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1)
about (1)
notice (0)
project (35)
column (11)
archive (14)

BLE의 두 번째 기획, 《공간을 투사하는 몇 가지 방향》 포스터

(https://twitter.com/ble_exh/status/1142376396062257153)

 

음악을 듣는다는 경험은 시대의 변화,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발맞춰 바뀌어 온 경험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분야에 있어 가장 유명한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소니가 1979년에 출시했던 워크맨(Walkman)을 빼놓을 수 없다. 워크맨은 헤드폰을 꽂아 듣는 카세트 레코더로, 특히 청년층을 대상으로 하여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말할 것도 없이, 워크맨의 특징은 소형화된 장치를 통해 어디서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동적인 청취 환경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동 떨어진 상태로 청취하는, ‘혼자 듣기(Listening to music alone)’ 경험은 이전의 청취 경험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경험의 양식이었다.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의 중요한 전신 중 하나로서, 워크맨은 음악을 함께 듣는 사회적 행위로부터 분리해, ‘모바일 음악(Musica Mobilis)’의 청취를 보편화했다. [각주:1]

 

하지만 애플이 선보인 아이팟(iPod) 2005년을 기준으로 미국 시장에서 73%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나아가 2007 1억대를 누적 판매하면서 역사상 가장 빠르게 판매된 음악 재생장치라는 기록을 세웠을 때, 모바일 음악과 그 청취 경험은 새로운 대표자를 찾은 셈이었다.[각주:2] 아이팟으로 대표되는 MP3플레이어에는 워크맨, 그리고 CD플레이어와 같은 음악 재생 장치와는 다른,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저장 용량의 차이였다. 만일 MP3 포맷으로 압축된 음원 파일 하나가 평균적으로 4MB 정도의 크기를 갖는다고 가정한다면, 최대 80GB의 용량을 지원했던 5세대 아이팟에는 약 2만개의 음원이 저장될 수 있었다. 이것은 거대한 차이로, 곧 음악 미디어가 저장되고 유통되는 방식을 전환하는 사례였으며 뿐만 아니라 음악을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각주:3]

 

하지만 아이팟은 그것이 받은 열광만큼, 열렬한 반대와도 부딪혀야 했다. 이 반발심은 아이팟 자체에 대한 것이자, 동시에 MP3플레이어가 제공하는 청취 경험 전반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비교적 열정적인 취미에 속하는 음악 듣기의 관습 안에서, 앨범이라는 제한된 단위를 통해 제공되는 경험과 수집 행위는 꽤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허나 약 2만개의 음원을 손바닥 크기의 모바일 미디어 안에 집어 넣어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것은 곧 음악 듣기의 관습적 청취 환경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는 이 취미의 참여자들에게 그다지 좋은 변화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열정적인 참여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이팟을 비롯한 MP3플레이어에는 부분적이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음원이 MP3 포맷으로 손실 압축될 경우, 디지털 음성 신호를 고효율 압축하는 과정에서 고주파 성분을 일부 누락하게 되는데, 이때 평평한 소리상과 얄팍한 질감을 갖는 소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레트로마니아』를 지은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MP3 음원 특유의 소리를 쪼그라든 소리라고 불평하면서, 같은 음원을 아이팟으로 대충듣다가 CD를 통해 청취했을 때 드럼 소리의 질감 같은 것이 얼마나 생생하고 또 입체적으로 느껴지는지, 놀라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MP3플레이어가 제공하는 청취 경험은 그 속성 상 어느 정도 훼손된 경험일 수밖에 없으며, MP3 포맷이 갖는 기술적 한계는 해상도 높은 음악적 경험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각주:4] 나아가, 대부분의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는 소형 라우드스피커, 혹은 헤드폰을 통해 음악을 제공하고 있는데, 만약 생생하고 실감나는 드럼 소리 같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헤드폰이나 이어폰 등의 장치를 경유해 오디오 신호를 청취하게 된다면, 음상이 머리 내부에 맺히는 음상 내재화 현상이 발생하고, 음향의 입체감과 공간감이 크게 떨어져 현실감이 저하될 수밖에 없는 탓이다.[각주:5]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제공되는 청취 경험은 음악 듣기의 원칙에 무관심할뿐더러, 나아가 질적으로도 좋지 않은 경험 양식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모바일 음악은 음악을 경험하는 나쁜범주에 속한다는 의견이 가능할 수 있다.

 

소형 미디어 플레이어와 헤드폰의 결합은 음악 듣기의 조건을 공간적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개인은 도심에서, 대중 교통에서, 회사나 카페에서 음악을 듣고, 청취 경험은 일종의 공간 경험으로 전환된다. 헤드폰을 통해 혼자 듣는음악은 시각적 경험과 공간적 경험 위로 청각적 경험을 겹쳐 올리는데, 이것은 공간을 전유하여 심미화하고, 그러므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게끔 이끈다. ‘혼자 듣기는 공적 공간을 사유화(Privatization)하는 장치이자 동시에 음악을 사유화하는 장치가 된다.[각주:6] 만약 모바일 음악이 음악 전반에 걸친 기능 전환을 이끌어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과장이다. 그러나 음악 듣기를 공간 경험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사람에게, 드럼 소리가 덜 입체적으로 들린다는 문제가 과연 얼마나 중요할까? 모바일 음악이 음악 경험의 나쁜범주에 속한다는 의견은, 어쩌면 그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불만일 수 있다. 더군다나, ‘혼자 듣기를 통한 모바일 음악의 경험이 그저 고립된 경험이자 폐쇄적 경험에 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다 긴밀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음악학자 호소카와 슈헤이(細川周平)1984년에 발표한 글 「워크맨 효과(The Walkman Effect)」에서, ‘혼자 듣기의 경험을 분석하며 영화 속 한 장면을 인용한다. 영화에서, 호감을 갖고 있는 누군가와 같은 파티에 참석했음에도, 원체 수줍음이 많아서 말을 걸기가 어려웠던 어떤 청년은, 상대방에게 헤드폰을 씌워주고 음악을 나누어 듣는 것으로 소통을 대신하려 한다. 고립된 청취를 가능케 하는 헤드폰 덕분에, 두 청년은 파티장에 울려 퍼지는 빠른 음악과는 다른, 더 느리고 보다 로맨틱한 음악을 나누며 그들만의 리듬으로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혼자 듣기는 세상의 리듬과는 분리된 채, 둘만의 리듬에 맞춰 춤추며 교감할 수 있는 비일반적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각주:7] 이렇게 음악을 나누어 듣는 두 청년은 이후 다양한 대화를 나눌 것인데, 그때 드럼 소리가 덜 입체적으로 들린다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이야깃거리는 아닐 것이다.

 

워크맨과 아이팟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스마트폰이라는 융합적 미디어가 모바일 음악을 재매개하기 시작하며, ‘혼자 듣기와 커뮤니케이션은 주목할 만한 음악의 기능 중 하나로 발전했다. 일상 공간을 심미화하는 고립된 듣기 경험이 네트워크 케이블을 타고 연결되며, 전지구적인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의해 매개된 모바일 음악은 새로운 형태의 나쁜문제를 만들어낸다. 스마트폰이 음악을 듣는 보편적인 도구로 부상함에 따라, 음악이 유통되는 산업의 방식 역시 큰 변화를 겪었는데, 이 변화의 중심부에는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있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이제 대부분의 음악이 유통되는 창구이며, 편리하고 유동적인 청취를 가능하게 해주는 플랫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청취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음악적 경험을 산산조각 내는 주범이다. 카세트 레코더, CD플레이어, 나아가 MP3플레이어의 시대에도 저장을 통한 감상이라는 청취 경험은 어떻게든 유지될 수 있었지만, 그것은 스트리밍의 시대를 맞아 보다 확실하게 분산되기 시작한다. 저장-감상-(수집)의 반복으로 청취의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하고, 그것을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갈무리해 저장하고 공유하는 행위는 음악 듣기의 열정적 참여를 구성하는 언어와도 같았다. 하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음악을 듣게 된다면, 실재하는 라이브러리를 구축하는 것은 서버의 접속 권한을 획득하는 일로 대체된다. 또한, 대부분의 스트리밍 플랫폼에는 정확도 있는 알고리즘을 통해 추천 음악을 꾸준하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특정 스트리밍 플랫폼에 사용자로 정착하고자 했을 때, 해당 플랫폼의 추천 알고리즘은 그의 음악 소비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나와 같은 경우 유튜브가 크게 성장한 이후 주변인들의 음악 소비가 묘하게 균질화되었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물론 모든 특별한취향은, 사실 그다지 특별한경우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를테면 시티팝유행의 배후에는 타케우치 마리야(まりや)가 부른 플라스틱 러브(プラスティックラブ)와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이 맺는 관계가 존재한다.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은 소수 마니아 중개자의 존재 없이 특정 음악과의 우연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했고,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 효과는 뛰어났다. 아무튼 스트리밍 서비스가 미치는 영향은 이뿐만이 아니라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수천만 개의 음원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의 특성은 결국 음악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소환하게 만든다. 특히 스트리밍 서비스는 음악의 소비를 주요 플랫폼 위주의 경제로 재구축하면서 산업의 구조를 폐쇄적으로 만드는데, 이 과정에서 단일 플랫폼은 더 큰 권력을 가지며, 노출이 어려운 독립적 음악의 유통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문제를 반복한다. 이것은 쥬크박스, 그리고 공영 라디오의 시대에서부터 지속해서 되풀이된 투쟁의 가장 최신화된 모델로서, 음악의 가치, 그리고 공정한 거래의 가능성에 대해 다시 한번 물음을 던지도록 한다.[각주:8]

 


타케우치 마리야(まりや) - 플라스틱 러브(プラスティックラブ)


 

하지만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의 목록을 늘어놓고 비교해보면, 스트리밍 서비스에 의해 매개되는 음악 듣기의 경험 역시 서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표적인 플랫폼을 애플 뮤직과 사운드클라우드, 그리고 유튜브 등으로 나누어보자. (스포티파이는 2019년 현재 국내에 정식 서비스되고 있지 않으므로 제외한다.) 애플 뮤직의 경우 스트리밍 서비스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위에서 예로 들었던 스트리밍 서비스를 대표한다. 하지만 사운드클라우드, 그리고 유튜브의 경우 이와 다소 상이한 기능을 갖는 대형 플랫폼으로, 제공하는 경험의 양식 역시 얼마간의 차이를 갖는다.

