관객 및 소비자는 유리 표면에 투영된 굿즈들의 모둠을 시선으로 훑어나가는 와중에 자신과 부합하는 특정 구간을 크롭crop해 마침내 굿즈로서 구체화시키는 동시에 소비하는 한편, 그것이 2차 창작된 과정을 각자의 관점에서 되짚어가며 자신만의 원본을 망상해낸다. 축약된 얼개는 이러한 분기들을 통해 유통되면서 자신의 외연을 넓혀나가는 동시에, 작가가 전제하고 있던 기존의 원본을 독해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소비 행위를 계기로) 발생시킨다. 그 와중에 개별 굿즈는 원본의 부산물이자, 자연스레 또 다른 분기의 시작점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KPS(구동희, 박미나, sasa(44))의 개인 소장품으로 구성된 컬렉션이나, 한진이 자신의 회화와 드로잉 세트와 별개로 제일 밑 칸에 두서없이 진열해둔 일상 용품들은 어떤 분기로 전개되는가? 애초에 그것들은 굿즈로 호명하거나, 굿즈로서 소비할 만한 물건들일까? 물론 일정 부분 작가의 취미나 기호를 반영하는 물건을 소장한다는 의미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낄 법도 하지만(더불어 sasa(44)와 박미나의 경우, 과거의 연작 및 협업에서 일련의 상품들을 나열하고 범주화함으로써 허구적 내러티브를 부여하는 전략을 구사하긴 했지만), 애초의 의도야 어찌됐건 이들은 작업으로서 쓸모없는 물건들을 굳이 굿즈로 판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미술의 유통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다. 흔한 레디메이드나 미술의 범주를 확장하기 위해 상품을 포섭하는 식의 시대착오적인 시도와 무관하게 단지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을 채우기 위해 동원한 이 쓸모없음, <굿-><취미관>과 같은 행사가 신세대 작가들이 만든 기적5)도 일군의 미술 생산자들의 자급자족을 위한 대안적인 시장 플랫폼의 단초도 아닌, 단지 최소한의 수익을 발생시키며 전개할 수 있는 조형 차원의 모의실험을 위해 부풀린 무용담이라는 사실과 애초에 굿즈가 얼마나 유연한 개념인 지를 은연중에 암시한다.


3) 이후의 굿즈


<취미관>에서의 굿즈가 오브제이자 오브제의 환영이라면, 이때의 오브제는 유리의 표면에 투영된 이미지의 그림자로써 공간상에 드리워져 있다는 식의 기묘한 역설을 넌지시 주장해볼 수 있다. 그림자의 영역으로부터 해금되기 위해선, 상업적인 차원이든 관람의 차원이든 누군가에 의해 소비되어 케이스 너머의 세계로 진입해야한다. 그래야만 마침내 굿즈로 성사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인과관계는 단순히 <취미관>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굿즈의 유연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즉 팬시한 상품의 이미지로부터 꺼내지 않으면 굿즈를 가용하는 주체가 누구든 정체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주지한다. 결국 굿즈를 소비하는 행위는 굿즈라는 형식을 새삼 복기해볼 수 있는 여지를 동반하며,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앞선 여지를 확장하거나 변주해낼 것인가라는 문제는, 굿즈의 생산자든 소비자든 지금 시점에서 취미가와 취미관과 굿즈에 연루된 모두에게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1) “취미가 趣味家 Tastehouse미술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취미가는 미술에 대해 고민하고 수집하고 정리하고 유통하며 미술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미술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취미가 공식 홈페이지의 소개글에서 일부 발췌. (http://www.taste-house.com/about)

2) “정금형 작가의 ‘<퍼폼 2016>한정 포스터가 아직 없으신가요? / 바로 지금, 정금형 작가의 창고에 남아있는 ‘<퍼폼 2016>한정 포스터를 구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드립니다! / 취미가에 <정금형의 배달서비스>가 입고되었습니다. / 정금형 작가가 직접 여러분이 계신 곳으로 포스터를 배달해 드립니다. / 선착순 20분에게 <정금형의 배달서비스>가 찾아갑니다! (...)” (http://www.taste-house.com/program/%ED%94%84%EB%A1%9C%EC%A0%9D%ED%8A%B8-%EC%A0%95%EA%B8%88%ED%98%95-%EC%A0%95%EA%B8%88%ED%98%95%EC%9D%98-%EB%B0%B0%EB%8B%AC%EC%84%9C%EB%B9%84%EC%8A%A4)

3) <더 스크랩>은 지난 20161227일부터 29일까지 진행한 새로운 타입의 사진 전시/판매 플랫폼이다. 103명의 작가/팀이 참여했고, 그들에 의해 생산된 1000여점의 사진은 김동희 작가가 제작한 그리드 형식의 구조물들에 일종의 견본으로 비치됐다. 관객/소비자는 구조물 사이를 돌아다니며 견본 사진을 관람할 수 있으며, 구매는 각각의 견본에 매긴 숫자를 메모해뒀다가 1층의 쇼룸에서 숫자와 책정된 가격을 지불하면, A4사이즈의 C-Print로 인화 출력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http://the-scrap.com/)

4) 물론 예외적인 섹션도 있다. 이를테면 최하늘의 섹션에서는 진열장이 개방돼있어 굿즈 형식에 걸맞게 얼마간 장식적이고 스케일이 작은 조각들을 직접 꺼내서 면밀히 살펴볼 수 있고, 송민정의 굿즈들은 애초에 유리 케이스가 아닌 소형 냉장고 안에 담겨있어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면 내부를 열람할 수 있다.

5) <[기자의 눈] 신세대가 만든 기적 굿-’>, 한국일보, 인현우 기자, 2015.10.18. (http://www.hankookilbo.com/v/fc88daf937704db394744e3e2931fccb)

신고
Posted by jipdanochan

<표면의 입출력, 곽이브와 윤향로의 사례>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각종 스마트 미디어와 매개된 사용자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가늠하지만, 물리적인 현실의 토대 자체는 그만큼 유동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기반의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의 티저 영상에서 (스마트폰 디바이스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한 채) 현실과 고스란히 합성된 게임 인터페이스로 각종 포켓몬들을 포획하는 장면은1), 굳이 발매 이후 실제 플레이의 감도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해당 영상을 접한 대다수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을 증강현실의 확장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증강현실이라는 수사는 현재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동기화한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부연하는 데 어느 정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단 이때의 증강은 현실감을 교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디스플레이의 형태가 아니라, 스마트 미디어가 현실의 풍경을 포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사용자의 내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오작동에 가깝다.


무엇이 어떻게 오작동하는가, 라는 뒤이은 질문은 디지털 환경을 의식하거나, 그것을 나름의 표준으로 삼거나, 포스트 디지털이라는 모호한 담론 속에서 공회전하다 튕겨져 나온 파편들을 뒤늦게 재료로 주워섬기거나, 설사 열거한 사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더라도 다중적인 사용자 계정들과 연계된 채 두서없이 전개 중인 이미지-서사와 병행하는 일련의 미술 작업들의 접점을 암시한다. 당대의 미술을 통해 굳이 그러한 오작동의 징후를 가늠하려는 이유는 내가 사용자인 동시에 작업의 생산자 또한 어쩔 수 없이 사용자를 겸하기 때문이다. 미술이 여전히 무언가 재현해야 된다면, 이는 사실주의의 오래된 규약에 따라 웹상에 유통되는 가난한이미지를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거나 열화한 이미지 자체를 프레임 삼아 쳐다본 현실을 반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용자(이자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의 단위를 모색해나간다. 앞선 오작동의 정체는 그러한 시도들의 느슨한 교차범위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은 결국 특정한 이미지가 가상의 인터페이스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이를테면 여타의 편집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각적 패러미터는 원본 이미지에 투영된 실제 구성물들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표면상에 각종 효과를 적용할 뿐이다.2) 그런 의미에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마법소녀물의 특정 장면에서 주인공이 방출하는 에너지 효과를 줌인해 일부만을 발췌함으로써 원본 아니메나 해당 시퀀스의 맥락 등은 모두 소거한 채 오로지 표면으로부터 불거진 듯한 산란한 시각적 패턴만을 유사 회화로서 제시한다. <스크린샷>의 패턴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전사前史도 추론해낼 수 없다. 이러한 선택은 마치 이제 더 이상 이미지가 생산된 실제 맥락이나 의도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그것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적어도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 기계에게는 부재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샷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며, 방출되는 에너지는 스샷의 우발성과 다름없다.


