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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이디어를 위한 절반의 마법

황재민

 


전시 Vera Verto: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 포스터



 전시 Vera Verto: Why are Digital Kid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이하 Vera Verto)의 제목을 옮기면 베라 베르토: 어째서 디지털 키즈들은 다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로 풀이된다. 부속된 긴 소제목은 비평가 얀 베르워트의 글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원문의 ­­­­제목은 어째서 개념주의 예술가들은 다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주석)이며 2005년쯤 쓰였기에 얼마간 시차를 갖는다. Vera Verto를 기획한 김나현은 구문­­을 살짝 바꿔 좋은 아이디어로써 쓰이는 회화, 그리고 회화가 갖는 의미를 2020년으로 옮겨 놓는다. 여기에는 물론 회화가 여전히 좋은 아이디어로 작동할 수 있다는 잠정적 판단이 선행된다.

 

 회화는 의미를 잃었다가 되찾으며, 낡은 것으로서 새롭게 주목받는다. 얀 베르워트가 글을 통해 진단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상황으로, “어째서 개념주의 예술가들은 다시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가?” 라는 제목의 글은 회화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반복되고 소모된 주제에 대한 보충에 속한다. 이제 회화가 죽었다 깨어나는 과정은 누구에게든 익숙한 서사처럼 보인다. 예술 생산의 양식과 방법이 변화하는 특정 구간 회화는 죽는다.’ 예술이 동굴을 탈출했을 때, 사진이 발명됐을 때, 미국산 후기 모더니즘의 평면성 신화가 무너졌을 때. 하지만 회화는 언제나 다시 등장하고 그것은 더는 놀라운 일도 되지 못한다.

 

 회화는 전통적 예술 생산의 상징물로서 아직 특수한 지위를 갖는다. 다른 매체가 무관심 속에서 잊힐 때 회화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죽는다. 이것은 동시대 미술의 갱신된 논의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후기 모더니스트 미술 이론의 적극적인 지지체로서 회화가 담당한 역할은 바로 그 이론이 폐기되고 기각된 이후에도 얼마간 영향을 지녔다. 모더니스트 미술 이론이 나름의 유효성을 다한 뒤에도 회화는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매체는 항상 의심 속에서 다시 검토되었는데, 이를 더 자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역사적 견해 뒤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충돌하고 있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회화가 정말 아직도 문제적인 양식이라면, 이것을 무엇으로, 또 어떻게 취급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는 게 당연하다. 이를테면 회화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회화는 모더니즘의 상징이자 권위였다. 모더니스트 도그마를 거부한 것이야말로 지난시기 미술이 거둔 중요한 성과 중 하나였는데, 이를 흘려보내는 것은 역사를 되풀이하는 낭비다. 모더니스트 이론이 가진 유효성이 사라진 뒤 일반화된 개념주의적 전환(Conceptual turn)’은 회화 매체가 독점했던 미적 매체의 선택지를 확장했다. 이때 매체를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단순한 뜻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특정 매체로 귀결될 수 있는 미적 생산의 프로토콜이 새로이 설계되었으며, 결과값으로 작동하는 매체 역시 해당 프로토콜과 유의미한 연관을 맺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개념주의적 전환이후 회화가 쉽게 선택될 수 없었던 이유는, 과정을 독점하는 결과값으로서 유연하게 반응하기 어려운, 무거운 매체로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의견 역시 존재한다. 만일 필연적 과정을 지니며 특정성을 얻었다면, 회화가 회화로서 작동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더불어, 회화를 단순히 기각하는 것 역시 낭비에 속한다. 물질적 근거를 지니는 예술 양식을 이론의 부속품으로 여길 때, 비언어적 예술로서 미술이 갖는 미덕은 사라진다. 나아가 지나치게 담론화되기 시작한 동시대 미술의 논의 속에서 언어가 매체에 앞설 때 발생하는 부작용이 존재한다. 담론적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레디메이드 예술은 언제나 주어진 토큰을 차지하며 자리를 잡고, 기관과 시장은 토큰을 제공하며 프레임을 잡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결국 매체를 매체 자체로 이해하지 못할 때, 예술은 예술을 위한 판단 기준의 힘을 예술 바깥의 기관에게 이양하며 힘을 잃는다.[각주:1]

