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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의 입출력, 곽이브와 윤향로의 사례>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각종 스마트 미디어와 매개된 사용자는 분명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가늠하지만, 물리적인 현실의 토대 자체는 그만큼 유동적이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 기반의 증강현실 게임인 포켓몬고의 티저 영상에서 (스마트폰 디바이스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최소화한 채) 현실과 고스란히 합성된 게임 인터페이스로 각종 포켓몬들을 포획하는 장면은1), 굳이 발매 이후 실제 플레이의 감도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해당 영상을 접한 대다수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을 증강현실의 확장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증강현실이라는 수사는 현재 우리가 일상 차원에서 동기화한 사용자라는 정체성을 부연하는 데 어느 정도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단 이때의 증강은 현실감을 교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디스플레이의 형태가 아니라, 스마트 미디어가 현실의 풍경을 포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사용자의 내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의도치 않은 오작동에 가깝다.


무엇이 어떻게 오작동하는가, 라는 뒤이은 질문은 디지털 환경을 의식하거나, 그것을 나름의 표준으로 삼거나, 포스트 디지털이라는 모호한 담론 속에서 공회전하다 튕겨져 나온 파편들을 뒤늦게 재료로 주워섬기거나, 설사 열거한 사례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더라도 다중적인 사용자 계정들과 연계된 채 두서없이 전개 중인 이미지-서사와 병행하는 일련의 미술 작업들의 접점을 암시한다. 당대의 미술을 통해 굳이 그러한 오작동의 징후를 가늠하려는 이유는 내가 사용자인 동시에 작업의 생산자 또한 어쩔 수 없이 사용자를 겸하기 때문이다. 미술이 여전히 무언가 재현해야 된다면, 이는 사실주의의 오래된 규약에 따라 웹상에 유통되는 가난한이미지를 단순히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거나 열화한 이미지 자체를 프레임 삼아 쳐다본 현실을 반영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사용자(이자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을 탈착함으로써 새로운 조형의 단위를 모색해나간다. 앞선 오작동의 정체는 그러한 시도들의 느슨한 교차범위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은 결국 특정한 이미지가 가상의 인터페이스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좌우된다. 이를테면 여타의 편집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시각적 패러미터는 원본 이미지에 투영된 실제 구성물들에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표면상에 각종 효과를 적용할 뿐이다.2) 그런 의미에서 윤향로의 <스크린샷> 연작은 마법소녀물의 특정 장면에서 주인공이 방출하는 에너지 효과를 줌인해 일부만을 발췌함으로써 원본 아니메나 해당 시퀀스의 맥락 등은 모두 소거한 채 오로지 표면으로부터 불거진 듯한 산란한 시각적 패턴만을 유사 회화로서 제시한다. <스크린샷>의 패턴 자체만으로는 어떠한 전사前史도 추론해낼 수 없다. 이러한 선택은 마치 이제 더 이상 이미지가 생산된 실제 맥락이나 의도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애초에 그것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적어도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인터페이스 기계에게는 부재하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샷의 형식이지 내용이 아니며, 방출되는 에너지는 스샷의 우발성과 다름없다.


<스크린샷> 연작이 일관되게 고수하는 미시적 레벨은, 일단 디지털의 권역에 속한 이미지는 원본의 위상과 무관하게 레이아웃 상에서 다양한 배율로 조절하거나 일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유동적인 시점 변환의 과정에서 이미지 자체가 얼마든지 픽셀 차원에서 망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윤향로는 편집 툴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는다. 작가가 확보하고 있는 사용자의 권한은 이미지 자체를 부러 관통하지 않는 표면상에서의 제한된 전개가 어떻게 이미지를 왜곡하고 때로는 의미론적 가치마저 무시하는지, 무엇보다 이러한 수순들이 열화의 한 방식이라면, 기꺼이 열화함으로써 어떻게 회화와 유사한 순간을 도출해낼 수 있을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때의 유사 회화라는 전제는 미국 코믹스나 일본 고전 만화와 같은 낯익은 대중문화 레퍼런스들을 재료 삼은 이전 작업들에서도 주지되는데, 이때의 회화적 화면은 커버 이미지에서 인물들을 소거함으로써 미장센을 강조하거나 만화의 동작선들을 발췌해 재조합하는 등, 이미지에 개입하고 있는 사용자의 존재가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 혹은 이때의 사용자는 편집 툴을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도구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면 <스크린샷> 연작에서는 사용자와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이 혼선되며, 앞선 거리감이 일순 무효화된다.