<스크린샷> 연작이 일관되게 고수하는 미시적 레벨은, 일단 디지털의 권역에 속한 이미지는 원본의 위상과 무관하게 레이아웃 상에서 다양한 배율로 조절하거나 일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유동적인 시점 변환의 과정에서 이미지 자체가 얼마든지 픽셀 차원에서 망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윤향로는 편집 툴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는다. 작가가 확보하고 있는 사용자의 권한은 이미지 자체를 부러 관통하지 않는 표면상에서의 제한된 전개가 어떻게 이미지를 왜곡하고 때로는 의미론적 가치마저 무시하는지, 무엇보다 이러한 수순들이 열화의 한 방식이라면, 기꺼이 열화함으로써 어떻게 회화와 유사한 순간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때의 유사 회화라는 전제는 미국 코믹스나 일본 고전 만화와 같은 낯익은 대중문화 레퍼런스들을 재료 삼은 이전 작업들에서도 주지되는데, 이때의 회화적 화면은 커버 이미지에서 인물들을 소거함으로써 미장센을 강조하거나 만화의 동작선들을 발췌해 재조합하는 등, 이미지에 개입하고 있는 사용자의 존재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혹은 이때의 사용자는 편집 툴을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 <스크린샷> 연작에서는 사용자와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이 혼선되며, 앞선 거리감이 일순 무효화된다.


윤향로, Screenshot 3.02.24-1, 2017, Acrylic on canvas, 116.8 x 80.3 cm


<스크린샷>에서 사용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에 얼마간 몰입하거나 최대한 밀착함으로써,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이미지-표면의 세부에 천착한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방출 에너지를 과도하게 확대하고 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포토샵 브러쉬처럼 번진 망점과 궤적들, 두서없이 중첩된 레이어들의 위계와 같은 디지털의 질감이다. 윤향로는 이를 재차 회화로 옮김으로써 디지털과 매개된 당대의 조건에 수렴할 만한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결과가 실제 편집 툴에서 작동하는 효과들과 얼마만큼 유사한 지 대질해볼 필요는 없다. 일련의 작업들은 편집 툴에 열거된 패러미터의 세목들을 일일이 고려해 얻어낸 정교한 결과값이 아니라, 유사 회화를 맹목적으로 지향하며 열화를 거듭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동기화한 사용자는 디지털의 조형성에 통달한 전지적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인터페이스의 역학에 순응함으로써 우발적으로 망가지는 이미지의 목격자에 가깝다. 이러한 수동성이 원본을 유사 회화라는 자의적인 이미지로 희석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인 지, 작업과 별개로 대다수 사용자에게 보편적으로 그어진 한계인 지는 불분명하다. 어찌됐든 우리는 전자의 결과를 통해 후자의 조건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스크린샷>이 디지털의 권역을 불안정하게 활공하다 임의로 정한 기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본질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구간이다. (물론 이는 윤향로를 포함해 디지털 환경을 작업의 토대로 삼거나, 각종 편집 소프트웨어를 작업 도구로 삼아 전시공간을 점유해야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내리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작가는 사용자로서 목격한 이미지의 표면을 회화적 오브제를 연출하듯 캔버스 위에 빈틈없이 도포함으로써 디지털의 질감을 불완전하게나마 물성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 회화의 이미지를 카페트처럼 직조하거나 라이트 박스로 조립하는 등, 원앤제이+에서의 개인전 이전에 선보인 <스크린샷> 연작의 일부는 자연스레 동일 이미지를 다양한 물리적 판본으로 리부팅시키는 모의실험처럼 독해된다. 이 모두는 결국 (작업을 매개로 새로운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듯) 회화 차원에서 전개할 만한 새로운 조형적 단위를 모색하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단순히 캔버스에 투사된 추상적인 평면이 아니라 캔버스를 감싸고 있는 표면으로 외화하고, 디지털 질감과 결코 일체화될 수 없는 아크릴 물감의 이질성은 이미지-표면이 현실로 이전됨으로써 두드러지는 (초평면의 관성과는 대비되는) 굴곡으로, 캔버스라는 오브제는 현실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해 오작동하는 일종의 물리적인 인터페이스로 전유된다. <스크린샷>은 일련의 편집 툴에서의 시각적 패러미터가 오로지 표면상에만 관여한다는 전제를 고수한 채, 발췌한 이미지-표면에 회화를 매개로 한 질감과 중량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샷의 결과물들은 단순한 낱장이 아니라 현실의 중력을 수용하며 랜더링을 거친 일련의 캔버스 오브제로서 혹은 묵직한 표면으로서 나열된다.

 

한편 취미가 2층에서 진행한 곽이브의 <역할 part> 프로젝트는 결국 하나의 회화로 압축해낸 <스크린샷> 연작과 달리 이미지들이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 자체를 제시한다. 각각 다른 그래픽 이미지가 출력된 A1사이즈의 프린트들은 바닥에 무방비하게 놓여있거나, 액자 속에 담긴 채 진열되거나, 공간 중앙에 놓인 장방형의 구조물에 일정한 군집을 이룬 채 달라붙어 있는 등, 뚜렷한 규칙 없이 배분되어 공간 속에서 느슨한 얼개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한 풍경은 얼핏 그림 카드들의 무작위한 배열 속에서 우연찮게 들어맞는 조합을 찾아내는 게임 같기도 한데,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프린트들 사이의 관계를 억지로 작도해서 게임을 단판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프린트가 낱개로 놓여있든 일정한 군집을 이루고 있든 간에 어떠한 유의미한 이미지 조합도 형성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름, 커튼, 유리판, 그리드와 그물망 패턴, 그 외의 기타 자재들은 (실사의 부분적인 캡쳐본에 가까운 구름 이미지를 제외하고) 최대한 단순화한 그래픽 이미지로 번안되어 프린트 상에 압착되어있다. 도시적 건축의 표면이나 유리창 같은 자재들을 은유하는 납작한 이미지를 출력해 제시했던 작가의 <면대면> 연작의 맥락 속에서 고려해보면, 앞서 열거한 프린트들의 목록은 결국 취미가라는 공간을 작가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이미지의 시점으로 포착하거나 연상해낸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미지가 출처 삼은 공간의 특정성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모호해지는데, 이는 작가가 대면한 실제 공간이 순전히 프린트라는 레이아웃이 부과하는 관성에 부합하게끔 도식화됨으로써 현실의 정보값을 잃어버린 채 몇 가지의 단면들로 파편화됐기 때문이다. 곽이브는 이처럼 이미지의 시점을 경유해 주어진 단면들을 독자적인 단위로 삼아 원본으로서의 물리적 공간, 이를테면 취미가의 한 구간을 점유해나간다. <스크린샷>에서의 스샷혹은 원본의 (과도하게 확대된) 단면이 결국 현실을 향해 특징적인 회화적 오브제로 외화했다면, <역할 part>는 그보다 가벼운 중량을 지닌 채 역으로 현실을 이미지 차원에서 수렴하는 동시에 무력화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단면들은 공간 속에서 작가의 자의에 따라 군집하거나 무방비하게 흩어지며 나름대로의 조형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역할 part> 프로젝트 전경, 취미가 201호 