 

 이처럼, 적극적 상징으로 갖는 힘을 잃은 뒤에도, 아니 오히려 힘을 잃었기 때문에, 회화는 여전히 논란을 촉발하며 문제를 일으킨다. 회화가 만일 좋은 아이디어로 작동할 수 있다면 그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회화 매체는 담론과 역사적 층위를 안고, 부정성과 긍정성을 내포하기에 임의적이고 중간적이며 그러므로 모호하다. 모호성이란 여전히 좋은 재능으로 취급된다. 미적 권위를 떠안은 매체로부터 모호함을 지닌 매체로 거듭날 수 있었다면, 예술의 상징으로부터 기각된 회화의 지위 역시 아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담론의 차원에서, 회화가 언제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마스터키 취급을 받는다는 건 결국 무엇을 뜻할까? 온갖 나쁜 아이디어와 결함 있는 실천으로 가득한 미술에게 모호성이라는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게임의 규칙에 끼지 못한다는 말은 아닐까?

 

 회화를 둘러싼 게임의 규칙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이제 한 가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 또 있다. “어째서 디지털 키즈들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가?”라는 전시의 질문은 원문에서 인용된 개념예술가라는 위치를 현재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수사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디지털 키즈들은 새로 그림을 그리는가? 어째서 회화는 여전히 가능하며, 회화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모호성을 재창출하는가? 이 질문은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코드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전자매체가 일상화되고 인터넷을 매개하는 디지털 디바이스가 개인화(Personalization)된 이후, 이 조건은 시각 예술을 위한 새로운 개념적 지지체가 된 것 같다. 모든 물질은 이미지화되어 네트워킹되지만, 동시에 별개의 스크린에서 개인화된다. 이것은 이미지를 조작하고 거느릴 수 있다는 감각을 만들며 이미지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바로 이 새로운 감각을 경유하여, 디지털 디바이스와 회화 캔버스의 형태적 동형성은 효과적으로 겹쳐진다. 여기서 디지털 키즈가 회화와 스크린을 겹치는 재주를 부리며, 확장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낸다는 서사가 가능해진다.[각주:2]

 

 하지만 위에서 충분히 검토했듯, 회화를 둘러싼 담론적 지형에서 확장이라는 문제는 항상 복잡하고 중요하다. 회화가 캔버스를 떠나고 벽을 떠나 여기저기에 놓일 때, 그러면서도 모종의 회화적임을 고집하고자 할 때, 회화는 당위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스크린의 자율성이 캔버스의 자율성 위로 겹쳐질 때, 확장은 너무 당연스럽게 허용되는 것 같다. 디지털 환경이 이미 우리의 시각성을 굴절시킨다는 가정 아래 회화의 임시적인 가능성은 매체적 확장과 착각되며 의아한 권능을 만들어낸다. 어떤 시점에서 캔버스는 여전히 이미지를 위한 지지체이고 스크린 역시 그렇다. 그러나 회화는 캔버스와 이미지의 결합물 이상의 담론적 현상이며 그러므로 스크린과 단순히 겹쳐질 수 없다. 스크린-캔버스의 동형성은 어느 정도 착각이며 이를 긍정하기 위하여 지각 이상의 담보가 요구된다.

