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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호 김정태 진챙총


황재민


이미지가 한때 어딘가에 단단히 혹은 헐겁게 묶여있던, 나아가, 최소한 묶여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인식은 이제 확실히 어딘가로 흘러가버린 것이 되었다. 인터넷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이미지의 동역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선 '약탈'이라는 묘사가 서술에서 제외되어야만 한다. 열화된 캡쳐 이미지가 개념적으로 무한한 공간을 쉴새 없이 떠돌아다니는 세상에서 이미지가 무언가를 가지고 있고 사용자가 그것을 빼앗아 재맥락화한다는 생각은 이제 분명히 어설프다.


디지털 소프트웨어가 장려하는 투명성에 힘입어(1) 이미지, 혹은 모니터 속의 어떤 것들은 오브젝트로 떼어져나와 어디에든 합성될 수 있는 자유로운, 그렇지만 동시에 어딘가 분열증에 걸린 것처럼 혼란한 형식이 되었다. 이런 이미지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구겨지고 찢긴 형상, 그리고 보는 순간 왠지 어처구니가 없어지는 ‘랜덤’한 상황은 인터넷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여러 글에 의해서 검토되고 때로 옹호되었다.


이런 옹호에는 새로운 것이 새로운 상황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측하는 오해와 호들갑이 자주 엮여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이와 같은 언급이 쉽게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가파른 상황에 이름을 주고 공간을 만든다는 순기능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정말로 모든 것이 납작해진 상황이라면, 납작한 공간에게 그곳에서만 가능한 새로운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온라인 공간에서 이미지라는 매체는, 공간과 조응하는 형식적 특질을 강조하는 언급들이 말하듯, 거의 무한하게 자유로운 재가공의 가능성과 종잡을 수 없는 순환을 통해 레이어를 만든다. 보통 공간이 야기되는 지점은 그 가능성과 유동성 자체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정보량이 자연스럽게 창출하는 글리치 같은 것에 있다. 웹에 대해서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런 에러는, 창의적인 상황을 만들고 보조하지만 동시에 후가공이라는 문제를 초래한다.


가상 공간의 새로운 움직임은 인식에 영향을 미치지만, 세계를 프린터로 단숨에 출력할 수 있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온라인과 그 속에서 점멸하는 글리치 같은 것은 다양한 논의와 실행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다종 다양한 담화들에게 일정한 한계를 부과했다. 인터넷의 혁명성에 대해 소리 높이는 외침과 진정한 예술은 모니터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낮은 목소리들의 대조는 익숙한 모양의 평행하는 선으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적확히 가리키지 않는다.


1. 경건함


9월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에서 있었던 백경호의 개인전 <Cast away>에서, 작가는 "캔버스라는 오래된 거푸집"을 통해 이미지를 수집한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떠오르는 생각들의 목록을 기반으로" 긁어모은 이미지들과 미술사적 참조와 도상은 한 화면에서 혼합되며 일상성 그리고 역사성을 서로 교차하도록 한다.


이 과정을 통해 백경호는 일상의 풍경을 재현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말하자면 산책자의 그것은 될 수 없다.(2) 작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러므로 목록화라는 방법론은 뭔가를 섞어버리기 위한 도구가 된다. 백경호의 캔버스에서 목록의 역할은 원근법의 정돈된 세계와도 아카이브의 무거운 세계와도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단지 나아가다가 모든 것을 갑작스럽게 그만두어버린다는 단순한 목적을 위한 알리바이다.