 

연구자 정명철과 오준호는 사운드클라우드가 제공하는 청취 경험을 분석하기 위하여, 뮤지션 에이펙스 트윈(Aphex Twin)이 굉장히 특정적인 방식으로 전개했던 해프닝에 대해 다룬다. 에이펙스 트윈은 사운드클라우드에 ‘user48736353001’이라는 이름의 익명 계정을 생성한 뒤, 90년대 초반에 제작했던 미발표 음원을 112개 업로드했다.[각주:9] 철저히 익명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누구도 이 디지털 소리 뭉치들이 에이펙스 트윈의 작업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상한 음원의 정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곧 밝혀지게 되었는데, 음원을 다운로드하여 관찰하면 제작자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몇 가지 힌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음원의 태그에는 에이펙스 트윈의 약칭인 ‘afx’가 기재되어있었고, 또 제작자명에는 그의 본명인 리처드 데이비드 제임스(Richard D. James)’가 남아 있었다. 음원의 정체를 추측하려는 사람들은 머지 않아 이 힌트를 알아챘고, 댓글을 남겨 그가 실제 에이펙스 트윈이 확실한지 떠보는 등 추리를 시작했다. 사운드클라우드는 유통 업체를 거치는 복잡한 음원 등록 절차를 포함하지 않는, 보다 자유로운 형태의 플랫폼이었고, 뮤지션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기 때문에 음악의 유통이 하나의 게임처럼 전유될 수 있었다. 정명철과 오준호는 에이펙스 트윈이 벌인 해프닝을 댓글과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업로드 등, 사운드클라우드의 기본 기능을 특정적으로 활용하면서 구축한, 독특한 형태의 피드백 구조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이것은 음악의 수용자들이 참여적으로 청취의 문법을 개발한 사례로, 스트리밍 서비스의 시대에 음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양상에 비평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례로써 평가될 수 있다.[각주:10]


 

user18081971(Aphex Twin) - 14 07 B


 

보다 공개적인 형태의 영상 기반 플랫폼으로서, 유튜브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의 생태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유튜브는 영상의 기록과 저장, 공유가 용이해지고 활발해지면서, 특히 기능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언제나 필요 이상의 정보가 축적되어있는 데이터베이스로서, 유튜브는 영상 미디어뿐 아니라 음악의 소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광적인 수집가들이 음악 아카이브를 유튜브에 적극적으로 방출하기 시작하면서, 희귀한 과거의 음원이나 나만 아는 음악들의 접근성이 크게 높아졌던 것이다. 이는 지난 여러 시대가 동시에 펼쳐지는과거의 수평적이고 선택적인 애호 현상을 만들어내며, “기념행사에 열광하는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각주:11] 그러나 초기 유튜브가 영상이나 오디오 등, 특정 미디어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할 수 있는 참여형의 아카이브와 같았다면, 이제 유튜브는 수많은 인구가 동기화된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가깝게 변화하는 중이다. 그에 따라 음악의 소비에서도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는데, 유튜브에서는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발전하고 있는 음악적 커뮤니케이션의 사례가 존재한다. 보통 -파이 힙합(Lo-fi Hip hop)’, 혹은 칠합(Chill hop)’ 정도의 이름으로 불리는 양식이 바로 그것으로, 이 장르는 몇몇 유저들이 24시간 동안 쉼 없이 송출하는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인기를 얻었다. 이 유사 라디오 채널에서는 거의 흡사한 분위기와 멜로디를 갖는 -파이한 질감의 서정적인 인스트루멘탈 힙합이 끊김 없이 흘러나온다는 점이 특징인데, 어찌 보면 이것은 일반적인 라디오 형식을 확장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각주:12] 그러나 내 생각에, -파이 힙합 채널과 라디오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제는 빛이 다 바랜 이야기지만, 보통 라디오 채널에 대해 기대하는 것으로는 DJ의 숙련된 토크와 특별한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히트곡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파이 힙합의 세계에는 특별한 플레이리스트도, 그리고 히트곡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로-파이 힙합에는 언제, 어느 때 접속해도 큰 차이를 느낄 수 없는 비슷한 질감의 음악들과, 그리고 유튜브의 스트리밍 기능이 제공하는 라이브 채팅이 존재한다. 이 라이브 채팅에서는 항상 거의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평범한 라이브 채팅을 보다 특징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유튜브라는 플랫폼이 제공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의 유사 공동체적 성격이다.

 


‘ChilledCow’의 ‘로파이 힙합 라디오 – 휴식과 학습을 위한 음악(lofi hip hop radio - beats to relax/study to)’


 

이 놀라울 정도의 평범함은, -파이 힙합을 특별한 장르로 만든다. 대중음악의 역사에 있어, 지역을 갖지 않는 장르가 존재했던 적이 있을까? 70년대의 펑크, 80년대의 힙합, 90년대의 그런지, 00년대의 그라임까지, 모든 장르는 지역을 기반으로 발생했다. 하지만 마침 듣고 있던 로-파이 힙합 채널의 라이브 채팅을 약 5분 정도 구경한 결과, 거기서는 영어, 태국어, 핀란드어, 러시아어, 그리고 스페인어 등, 최소한 5개의 언어를 관찰할 수 있었다. 어쩌면 로-파이 힙합은, 영미권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북유럽과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 따른 시차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첫 번째 대중음악 장르일 수 있다. 히트곡도, 시차도 없이, -파이 힙합은 디지털 네이티브의 시대와 어울리는 기묘한 평등주의를 실현한다.[각주:13] 하위문화의 시대에 장르란 언제나 반동을 동력 삼아 출현했다. 하지만 로-파이 힙합의 경우, 반동을 통해 성립된 장르라기보다는 최적화에 따른 결과물처럼 보인다. 언제든, 필요할 때, 이어폰을 통해, 균질한 정도의 경험과 커뮤니케이션을 제공하는 장르로서, -파이 힙합의 라이브 스트리밍은 스마트폰 시대의 모바일 음악 청취 환경을 대표하는 사례가 된다.

 

청취 경험과 그 환경의 변환을 되짚는 일은, 자연스럽게 음악의 기능이 어떻게 파생되고, 또 변화해 왔는지를 되짚는 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음악은 적극적인 청취 경험을 유도하는 주요한 단위 중 하나지만, 청취 경험의 유일한 단위는 아니다. 청취 환경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훑어보기를 원한다면대중음악 바깥의 영역에서 청취 환경이 어떻게 재편되고 있는지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침 2019, 김동용, 서민우, 주윤탁 등은 모종의 협업을 위하여 BLE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BLE청취 환경 구축하기(Build a Listening Environment)’를 줄인 것으로, 이들은 새로운 청취 환경을 구축하고, 청취 환경을 재설정한다는 목표를 지니고 몇 차례의 공연을 선보였다. 이는 청취 경험을 유도하는 환경이 변화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채, 비평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함이었다.

 

BLE는 첫 번째 공연을 준비하며, 거의 선언적으로 보이는 서문을 발표했다. 서문은 실험 음악과 사운드 아트에 대한 의견에서 새로운 청각적 언어의 발명을 위한 고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포함한다. 서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소음이라는 단어가 꾸준하게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서문에 따르면, 소음은 BLE의 목표, 청취 환경을 비평적으로 재설정한다는 목표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소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되짚어보고”, 소음에 대한 뒤늦은 검토를 시도하는 것까지, 소음이 무엇인지, 나아가 무엇이 될 수 있을지를 차분하게 살펴보는 것은 프로젝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서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BLE가 소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며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소음은 단순히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일컬어지는 사전적 의미에서부터, 음악의 관습화된 질서와 거리를 두는 전위적 예술 형태를 지칭하기까지, 다양한 범주에 걸쳐 각기 다른 의미를 형성한다. 나아가 서문의 몇 가지 문맥을 읽는다면, 소음은 소리 그 자체를 대체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BLE는 이를 분명하게 해설하는 대신 빈 칸으로 모호하게 남겨둔 채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서문에 따르면, 소음이 청각적 사유의 모델로서 작동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소음이 소리의 물질성을 구체화하여 보여주는 방법이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에 기반하는 만큼, BLE의 탐구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의 물질성을 탐구하고, 또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BLE소리의 물리적 속성을 크기, 방향, 질감, 속도, 공간으로 나누어 공연으로 구현하고자 하는데, 이를 통해 소음은 특정한 물성을 지니는 조형적 탐구의 대상으로 재배치된다.[각주:14]

 

개체화된 소리, 혹은 소음이 비평적 청각성을 구사하는 모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음악이라는 질서 바깥의 타자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소음의 추상적 성격 때문이다. 소음을 활용하여 음악적 범주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일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요한 기획 중 하나였다. 음악이라는 기성의 범주가 소리의 사용을 이미 점유하고 있었던 탓에, 소리를 탐구하기 위한 전위적인 예술은 음악과 지속적인 갈등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각주:15] 그렇기에 소리, 혹은 소음을 이용하는 예술의 양식은 음악으로 환원되지 않는 방법론을 고민해야 했고, 그것은 곧 소리의 물질성과 청취 환경을 탐구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콘서트 홀 안에서 작동할 필요가 없게 된 소리는 새로운 명명을 필요로 했고, ‘사운드 아트(Sound Art)’란 곧 이와 같은 필요가 누적된 결과였다. 다만 사운드 아트는 청각적인 것을 이용한, (음악이 아닌) 예술을 통칭하는 모호한 정의로서, 관습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예술의 형태를 정의하기 위한 임시적인 성격을 가졌다.[각주:16] 다양한 필요가 반영된 넓은 범주로서, 사운드 아트는 소음과 전위 음악뿐이 아닌, 공연 예술이나 시각 예술, 나아가 음악 자체까지 복잡하게 뒤섞이는 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사운드 아트는 전적으로 긍정하거나 수용하기에는 너무 임의적인 범주처럼 받아들여졌고, 사운드 아트라는 명명은 오히려 제도적이거나 학제적인 분류로서 최소한의 유효성을 가질 뿐이었다.[각주:17]

 

BLE의 서문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흥미로운 단어로, “조형성이 존재한다. BLE는 물성을 중심으로 소음을 해설하면서 청각의 조형성을 전면화하고자 했다. 이런 탐구는 청각 매체의 새로운 언어 발명을 위하여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인데,[각주:18] 허나 조형성의 사전적 의미는 조형 예술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뜻한다. 그렇다면 BLE의 이와 같은 서술은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이 청각성과 청취 환경에 대한 비평으로 작동할 때, 시각 예술의 방법론과 어떻게든 엮여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결과다.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이 음악적 질서와 분리되기 위해 비시간적, 공간적인 탐구를 진행했을 때, 시각성이라는 문제는 중요한 해당 양식의 구성 요소 중 하나로 등장할 수 있었다. 사운드 아트 특유의 혼란한 경계는 시각 예술의 방법들 역시 소리를 이용하는 예술의 범주 중 하나로 포함할 수 있도록 했고, 실제로 사운드 아트는 공연장에서 공연되는 경우만큼이나 전시의 방법을 거쳐 공개되는 경우도 잦았다.[각주:19] 그러나 사운드 아트가 시각성을 적극적으로 지시할 때, 그것은 사운드 아트의 모호성을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시각성과 청각성은 통합되기보다는 언제나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고, 그 분리는 쉽게 해결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역사 안에서, 시각성과 청각성이 항상 분리된 상태로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각성과 청각성 사이에는, 여러 분기에 걸쳐 간헐적인 흔적으로 남은 분절된 역사가 존재한다. ‘소리를 이용한 예술의 가장 중요한 전사로 손꼽히는 소음 예술(L'arte dei Rumori)(1913) 선언문의 발명자였던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는 미래주의자의 한 사람으로서 당시의 시각 예술가들과 자주 교우했으며, 예컨대 플럭서스(Fluxus)의 경우, 그것은 시각성과 청각성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중요한 역사적 무대 중 하나였다.[각주:20] 허나 문제가 있다면, 이와 같은 사례 역시 온전히 청각성 그 자체에 대한 실험은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영화나 라디오, 그리고 축음기에 의해 생산되는 기술적 소리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 이전, 소리 자체는 예술적 대상으로 활용되지 못했고,[각주:21] 플럭서스는 시각성과 청각성이 뒤섞인 어지러운 무대였지만, 그 무대의 목표는 청각성, 그리고 시각성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플럭서스는 아방가르드 기획의 연장으로서, 미술과 음악, 나아가 예술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서 작동하고자 했다. 플럭서스의 중요한 개척자이자 참여자였던 존 케이지(John Cage)는 기본적으로 음악가였으며, 또 다른 참여자였던 딕 히긴스(Dick Higgins)나 조지 브레히트(George Brecht), 백남준 역시 음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지만, 당시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이라고 불리기 어려운, 심지어 예술이라고도 불릴 수 없는 총체적인 부정을 연출해 커피잔이 세련된 조각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고, 아침의 키스가 어떤 연극보다 더 연극적일 수 있는[각주:22] 일상적 순간을 공격적으로 구현하는 일에 있었다.

 


〈INTONAMURI 100〉, 2013년 '소음 예술' 선언문 발표 100주년을 기념해 whats:ON? 페스티벌에서 복원된 소음 기계(Intonarumori)의 연주 실황.