여전히 <역할 part>를 일종의 카드 맞추기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는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배열 속에서 실제 공간의 해상도를 짜 맞추려고 하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원본으로 삼은 공간은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에게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다소 무미건조한 바탕으로 전락한다. 곽이브는 스마트 미디어나 디지털 환경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할 part>가 이미지를 매개로 특정 공간이나 대상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서 일상 풍경의 타임라인을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그리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후자에서 중요한 것은 업로드된 단편들이 사용자가 속한 일상의 전체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한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불연속적인 순간들로 환원시키고 이를 스냅샷의 형식으로 포착해 나열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곽이브가 탈착한 이미지의 시점은 동질적으로 구조화된 특정 공간을 여타의 단면들로 발췌함으로써 현실에서와 다른 맥락을 점하되, 그 결과가 투영된 프린트의 얇은 물성으로 말미암아 인스타그램 이미지와 달리 최소한의 물리적인 접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프린트에 코팅된 매끈한 표면은 관객의 시선을 온전히 수렴하는 대신 공간 내에 밝혀진 조명을 포함한 주변의 잔상들을 은연중에 되비추며, 프린트 외부의 현실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가 불화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유리판이나 커튼이 드리운 창문의 이미지가 단순한 그래픽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가상의 표면은 실제 코팅지의 물리적인 표면과 애매하게 중첩된 채 이미지의 안팎에서 현실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명확해지는 사실은 <역할 part>가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는 출력된 결과물에 불과하며, 어떤 관객이나 사용자도 더 이상 그 너머로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를 매개로 한 물리적인 공간의 편집 혹은 재구성은 프로젝트가 개막한 시점에서 이미 완료됐다. 이미 완료된 게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선별된 내용의 프린트를 필요에 따라 추가로 출력하여 이제는 이미지와 무관해진 물리적인 공간 위에 덧붙이거나 프린트 자체를 독립적인 단위로 삼아 주어진 배열을 바꿔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역할 part>가 점유한 취미가의 한 구간은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그것을 파쇄시킨 이미지의 얼개 사이의 분기점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곽이브와 윤향로가 최근에 선보인 작업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염두하고 있는 평면이라는 개념이 한때 모더니즘의 서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내적인 완결성을 지닌 채 존재했던 회화적 평면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 평면은 그것이 회화의 형태로 반복되든 프린트로 얄팍하게 출력되든 선택한 매체 자체로부터 비롯한 독자적인 특성이라기보다, 현실의 특정한 시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불협화음과 일시적으로 동기화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일종의 레이아웃에 가깝다. 문제는 이때의 레이아웃이 특정 작가가 전제하고 있는 사용자의 경험치 혹은 디지털과 어떤 식으로든 연루된 이미지 재료를 반영하기 위해 조절되는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규약이자 조형적 단위로서의 평면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로 외화되는 순간 부과되는 물리적인 하중과도 일맥상통하며, 디지털의 관성을 미술 차원에서 단순히 의태하거나 모사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 지를 재차 상기하게끔 한다. 어찌됐든 디지털을 시작점으로 해 몇 가지 상이한 차원에 걸쳐있는 이 시각적 다이어그램은 바로 그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전히 어떤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다.

 

반대로 그 어떤 이미지에 의해 부단히 조율되고 어긋나는 과정이야말로 서두에서 언급한 오작동의 정체이자, 어딘지 모르게 망가진 듯한 이미지와 해상도가 재생산되는 이유일 것이다. 설사 특정한 작업으로 외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시점, 이미지를 매개로 한 시점을 탈착한 채로. 미술이 과연 이러한 새로운 영점과 무관할 수 있을까? 반드시 디지털을 소리 내 읊지 않더라도, 어떻게 이에 부합할 것인가?

 

한편 레이아웃으로서의 평면이 현실에서 임의로 제시되는 순간 관객의 시선을 되비추며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자신이 기입된 특정한 매체를 거부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며 불투명한 표면으로 환원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점차 보편화하고 있는 시각적인 오작동이 평면의 질감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표면이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의 징후로서의 이미지를 사용자로서 입력하고 이를 미술의 언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출력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오작동의 지점이자 새로운 평면성이 도출되는 순간이고 주어진 매체를 갱신할 수 있는 여지인 셈이다. <스크린샷> 연작과 <역할 part> 프로젝트 사이의 느슨한 교집합 속에서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편집 도구, 평면, 레이아웃과 같은 단어들의 순차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당대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작가(이자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불화하는 방식 자체다. 이제 표면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 https://www.youtube.com/watch?v=IZ2L2sbYAj8

2) 이케아 홈 플래너 같은 어플리케이션에서 원본의 사진 속에 놓여있는 2d의 사물을 전방위로 조작 가능한 3d 객체로 변환시켜주는 기능 또한 일단 사물 이미지의 표면을 포착하고 사전에 확보한 데이터뱅크에서 그와 관련한 텍스처를 추출해 이를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엄밀히 말해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상해낸 3d 객체인 셈. 이는 캐릭터 피규어가 제작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신고
Posted by jipdanochan

<강정석 x 김희천 x ? 유닛으로 질주하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지난 2017.2.1 ~ 2.7 산수문화에서 진행한 <비평실천>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해당 전시는 참여 비평가들의 글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기로 했으나, 필자의 개인적인 판단 하에 집단오찬에 게재합니다. 글의 소유권은 필자에게 있고, 전시 이후 휘발되기보다 명시적인 기록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에 일종의 해적판으로 공유하게 됐습니다혹시나 일전에 <비평실천>을 관람했거나, 관련한 내용을 숙지하고 있던 분들은 이를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http://sansumunhwa.com/critic/) 


프롤로그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지도 앱을 참조하며 실제의 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리면, 지금 내가 쥐고 있는 스마트폰의 방위 센서에 따라 지도 인터페이스 상의 유닛1)이 자신의 시점을 ()조정한다. 이를 지표 삼아 내가 걸음을 옮기면 유닛 또한 마찬가지로 납작한 텍스처의 공간을 가로지른다.

 

유닛은 나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사용자인 내가 위치 서비스를 비활성화시키면 다중 위성을 통해 지속적으로 방송되는 중인 GPS대역과 나의 스마트폰에 내장된 위치 수신기와의 매개는 일단락되며 그로 인해 유닛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달리 말해 유닛과 유닛의 세계의 성립 여부는 오로지 나로 인해 좌우되는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 위에 나와 동기화된 별도의 세계를 투영시킬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있다.

 

나는 유닛과 유닛의 세계에 결코 몰입하지 않는다. 주지하듯 유닛은 내가 참조할 수 있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유닛은 내가 아니되 어떤 식으로든 나에게 부속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의 권한, 즉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유닛은 내가 의식하는 만큼 자신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다. 달리 말해 유닛의 경험은 나의 경험의 반영이다. 유닛은 스마트폰 속에서 나와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면상에는 분명 유닛이 전제하고 있는 시선의 방향성이 있다.

 

스마트폰의 위치 서비스를 활성화해 각자의 유닛을 확인해보자. GPS버튼을 연속으로 두드려 유닛이 쳐다보고 있는 각각의 방향을 가늠해보자.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불능감을 위한 인벤토리

 

유닛의 세계란 결국 어떤 불능감에서 연원한다. 이를테면 강정석은 지난 두산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GAME >의 특별공략에서 이를 비디오게임의 연대기와 대조하며 초기 하드웨어가 가지고 있던 많은 제약은 검은 평면 속에서 즐거움과 동시에 불능감을 발견하는 데에 기여했으며 이러한 불능을 해결하려는 행위가 새로운 불능을 발견하고, 이는 다시 새로운 솔루션의 발견으로 이어졌다고 상술한다. 이때의 솔루션이란 비디오게임의 사용자와 호환되는 각종 주변기기들의 목록으로 구체화된다.2) 달리 말해 CRT모니터 속에서 도트 형식으로 존재하는 캐릭터/아바타와 사용자 간의 간극, 즉 특정 유닛이 나와 온전히 연동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불능은, 도트로부터 폴리곤으로 외형을 재구성하는 식으로 점차 변화한 컴퓨터 그래픽스의 발전과 별개로 불능 자체를 만회할 수 있을 만한 대리적인 접촉()을 파생시켜왔다.

 

컴퓨터 그래픽스 환경과 주변기기를 임의로 구분 짓고, 후자의 관점에서 게임이라는 매체를 재고해보면 해상도의 문제가 반드시 시각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실제로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해서 논의할 때 우선순위에 놓이는 것은 실사와 흡사한 대상이 아니라 현실과 별개의 영역에 놓인 독자적인 세계관을 사용자가 운용하는 방식이다. 이때 발생하는 불능감은 양가적이다. 게임 속 세계관이 현실에서의 커브와 맞닥뜨릴 때 사용자는 문득 화면과의 거리감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 사용자의 감각과 점차 최적화된 주체가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역으로 계발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곧잘 사용자에게 유발되는 정신착란이나 각종 FPS나 전쟁 시뮬레이션 등의 게임 컨텐츠의 윤리성 문제와 같이 동시대의 병리적 증상을 규명하기 위한 상투형의 객관식 문항들로 나열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요한 것은 게임적 리얼리티가 유발하는 일방향의 몰입감이 아니라 그것이 남긴 일종의 잔여의 전류일 뿐이다. 실제로 강정석이 <GAME >에서 전개하는 서사는 미처 혼선되거나 증강되지 못한 현실을 사용자의 관점에서 앞지르기 위해, 혹은 지금으로써는 미완일 수밖에 없는 사용자의 관점에 나름의 자기완결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해한 각종 트랙들로 구성되어있다.