이미지를 전유의 대상으로 파악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회화들은 그것의 소재나 성격 같은 것을 맞부딪히고 섞어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미지의 성격이 평평해지고 어처구니 없어진 세상에서, 레이어의 기능은 전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한 상태로, 백경호는 우연한 목록과 역사 따위를 합쳐버리는데, 이제 그 화면은 기호를 독해하고 의미를 읽는 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독해법을 거부하고 어딘가 투명한 것이 되어 시야 바깥으로 슬그머니 잠적하는 일을 위한 것이 된다. 투명성과 고정성 사이에서, 서사에 빚이 없는 목록들이 만드는 것은 언제라도 수정할 수 있을 것처럼 서로 동떨어진 화면들의 산술적 집합이다. 그 외형으로부터 포토샵 레이어의 비유를 꺼내드는 것은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작가 스스로는 소프트웨어를 경유하는 인식론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백경호의 회화들은 새로운 시각성과 새로운 화면을 위한 구성이라기보단 새로운 배경과 배경이 제공하는 혼란상을 자각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는 일을 포기한 결과로 보아야 옳다. 그 결과 백경호의 표면에서 엿보이는 것은 뜨거운 표현의 정서도, 차용의 차가운 거리감도 아닌 미적지근한 ‘현자 타임’의 시간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설명할 때 경건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단어는 사실상 회화의 존재론에 관한 질문을 괄호 안에 가두는 역할을 한다. 어찌 되었든 백경호는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며 인터넷 이미지와 그것의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데, 동시에 역사라는 큰 주제를 회화 안에 어떻게 붙잡아놓아야 하는지, 반드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을 붙잡는 새로운 방법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진다. 이 복잡하고 큰 질문들은, 결과적으로는 미지근하고 텁텁한 정서와 함께 개미지옥인지 "정신과 시간의 방"(3)인지 모를 시공간을 만든다.


2. 속도감


새로운 시공간적 환경이 선사하는 난감함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또한 지난 세기의 유물이라면, 그래서 백경호와 그의 작업이 어딘가 맥이 빠진 방식으로 캔버스를 “오래된 거푸집”이라 표현하는 자각의 정서를 가져가다면, 반대로 인터넷이 초래한 환경에 반가움을 표하려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김정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김정태는 오픈베타 공간이라는 정체성을 표하는 공간 <반지하>에 설치했던 프로젝트 <현피>와 커먼센터의 <오토세이브>에서 그림으로 공간을 메우려는 듯 물량으로 승부했다. 인터넷의 특정성을 물리적이고 미적인 물건으로 현실화한다는 문제 앞에서, 김정태는 우선 그림을 보조물로 삼아 인터넷 환경을 재연하고자 한다.


백경호에게 회화와 그것의 지지대로서 캔버스가 "오래된 거푸집"에 불과한 반면, 김정태의 그림들은 인터넷의 난잡스럽고 무작위적인 질서와 그 속에서 파열된 이미지들이 만드는 환경과 동기화하기 위한 접속코드로 쓰인다. 김정태는 그림으로부터 해묵고 무거운 것들을 털어내고, 인터넷 이후의 세계가 그 이전과 어떤 방식으로 달라졌는지 직접 시연해보인다.


그 결과, 매체는 분산되고 이름은 사라진다. 작업은 특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경처럼 멀리 두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된다. 인터넷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고 그것과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작가들에게 흔히 화이트큐브가 제공하는 팬시한 진공 포장 상태에 친화적인, 특히 텀블러 같은 데에 올리기 좋은 ‘포토제닉’한 작업을 시도한다는 불평이 쏟아진다는 것(4)을 생각해볼 때, 작가가 인터넷에 호의적인 동시에 포착하기 어려운 하나의 배경처럼 작업을 구성한다는 점은 대조해볼 만 하다.


그렇지만 작가와 그의 작업은 인터넷과 거리감을 좁히는 동안 그 새로운 환경이 만드는 새로운 약점들에 함께 노출된다. 인터넷과 그 환경을 재연한다는 생각은 작업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물리적인 그림으로 재연한다는 생각과 연결되는데, 이때 그림은 어딘가 점점 어눌해지는 삼차원 세상의 물성에 사로잡히며 모니터 속 jpg 이미지의 완전무결함, 그리고 아직은 그 완벽한 평면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글리치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상기시키며 껍데기가 된다. 이렇게 인터넷의 특정성으로부터 탈신비화되었을 때, 그림은 ‘포스트-인터넷’의 들뜬 야심에서 형식주의의 답답한 굴레로 내던져지며 ‘그냥 그림’이 된다.


3. 진챙총


위의 작가들이 일반 명사로서의 인터넷에 관심을 둔다면, 진챙총은 인터넷의 좀 더 음하고 폐쇄적인 공간에 관심을 둔다. 8월 7일 오프닝과 함께 트위터 타임라인을 박살냈던 첫 개인전 <후죠시 매니페스토>에서 전시되었던 진챙총의 작업은 일단 포르노 이미지이자 표절한/전유한 이미지이자 또 다른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수작업을 통해 정성스럽게 물화한 이미지-오브제이기도 했다.