 

사운드 아트는 음악, 그리고 시각 예술 사이에서, 나아가 시각성과 청각성 사이에서 작동할 필요가 있지만, 이 사이에서 성공적으로 작동한 사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강력한 두 범주의 중간 어딘가에 위치해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알기가 어려운 임의의 명명으로서, “사운드 아트는 오직 제도적 지원을 위한 카테고리로 쓰일 때나 유용하다는 비판적 입장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이것은 한국을 배경으로 보아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에서 사운드 아트가 시각 예술 본위의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화이트 큐브 갤러리 공간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 시점은 보통 00년대 중반 즈음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자 이승린은 90년대부터 활동해왔던 한국의 노이즈 뮤지션들이 미술 제도 내부에서 모종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시작했던 계기를, 00년대 이후 가시화된 예술의 다원화 현상으로부터 찾는다. 실제로 이 시점은 미술 제도 내에서도 서서히 인지되기 시작했던 특정한 종류의 미적 경향이 다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공적 승인을 거쳤던 시점과 거의 겹쳐지는 듯 보인다.[각주:23][각주:24]

 

2005,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민간 합의 기구 형태의 민간위원회로 전환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이에 따른 개편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소위원회 분류에도 조정이 있었는데, ‘다원예술이 문학, 시각예술, 연극, 무용, 음악 등의 기초예술 분야와 동등한 부문으로 격상된 것은 이때였다. 그전까지 다원예술은 실험, 인디, 대안, 복합, 대중예술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집합적 용어로 다소 불분명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위원회는 개편을 계기 삼아 해당 범주를 제도적으로 체계화하여 그 특징에 맞는 지원 방식을 개발하고자 했던 것이다.[각주:25][각주:26] 허나 제도적 정식화가 곧 의미 차원에서의 체계화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위원회는 다원예술을 생성 중인 예술, 부상하는 예술, 기존의 관습과 관행을 넘어서는 예술이자 순수/응용/대중 등 전통적 구분을 넘어서는 새로운 예술창작활동이며 현재의 주류 예술이 아니라 잠재적 예술로서 정의하고자 했는데, 이것은 특정한 예술 범주에 대한 정의라기보단, 창작 경향에 대한 추상적 서술에 가깝게 보였다.[각주:27] 다원예술은 공적 영역에서 제도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모호한 범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제도적 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작업이 공연되고 전개되는 현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원예술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꼽힐 수 있을 《스프링웨이브》(2007) 같은 경우, “국제다원예술축제라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그것은 행사의 정체성을 표방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조화된 예술지원 양식에 맞추기 위하여 전략적인 선택을 한 것에 가까웠다.[각주:28] 이처럼 모호함이 강한 범주로서, 다원예술은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었고, 범주 차원에서 근본적인 모호함을 갖고 있었던 사운드 아트 역시 이 필요를 반영했다.


《스프링웨이브》(김성희·김성원 감독) 포스터 (디자인: 슬기와민)

(http://www.sulki-min.com/wp/springwave-poster-kr/)


하지만 화이트 큐브에서 작동하게 된 사운드 아트는 또 다른 어려움과 맞닥뜨린다. 다수의 증언에 의하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사운드 아트는 청각성이라는 영역을 재발견하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술관에서-작동하는-사운드-아트라는 틀에 가두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 시기의 중요한 참여자 중 한 사람인 류한길은, 몇몇 인터뷰와 글을 통해서 00년대 중반 미술관에서 전개된 큐레이팅이 대개 사운드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해있었음을 지속해서 지적했던 적이 있다.[각주:29][각주:30][각주:31] 화이트 큐브에서, 사운드 아트는 마치 시각 예술을 위한 부수적 자재인 듯 취급되고, 심지어는 하나의 배경음악처럼 제작되기를 요구받기도 했는데, 그 기반에는 청각적인 것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을지, 혹은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은 같은 공간에 놓일 때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재한, 시각성 본위의 큐레이팅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제도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뿐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공존한다. 화이트 큐브 공간은 시각적인 것을 위해 만들어지고 오래 사용되었으므로, 청각적인 것을 재배치하는 문법은 적용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화이트 큐브에서 이용되는 사운드의 경우, 종종 무언가의 장소(Site)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장소담론적 장소(Discursive Site)’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담론적 장소는 미술사가 권미원이 제도비판(Institutional Critique)’ 이후의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의 변화를 설명하며 제안한 것으로, 개념미술을 형식 차원에서 전유한 반시각적/비물질적 양식들이 구체적인 담론의 일부로 나아가며 공간을 텍스트화하고 담론을 공간화했던, ‘동시대적미술의 사례를 분석한 결과다. 이처럼 담론을 장소 삼으며 미술 바깥으로 점차 확장된 미술은, 추상적 영역을 매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며 다양한 관계를 고안해내었는데,[각주:32] 이와 같은 문법은 사운드가 갤러리 공간으로 진입했을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어, 청각적인 것을 하나의 담론으로 장소화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사운드 아트라는 명명에는 소리를 이용한 예술’, 나아가 청각을 이용하는 예술이라는 함의가 광범위하게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마치 시각 예술이 그러하듯, 대문자 범주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장르의 이름이 되었고, 그에 따라 이해가 과도하게 압축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어쩌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사운드 아트가 겪어야 했던 몰이해는, 이 압축 과정에서 파생된 매체적 멀미 증상과도 같다. 하지만 화이트 큐브에 도착해, ‘담론적 장소로서 위치 설정된 사운드에서는,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딜레마, 나아가 청각적인 것이 시각적인 것과 갖는 딜레마가 너무 쉽게 의미를 얻고 가시화된다. 이것은 화이트 큐브에서 작동하는 사운드 아트를 긍정하는 방법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문제적인 지점을 만들기도 했다. 소리를 하나의 담론적 장소로 간주할 때, 그것은 음악과 시각 예술이라는 관습적 범주 사이에서, ‘소리를 이용한 예술이 지속적으로 유지할 필요가 있는 긴장 상태를 우회한다. 다양한 예술의 양식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분야로서, 사운드 아트의 경계는 임의적이며 활용되는 양상 역시 때에 따라 달라진다.[각주:33] 사운드 아트가 작동할 때 갖는 모호성을 구체적으로 고려하지 못할 때, 그것은 시각성의 세계에서 청각성을 도구화하거나, 청각성의 세계에서 시각성을 도구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현재까지 꾸준하게 지속되고 있는 사운드이펙트서울(SFX Seoul)’의 첫 번째 전시에서, 디렉터 양지윤은 무의미하게 재생산되는 것처럼 보이는 갤러리에서의 사운드 아트를 비평하고자 했다. 전시에서 발표된 서문을 통해, 양지윤은 갤러리 공간에서의 사운드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사례를 손꼽는다. 화이트 큐브 갤러리 공간은 방음 설비가 철저하지 못한 등, 청각적인 것을 다루는 데에 특화된 공간이 아니기에, 사운드 아트는 정상적인 경험이 어려운 상태에 놓이고는 했다. 갤러리 공간에 놓인 사운드 작업들은 영상 작업처럼, 사운드를 포함한 다른 작업에 의해 침략 당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헤드폰을 통해 송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양지윤은 이런 전시 방식이 사운드를 경험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조건이며, 나아가 청각적인 것이 갖는 어떤 종류의 특정성을 괄시한 전시 방식이라고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사운드가 근거하는 매체적인 몸체 중 하나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사운드 웨이브의 떨림이 존재하며, 그렇기에 사운드 아트는 이 떨림을 가시적인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그 특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사운드 아트 전시는 현장에서 사운드의 웨이브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적 조건을 갖춰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양지윤은 사운드 아트를 소리를 매개로 한 예술 행위라고 정의한 뒤, ‘미디어 아트와 현대 음악의 사이 어딘가에 있는 무엇이라는 해석을 제안하는데, 이것은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운드 아트의 폭넓은 정의를 보다 구체성을 가질 수 있게 좁힌 사례다.[각주:34] 이런 정리는 꽤 명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의구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특히 미디어 아트라 통칭된 뉴미디어 기반의 미술 문법들이 명백히 부적절한 것이 되어버린 요즘에는 더욱 더 그렇다. 양지윤이 사운드 아트의 자리를 미디어 아트와 현대음악 사이의 어딘가에서 찾았던 2007-8, 미디어 아트의 문법은 사운드의 시각적, 매체적 구현을 위해 일반적이었다. 2000년대 중반 즈음 유행했던 미디어 아트의 특징이 잡다한 기술 매체를 장식처럼 활용하며 시각적 스펙터클을 구현하는 방법에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사운드 아트 역시 그 방법을 공유했다. 기술과 사운드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연계되었고, 이때 사운드는 그것이 작동하고 출력되는 방식을 장식으로 노출하면서 유원지형 감흥을 이끌어 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이제 적절하게 보이지 않는다. 선진적 기술이 융합적 디바이스 내에서 비가시적으로 펼쳐지고 고안되는 현재, 테크놀로지의 작동 방식을 가시화하는 미디어 설치는 돌이킬 수 없이 장식적인 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운드 아트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특정한 범주 사이의 개념으로서 사운드 아트는, 종종 두 범주를 화해시키고 융합시키는 역할을 제안받기도 한다. 물론 시각성과 청각성의 융합은 긍정적인 비전이며, 지속해서 추구될 필요가 있는 사운드 아트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사운드 아트는 언제나 두 범주를 합치고 화해 시켜 하나로 만드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사운드 아트의 중요한 매개물 중 하나이자 역사적 전사로도 꼽히곤 하는 소음 같은 경우, 고도로 추상화되어 모방적 음악의 질서 바깥에 놓이며, 그에 따라 불쾌한 것, 동시에 환영받지 못하는 것으로서 악명 높다. 소음은 여전히 사운드 아트의 지분 중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사운드 아트와 소음은 모종의 부정성을 공유한다. 사운드 아트가 무엇이라고 체계적으로 정의되기 어렵다는 사실은, 장점도 단점도 아닌 정체성에 가깝다. 사운드 아트는 청각 인지와 청취 환경을 비평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기에 음악적 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청각적인 것을 담보 삼아 시간과 공간을 구체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으므로 시각 예술의 방법론과도 멀어지고는 한다. 예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운드 아트는 여전히 중첩된 범주 사이에서 긍정으로, 또한 부정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다. 음악과 시각 예술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도 시각 예술도 아닌 무언가로서, 사운드 아트가 갖는 모호함은 어떤 반발력과 같은 속성을 만들어낸다.

 

BLE가 조형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소음, 혹은 소리를 재구성하고 다시 인식하고자 시도할 때, 그것 역시 모종의 반발력을 포함하는 셈이다. 화이트 큐브에서 사운드 아트는 온전하게 작동하지 못했다. 거기에는 화이트 큐브라는 시각적 공간이 부여하는 압력과, 시각성에 근거를 둔 큐레이팅이 만들어내는 이해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하지만 사운드 아트가 화이트 큐브로 진입했을 때, 사운드 아트 역시 화이트 큐브라는 시각적 환경을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만약 시각적인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해 공간과 청취 환경을 매개하는 청각적 활동이 가능하다면, 그 모습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까? 혹시 BLE가 굳이 조형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시각성을 환기하는 까닭은, 시각 매체가 청각성에 대해 무관심한 것만큼이나, 청각 매체 역시 시각성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진단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BLE는 조형성이라는 개념을 인용하여 청각적 활동에 내재한 시각적 요소를 탐구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업의 핵심을 이루기도 한다.

