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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브맘(Dovemom)》 전시 포스터

 

 

작가 김아람은, 개인전 《도브맘(Dovemom)》을 통해 ‘도브맘’으로 행세하기로 결심한다. ‘도브맘’이 대체 무엇인가 하면, 말 그대로 ‘비둘기 엄마’라는 뜻인데, 관련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의문이 있겠지만, 일단은 ‘도브맘’이 되고자 하는 김아람의 계획이 《도브맘》에서 어떻게 성취되는가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도브맘’이 되기 위한 김아람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비둘기를 포획한다. 비둘기를 진료한다. 비둘기에게 건강상의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숙소로 데려간다. 비둘기에게 이름을 주고(“후추”), 5일간 동숙한다. 동숙이 끝나면 포획한 장소를 찾아가 방생한다. 이 과정에서, 김아람이 취하는 대부분의 행동은 기록된다.

 

전시는 이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김아람은 “후추”와 보낸 시간을 선별해 전시장에서 상영하고, 동숙한 이부자리를 옮겨 놓고, 일기를 전시하며, (아마도 동네 사진관에서) 함께 촬영한 사진을 걸어 놓는다. 또한 작가는 자신이 사용하는 노트북을 전시장 가운데에 놓아두었는데, 만약 시간이 충분한 관객이라면 가공되지 않은 영상 로데이터(Raw Data)를 전부 관람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도브맘》은 작가가 후추와 함께 한 5일에 대한 상세한 아카이브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둘기와 짧게나마 반려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수행은 다른 동물을 대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듯하다. 생활 반경이 도심으로 제한된 집비둘기(Columbia livia domestica)종은 널려 있는 음식물 찌꺼기를 섭취하며 빠르게 번식했기 때문에, “하늘의 쥐”로 불리며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2009년, 환경부는 ‘야생동식물보호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예고하며 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로 분류했는데, 이런 분류는 불특정 인구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83%에 달하는 지지를 얻기도 했다.[1] 이제 비둘기는 “하늘의 쥐”, 혹은 “닭둘기”로서 도심의 밈(Meme)에 가깝고, 비둘기가 기독교적 서사 안에서 성령의 기적을 의미하는 평화의 상징으로 쓰인 적이 있다는 과거는 놀림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아람은 ‘도브맘’을 자처하는 것으로 혐오스러운 것과 함께하며, 짐짓 타자를 환대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그렇다면 《도브맘》은 선한 성격의 프로젝트다. 불특정 타자를 포획한 뒤 그를 위해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으로 다변적 형태의 네트워크를 제시하려는 《도브맘》의 기획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작은 동물과 관계 맺으며 상호작용하고 지도 그린다는 미술의 쓰임을 확장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타자와 ‘대화하는’, ‘착한’ 미술은 이미 나름의 작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선량한 기획들은 종종 축복이 되기를 바라는 낮은 목소리의 기도 같은 것이 되어, 예외적 위치를 점하고자 애를 쓴다.

 

그렇지만 이 미끌미끌한 서술은 얼마만큼이나 사실일까? 위와 같은 친절함, 혹은 용감함 사이에서, 미술은 자주 기만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위에서 “예외적 위치를 점하고자 애를 쓴다”고 적은 것은 쓴 그대로의 사실이다. 이런 종류의 미술은 윤리적 딜레마를 자아내고 그것을 차지함으로써, 미적인 것을 위한 질문이 윤리적인 것을 위한 질문이 되게끔 왜곡한다. 판단의 장이 이처럼 왜곡된다면, (세계가 아니라) 미술에 대해 묻는 것은 치사하거나 심지어 비윤리적인 일이 된다. 허나 좋은 것이 곧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 곧 좋은 것이라는 규칙이 분할되었다고 하더라도, 둘 중 어느 측면도 완전히 극복된 적은 없기에, 미술은 언제나 ‘윤리적인 것을 매개하는 재배치의 장’인 만큼이나 ‘소수가 공유하는 내부자 게임의 문법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미술이 타자를 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기도하듯 말하는 장면은 가끔 스스로의 위선을 가리는 깔끔한 장막을 만드는, 기만적 행동으로 마무리된다.

 

《도브맘》을 사례 삼아 살펴보자. 이 선한 프로젝트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 타자를 환대하기 위해 타자를 포획할 수밖에 없는 이 기획은, 미술이 “다변적 형태의 네트워크를 제시”하거나 “삶의 일부를 공유” 하려 들 때 만들어내는 특유의 모순을 자가 폭로한다. 후추는 원했기에 붙잡혔는가? 미술을 위해 희생하는 비둘기가 동물학적으로 가능할까? 김아람은 후추를 포획한 뒤 동물병원으로 데려가 진료하는데, 이것은 후추의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조류 인플루엔자(AI) 등의 인수 공통 전염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김아람은 후추를 ‘환대’하지만, 동시에 후추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를 느낀다.

 

그렇지만 이런 양가성은 이미 전시의 주제 중 하나다. 나아가, 김아람은 기록된 영상에서, 내내 신기할 정도로 진솔하게, 혹은 투명하게 행동한다. 작가는 ‘무엇으로서의 예술가’를 위한 제스처를 취하는 대신, 자신을 그냥 김아람으로 내버려 두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영상의 어떤 내러티브는 자연히 희극적인 것이 된다. 그건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작업을 위해 비둘기를 포획하고자 나선 작가는 비둘기가 생각보다 쉽게 잡히는 동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좌절한다. 비둘기는… 그러니까 길고양이와는 다르므로, 떼로 모여서 바글거리고 그 후추색 군집은 부담스럽다. 그 때문에 작가는 비둘기를 초대하거나 달래가며 꾀는 것이 아니라, 장갑을 끼고, 먹을 만한 것을 던져주며, 마치 사냥꾼과 같은 태도로, 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김아람은 마치 사냥꾼과 같이 강인한 사람은 아니므로, 계속해서 독백한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고 한 번만 말해줘. 이것은 윤리적 딜레마 앞에서 고민하는 사람의 태도라기보다는, 미적 해프닝을 일으키기에 앞서 주저하는 사람의 태도처럼 보이므로 희극적이다.

 

 

〈Dovemom〉, 단채널 영상, 2019

 

 

심지어, 작가는 포획 과정에서 익명의 행인으로부터 꾸중을 듣기도 한다. 김아람이 반쯤 망연자실한 채 비둘기 떼를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행인은 지금 이거 허가받고 하시는 일이냐고 따져 묻는데, 그가 그렇게 작가를 힐난하는 이유는 비둘기한테 좀 좋은 걸 던져주시지… 몸에도 안 좋은 짠 걸 던져주시면서 그렇게 하시는 게 그의 입장에서는 아유 아무래도 불편하고 마땅찮기 때문이다.[2] 계속되는 타박 앞에서 작가는 작업과 작업이 지니는 미적 의미를 충분히 항변하지 못한 채, 다만 작업을 끝낼 수 있게 좀 지나가 주시라고 (짜증을 조금 섞어) 요청할 따름이다. 결국 행인은 지나쳐 가지만,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는 듯 또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작게 말한다. 진짜 비둘기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었어… 여기서 ‘도브맘’이 필요로 하는 윤리적 우위는 흔들린다.