다소 복잡하고 수고스러운 절차를 통해 물리 세계에 도착한 디지털 이미지-천조각들은 전시와 동시에 스마트폰 카메라로 빨려 들어간 뒤 의식과도 같은 절차를 거쳐 가상 공간에 흩뿌려진다. 이제는 일상적인 이 같은 관람의 방식은 <후죠시 매니페스토>의 선언문들이 어떤 정념의 기호화를 시도하면서 디지털 이미지의 기본 단위인 화소를 구체화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새삼 살펴볼 만하다. 작가가 "보석 찍는 초근접 카메라로 촬영"(5)하여 확대하고 인쇄한 화면은 관람객의 핸드폰 카메라를 통해 포착된 다음 LCD 디스플레이의 화소 아래에서 다시 보여지며 화소 따위 없는 것이 되거나 - 화소 밖에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용과 형식의 강제적인 단절은 진챙총의 오브제들이 가상 공간에서 하나의 민족정신을 공유하는 인터넷 사용자들을 표상하고 상징하려는 작업으로 독해되는 데에 빌미를 제공했다. 그렇지만 그 인쇄된 이미지들은 뭔가를 차용하고 발화한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텅 빈 지점을 겨냥한다.


이미지가 가상 공간에 기반하는 세계 위에 서며 그것을 잡아 늘려 화소를 노출한다는 생각은 무한한 평면처럼 보이는 것에 존재하는 물질적 불균질성을 찾아낸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동시에 그것은 디지털 공간 속에서 이미지가 근원하는 지점을 파악하겠다는 시도로 이어지는데, 성공하지 못할 것 같은 시도 속에서 작업물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들에도 불구하고 별안간 공허해진다. 하지만 이 공허가 노출하는 것은 헛소실점을 가리키는/가리키지 않는 분열적인 작도법이 아니라 화면에 놓인 모든 요소가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거침없이 수렴하는 1점 투시도에 가깝다. 그리고 그 투시도의 끝에서 소실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작가 자신, 스스로가 적극적인 인터넷의 사용자였을 작가 자신의 축적된 경험 세계다.


소실점이 오로지 작가 본인에게 향하는 작업을 일기장 작업으로 일컫는다면 진챙총이 매체를 사용하는 방식은 의아한 것일 수 있다. 작가는 여러가지 광학적 필터를 덧입혀가며 이미지를 열화하고 공들여 물건으로 조직하지만 정작 그것은 보기 좋게 실패하기 위한 것이다.(6) 저해상도 이미지를 고품질의 규격으로 물화하는 것은 작가의 개인사적 취미와 분명한 연관성을 갖지만 그것은 단단하고 평평한, 혹은 물렁하고 울퉁불퉁한 디스플레이 아래 흩어지며 동어반복을 만들고 사라진다. 일기장은 보통 서랍 안에 조용히 놓이는 것으로, 과거를 보존하고 글쓴이를 증언한다. 하지만 이 헛수고의 구조는 아무것도 증언하지 않는다. <후죠시 매니페스토>는 바깥 세계와 격렬히 관계했지만, 정작 그 파열음은 작업과 큰 상관이 없다.


4.


인터넷 이후의 세계와 그 인식론에 대해 이야기하며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하는 전시는, 구글 검색창에 몇가지 검색어만을 입력해보아도 싱겁게 찾아진다. 그러나 새로운 것, 새로울 수 밖에 없는 무엇을 향한 거의 의무적인 고양감을 걷어내고 보면 해당 전시들 중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둔 경우는 없었다. 이를테면 2015년 10월 현재 진행 중인 뉴 뮤지엄의 새로운 온라인 전시 <브러시들 (Brushes)>(7)을 대표적인 경우로 삼아 살펴보자. 회화의 역사를 도구로 늘여진 것으로 파악하고 그 파편적 타임라인의 마지막 줄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삽입하는 기획은 이를테면 쉴 새 없이 쌓이고 사라지는 레이어들을 반복하는 140메가바이트짜리 GIF-회화 같은 것으로 뒷받침 되는데, 그 생각은 손으로 잡히고 만져지는 세계와 그 위에서 누적된 역사를 과소평가하면서 성급한 풍경을 연출한다. 이제 납작하고 어설퍼진 물리적 공간은 거기가 세계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디지털 공간과 그것이 꼬아 비튼 개념적 바탕이 보다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할 때 갑자스레 단단하고 거친 거름망의 지위를 행사한다. 어떤 이야기에 의해서 지지되든, 그 거름망이 거의 천덕꾸러기와 같은 지위를 가질 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일은 아직 불가능하다.


