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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의 두 번째 기획, 《공간을 투사하는 몇 가지 방향》 포스터

(https://twitter.com/ble_exh/status/1142376396062257153)

 

음악을 듣는다는 경험은 시대의 변화,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발맞춰 바뀌어 온 경험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분야에 있어 가장 유명한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소니가 1979년에 출시했던 워크맨(Walkman)을 빼놓을 수 없다. 워크맨은 헤드폰을 꽂아 듣는 카세트 레코더로, 특히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여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말할 것도 없이, 워크맨의 특징은 소형화된 장치를 통해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동적인 청취 환경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진 상태로 청취하는, ‘혼자 듣기(Listening to music alone)’ 경험은 이전의 청취 경험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경험의 양식이었다.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의 중요한 전신 중 하나로서, 워크맨은 음악을 함께 듣는 사회적 행위로부터 분리해, ‘모바일 음악(Musica Mobilis)’의 청취를 보편화했다. [각주:1]

 

하지만 애플이 선보인 아이팟(iPod) 2005년을 기준으로 미국 시장에서 7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나아가 2007 1억대를 누적 판매하면서 역사상 가장 빠르게 판매된 음악 재생장치라는 기록을 세웠을 때, 모바일 음악과 그 청취 경험은 새로운 대표자를 찾은 셈이었다.[각주:2] 아이팟으로 대표되는 MP3플레이어에는 워크맨, 그리고 CD플레이어와 같은 음악 재생 장치와는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저장 용량의 차이였다. 만일 MP3 포맷으로 압축된 음원 파일 하나가 평균적으로 4MB 정도의 크기를 갖는다고 가정한다면, 최대 80GB의 용량을 지원했던 5세대 아이팟에는 약 2만개의 음원이 저장될 수 있었다. 이것은 거대한 차이로, 곧 음악 미디어가 저장되고 유통되는 방식을 전환하는 사례였으며 뿐만 아니라 음악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각주:3]

 

하지만 아이팟은 그것이 받은 열광만큼, 열렬한 반대와도 부딪혀야 했다. 이 반발심은 아이팟 자체에 대한 것이자, 동시에 MP3플레이어가 제공하는 청취 경험 전반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비교적 열정적인 취미에 속하는 음악 듣기의 관습 안에서, 앨범이라는 제한된 단위를 통해 제공되는 경험과 수집 행위는 꽤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허나 약 2만개의 음원을 손바닥 크기의 모바일 미디어 안에 집어 넣어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것은 곧 음악 듣기의 관습적 청취 환경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이 취미의 참여자들에게 그다지 좋은 변화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열정적인 참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이팟을 비롯한 MP3플레이어에는 부분적이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음원이 MP3 포맷으로 손실 압축될 경우, 디지털 음성 신호를 고효율 압축하는 과정에서 고주파 성분을 일부 누락하게 되는데, 이때 평평한 소리상과 얄팍한 질감을 갖는 소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레트로마니아』를 지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MP3 음원 특유의 소리를 쪼그라든 소리라고 불평하면서, 같은 음원을 아이팟으로 대충듣다가 CD를 통해 청취했을 때 드럼 소리의 질감 같은 것이 얼마나 생생하고 또 입체적으로 느껴지는지, 놀라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MP3플레이어가 제공하는 청취 경험은 그 속성 상 어느 정도 훼손된 경험일 수밖에 없으며, MP3 포맷이 갖는 기술적 한계는 해상도 높은 음악적 경험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각주:4] 나아가, 대부분의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는 소형 라우드스피커, 혹은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제공하고 있는데, 만약 생생하고 실감나는 드럼 소리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헤드폰이나 이어폰 등의 장치를 경유해 오디오 신호를 청취하게 된다면, 음상이 머리 내부에 맺히는 음상 내재화 현상이 발생하고, 음향의 입체감과 공간감이 크게 떨어져 현실감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탓이다.[각주:5]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는 청취 경험은 음악 듣기의 원칙에 무관심할뿐더러, 나아가 질적으로도 좋지 않은 경험 양식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모바일 음악은 음악을 경험하는 나쁜범주에 속한다는 의견이 가능할 수 있다.

 

소형 미디어 플레이어와 헤드폰의 결합은 음악 듣기의 조건을 공간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개인은 도심에서, 대중 교통에서, 회사나 카페에서 음악을 듣고, 청취 경험은 일종의 공간 경험으로 전환된다. 헤드폰을 통해 혼자 듣는음악은 시각적 경험과 공간적 경험 위로 청각적 경험을 겹쳐 올리는데, 이것은 공간을 전유하여 심미화하고, 그러므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끔 이끈다. ‘혼자 듣기는 공적 공간을 사유화(Privatization)하는 장치이자 동시에 음악을 사유화하는 장치가 된다.[각주:6] 만약 모바일 음악이 음악 전반에 걸친 기능 전환을 이끌어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과장이다. 그러나 음악 듣기를 공간 경험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 드럼 소리가 덜 입체적으로 들린다는 문제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모바일 음악이 음악 경험의 나쁜범주에 속한다는 의견은, 어쩌면 그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불만일 수 있다. 더군다나, ‘혼자 듣기를 통한 모바일 음악의 경험이 그저 고립된 경험이자 폐쇄적 경험에 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음악학자 호소카와 슈헤이(細川周平)1984년에 발표한 글 「워크맨 효과(The Walkman Effect)」에서, ‘혼자 듣기의 경험을 분석하며 영화 속 한 장면을 인용한다. 영화에서, 호감을 갖고 있는 누군가와 같은 파티에 참석했음에도, 원체 수줍음이 많아서 말을 걸기가 어려웠던 어떤 청년은, 상대방에게 헤드폰을 씌워주고 음악을 나누어 듣는 것으로 소통을 대신하려 한다. 고립된 청취를 가능케 하는 헤드폰 덕분에, 두 청년은 파티장에 울려 퍼지는 빠른 음악과는 다른, 더 느리고 보다 로맨틱한 음악을 나누며 그들만의 리듬으로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혼자 듣기는 세상의 리듬과는 분리된 채, 둘만의 리듬에 맞춰 춤추며 교감할 수 있는 비일반적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7] 이렇게 음악을 나누어 듣는 두 청년은 이후 다양한 대화를 나눌 것인데, 그때 드럼 소리가 덜 입체적으로 들린다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이야깃거리는 아닐 것이다.