 

2019년 결성된 뒤, BLE는 총 두 차례의 공연을 통해 각자 다른 주제를 다루었다. BLE(일종의) 서문을 통해 공개한 소음의 조형적 속성들, “크기, 방향, 질감, 속도, 공간과 같은 요소들은, 그 자체로 곧 공연의 주제가 되었다. 첫 번째 공연이었던 《음량, 공연장》에서는 공간과 크기라는 속성이 주제로 선택되었으며, 두 번째 공연인 공간을 투사하는 몇 가지 방향(이하 방향)에서는 방향이라는 임의적 속성에 집중하여 소리를 해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같은 탐구는 꽤 진지한 작업 방법처럼 보였지만, 여러 사정이 있었기에 공연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그리 크지 않은 합주 연습실에서 소규모로 진행되었다. 이 장소는 공간, 그리고 방향과 같은 소리의 속성이 자연스럽게 감각될 만큼 여유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공연을 위해서는 몇 가지 설치와 장치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음량, 공연장》에서, BLE는 합주실을 4등분하는 암막 커튼을 설치해서 공간을 분할했고, 공간성을 부각할 수 있는 간이 무대를 만들어냈다. 주자는 필요에 따라서 커튼을 조절하여 공간을 나누고, 작업을 위해 적절한 공간을 설정할 수 있었다. 음량, 공연장》에서는 음향이라는 소리의 관습적 형태가 보다 중요하게 사용된다. BLE는 음향과 관련된 여러 요소를 부분적으로 조작하여 소리의 물질성을 극대화하고, 그를 통해 나타나는 조형성을 경유하여 두 가지 공간을 환기하고자 했다. 이 중 하나가 소리가 연출되는 무대인 합주실이라는, 실제 공간이었다면 나머지 하나는 소리 내부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연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BLE는 소리를 다루는 담론들이 대부분 소리 그 자체를 추상화하여 생각하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한 뒤, 공간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기반으로 소리를 탐구하며 추상적 상황을 구체화한다는 목적을 가졌지만, 공연은 공간마저 뭐가 뭔지 잘 모르도록 추상화해버리는 결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공연의 첫 번째 순서는 서혜민이었다. 서혜민이 연주한 작업은 눈 떠보니 여기라는 제목으로, “비가시적인 소리를 통해 미세 입자의 파동을 인위적으로 드러내고 헤집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작업에서 소리는 자글거리는 질감을 갖고, 넓게 펼쳐지면서 공간을 점유했는데, 이 같은 질감의 사용은 미세 입자의 파동을 청각적 이미지로 환원한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작업을 통해, 서혜민은 통상적인 가청(可聽)영역에서 감각이 불가능한 소리를 가청화하고, 나아가 특정 물질, 혹은 현상에 잠재된 소리를 끄집어내 보이고자 했다. 작가는 과거 작업에서 숯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채취하여 하나의 사운드 트랙으로 편집한 다음, 그 소리를 숯의 라이브 사운드와 병치하거나('BREATH' for Live and Tape), 대기 오염과 미세먼지에 의해 마모된 감각에 관한 청각적 탐구를 시도하는 등 (PM 2.5), 통상의 지각으로는 감각이 어려운 소리를 가청 영역으로 이끌어 내고 (혹은 그렇게 된 것처럼 들리게끔 하고), 구체화한 소리를 성찰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하곤 했다. 눈 떠보니 여기〉 역시 이 같은 방법의 일부로 독해할 수 있다면, 소리 질감을 조작하여 구현되는 청각적 이미지들은 곧 미세 입자를 가청화한 결과물이 될 텐데, 이때 미세 입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물리적 공간에 현존하는 무엇으로, 그것을 가청화하는 것은 곧 공간 전체를 환기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눈 떠보니 여기〉에서, 서혜민은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소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이용, 공간을 비평적으로 성찰하고자 했는데, 이는 이전에 전개되었던 작가의 방법론을 확장하는 방법이자, 동시에 음량, 공연장》의 기획적 목표에 응답하는 방법이었다. 서혜민의 연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되는 소리의 반복과 변형을 통해서 점차 몰입되는 경험을 제공했는데, 이 경험은 청자에게 청각적 공간을 음상화하도록 이끌었다. 다만, 이것이 몰입의 경험으로 제공된다는 사실은 의심이 가는 부분 중 하나다. 이처럼 청각적 공간을 음상화할 때, 공간의 물리적 속성은 성찰되는 대신 오히려 잊혀버리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서혜민의 다음 순서였던 서민우는 이라는 작업을 실연했는데, 은 공연장에 매단 커튼을 전부 쳐서 공간을 4등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공간이 명확히 나뉘었기에, 작가의 공연은 공간을 번갈아 돌아다니면서 감상해야 효과적일 듯 보였지만, 협소한 공간에 관객이 꽤 있었기 때문에 관람은 다소 수동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에서는, 이를테면 새의 울음소리 같은 자연음, 그리고 ‘ASMR’ 사운드처럼 들리는 내밀한 소리 질감의 인공음이나 왠지 익숙한 클래식음악의 음조가 서로 다른 음량과 방향에서 들려오고, 또 어떨 때엔 송출되는 스피커를 바꿔가면서 변주됐는데, 그것은 기록된 소리를 재료 삼고 재조합해 ()음악적 상황을 연출했다는 점에서 구체 음악의 방법론을 스피커를 도구 삼아 전유한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민우는 다양한 차원에서 작동하는 각자 다른 성격의 소리를 꽤 재치 있는, 혹은 위악적인 방식으로 조합한다. 공연에서 자연적인 소리와 인공적인 소리, 그리고 음악과 소음이라는 청각적 자원은 4개의 스피커를 오고 가면서 재생, 혹은 연주되고, 음량이 높거나 또 낮게 조정됨에 따라, 또 관객이 분절된 공간의 어떤 분면에 있느냐에 따라 소리는 다른 음향으로 연출되었다. 〉에서 이용된 음악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가 작곡한 사계(Le Quattro Stagioni)(1725) 중 협주곡 1’,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의 바이올린 소나타 5(1801), 펠릭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무언가無言歌》 중 〈봄의 노래(1842-44), 그리고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볼레로(Boléro)(1928) 등이었는데, 이 중 볼레로를 제외한 나머지 음원은 봄의 심상을 떠올리도록 만드는 대표적인 클래시컬 음악에 속했다. 서민우의 작업에서 사용된 모든 음원은 유튜브를 통해 라이브로 송출된 것이었고, 그러므로 〉은 유튜브 비디오의 라이브 연주 같은 것과 다름없었다. 서민우는 관습적 음악, 아방가르드의 기획들이 벗어나고자 애썼던 고전적 범주인 음악을 대수롭지 않게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하는데, 작업에서 유튜브-연주가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쓰임에 따라 자연히 오디오의 음질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 나쁜음질은, 그 자체로 고전 음악 감상의 관습적 방법에 대한, 나아가 일반적인 음악 경험에 대한 비평적 반응이기도 했다. 만약 나쁜조건에서의 음악 청취를 소음이라고 절하하는 모종의 감상을 따른다면, 유튜브를 거쳐 라이브 재생, 혹은 연주되는 이 음원들은 소음과 음악, 둘 중 어느 위치에 놓이게 될까? 음악의 영역에서는 소음이며, 소음의 영역에서는 음악인 무엇을 차용하며, 〉은 청취 환경 전반에 대한 비평적 작업으로 남고자 했다.

 

다만 서민우의 공연 중간에는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있었다. 작업에서 침묵이나 공백이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고려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그것은 아마도 연주 실수인 듯싶었지만, 〉은 관성적인 수법의 연주가 아니었고 주자의 표정 역시 짐짓 태연했으므로 그것이 연주 실수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분별이 어려웠다. 〉에서는 공간의 분할과 그에 따른 청취 환경의 변화가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다뤄지지만, 분할을 위해 설치된 암막 커튼은 오히려 제스처에 가까운 것으로, 공간을 완벽하게 나누어 밀폐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소리 역시 의도한 대로 분절되어 송출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고, 그것은 곧 물리적 공간이 갖는 통합의 힘을 역설적인 방식으로 강조했다.

 

음량, 공연장의 마지막 차례를 담당한 김동용은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오픈축하공연 : RFSC100 공간 매뉴얼 2019라는 이름의 연주에서, 작가는 준비된 소리들을 플레이하는 동시에 공간에 비치된 여러 사물을 이용해 소리를 만들고, 그것을 즉석에서 녹음한 뒤 재생했다. 오픈축하공연 : RFSC100 공간 매뉴얼 2019에서는 음원 재생과 녹음물 재생, 즉흥 연주와 계획된 연주라는 네 가지 청각적 레이어가 교차되었는데, 녹음한 소리를 거의 즉시 재생하여 시간을 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작가가 과거 한 전시에 참여했을 때 진행했던 어떤 작업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이 작업에서, 김동용은 나뉜 두 공간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설치한 다음 한 공간의 소리가 다른 공간으로 즉각 송출되게끔 하여, 두 개의 공간이 청각적으로 연동되게끔 의도했는데, 《음량, 공연장》에서 선보인 녹음과 재생의 재조합은 그와 같은 설치의 라이브 버전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김동용의 공연에서는 암막 커튼 역시 마구 움직이며 녹음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에 따라 커튼은 공간을 나누는 장치에서 소리를 만들어내는 장치로 바뀌었고, 그것은 이전 차례, 조금은 엄숙한 태도로 커튼을 다루었던 서민우의 공연과 대비되며 아이러니한 구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김동용의 즉흥 녹음-연주에서, 어떤 사물들은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 잠재된 소리를 구현하는 청각적 사물로 재배치되었는데, 시점에 따라 그것은 공연장 공간을 악기처럼 다루는 일로 보이기도 했다. 이는 공간을 비평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청각적 실천을 만들어내겠다는, 음량, 공연장의 전제에 직설적으로 반응한 결과다. 작업에서 즉흥은 이런 퍼포먼스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였지만, 다루어내고 통제해야 하는 레이어가 다양한 탓인지 공연은 역동적이지 못하고 다소 지루하게 늘어져 버리기도 했다. 연주자였던 김동용은 이씨이라는 록밴드에서 프론트 퍼슨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씨이는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유행을 타고 결성된 밴드 중 가장 이상한 레퍼런스를 참고삼아 활동했던 밴드 중 하나다. 작가의 이와 같은 경력은, 어쩌면 이 즉흥적 연주가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 그 전사를 얼마간 설명해주기도 한다. 오픈축하공연 : RFSC100 공간 매뉴얼 2019에서, 연주는 앞선 두 작업에 비해서도 특별히 공연의 문법 아래서 진행된 듯 보였고, 특히 여러 사물을 흔들고 때려 소리를 끌어내는 이용은 관습적 연주의 그것과 겹쳐져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이씨이 - 흙탑을 무릎위에


 

두 번째 공연이었던 방향에서, BLE의 관심은 소리의 방향과 그를 통해 구체화되는 청각적 조형성으로 이동한다. 방향》에서는 첫 번째 공연에서 보였던 몇 가지 흠결을 보완하기 위해 개선된 부분이 있었다. 우선, 공간이 협소한 탓에 자유롭게 움직이며 공연을 듣기 어려웠던 환경을 의식한 것인지, 공연은 회차를 총 3회로 나누고 입장 인원을 10명 내외로 제한했다. 그에 따라 방향에서, 관객은 협소한 공간에서도 최소한의 동선을 확보할 수 있었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비교적 자유롭게 청취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음량, 공연장에서 4개의 스피커가 공연장의 네 모서리에 각자 배치되어, 4개의 청각적 공간을 조성했다면, 방향에서는 4개의 스피커가 공연장 중간에서 후면을 맞대고 관객을 바라본 상태로 놓였는데, 이것은 방향이라는 소리의 물리적 속성을 더 구체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방향에서는 스피커만큼 중요하게 사용되는 도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어폰과 사운드클라우드였다. 관객은 입장 시 공연장에 부착된 QR코드를 읽거나, 핸드폰 메시지로 전달받은 링크를 열어 작가가 업로드한 비공개 사운드클라우드 트랙을 이어폰으로 청취하며 공연을 보아야 했는데, 이때 스피커가 송출하는 소리의 방향은 이어폰이 형성하는 고립된 청취 경험 위로 겹쳐지면서, 두 가지로 나뉜 청취 환경을 중첩시킨다.