 

 

〈후추엄마1〉, 단채널 영상, 2019

 

 

끝까지 뭔가 ‘랜덤한’ 순간으로 가득 한 《도브맘》의 서사에는, 환대하고 관계 맺는 미술(들)에 대한 코멘트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다. ‘무엇으로서의 미술가’로 행세하는 일에 그렇게까지 몰입하지는 못하는 것 같은 김아람은, 후추와 동숙하는 동안 치킨(!)을 시켜 먹고, 노트북 위로 분변을 흩뿌려 놓은 후추를 진짜 죽이고 싶은데 저걸 어떻게 죽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전시는 관계적 네트워크를 창출하는 느슨한 미적 실천쯤으로 보인다기보단 어느 예술가의 기이한 프로젝트를 촬영한 다큐멘터리 같은 것과 비슷하게 보인다. 전시는 환대-관계를 위해 필요한 암묵적인 법칙 같은 것을 보기 좋게 무시하지만, 비평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기 때문에 꽤 흥미롭고 또 아이러니하다. 후추와 함께 한 5일을 회고하는 영상에서, 작가는 본인이 느낀 바를 두서없이 서술한다. 이 자기 회고에서, 김아람은 본인이 연출한 딜레마가 생각보다 꽤 거대하다는 사실을 알고, 생각보다 “존나 괴로”웠다는 것을 체감하지만, 유사-반려동물화된 후추와 보낸 5일이 생각보다 즐거웠다는 사실 역시 인정한다.

 

 

〈후추엄마3〉, 단채널 영상, 2019

 

 

5일간의 동숙이 끝나자, 후추는 작가에 의해 방생된다. 후추는 무리로 순식간에 섞여 들어가고, 무리로 섞인 후추는 다른 비둘기들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후추는 허무하게 잡힌 것처럼 허무하게 떠난다. 《도브맘》은 흥미롭게 허무한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만약 후추와 김아람의 이야기를 타자와 관계 맺는 도구로서의 미술에 대한 비유, 혹은 우화로 읽는 게 가능하다면, 냉소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허무한 ‘도브맘’의 이야기는 그와 같은 시도들이 사실 미술을 통해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노출한다. 이처럼 관계가 선택하고 만들어내는 것도, 또 끝내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면, 미술의 영역에서 유행했던 그 수많은 만남의 순간들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만남을 위해 설계한 미적 프레임 안에서 부적응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김아람의 전시는 이런저런 질문을 제기하고, 이와 같은 물음 역시 그 다양한 질문의 일부가 된다.

 

 

《도브맘(Dovemom)》 설치 전경, 2019

 

 

 


[1] 「“비둘기 싫어요”…‘평화의 상징’에서 ‘닭둘기’ 된 사연은?」, SBS News, 2017-10-24,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450533

[2] 허나 작가가 던져준 먹을거리는 과자 ‘아이비’로, 과연 그것이 비둘기에게 몸에도 안 좋은 짠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Posted by 황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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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스트리트 뷰로 바라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물


언젠가, 어디선가 ‘국립현대미술관을 좋아하면 힙스터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한 기분이 되었던 적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힙스터요…? 힙스터 농담이라는 게 이제 얼마나 쑥스러운 것이 되었는지에 대해 상기하기에 앞서, 그 지루한 허허벌판에 무슨 세련미가 있다고 그런 소리가 떠도는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종류를 막론하고, 현재 공간은 ‘인증샷’을 위한 배경 역할을 하느라 1차원적으로 소비된다. 이런 환경에서 대부분의 공간적 경험은 파편화되는 한편 균질화되는데, 서울에는 이제 해상도가 적당한 각종 공간이 많고 그러므로 미술관이 차지할 수 있는 입지라곤 그저 소박한 것으로 보인다. 개중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공적 입지의 거대 미술관이 매개할 수 있는 경험은 경쟁력이 없어 보이고, 그 때문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이제 ‘청년 문화 감상 인구’ 쯤으로 넓게 풀이될 수 있는 ‘힙스터’에게 인기 있다는 사실은 납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국립현대미술이란 어떤 공간으로 알려지고, 또 활용되고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몇몇 지인에게 개인적으로 문의했고, 그 결과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상을 수집할 수 있었다.


J (95년생, 재료공학): 서울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술관을 일상적으로 갈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외관이 크고, 시설도 되게 많고, 직원도 친절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아서 그런지 작품은 난해한 감이 있었지만, 볼 게 많아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찾았던 때가 여름이었는데, 앉아서 쉴 곳도 많아 여유로운 느낌을 받았다.


B (94년생, 경영학): 서울관은 가성비가 좋다. 대림미술관 같은 데보다 볼 것도 많고, 넓고 좋다. 동행은 작품이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긴 했는데, 나는 좋았다. 밥은 근처에서 먹었는데 별로였다. 밥 먹으려면 근처 말고 다른 데로 나가는 게 낫겠더라. 근데 거기 근처가 다 비싸긴 하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대부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의미한다. 또 재미있는 언급처럼 보이는 것은 외관이 큰”, “넓고 좋은건축이다. 서울관의 넓은 부지는 전시 경험 이상의 체험을 제공한다. 여기저기 앉아 쉬기 좋고 사진을 찍기도 괜찮은 서울관의 주변 공간은 종종 인스타그램을 주 채널 삼아 활동하는 소규모 개인 사업자의 제품 촬영 장소로도 흔하게 쓰이는데, 어쩌면 이것이 힙스터는 국현을 좋아한다는 소문의 기원이다. 더하여, 놀랍게도 몇몇의 관객은 여전히 전시와 작품을 의식한다. 서울관의 전시는 난해한편인데, 어쩌면 이 사실은 대림미술관 등의 전람회형 전시에 비해 서울관이 현대적 미술관으로서 나름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신비롭게도, 서울관이 지니는 외연은 여러 대중 지향형 미술관에 비하면 비교적 넓어서, 모종의 대중적 접면을 확보하는 동시에 미적인 전시를 수행한다.


물론 이 같은 인상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관객의 눈에 난해한전시가 직선적으로 현대적기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넓은 부지 중 대부분을 휴식 공간쯤으로 내버려두는 공간 활용은 미술관이 공간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허나, 서울관의 입지는 애초에 이렇게 고려되었다. 뉴욕 현대 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처럼, 조르주-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Pompidou)처럼, 또 테이트 미술관(Tate Modern Museum)처럼, 서울관은 서울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고 그리고 또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한국 미술의 상징적 공간이 되고자 했다. 과천, 그리고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공간으로서, 한국의 가장 동시대적이고 세계적인 기관으로서. 하지만 뉴욕 현대 미술관과 같은 글로벌한 공간과 비교할 때, 국립현대미술관의 약점은 명백했는데, 뉴욕 현대 미술관의 소장품이 15만점에 달하는 데에 비해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수는 그 4.7% 남짓에 해당하는 7000여점에 불과하고, 예산 역시 크게 부족해 유명 작가의 대표작을 꾸준히 구입해 소장하는 것조차 어렵다는 점이었다. 서울관을 건립할 당시, 미술관은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대형 미술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동시대적 미술을 중심으로 의미 있고 특색 있는 기획 전시를 추구하는 한 편 미술사형 미술관을 벗어나 복합문화공간으로 정체화하는 등, 새로운 형태의 소비자-관객에게 적응하기 위한 경영적 시야를 적극 도입하고자 계획을 세웠다.[각주:1]