 

워크맨과 아이팟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스마트폰이라는 융합적 미디어가 모바일 음악을 재매개하기 시작하며, ‘혼자 듣기와 커뮤니케이션은 주목할 만한 음악의 기능 중 하나로 발전했다. 일상 공간을 심미화하는 고립된 듣기 경험이 네트워크 케이블을 타고 연결되며, 전지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의해 매개된 모바일 음악은 새로운 형태의 나쁜문제를 만들어낸다. 스마트폰이 음악을 듣는 보편적인 도구로 부상함에 따라, 음악이 유통되는 산업의 방식 역시 큰 변화를 겪었는데, 이 변화의 중심부에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제 대부분의 음악이 유통되는 창구이며, 편리하고 유동적인 청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플랫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청취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음악적 경험을 산산조각 내는 주범이다. 카세트 레코더, CD플레이어, 나아가 MP3플레이어의 시대에도 저장을 통한 감상이라는 청취 경험은 어떻게든 유지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스트리밍의 시대를 맞아 보다 확실하게 분산되기 시작한다. 저장-감상-(수집)의 반복으로 청취의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고, 그것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갈무리해 저장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음악 듣기의 열정적 참여를 구성하는 언어와도 같았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음악을 듣게 된다면, 실재하는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것은 서버의 접속 권한을 획득하는 일로 대체된다. 또한, 대부분의 스트리밍 플랫폼에는 정확도 있는 알고리즘을 통해 추천 음악을 꾸준하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특정 스트리밍 플랫폼에 사용자로 정착하고자 했을 때, 해당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그의 음악 소비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나와 같은 경우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이후 주변인들의 음악 소비가 묘하게 균질화되었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물론 모든 특별한취향은, 사실 그다지 특별한경우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를테면 시티팝유행의 배후에는 타케우치 마리야(まりや)가 부른 플라스틱 러브(プラスティックラブ)와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맺는 관계가 존재한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소수 마니아 중개자의 존재 없이 특정 음악과의 우연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했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 효과는 뛰어났다. 아무튼 스트리밍 서비스가 미치는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라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수천만 개의 음원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의 특성은 결국 음악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소환하게 만든다. 특히 스트리밍 서비스는 음악의 소비를 주요 플랫폼 위주의 경제로 재구축하면서 산업의 구조를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단일 플랫폼은 더 큰 권력을 가지며, 노출이 어려운 독립적 음악의 유통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를 반복한다. 이것은 쥬크박스, 그리고 공영 라디오의 시대에서부터 지속해서 되풀이된 투쟁의 가장 최신화된 모델로서, 음악의 가치, 그리고 공정한 거래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음을 던지도록 한다.[각주:8]

 


타케우치 마리야(まりや) - 플라스틱 러브(プラスティックラブ)


 

하지만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의 목록을 늘어놓고 비교해보면, 스트리밍 서비스에 의해 매개되는 음악 듣기의 경험 역시 서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표적인 플랫폼을 애플 뮤직과 사운드클라우드, 그리고 유튜브 등으로 나누어보자. (스포티파이는 2019년 현재 국내에 정식 서비스되고 있지 않으므로 제외한다.) 애플 뮤직의 경우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위에서 예로 들었던 스트리밍 서비스를 대표한다. 하지만 사운드클라우드, 그리고 유튜브의 경우 이와 다소 상이한 기능을 갖는 대형 플랫폼으로, 제공하는 경험의 양식 역시 얼마간의 차이를 갖는다.

 

연구자 정명철과 오준호는 사운드클라우드가 제공하는 청취 경험을 분석하기 위하여, 뮤지션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이 굉장히 특정적인 방식으로 전개했던 해프닝에 대해 다룬다. 에이펙스 트윈은 사운드클라우드에 ‘user48736353001’이라는 이름의 익명 계정을 생성한 뒤, 90년대 초반에 제작했던 미발표 음원을 112개 업로드했다.[각주:9] 철저히 익명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구도 이 디지털 소리 뭉치들이 에이펙스 트윈의 작업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상한 음원의 정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곧 밝혀지게 되었는데, 음원을 다운로드하여 관찰하면 제작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힌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음원의 태그에는 에이펙스 트윈의 약칭인 ‘afx’가 기재되어있었고, 또 제작자명에는 그의 본명인 리처드 데이비드 제임스(Richard D. James)’가 남아 있었다. 음원의 정체를 추측하려는 사람들은 머지 않아 이 힌트를 알아챘고, 댓글을 남겨 그가 실제 에이펙스 트윈이 확실한지 떠보는 등 추리를 시작했다. 사운드클라우드는 유통 업체를 거치는 복잡한 음원 등록 절차를 포함하지 않는,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플랫폼이었고, 뮤지션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기 때문에 음악의 유통이 하나의 게임처럼 전유될 수 있었다. 정명철과 오준호는 에이펙스 트윈이 벌인 해프닝을 댓글과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업로드 등, 사운드클라우드의 기본 기능을 특정적으로 활용하면서 구축한, 독특한 형태의 피드백 구조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이것은 음악의 수용자들이 참여적으로 청취의 문법을 개발한 사례로,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대에 음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양상에 비평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례로써 평가될 수 있다.[각주:10]


 

user18081971(Aphex Twin) - 14 07 B


 

보다 공개적인 형태의 영상 기반 플랫폼으로서, 유튜브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의 생태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유튜브는 영상의 기록과 저장, 공유가 용이해지고 활발해지면서, 특히 기능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언제나 필요 이상의 정보가 축적되어있는 데이터베이스로서, 유튜브는 영상 미디어뿐 아니라 음악의 소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적인 수집가들이 음악 아카이브를 유튜브에 적극적으로 방출하기 시작하면서, 희귀한 과거의 음원이나 나만 아는 음악들의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던 것이다. 이는 지난 여러 시대가 동시에 펼쳐지는과거의 수평적이고 선택적인 애호 현상을 만들어내며, “기념행사에 열광하는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각주:11] 그러나 초기 유튜브가 영상이나 오디오 등, 특정 미디어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는 참여형의 아카이브와 같았다면, 이제 유튜브는 수많은 인구가 동기화된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가깝게 변화하는 중이다. 그에 따라 음악의 소비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는데, 유튜브에서는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발전하고 있는 음악적 커뮤니케이션의 사례가 존재한다. 보통 -파이 힙합(Lo-fi Hip hop)’, 혹은 칠합(Chill hop)’ 정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양식이 바로 그것으로, 이 장르는 몇몇 유저들이 24시간 동안 쉼 없이 송출하는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이 유사 라디오 채널에서는 거의 흡사한 분위기와 멜로디를 갖는 -파이한 질감의 서정적인 인스트루멘탈 힙합이 끊김 없이 흘러나온다는 점이 특징인데, 어찌 보면 이것은 일반적인 라디오 형식을 확장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각주:12] 그러나 내 생각에, -파이 힙합 채널과 라디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제는 빛이 다 바랜 이야기지만, 보통 라디오 채널에 대해 기대하는 것으로는 DJ의 숙련된 토크와 특별한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히트곡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파이 힙합의 세계에는 특별한 플레이리스트도, 그리고 히트곡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로-파이 힙합에는 언제, 어느 때 접속해도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비슷한 질감의 음악들과, 그리고 유튜브의 스트리밍 기능이 제공하는 라이브 채팅이 존재한다. 이 라이브 채팅에서는 항상 거의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평범한 라이브 채팅을 보다 특징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제공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유사 공동체적 성격이다.

 


‘ChilledCow’의 ‘로파이 힙합 라디오 – 휴식과 학습을 위한 음악(lofi hip hop radio - beats to relax/study to)’


 

이 놀라울 정도의 평범함은, -파이 힙합을 특별한 장르로 만든다.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 지역을 갖지 않는 장르가 존재했던 적이 있을까? 70년대의 펑크, 80년대의 힙합, 90년대의 그런지, 00년대의 그라임까지, 모든 장르는 지역을 기반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마침 듣고 있던 로-파이 힙합 채널의 라이브 채팅을 약 5분 정도 구경한 결과, 거기서는 영어, 태국어, 핀란드어, 러시아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 최소한 5개의 언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어쩌면 로-파이 힙합은, 영미권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북유럽과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른 시차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첫 번째 대중음악 장르일 수 있다. 히트곡도, 시차도 없이, -파이 힙합은 디지털 네이티브의 시대와 어울리는 기묘한 평등주의를 실현한다.[각주:13] 하위문화의 시대에 장르란 언제나 반동을 동력 삼아 출현했다. 하지만 로-파이 힙합의 경우, 반동을 통해 성립된 장르라기보다는 최적화에 따른 결과물처럼 보인다. 언제든, 필요할 때, 이어폰을 통해, 균질한 정도의 경험과 커뮤니케이션을 제공하는 장르로서, -파이 힙합의 라이브 스트리밍은 스마트폰 시대의 모바일 음악 청취 환경을 대표하는 사례가 된다.