그 결과 온라인은 오프라인에 꾸준히 패배하여 온 것 같다. 더군다나 '포스트-인터넷'이라는 해설이 곱절의 민망함을 선사하는 한국에서 새로운 인식을 위한 공간은 아직 설 자리를 찾지 못한 것 같고, 그러므로 관련한 담화들을 디딤돌 삼는 일은 맞지 않는 유행을 따르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광랜 서비스가 데려온 평평한 지반은 거리감이라는 개념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고 영향을 미치는 경로를 새로이 개발한다. 가상 공간과 물리적 공간의 틈과 마주치는 작가들은 이와 같은 변화의 실례로, 신생 공간이라고 정리되는 지금 한국의 미술의 새 발판과 관계하며 전과 다른 역사를 쌓는 데에 기여한다.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맥락일 것이다.


인터넷 공간은 종종 혼란하여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너무 뻔한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LCD 디스플레이 속에서 표시되는 것들은 납작하고 평평한 지대이지만, 울퉁불퉁하고 난잡하여 쉽게 관계하기 어렵다는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서로 맞지 않는 진술들은 어쩌면 아직 온라인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 할 토대가 준비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 이것은 그 자체가 가상 공간의 성격에 대한 증언록일 수도 있다. 이처럼 어긋나고 미끌거리는 상황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그 공간에 주의를 기울이는 작가들은 몇가지 방식을 통해 관념과 물질 사이의 대비 혹은 중첩이라는 문제에 관계하며, 이미 지나간 시간의 틀로는 쉬이 맞추어지지 않는 풍경을 구성한다.


미주


(1): "아마도 1993~1999년 기간 동안 일어난 변화 중에서 가장 극적인 것은 디지털 합성(digital compositing)을 통해 다양한 투명도를 가진 다양한 수준의 이미지를 새롭게 결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레프 마노비치(Lev Manovich), 이재현(역), <소프트웨어가 명령한다>, 서울: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4, 360p

(2): 그렇지만 변화한 현실감각을 논하며 회화의 역할을 "'전통적 의미에서의 프레임'", 재현적 프레임으로 한정 짓는 것은 다소 성급한 일이다. 그런 종류의 설명은 회화로부터 뻗어 나온 상이한 역사적 갈래들을 묵과한 채 일상화된 디지털 공간이라는 새로운 주제에 너무 빠르게 의존한다. 인용은 권시우의 글 <백경호 「Cast away」, 추상이라는 인터페이스> (http://jipdanochan.com/62) 에서.

(3): 정신과 시간의 방은 만화 <드래곤 볼>에 등장하는 레벨업을 위한 장소로, "단 하루로 1년간의 수련을 할 수 있는"(토리야마 아키라(Toriyama Akira), <드래곤 볼 31>, 서울: 서울문화사(만화), 2001, 69p) 서브컬처의 신화적 장소다.또, 그것은 789라는 이름으로 회화 작업을 하는 콜렉티브가 사용하는 장소의 이름이기도 한데, 그곳은 "2015년 4월 1일부터 2016년 4월 1일까지"(http://chillpalgu.tumblr.com/about) 일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전시를 위해 헌정하면서 유예 기간으로서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4): Brian Droitcour, <포스트-인터넷 예술의 위험성(The Perils of Post-Internet Art)>, http://www.artinamericamagazine.com/news-features/magazine/the-perils-of-post-internet-art/

(5): <나일론>의 짧은 인터뷰에서 인용. 링크는 http://www.nylonmedia.co.kr/contents/index_view.html?catecode=40&subbcode=&contnumb=2542

(6): 이런 종류의 헛수고는 또한 90-00년대 한국 현대 미술의 주요한 조형 언어이기도 했다. 이같은 정서를 활용하는 작업들은 유토피아적 승화에 대한 열망과 현실적 절망의 틈새에서 짐짓 좌절하는 모습을 연출하며 완성되었다. 하지만 과거의 헛수고-양식들과는 달리 진챙총의 작업물은 동일한 방법론을 집착적 열망을 표시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그러나 이런 독해는 작업이 관련되는 이미지들이 불러오는 착시 현상일 수 있다.

(7): http://www.newmuseum.org/exhibitions/view/first-look-brushe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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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