 

미술관의 재정 구조를 개편하기 위한 특수 법인화 계획이 논의되었던 것 역시 서울관이 건립 당시 표명했던 위와 같은 비전에 호응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10여년 넘게 특별한 진전 없이 정체되던 특수 법인화 논의는 2018 6월 전면 철회되었다. 찾아보아도 철회 사유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이 발표된 적은 없는 듯 한데, 법인화가 서울관의 장기적 비전 중 일부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였다면 이 조용함에는 문제가 있다. 그 필요가 사라진 이후의 미술관에 어떤 전략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도, 함께 조용히 하겠다는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18년 연말부터 2019년 초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몇몇 변화가 있었다; 관장이었던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Bartomeu Mari Ribas, 53)가 퇴임하고, 윤범모(67) 동국대 석좌교수가 새로운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윤범모 관장의 임명이 발표된 이후 미술계는 한 동안 시끄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장 선임을 위한 고위 공무원 역량 평가 과정에서 최종 후보자였던 김홍희(71), 윤범모, 이용우(67) 중 이용우 후보자만이 유일하게 평가를 통과했지만, 문체부에서 이후 자체적으로 재평가를 실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재시험이 인사 규정 상 절차적으로 문제가 없고, 또 재평가 과정에서 최종 후보자 3인이 모두 탈락 커트라인을 넘어 합격점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합격자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굳이 역량 평가를 재실시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재평가가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특정 후보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서 실시된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최종 후보자이자 1차 역량 평가의 유일한 합격자였던 이용우 전 광주비엔날레재단 대표이사는 입장문을 통해 정의구현의 차원에서, 그 어느 때 보다도 기대와 소망을 많이 걸었던 이번 정부인데 참 많이 아쉽다. 촛불혁명은 깨어난 시민, 국민들이 이루었는데 정치인들은 열매나 즐기며 문화예술계를 너무 쉽게 보는 것은 아닌가.”라며, “국립현대미술관의 장도를 바란다.”라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매체에서 문체부의 결정을 비판했지만, 아직 문체부는 공식적으로 해명하지 않았고, 나는 그냥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궁금하다.


취임 간담회에서 발언하는 윤범모 관장. 3월 5일 열린 취임 간담회에서 윤범모 관장은 "비판에 대해 더 열심히 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답했다. (사진 출처: 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305_0000576749&cid=10701)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 계획이 철회된 사실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 맞이 중기 운영 혁신 계획안을 발표하던 현장에서 함께 알려졌다고 한다. 철회 사실이 법인화와 관련된 간담회가 아니라 중기 운영 혁신 계획안을 발표하던 현장에서 갑작스럽게 공지된 만큼, 철회와 관련된 세부 사항은 공지되지 않았다. 다만 이에 대해 문체부 차원의 견해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당시 발표 현장에서 발언한 박위진 기획운영단장의 말을 따르자면, 법인화 논의를 백지화한 데에는 예측 가능한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문체부 차원의 목표가 있었다고 한다.[각주:2] 예측 가능한 미술관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문체부에서 상정한 해석이 궁금해지지만, 편히 해석하자면 그것은 고정된 절차 아래 굴러가는 미술관 운영을 뜻할 듯도 하다. 적절한 기획 주제를 선정하고, 기관 내외의 적합한 인물/팀에게 충분한 예산과 기간을 주고 연구할 수 있게 하는 체계적 절차와 그를 뒷받침하는 합리적 행정. 이것으로 성립되는 예측 가능한 미술관이라는 비전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당장의 문체부에게 예측 가능한 미술관이란, 정부에서 선호하는 인사를 어떻게든 관장으로 선임하면 만들어지는, 그런 성격의 미술관이었던 것 같다. 체계와 합리성이란 예산을 한 해 700억씩 소모하는 미술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전임이었던 마리 관장이 갖는 위치는 확실했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역사 중 최초의 외국인 관장으로, 특정 계파로 분열된 (진짜 촌스러워 죽겠네!) 한국 미술계에 예외적인 중립의 역할을 기대 받았다. (그가 미술계의 히딩크정도로 불렸다는 사실도 일단 기록해둔다.) 마리 관장은 글로벌한 미술관을 지향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목표에 맞추어, 앤디 워홀, 리처드 해밀턴, 파블로 피카소 등 서양 근현대미술 거장의 작품을 순차적으로 전시할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재정적, 그리고 행정적 차원의 문제가 겹쳐 계획되어있던 앤디 워홀, 피카소 전시 등은 결국 취소되었지만,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은 다원예술 프로그램(감독 김성희)을 개최해 아시아를 비롯한 해외의 동시대적 예술을 선보이는 등, ‘글로벌한 성과가 아주 전무했던 것은 아니었다.[각주:3]

 

바르토메우 마리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과 윤범모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은 서로 무척 다를 것이다. 윤범모 관장은 동인 현실과 발언의 창립 멤버로서 대표적인 민중미술 인사로 꼽히며, 한국 미술계가 서구미술사조 중심적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국 근대미술의 연구자이기도 하다. 반면 바르토메우 마리 전 관장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장으로 일했고, 그렇기에 윤범모 관장에 비하면 활동 반경은 보다 국제적이다. 윤범모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은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이고, 그것은 한편으로 마리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을 포함할 것이다. 지난 3년간 관장으로 하여금 세계적 미술관을 향한 계획을 제출/실행하게 해놓고, 관장을 교체하는 시기가 되자 또 다른 단절을 만들어버리는 것 이것은 무척 소모적이다. 윤범모 관장 시기의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떤 기획과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허나 이런 종류의 단절은 정권이 바뀌고 또 관장이 바뀌면, 다시 전과 전혀 다른 형체 없는 비전이 미술관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게 만든다. 국내 유일의 국립 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이 이처럼 3년을 주기로 바쁘게 달라지는 미술관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생각해보아도 즐겁지 않다.

 

공허로서의 국립현대미술관. 이 표현은 아름다워 보인다. 어쩌면 이처럼 무조건적인 공허로 남는 미술관도 미적으로 의미 있을지 모른다. 허나 완전한 공허는 가능하지 않기에, 미술관은 여전히 관객을 모으고, 예산을 집행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이런저런 연락을 돌리면서 실존한다. 불태우거나 공허로 만들어버릴 수 없는, 실존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싫어도 한국 미술계의 중심적 공간으로 무시해버리기 어려운 존재다.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 직급은 차관급으로 격상, 임명제로 바뀌어야 한다. 3년 남짓에 불과한 짧은 재임 기간 역시 미술관 운영을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미술관의 장기 계획을 수립하고 그를 지탱할 수 있는 행정적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관장의 임기 기간과 직급의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나아가 다양한 결정권과 재량권이 함께 주어져야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문체부의, 나아가 정부의 정치적 지향점을 장식하는 하위 기관이 아니라 독립적인 기관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만약 예측 가능한 미술관이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이 갖는 유일한 비전이라면, 그것은 억지 행정으로 이뤄지는 여태까지의 미술관으로 마무리 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체계와 절차를 위한 비전으로, 장기적 운영을 위한 계획으로 새롭게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다만 안정적 운영이 모든 것은 아니다. 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부분은 최대한 동시대적이고 실험적인 공간으로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믿는다.