 

청취 경험과 그 환경의 변환을 되짚는 일은, 자연스럽게 음악의 기능이 어떻게 파생되고, 또 변화해 왔는지를 되짚는 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음악은 적극적인 청취 경험을 유도하는 주요한 단위 중 하나지만, 청취 경험의 유일한 단위는 아니다. 청취 환경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훑어보기를 원한다면대중음악 바깥의 영역에서 청취 환경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침 2019, 김동용, 서민우, 주윤탁 등은 모종의 협업을 위하여 BLE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BLE청취 환경 구축하기(Build a Listening Environment)’를 줄인 것으로, 이들은 새로운 청취 환경을 구축하고, 청취 환경을 재설정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몇 차례의 공연을 선보였다. 이는 청취 경험을 유도하는 환경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채, 비평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함이었다.

 

BLE는 첫 번째 공연을 준비하며, 거의 선언적으로 보이는 서문을 발표했다. 서문은 실험 음악과 사운드 아트에 대한 의견에서 새로운 청각적 언어의 발명을 위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한다. 서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소음이라는 단어가 꾸준하게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서문에 따르면, 소음은 BLE의 목표, 청취 환경을 비평적으로 재설정한다는 목표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소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되짚어보고”, 소음에 대한 뒤늦은 검토를 시도하는 것까지, 소음이 무엇인지, 나아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차분하게 살펴보는 것은 프로젝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BLE가 소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며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소음은 단순히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일컬어지는 사전적 의미에서부터, 음악의 관습화된 질서와 거리를 두는 전위적 예술 형태를 지칭하기까지, 다양한 범주에 걸쳐 각기 다른 의미를 형성한다. 나아가 서문의 몇 가지 문맥을 읽는다면, 소음은 소리 그 자체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BLE는 이를 분명하게 해설하는 대신 빈 칸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서문에 따르면, 소음이 청각적 사유의 모델로서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소음이 소리의 물질성을 구체화하여 보여주는 방법이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에 기반하는 만큼, BLE의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의 물질성을 탐구하고, 또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BLE소리의 물리적 속성을 크기, 방향, 질감, 속도, 공간으로 나누어 공연으로 구현하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 소음은 특정한 물성을 지니는 조형적 탐구의 대상으로 재배치된다.[각주:14]

 

개체화된 소리, 혹은 소음이 비평적 청각성을 구사하는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이라는 질서 바깥의 타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소음의 추상적 성격 때문이다. 소음을 활용하여 음악적 범주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일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요한 기획 중 하나였다. 음악이라는 기성의 범주가 소리의 사용을 이미 점유하고 있었던 탓에, 소리를 탐구하기 위한 전위적인 예술은 음악과 지속적인 갈등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각주:15] 그렇기에 소리, 혹은 소음을 이용하는 예술의 양식은 음악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했고, 그것은 곧 소리의 물질성과 청취 환경을 탐구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콘서트 홀 안에서 작동할 필요가 없게 된 소리는 새로운 명명을 필요로 했고, ‘사운드 아트(Sound Art)’란 곧 이와 같은 필요가 누적된 결과였다. 다만 사운드 아트는 청각적인 것을 이용한, (음악이 아닌) 예술을 통칭하는 모호한 정의로서, 관습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예술의 형태를 정의하기 위한 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각주:16] 다양한 필요가 반영된 넓은 범주로서, 사운드 아트는 소음과 전위 음악뿐이 아닌, 공연 예술이나 시각 예술, 나아가 음악 자체까지 복잡하게 뒤섞이는 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사운드 아트는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수용하기에는 너무 임의적인 범주처럼 받아들여졌고, 사운드 아트라는 명명은 오히려 제도적이거나 학제적인 분류로서 최소한의 유효성을 가질 뿐이었다.[각주:17]

 

BLE의 서문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흥미로운 단어로, “조형성이 존재한다. BLE는 물성을 중심으로 소음을 해설하면서 청각의 조형성을 전면화하고자 했다. 이런 탐구는 청각 매체의 새로운 언어 발명을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인데,[각주:18] 허나 조형성의 사전적 의미는 조형 예술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BLE의 이와 같은 서술은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이 청각성과 청취 환경에 대한 비평으로 작동할 때, 시각 예술의 방법론과 어떻게든 엮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결과다.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이 음악적 질서와 분리되기 위해 비시간적, 공간적인 탐구를 진행했을 때, 시각성이라는 문제는 중요한 해당 양식의 구성 요소 중 하나로 등장할 수 있었다. 사운드 아트 특유의 혼란한 경계는 시각 예술의 방법들 역시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의 범주 중 하나로 포함할 수 있도록 했고, 실제로 사운드 아트는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경우만큼이나 전시의 방법을 거쳐 공개되는 경우도 잦았다.[각주:19] 그러나 사운드 아트가 시각성을 적극적으로 지시할 때, 그것은 사운드 아트의 모호성을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시각성과 청각성은 통합되기보다는 언제나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고, 그 분리는 쉽게 해결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역사 안에서, 시각성과 청각성이 항상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각성과 청각성 사이에는, 여러 분기에 걸쳐 간헐적인 흔적으로 남은 분절된 역사가 존재한다. ‘소리를 이용한 예술의 가장 중요한 전사로 손꼽히는 소음 예술(L'arte dei Rumori)(1913) 선언문의 발명자였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는 미래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의 시각 예술가들과 자주 교우했으며, 예컨대 플럭서스(Fluxus)의 경우, 그것은 시각성과 청각성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중요한 역사적 무대 중 하나였다.[각주:20] 허나 문제가 있다면, 이와 같은 사례 역시 온전히 청각성 그 자체에 대한 실험은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영화나 라디오, 그리고 축음기에 의해 생산되는 기술적 소리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 이전, 소리 자체는 예술적 대상으로 활용되지 못했고,[각주:21] 플럭서스는 시각성과 청각성이 뒤섞인 어지러운 무대였지만, 그 무대의 목표는 청각성, 그리고 시각성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플럭서스는 아방가르드 기획의 연장으로서, 미술과 음악, 나아가 예술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서 작동하고자 했다. 플럭서스의 중요한 개척자이자 참여자였던 존 케이지(John Cage)는 기본적으로 음악가였으며, 또 다른 참여자였던 딕 히긴스(Dick Higgins)나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 백남준 역시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당시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심지어 예술이라고도 불릴 수 없는 총체적인 부정을 연출해 커피잔이 세련된 조각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고, 아침의 키스가 어떤 연극보다 더 연극적일 수 있는[각주:22] 일상적 순간을 공격적으로 구현하는 일에 있었다.