 

앞선 트랙들이 지향하는 공통의 소실점은 결국 질주를 거듭하는 스피드러너1인칭 시점 속으로 수렴한다. 스피드런은 기본적으로 최단 시간의 게임 클리어를 위한 것이지만, 오로지 그러한 의도만으로 가늠하기엔 질주의 과정에 너무도 많은 사족이 불필요하게 간섭하고 있다. 일단 영상의 내레이터부터, 스피드런을 중계하는 BJ와 전시에 부속된 특별공략 텍스트 일부를 읊는 익명의 남성과 여성까지 포함해 최소 3명이다. BJ가 게임의 진행과 병행하며 별다른 정보값 없는 중계를 되풀이하는 동안, 다른 내레이터들은 닌텐도 게임보이에서 시작해 게임 <쉔무>가 구현한 절차적 생성이라는 랜더링 방식, 각종 주변기기들, R.O.B의 눈, 2000년대 한국의 온라인 게임, 그 안에서 구현되는 다중적인 시점들, 트와이스 직캠, V(...)에 이르기까지 게임과 가상현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언급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 무엇을 보는가? 엄밀히 말해 무언가 보고 있다기보다, 스피드러너의 1인칭 시점이 상연하는 질주의 궤적은 앞선 내레이션 트랙들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트랙으로 구실한다. 그것은 텍스트의 각각의 구간이 발화하는 내용/이미지에 따라 때로는 게임보이의 발전형으로, R.O.B의 눈의 연장선으로, 그 외의 모든 것으로 각기 다르게 혼선된 채 인식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1인칭 시점은 스피드 러너의 일사분란한 파쿠르Parkour를 통해 온갖 지형지물들 사이를 넘나들며 시선의 낙차를 조성하지만, 정작 관객은 이 모든 질주의 감각으로부터 차단된 채 단지 화면의 바깥 혹은 표면surface만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이 화면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앞서 언급했듯 텍스트의 각 구간들을 듣거나 읽으며 서사의 얼개를 가늠할 때뿐이다. 이를 방증하듯 혹시 트와이스의 멋진 점이 뭔지 알아요?”라고 되묻는 구간부터 화면상에는 본격적으로 트와이스의 각종 짤방과 face swap 어플리케이션으로 합성한 이미지 등이 하이퍼스레딩 형식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개입하거나 누적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1인칭 시점에는 도통 원근법적인 깊이감이 없거나 이를 자발적으로 무효화한다. 이런 식으로 표면을 쉽사리 뒤집는 방식은 지난 <유명한 무명>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Savior’가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이전 작인 ‘Soulseek/Pegging/Air-Twerking’ 위에 얄팍하게 투영된 것과 유사한 감각을 공유한다. “(...) ‘/Savior’는 감상해야 하는 영상작품이기보다는 그 제목처럼 화면 보호기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설치작업이나 작품을 보조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Savior’는 독립적인 영상 작품이기보다 <뉴 스킨>의 목재 구조물이나 <랠리>에서 텅 빈 커먼센터와 같은 역할에 가까워 보인다.”3) 그렇다면 강정석의 표면은 무엇을 보호하는가?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적 리얼리티)?

 

김희천의 ‘/Savior’는 마우스의 커서를 움직이면 금세 사라지고 말지만, 강정석의 표면은 그 너머로 질주하거나 몰입하기 위한 스피드러너의 관성과 그로부터 재차 밀어내는 표면 자체의 관성이 공존하는 양가적인 공간이다. 그 결과 표면은 더 이상 연장될 수 없는 트랙(의 절단면)으로 존재하며, 그럼에도 여타의 트랙들과 교차하기 위한 방편으로 최소한의 하이퍼스레딩을 수렴할 수 있는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준다. <GAME >은 이와 같은 혼선을 유발하는 내레이션을 포함해, 사전에 텍스트로 정리하거나 구축한 특정한 사용자의 세계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특별 공략을 비롯한 텍스트는 단순히 영상의 부록으로 구실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영상이 텍스트에 기반한 하나의 파본으로 제시된 것에 가깝다. 내레이터의 기계적 어조는 얼핏 불능감 이후에 도래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예시하는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은 게임적 리얼리티에 대한 나름의 촘촘한 서사적 얼개를 지니며 비약의 순간은 단지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현실로 이전되는 말미에 이르러서야 발생한다. 달리 말해 강정석이 스피드러너를 통해 돌파하고자 하는 스테이지는 현실에 대한 불능감을 온전히 체감할 수 없는 바로 지금의 모호한 접경지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상에 간섭하는 각종 트랙들과 하이퍼 이미지 및 링크들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에 굳이 현실을 기입하기 위한 엇나간 시도들이 빚어낸 파열이다.

 

이처럼 (세계관에 대한) 공략이 선행하는 게임이라는 역전된 관계는 불능감이라는 전제가 온전히 재현될 수 있는가, 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되묻게끔 한다. 오히려 명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은 불능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아바타라는 분신을 통해 시점의 탈착이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점차 현실감이 저하되고 있다(...)고 부추기는 공략 자체다. <GAME >에서의 속도감은 스피드러너의 질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는 특정한 사용자의 조급함에서 비롯한다. 이때의 사용자는 1인칭 시점이나 내레이터들과 등가의 존재가 아니라 정작 화면상에 부재하면서도 어딘가에서 일련의 트랙들을 조급하게 조율해내고 있는 전지적 작가에 가깝다. ‘는 자신이 망상해낸 불능의 세계를 투사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사실 에게 중요한 것은 불능의 세계를 최대한 실제의 불능감에 가깝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능이라는 도저히 통제될 수 없는 상태를 독자적인 세계관 속에서나마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든 동기화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역학은 스마트폰을 대하는 사용자의 관점과 흡사하다. 단순히 굳어있는 표면이 사용자의 헛손질에 의해 인터페이스로 변화하듯, <GAME >에서 제시하는 세계상은 특정한 사용자의 망상과 접촉함으로써 편의적으로 배열되는 와중에 있다. 특정 사용자는 전지적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굽어보고, 조급함 속에서 안도한다.

 

결과적으로 <GAME >의 관객은 앞선 전지적 사용자로부터 괴리된 채 에 의해 조율되고 있는 관성들만이 존재하는 쿠소게4)에 가까운 공간 속에 처하고 만다. 스피드러너는 스테이지를 최단 시간으로 클리어하기 위해 분주하지만, 계속 루프되는 영상은 정작 스테이지의 명확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이로써 질주라는 행위는 표면을 가로지르기 위한 헛발질과 동의어가 된다. 이를테면 표면은 게임 맵을 통해 3d로 복각된 폐쇄회로로서 존재하고 불능감은 1인칭 시점을 경유해 화면 너머로 접속함에도 불구하고 단지 공간 내에서 공회전할 뿐 도통 해소되지 않는다. 기계 인간 혹은 온전한 아바타가 되고 싶다는 욕구는 도트와 폴리곤의 여하와 무관하게 언제나 표면에 의해 좌절된다. 마찬가지로 영상의 주변에 일렬로 비치된 스티로폼 박스들과 러닝머신의 발판이 향하고 있는 합성 이미지 속 도트들은 물성의 여부와 무관하게 서로를 불완전하게 암시하며 동일한 불능의 자장에 속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정석이 유년 시절의 기억을 포함해 자신의 일부를 이곳에 백업하고자 하는 이유는 기계 인간을 자처함으로써 표면상에 최적화된 존재로 스스로를 열화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게임적 리얼리티는 현실을 증강하기보다 사용자를 열화하면서 평형 상태를 모색한다. 혹은 스피드런이라는 질주의 궤적을 통해 열화된 자신을 백업할 수 있는 임의의 공간적 틀을 직조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분기한 평행세계

 

<시뮬레이팅 서피스A/B>를 포함해 강정석의 이전 작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던 동세대의 인물들은 지금 포착되고 있는 영상 혹은 시간이 열화된 클립들로 재구성된 채 유통될 것이란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듯, 작가에 의해 주지된 무의미한 행동들(반복되는 출근길의 배웅, 고가도로 아래에서 콩알탄을 터뜨리며 주고받는 슬랩스틱, 오늘 하루 일과에 대한 자기고백 등등)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수행하며 자신의 잉여적인 정체성을 표면상에서 기꺼이 상연했다. 그러나 세대라는 사회학적 전제와 표면이라는 데이터 표상을 위한 시각적 인터페이스 사이의 교착 상태5)<GAME >에 이르러 얼마간 유보됐거나 본격적으로 (세계 내 주체와 대치되는) 표면 내 주체를 망상하기 위한 시도들로 구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강정석은 동세대의 인물들을 표면상에서 굽어보는 대신 스스로를 백업시킴으로써 표면 내 주체 이를테면 유닛의 시점으로 바라보거나 유닛이 기꺼이 거주할 수 있는 세계상을 위한 토대를 가설하고 있는 셈이다.