 

뉴욕 현대미술관은 올해 10월을 목표로, ‘새로운 MoMA’를 위한 물리적/비물리적 변화를 예고했다. 2019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 간의 휴관을 앞둔 MoMA는 휴관 기간 동안 확장 공사를 진행할 예정인데, 확장된 미술관에서는 그 동안 전시되지 못했던 소수 인종 미술가와 여성 미술가의 작품 컬렉션을 재배치하여 선보일 계획이다. MoMA의 관장인 글렌 D. 로우리(Glenn D. Lowry)는 새로운 MoMA에 대해서 우리의 문화를 형성하는 아이디어를 탐구하고, 우리 시대의 예술로부터 영감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미술관을 실험실, ‘공중이 초대되는 실험실로 정의했던 알프레드 H. 바 주니어(Alfred H. Barr Jr.)의 이상을 참조하고 계승하는 것이다.[각주:4] 이 같은 MoMA의 비전에 대해 평가하기에 앞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면 과거의 미술관과 오늘의 미술관을 연결하고, 또 그를 통해 미래의 미술관을 제시할 수 있는 어떤 연속성이다. 그렇다면 국립현대미술관에게 참조할 수 있는 이상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으며, 만약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여,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이곳이 안정적으로 고이는 공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비전과 실험이 필요할까?

 

오늘도 어제도, 또 무엇도 없는 시대라곤 하지만 여전히 세계는 다양한 산업적/정치적 가능성들이 대두되는 급변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같은 사람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위치를 점할 때, 답답한 마음은 심각해진다. 영원히 지겨울 것 같은 국립현대미술관이지만, 기관이 여러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개선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란다. 또 문체부가 절차적 불공정함에 대해 해명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길 바라며,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 현대 미술의 중추적 공간으로서,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길 바란다. 이외에 더 많은 바라는 점들이 있고, 그 얘기 또한 다음에 어떻게 해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한국을 떠나는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웃는 모습. (사진 출처: 뉴시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1208_0000496737)




  1. 한국문화관광연구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 목적 및 기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건립기본계획연구』, 2009년 [본문으로]
  2. 「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철회… 마리 관장과 혁신안」, 뉴시스, 2018-06-26,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626_0000346656 [본문으로]
  3. 이외에도 마리 관장이 직접 거론한 성과로는 전시와 출판, 소통 능력에 있어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조직개편이 있다. 「임기 2년 맞은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매일경제, 2017-09-19, http://news.mk.co.kr/newsRead.php?sc=30000001&year=2017&no=629625 [본문으로]
  4. 뉴욕 현대미술관 웹페이지 참조, https://www.moma.org/about/new-moma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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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Y: 더 그레이쉬 미러 비트윈 블랙 앤드 화이트>


박정우



M.칼리니스쿠는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Five Faces of Modernity(1987)에서, 오스카 와일드의거짓의 시대Decay of Lying(1889)’를 인용하며 모더니티와 키치의 관계를 비평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때 자연이 예술을 모방했고, 마치 어떤 일몰은 코로Corot의 그림처럼 보이게 되었다면, 오늘날 자연은 그림엽서처럼 아름다워지고자 대량생산된 복제화를 모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말이다. 풍경을 감상하는 수용자의 관점에서 실재와 재현의 매개 관계를 뒤집은 이 역설법은 디지털이 시각적 경험에 관한 모든 프로세스를 하이퍼리얼하게 재매개한 현재의 시점에 적용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발생시킨다. 디지털이미지는 이미지로 하여금 무엇을 모방하게 만드는가?

 

장다해는 디지털 드로잉을 기반으로 회화, 설치, 영상작업 등을 병행하고 있는 미술가이다. 그가 드로잉의 주된 수단으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인그림판 MS PAINT Microsoft corporation의 대표적인 OS Windows 시리즈에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저용량의 래스터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이며, 1995년 출시된 Windows 95부터 2009년에 출시된 Windows 7 이전까지,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일관된 인터페이스를 유지했을 정도로 매우 원초적인 기능만 제공하였다. 2D 이미지 제작을 위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Adobe Systems Photoshop, Illustrator등과 비교하면 대부분의 디테일한 설정이 불가능하고, 해상도가 낮으며, 타블렛을 사용하더라도 필압이 감지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점은 레이어 구조로 이미지를 편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임의의 형태를 직접 드로잉 하거나, 혹은 프로그래밍된 도형 템플릿을 화면 위에 올려두더라도, 일단 다른 종류의 형태와 겹쳐지고 나면 앞과 뒤를 분리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미지를 구성하는 조형적 단위들 사이에 시공간적 질서가 부재하는 셈이다. 당연히 과정의 일부를 별도로 수정하거나 재구조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지나간 과정은 돌이키기 어려운 회화의 물리적 제약과 직관적으로 유사하지만, 결과는 이질적이다.

 

작가는그림판을 통해 아날로그 드로잉의 섬세함을 가장하기보다는 인터페이스가 강제하는 제약에 따라 다소 조악하거나 둔탁할 수 밖에 없는 조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만나거나 엇갈리는 외곽선들의 관계, 화면에서 색면들이 차지하는 시각적 무게감 등을 긴장감 있게 조율하여 조형적 질서를 구성한다. 그런데 아무리 섬세하게 다듬는다고 해도, 색감이나 윤곽의 형태에서 여전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그림판스러움, ‘페인팅을 디지털로 재매개하는 초기 과정의 기술적 한계가 번들 소프트웨어라는 이유로 꾸준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하이퍼매개적 특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장다해는 디지털 드로잉에 기반한 조형감각에 인터페이스-특정성을 부여하고, 이를 회화, 영상, 꼴라쥬 등 각 형식의 지지체가 일종의 모듈이나 템플릿으로 여겨지는 상황과 연동시키는 방식으로 매체특정성을 전유한다.

 

그렇다면 정작 회화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는 어떠한가? 첫 개인전 제목인 <Built-in>은 회화에 대한 인식을 인테리어의 개념으로 약호화한다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작가는 황재민 비평가와의 인터뷰에서빌트인옆면의 문제를 다루는 단어라 생각했다고 함축적으로 답변하는데, 이는 벽면의 일부가 된 사물들의 평면적 상태와, 벽면으로부터 돌출된 캔버스 두께의 인식론에 대한 미술사적 함의를 동시에 연상케 한다. 마찬가지로가변형 벽체라는 제목 역시 벽 표면의 가변성과 벽 자체의 가동성을 동시에 상기시키면서, 입체이면서 평면이고, 물질이면서 이미지인, 회화의 양가성을 진동하게 만든다. 또한 인테리어의 맥락 안에서 회화가 갖게 될 위상이 어떠한가를 생각해보면 결국 <Built-in>이라는 제목은 회화의 처지를 약간은 자조적으로 의식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 그리는가, 무엇을 그리는가, 어떻게 인식하는가, 어떻게 제시하는가, 이 각각의 단계와 맞물려 있는 일련의 조형적 알고리즘은, 언뜻 보기에 투명해 보일 정도로 명확한 재귀적 구조를 형성하는 탓에,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 외부의 질서가 작품 내부의 질서에 종속되어 보이는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장다해의 작업은 매체와 이미지 사이에 놓여진 거울의 회전운동 같은 것으로서, 깨끗하고 단단하지만, 결코 투명한 것은 아니다.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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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관통하는 ''