 


〈INTONAMURI 100〉, 2013년 '소음 예술' 선언문 발표 100주년을 기념해 whats:ON? 페스티벌에서 복원된 소음 기계(Intonarumori)의 연주 실황.


 

사운드 아트는 음악, 그리고 시각 예술 사이에서, 나아가 시각성과 청각성 사이에서 작동할 필요가 있지만, 이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한 사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강력한 두 범주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기가 어려운 임의의 명명으로서, “사운드 아트는 오직 제도적 지원을 위한 카테고리로 쓰일 때나 유용하다는 비판적 입장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이것은 한국을 배경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에서 사운드 아트가 시각 예술 본위의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화이트 큐브 갤러리 공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시점은 보통 00년대 중반 즈음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자 이승린은 90년대부터 활동해왔던 한국의 노이즈 뮤지션들이 미술 제도 내부에서 모종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던 계기를, 00년대 이후 가시화된 예술의 다원화 현상으로부터 찾는다. 실제로 이 시점은 미술 제도 내에서도 서서히 인지되기 시작했던 특정한 종류의 미적 경향이 다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공적 승인을 거쳤던 시점과 거의 겹쳐지는 듯 보인다.[각주:23][각주:24]

 

2005,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민간 합의 기구 형태의 민간위원회로 전환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에 따른 개편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소위원회 분류에도 조정이 있었는데, ‘다원예술이 문학, 시각예술, 연극, 무용, 음악 등의 기초예술 분야와 동등한 부문으로 격상된 것은 이때였다. 그전까지 다원예술은 실험, 인디, 대안, 복합, 대중예술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집합적 용어로 다소 불분명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위원회는 개편을 계기 삼아 해당 범주를 제도적으로 체계화하여 그 특징에 맞는 지원 방식을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다.[각주:25][각주:26] 허나 제도적 정식화가 곧 의미 차원에서의 체계화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위원회는 다원예술을 생성 중인 예술, 부상하는 예술, 기존의 관습과 관행을 넘어서는 예술이자 순수/응용/대중 등 전통적 구분을 넘어서는 새로운 예술창작활동이며 현재의 주류 예술이 아니라 잠재적 예술로서 정의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특정한 예술 범주에 대한 정의라기보단, 창작 경향에 대한 추상적 서술에 가깝게 보였다.[각주:27] 다원예술은 공적 영역에서 제도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모호한 범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제도적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작업이 공연되고 전개되는 현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원예술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꼽힐 수 있을 《스프링웨이브》(2007) 같은 경우, “국제다원예술축제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행사의 정체성을 표방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조화된 예술지원 양식에 맞추기 위하여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에 가까웠다.[각주:28] 이처럼 모호함이 강한 범주로서, 다원예술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었고, 범주 차원에서 근본적인 모호함을 갖고 있었던 사운드 아트 역시 이 필요를 반영했다.


《스프링웨이브》(김성희·김성원 감독) 포스터 (디자인: 슬기와민)

(http://www.sulki-min.com/wp/springwave-poster-kr/)


하지만 화이트 큐브에서 작동하게 된 사운드 아트는 또 다른 어려움과 맞닥뜨린다. 다수의 증언에 의하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사운드 아트는 청각성이라는 영역을 재발견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관에서-작동하는-사운드-아트라는 틀에 가두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 시기의 중요한 참여자 중 한 사람인 류한길은, 몇몇 인터뷰와 글을 통해서 00년대 중반 미술관에서 전개된 큐레이팅이 대개 사운드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해있었음을 지속해서 지적했던 적이 있다.[각주:29][각주:30][각주:31] 화이트 큐브에서, 사운드 아트는 마치 시각 예술을 위한 부수적 자재인 듯 취급되고, 심지어는 하나의 배경음악처럼 제작되기를 요구받기도 했는데, 그 기반에는 청각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혹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은 같은 공간에 놓일 때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재한, 시각성 본위의 큐레이팅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도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뿐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공존한다. 화이트 큐브 공간은 시각적인 것을 위해 만들어지고 오래 사용되었으므로, 청각적인 것을 재배치하는 문법은 적용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화이트 큐브에서 이용되는 사운드의 경우, 종종 무언가의 장소(Site)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장소담론적 장소(Discursive Site)’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담론적 장소는 미술사가 권미원이 제도비판(Institutional Critique)’ 이후의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의 변화를 설명하며 제안한 것으로, 개념미술을 형식 차원에서 전유한 반시각적/비물질적 양식들이 구체적인 담론의 일부로 나아가며 공간을 텍스트화하고 담론을 공간화했던, ‘동시대적미술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다. 이처럼 담론을 장소 삼으며 미술 바깥으로 점차 확장된 미술은, 추상적 영역을 매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며 다양한 관계를 고안해내었는데,[각주:32] 이와 같은 문법은 사운드가 갤러리 공간으로 진입했을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어, 청각적인 것을 하나의 담론으로 장소화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운드 아트라는 명명에는 소리를 이용한 예술’, 나아가 청각을 이용하는 예술이라는 함의가 광범위하게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마치 시각 예술이 그러하듯, 대문자 범주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장르의 이름이 되었고, 그에 따라 이해가 과도하게 압축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어쩌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사운드 아트가 겪어야 했던 몰이해는, 이 압축 과정에서 파생된 매체적 멀미 증상과도 같다. 하지만 화이트 큐브에 도착해, ‘담론적 장소로서 위치 설정된 사운드에서는,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딜레마, 나아가 청각적인 것이 시각적인 것과 갖는 딜레마가 너무 쉽게 의미를 얻고 가시화된다. 이것은 화이트 큐브에서 작동하는 사운드 아트를 긍정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문제적인 지점을 만들기도 했다. 소리를 하나의 담론적 장소로 간주할 때, 그것은 음악과 시각 예술이라는 관습적 범주 사이에서, ‘소리를 이용한 예술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 긴장 상태를 우회한다. 다양한 예술의 양식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분야로서, 사운드 아트의 경계는 임의적이며 활용되는 양상 역시 때에 따라 달라진다.[각주:33] 사운드 아트가 작동할 때 갖는 모호성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지 못할 때, 그것은 시각성의 세계에서 청각성을 도구화하거나, 청각성의 세계에서 시각성을 도구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현재까지 꾸준하게 지속되고 있는 사운드이펙트서울(SFX Seoul)’의 첫 번째 전시에서, 디렉터 양지윤은 무의미하게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는 갤러리에서의 사운드 아트를 비평하고자 했다. 전시에서 발표된 서문을 통해, 양지윤은 갤러리 공간에서의 사운드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사례를 손꼽는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 공간은 방음 설비가 철저하지 못한 등, 청각적인 것을 다루는 데에 특화된 공간이 아니기에, 사운드 아트는 정상적인 경험이 어려운 상태에 놓이고는 했다. 갤러리 공간에 놓인 사운드 작업들은 영상 작업처럼, 사운드를 포함한 다른 작업에 의해 침략 당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헤드폰을 통해 송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양지윤은 이런 전시 방식이 사운드를 경험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조건이며, 나아가 청각적인 것이 갖는 어떤 종류의 특정성을 괄시한 전시 방식이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사운드가 근거하는 매체적인 몸체 중 하나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운드 웨이브의 떨림이 존재하며, 그렇기에 사운드 아트는 이 떨림을 가시적인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그 특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사운드 아트 전시는 현장에서 사운드의 웨이브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적 조건을 갖춰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양지윤은 사운드 아트를 소리를 매개로 한 예술 행위라고 정의한 뒤, ‘미디어 아트와 현대 음악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무엇이라는 해석을 제안하는데, 이것은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운드 아트의 폭넓은 정의를 보다 구체성을 가질 수 있게 좁힌 사례다.[각주:34] 이런 정리는 꽤 명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특히 미디어 아트라 통칭된 뉴미디어 기반의 미술 문법들이 명백히 부적절한 것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더욱 더 그렇다. 양지윤이 사운드 아트의 자리를 미디어 아트와 현대음악 사이의 어딘가에서 찾았던 2007-8, 미디어 아트의 문법은 사운드의 시각적, 매체적 구현을 위해 일반적이었다. 2000년대 중반 즈음 유행했던 미디어 아트의 특징이 잡다한 기술 매체를 장식처럼 활용하며 시각적 스펙터클을 구현하는 방법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사운드 아트 역시 그 방법을 공유했다. 기술과 사운드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계되었고, 이때 사운드는 그것이 작동하고 출력되는 방식을 장식으로 노출하면서 유원지형 감흥을 이끌어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이제 적절하게 보이지 않는다. 선진적 기술이 융합적 디바이스 내에서 비가시적으로 펼쳐지고 고안되는 현재, 테크놀로지의 작동 방식을 가시화하는 미디어 설치는 돌이킬 수 없이 장식적인 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운드 아트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특정한 범주 사이의 개념으로서 사운드 아트는, 종종 두 범주를 화해시키고 융합시키는 역할을 제안받기도 한다. 물론 시각성과 청각성의 융합은 긍정적인 비전이며, 지속해서 추구될 필요가 있는 사운드 아트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운드 아트는 언제나 두 범주를 합치고 화해 시켜 하나로 만드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사운드 아트의 중요한 매개물 중 하나이자 역사적 전사로도 꼽히곤 하는 소음 같은 경우, 고도로 추상화되어 모방적 음악의 질서 바깥에 놓이며, 그에 따라 불쾌한 것, 동시에 환영받지 못하는 것으로서 악명 높다. 소음은 여전히 사운드 아트의 지분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사운드 아트와 소음은 모종의 부정성을 공유한다. 사운드 아트가 무엇이라고 체계적으로 정의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장점도 단점도 아닌 정체성에 가깝다. 사운드 아트는 청각 인지와 청취 환경을 비평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기에 음악적 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청각적인 것을 담보 삼아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으므로 시각 예술의 방법론과도 멀어지고는 한다. 예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운드 아트는 여전히 중첩된 범주 사이에서 긍정으로, 또한 부정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도 시각 예술도 아닌 무언가로서, 사운드 아트가 갖는 모호함은 어떤 반발력과 같은 속성을 만들어낸다.