 

방향에는 BLE의 동인인 김동용과 서민우만이 참여했는데, 이 중 처음 시작을 맡은 것은 김동용이었다. 〈유튜브 무료 브금(bgm)이라는 이름의 공연에서, 작가는 유튜브에서 제작자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하는 배경음악을 재료 삼아 작업을 제작했고, 공연은 이 배경음악을 스피커를 통해 내보내는 것으로 출발했다. 배경음악 특유의 나이브한 특징들, 단조로운 리듬과 야심 없는 멜로디 등은 공연장을 금방 관습적인 분위기로 채웠지만, 브금들은 점차 서로 중첩되고 반복되면서 비트를 얻게 되었고, 음량 역시 필요 이상으로 증폭되면서 묘한 소격 효과가 활성화됐다. 특히 공연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소리는 더 집중적으로 반복됐고, 음량 역시 더 큰 폭으로 높아졌기에, 익숙하게 들려오던 배경음악은 보다 과격한 감상을 자아냈다. 시간이 지나자, 랩탑 앞에 앉아 연주하던 작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대단히 퍼포머티브한 방식으로 공연에 개입했다. 김동용은 공연장에 놓인 스피커의 헤드를 마구 돌려가며 소리의 방향을 직접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스피커는 관객이 서 있는 방향을 가리키다가 이내 안쪽으로 돌려지기도 했고, 그에 따라 음향 역시 마구잡이로 변화했다. 공연이 중반을 넘어서 후반부로 나아갈 때쯤에는, 작가는 스피커 헤드를 돌리거나 움직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듯, 스피커를 번쩍 들어 올려 위치를 조정하기도 했다. 이제 4대의 스피커는 서로 1m 남짓한 거리를 두고, 마주 본 상태로 모이게 되었는데, 작가의 설명을 따르면 이것은 스피커 바깥쪽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관람하던 관객들을 스피커 안쪽으로 모아, 소리를 압축적으로 청취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작가가 랩탑 앞을 떠난 이후부터, 공연에서는 같은 소리가 반복될 뿐이었지만, 스피커의 방향이 직접적으로 조작됨에 따라서 음량부터 소리의 밀도나 떨림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음향을 체험하는 게 가능했다. 〈유튜브 무료 브금(bgm)〉에서, 김동용은 소리의 방향을 직접 조작하며 DIY 방식으로 가설적 무대를 설치하고, 이 무대에서는 오직 불안정하고 흔들거리는 청취 경험만이 제공되었다. 첫 번째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방향》에서 작가는 공연에 설정되어있는 담론적 전제를 그대로구현하고, 여기서는 예술가의 시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엔지니어의 시점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이 역할을 한다. 공연의 전제는 김동용의 손을 빌어 대단히 직설적인 방식으로 번역되는데, 그 결과는 다소 희극적이고 또 다소 예외적이었다.

 

김동용이 배경음악을 사용한다면, 서민우는 자연발생적인 소리와 도심의 소음, 그리고 일상적 형태의 소음을 재료로 공연했다. 서민우의 Surfing Scape에서는 이어폰을 통한 청취 환경의 중첩이 더욱 진지한 방법으로 활용된다. 앞선 공연에서, 김동용은 이어폰을 언제든 관객이 원하는 시점에 끼고 들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통제했는데, 김동용이 제공한 사운드클라우드 플레이리스트에서는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무료 배경음악들의 원본 음원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이것은 스피커와 이어폰이 만들어내는 청취 환경을 입체적으로 활용한다기보다는, 분리된 상태로 유지한 채 내버려 둔 결과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민우의 공연에서는 반드시 특정 시점에 이어폰을 착용해 공연을 감상해야 했고, 그에 따라 이어폰의 소리, 그리고 스피커의 소리는 보다 구체성을 띈 채 중첩되었다. 그런 만큼, Surfing Scape〉에서 스피커는 조작하거나 움직여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 본래의 목적에 맞춰 사용되었다.

 

Surfing Scape〉에서, 방향의 조작은 공연되는 소리의 내부 공간에서 이뤄졌다. 소리와 소음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공간이라는 문제는 빼놓을 수 없다. 사회적이고 물질적 공간의 특성에 따라서, 소음의 분류와 작동 방식은 언제나 달라지기 때문이다. 소음은 생활 공간 속에서 언제나 어지럽게 충돌하고, 자연스러운 소음,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소음의 구분은 상황에 맞추어 달라진다. Surfing Scape〉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소리, 혹은 소음이 등장한다.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공연에 등장한 소리로는 금속캔을 열어 따는 소리, 금속성의 물질이 질질 끌리는 듯한 소리와 새의 울음소리, 어딘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교향악의 익숙한 소리와 발걸음 소리까지, 많은 종류의 소리가 이용되며 청각적 풍경을 형성한다. 하지만 음원의 음질이 워낙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리는 명료하게 들리지 않고 소리의 정체를 확신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Surfing Scape〉에서, 나쁜음질은 무조건적인 결손이라기보단 공연의 구성 요소로서, 직접적으로 작동한다. 어차피 공연에서는 스피커 경험과 이어폰 경험이 중첩되어 있으므로, 소리를 분별하거나 꼼꼼하게 듣기가 어렵다는 것도 한몫을 한다. 저하된 음질은 음원 자체의 해상도를 크게 낮추지만, 간섭을 모방하고 반사와 잔향을 임의로 극대화해 청각 인지를 불분명하게 하며 의외의 청각적 현실감을 만들어낸다. 눈을 감고 오래 듣다 보면, Surfing Scape〉는 어딘가로 빠르게 이동하는 과정에서 감각되는 청각적 풍경, 혹은 물속에서 청취 되는 청각적 풍경 같은 것을 연상케 한다. Surfing Scape〉에서, 저하된 음질을 거쳐 감각되는 소리의 방향은 가상적 공간감의 해상도를 높인다.

 

이와 같은 모방적 소리가 반감을 만들지 않는 까닭은, 작가가 몰입적 경험을 막는 《방향》의 청취 환경을 적절하게 이용한 결과다. Surfing Scape〉에서, 소리와 소음, 나아가 음악까지, 등장하는 소리를 무엇이라고 분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작업에서 등장하는 모든 소리는 저하된 음질을 필터 삼아 가상의 청각적 장소에서 겹쳐지고, 여기에선 범주 차원의 경계나 청각적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이 현실감 있게 조형된 청각적 풍경을 좇는 동안, 소리를 분할하는 모종의 범주들은 추상적 장소로 모이며 아주 짧은 시간 종합된다.

 

Surfing Scape〉에서는 이어폰이 사용되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작가가 연주하는 풍경은 이미 완결된 구성을 갖고 있었고, 이어폰을 통해 즉석에서 형성하는 고립적 청취 환경 역시 이 구성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관객은 처음에 스피커를 통해 공연을 청취하다가, 공연의 특정 순간에 맞춰 이어폰을 착용하고, 사운드클라우드에 접속해 트랙을 재생해야 했는데, 이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작가는 공연 중간에 여기서 이어폰을 착용하고,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음원을 재생해달라고 입말을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공간이 좁고 환경이 좋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공연의 리듬을 깨는 나쁜 순간으로 남았다. 첫 번째 공연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공연에서도 서민우는 유튜브, 그리고 사운드클라우드 등, 변화한 청취 환경의 매개물을 도구로 이용하는 라이브 연주를 펼쳤지만, 여전히 이 악기를 다루는 방법은 안정되어 있지 못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다만 이것이 과연 악기의 결함인지, 연주자의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을 것이다.

 

방향》에서 스피커는 바깥을 바라본 상태로 모여있었는데, 이것은 청자에게 소리를 더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설치라기보단 공간에 소리를 더 잘 채우기 위한 설치처럼 보인다. BLE는 소리를 더 잘 들려줄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고, 그러므로 관객이 소리를 잘 청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소리가 더 잘 청취 될 수 있는 환경은, 화이트 큐브에서 작업했던, 사운드 아트의 참여자들이 언제나 지적했던 결여된 조건 중 하나다. 여기에 선행된 것은, 소리의 해상도와 물성이 원활하게 감각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만 소리가 그 미적 역량을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BLE는 프로젝트를 통해, 짐짓 소리가 물리적으로 잘 구현될 수 있다면 잘 들리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는 자세를 취한다. 김동용과 서민우가 종종 음악으로도, 소음으로도 엮이기 힘든 배경음악이나 음향의 세계에 관심을 두는 것 역시 이런 생각과는 잘 어울린다. BLE에서, 음향-소리는 음악-소리와 소음-소리의 더 큰 범주로서 고찰되고, 아마도 프로젝트는 이에 대해 아직 할 말이 남아있을 것이다.

 

두 차례의 공연을 통해서, BLE가 탐구하고자 했던 소음의 물리적 속성 중 공간과 크기, 그리고 방향이라는 사례가 구체화되었고, 이제 질감과 속도 등, 몇 가지 속성들이 주제로서 남아있다. BLE의 프로젝트에는 언제나 진지한 담론적 전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막상 구현될 때 종종 희극적으로 변주되거나 은근슬쩍 무시되고, 공연장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공연 전에 배포되는 텍스트와 흥미로운 관계를 만든다. BLE는 공연이 조금 더 입체적인 이해를 만들 수 있게끔 상황을 연출하고, 그에 따라 텍스트를 제작하는 것, 그리고 청취 환경을 임의로 구성하는 것은 공연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공적 지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프로젝트가 아니기에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를 알 수 없고, 또 공연 자체도 완벽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것은 무조건적인 결점이라기보단, 어쨌든 뭔가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부분처럼 보인다. 지향하는 목표가 존재하고, 그것이 뚜렷하다면, 그것은 성공과 실패 여부와는 관계없이 나름대로 흥미롭기 때문이다. 혹은, 과대평가와 과대 해석이야말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1. Hosokawa Shuhei(細川周平), 「Walkman Effect」, 『Popular Music』, Vol. 4, 1984, 167p [본문으로]
  2. 「100 Million iPods Sold」, 애플 보도자료, 2007년 4월 9일, https://www.apple.com/newsroom/2007/04/09100-Million-iPods-Sold/ [본문으로]
  3. 이재현, 「MP3플레이어의 인터페이스와 시공간성」, 『언론정보연구』, 제 44권 1호, 2007, 116p [본문으로]
  4.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 『레트로마니아』,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4, 92-3p [본문으로]
  5. 서정일, 장인선, 이용주, 유재현, 강경옥, 「청취환경 차이에 따른 3차원 오디오 기술 개발 동향」, 『방송과 미디어』, 제13권 1호, 2008, 84p [본문으로]
  6. Michael Bull, 「No Dead Air! The iPod and the Culture of Mobile Listening」, 『Leisure Studies』, Vol. 24, No. 4, 2005, 347p [본문으로]
  7. 細川周平(Hosokawa Shuhei), 위의 글, 170p. [본문으로]
  8. Eric Harvey, 「Station to Station: The Past, Present, and Future of Streaming Music」, Pitchfork, 2014년 4월 16일, https://pitchfork.com/features/cover-story/reader/streaming/ [본문으로]
  9. 이 음원은 현재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삭제되었지만, 인터넷 아카이브를 통해 열람할 수 있다. https://archive.org/details/AphexTwin_20150417 [본문으로]
  10. 정명철, 오준호, 「디지털 음악 플랫폼에서 창발하는 음악 생산과 수용의 새로운 모델: 에이펙스 트윈의 사운드클라우드 계정 ‘user18081971’을 중심으로」, 『음악논단』, 제37집, 2017 [본문으로]
  11. 사이먼 레이놀즈, 위의 책, 2014, 11p [본문으로]
  12. 이 중 가장 많은 수의 청취자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라이브 스트리밍은, ‘ChilledCow’라는 이름의 채널이 송출하는 ‘로파이 힙합 라디오 – 휴식과 학습을 위한 음악(lofi hip hop radio - beats to relax/study to)’다. https://www.youtube.com/watch?v=hHW1oY26kxQ [본문으로]
  13. Wil Jones, 「How “lofi beats to relax/study to” YouTube channels define the melancholy of a generation」, JOE, https://www.joe.co.uk/music/lofi-beats-youtube-channels-define-the-melancholy-of-a-generation-191373 [본문으로]
  14. 「BLE(Build a Listening Environment)」, https://twitter.com/ble_exh/status/1108996665636061184 [본문으로]
  15. Douglas Kahn, 『Noise, Water, Meat: A History of Sound in the Arts』, The MIT Press, 1999, 109p [본문으로]
  16. Alan Licht, 『Sound Art: Beyond Music, Between Categories』, Rizzoli International Publications, 2007, 9-14p [본문으로]
  17. Douglas Kahn, 「Sound Art, Art, Music」, 『The Iowa Review Web』, Vol. 8, No. 1, 2006 [본문으로]
  18. 「BLE(Build a Listening Environment)」, 위의 링크 [본문으로]
  19. Alan Licht, 위의 책, 2007, 14p [본문으로]
  20. Douglas Kahn, 위의 책, 1999, 56p [본문으로]
  21. Douglas Kahn, 위의 책, 1999, 101p [본문으로]
  22. Dick Higgins, 「A Child’s History of Fluxus」, 『Horizons: The Poetics and Theory of the Intermedia』,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4 [본문으로]
  23. "2006년 말 경부터, 한국의 미술계에는 사운드 아트가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기 시작해서 2007년에는 몇 개의 기획전시가 진행되거나 워크샵, 담론집등이 출간되기도 했다. 미술의 외피 확장이라는 견해와 동시에 미디어 아트를 중심으로 사운드와 비주얼을 다루는 총체적인 관점들, 그리고 현대 음악의 역사적 실험들이 결부되면서 일약 예술계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는 듯 했다." 류한길, 「‘사운드 아트’를 위한 제안」, 앨리스온, 2008. https://aliceon.tistory.com/683?category=93196 [본문으로]
  24. 이승린, 『1990년대 이후 국내 노이즈 음악의 위상과 질적 변화에 대한 연구: 소음을 매체로 활용하는 국내 뮤지션과 적극적인 청취자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석사 논문, 2017, 111-6p. [본문으로]
  25. 양효석, 「문화예술위원회로의 전환, 무엇이 어떻게 바뀌나」, 『문화예술』, 통권311호, 2005, 17-23p [본문으로]
  26. 「다원예술 정책수립을 위한 기초연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6, 11-13p [본문으로]
  27. 위의 책, 2006, 13p, 20p [본문으로]
  28. “축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재원이 필요하다. 당연히 공적 지원도 필요한데, 현재 예술지원은 장르별로 구조화되어 있다. 그러한 장르 구조에서 유일한 틈이 다원예술이었다.”, 「“질서정연한 예술계에 혼란을 만들어내고 싶다”: 《스프링웨이브》와 《페스티벌 봄》의 디렉터 김성희 인터뷰」, 『문화예술』, 통권329호, 2008, 182p [본문으로]
  29. “이런 촌스럽기 짝이 없는(안타깝게도 충분히 예상이 되었던) 상황에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로 나는 2007년도에 진행된 기획 전시들이 이슈의 시간적 흐름을 타기 위해 실질적인 도큐먼트와 아카이빙 그리고 담론 형성을 위한 노력이 선행되기 보다는 먼저 보여주기 식의 급조된 기획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 사운드 아트 관련 기획들, 워크샵들 속에서 정작 사운드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들은 빠져있고 사운드 아트가 무엇인가라는 식의 정의 내리기에 집착하는 경우를 경험할 수 있었다. 즉 기존의 미술장치들, 음악장치들이 어떻게 사운드 아트로서 소비될 수 있을 것인에 대한 관심만이 존재한 것 아닌가 싶은 것이다.” 류한길, 위의 글, 앨리스온, 2008, https://aliceon.tistory.com/683?category=93196 [본문으로]
  30. “시각미술을 다루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루고자 하는 물질에 대한 어려움이 더 강해졌다. 매체는 폭넓어졌는데 자신들이 알고 활용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새로움이 있으면 그에 대한 경쟁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큐레이터는 신기한 것에 대한 강박감이 있다. 그 시점에 사운드 담론이 생산된다기보다는 물타기 기획들이 난립했다.” 「왜 사운드 (아트) 인가」, podo, 2010, http://www.podopodo.net/forum/round/detail.asp?seq=9 [본문으로]
  31. “지금의 미술계에서 사운드 아트를 이야기하면서 헷갈려하는 지점이 무엇인가 하면 여전히 사운드 아트라고 이야기 할 것과 음악으로 이야기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각중심적인 사고로 작품을 진행하면서 사운드를 소재적인 요소로 차용하는 수준에서의 모습을 사운드 아트라고 말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사운드 아트에 대해 이야기하다」, 디자인정글, 2011, https://www.jungle.co.kr/magazine/3519 [본문으로]
  32. Miwon Kwon(권미원), 『장소특정적 미술』, 김인규, 우정아, 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2013, 52p [본문으로]
  33. Alan Licht, 위의 책, 2007, 210p [본문으로]
  34. 양지윤, 「한국의 사운드 아트」, 『사운드+아트』, 미술문화, 2008, 6p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 포스터