 

이양헌

 

*아트인컬쳐 2018 8월 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위대한 역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인간이 만든 가장 특수한 개념체로서, 그것은 원래 시작과 끝이 정해진 닫힌 텍스트였으며 그 결말에는 언제나이 설정한 궁극의 구원이 쓰여 있다고 전해진다. 이 예정된 섭리는 계몽주의와 실증주의 사관이 등장한 이후에도 소거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낙관적인 그러나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로 투영되어 세속화된 채 구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보를 향한 이 목적론적 매개-고리가 끊어진 건 아마도 유토피아적 열망으로 구축되었던 사회주의 체제가 베를린 장벽과 함께 완전히 무너진 이후일 것이다. 역사가 이미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 그리고 대사건이 모두 소진되었다는 믿음 사이에서 바야흐로역사의 종말이 선언되었다.

 

역사와의 절연 혹은역사-없음으로 지루하게 정체된 오늘날, 육근병은 상당히 오랫동안 역사의 형상들을 추적해왔다. 무덤과 심장박동, 탯줄을 닮은 통로, 아이의 울음소리와 같은 모티프들은 그 자체로 동양적인 자연관이나 종교적인 제유로 치환될 어떤 추상적인 당위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은 어떠한가? 초역사적인 주체의 자리, 삼라만상을 관조하는 역사의 증인이자 세계를 담지한 극소체로서 거대한 봉분 위의 시선은 복잡한 인과율과 사건의 집합 너머에 어쩌면 부동의 도표가 존재하리라는, 나아가 그것을 읽어낸다면 시대를 추동하는 근원적인 원리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의지를 표상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사주의가 파산한 이후 계승할 수 있는 과거와 새로운 미래가 거의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서술은 신비주의를 넘어 차라리 반시대적으로 느껴진다. 황혼이 되어서야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이미 떠나버리지 않았던가.

 

열두 개의 비디오가 원형으로 배치된 <십이지신상>에서 전면으로 교차하는 스크린들 사이로 역사적 형상들이 출현하고 때때로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들은 모두 근대사를 이루는 기념비적인 인물들이며 동시에 지난 세기 가장 강렬했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회억의 계기들이라 할 만하다. 붉은 혁명가와 위대한 선지자들, 비극으로 각인된 존재들이 유령처럼 출몰할 때, 순차적이었던 사건의 배열은 공시적인 풍경으로 전환되고 다()시간의 착란 속에서 이곳은 과거를 잊은 자들을 위한 소극의 무대가 된다. 그러나 유령-이미지 뒤에서 다시 등장하는과 잠시 잊고 있던 아이의 심장박동이 들려오는 순간, 이 기념비들은 파편화된 기억으로 과거를 호출하는 목가(牧歌)가 아니라 현재주의와 경합하며 보편사를 세우려는 송가(頌歌)였음이 분명해진다. 또 다른 작품인 <생존은 역사다시간 속의 시간 –>에서 인류사의 어두운 기억들을 간직한 사진은 어째서 역사적 아카이브가 전쟁과 폭력, 재난과 같은 트라우마와 자주 연결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병치된을 통해 그것이 망각에 묻힌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과제였음을 상기시킨다.

 

역사가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이질적인 서사를 누락하고 몫 없는 자들을 배제해왔는지 잊지 않았다면, 대문자 히스토리를 복권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그러나 탈역사적 냉소주의는 우리를 붕괴된 시공과 세계 없는 세계들, 기한이 만료된 전거들이 흩어진 폐허의 잔해 위에 도착하게 할 것이다. 육근병이 만든 오래된 형상 중 하나인 <풍경의 소리 + 터를 위한 눈>에서 산 자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무덤 위로 무구한 아이의 눈이 재생되고 있다. 시선은 어디를 향하는가? 종결이 유예된 다공성의 역사, 종합을 부정하고 순간으로 파열되는 불연속의 역사 그럼에도 미시사로 환원되지 않는 보편의 범주를 다시 요청하는 역사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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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윤리를 나누는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홍양무현(맥주)

 

예술과 윤리를 나누는 이분법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20021) 11월 아라키 노부요시의 전시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2)가 열렸고, 20032월에 [Anti Araki ]3)이 열렸다. 20084월 김홍석의 전시 [밖으로 들어가기]4)의 퍼포먼스 및 설치 작업 <Post 1945>5)가 공개되었고, 그에 따른 안티퍼포먼스6)가 같은 해 5월에 진행되었다. 안티아라키전의 주체는 영 페미니스트 미술가 연대7), 안티퍼포먼스의 주체들은 민주성노동자연대, 성노동네트워크, 여성주의 지향 블로거 모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성노동 팀, 인터넷 공지를 보고 온 개인 참가자등 다양했다. 영 페미니스트 미술가 연대는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며 비판했고, 안티퍼포먼스 참가자들은 <Post 1945>가 성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이용했다고 지적했다.

영 페미니스트 미술가 연대는 일민미술관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방식과 대항하는 전시를 갖는 다양한 방식을 취했다. 안티퍼포먼스의 퍼포머들은 김홍석을 찾는 이에게 120원을 주겠다는 피켓을 들고, 성명서를 낭독한 후 내가 창녀다라고 외치며 전시장의 외부 현관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갤러리 측으로부터 30여분간 입장이 저지되었다.

이러한 행동들이 미술이냐 활동이냐를 나누어보는 것보다는, 행동의 수용자-기대 관객-가 누구인지 생각하고, 수용자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다가갔는지의 방법론에 따라 판단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전자는 여성 이미지를 대상화한아라키와 전시에 대해 무비판적인 언론과 미학적 논의 외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8) 미술계에 대해서 날을 세웠으며, 후자는 김홍석 작가와 제대로 된 비평 하나 내놓지 않는9) 미술계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흥미롭게도 두 사례 모두 현실과 괴리된 미술계의 모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아라키 사진의 여성 대상화, 포르노적 시선을 지적한 전자의 문제의식에 대응하듯 2017D.S.O.10)는 불법촬영 영상 유포와 성폭행 모의 등의 플랫폼으로 기능했던 웹페이지 소라넷 폐지에 크게 기여했다. 2018년에는 아라키 노부요시의 모델이었던 카오리로부터 합의없는 누드 사진 촬영과 출판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터져나왔다. Anti Araki 전 기획팀의 문제의식과 한국의 포르노 산업 및 유통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11로 병치시키는 것은 섣부른 일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여성 신체 이미지를 다루는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는 데 동의한다면 여성 피사체를 대할 때 발화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작품 내에서의 거리감을 어떻게 확보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후자도 마찬가지인데, 성노동11)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성착취’, ‘성매매’, ‘성노동등 여러 용어가 쓰이고 있으며, 이에 따른 여러 가지 견해들이 존재한다.12)

 

사실, ‘윤리를 다루며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상찬받는 작업물들의 면면들을 살펴볼 때, 대부분의 작업물들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발화자의 위치와 연관지어 생각해보았을 때 아쉽게도 그다지 파격적이지 않다.

