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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본 글은 미술세계 12월호 특집 '신생공간 그 너머/다음의 이야기'에 게재되었습니다.


WEAVER - SEOUL METRO, (http://weaverhub.blogspot.kr/)

 

신생공간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브하는 엮는자계정의 2015년 하반기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서울 각지에는 총 27곳의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가 존재했었다. 반드시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여타 독립서점, 이벤트 공간, 미팅 룸 등은 앞선 27개 목록의 하위에 따로 분류되어있다. 그러나 이 ‘27’이라는 숫자는 유동적이다. 가장 최근 집계된 결과(2016.10.12. 업데이트)에 따르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는 총 24곳으로 감소했고, 그 사이 새로 개설된 공간 몇몇이 운영 종료된 공간들 대신 목록에 추가됐다. 무엇보다 애초에 신생공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공인된 라이센스가 아니듯 엮는자의 시야에 미처 포착되지 못한 공간들도 다수 존재하며 기존에 분류된 목록들이 공간의 운영방식의 변화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지표 삼아 자연스레 상기하게 되는 의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신생공간이라는 명칭이 SNS상에서 거론되기 시작하고 각종 지면상에서 신생공간 자체를 담론 내지는 이슈로 소급하기 위한 성급한 시도들이 뒤이었을 때부터 제기된 다소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의 요점은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이 정작 공간 운영 주체들로부터 비롯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호명인가? 그렇다면 그 외부는 무엇인가? 이처럼 최초의 발화자를 물색하는 듯한 공허한 소요가 잠시나마 일었지만, 갈수록 명확해진 것은 신생이라는 미심쩍은 명칭과 별개로 개별 공간들이 공통의 플랫폼으로 체감된다는 사실이었다.

 

신생공간은 1세대 대안공간들의 파국 이후에 재차 대안을 가설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정치적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애초에 00년대 초중반의 활황세에 빚진 적이 없거나 더 이상 제도의 부산물들을 가용할 수 없는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마련한 거점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총합이라는 단위는 과정상의 불균질함을 소급하지 못한다.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에 대한 반발 내지는 불편함은 개별 공간들이 생성된 구체적인 맥락과 운영의 방향성 및 정체성의 미묘한 차이들이 플랫폼, 담론, 혹은 호명 방식 자체에 의해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불안정한 현존성은 신생공간이 점유한 2015년이라는 특정적인 시공을 견인한 주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개별 공간들은 SNS상에 개설한 각자의 계정을 통해 각자의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유통시키며 스스로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결과 서로 혼선되는 정보량 자체가 일종의 공론으로 감지되며 플랫폼이라는 착시를 가속화했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자면 결국 각자의 특정성이 데이터 차원에서 희석되며 서로를 임의로 연결 짓는 통로를 열어젖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줌아웃을 해보자. 당장 일별할 수 있는 것은 서울이라는 지정학적인 토대와 그 속에 다소 무작위하게 배열된 신생공간들의 좌표와 그 사이의 간극 혹은 여분으로서의 공간이다. 우리는 연결이라는 행위가 암시하는 것처럼 개별 공간들 사이를 실선으로 잇거나 몇 가지의 계열에 따라 그루핑하는 식으로 공간을 직접적으로 작도할 수 없다. 신생공간 혹은 그곳이 위치한 서울의 변두리를 찾아다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관객들의 GPS유닛은 조감된 화면 위에 어떠한 물리적인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줌아웃과 그로 인한 조감의 시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신생공간 플랫폼을 시각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우리가 신생공간에 모종의 공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실선이 아니라 차라리 그 이면에서 유통시킨 데이터들의 얼개를 작도해야한다.

 

그러나 한때 공론으로 감지됐던 정보량 자체를 뒤늦게 개개의 발화들로 분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형해화된 데이터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 플랫폼을 구성하는 와중에 발생한 일련의 변수들을 어떻게 정보량으로 희석했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SNS의 타임라인 상에서 상연된 것은 가상의 계정들 간에 이루어진 비평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신생공간에 대한 서로의 경험치를 공유하며 동시성의 감각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굳이 대항제도를 자처하며 깃발을 꽂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미술제도로부터 이탈한 채 전시공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생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혹은 반드시 공간을 가설하지 않더라도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미술을 지속하기 위해서 링크의 감각을 활성화한 셈이다. ‘반지하 B½F’가 표방하는 오픈베타공간이라는 정체성처럼 신생공간은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모의실험의 장이었지만, 링크를 매개로 플랫폼이 한시적으로 확장된 이후 바로 그 모의실험을 언제까지 반복하거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재고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모의실험은 그 자체로 작업을 조형해나가는 특정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굿->에 참여한 총 15개의 신생공간과 80여명의 작가들이 현장에 부려놓은 굿즈형식의 작업들은 단순히 아트 마켓에서 판매되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신생공간들이 동기화한 오픈베타의 상태를 경유하며 분절된 조형적인 단위들이다. 원본 작업의 스케일을 축소하거나, 일부를 절삭하거나, 카트리지 케이스에 압축하거나, 디지털 프린트하는 식으로 2차 창작을 거듭한 결과물들은 미처 완결되지 못한 작업으로서 그 이전의 전사와 이후의 전개를 암시한다. 이처럼 오픈베타 형식의 작업들은 신생공간에 속한 당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링크의 감각을 지향하며 어떤 연결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파편으로부터 정확히 어떤 독자적인 경험의 회로들을 개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말 그대로 오픈베타서비스는 계속 연장되고 있다. ‘굿즈에 백업된 각각의 작업을 어떻게 해금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는 개별 공간들이 동시성을 잃어버렸을 때 무엇으로 구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와 유사하다.

