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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미술관

- 차가운 콘크리트와의 포옹을 갈구하며



전민지


* 본 원고는 『건축평단』 2017년 여름호에 수록된 원고를 재게재한 것입니다.

 

 


1.


 어려운 것은 누구에게나 달갑지 않고, 딱딱한 것은 누구에게나 탐탁지 않다. 어려운 동시에 딱딱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2.


 그러한 존재를 몇몇 꼽아보자니, 미술관이 눈에 들어온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술관에 첫 발을 디딜 때, 게다가 그곳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할 때 오는 무력감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분명 반갑지 않은 생경함이 아닌가. 공간 속에 무언가 담아내는, 또는 담아내야 하는 건축물의 필수불가결한 특징을 차치하고서라도 둘 이상의 예술 장르가 각자의 길을 잃지 않도록 서로 다른 평행선을 타야하는 미술관의 본질은 당황스러움에 빠진 인간들을 구출해주지 못한다. 또 다른 구석에서 생각해보면, 건축이라는 예술이 또 다른 장르인 미술을 포괄해야 하는 미술관의 기능이라는 것이 어딘가 어색하기도 하다. 그렇기에 미술관에 던져진 사람들의 몸뚱이는 그저 막막하다. 뇌 곳곳에 숨어있던 뉴런이 작품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을 때, 정작 눈앞이 깜깜해져버린 관람객들은 미술관을 걷다말고 불안함 위로 둥둥 떠다니게 된다. 이쯤에서 미술관이라는 차갑고도 딱딱한 건축물이 두 팔 벌려 안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한다면, 조금은 덜 이기적인 것일까.

 

 

3-1.


 만물에 대한 고민을 지속하면서도 존재의 안과 밖을 동시에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눈먼 존재로서의 숙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연유로 몸은 머리가 해내지 못하는 사유를 행한다. 다시 말해 언어로 구성된 복잡한 생각이 해내지 못하는 기능을 오히려 껍데기가 해내기도 한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지각의 현상학>에서 풀어낸 이야기에 따르면, 몸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경험된 의미들의 집합(grouping of lived-through meaning)이며, 세계와의 접합(interface)인 동시에 타자들에게 열려있는 살(flesh)이다. 그렇다면 집합을 이루는 의미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살이 만나게 되는 타자는 누구/무엇인가?

 감히 그것을 특정한 환경에 놓였을 때 느끼게 되는 감각- 그중에서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촉각과 가까운 감각-이라고 칭해보고자 한다. 시각적으로, 즉 단순히 바라보거나 몇 초간 주시하는 것을 넘어 그 대상을 오랜 시간 응시한다고 하여도 해석이 불가능한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신체가 그 공간에 놓여야만 비로소 받아들여지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다른 어떤 곳보다도, 미술관의 구조가 그러하다. 언뜻 보면 통유리로 된 벽 한 쪽이 세상과 관람객을 단절시키는 듯해도 오후 두 시에 부서져 내리는 햇빛이 새로운 세상의 입구가 되고, 투박한 석고보드가 오히려 친절하고도 조용히 이야기를 건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보다도 넓게 뻗어나가는 공간감에서 자기 자신을 찾고, 미술관에 온 이유를 곱씹어보게 된다. 시야 가득한 자연광과 외벽 표면에 비친 이미지들은 그 경험 또한 생동하게 한다. 이와 같이 그들만의 공간을 생성하고 그곳에 안착하는 과정은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현상학적 경험으로 이어진다. 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지식으로서 명멸하는 팜플렛들을 제쳐두어도, 관람객들이 미술관 건물 내부에서 직면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거대한 서사가 된다.