윤향로, Screenshot 3.02.24-1, 2017, Acrylic on canvas, 116.8 x 80.3 cm


<스크린샷>에서 사용자는 디지털 이미지의 시점에 얼마간 몰입하거나 최대한 밀착함으로써, 맨눈으로는 볼 수 없을 이미지-표면의 세부에 천착한다. 그 결과 드러나는 것은 방출 에너지를 과도하게 확대하고 이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포토샵 브러쉬처럼 번진 망점과 궤적들, 두서없이 중첩된 레이어들의 위계와 같은 디지털의 질감이다. 윤향로는 이를 재차 회화로 옮김으로써 디지털과 매개된 당대의 조건에 수렴할 만한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 결과가 실제 편집 툴에서 작동하는 효과들과 얼마만큼 유사한 지 대질해볼 필요는 없다. 일련의 작업들은 편집 툴에 열거된 패러미터의 세목들을 일일이 고려해 얻어낸 정교한 결과값이 아니라, 유사 회화를 맹목적으로 지향하며 열화를 거듭한 이미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동기화한 사용자는 디지털의 조형성에 통달한 전지적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인터페이스의 역학에 순응함으로써 우발적으로 망가지는 이미지의 목격자에 가깝다. 이러한 수동성이 원본을 유사 회화라는 자의적인 이미지로 희석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한 결과인 지, 작업과 별개로 대다수 사용자에게 보편적으로 그어진 한계인 지는 불분명하다. 어찌됐든 우리는 전자의 결과를 통해 후자의 조건을 유추할 수 있다.


이처럼 <스크린샷>이 디지털의 권역을 불안정하게 활공하다 임의로 정한 기착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본질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구간이다. (물론 이는 윤향로를 포함해 디지털 환경을 작업의 토대로 삼거나, 각종 편집 소프트웨어를 작업 도구로 삼아 전시공간을 점유해야하는 대다수의 작가들이 내리는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작가는 사용자로서 목격한 이미지의 표면을 회화적 오브제를 연출하듯 캔버스 위에 빈틈없이 도포함으로써 디지털의 질감을 불완전하게나마 물성화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유사 회화의 이미지를 카페트처럼 직조하거나 라이트 박스로 조립하는 등, 원앤제이+에서의 개인전 이전에 선보인 <스크린샷> 연작의 일부는 자연스레 동일 이미지를 다양한 물리적 판본으로 리부팅시키는 모의실험처럼 독해된다. 이 모두는 결국 (작업을 매개로 새로운 회화적 도구의 사용법을 가늠해보듯) 회화 차원에서 전개할 만한 새로운 조형적 단위를 모색하는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미지는 단순히 캔버스에 투사된 추상적인 평면이 아니라 캔버스를 감싸고 있는 표면으로 외화하고, 디지털 질감과 결코 일체화될 수 없는 아크릴 물감의 이질성은 이미지-표면이 현실로 이전됨으로써 두드러지는 (초평면의 관성과는 대비되는) 굴곡으로, 캔버스라는 오브제는 현실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출력하기 위해 오작동하는 일종의 물리적인 인터페이스로 전유된다. <스크린샷>은 일련의 편집 툴에서의 시각적 패러미터가 오로지 표면상에만 관여한다는 전제를 고수한 채, 발췌한 이미지-표면에 회화를 매개로 한 질감과 중량을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샷의 결과물들은 단순한 낱장이 아니라 현실의 중력을 수용하며 랜더링을 거친 일련의 캔버스 오브제로서 혹은 묵직한 표면으로서 나열된다.

