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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라는 확장자를 실행시키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우리동네 아트페어 비평·평가> 활동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처음 동대문구 왕산로924에 위치한 빈 건물에서 더 스크랩이 개막한다고 안내받았을 때 자연스레 상기하게 된 풍경은 폐허 속에 가설된 무대였다. 모든 유휴공간이 낡고 해진 폐허의 텍스처를 공유하진 않지만, 중요한 것은 공간을 임의로 사용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부분과 드러나지 않는 부분 사이의 긴장을 조율해내면서 공간의 레이어들을 마치 폐허의 자재들처럼 솎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제 폐허는 단순히 낡고 해진 정도로 가늠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율되기 이전의 무방비한 공간을 의미한다. 사진을 판매하기 위한 프로세스는 어떤 식으로 앞선 폐허와 이접되며 새로운 경험 혹은 무대를 연출할 것인가? 임대와 유휴라는 물리적인 제약 탓에 도면상의 공간을 재배치하는 식의 직접적인 개입을 최소화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진 혹은 이미지는 이를 만회하기 위한 효율적인 매개체로 구실할 수 있다. 이를테면 사진이 특정 대상이나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선택한 시점이 역으로 그것이 비치될 공간을 경험하는 관객의 시점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동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더 스크랩은 이처럼 이미지를 여과해 공간을 작도하는 대신 사진을 사는(파는) 경험을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전자가 공간 내에서 조율 가능한 이미지들의 밀도와 개별 시점들 사이의 낙차를 기반으로 한다면, 후자는 보다 명료한 프로세스를 통해 섣불리 범주화할 수 없는 다양한 소속의 (본래 사진 매체를 활용하거나, 더 스크랩을 통해 ‘C프린트 출력과 A4사이즈라는 정해진 규격 내에 제 작업을 투사해볼 기회를 가진) 작가 군과 그들에 의해 생산된 작업들로 구성된 유사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한다. 일련의 작업들에 부여된 익명성이란 전제는 사진이라는 확장자를 공유하는 이미지들이 나란히 배열됨으로써 얻어지는 일종의 연속체적인 감각을 부연하는 한편, 기획팀에 의해 선별된 102명의 작가들의 특정한 조합에 구애받지 않고 관객이 자신이 구매할 작업들을 자유롭게 선택함으로써 각자의 취향과 기호를 실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는 임의의 규칙으로 작용한다. 진열된 1000여점의 작업들은 개별적으로 전시되기보다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로 존재하며, 이것들을 어떤 식으로 취합할지의 여부는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반드시 취향과 기호를 준거 삼지 않더라도 데이터베이스를 어떤 식으로 가로지르고 구획할 것인가, 라는 시점 선택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관객 대부분은 비좁은 진열대 사이에서 장시간 머물며 작업과 눈을 맞추기보다 일련의 사진들을 잔상으로 기억하고 그 와중에 자신의 시점과 부합하는 특정적인 순간이 있었는지를 복기하며 구매 체크리스트의 공란을 채운다. 일부는 잔상에 떠밀려 특정적인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개별 작업이나 품번을 각자가 휴대하고 있는 스마트폰의 내장 카메라로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경은 감상을 유예한 채 이미지를 수집 발췌하기를 거듭하는, 기존 사진 전시의 문법과는 다소 상이한 소비의 경험치를 형성한다. 주지하듯 웹과 SNS의 타임라인 상에 산개한 무분별한 이미지들은 사진의 매체적 속성을 점차 불안정하게 만든다. 사용자는 사진을 포함한 이미지를 의미론적으로 독해하기보다 지속적으로 갱신되는 데이터의 일부로 수렴하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 업로드되는 사진들은 더 이상 해상도의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각자의 일상 속에서 편의적으로 발췌한 별다른 맥락 없는 스냅snap들로 구성될 뿐이다. 더 스크랩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할 만한 사진 매체의 변별력을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개별 작업들이 잔상이나 스냅으로 소비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이처럼 사진의 해상도가 하향 평준화된 와중에 판매/구매라는 명시적인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잔상을 대면하는 경험을 활성화한다.