 

BLE가 조형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소음, 혹은 소리를 재구성하고 다시 인식하고자 시도할 때, 그것 역시 모종의 반발력을 포함하는 셈이다. 화이트 큐브에서 사운드 아트는 온전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화이트 큐브라는 시각적 공간이 부여하는 압력과, 시각성에 근거를 둔 큐레이팅이 만들어내는 이해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운드 아트가 화이트 큐브로 진입했을 때, 사운드 아트 역시 화이트 큐브라는 시각적 환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만약 시각적인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해 공간과 청취 환경을 매개하는 청각적 활동이 가능하다면, 그 모습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 혹시 BLE가 굳이 조형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각성을 환기하는 까닭은, 시각 매체가 청각성에 대해 무관심한 것만큼이나, 청각 매체 역시 시각성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진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BLE는 조형성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청각적 활동에 내재한 시각적 요소를 탐구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업의 핵심을 이루기도 한다.

 

2019년 결성된 뒤, BLE는 총 두 차례의 공연을 통해 각자 다른 주제를 다루었다. BLE(일종의) 서문을 통해 공개한 소음의 조형적 속성들, “크기, 방향, 질감, 속도, 공간과 같은 요소들은, 그 자체로 곧 공연의 주제가 되었다. 첫 번째 공연이었던 《음량, 공연장》에서는 공간과 크기라는 속성이 주제로 선택되었으며, 두 번째 공연인 공간을 투사하는 몇 가지 방향(이하 방향)에서는 방향이라는 임의적 속성에 집중하여 소리를 해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같은 탐구는 꽤 진지한 작업 방법처럼 보였지만, 여러 사정이 있었기에 공연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합주 연습실에서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이 장소는 공간, 그리고 방향과 같은 소리의 속성이 자연스럽게 감각될 만큼 여유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공연을 위해서는 몇 가지 설치와 장치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음량, 공연장》에서, BLE는 합주실을 4등분하는 암막 커튼을 설치해서 공간을 분할했고, 공간성을 부각할 수 있는 간이 무대를 만들어냈다. 주자는 필요에 따라서 커튼을 조절하여 공간을 나누고, 작업을 위해 적절한 공간을 설정할 수 있었다. 음량, 공연장》에서는 음향이라는 소리의 관습적 형태가 보다 중요하게 사용된다. BLE는 음향과 관련된 여러 요소를 부분적으로 조작하여 소리의 물질성을 극대화하고, 그를 통해 나타나는 조형성을 경유하여 두 가지 공간을 환기하고자 했다. 이 중 하나가 소리가 연출되는 무대인 합주실이라는, 실제 공간이었다면 나머지 하나는 소리 내부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연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BLE는 소리를 다루는 담론들이 대부분 소리 그 자체를 추상화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한 뒤, 공간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기반으로 소리를 탐구하며 추상적 상황을 구체화한다는 목적을 가졌지만, 공연은 공간마저 뭐가 뭔지 잘 모르도록 추상화해버리는 결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공연의 첫 번째 순서는 서혜민이었다. 서혜민이 연주한 작업은 눈 떠보니 여기라는 제목으로, “비가시적인 소리를 통해 미세 입자의 파동을 인위적으로 드러내고 헤집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작업에서 소리는 자글거리는 질감을 갖고, 넓게 펼쳐지면서 공간을 점유했는데, 이 같은 질감의 사용은 미세 입자의 파동을 청각적 이미지로 환원한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작업을 통해, 서혜민은 통상적인 가청(可聽)영역에서 감각이 불가능한 소리를 가청화하고, 나아가 특정 물질, 혹은 현상에 잠재된 소리를 끄집어내 보이고자 했다. 작가는 과거 작업에서 숯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채취하여 하나의 사운드 트랙으로 편집한 다음, 그 소리를 숯의 라이브 사운드와 병치하거나('BREATH' for Live and Tape), 대기 오염과 미세먼지에 의해 마모된 감각에 관한 청각적 탐구를 시도하는 등 (PM 2.5), 통상의 지각으로는 감각이 어려운 소리를 가청 영역으로 이끌어 내고 (혹은 그렇게 된 것처럼 들리게끔 하고), 구체화한 소리를 성찰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하곤 했다. 눈 떠보니 여기〉 역시 이 같은 방법의 일부로 독해할 수 있다면, 소리 질감을 조작하여 구현되는 청각적 이미지들은 곧 미세 입자를 가청화한 결과물이 될 텐데, 이때 미세 입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물리적 공간에 현존하는 무엇으로, 그것을 가청화하는 것은 곧 공간 전체를 환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눈 떠보니 여기〉에서, 서혜민은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소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이용, 공간을 비평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는데, 이는 이전에 전개되었던 작가의 방법론을 확장하는 방법이자, 동시에 음량, 공연장》의 기획적 목표에 응답하는 방법이었다. 서혜민의 연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는 소리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서 점차 몰입되는 경험을 제공했는데, 이 경험은 청자에게 청각적 공간을 음상화하도록 이끌었다. 다만, 이것이 몰입의 경험으로 제공된다는 사실은 의심이 가는 부분 중 하나다. 이처럼 청각적 공간을 음상화할 때, 공간의 물리적 속성은 성찰되는 대신 오히려 잊혀버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서혜민의 다음 순서였던 서민우는 이라는 작업을 실연했는데, 은 공연장에 매단 커튼을 전부 쳐서 공간을 4등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공간이 명확히 나뉘었기에, 작가의 공연은 공간을 번갈아 돌아다니면서 감상해야 효과적일 듯 보였지만, 협소한 공간에 관객이 꽤 있었기 때문에 관람은 다소 수동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에서는, 이를테면 새의 울음소리 같은 자연음, 그리고 ‘ASMR’ 사운드처럼 들리는 내밀한 소리 질감의 인공음이나 왠지 익숙한 클래식음악의 음조가 서로 다른 음량과 방향에서 들려오고, 또 어떨 때엔 송출되는 스피커를 바꿔가면서 변주됐는데, 그것은 기록된 소리를 재료 삼고 재조합해 ()음악적 상황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구체 음악의 방법론을 스피커를 도구 삼아 전유한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민우는 다양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각자 다른 성격의 소리를 꽤 재치 있는, 혹은 위악적인 방식으로 조합한다. 