특히 여성의 목소리가 삭제된, 여성 신체 이미지에 대한 작업물들은 세계관 자체의 구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작업물들을 예술로서 호명하고, 그에 더해 윤리에 저항하는 예술이라는 구도를 만들어 호의적으로 해석하고 비평을 풀어놓는 저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에게 이로운가?

 

'문제적' 의견은 어디서부터 '문제'와 구분되는가?

 

20185월 합정지구에서 미러의미러의미러13)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논의해볼 여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권용만과 한솔의 영상들에 대해 다루기로 한다.

 

권용만의 영상물 <Mondo Corea:TakeFIVE>5분간 웃어볼 것을 제시하는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두고, 금기시되는 여러가지 일들- 자위, 유아의 욕, 십자가나 성경책의 훼손 등-이 저질러지는 현장들을 담아낸 영상들을 병렬로 세워놓는다. 이 영상물이 만약 흥미로울 수 있는 지점이 있다면, 영상의 내용이 금기와 전복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이미지의 촬영과 편집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낮아졌고, 그에 따라 금기에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내용들이 웹-공공- 공간에 공유를 허락하는 방식으로 다수 제시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영상을 보면서 크레딧이 꽤 길 것을 각오했고, 그 뒤에 숨은 개인의 욕망들을 맞대면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권용만은 출처를 밝히고 인용 표기를 해야 할 엔딩크레딧에 모든 영상과 텍스트의 출처는 유튜브14)라고 제시했다. 이 영상이 개개인의 금기에 대한 도전 의지를 보여주며, 사회적 합의의 공고함에 균열을 내려는 자가 바로 당신의 옆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상정하기를 제안한다고 여기기 위해서, 출처 제시와 인용 표기는 구체적으로 드러났어야 한다.

또한 크레딧 말미에 매어달린, 소스로 사용된 영상들을 동의나 추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음이라는 변명은 부적절하다. 시각이미지 작업자라면 자신이 내놓은 이미지가 어떤 정보값으로 다가갈지에 대해서는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열어 놓아야 한다. 작가 자신의 의도를 설명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작업노트 등 작품과는 거리를 둔 방식으로 관객에게 제공될 필요가 있다. 작가의 의도를 굳이 크레딧에 명시하는 것은 군더더기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

 

한솔의 <메루메루빔>15)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청소년기 때부터 성노동을 해왔음을 암시하는 메루메루의 글을 모사하는 듯한 이 영상은 내가 자살하면은 성노동 혐오자들 때문일까 아님 착취당해서일까라는 불가능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이 불가능한 이유는 성노동 혐오자들착취는 같은 비교선상에 올라올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비슷한 무게로 뒤섞어버리는 것은 개인의 인생사 속에서 한시적으로, 그리고 느낌적으로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한솔은 작가가 응답해야 할 지점을 메루메루라는 당사자성을 지닌 개인에게 넘겨버림으로서 책임을 회피한다.

한솔의 태도는 비도 오고 그래서16)의 가사를 개사하여 사용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원본의 가사 중 인상적인 것은 비도 오고 그래서 네 생각이 났어,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랬던 거지, 별 의미 없지’,‘어차피 이 밤이 다 지나가면은 별 수도 없이, 난 또 한 동안은 널 잊고 살테니까, 내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갈 테니까등이다. 전시장에 게시된 한솔의 작업 설명이 말하는 대로 메루메루를 추모17)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자기연민의 태도와 개념상의 무게균형이 맞지 않는 균열 지점을 메루메루에게 넘기며 회피하는 태도의 한 쌍은 그 의도를 배신하고 있다.18)

 

권용만과 한솔의 영상물들을 작품으로서 화이트큐브에 내어걸었다는 것은, 기획자가 생각한 대로, ‘윤리와 도덕, 사회적 합의에 저항하는 예술이라는 이분법의 세계관이 내놓은 처참한 결과물이다. 하나의 윤리를 상정하고, 그 반대값으로서의 예술을 보여주기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윤리라는 범주를 좁게 그어놓는 것이 누구인지, 그 범주화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가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안타깝게도, 기존의 윤리로부터 한시적으로나마 보호받을 수 있는 자들이 윤리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여성주의 감각이 없는 자가 여성 신체 이미지를 다룰 때, 그는 당사자성을 대상이 되는 여성에게 맡기면서 비판 지점도 함께 떠넘긴다. 이러한 안일함은 쉽게 지적되지 않는다.

창녀일반인(-창녀)’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대상화를 시도했던 김홍석의 <Post 1945>, “내가 창녀다라는 외침으로 그러한 구분에 문제를 제기했던 안티퍼포먼스의 퍼포머들을 보자. 화자 김홍석은 일반인의 위치에 단단히 자신을 매어놓으며, 따라서 <Post 1945>는 초기 설정부터 화자에게 유리하게 조작된 그의 자그마한 세계다. 조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설정한 비겁함은 윤리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미명 아래 감춰진다. 김홍석의 폭 좁은 사회적 범주의 시각화에 대해서 오히려 퍼포머들은 범주화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응했으며, 좁은 질문에 넓은 답으로 다가간 셈이다.

김홍석과 퍼포머들의 문답이 보여주듯이, 개인의 표현이 의견으로서 공적 토론의 장에 올라갈 때에는 발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기반이 필요하고, 그 기반은 예술이라는 매체를 통해 물화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하다. 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의 이해- 하나의 이미지가 공적 공간에서 전시될 때에는 공론화에 동의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거친다는 이해를 기본으로, 예술이라는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예술의 맥락을 제공한 사회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우리는 윤리의 개념을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해나갈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다뤄지는 여러 화두들에 직면할 때, 여성주의 활동은 그 이름대로 적극적으로 움직여 나간다. 예술을 통해 드러나는 의견들 또한 움직임의 일부가 될 수 있고 새로운 화두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이 윤리에 저항한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둘러싼 사회 문제들을 다룬다고 할 때, 많은 경우 그 것들은 문제의 핵심을 빗겨나가곤 한다. 예술로서 나타난 의견과 그 방식이 적절했는지 부적절했는지, 혹은 제시한 화두가 지금 이 공간에 필요한지 아닌지에 대해서 우리는 토론할 수 있다.

 

또다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예술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데 벗 혜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그에 감사한다. 글 내부의 실패 지점에 대한 책임은 나의 몫이다.  


1) 2002년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압사 사건이 벌어진 해이다. 1992년에 벌어진 (고 윤금이 씨를 대상으로 한) 미군 성범죄 사건으로부터 10년이 지난 해이기도 하다. 고 윤금이 씨의 주검 사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태에 대해, 미군의 범죄에 맞서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고인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는 여성 신체 이미지의 사용에 대한 또 하나의 논의과정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홈페이지 http://fc.womenlink.or.kr 에서 윤금이씨 주검사진 게재에 반대한다는 것은라는 이름으로 루나(여성노동센터 회원) 의 글을 검색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윤금이씨 주검사진 게재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 네트워크'는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직접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윤금이씨 주검사진 게재에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이 반미운동이라는 전체 흐름을 균열시키고 '큰 틀'을 파악하지 못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의 공동 적은 미국인데 이렇게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 '우리'에 여성이 포함되었는가.”