2018 12 19일부터 2019 4 21일까지, 취미가는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을 다시 연다 – “132()의 특별한 에디션, 작업의 부산물, 작품과 굿즈, 소장품, 특별히 선별된 물품을 4개월간 선보인다.

 

첫번째 취미관이 열린 것은 2017년이었다. 2018년에 열려서 2019년까지 지속되는 두번째 취미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공간 취미가의 독립적 아트 페어 같은 게 되어서 어떤 연속성을 가지게 된 듯 하다. (물론 기금은 받는다.) 허나 올해의 취미관》과 2017년의 《취미관》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두 《취미관》은 지속성이 다르다. 2017년의 취미관이 단 4주의 시간에 불과했다면 18-19년의 취미관은 다섯 달 동안 유지된다. 시간적 여유가 늘어남에 따라, 참여하는 작가()의 수 역시 불어난다. 2017년의 취미관 35명의 작가()을 수용했다면 18-19년도의 취미관에서는 132()이 투명한 렌탈 케이스 안에 작품, 굿즈, 혹은 그 어떤 것을 납품한다.

 

취미가 공간에 렌탈 케이스가 놓이고 케이스 안에는 그 어떤 것이 놓인다는 포맷은 큰 틀에서 유지되지만, 세부 역시 2017년과는 조금 달라진다. 첫번째 취미관에서, 장식장 하나에는 하나의 작가()이 입점했고 이것은 꽤 명료한 방식이었다. 한 명의 작가()은 하나의 케이스라는 제한을 갖고 그 만큼의 ()자유를 구현한다. 허나 두번째 취미관에서 이 명료한 법칙은 사라진다. 작품은 흩어지고, 작가는 뒤섞이며, 중력은 산개한다. 2017년의 취미관에서 작가()이 중심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 2018-19의 취미관에서는 작품, 굿즈, ‘그 어떤 것이 중심이 된다.

 

2018-19년의 취미관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팝업스토어일까, 독립적 형태의 아트 페어일까, 혹은 포스트-굿즈를 매개체 삼는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의 구현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냥 취미관일까? 취미관》은 여전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애매한 영역에 놓인다. 이것은 《취미관》이 어디까지나 취미가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취미가라는 제한은 《취미관》으로 하여금 케이스를 만들도록 부추긴다. 케이스는 작품에게 알맞은 크기와 형태를 요구한다. 케이스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스케일을 재조정한 작품은 조금 다른 맥락을 획득한다. 이렇게 취미관》은 굿즈라는 ()형식의 짧은 역사와 어떻게든 연결되어버리는 플랫폼이 되어버리고, 그 때문에 단면적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픈베타공간인 반지하B½F의 사무실에서 장기 기생하는 프로젝트로 출발한 굿즈(g8ds)’, 반지하와 함께 취미가 공간의 전신이다. 나는 그때 굿즈에서 판매되던 어떤 작업을 기억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돈선필의 <BOX gHOST figure>(2014) 같은 작업인데, 작업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거의 농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엽서와 뱃지, 그리고 작은 책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본격적인 조형인 <BOX gHOST figure>가 주는 황당함 같은 게 있었다. 작품이라기엔 너무 저렴하지만, 굿즈라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 역시 물음표였다. 그 탓인지 <BOX gHOST figure>은 꽤 오랫동안 판매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취미관과 같은 공간에서 <BOX gHOST figure>와 같은 조형은 흔하고, 황당한 기분을 만들지도 않는다. 반지하 시기의 어떤 비전은 여기서 부분적으로 성취된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무언가 성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굿즈굿-》를 거쳐 포스트-굿즈가 되면서 복잡해진 사정과 관련이 있다.

 

  

BOX gHOST figure, FRP, 혼합재료 도색, 원목 베이스, 300 x 135 x 100(mm), 2014

(사진 출처: ‘굿즈텀블러 페이지 http://g8ds.tumblr.com/post/95093496998/%EB%8F%88%EC%84%A0%ED%95%84-box-ghost-figure-2014-sold-out-frp)

 

허나, 우선은 올해의 취미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한다. 132()에 달하는 숫자가 말해주듯, 작품의 수는 무척 많았고 볼 것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먼저 김혜원의 작은 부조가 조금 재미있었는데, 문구 상자 안에 꽉 찬 입체는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고 어디로든 쉽게 수납될 수 있는 이동성을 확보한다. 김혜원은 과거 정물화, 혹은 풍경화와 같이 보편적인 형태의 그리기를 통해 산출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그림에 적용된 자신의 그리기방식을 역산한 뒤 언어로 정리, 체계화한 다음 그 체계를 뒤섞거나 제한하여 이미지를 제작하는 실험을 전개했는데, 취미관에서의 부조 역시 작업의 이런 차원과 관련이 있다. 김혜원이 그리는 그림이 3차원을 재료 삼는 2차원 이미지라면, 부조는 “2차원으로 완결된 3차원 세계를 다시 3차원으로 재현하는 작업[각주:1]으로, 부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리기 체계의 일부인 양감/부피 만들기는 물감이 아니라 스컬피를 통해 구현되고 2차원적 물성이 3차원적으로 재현된다. 작가는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풍경화, 혹은 정물화 같은 그림을 종종 그리는데, 이 이미지는 작가가 몸에 익은 그리기 수법을 극복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거기에 자신을 맞춰나간 결과로, 실은 깊이가 무척 얕은 형상이다. 취미관에 전시된 부조 위에서도 풍경/정물화적 이미지는 등장하는데, 김혜원의 부조가 갖는 2.5차원의 부피감은 이미지의 얕음과 공모하면서, 평평하지만 평평하지 않은, 이미지-물체로 거듭난다. 또 김혜원은 ‘3dknittinger’라는 이름으로 뜨개 인형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이는 작가 한진의 드로잉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취미관 속 조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였다.

 

  

'3dknittinger'의 뜨개 조형, <bumpy>, <mao>, <hi>, 

(사진 출처: 취미가 트위터 페이지,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1077873158848372741)

 

한편 정희민은 과거의 작업을 확장한다. 정희민이 전시하는 아크릴 조형은 2018년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인 UTC-7:00 JUN 오 후 세 시의 테이블》로부터 튀어나온 것이다. 전시에서 정희민은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낸 가상 공간을 다양한 층위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캔버스 위로 옮겨냈는데, -파이한 3D 모델이 캔버스 위에서 거의 1:1로 재현되는 동안 불투명한 겔 미디엄은 캔버스 화면을 부분적으로 가리면서, 그러나 완벽하게 가리지는 못하면서, 노이즈 역할을 했다. 이 겔 미디엄은 이제 《취미관》에서 아크릴 조형으로 독립하는데, 이 입체 역시 주변 출품작들을 가리면서, 그러나 완벽하게 가리지는 못하면서, 흐릿한 채로 있는다.

 

회화를 위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취미관》렌탈 케이스속에서 어떻게 적응하는가 관찰하는 관람은 흥미롭다. 이를테면 유지영은 휴대 및 전시가 용이한 소형 회화 키트 같은 것을 판매했는데, 이것은 회화 매체를 《취미관》이라는 특정한 플랫폼에 출품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스케일이라는 문제와 디스플레이라는 문제에 맞춰 작업을 최적화한 결과다. 유지영이 《취미관》에 출품한 작은 회화에는 손잡이가 달린 나무 케이스가 부착돼있고, 케이스 뒤편에는 이케아 스타일의 사용자 매뉴얼 같은 게 동봉되어있는데, 케이스와 매뉴얼을 제공함으로써 유지영은 회화를 직접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굿즈를 수행, 문제를 해결한다.