 

 근대적 권위의 상징으로부터 잘못 설정된 디폴트 값으로, 진보하는 형식으로부터 안정적인 제한으로, 회화가 거쳐야 했던 몇 가지 전환은 자못 드라마틱하게 보인다. 회화가 갖는 모호성을 수긍하고 긍정하는 것은 회화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며, 스크린과 캔버스의 동형성을 긍정할 때 그것은 어쩌면 시의성까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회화의 모호성을 수긍하는 일은, 어떤 면에서 결국 사변적 힘을 강조하거나, 혹은 매달리는 일로 나타난다. 매체성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매체성이 결국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도외시해야 한다. 이와 같은 한계 아래에서, 회화는 이제 딛고 움직일 수 있는 발판이 아니라 차라리 과속방지턱과 같은 것으로, 행동을 제한하고 움직임을 통제하며 정지를 권유하고, 그것으로 조형적 순간을 연출하려 하는 제한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 만큼 회화를 주제 삼아 유효한 미적 상황을 펼쳐내는 건 어느 정도 불가능하고 이루기 어려운 과제처럼 느껴질 지 모른다. 이를테면 거의 마법에 가까운 무언가처럼.

 

 《Vera Verto에서 마법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제목인 베라 베르토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주문인데, 지팡이로 컵을 날카롭게 세번 두드리고 대상을 향해 지팡이를 겨눠 베라 베르토를 정확하게 발음하면 대상이 된 동물을 유리잔으로 바꿀 수 있다. 전시는 주문의 출처를 밝히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제안한다. 그 이미지 속에서 주문은 성공한 것도, 실패한 것도 아닌데, 희생된 생쥐는 절반은 제 몸을 유지하고 있지만 반은 유리잔이 된 채 멈춰 있다. 완전히 폐기된 것도 아닌,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닌 회화와 같이, 그것은 절반쯤 우스꽝스럽고 절반쯤 문제적이다.

 

 우습고 문제적인 쥐-유리잔의 심상은 회화를 일종의 마법으로 되돌리려는 사변 실험이 가능할까?’라는 자문의 자답처럼 보인다. 마법이란 인간 지각과 경험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시절의 인식 체계로, 쇠퇴한지 오래되어 감각이 어려운 골동이다. 그렇기에 마법을 소환하는 미적 실험은 어쩔 도리 없이 기만적이다. 더군다나 마법의 형태 자체도 문제다. 비인간 생물의 형태를 사물로 희화하는 마법은 옳지 않을 뿐더러, 논리적이지도 않다. 만일 마법이 정말로 선험적인 자연 질서의 일부였다면 이토록 인간 중심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베라 베르토의 주문은 마법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마법은 기술에 의해 잉여가 된, 영적인 동시에 세속적인 형태의 근세적 염원이며, 인간적 서사 바깥을 쉽게 넘지 못하는 부속이다. 전시는 마법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언급하며, 회화가 지녔던 사라진 과거와 근대적 권능을 상기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마법은 해리 포터라는 서사적 카테고리 안에서 제한되며 회화는 예의 모호성 안에서 제한된다. 마법이 회화를 부활시키지 못하듯 회화는 마법을 소환하지 못한다. 이 이중부정은 그 자체로 전시의 주제가 된다.

 

 마법에 대한 요구는 특히 박제호의 작업에서 노골적이다. 우리는 마법을 기대한다라는 제목의 연작에서, 화면은 우연적인 필치가 빗는 추상적 형상으로 덮인다. 여기서 우연이란 다름아닌 마법을 위한 것이고, 그러므로 대단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작가는 회화에 집약된 물신적 판타지를 말한다.” 판타지는 회화가 오래 전 잃어버린 것인데, 그렇기에 이것을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판타지를 잃어버리기 직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제호는 마법이 탈-마법화되던 시기, 주술과 영화가 분리되기 직전의 시기로 돌아가 망령을 호출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박제호의 화면에서, 우연은 붓질의 몫이 아니라 스크래치의 몫이다. 작가의 회화에서 붓질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뭉개지지만 가는 선으로 판 음각은 두드러진다. 거의 자동기술적인 것으로 보이는 음각의 선은 회화 표면에서 모종의 물질성을 상기시킨다. 마치 비석처럼, 혹은 석고판처럼, 음각의 긁힌 자국은 착시를 만들며 고딕적 정동을 소환한다. 이 착시는 단지 표면에서 멈추지 않고 지지체 차원으로 확장된다. 작업 중 석고 캔버스연작은 실제 석고를 캔버스 형태로 만져 전시한 것으로, 작가는 석고의 물성을 물감의 그것과 같은 차원에 두고 취급한다. 비석과 같은 석고의 물성은 그 자체로 과거를 끌어들이는 조건이다. 추상에 가까운 화면 속 유일하게 형상에 가까운 가고일은 종종 뚜렷하지만 종종 흐릿하게, 하지만 분명히 반복적으로 존재하는데, 이것은 박제호의 추상 속에서 형상적인 것을 찾도록 만드는 원인이 된다. 추상 속에서 언뜻 보이는 형상을 찾으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복고적인 것이다.