2)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 일민미술관. 2002.11.15.~2003.02.23. 관련기사: “섬뜩파격천재 예술성 엿보기”, 주간동아. 전원경 기자. 2002.11.14. http://weekly.donga.com/

3) [Anti Araki ]. 카페 시월. 2003.02.20.~2003.03.02. www.neolook.com/ > 검색어“Anti Araki“

관련기사: “음란물이냐 폭력물이냐, '포르노 정체' 대논쟁”. 한겨레. 강김아리 기자. 2003.02.23.

4) [밖으로 들어가기 In through the outdoor]. 국제갤러리, 2008.04.17.~2008.05.19.

www.kukjegallery.com > EXHIBITIONS > 2008.

5) "혹시 여기 적힌 창녀분?"... "내가 그렇게 보이냐?". 오마이뉴스. 2008.05.02. 김홍주선 기자.

"지금 이곳에는 의도적으로 창녀가 초대되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있는 미술 전시 개막행사에 3시간 참석하는 조건으로 한화 60만원을 작가로부터 지급받습니다. 이 순간 여러분 사이를 유유히 걸어 다니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이 창녀가 누구인지 찾아낸 분은 작가로부터 그녀를 찾은 대가로 120만원을 지급받게 됩니다. 창녀를 찾아봅시다." 퍼포먼스 이후 120만원이 담겨 있었던 빈 금고와 함께 김홍석이 전시장에 게시한 텍스트.

6) "'창녀찾기' 작가 찾으면 120원 드립니다". 오마이뉴스. 2008.05.19. 김홍주선 기자.

7) “미대생들 안티아라키전만들다”. 한겨레. 강김아리 기자. 2003.02.23.

8) 2)와 같은 출처.

9) 5)와 같은 출처.

10) ‘디지털 성폭력 아웃(Digital Sexual Crime Out·D.S.O) 프로젝트’. ‘소라넷 고발 프로젝트’, ‘여성 리벤지 포르노 아웃(Revenge Porn Out·RPO)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거쳤다. 관련 기사: “국내 최대 불법 음란사이트 소라넷폐지 뒤엔 ‘DSO’가 있었다“, 여성신문, 2017.3.7. 이하나 기자.

11) ‘성매매성노동이라는 두 가지 용어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성매매는 반어적으로 성구매자에 대한 논의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며, 성노동은 노동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육체를 활용한 성적 서비스가 감정노동과 엮여 제공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성노동을 사용하였다.

12) ‘우리에게 판타지는 필요없다-한국의 성노동 연구자들에 대한 비판을 참고해보면 좋겠다. 반성매매인권운동 이룸의 홈페이지 e-loom.org에서 읽을 수 있다. 필자 박혜정의 최근 글은 웹진 집단오찬jipdanocahn.com에서 읽을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13) [미러의미러의미러], 합정지구. 기획 이진실. 참여 권용만, 업체eobchae류성실, 이자혜, 한솔.

2018.5.25.~6.24. http://hapjungjigu.com/mirrors/에서 전시서문을 읽어볼 수 있다.

14) <Mondo Corea:TakeFIVE> 엔딩크레딧의 정확한 내용은 이러하다. [사용된 음악. Hector Berlloz-Symphonia Fantastique. 영웅본색2 OST- 여기는 우리가 살 곳이 아냐. 이강영- 19분간 모든 걸 내려놓아요. 사용된 영상. 요양박사 케어닥의 5분 웃음치료 요법 외 다수. 모든 영상과 텍스트의 출처는 유튜브입니다. 제작자는 본 영상에 등장하는 그 어떤 영상이나 메시지도 동의나 추천의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권용만의 다른 영상 <페미네이터:재기의 날>은 엔딩 크레딧이 없다.

15) 한솔, <메루메루빔>, 단채널 영상, 332, 2018. ‘메루메루빔메루메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트위터 계정주@candle_daze의 죽음 이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고인을 추모한다며 돌았던 해쉬태그이기도 하다. <메루메루빔>메루메루의 기록들에 디테일한 부분들까지도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 ‘메루메루의 블로그 글에서 언급되었던, 돈을 벌어 산 물건이 텀블러와 외장하드 등이라는 세세한 부분의 언급까지 같다.

16) 헤이즈 (Heize) - 비도 오고 그래서 (You, Clouds, Rain). 20176월 발표되었다.

17) 한솔의 작업 설명 전문은 이러하다. ‘2018.4.2. #메루메루빔. 나는 메루님의 얼굴을 영정사진을 통해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 나서야 쓸데없이 상황에 경도되어 그녀의 블로그 글과 트위터를 뒤적여 본다. 이 모든 일들이 이기적일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의 이기심과 맞먹는 살아있는 사람의 이기심을 발휘해 그녀를 슬픔의 대상으로 삼아보려 한다. 메루메루의 명복을 빔.’

18) 사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오히려 한솔의 [obstacle race] 등의 다른 작품이 당사자성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는 한솔의 다른 작품을 다른 시점의 전시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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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 대한 폭력 지우기, 예술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나

 

박혜정

반성착취 운동가, 자유기고가


https://twitter.com/hapjungjigu/status/1009013568950362113?s=19 


얼마 전 메루메루라는 트위터 이용자의 자살로 트위터가 떠들썩했다. 메루메루는 21살의 여성으로, 생전에 저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입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본인 블로그에 올렸었고 트위터 상에서 자살해서 트위터계의 아이돌이 되고싶다라는 말도 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올해 봄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 ‘퀴어방송이라는 팟캐스트에서는 4월에 제 96화에서 메루 추모 특집을 방송했고 작가 한솔은 최근 <미러의 미러의 미러>(이진실 기획, 합정지구)라는 전시에서 <메루메루빔>이라는 제목의 비디오 작품을 전시했다. 나는 반성착취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건에 대해 처음 듣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사건을 둘러싼 현실 및 담론 지형과, 이 사건을 다룬 전시에 대한 활동가로서의 생각을 풀어내고자 한다.