 

동세대라는 전제가 그러했듯 표면의 관성에 의해 열화되기 이전의 주체는 여전히 유년기와 같은 실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세계 내에서 육화된 존재다. 그러므로 자신을 유닛 속에 기입하기 위해선 일단 기억이라는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을 만한 구체적인 얼개, 즉 게임적 리얼리티와 그와 관련된 불능감의 서사 및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또 다른 텍스트가 필요한 것이다. 후자는 결국 유닛으로서 현실에 대해 느끼는 불능감으로부터 연역된 일종의 대체 기억이다. 이처럼 강정석이 유닛의 세계를 위한 나름의 전사前史를 구축하기 위해 텍스트라는 형식을 구체적인 토대로 삼는 한편, 김희천은 지난 바벨 3부작을 통해 그저 인터페이스상에서 고스란히 복각했을 뿐인 텅 빈모델링의 세계 속에 이입하기 위한 장치로써 사소설에 가까운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사후적으로 투사해냈다. ‘라는 수신자에게 부치는 서신과 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서사적 레이어들은 전사가 부재한 서울의 폐허들, 즉 반드시 철거됐거나 철거를 예비한 허름한 가건물이 아니더라도 CAD와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 얼마든지 편의에 따라 임포트되거나 GPS를 포함한 유닛들의 시점을 빌어 재조정될 수 있는 가변적이고 허약한 도시 구조체를 현실의 거울상으로 반영해내기 위한 텍스트적 질감이다. ‘이곳은 기억을 백업하기 위해 모델링됐다기보다 내러티브가 투과할 수 있을 만큼 얄팍해진 데이터 껍데기다.

 

김희천이 ‘/Savior’를 통해 화면보호기를 자처하며 제 작업을 표면의 더께로 삼은 것은 사용자의 시선이 표면상에서 차단될 것이란 전제를 얼마간 의식함과 동시에, 3부작에 포함된 여타 작업들과 달리 별다른 내러티브가 부재한 ‘Soulseek/Pegging/Air-Twerking’을 오로지 데이터 껍데기들만이 범람하는 몰가치한 질료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Savior’는 작가가 습관적으로 촬영한 각종 스냅 영상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파운틴 푸티지 조각들은 그것이 발췌한 실제 일상의 타임라인을 대변하며, 화면 보호기 이면에서 별다른 얼개 없이 이합집산만을 거듭하는 데이터 껍데기들과 질료 차원에서의 대비값을 조성한다. 이를테면 <랠리>에서 데이터와 혼선된 세계상을 은유하는 유리 파사드의 공간은 ‘/Savior’‘S/P/A’의 시공이 대치하는 가상의 경계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희천은 현실과 가상, (경계로서의) 파사드를 데이터에 의해 포화된 유사 디스토피아를 연출하기 위한 개별적인 전제들로 나름대로 명확하게 구분짓고 있다. 그러나 이제껏 현실의 패러미터는 파사드적인 공간 속으로 이접되기 위해 언제나 내러티브라는 자장 내에서 조절되어왔다. ‘/Savior’가 예외적인 이유는 그것이 데이터 껍데기와 별도의 영역에서 수집 나열됨으로써 내러티브와 함께, 조절 가능한 패러미터 자체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희천은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을 모색한다.

 

지난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2016에서 선보인 김희천의 <썰매>에 부여된 서사적 레이어들은 여전히 서사를 빙자하되 단순히 데이터 껍데기를 투과하기보다 공간의 폐쇄감을 북돋기 위해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속도감의 방언을 터뜨린다. 중요한 것은 수신자를 향한 발화가 아니라, (작중에서 등장하는) VR기기를 뒤집어쓰고 서로의 데이터 자아를 자살시켜주는집단자살클럽처럼 데이터 차원에서 열화한 자아와 정보와 가십과 그것들 각각의 구분이 무화된 세계를 엄연한 현실로 인식한 상태에서 한층 배가되는 망상의 부피감이다. 달리 말해 한때 세기말의 정서와 대응되며 어쩐지 불길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던 파국의 정서는 <썰매>에 이르러 마침내 기정사실화된다. 앞선 내러티브로부터의 탈선은 결국 이처럼 파국적이고 뒤죽박죽인 세계 내에서 이루어진다. 모 레이싱 게임에서 빌려온 숭례문 서킷의 이미지는 레이싱카의 1인칭 시점이 숭례문 주변에 구획된 도로를 질주하며 점차 가속하고 이는 실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중력을 잃은 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굽이치는 스마트폰 내장 카메라의 1인칭 시점과 분할 화면을 통해 무한루핑되는 롤러코스터 장면 등으로 이어진다. 이 와중에 암시되는 속도감은 강정석의 <GAME >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불능을 전제하되, 이미 현실로부터 차단됐기 때문에 주어진 표면 너머에서의 자율성을 동력으로 삼는다. <썰매>는 표면 너머로 신속히 미끄러지며 불능의 서사 및 내러티브를 헝클어뜨리는 이미지 잔상이다.

 

김희천은 <썰매>의 말미에서 face swap 어플을 통해 행인들의 얼굴 위에 덧씌운 자신의 얼굴을 빌어 화면 속에서 우리(가 속한 이편)를 응시한다. 이제 속도가 더 이상 소용이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자살을 거듭할 수 있는 가 속해있는 세계가 단지 영상 클립의 일부, 즉 열화된 시간의 절단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정석과 김희천은 표면이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지금의 모호한 현실을 재고하고 있다. 전자가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서사를 발판 삼아 자신이 조작하고 있는 불능의 세계가 투영된 표면을 향해 밀착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문학적 내러티브로 조형한 데이터 파사드 속에 이미 상주한 채 표면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냉소하고 있다. 이때 질주라는 행위는 각자가 점유한 세계관을 오작동시킴으로써 가시화하는 서로 다른 계기로 작용하되 관객의 시점에서는 동일하게 불능하다.

 

이상한어둠 혹은 파국과 대면하기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라슬로 네메시의 <사울의 아들>에서 주인공의 시선과 얼마간 밀착하여 심도가 흐릿해진 화면을 항구적인 위급함의 감각, 언제나 다른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강제를 수렴함으로써 작중 배경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잠식한 어둠 혹은 파국의 한가운데에 있기를 자처하는 이미지-패닉으로 정의한다.6) 그에 반해 스마트폰이나 게임의 1인칭 시점을 통해 구현되는 휴먼 스케일의 화면은 그 안에 담긴 대상에 대한 심정적인 거리에 따라 화면 심도를 조절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파국에 의해 추동되는 질주란 얼마만큼 패닉을 수반하는가? 이를 재고하기 위해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이라는 전제를 끌어와 각종 사회정치적 현안들에 무감한, 즉 패닉 없는 사용자 주체를 커스터마이징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앞선 작업들에서 등장하는 질주라는 행위가 단순히 오래된 외상의 태엽을 감아 어딘가로 달려감으로써 파국의 감각을 활성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에 기입된 명시적인 계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도래한, 어찌됐든 가 감수해야만 하는 정체모를 파국에 대한 나름의 윤곽을 가설해나가는 과정이자 결과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면에 대한 위화감 혹은 유닛에 대한 불능감은 불현듯 당도한 세계를 대면하는 감각이다. 유닛의 시점에 이입함으로써 표면 내외에 거주하려는 시도는 한순간의 냉소와 체념에 그치기보다 최소한 가 제어할 수 있는 파국의 범위 내에서 불능의 상태를 응시하고자 한다.