 

지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서울 바벨>에서 총 17개의 신생공간이 이합집산한 장면은 개별 공간들이 문득 현실의 중력에 붙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별 공간들은 그간 자체적으로 진행한 전시나 레지던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축적한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각각의 구간을 점유했지만, 정작 열거된 작업들은 공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일정한 범주로 묶이지 못한 채 다소 산란하게 뒤섞여있다. 이는 단순히 신생공간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컨텐츠들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간 공통의 플랫폼이라는 착시 속에서 이들이 어찌됐든 동질적인 대상으로 간주됐으며 그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각자가 잃어버린 접촉면을 암시하거나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서울 바벨>이 마치 신생공간 플랫폼의 물리적인 잔해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성의 감각은 정확히 무엇을 지향했는가? 우리는 이를 선뜻 캐묻지 못한다. 신생공간은 세대교체를 가속화하기 위한 유효한 방편이었을 뿐 그 이후의 대안까지 선취해낸 영구적인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바벨> 전시 전경 일부

 

앞선 <굿->를 통해 신생공간 자체의 동력이 완결됐다고 회자되는 이유는 그간 명시적인 교류가 없었던 개별 공간들이 연계된 채 굿즈라는 조형적인 단위를 공통의 언어로서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일련의 작업들을 재구성하며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신생공간은 여전히 잔존하며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의 목록은 앞으로도 갱신되겠지만 모두가 예감하듯 2015년 자체는 결코 재연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반드시 세워야한다면, 시작점은 다소 모호하되 2015년이 마감된 바로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소성의 압력을 견디며 반복한 모의실험의 잔여들은 신생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징후인 동시에 이후의 시간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지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앞선 정보량은 일종의 경험치로 누적된다. 지도상의 좌표들을 억지로 작도하는 대신 공간을 가상의 계정과 연동시킨 채 서로에게 접속하기를 반복하면서, 물리적인 토대와 중력은 점차 당연한 전제가 아닌 공간에 부속된 레이어로 변화한다. 결국 공통의 플랫폼이 걷힌 자리에서 헛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공간의 위상 자체다.

 

오픈베타 형식의 전시는 단순히 미완성의 결과물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온전히 합성되지 못한 작업의 파편들을 그 자체로 유지함으로써 서로를 가리키는 링크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공통의 플랫폼을 잃어버린 개별 공간들은 링크의 절단면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과 연결된 명시적인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링크의 관성에 따라 현실의 거점에 정주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한 번 정보량으로 희석된 뒤 내뱉어진 공간은 데이터 흐름 속에 휩쓸리며 어긋난 관계들을 일종의 외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랜더링이 덜 된공간은 스스로를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환원한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링크의 방향성은 이제 공간의 내부로 수렴하며 기존의 공간성을 벡터의 관계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공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며 조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 대신 재차 오픈베타를 가동하여 각각의 파편들을 필요에 따라 배치하고 때로는 어긋난 방향성을 유도하며 이전과는 다른 공간 경험을 연출해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더불어 각종 스마트 기기를 이용하여 데이터라는 불가해한 대상을 보다 편의적으로 운용하는 와중에 특정 공간을 포함한 일련의 사용자들이 체득하는, 갈수록 저하되거나 모호해지는 현실의 해상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보 이미지들은 여전히 과잉 생산되는가? 혹은 이러한 과잉은 여전히 사용자 주체에게 과부하와 정신착란을 유발하는가? 지역 괌성유망을 이어붙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월드 와이드 웹을 상상하던 90년대에 비해 데이터의 속도는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증가했지만, 어느덧 우리는 이를 따라잡기를 멈췄다. 더 이상 뉴미디어에서 상연되는 디지털 기반 이미지들의 산란한 풍경에 시각적으로 압도되지도 않고, 하이퍼링크를 매개로 펼쳐지는 페이지들의 관성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속도의 스펙터클 자체에 둔감하다. 과잉 생산은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매개되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뒤섞고 무너뜨리지만 이는 인터페이스 배후의 사건일 뿐, 사용자는 단지 손끝으로 밀어서없애거나 선택적으로 크롭할 뿐이다.

 

결국 산란한 감각은 영점으로 하향되며, 영점의 상태는 바로 우리가 처한 현재를 규정 짓는다. 설사 특정한 레이아웃 상에서 이미지들을 편집하거나 작도하더라도, 그와 연동하는 행위는 오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만 이루어질 뿐 정작 행위를 결정짓는 데이터 알고리즘, 이를테면 배후에 놓인 실재와의 관계는 부재한다. 그리고 이는 점차 굳이 현실을 뒤집어볼 필요도 여력도 없는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으로 귀결된다. 정신착란이 없거나 과잉에 대한 체감을 잃어버린 세계.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재현하는가?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은 인터페이스의 뒷면과 달리 우리와 거리낌 없이 동기화되는가? 그것은 사실 영점에 대한 지속적인 재확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용자는 저하된 해상도에 몰입하기 위해 애꿎은 눈을 비비기보다 차라리 표면 위에 또 다른 경험들을 가설해나가는 편을 택한다. 이제 인터페이스는 무감각이 아닌 표면 자체를 응시하는 새로운 관점과 각도들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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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