나는 10여년 간 반성매매단체에서 일하며 집결지, 룸살롱, 안마, 다방, 휴게텔, 오피, 조건만남 등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유형의 성산업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나왔다. 그 과정에서 약물과다복용 또는 자살, 질병 및 건강 악화로 인한 죽음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여성들에게 법률지원을 하는 과정에서 성착취 남성과 포주들도 많이 만났다. 내가 현장에서 목격한 성산업은 섹스를 사고 파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이 여자의 몸을 능욕할 권리를 5만원, 10만원 주고 사는 행위는 정당한 거래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성착취이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해당 여성이 동의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가부장제 사회는 돈이 없는 여자는 몸을 파는 게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사회화 과정을 통해 여남에게 심어준다. 자원이 없거나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황의 여자를 팔 벌려 환영하는 성산업과 남자들의 수요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해당 여성이 그 행위에 얼만큼 동의했는지를 먼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성산업을 만들어내는 수요를 차단하기 위해 성착취 남성과 알선자를 처벌하고 성을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 노르딕 모델(스웨덴, 프랑스, 노르웨이, 아일랜드 등이 채택)을 도입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10여 년 사이 일부 여성계와 소수자 운동, 좌파 운동 쪽에서 상업화된 성착취를 성노동이라 칭하며 성산업의 완전 비범죄화를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성노동또는 성노동자라는 용어를 쓰는 일반인들이 모두 이런 성노동론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성노동자라는 단어가 성매매 여성등의 단어보다 더 당사자를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서 이런 언어를 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성착취를 성노동이라고 부를 때, 성착취할 권리를 돈을 주고 산 사람을 고객또는 서비스 이용자, 남의 몸을 팔아서 수익을 취한 포주를 사업가또는 운영자로 정당화해주게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성산업 속에 있는 여성들을 피해자화하지 않기 위해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활동가들이 있는데, 성산업 속에서 착취당하는 여성을 피해자로 보지 않겠다는 것은 곧 가해자와 가해 세력이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으며, 엄연한 피해가 발생하는 착취 현장에 눈감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성노동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착취 현장에 눈감는 것을 넘어서, 여성들이 당하는 피해를 주체적인 행위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한 예로, 많은 성착취 피해여성들이 심리적 해리현상을 경험한다. ‘해리는 반복적으로 폭력 피해를 당하는 피해자들이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몸의 감각에서 의식을 분리시키는 대응기제로, 성착취 피해여성들은 흔히 내 몸은 거기 있었지만 내 마음은 창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라거나 정신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천장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성폭력, 가정폭력, 성착취 피해자에게서 모두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해리는 당장의 고통을 덜 느낄 수 있게 해주지만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현실인식능력이 떨어지게 되고 내 몸이 죽어있는 느낌까지 들게 되기 때문에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살을 칼로 긋는 등의 자해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성노동론자들은 이런 의식 분리 현상을 장려하며, 이것이 성노동자로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호주의 성노동자단체인 RhED는 성착취 피해 여성들에게 배포하는 성폭력 예방 매뉴얼에서 통제를 가지는 것이 여러분이 잘 하는 일입니다. 그게 여러분의 일입니다. 가면을 쓰고, 앞에 스크린을 세우고, 여러분이 되고 싶은 사람인 척 하세요.”라고 권고한다. 여성학자 문은미는 소외나 거리두기, 가장하기 등을 성노동이 여성에게 착취적인 노동의 한 증거로 볼 것이 아니라 이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하고1)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이하 여이연’)의 사미숙은 성노동자가 오르가즘을 피하거나 또는 거짓 오르가즘을 연기하는 것은 고객과의 거리두기를 위해서이다. 이것은 성노동자에게 있어 자기 상실이나 섹슈얼리티의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


나는 2016년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주최한 성노동관련 세미나에 갔다가 엄청나게 분노한 적이 있다. 여성학자, 활동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성노동은 무대예술과 같은 예술노동이자 쾌락생산노동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성노동이 무기를 파는 노동보다 나쁘지 않다는 말을 20대의 여남 청중 앞에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관련 세미나에 오는 젊은 여성들이 마주한 현실은 여자에게 차별적인 취업 시장과 여성의 외모를 능력의 하나로 보는 풍토, 성희롱과 성폭력이 난무하는 직장 문화 등 여자에게 적대적인 노동 시장이다. 이런 현실을 마주한 이들을 세계 최고의 거대 성산업이 둘러싸고는 잠깐만 괴로움을 참으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며 어서 오라 하는데, 여성학자나 퀴어 활동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성노동을 주장하며 성착취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상업화된 성착취 현장을 오래 보아온 내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과거에 우리 정부가 기지촌 여성들을 모아놓고 달러를 벌어들이는 산업 역군이라고 치켜세우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폭력과 고통을 감내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실 이런 이야기는 달콤한 마약과 같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아무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가 현장에서 만난 많은 여성들이 이런 데(성착취 업소)가 없으면 일반 여자들이 강간을 더 많이 당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자신이 겪는 현실을 정당화해야만 덜 비참하고, 그 곳에서 계속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메루메루님이 본인의 블로그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제목은 나는 성노동을 너무 사랑하는 성노동자이지만 그 내용은 실상 성착취 현장의 다른 여성들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14살 때 가출했다가 조건만남으로 처음 성착취 피해를 통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돈이 없어 당장 먹을 것과 잘 곳이 궁한 14살 청소년에게 돈을 주고 성착취하는 것은 강간이다. 그는 강간 피해자였고 그 첫 성착취 피해경험 후에도 조건만남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강간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생전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자살충동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수많은 성착취 피해여성들처럼. ‘메루님 추모특집이라며 방송한 팟캐스트 퀴어방송을 들어 보았다. 고인에 대해 모욕적인 표현들이 사용된 것도 문제적이었지만 이 방송의 진행자는 메루가 청소년기부터 성노동을 했다라고 말하는 데서 어이가 없었다. 성착취를, 강간을 성노동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들은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최근 들어서 성소수자 운동 진영의 활동가들이 성노동론을 주장하는 사례가 많고 어떤 여성학자들은 성판매 여성은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성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 나는 레즈비언으로서,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을 일부 퀴어 활동가들이 소수자 정체성으로 매도하는 데 대해 분노한다. ‘퀴어방송의 진행자도 스스로 성노동을 한다고 방송에서 말하는데, 이런 내용을 퀴어한 것으로 가볍게 다루며 방송하는 것이 이런 방송을 듣는 주 청취자인 10, 20대 젊은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고려는 조금도 없는 듯하다.


<메루메루빔>은 노래방 영상 같은 느낌으로 메루메루님의 생전 트윗과 블로그 글 일부를 작가가 촬영한 영상에 노래 가사처럼 입힌 것이었다. “성노동자라서 행복하다”, “난 자랑할 거야 난 섹스로 돈 잘 벌어등의 말들이었다. 노래방 영상 스타일은 고인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기에, 고인을 기리기에 적합한 형식이 아니다. 게다가 그 고인이 14살 때부터 당한 일들로 많은 심리적 고통을 겪었고 결국 21살의 나이에 자살을 하게 된 사람일 때, 이런 작품은 고인이 겪어온 고통에 대한 모욕에 가깝다. 작가는 작품에 달린 캡션에서 이 모든 일들이 이기적일 수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나는 죽은 사람의 이기심과 맞먹는 살아있는 사람의 이기심을 발휘해 그녀를 슬픔의 대상으로 삼아보려 한다. 메루메루의 명복을 빔.”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성착취 피해자의 자살이 어떻게 이기적인 일로 해석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예술의 범주 아래 고인의 죽음을 가볍게 다루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성노동론이 여자들이 몸으로 겪는 고통을 무시하고 이를 왜곡해야만 성립 가능한 이론이자 이데올로기이듯, ‘성노동론을 받아들인 사람이 메루메루님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 또한 생전에 그가 겪은 고통을 무화하고 희화시키며 우리에게 거리두기를 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런 것이 예술인가? 난 잘 모르겠다. 예술의 이름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가볍게 다뤄지며 희화되는 한 예로 보일 뿐이다.


1) 문은미, 성노동은 어떤 노동인가? 친밀한 노동으로서의 성노동, /성이론, 2009. 12.

2) 사미숙, 쾌락생산노동으로서의 성노동,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연속간담회 5, 2016. 5.

3) 원미혜, 성판매 여성의 인권탐색을 위한 시론, 비판사회정책, 200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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