 

나는 내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위해 유닛의 시점을 활성화한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단일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일개 좌표이자 지표로 환원되지 않는다. 문제는 유닛이 쳐다보는 방향성을 현실과 연루된 다중적인 세계상으로 연장하기 위해서 어떤 망상이 필요할 지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유닛은 망상을 투영해냄으로써 유사 주체의 시점을 탈착한다. 이러한 유닛들이 산개한 세계는 파국의 계기가 없는 현재형의 파국을 각자의 서사로 대질해볼 수 있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비록 자아는 사이버펑크의 세계관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거나 편의적으로 백업할 수 있을 만큼 열화되진 않았지만, 유닛의 슬롯은 새로운 프로필과 그에 기반한 일종의 대체서사이자 독자적인 타임라인을 예비하고 있다. 나의 텍스트를 생산하는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패닉은 차라리 응시할 만한 대상을 계발하는 와중에 동원되는 서로 다른 밀도의 텍스트 사이의 낙차에서 비롯한다. 이런 식으로 대체되어가는 전사前史들은 점차 패닉을 데이터적인 자기조형성의 과정으로 뒤섞는 동시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패러미터의 관계 내에서 굳이 어떤 서사적 얼개를 식별해내고자 한다. 그러나 유닛으로부터 비롯한 다수의 대체서사들을 서로 엮어냄으로써 파국의 불확실한 정체를 헤아리기보다, 서사성을 변화하는 스케일에 따라 재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재확인하는 일이 우선이다.

 

혹은 일련의 작업들이 부러 파국의 계기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면 어떨까? 각자의 불능감을 통해 유지하는 소위 세계와의 등거리는 굳이 그 이면을 뒤집어볼 필요가 없는 지엽적인 권한을 부여한다. 달리 말해 사용자의 편의에 따라 세계를 압축/상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과 연계된 각종 사회정치적 전제들을 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는 단순히 정치적 감수성의 부재로 환원되지 않는다. 어쩌면 2008년 이후 한때 미술계를 포함해 전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성했던 동시대성의 전제가 와해되고 더불어 중산층이라는 신화가 대대적으로 붕괴함으로써 일련의 물적 토대를 잃어버린 주체들은 이제 자신의 현존성을 가늠할 수 있는 매개를 주기적인 와해와 붕괴 그리고 재생산이라는 순환적인 메커니즘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데이터의 권역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항구적인 위기감의 감각을 지속적으로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세계 내 주체는 결국 항구적인 위기 자체를 자양분으로 삼는 데이터 생산물에 자신을 투영해냄으로써 표면 내 주체로 적응해나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기계 인간이나 아바타가 아니라 굳이 표면이라는 전제를 부각하는 이유는 데이터에 대한 적응력을 발휘하는 순간마저도 여전히 불능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주변기기는 지금으로썬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데이터를 표상할 뿐인 표면상의 이미지를 쳐다보고 그와의 간극 속에 각자의 서사를 기입할 수 있을 뿐이다.

 

표면으로부터의 차단과 소외를 만회하기 위해 그 내외에 기입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를, 주변풍경의 잔해들을, 무엇보다 자신의 잔해들을 에둘러보는 것. 이것이 지금 나에게 부속된, 그러나 얼마든지 다르게 번안될 수 있는 유닛의 전사다. 표면은 차단함으로써 불능감의 분기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다시 한 번,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은 어디쯤인가?

 

1) 유닛은 본래 특정한 단위 혹은 단위체를 의미하지만, 나는 이를 GPS좌표와 게임의 캐릭터/아바타, SNS의 계정 등을 포함해 주체가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가상의 객체를 의미하는 조어로 사용한다.

2) “(...) 네트워크를 통한 멀티플레이, 전자총을 이용한 사격, 레이싱 휠을 사용한 비디오 드라이빙, 유압식 모션 제어를 이용한 오토바이 경주, 시뮬레이션 체어, 센서를 이용한 제스처 기반 컨트롤러 등 오늘날 익숙한 플레이는 모두 초기 게임에서 선보여졌습니다. 가능성은 무한했지만, 충분히 가속되지 않아 다소 열화된 모습으로 도착한 결과물입니다.” 강정석, <특별공략, GAME 완전분석 매뉴얼>, 전시 텍스트 수록

3) 이기원, <모델링, 화면보호기, 셀카_플러그인으로서의 김희천>, 보고 쓰고 분류하기, 2016, 89p

4) “일본에서는 '쿠소 게임(クソゲーム, ゲーム)', 줄여서 '쿠소게(クソゲー, ゲー)'라고 부른다.[1] ', 쓰레기, 젠장'이라는 뜻의 'くそ'와 게임을 합친 것. 북미권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Shitty Game'이라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 그러나 강정석이 연출한 공간을 언급하며 사용한 쿠소게라는 표현은 컬트적으로 소비되는 졸작 게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불능감을 암시하는 영상의 표면과 도트에 대응되는 각종 이미지들을 함께 나열함으로써 현실상에서 어딘지 모르게 애매한 상태로 굳어버린 데이터 객체 혹은 게임적 리얼리티의 공간을 가리킨다.

5) “역설적으로 세대라는 관성은 계속해서 스킨으로서의 무가치함을 방해한다. 동세대 안에 종속된 인물들을 마저 열화시킬 수 없는 강정석은 슬랩스틱의 와중에도 빈번히 그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최소한 스마트폰 1인칭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면 이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복기하고 있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웹진 집단오찬’(http://jipdanochan.com/71)

6)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어둠에서 벗어나기, 이나리 옮김, 만일, 2016, 49-50p

신고
Posted by jipdanochan

<사진이라는 확장자를 실행시키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우리동네 아트페어 비평·평가>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처음 동대문구 왕산로924에 위치한 빈 건물에서 더 스크랩이 개막한다고 안내받았을 때 자연스레 상기하게 된 풍경은 폐허 속에 가설된 무대였다. 모든 유휴공간이 낡고 해진 폐허의 텍스처를 공유하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공간을 임의로 사용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부분과 드러나지 않는 부분 사이의 긴장을 조율해내면서 공간의 레이어들을 마치 폐허의 자재들처럼 솎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제 폐허는 단순히 낡고 해진 정도로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율되기 이전의 무방비한 공간을 의미한다. 사진을 판매하기 위한 프로세스는 어떤 식으로 앞선 폐허와 이접되며 새로운 경험 혹은 무대를 연출할 것인가? 임대와 유휴라는 물리적인 제약 탓에 도면상의 공간을 재배치하는 식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진 혹은 이미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한 효율적인 매개체로 구실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진이 특정 대상이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선택한 시점이 역으로 그것이 비치될 공간을 경험하는 관객의 시점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더 스크랩은 이처럼 이미지를 여과해 공간을 작도하는 대신 사진을 사는(파는) 경험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가 공간 내에서 조율 가능한 이미지들의 밀도와 개별 시점들 사이의 낙차를 기반으로 한다면, 후자는 보다 명료한 프로세스를 통해 섣불리 범주화할 수 없는 다양한 소속의 (본래 사진 매체를 활용하거나, 더 스크랩을 통해 ‘C프린트 출력과 A4사이즈라는 정해진 규격 내에 제 작업을 투사해볼 기회를 가진) 작가 군과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작업들로 구성된 유사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다. 일련의 작업들에 부여된 익명성이란 전제는 사진이라는 확장자를 공유하는 이미지들이 나란히 배열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연속체적인 감각을 부연하는 한편, 기획팀에 의해 선별된 102명의 작가들의 특정한 조합에 구애받지 않고 관객이 자신이 구매할 작업들을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써 각자의 취향과 기호를 실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임의의 규칙으로 작용한다. 진열된 1000여점의 작업들은 개별적으로 전시되기보다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로 존재하며,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 취합할지의 여부는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반드시 취향과 기호를 준거 삼지 않더라도 데이터베이스를 어떤 식으로 가로지르고 구획할 것인가, 라는 시점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관객 대부분은 비좁은 진열대 사이에서 장시간 머물며 작업과 눈을 맞추기보다 일련의 사진들을 잔상으로 기억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시점과 부합하는 특정적인 순간이 있었는지를 복기하며 구매 체크리스트의 공란을 채운다. 일부는 잔상에 떠밀려 특정적인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개별 작업이나 품번을 각자가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의 내장 카메라로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경은 감상을 유예한 채 이미지를 수집 발췌하기를 거듭하는, 기존 사진 전시의 문법과는 다소 상이한 소비의 경험치를 형성한다. 주지하듯 웹과 SNS의 타임라인 상에 산개한 무분별한 이미지들은 사진의 매체적 속성을 점차 불안정하게 만든다. 사용자는 사진을 포함한 이미지를 의미론적으로 독해하기보다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데이터의 일부로 수렴하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업로드되는 사진들은 더 이상 해상도의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의 일상 속에서 편의적으로 발췌한 별다른 맥락 없는 스냅snap들로 구성될 뿐이다. 더 스크랩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할 만한 사진 매체의 변별력을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개별 작업들이 잔상이나 스냅으로 소비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이처럼 사진의 해상도가 하향 평준화된 와중에 판매/구매라는 명시적인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잔상을 대면하는 경험을 활성화한다.