공연에서 자연적인 소리와 인공적인 소리, 그리고 음악과 소음이라는 청각적 자원은 4개의 스피커를 오고 가면서 재생, 혹은 연주되고, 음량이 높거나 또 낮게 조정됨에 따라, 또 관객이 분절된 공간의 어떤 분면에 있느냐에 따라 소리는 다른 음향으로 연출되었다. 〉에서 이용된 음악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가 작곡한 사계(Le Quattro Stagioni)(1725) 중 협주곡 1’,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바이올린 소나타 5(1801), 펠릭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무언가無言歌》 중 〈봄의 노래(1842-44), 그리고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볼레로(Boléro)(1928) 등이었는데, 이 중 볼레로를 제외한 나머지 음원은 봄의 심상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클래시컬 음악에 속했다. 서민우의 작업에서 사용된 모든 음원은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로 송출된 것이었고, 그러므로 〉은 유튜브 비디오의 라이브 연주 같은 것과 다름없었다. 서민우는 관습적 음악, 아방가르드의 기획들이 벗어나고자 애썼던 고전적 범주인 음악을 대수롭지 않게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작업에서 유튜브-연주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쓰임에 따라 자연히 오디오의 음질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 나쁜음질은, 그 자체로 고전 음악 감상의 관습적 방법에 대한, 나아가 일반적인 음악 경험에 대한 비평적 반응이기도 했다. 만약 나쁜조건에서의 음악 청취를 소음이라고 절하하는 모종의 감상을 따른다면, 유튜브를 거쳐 라이브 재생, 혹은 연주되는 이 음원들은 소음과 음악, 둘 중 어느 위치에 놓이게 될까? 음악의 영역에서는 소음이며, 소음의 영역에서는 음악인 무엇을 차용하며, 〉은 청취 환경 전반에 대한 비평적 작업으로 남고자 했다.

 

다만 서민우의 공연 중간에는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있었다. 작업에서 침묵이나 공백이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고려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은 아마도 연주 실수인 듯싶었지만, 〉은 관성적인 수법의 연주가 아니었고 주자의 표정 역시 짐짓 태연했으므로 그것이 연주 실수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분별이 어려웠다. 〉에서는 공간의 분할과 그에 따른 청취 환경의 변화가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뤄지지만, 분할을 위해 설치된 암막 커튼은 오히려 제스처에 가까운 것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나누어 밀폐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소리 역시 의도한 대로 분절되어 송출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고, 그것은 곧 물리적 공간이 갖는 통합의 힘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강조했다.

 

음량, 공연장의 마지막 차례를 담당한 김동용은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오픈축하공연 : RFSC100 공간 매뉴얼 2019라는 이름의 연주에서, 작가는 준비된 소리들을 플레이하는 동시에 공간에 비치된 여러 사물을 이용해 소리를 만들고, 그것을 즉석에서 녹음한 뒤 재생했다. 오픈축하공연 : RFSC100 공간 매뉴얼 2019에서는 음원 재생과 녹음물 재생, 즉흥 연주와 계획된 연주라는 네 가지 청각적 레이어가 교차되었는데, 녹음한 소리를 거의 즉시 재생하여 시간을 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작가가 과거 한 전시에 참여했을 때 진행했던 어떤 작업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이 작업에서, 김동용은 나뉜 두 공간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한 다음 한 공간의 소리가 다른 공간으로 즉각 송출되게끔 하여, 두 개의 공간이 청각적으로 연동되게끔 의도했는데, 《음량, 공연장》에서 선보인 녹음과 재생의 재조합은 그와 같은 설치의 라이브 버전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김동용의 공연에서는 암막 커튼 역시 마구 움직이며 녹음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에 따라 커튼은 공간을 나누는 장치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장치로 바뀌었고, 그것은 이전 차례, 조금은 엄숙한 태도로 커튼을 다루었던 서민우의 공연과 대비되며 아이러니한 구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김동용의 즉흥 녹음-연주에서, 어떤 사물들은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 잠재된 소리를 구현하는 청각적 사물로 재배치되었는데, 시점에 따라 그것은 공연장 공간을 악기처럼 다루는 일로 보이기도 했다. 이는 공간을 비평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청각적 실천을 만들어내겠다는, 음량, 공연장의 전제에 직설적으로 반응한 결과다. 작업에서 즉흥은 이런 퍼포먼스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다루어내고 통제해야 하는 레이어가 다양한 탓인지 공연은 역동적이지 못하고 다소 지루하게 늘어져 버리기도 했다. 연주자였던 김동용은 이씨이라는 록밴드에서 프론트 퍼슨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씨이는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유행을 타고 결성된 밴드 중 가장 이상한 레퍼런스를 참고삼아 활동했던 밴드 중 하나다. 작가의 이와 같은 경력은, 어쩌면 이 즉흥적 연주가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그 전사를 얼마간 설명해주기도 한다. 오픈축하공연 : RFSC100 공간 매뉴얼 2019에서, 연주는 앞선 두 작업에 비해서도 특별히 공연의 문법 아래서 진행된 듯 보였고, 특히 여러 사물을 흔들고 때려 소리를 끌어내는 이용은 관습적 연주의 그것과 겹쳐져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씨이 - 흙탑을 무릎위에


 