 

 석고와 캔버스 사이에서, 추상과 형상 사이에서, 그리고 마법과 현실 사이에서, 회화는 모호성을 최대한 방치한다. 무풍지대, 그리고 가고일이라는 제목의 작업에서 박제호는 무빙이미지를 LCD 스크린에 상영하고, 이를 캔버스 사이에 함께 병치한다. 이때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이미지는 거의 정지된 것처럼 느리고 흐려서 무의미한 움직임을 만드는 듯 지지부진하다. 여기서는 스크린을 회화를 위한 새로운 매체로 제시하려는 야심보다는, 큰 기계를 깎아 돌도끼처럼 사용하는 듯한 연극적이고 의도적인 착각이 읽힌다. 박제호는 회화에 기대를 투영하고, 그것이 잊힌 것을 되살리고 복구하여 마침내 과거라는 신선한 땅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하게 투사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와 효과가 필요한 지에 대해서는 비밀에 붙인다.

 

 한 편 이연석의 작업에서, 확장은 좀 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작가는 회화를 일종의 사물로 파악하고 나아가 상품의 상태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물신의 논리를 굳이 인용하고 긍정하는 것은 회화를 둘러싼 구태의 담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제스처로 파악된다. 이연석은 전시된 작업 중 대부분의 제목을 리들리 스콧(Ridley Scott)의 영화 《카운슬러(The Counselor)(2013)의 대사에서 가져오는데, 이것은 결국 의미가 담기는 제도적 근거를 무의미로 회피하는 일이고 회화가 지시할 수 있는 모호성을 충분하게 활용하는 일이다.

 

 이연석의 회화는 기존재하는 상품 택을 붙인 채 두껍게 걸리고, 또 붓질로 뒤덮인 불균질한 표면 대신 미디엄이 깨끗하게 발린 균질하고 반질거리는 표면을 갖는다. 입체성을 강조하는 캔버스의 두꺼운 측면이나 투명하고 평평한 표면은 그 자체로 사물의 상태를 지시한다. 이것은 대단히 의도적인 것이지만, 굳이 상품이 되려는 미술의 장난스러운 악의가 과연 지금도 유효한지 하는 일은 다시 한번 질문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업의 반질거리는 표면 뒤에서 붓과 물감으로 만들어진 이미지가 투명하게 엿보이고, 미디엄 뒤에서 크랙이 간 표면이 모종의 물성을 가리킬 때, 상품의 상태를 부연하는 작가의 논리는 조금 흐트러진다. 표면이 갖는 매끄러움은 사물을 위한 것이지만, 이것은 너무 투명하기에 그 뒷편에 위치한 회화적 상황을 숨기지 못한다.

 