 

작업을 구매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공간을 가로지르는 경험은 잔상들의 총량 가운데 어떤 지점에서 나의 감식안이 반응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기회다. 더 스크랩에서의 소비는 단순히 상품의 구매라는 통상적인 의미에 그치기보다 이미지의 배후가 아닌 표면만을 준거로 삼아 자신과 동기화시키는 행위를 포괄한다.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 게재하기 위해 특정 대상과 장면을 선택할 때의 맥락 없음은 특정한 인과관계를 미처 의식하기 전에 발휘되는 사용자의 자동화된 감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각별한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 또한 마찬가지로 굳이 이미지로 발췌한다. 스마트폰과 동기화된 사용자는 일상을 장면 혹은 스냅으로 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불연속의 감각을 체득한 채 그에 들어맞는 현실의 단면들을 은연중에 솎아내는 것이다. 더 스크랩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이미지 연속체로 나열되는 와중에 각자의 불연속성을 담보하고 있는 표면상의 특정적인 균열이고, 사용자인 동시에 관객으로서의 감식안을 지닌 참여자들은 자신이 전제한 불연속의 리듬과 합선되는 순간을 맞닥뜨리기 위해 거듭 잔상들을 수렴한다. 그 결과 현실의 단면이 아닌 이미지의 단면들이 누적된다. 데이터베이스의 특정 지점에서 문득 꺼내드는 스마트폰은 기록의 과정인 동시에 사용자의 POV가 특정 장면과 합선되는 명시적인 순간인 것이다.

 

익명성이라는 전제는 익숙한 방법론을 구사하는 작가의 작업과 맞닥뜨리는 순간 무력화되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역된 결과라는 점에서 앞선 소비의 맥락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더 스크랩은 이처럼 각자의 이미지 소비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획해나가면서 공간 내에 다중적인 시점의 레이어를 부여한다. 이는 어떤 POV를 탈착하느냐에 따라 데이터베이스와 대면하는 경험이 관객의 내적 차원에서 서로 다르게 구성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더 스크랩 자체가 사진을 이미지로 감식하기 위해 분기하는 각각의 POV들을 수렴하기 위한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판매의 프로세스는 사용자의 POV를 의식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제한된 목록의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다소 무분별하게 백업된 1000여점의 작업들은 수행적으로 작동하는 소비의 맥락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취합되기를 예비하고 있다. 이때 공간은 폐허의 자재들로 분화되고 스스로를 재구성함으로써 자기조형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경험을 추동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배분된 플랫폼으로 구실한다. 더 스크랩은 데이터의 잔해가 아니라 적절한 조각 모음의 과정을 거친 뒤 물리적 공간 안에 재현한 데이터베이스 공간이며 정해진 출력 방식과 프린트의 규격은 이 모두를 사진으로 포괄한다. 무방비한 공간에서 마침내 사진이라는 확장자가 실행된 것이다.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얼개 속에서 사진은 어떤 효용성을 지니는가? 앞선 질문은 사진의 불안정한 위상을 복권하기 위한 인위적인 시도가 아니라 사진이 기꺼이 이미지로서 소비되기 시작할 때 보다 명료해진다. 더 스크랩은 무수한 잔상들 가운데 사용자가 이미지와 합선되는 순간을 사진과 대면하는 특정적인 경험으로 호명하고 이를 판매한다. 일련의 작업들은 거듭 유통되고 공유될수록 본래의 정보값을 잃어버리는 가난한래스터 이미지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귀속되는 순간 보다 명확해지는 해상도의 프린트로 배분된다. 전자가 이미지의 몰가치함을 예증한다면 후자는 몰가치한 이미지를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어떤 경험을 필요로 하는지를 재고하게끔 한다. 판매 데스크에 내가 취합한 체크리스트를 건네고 작업들이 포장되기까지 기다리는 여분의 시간은 마치 품번의 목록과 잔상들의 조합으로만 존재했던 무형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에 맞게 재조정되고 마침내 물성을 획득하는 랜더링의 과정 같다. ‘사진을 사는(파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용자-관객이 이미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현실과의 등거리 속에 사진을 위치시킴으로써 역으로 사진이 사용자와 일시적으로나마 눈을 맞출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 이를 서로 다른 판본으로 재현하는 과정이다. 대개의 사진은 잔상으로 휩쓸리지만 사진의 표면을 감식하는 POV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최적화된 이미지를 찾아낸다. 이와 같이 표면을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 속에서 사진은 거듭 스크랩된다.

 

신고
Posted by jipdanochan

<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본 글은 미술세계 12월호 특집 '신생공간 그 너머/다음의 이야기'에 게재되었습니다.


WEAVER - SEOUL METRO, (http://weaverhub.blogspot.kr/)

 

신생공간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브하는 엮는자계정의 2015년 하반기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서울 각지에는 총 27곳의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가 존재했었다. 반드시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여타 독립서점, 이벤트 공간, 미팅 룸 등은 앞선 27개 목록의 하위에 따로 분류되어있다. 그러나 이 ‘27’이라는 숫자는 유동적이다. 가장 최근 집계된 결과(2016.10.12. 업데이트)에 따르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는 총 24곳으로 감소했고, 그 사이 새로 개설된 공간 몇몇이 운영 종료된 공간들 대신 목록에 추가됐다. 무엇보다 애초에 신생공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공인된 라이센스가 아니듯 엮는자의 시야에 미처 포착되지 못한 공간들도 다수 존재하며 기존에 분류된 목록들이 공간의 운영방식의 변화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지표 삼아 자연스레 상기하게 되는 의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신생공간이라는 명칭이 SNS상에서 거론되기 시작하고 각종 지면상에서 신생공간 자체를 담론 내지는 이슈로 소급하기 위한 성급한 시도들이 뒤이었을 때부터 제기된 다소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의 요점은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이 정작 공간 운영 주체들로부터 비롯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호명인가? 그렇다면 그 외부는 무엇인가? 이처럼 최초의 발화자를 물색하는 듯한 공허한 소요가 잠시나마 일었지만, 갈수록 명확해진 것은 신생이라는 미심쩍은 명칭과 별개로 개별 공간들이 공통의 플랫폼으로 체감된다는 사실이었다.