두 번째 공연이었던 방향에서, BLE의 관심은 소리의 방향과 그를 통해 구체화되는 청각적 조형성으로 이동한다. 방향》에서는 첫 번째 공연에서 보였던 몇 가지 흠결을 보완하기 위해 개선된 부분이 있었다. 우선, 공간이 협소한 탓에 자유롭게 움직이며 공연을 듣기 어려웠던 환경을 의식한 것인지, 공연은 회차를 총 3회로 나누고 입장 인원을 10명 내외로 제한했다. 그에 따라 방향에서, 관객은 협소한 공간에서도 최소한의 동선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비교적 자유롭게 청취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음량, 공연장에서 4개의 스피커가 공연장의 네 모서리에 각자 배치되어, 4개의 청각적 공간을 조성했다면, 방향에서는 4개의 스피커가 공연장 중간에서 후면을 맞대고 관객을 바라본 상태로 놓였는데, 이것은 방향이라는 소리의 물리적 속성을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방향에서는 스피커만큼 중요하게 사용되는 도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어폰과 사운드클라우드였다. 관객은 입장 시 공연장에 부착된 QR코드를 읽거나, 핸드폰 메시지로 전달받은 링크를 열어 작가가 업로드한 비공개 사운드클라우드 트랙을 이어폰으로 청취하며 공연을 보아야 했는데, 이때 스피커가 송출하는 소리의 방향은 이어폰이 형성하는 고립된 청취 경험 위로 겹쳐지면서, 두 가지로 나뉜 청취 환경을 중첩시킨다.

 

방향에는 BLE의 동인인 김동용과 서민우만이 참여했는데, 이 중 처음 시작을 맡은 것은 김동용이었다. 〈유튜브 무료 브금(bgm)이라는 이름의 공연에서, 작가는 유튜브에서 제작자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하는 배경음악을 재료 삼아 작업을 제작했고, 공연은 이 배경음악을 스피커를 통해 내보내는 것으로 출발했다. 배경음악 특유의 나이브한 특징들, 단조로운 리듬과 야심 없는 멜로디 등은 공연장을 금방 관습적인 분위기로 채웠지만, 브금들은 점차 서로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비트를 얻게 되었고, 음량 역시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면서 묘한 소격 효과가 활성화됐다. 특히 공연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소리는 더 집중적으로 반복됐고, 음량 역시 더 큰 폭으로 높아졌기에, 익숙하게 들려오던 배경음악은 보다 과격한 감상을 자아냈다. 시간이 지나자, 랩탑 앞에 앉아 연주하던 작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대단히 퍼포머티브한 방식으로 공연에 개입했다. 김동용은 공연장에 놓인 스피커의 헤드를 마구 돌려가며 소리의 방향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스피커는 관객이 서 있는 방향을 가리키다가 이내 안쪽으로 돌려지기도 했고, 그에 따라 음향 역시 마구잡이로 변화했다. 공연이 중반을 넘어서 후반부로 나아갈 때쯤에는, 작가는 스피커 헤드를 돌리거나 움직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 스피커를 번쩍 들어 올려 위치를 조정하기도 했다. 이제 4대의 스피커는 서로 1m 남짓한 거리를 두고, 마주 본 상태로 모이게 되었는데, 작가의 설명을 따르면 이것은 스피커 바깥쪽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들을 스피커 안쪽으로 모아, 소리를 압축적으로 청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작가가 랩탑 앞을 떠난 이후부터, 공연에서는 같은 소리가 반복될 뿐이었지만, 스피커의 방향이 직접적으로 조작됨에 따라서 음량부터 소리의 밀도나 떨림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음향을 체험하는 게 가능했다. 〈유튜브 무료 브금(bgm)〉에서, 김동용은 소리의 방향을 직접 조작하며 DIY 방식으로 가설적 무대를 설치하고, 이 무대에서는 오직 불안정하고 흔들거리는 청취 경험만이 제공되었다. 첫 번째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방향》에서 작가는 공연에 설정되어있는 담론적 전제를 그대로구현하고, 여기서는 예술가의 시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엔지니어의 시점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역할을 한다. 공연의 전제는 김동용의 손을 빌어 대단히 직설적인 방식으로 번역되는데, 그 결과는 다소 희극적이고 또 다소 예외적이었다.

 

김동용이 배경음악을 사용한다면, 서민우는 자연발생적인 소리와 도심의 소음, 그리고 일상적 형태의 소음을 재료로 공연했다. 서민우의 Surfing Scape에서는 이어폰을 통한 청취 환경의 중첩이 더욱 진지한 방법으로 활용된다. 앞선 공연에서, 김동용은 이어폰을 언제든 관객이 원하는 시점에 끼고 들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통제했는데, 김동용이 제공한 사운드클라우드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무료 배경음악들의 원본 음원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이것은 스피커와 이어폰이 만들어내는 청취 환경을 입체적으로 활용한다기보다는, 분리된 상태로 유지한 채 내버려 둔 결과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민우의 공연에서는 반드시 특정 시점에 이어폰을 착용해 공연을 감상해야 했고, 그에 따라 이어폰의 소리, 그리고 스피커의 소리는 보다 구체성을 띈 채 중첩되었다. 그런 만큼, Surfing Scape〉에서 스피커는 조작하거나 움직여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 본래의 목적에 맞춰 사용되었다.

 

Surfing Scape〉에서, 방향의 조작은 공연되는 소리의 내부 공간에서 이뤄졌다. 소리와 소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공간이라는 문제는 빼놓을 수 없다. 사회적이고 물질적 공간의 특성에 따라서, 소음의 분류와 작동 방식은 언제나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음은 생활 공간 속에서 언제나 어지럽게 충돌하고, 자연스러운 소음,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소음의 구분은 상황에 맞추어 달라진다. Surfing Scape〉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소리, 혹은 소음이 등장한다.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공연에 등장한 소리로는 금속캔을 열어 따는 소리, 금속성의 물질이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와 새의 울음소리,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교향악의 익숙한 소리와 발걸음 소리까지, 많은 종류의 소리가 이용되며 청각적 풍경을 형성한다. 하지만 음원의 음질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리는 명료하게 들리지 않고 소리의 정체를 확신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Surfing Scape〉에서, 나쁜음질은 무조건적인 결손이라기보단 공연의 구성 요소로서, 직접적으로 작동한다. 어차피 공연에서는 스피커 경험과 이어폰 경험이 중첩되어 있으므로, 소리를 분별하거나 꼼꼼하게 듣기가 어렵다는 것도 한몫을 한다. 저하된 음질은 음원 자체의 해상도를 크게 낮추지만, 간섭을 모방하고 반사와 잔향을 임의로 극대화해 청각 인지를 불분명하게 하며 의외의 청각적 현실감을 만들어낸다. 눈을 감고 오래 듣다 보면, Surfing Scape〉는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는 과정에서 감각되는 청각적 풍경, 혹은 물속에서 청취 되는 청각적 풍경 같은 것을 연상케 한다. Surfing Scape〉에서, 저하된 음질을 거쳐 감각되는 소리의 방향은 가상적 공간감의 해상도를 높인다.

 

이와 같은 모방적 소리가 반감을 만들지 않는 까닭은, 작가가 몰입적 경험을 막는 《방향》의 청취 환경을 적절하게 이용한 결과다. Surfing Scape〉에서, 소리와 소음, 나아가 음악까지, 등장하는 소리를 무엇이라고 분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작업에서 등장하는 모든 소리는 저하된 음질을 필터 삼아 가상의 청각적 장소에서 겹쳐지고, 여기에선 범주 차원의 경계나 청각적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이 현실감 있게 조형된 청각적 풍경을 좇는 동안, 소리를 분할하는 모종의 범주들은 추상적 장소로 모이며 아주 짧은 시간 종합된다.