 목전에 놓인 모든 것이 처음인 것 마냥, 눈을 반짝이며 들어가는 사람들을 포근하게 침전시키는 미술관들이 있다. '전시'라는 평행우주 속의 본업, '건축물'이라는 또 다른 우주의 존재 이유를 모두 포괄하며 인간에게 깊은 포옹을 전달하는 곳들이다. 주변의 빛을 머금은 연못으로 관람객을 초대해 자연스럽게 공간에 녹아들도록 하는 도쿄도현대미술관(東京都現代美術館)을 떠올려보자. 오노 요코(Ono Yoko)에 의해 〈Cloud Piece〉라는 제목이 붙은 창문 너머의 구름은 에드먼드 후설(Edmund Husserl)이 주창했던 현상학적 환원이 그러했듯이, ‘대상에 대한 객관성을 버리고 직접 인식하는 체험이 무엇인지 살갗으로 느끼게 한다. 비정형의 독특함으로 무장해 공간개념의 틀을 깨버린 라빌레뜨 공원(Parc de la Villette)의 파빌리온은 어떠한가. 벽 위로 끝없이 정렬된 직선들이 관람객으로 하여금 미술관의 구조 그 자체에 흡수되도록 한다. 그런가 하면, 베를린의 유태인 박물관(Jewish Museum)에서는 침몰하는 배의 침전을 경험하게 된다.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정신적 탐구가 끝없이 이루어지는 이곳의 기본 구조가 하나의 지그재그 선처럼 보여 개념적인 의미까지 전달하기 때문이겠다. 현상학의 주된 관점은 생활세계’, 즉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상적 삶의 문맥에 있다. 그렇기에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끊기고 만 시대의 선을, 시의성 있는 공간에서 다시금 기억하는 것은 의도된 바보다도 어렵지 않다.

 

 

3-2.


 인간의 감각이 스스로 무언가 흡수할 준비를 마쳤다면, 바로 그때 미술관의 관람객들은 모든 것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 건물의 정중앙에 서 있는 관람객에게 미술관 벽과 천장이 이야기를 속삭이는 과정은 결국 미술건축이라는 두 가지 예술 장르가 인간에게 가까워지는 방법으로서 가장 유효한 것이기도 하다. 미술관이 지어지는 과정에 몸과 살갗이 작게나마 숨어있다면 이전의 미술관이 차지하던 높은 지위는 박탈당하고, 유미주의에 갇힌 성전으로서의 미술관 또한 금세 녹아내리게 될 것이다.

 고뇌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고뇌하는 공간을 바라본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발걸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미술관의 공간이 그들을 바라본다. 비록 미술관의 탄생은 제국주의 및 서구중심주의와 평행선상에 있을지라도, 시민의 참여와 커뮤니티와의 소통 및 협업이 중시되는 오늘날 미술관의 발전 방향을 생각해본다면 미술관은 그 자체로 고뇌의 주체이다. 이처럼 그 역할이 크나큰 변화를 겪게 된 공간에서 몸과의 관계를 고찰해보는 것은 굳이 후설이나 메를로-퐁티를 인용하지 않아도 명백한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인간에게 다가가는 미술관의 파티션들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공명을 일으킨다. 공진하는 고요함 속에서, 시공간으로부터 해방된 미적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건축물은 마치 인간과 같은 사유를 지속한다. 그 결과로 우러나오는 진실성은 관객과 두 갈래의 예술을 동시에 가깝게 할 수밖에 없다.

 

 

4.


 결국 예술이 별거냐, ‘이들 예술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말하는 미술관 건물 자체가 예술이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에 의한 것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몸을 내어주며 대화를 시도하는, 그리하여 사람들을 가득히 안을 줄 아는 미술관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유서 깊을 필요도, 최첨단일 필요도 없다. 그저 친절하고 어렵지 않게 대화와 포옹을 선사하는 곳이라면 마냥 기쁜 곳이 될 테다. 세계 안에 체화된 존재의 경험을 극대화하라고 했던가. 은빛의 스틸이 인간과 공유하는 것을 찾으라면, 그것이 곧 미술관일 수 있어야 한다. 예술가들의 철학이 결합을 이루어 콘크리트 위에 흩뿌려질 때, 이 과정이 미술관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풍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관람객은 놀랄 수밖에 없다. 어렵지도 않고, 딱딱하지도 않기에

Posted by 황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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