 

한편 취미가 2층에서 진행한 곽이브의 <역할 part> 프로젝트는 결국 하나의 회화로 압축해낸 <스크린샷> 연작과 달리 이미지들이 일시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 자체를 제시한다. 각각 다른 그래픽 이미지가 출력된 A1사이즈의 프린트들은 바닥에 무방비하게 놓여있거나, 액자 속에 담긴 채 진열되거나, 공간 중앙에 놓인 장방형의 구조물에 일정한 군집을 이룬 채 달라붙어 있는 등, 뚜렷한 규칙 없이 배분되어 공간 속에서 느슨한 얼개를 조성하고 있다. 그러한 풍경은 얼핏 그림 카드들의 무작위한 배열 속에서 우연찮게 들어맞는 조합을 찾아내는 게임 같기도 한데,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프린트들 사이의 관계를 억지로 작도해서 게임을 단판에 끝내는 것이 아니라 프린트가 낱개로 놓여있든 일정한 군집을 이루고 있든 간에 어떠한 유의미한 이미지 조합도 형성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구름, 커튼, 유리판, 그리드와 그물망 패턴, 그 외의 기타 자재들은 (실사의 부분적인 캡쳐본에 가까운 구름 이미지를 제외하고) 최대한 단순화한 그래픽 이미지로 번안되어 프린트 상에 압착되어있다. 도시적 건축의 표면이나 유리창 같은 자재들을 은유하는 납작한 이미지를 출력해 제시했던 작가의 <면대면> 연작의 맥락 속에서 고려해보면, 앞서 열거한 프린트들의 목록은 결국 취미가라는 공간을 작가가 일관되게 고수하는 이미지의 시점으로 포착하거나 연상해낸 결과물인 셈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미지가 출처 삼은 공간의 특정성이 무엇인지는 오히려 모호해지는데, 이는 작가가 대면한 실제 공간이 순전히 프린트라는 레이아웃이 부과하는 관성에 부합하게끔 도식화됨으로써 현실의 정보값을 잃어버린 채 몇 가지의 단면들로 파편화됐기 때문이다. 곽이브는 이처럼 이미지의 시점을 경유해 주어진 단면들을 독자적인 단위로 삼아 원본으로서의 물리적 공간, 이를테면 취미가의 한 구간을 점유해나간다. <스크린샷>에서의 스샷혹은 원본의 (과도하게 확대된) 단면이 결국 현실을 향해 특징적인 회화적 오브제로 외화했다면, <역할 part>는 그보다 가벼운 중량을 지닌 채 역으로 현실을 이미지 차원에서 수렴하는 동시에 무력화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일련의 단면들은 공간 속에서 작가의 자의에 따라 군집하거나 무방비하게 흩어지며 나름대로의 조형적 질서를 이루고 있다.