 

 

Pre-product of Plate VIII, Acrylic paint and pencil on canvas, wooden frame with handle, printed instruction guide, screw, command tape, CoA, 31.5 x 21.4 x 2.5 cm (incl. the frame), 2018

(Special Edition for TasteView at Taste House)

(사진 출처: 작가 홈페이지, https://jiyoungyoo.com/Pre-Product-of-Plate-VIII)

 

또 그림에 대해서 말하자면, 호상근은 이번의 《취미관》에서 작은 그림도 팔고 또 작은 피규어도 파는데, 이 그림은 큰 작업을 하기 전에 하는 실물 미니어처로서, “그림이 정말 크다면 어떠할지, 그런 바람을 담아 만들어진 작품이다.[각주:2] 하지만 큰 작업은 《취미관》의 케이스 안에서는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그림이 커지는 대신, 작가 자신이 줄어든다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유사-화이트 큐브적 모형 속에 놓인 작은, 그러나 큰, 그림을 보는 일, 그리고 그 주변 귀퉁이에서 뻣뻣하게 서있는 작가 자신의 피규어를 보는 일은, 웃기고 슬픈 한편 웃기지도 않는데, 이처럼 호상근은 《취미관》이 강요하는 스케일의 문제를 이상한 멜랑코리아를 도입하는 것으로 빗겨나간다.

 

(사진 출처: 직접 촬영)

 

돌출 조각-1, (사진 출처: 취미가 트위터 페이지,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1096750293033734144)

 

허나 2018-19년의 취미관에서, 주가 되는 매체를 꼽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조각이었다. ‘그 어떤 것이라는 명명과 잘 어울리는 모습의 소박한 입체에서 보다 조각적인 형상을 갖는 것까지, 취미관의 케이스에서 입체성을 갖는 조형은 제일 활발한 모습이었다. 개 중 하나로 곽인탄의 작업이 있었는데, 작가가 조형한 <유니크 페이스-1>, <유니크 페이스-2>, 그리고 <->은 제작 과정에서 파생된 잔여물을 조형 안으로 포괄하면서 미완결된 상황을 완결하고, 도구를 재료화한 조각이었다. 위의 세 작업에서 진행되는 재료 실험이 과정을 결과로 포함하는 성격을 갖는다면, <돌출 조각-1>에서의 재료 실험은 성격이 조금 다른데, 이것은 하종현의 접합연작을 방법론 차원에서 참조한 것으로, 과거의 회화 실험에서 물감을 대상으로 실험된 재료의 물성 탐구를 조각적 방법으로 재연해 매체성을 혼합하고 나아가 시간을 뒤섞는다. 또 돈선필은 끽태점(喫態店, Kitsutaiten)’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참여했는데, 그것은 취미관》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했다. 돈선필의 끽태점은 로고가 새겨진 컵이나 중고품을 출품하는 등, 작가처럼 행동하기보단 플랫폼처럼 행동했다.

 

두번째 《취미관》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시각적으로 꽤 복잡했고, 층위 역시 다양했으며, 결과적으로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132()이 참여한 비엔날레 같은 게 있다고 했을 때, 거기 전시된 수많은 작업 중 몇 개의 작업이 기억에 남을 수 있을까? 《취미관》은 압축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사고, ‘작품이 더 작을수록 단점 역시 작아질 수 있다는 스케일의 문제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관람은 꽤 즐거워진다. 다만 여기서 마음 놓고 응원하기 힘든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취미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다시 굿즈에 대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장기 기생하는 프로젝트로서, (반지하의) ‘굿즈 (반지하가 그렇듯) 연습과 같은 걸 하는 듯 보였다. 그 연습의 시공간은 특별해서, ‘굿즈베타 테스트기간 동안 판매되는 굿즈의 수익을 작가들에게 100% 분배하기도 했었다.[각주:3] 그러나 연습은 반지하가 운영을 종료하면서 함께 종료됐고, 취미가의 분배율은, 자세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제 100%는 아닐 것이다. 연습이 끝난 뒤, ‘굿즈굿-가 되었고 반지하는 취미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이제 공간은 제도의 게임안에서 씨름한다. “제도의 게임이라는 표현은 강정석이 제작한 MAGAZINE beta 1에 수록된 LOG 2 : 두 플레이어가 벌이는 최소극대화의 게임에서 등장한 것인데, 이 글에서 강정석은 신생공간-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시점을 개인의 것으로 전환해 “’미술계의 캐릭터’”가 되었을 때, 제도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시간을 겪게 되는 상황에 대해 쓴다. 1년짜리 시간, 부족한 예산, 벗어날 수 없는 공간, 개인의 시간을 잡아먹는 갖은 잡무들, 그리고 이 안에서 작동하는 합리성. 포스트-신생공간의 몇몇 상황은 이것들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그 안에서의 최선을 찾는다.

 

최선을 위한 이 탐색 안에서 공간은 어렵고 중요한 주제로 끝끝내 ()등장한다. 여전히 부동산을 이길 수 없는 신생공간-공간들은 최선을 찾아 최적화를 시도하는데, 개 중에선 특히 PACK의 경우가 극적이다. PACK의 완벽한 작은 케이스는 전시될 작품을 위해서 거의 가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뮤지엄 컨디션을 구현한다. PACK》의 케이스 안에서 신생공간-공간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열악함은 완화되고, 해소된다. 여전히 스케일이라는 문제가 있지 않냐고? 2018년에 열렸던 2번째 PACK의 부제는 팅커벨의 여정이었다. PACK은 완벽한 큐브 속에서 적절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작품의 스케일을 긍정하기 위해 시선의 주체를 줄여버린다. 그리고 거부 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디즈니적 껍데기를 권유한다. PACK에서 작은 작품을 들여다보고 관심 갖는 개인은 서울의가난한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요정이다. 팅커벨 스케일의 개인은 휴먼 스케일을 극복한다. 이렇게 가상적 시점은 탈출구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취미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PACK2018:팅커벨의 여정》 트레일러, 윤태웅(NNK) 제작 

(https://pack2018.org/)

 

권시우는 2017년의 취미관을 다룬 글을 통해, ‘오픈베타공간인 반지하가 실재하지 않는 원본을 지지체 삼아 망상적 작업을 현실화하는 실험장이었듯, 굿즈 역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글에서, 권시우는 굿즈로서의 작업미니어처로 제작됐을 뿐 굿즈는 아닌 작업을 구분한다. 나아가 그는 굿즈를 작가가 전개하는 작업적 세계관의 일부로 기능하는 형식적 단위라고 전제한 뒤, “팬시한 상품의 이미지로부터 굿즈를 구출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은 결국 개별 작업을 통하여 형식화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본작업에 비해 자원과 시간을 덜 소모할 수 있는 굿즈형 작업을 통해, 작가 개인은 스스로 구축한 형식 및 작업적 세계관을 분절하여 관리할 수 있고, ‘포스트-굿즈의 이와 같은 유연함을 적절히 활용하며 작가는 이후를 준비할 수 있다.[각주:4][각주:5]

 

이것은 포스트-신생공간의 가상적 상황을 물렁한 채로 내버려두지 말고,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상적 상황이 단단해져야 하는 이유는, 강정석이 말한 것처럼, 이 물렁한 시/공간이 이제 제도적 게임과 연관됐기 때문이다. 제도는 상황을 자신에 맞춰 재구성한다. 제도의 이런 강제력이 부여하는 상황은 심지어 미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신생공간이 아직 가변적 시간”(강정석) 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작가에게 수익을 무슨 100%를 줘버리는 말도 안 되는 아마추어적 시간이었을 때, 신생공간적 상황은 전염성을 가졌다. 지금에서야 사람들이 전부 신생공간 작업들 그때 봤어도 완전 다 허접하고 말도 안 됐다라고 얘기하지만, 기존의 미술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미술로서 신생공간이 지닌 특별함이 존재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괜히 다들 어깨를 으쓱하긴 하지만 그러는 당신도 한진의 그림 같은 것을 아름답고 이상하고 특별하다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생공간적 상황이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으로 전환된 이후, 이처럼 아름답고 이상하고 특별하다고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광경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도는 이 전염성, 어떤 동질감을 휘발시킨다; 신생공간적 상황 역시 기존의 미술과 작동방식이 동일해진다. 응원도 후원도 없는 곳에서 가변적 시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권시우의 의견은 이런 상황을 의식한다. 물렁물렁한 시간이 끝나면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미술 안에 정착하는 게 맞는데, ‘기존의 미술뿐 아니라 그것이 아닌 미술을 관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로서 작업은 제도가 강제하는 재구성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반자율적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렁한 상황이 단단하게 된 상황에 맞춰 자신과 그 주변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의견으로 작업을 하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지난 시간을 잘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또한 가능하다. 신생공간이 활발하던 시기, 정리에 대한 강박은 이미 그 주변에 가득했다. 목적은 다양했다. 이 유동적인 상황을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단순하게 이것이 싫어서 폄하하기 위해서, 또는 다음주까지 써야 하는 원고 마감을 위해서. 그렇지만 아직 그럴듯한 이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최소 극대화의 게임에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도표를 제공한다.


도표에서, 신생공간은 포스트-굿즈를 바라보지만, 포스트-굿즈는 신생공간을 바라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이후의 시점은 어긋날 수 밖에 없다. 최소 극대화의 게임은 아래를 바라보는 이전의 시선을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요약한다.

 

“90년대생이 준비한 것이 많을 텐데, 올해 사람들이 모여서 큰 행사를 하고 하니 가려진 부분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더 드러나게 되겠죠.”[각주:6]

 

그렇다면 90년대생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가 기입된 애매한 위상의 폐허를 다시 플레이보드로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 주지하듯 한번 유예된 시간은 지속할 수 없다.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각주:7]

 

권시우와 윤태웅(NNK)이 기획한 전시 호버링, 윤태웅이 우연히 전시를 하나 기획하게 되며 탄생했다. 윤태웅은 “90년대생 작업자를 소개하고, 전시하고, 연결하는 플랫폼인 90APT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자연히 전시는 “90년대생 작업자를 소개하고”, 연결하는 기획이 되었다. 전시를 구체화하면서 윤태웅은 권시우를 공동 기획으로 섭외했는데, 당시 권시우가 신생공간 이후에 가능한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전시를 하게 된 공간이 이전에 커먼센터였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흘러 흘러 기획은 ‘90년대생 작업자는 + 신생공간이라는 소유자 불명의 영토에서 =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마주치게 됐다. 전시 서문을 통해 권시우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호출하면서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신생공간적 상황을 재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을 ()익명의 자본으로 전제하고 전유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생공간을 전유하려던 호버링의 기획은 어떤 논의를 불러일으켰을까? 신생공간을 소유자 없는 땅으로 간주하고 강탈을 시도하려던 “90년대생 작업자들의 기획은 무엇으로 간주됐을까? 허나 놀랍(지 않)게도, 호버링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나고 시간이 지난 뒤, 권시우는 트위터를 통해 “80년대생 미술계 종사자를 겨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이후 세대에게 당신들의 경험치를 배분해줄 의향이 있습니까? 신생공간이 씬이 아니었다고, 그건 단순히 외부의 필요에 의한 호명이었다고 거듭 부정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상생하고 있는 당신의 동료들은 무엇입니까? (…) 어차피 당신이 이후 세대에게 기여할 의향이 없다면, 90들이 판을 어떻게 깔든 무슨 상관인가?”[각주:8]

 

호버링》은 신생공간이라는 맥락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전시가 될 수는 없었다. 권시우와 윤태웅이 《호버링》을 통해 만들어내고 싶었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긍정적인 형태의 순환이었을 것이다. 더 많은 논란과 더 많은 이야기들, 또 더 많은 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이 꼬리를 물며 돌아갈 때 다시 풍부해질 미적 상황들. 허나 벌어져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시점은 어긋났으며, 블랙박스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후는 정말 어디에도 없었던 것일까? 굿-가 막을 내린 뒤, 많은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단번에 죽어버리지는 못했으므로, ‘이후가 존재했다. 그것은 (이하 무순) 소쇼룸(soshowroom)의 가변적인, 그러나 협업적인 공간에 존재했고, 기고자와 원룸에도 존재했다. 신생공간적 상황은 대개 가상적 공간성을 과장하여 현실화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공간적 조건을 분할하여 분산하려 했던 이런 저런 시도 속에도 이후가 존재했다. 오페라 코스트나 웨스트웨어하우스, 또 행사를 세 개로 쪼개 각자 다른 세 공간에서 선보였던 첫번째 PACK》 등. 또한 이후 2번째 《PACK》에서 윤태웅이 협업 기획으로 참여, 참여 작가 중 “90년대생 작업자의 비율을 늘렸을 때, 그곳에도 있었을 것이다. 최하늘이 자신의 개인전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를 문주혜의 개인전 《Shuffle The Deck》 위로 겹쳐버렸을 때, 회화적 상황과 조각적 상황을 서로 독립된 상태로 중첩시켜, 하나의 덩어리로 조감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분산된 것이 아니라) 완결된 상태로 제시했을 때, 그것은 신생공간 미술의 공간성을 극복하려는 나름의 방법으로 보였다. 또 박보마와 송민정이, (어쩌면 장다해가) 빈곤을 미학화하려는 신생공간 미술의 어떤 기제를 초-장식적 경험으로 환원하려고 무언가 했을 때, 거기에도 이후는 존재했다. 서울 바벨》에서, 유령팔》에서, 또 《호버링》에서, ‘이후는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 이후에서 시도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유동하던 가변적 시간이 지나간 뒤, 신생공간이라는 흐름에 대해 제도가 자원을 투자해 연구하고,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가 기획되며, 그 결과에 대부분이 만족하고, 그로부터 누군가는 배움을 얻고 또 누군가는 불만을 가지며, 그것이 미적으로 구현되고, 거기에 모두가 영감을 얻어 더욱 진보된 의제를 펼치며 제도는 이 선순환 구조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후원한다는 미래. 모르긴 몰라도 이 미래가 도착했다면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은 지금과 무척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미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닐까?