 

작업을 구매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 공간을 가로지르는 경험은 잔상들의 총량 가운데 어떤 지점에서 나의 감식안이 반응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기회다. 더 스크랩에서의 소비는 단순히 상품의 구매라는 통상적인 의미에 그치기보다 이미지의 배후가 아닌 표면만을 준거로 삼아 자신과 동기화시키는 행위를 포괄한다.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 게재하기 위해 특정 대상과 장면을 선택할 때의 맥락 없음은 특정한 인과관계를 미처 의식하기 전에 발휘되는 사용자의 자동화된 감각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각별한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 또한 마찬가지로 굳이 이미지로 발췌한다. 스마트폰과 동기화된 사용자는 일상을 장면 혹은 스냅으로 구성함으로써 얻어지는 불연속의 감각을 체득한 채 그에 들어맞는 현실의 단면들을 은연중에 솎아내는 것이다. 더 스크랩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이미지 연속체로 나열되는 와중에 각자의 불연속성을 담보하고 있는 표면상의 특정적인 균열이고, 사용자인 동시에 관객으로서의 감식안을 지닌 참여자들은 자신이 전제한 불연속의 리듬과 합선되는 순간을 맞닥뜨리기 위해 거듭 잔상들을 수렴한다. 그 결과 현실의 단면이 아닌 이미지의 단면들이 누적된다. 데이터베이스의 특정 지점에서 문득 꺼내드는 스마트폰은 기록의 과정인 동시에 사용자의 POV가 특정 장면과 합선되는 명시적인 순간인 것이다.

 

익명성이라는 전제는 익숙한 방법론을 구사하는 작가의 작업과 맞닥뜨리는 순간 무력화되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역된 결과라는 점에서 앞선 소비의 맥락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더 스크랩은 이처럼 각자의 이미지 소비의 포트폴리오를 작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획해나가면서 공간 내에 다중적인 시점의 레이어를 부여한다. 이는 어떤 POV를 탈착하느냐에 따라 데이터베이스와 대면하는 경험이 관객의 내적 차원에서 서로 다르게 구성될 뿐만 아니라, 애초에 더 스크랩 자체가 사진을 이미지로 감식하기 위해 분기하는 각각의 POV들을 수렴하기 위한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판매의 프로세스는 사용자의 POV를 의식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해 제한된 목록의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다소 무분별하게 백업된 1000여점의 작업들은 수행적으로 작동하는 소비의 맥락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취합되기를 예비하고 있다. 이때 공간은 폐허의 자재들로 분화되고 스스로를 재구성함으로써 자기조형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의 경험을 추동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배분된 플랫폼으로 구실한다. 더 스크랩은 데이터의 잔해가 아니라 적절한 조각 모음의 과정을 거친 뒤 물리적 공간 안에 재현한 데이터베이스 공간이며 정해진 출력 방식과 프린트의 규격은 이 모두를 사진으로 포괄한다. 무방비한 공간에서 마침내 사진이라는 확장자가 실행된 것이다.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얼개 속에서 사진은 어떤 효용성을 지니는가? 앞선 질문은 사진의 불안정한 위상을 복권하기 위한 인위적인 시도가 아니라 사진이 기꺼이 이미지로서 소비되기 시작할 때 보다 명료해진다. 더 스크랩은 무수한 잔상들 가운데 사용자가 이미지와 합선되는 순간을 사진과 대면하는 특정적인 경험으로 호명하고 이를 판매한다. 일련의 작업들은 거듭 유통되고 공유될수록 본래의 정보값을 잃어버리는 가난한래스터 이미지가 아니라 사용자에게 귀속되는 순간 보다 명확해지는 해상도의 프린트로 배분된다. 전자가 이미지의 몰가치함을 예증한다면 후자는 몰가치한 이미지를 명료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어떤 경험을 필요로 하는지를 재고하게끔 한다. 판매 데스크에 내가 취합한 체크리스트를 건네고 작업들이 포장되기까지 기다리는 여분의 시간은 마치 품번의 목록과 잔상들의 조합으로만 존재했던 무형의 이미지가 현실의 해상도에 맞게 재조정되고 마침내 물성을 획득하는 랜더링의 과정 같다. ‘사진을 사는(파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결국 사용자-관객이 이미지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현실과의 등거리 속에 사진을 위치시킴으로써 역으로 사진이 사용자와 일시적으로나마 눈을 맞출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 이를 서로 다른 판본으로 재현하는 과정이다. 대개의 사진은 잔상으로 휩쓸리지만 사진의 표면을 감식하는 POV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최적화된 이미지를 찾아낸다. 이와 같이 표면을 기반으로 한 상호작용 속에서 사진은 거듭 스크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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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