 

신생공간은 1세대 대안공간들의 파국 이후에 재차 대안을 가설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정치적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애초에 00년대 초중반의 활황세에 빚진 적이 없거나 더 이상 제도의 부산물들을 가용할 수 없는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마련한 거점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총합이라는 단위는 과정상의 불균질함을 소급하지 못한다.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에 대한 반발 내지는 불편함은 개별 공간들이 생성된 구체적인 맥락과 운영의 방향성 및 정체성의 미묘한 차이들이 플랫폼, 담론, 혹은 호명 방식 자체에 의해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불안정한 현존성은 신생공간이 점유한 2015년이라는 특정적인 시공을 견인한 주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개별 공간들은 SNS상에 개설한 각자의 계정을 통해 각자의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유통시키며 스스로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결과 서로 혼선되는 정보량 자체가 일종의 공론으로 감지되며 플랫폼이라는 착시를 가속화했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자면 결국 각자의 특정성이 데이터 차원에서 희석되며 서로를 임의로 연결 짓는 통로를 열어젖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줌아웃을 해보자. 당장 일별할 수 있는 것은 서울이라는 지정학적인 토대와 그 속에 다소 무작위하게 배열된 신생공간들의 좌표와 그 사이의 간극 혹은 여분으로서의 공간이다. 우리는 연결이라는 행위가 암시하는 것처럼 개별 공간들 사이를 실선으로 잇거나 몇 가지의 계열에 따라 그루핑하는 식으로 공간을 직접적으로 작도할 수 없다. 신생공간 혹은 그곳이 위치한 서울의 변두리를 찾아다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관객들의 GPS유닛은 조감된 화면 위에 어떠한 물리적인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줌아웃과 그로 인한 조감의 시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신생공간 플랫폼을 시각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우리가 신생공간에 모종의 공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실선이 아니라 차라리 그 이면에서 유통시킨 데이터들의 얼개를 작도해야한다.

 

그러나 한때 공론으로 감지됐던 정보량 자체를 뒤늦게 개개의 발화들로 분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형해화된 데이터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 플랫폼을 구성하는 와중에 발생한 일련의 변수들을 어떻게 정보량으로 희석했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SNS의 타임라인 상에서 상연된 것은 가상의 계정들 간에 이루어진 비평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신생공간에 대한 서로의 경험치를 공유하며 동시성의 감각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굳이 대항제도를 자처하며 깃발을 꽂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미술제도로부터 이탈한 채 전시공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생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혹은 반드시 공간을 가설하지 않더라도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미술을 지속하기 위해서 링크의 감각을 활성화한 셈이다. ‘반지하 B½F’가 표방하는 오픈베타공간이라는 정체성처럼 신생공간은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모의실험의 장이었지만, 링크를 매개로 플랫폼이 한시적으로 확장된 이후 바로 그 모의실험을 언제까지 반복하거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재고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모의실험은 그 자체로 작업을 조형해나가는 특정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굿->에 참여한 총 15개의 신생공간과 80여명의 작가들이 현장에 부려놓은 굿즈형식의 작업들은 단순히 아트 마켓에서 판매되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신생공간들이 동기화한 오픈베타의 상태를 경유하며 분절된 조형적인 단위들이다. 원본 작업의 스케일을 축소하거나, 일부를 절삭하거나, 카트리지 케이스에 압축하거나, 디지털 프린트하는 식으로 2차 창작을 거듭한 결과물들은 미처 완결되지 못한 작업으로서 그 이전의 전사와 이후의 전개를 암시한다. 이처럼 오픈베타 형식의 작업들은 신생공간에 속한 당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링크의 감각을 지향하며 어떤 연결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파편으로부터 정확히 어떤 독자적인 경험의 회로들을 개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말 그대로 오픈베타서비스는 계속 연장되고 있다. ‘굿즈에 백업된 각각의 작업을 어떻게 해금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는 개별 공간들이 동시성을 잃어버렸을 때 무엇으로 구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와 유사하다.

 

지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서울 바벨>에서 총 17개의 신생공간이 이합집산한 장면은 개별 공간들이 문득 현실의 중력에 붙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별 공간들은 그간 자체적으로 진행한 전시나 레지던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축적한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각각의 구간을 점유했지만, 정작 열거된 작업들은 공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일정한 범주로 묶이지 못한 채 다소 산란하게 뒤섞여있다. 이는 단순히 신생공간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컨텐츠들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간 공통의 플랫폼이라는 착시 속에서 이들이 어찌됐든 동질적인 대상으로 간주됐으며 그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각자가 잃어버린 접촉면을 암시하거나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서울 바벨>이 마치 신생공간 플랫폼의 물리적인 잔해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성의 감각은 정확히 무엇을 지향했는가? 우리는 이를 선뜻 캐묻지 못한다. 신생공간은 세대교체를 가속화하기 위한 유효한 방편이었을 뿐 그 이후의 대안까지 선취해낸 영구적인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바벨> 전시 전경 일부

 

앞선 <굿->를 통해 신생공간 자체의 동력이 완결됐다고 회자되는 이유는 그간 명시적인 교류가 없었던 개별 공간들이 연계된 채 굿즈라는 조형적인 단위를 공통의 언어로서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일련의 작업들을 재구성하며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신생공간은 여전히 잔존하며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의 목록은 앞으로도 갱신되겠지만 모두가 예감하듯 2015년 자체는 결코 재연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반드시 세워야한다면, 시작점은 다소 모호하되 2015년이 마감된 바로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소성의 압력을 견디며 반복한 모의실험의 잔여들은 신생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징후인 동시에 이후의 시간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지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앞선 정보량은 일종의 경험치로 누적된다. 지도상의 좌표들을 억지로 작도하는 대신 공간을 가상의 계정과 연동시킨 채 서로에게 접속하기를 반복하면서, 물리적인 토대와 중력은 점차 당연한 전제가 아닌 공간에 부속된 레이어로 변화한다. 결국 공통의 플랫폼이 걷힌 자리에서 헛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공간의 위상 자체다.

 

오픈베타 형식의 전시는 단순히 미완성의 결과물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온전히 합성되지 못한 작업의 파편들을 그 자체로 유지함으로써 서로를 가리키는 링크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공통의 플랫폼을 잃어버린 개별 공간들은 링크의 절단면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과 연결된 명시적인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링크의 관성에 따라 현실의 거점에 정주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한 번 정보량으로 희석된 뒤 내뱉어진 공간은 데이터 흐름 속에 휩쓸리며 어긋난 관계들을 일종의 외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랜더링이 덜 된공간은 스스로를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환원한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링크의 방향성은 이제 공간의 내부로 수렴하며 기존의 공간성을 벡터의 관계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공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며 조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 대신 재차 오픈베타를 가동하여 각각의 파편들을 필요에 따라 배치하고 때로는 어긋난 방향성을 유도하며 이전과는 다른 공간 경험을 연출해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더불어 각종 스마트 기기를 이용하여 데이터라는 불가해한 대상을 보다 편의적으로 운용하는 와중에 특정 공간을 포함한 일련의 사용자들이 체득하는, 갈수록 저하되거나 모호해지는 현실의 해상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보 이미지들은 여전히 과잉 생산되는가? 혹은 이러한 과잉은 여전히 사용자 주체에게 과부하와 정신착란을 유발하는가? 지역 괌성유망을 이어붙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월드 와이드 웹을 상상하던 90년대에 비해 데이터의 속도는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증가했지만, 어느덧 우리는 이를 따라잡기를 멈췄다. 더 이상 뉴미디어에서 상연되는 디지털 기반 이미지들의 산란한 풍경에 시각적으로 압도되지도 않고, 하이퍼링크를 매개로 펼쳐지는 페이지들의 관성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속도의 스펙터클 자체에 둔감하다. 과잉 생산은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매개되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뒤섞고 무너뜨리지만 이는 인터페이스 배후의 사건일 뿐, 사용자는 단지 손끝으로 밀어서없애거나 선택적으로 크롭할 뿐이다.

 

결국 산란한 감각은 영점으로 하향되며, 영점의 상태는 바로 우리가 처한 현재를 규정 짓는다. 설사 특정한 레이아웃 상에서 이미지들을 편집하거나 작도하더라도, 그와 연동하는 행위는 오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만 이루어질 뿐 정작 행위를 결정짓는 데이터 알고리즘, 이를테면 배후에 놓인 실재와의 관계는 부재한다. 그리고 이는 점차 굳이 현실을 뒤집어볼 필요도 여력도 없는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으로 귀결된다. 정신착란이 없거나 과잉에 대한 체감을 잃어버린 세계.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재현하는가?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은 인터페이스의 뒷면과 달리 우리와 거리낌 없이 동기화되는가? 그것은 사실 영점에 대한 지속적인 재확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용자는 저하된 해상도에 몰입하기 위해 애꿎은 눈을 비비기보다 차라리 표면 위에 또 다른 경험들을 가설해나가는 편을 택한다. 이제 인터페이스는 무감각이 아닌 표면 자체를 응시하는 새로운 관점과 각도들을 요구하고 있다.

신고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