<역할 part> 프로젝트 전경, 취미가 201호 


여전히 <역할 part>를 일종의 카드 맞추기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는 불연속적인 이미지들의 배열 속에서 실제 공간의 해상도를 짜 맞추려고 하겠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원본으로 삼은 공간은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에게 자신의 표면적을 기꺼이 내어줌으로써 다소 무미건조한 바탕으로 전락한다. 곽이브는 스마트 미디어나 디지털 환경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역할 part>가 이미지를 매개로 특정 공간이나 대상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이를테면 인스타그램에서 일상 풍경의 타임라인을 단편적인 이미지들의 그리드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방식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후자에서 중요한 것은 업로드된 단편들이 사용자가 속한 일상의 전체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기 위한 일부가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불연속적인 순간들로 환원시키고 이를 스냅샷의 형식으로 포착해 나열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곽이브가 탈착한 이미지의 시점은 동질적으로 구조화된 특정 공간을 여타의 단면들로 발췌함으로써 현실에서와 다른 맥락을 점하되, 그 결과가 투영된 프린트의 얇은 물성으로 말미암아 인스타그램 이미지와 달리 최소한의 물리적인 접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프린트에 코팅된 매끈한 표면은 관객의 시선을 온전히 수렴하는 대신 공간 내에 밝혀진 조명을 포함한 주변의 잔상들을 은연중에 되비추며, 프린트 외부의 현실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가 불화하는 순간을 연출한다. 이를테면 유리판이나 커튼이 드리운 창문의 이미지가 단순한 그래픽의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가상의 표면은 실제 코팅지의 물리적인 표면과 애매하게 중첩된 채 이미지의 안팎에서 현실을 차단하고 있는 셈이다. 이로써 명확해지는 사실은 <역할 part>가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는 출력된 결과물에 불과하며, 어떤 관객이나 사용자도 더 이상 그 너머로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미지를 매개로 한 물리적인 공간의 편집 혹은 재구성은 프로젝트가 개막한 시점에서 이미 완료됐다. 이미 완료된 게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선별된 내용의 프린트를 필요에 따라 추가로 출력하여 이제는 이미지와 무관해진 물리적인 공간 위에 덧붙이거나 프린트 자체를 독립적인 단위로 삼아 주어진 배열을 바꿔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역할 part>가 점유한 취미가의 한 구간은 원본으로서의 현실과 그것을 파쇄시킨 이미지의 얼개 사이의 분기점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곽이브와 윤향로가 최근에 선보인 작업들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두 작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염두하고 있는 평면이라는 개념이 한때 모더니즘의 서사 속에서 나름대로의 내적인 완결성을 지닌 채 존재했던 회화적 평면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에서 평면은 그것이 회화의 형태로 반복되든 프린트로 얄팍하게 출력되든 선택한 매체 자체로부터 비롯한 독자적인 특성이라기보다, 현실의 특정한 시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감각적인 차원에서의 불협화음과 일시적으로 동기화하기 위해 취사선택한 일종의 레이아웃에 가깝다. 문제는 이때의 레이아웃이 특정 작가가 전제하고 있는 사용자의 경험치 혹은 디지털과 어떤 식으로든 연루된 이미지 재료를 반영하기 위해 조절되는 과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서 통용되는 하나의 규약이자 조형적 단위로서의 평면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로 외화되는 순간 부과되는 물리적인 하중과도 일맥상통하며, 디지털의 관성을 미술 차원에서 단순히 의태하거나 모사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시도인 지를 재차 상기하게끔 한다. 어찌됐든 디지털을 시작점으로 해 몇 가지 상이한 차원에 걸쳐있는 이 시각적 다이어그램은 바로 그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전히 어떤 이미지를 지향하고 있다.

 

반대로 그 어떤 이미지에 의해 부단히 조율되고 어긋나는 과정이야말로 서두에서 언급한 오작동의 정체이자, 어딘지 모르게 망가진 듯한 이미지와 해상도가 재생산되는 이유일 것이다. 설사 특정한 작업으로 외화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러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시점, 이미지를 매개로 한 시점을 탈착한 채로. 미술이 과연 이러한 새로운 영점과 무관할 수 있을까? 반드시 디지털을 소리 내 읊지 않더라도, 어떻게 이에 부합할 것인가?

 

한편 레이아웃으로서의 평면이 현실에서 임의로 제시되는 순간 관객의 시선을 되비추며 위화감을 조성하거나 자신이 기입된 특정한 매체를 거부하는 제스추어를 취하며 불투명한 표면으로 환원될 때, 우리는 이를 통해 점차 보편화하고 있는 시각적인 오작동이 평면의 질감 자체를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표면이란 변화한 미디어 환경의 징후로서의 이미지를 사용자로서 입력하고 이를 미술의 언어를 다루는 작가로서 출력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오작동의 지점이자 새로운 평면성이 도출되는 순간이고 주어진 매체를 갱신할 수 있는 여지인 셈이다. <스크린샷> 연작과 <역할 part> 프로젝트 사이의 느슨한 교집합 속에서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 편집 도구, 평면, 레이아웃과 같은 단어들의 순차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당대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작가(이자 사용자)의 권한 내에서 불화하는 방식 자체다. 이제 표면이라는 인터페이스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 https://www.youtube.com/watch?v=IZ2L2sbYAj8

2) 이케아 홈 플래너 같은 어플리케이션에서 원본의 사진 속에 놓여있는 2d의 사물을 전방위로 조작 가능한 3d 객체로 변환시켜주는 기능 또한 일단 사물 이미지의 표면을 포착하고 사전에 확보한 데이터뱅크에서 그와 관련한 텍스처를 추출해 이를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엄밀히 말해 이미지의 표면으로부터 연상해낸 3d 객체인 셈. 이는 캐릭터 피규어가 제작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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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