 나아가 몇몇 작업은 전통적인 회화의 구성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도 한다. 이연석은 ‘triptych panel’ 연작에서 세 개의 큰 캔버스를 일종의 삼면화처럼 제시하고, 그 위에는 단순한 정사각형 추상을 마치 성화(Icon)처럼 올려 둔다. 삼면화 중 어두운 단색의 화면을 갖는 triptych panel 1》과 《triptych panel 3》은 양 옆에 놓이고, 단순한 풍경처럼 보이는 triptych panel 2》이 가운데를 차지한다. 가운데 놓인 triptych panel 2》는 언뜻 보면 풍경화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어떤 풍경과도 일치하지 않는 모양이다. 작가는 이 그림이 워낙 얇게 칠해져 옮기는 중 쉽게 상하기도 하고, 그에 따라 다시 칠해야 할 때도 있다고 부연하는데, 이처럼 자주 다치고 까지는 얇은 물감은 형상을 의도치 않게 바꾸는 원인이며 풍경을 오작동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 모호성 속에서, 구상은 거의 추상에 가까운 것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형상은 형상이다. 전시된 작업 중 but there is no perfect diamond As my father would say는 예의 얇고 흐린 붓질이 특정 도상에 집중된 사례다. 널찍한 캔버스 중앙에 약하게 자리 잡은 도상은 무척 흐리기에 그 어떤 형상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누구든 이 그림을 본다면 《최후의 만찬(Ultima Cena)》의 그리스도 도상을 즉각 떠올리며 여러 맥락을 상기하게 된다. 이미지의 힘은 아무리 미약해도 아직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은 여전히 회화가 상대해야 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연석은 회화 캔버스의 물성을 부각시키며 사물과 비슷한 상태를 연출하고, 그것을 상품과 연관된 논의 안에 배치하지만, 오히려 몇몇 작업에서는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이 부각되는 것 같다. 작가는 사물을 선포하고 이미지를 불특정하고 아슬아슬하게 표현하면서 거의 말하지 못하도록 막지만, 이것은 결국 이미지가 회화 안에서 여전히 갖는 다양한 힘을 충실하게 강조하는 결과로 마무리된다. 다만 역설적인 것은 the cult seems big》이나 《the gridle comes out crooked》 등, 머리 위에 놓인 성상 같은 추상을 볼 때, 표면 위 추상 이미지의 가상적 깊이에 빠지는 대신 캔버스의 텅 빈 옆면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회화는 여전히 이미지와 사물 속에서 회전하며 종종 통제된 상황 바깥으로 넘어간다.

 

 《Vera Verto》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업은 말하자면 추상에 가까운 문법을 갖는다. 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그 중 온전한 의지와 당위를 가진 추상은 거의 드물거나 어쩌면 없다. 이들은 추상으로 머무르도록 회화를 내버려두지만, 여기서 추상과 구상은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이 경계 없음은 의식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이거나 우연적인 것이고, 어쩌면 전시를 통해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이와 같은 상황이다.

 

 회화는 그 무게 탓에 무조건적으로 늦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촉진되는 듯 보이는 오늘, 어쩌면 이건 여전히 회화만이 지니는 재능일 수 있다. Vera Verto》는 마법을 인용하며 회화의 낡음을 강조하고, 회화가 새로 갖는 한계를 쫓고자 한다. 다만 이처럼 끊임없이 중간에 놓이려는 유보된 상태는 의심을 자아내기 쉽다. 회화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자 한다면 회화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둘 중 어떤 질문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까?

 

 정체 불명의 주문이 회화를 향해 겨누어진다. 과연 마법이 가능할까? 마법은 마법이 있다고 믿는 자들에게만 부분적으로 실존한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염원이자, 잉여에 가까운 인식 차원의 지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믿지 않는 자에게 종교는 공예이며 불신자를 겁박할 수 있는 마법의 저력은 아직까지 우리 지구에서는 관찰된 바 없다. 베라 베르토”, 잔이 되어 반쯤 굳은 생쥐를 위한 어설픈 마법은 어쩌면 그 자체로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변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위한 것에 가깝고, 정교한 속임수로써 마법은 좀 더 자세해질 때 항상 도움이 된다.



  1. Jan Verwoert, 「Why are conceptual artists painting again? Because they think it's a good idea」, Translated by Hugh Rorrison, 『Afterall: A Journal of Art, Context and Enquiry』, Issue 12, Autumn/Winter, 2004. [본문으로]
  2. Alex Bacon, 「Surface, Image, Reception: Painting in a Digital Age」, RHIZOME, 2016, https://rhizome.org/editorial/2016/may/24/surface-image-reception-painting-in-a-digital-age/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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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5.22 18:30 삐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공부가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