 

Surfing Scape〉에서는 이어폰이 사용되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작가가 연주하는 풍경은 이미 완결된 구성을 갖고 있었고, 이어폰을 통해 즉석에서 형성하는 고립적 청취 환경 역시 이 구성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관객은 처음에 스피커를 통해 공연을 청취하다가, 공연의 특정 순간에 맞춰 이어폰을 착용하고, 사운드클라우드에 접속해 트랙을 재생해야 했는데, 이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작가는 공연 중간에 여기서 이어폰을 착용하고,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음원을 재생해달라고 입말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 좁고 환경이 좋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공연의 리듬을 깨는 나쁜 순간으로 남았다. 첫 번째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공연에서도 서민우는 유튜브, 그리고 사운드클라우드 등, 변화한 청취 환경의 매개물을 도구로 이용하는 라이브 연주를 펼쳤지만, 여전히 이 악기를 다루는 방법은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다만 이것이 과연 악기의 결함인지, 연주자의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을 것이다.

 

방향》에서 스피커는 바깥을 바라본 상태로 모여있었는데, 이것은 청자에게 소리를 더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설치라기보단 공간에 소리를 더 잘 채우기 위한 설치처럼 보인다. BLE는 소리를 더 잘 들려줄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러므로 관객이 소리를 잘 청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소리가 더 잘 청취 될 수 있는 환경은, 화이트 큐브에서 작업했던, 사운드 아트의 참여자들이 언제나 지적했던 결여된 조건 중 하나다. 여기에 선행된 것은, 소리의 해상도와 물성이 원활하게 감각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만 소리가 그 미적 역량을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BLE는 프로젝트를 통해, 짐짓 소리가 물리적으로 잘 구현될 수 있다면 잘 들리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자세를 취한다. 김동용과 서민우가 종종 음악으로도, 소음으로도 엮이기 힘든 배경음악이나 음향의 세계에 관심을 두는 것 역시 이런 생각과는 잘 어울린다. BLE에서, 음향-소리는 음악-소리와 소음-소리의 더 큰 범주로서 고찰되고, 아마도 프로젝트는 이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남아있을 것이다.

 

두 차례의 공연을 통해서, BLE가 탐구하고자 했던 소음의 물리적 속성 중 공간과 크기, 그리고 방향이라는 사례가 구체화되었고, 이제 질감과 속도 등, 몇 가지 속성들이 주제로서 남아있다. BLE의 프로젝트에는 언제나 진지한 담론적 전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막상 구현될 때 종종 희극적으로 변주되거나 은근슬쩍 무시되고, 공연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공연 전에 배포되는 텍스트와 흥미로운 관계를 만든다. BLE는 공연이 조금 더 입체적인 이해를 만들 수 있게끔 상황을 연출하고, 그에 따라 텍스트를 제작하는 것, 그리고 청취 환경을 임의로 구성하는 것은 공연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공적 지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프로젝트가 아니기에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고, 또 공연 자체도 완벽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인 결점이라기보단, 어쨌든 뭔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부분처럼 보인다. 지향하는 목표가 존재하고, 그것이 뚜렷하다면, 그것은 성공과 실패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름대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혹은, 과대평가와 과대 해석이야말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1. Hosokawa Shuhei(細川周平), 「Walkman Effect」, 『Popular Music』, Vol. 4, 1984, 167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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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이 음원은 현재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삭제되었지만, 인터넷 아카이브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 https://archive.org/details/AphexTwin_201504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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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이 중 가장 많은 수의 청취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은, ‘ChilledCow’라는 이름의 채널이 송출하는 ‘로파이 힙합 라디오 – 휴식과 학습을 위한 음악(lofi hip hop radio - beats to relax/study to)’다. https://www.youtube.com/watch?v=hHW1oY26kxQ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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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006년 말 경부터, 한국의 미술계에는 사운드 아트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2007년에는 몇 개의 기획전시가 진행되거나 워크샵, 담론집등이 출간되기도 했다. 미술의 외피 확장이라는 견해와 동시에 미디어 아트를 중심으로 사운드와 비주얼을 다루는 총체적인 관점들, 그리고 현대 음악의 역사적 실험들이 결부되면서 일약 예술계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듯 했다." 류한길, 「‘사운드 아트’를 위한 제안」, 앨리스온, 2008. https://aliceon.tistory.com/683?category=93196 [본문으로]
  24. 이승린, 『1990년대 이후 국내 노이즈 음악의 위상과 질적 변화에 대한 연구: 소음을 매체로 활용하는 국내 뮤지션과 적극적인 청취자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 논문, 2017, 111-6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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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원이 필요하다. 당연히 공적 지원도 필요한데, 현재 예술지원은 장르별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한 장르 구조에서 유일한 틈이 다원예술이었다.”, 「“질서정연한 예술계에 혼란을 만들어내고 싶다”: 《스프링웨이브》와 《페스티벌 봄》의 디렉터 김성희 인터뷰」, 『문화예술』, 통권329호, 2008, 182p [본문으로]
  29. “이런 촌스럽기 짝이 없는(안타깝게도 충분히 예상이 되었던) 상황에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나는 2007년도에 진행된 기획 전시들이 이슈의 시간적 흐름을 타기 위해 실질적인 도큐먼트와 아카이빙 그리고 담론 형성을 위한 노력이 선행되기 보다는 먼저 보여주기 식의 급조된 기획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 사운드 아트 관련 기획들, 워크샵들 속에서 정작 사운드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은 빠져있고 사운드 아트가 무엇인가라는 식의 정의 내리기에 집착하는 경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즉 기존의 미술장치들, 음악장치들이 어떻게 사운드 아트로서 소비될 수 있을 것인에 대한 관심만이 존재한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류한길, 위의 글, 앨리스온, 2008, https://aliceon.tistory.com/683?category=93196 [본문으로]
  30. “시각미술을 다루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루고자 하는 물질에 대한 어려움이 더 강해졌다. 매체는 폭넓어졌는데 자신들이 알고 활용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새로움이 있으면 그에 대한 경쟁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큐레이터는 신기한 것에 대한 강박감이 있다. 그 시점에 사운드 담론이 생산된다기보다는 물타기 기획들이 난립했다.” 「왜 사운드 (아트) 인가」, podo, 2010, http://www.podopodo.net/forum/round/detail.asp?seq=9 [본문으로]
  31. “지금의 미술계에서 사운드 아트를 이야기하면서 헷갈려하는 지점이 무엇인가 하면 여전히 사운드 아트라고 이야기 할 것과 음악으로 이야기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중심적인 사고로 작품을 진행하면서 사운드를 소재적인 요소로 차용하는 수준에서의 모습을 사운드 아트라고 말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사운드 아트에 대해 이야기하다」, 디자인정글, 2011, https://www.jungle.co.kr/magazine/3519 [본문으로]
  32. Miwon Kwon(권미원), 『장소특정적 미술』, 김인규, 우정아, 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2013, 52p [본문으로]
  33. Alan Licht, 위의 책, 2007, 210p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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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황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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