 

최소극대화의 게임에서, 강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방안에 앉아 계속해서 상위 시점을 더듬어가면 한국 사회 전반이나, 그보다 상위 시점의 게임까지 막연히 상상하며 붕 떠버릴 수도 있다.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전체 그림을 한 번에 잡을 필요는 없다. 되려 천천히 관찰해야 한다. 사회 속엔 다양한 캐릭터가 루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완벽한 상황에 대한 기대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 “제도의 게임에 참여한 개인은 제도의 속도에 사로잡히고, 제도가 제공하는 환경에 바쁘게 반응하는 동안 이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여유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은 땅에 발을 붙이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이즈로 해야 한다. 이것은 타당하지만, 그렇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완전한 주변의 시간으로, 연습적 시간으로.

 

2017년의 취미관》을 다룬 글을 통해 나는 《취미관》이 전적으로 시간을 마련하는 플랫폼이라고 썼다.[각주:9] 시간을 선형적으로 거치며 생겨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취미관》이 외연을 보다 넓히기 위해 《굿-》라는 자산을 변형하며 버티기 시작했을 때,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 18-19취미관》은 보다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게 된 듯 하다. 참여 작가는 100여명()을 넘었고, 기간은 대폭 늘어났으며, 외연 역시 어느 정도 늘어났다. (IAB 스튜디오와 콜라보레이션한 후디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품절되었는지, 취미가의 SNS 계정을 팔로우해둔 사람은 보았을 것이다.) 2019년 현재, 드디어 작음을 긍정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취미관은 이제, “단지 너무 무겁지 않게 약간의 짐을 나누어 지는 자리가 되어, “작은 것은 작은 우회와 작은 교차의 기회를 제공한다.”[각주:10]

 

어쩌면 이것 역시 시간이라는 단순한 힘에 의한 결과다. 허나 시간의 선형적 힘은 공평해서, 그것은 취미가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힘은 굿즈에도 역시 똑같이 작용했다; 굿즈를 위한 시공간은 이제 너무나도 많아서, 취미관》이라는 맥락은 이제 볼 만한 아트샵 중 하나 정도로 단순해졌다. 굿즈는 나눌 만한 자원이자 괜찮은 아이템으로서 더 유연하고 더 광범위하게 변모를 거듭하고, 그 결과 급속도로 지루해졌다.

 

취미가에게는 비전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적 공간에서 작업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그를 통해 서울의 미술에서 가장 크게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각주:11] 이 이야기는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에서 취미가가 찾은 답안 중 하나이고, 동시에 생존이라는 지긋지긋한 주제를 위한 미술의 고민이다. 이것은 중요한 목표라서, 취미가는 이 비전을 추진하기 위해서 시간을 더 견뎌야 할 필요가 있다. 허나 그러는 동안, 취미가라는 포스트-신생공간적 공간은 작은-기성적-공간이 된다. 대관료를 받고 전시를 유지하는 공간이 되었고, 아트샵도 페어도 아닌 것을 다섯 달 동안 회전시키는 무의미의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접혀버린 신생의 시간 위에서 취미가는 기성도, 신생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구축한 최선의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취미관》은 어떠한 형태를 갖추게 될까? 혹시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것은 기금 마련을 위한 디너쇼 같은 것처럼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허나 아직 《취미관》은 끝나지 않았고, 케이스 속 출품작들은 꾸준히 변동될 예정이다. 나는 아직 《취미관》을 전부 본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부분적인 이야기만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취미관》은 여전히 유예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고, 여전히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 안에서, 취미관》은 여전히 최선의 결과물인데, 이것은 답답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1. 『Painter by Painters』, 김혜원 인터뷰, 110p [본문으로]
  2. 《PACK2018:팅커벨의 여정》 웹페이지 작품 설명 참조. https://pack2018.org/W [본문으로]
  3. 굿-즈 트위터 페이지 참조, https://twitter.com/g8dsinfo/status/510673519617638400 [본문으로]
  4. 권시우, 「취미가와 취미관 이후의 ‘굿즈’」,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87?category=650941 [본문으로]
  5. 권시우, 「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미술세계』 2016년 12월호 제50권, 91-93p,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본문으로]
  6. 강정석, 「LOG 2 : 두 플레이어가 벌이는 최소극대화의 게임」, 『MAGAZINE beta 1』, 201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권시우, 「《호버링Hovering》 전시 서문」, 2018, 페이지 표기 없음 [본문으로]
  8. 권시우 a.k.a. “흔들렸던 죠” 트위터.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https://twitter.com/shakingjoe/status/1003575837189238785 [본문으로]
  9. 황재민, 「미술은 취미가 되어야 하는가? "<취미관>이라는 4주의 시간"을 향한 에세이」,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88 [본문으로]
  10. 윤원화, 「캐비닛의 ‘작은 미술’: 굿즈, 생산-전시-소비를 말하다」, 『아트인컬처』 2019년 2월호, 126-129p. [본문으로]
  11. 권순우, “(…) 사적 공간에서 작업을 감상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돈을 지급해서 일정 부분 작가를 후원하게 되는··· 씬에 명확하게 포함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번 그걸 해본 것은 한 번도 안 해본 것이랑은 엄청난 차이죠.”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피아★방과후』, https://pia-after.com/?p=609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엎지른 물》 전시 전경 (사진: 윤병주)


정동 인근의 갤러리, ‘레인보우 큐브 Rainbow Cube’는 가택을 고친 모양의 전시 공간이다. 이곳에선 작년 한 해 처음의 개인전이라는 작은 공모를 열었는데, 공모는 아직 개인전을 열어본 적 없는 이력의 작가에게 처음의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공간 및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유지영은 2018, 이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것은 작가가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관여한 첫 번째 전시였다. 개인전의 제목은 엎지른 물 Spilled Water이었는데, 전시 리플렛에 포함된 정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엎지른 물의 경위란 다음과 같다


물과 컵. 물은 컵이라는 물리적 기반에 담겨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컵은 물이라는 내용물을 통해 사용가치를 얻는다. 그렇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린 채 물이 가득 담긴 컵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그 앞에 앉은 사용자가 목이 마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물은 사용자에 의해 들어 올려진 컵을 빠져나감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제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만 그와 동시에 지반을 잃고 금방 증발될 위기에 처한다. 유용성에 종속되는 투명한 사물이었던 컵은 구멍이라는 비효용성을 통해 내용물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사용자를 좌절시킨다. 회화라는 컵에 담긴 이미지라는 물을 마시러 온 관객들에게, 전시 엎지른 물은 다음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을 경험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두 요소 간의 딜레마적인 관계를 상기시킨다.”[각주:1]


이 경위에는 맥락이 있다. 유지영은 물과 컵에 관련된 비유를 다른 곳에서 빌려왔는데, 그것은 벨기에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파이코 베커스(Feiko Beckers)가 영국의 갤러리 텐더픽셀(Tenderpixel)에서 개최했던 전시인 <당신은 실제로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You might actually learn something>(2017)에서 진행했던 퍼포먼스, 혹은 워크샵<당신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좌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 A thing you can't, but also don't want: A workshop on handling frustration>(2017)이라는 작업에서 비롯한다. 작업은 좌절감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해석을 담은 퍼포먼스, 해당 작업에서 파이코 베커스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컵과 거기 담긴 물을 앞에 두고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 어떻게 해야 해당 욕망을 좌절시키는 구멍이라는 방해물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읊조리다가 결국에는 구멍 난 컵(지지체)을 들어 올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물(내용물)을 다 쏟고야 마는장면을 연출했다.[각주:2] 유지영은 좌절감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이 퍼포먼스에서 영향 받아 <좌절의 서식 Template of Frustration>(2018)이라는 작업을 제작했는데, 주제로부터 영향을 직접 받았다기보단 퍼포먼스에 사용된 물리적 매개물로부터 작업의 계기를 얻은 듯 보인다. 이 컵과 물이라는 비유는 작업 <좌절의 서식>과 그 쌍인 <희망의 서식 Template of Hope>(2018) 등의 작업을 통해 구체화되며 사용자와 내용물과 물리적 기반과의 관계, 회화와 이미지와 지지체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했고, 작가의 첫 개인전 엎지른 물은 그 필요가 쌓이며 만들어낸 결과다.


유지영은 회화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작업, “상수로 여겨졌던 회화의 조건들을 각각 조정해보면서 도출되는 작업이 회화와 비-회화의 경계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가늠하는 실험을 한다.[각주:3] 회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는 특정한 형태의 미적 미디엄에는 관습화된 문법이 존재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시작해 규칙을 임의로 분할하여 재배치하는 작업으로 나아가고, 또 문법적 규칙이 그렇게 바뀌었을 때 어떤 경우가 회화로 보이고 어떤 경우에는 회화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지 양상을 실험한다. 만약 이 실험에 목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회화라고 불리는 특정 형식의 기반에 대해 고찰하는 일일 것이다.


이 고찰에는 개인적 계기와 미적 계기가 공존할 듯하다. 작가는 회화 작업을 하며, 작업의 절차와 선택되는 재료와 같은 필수 요소들이 어째서 유독 한정되어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것은 일반적인 형태의 그리기를 통해서는 성립되지 않는, 형식적 회화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작업의 절차를, 재료를, 나아가 기반을 바꾸기 위해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관찰 가능한 표본으로서) 주변에 대한 반발, 그리고 미적 차원에서는 (의심 없이 수용되는) 관습에 대한 반발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탄력인데, 이 반발력은 회화라는 미디엄에 연루된 다양한 이야기들, 문법적 규칙과 역사적 강제력과 관습적 이해와 물질적 층위 같은 수많은 요소의 가능성과 미래를 간과하지 않는 작가가 도출한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보인다.

 

허나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 유지영의 실험은 충분히 의아한 실험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회화의 기반을 고찰하고 탐구하기 위하여, 이런 절차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그러니까, 지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그냥 그림을 그리는 행위일 수 있을까? 역시 회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냥 그림을 그린다는 것일 수 없고, 이와 같은 경우 그리는 행위 자체에 회의가 내재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엎지른 물의 경우처럼 회화에 대해 실험하는 미적 행위가 극적인 형태로 내보여져야 하는 필연성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종종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회화를 매개하는 것은 손에 익은 기술과 그 기술을 위해 적합하게 생산된 각종 재료를 이용해 캔버스 전면((前面) 혹은 바깥 어딘가에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법을 포함한다. 다만 이것은 회화적 매체/행위가 지니는 각종 속성을 개체화한 뒤 필연성을 지니도록 조작해서 재배열하는 행위 일체, 이와 같은 방식에서 회화적인 것을 탐구하는 행위 일체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이것을 경향으로 특정할 수 있다면, ‘그리기로 매개되는 회화와 회화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통해 매개되는 회화는 서로 구분된다; 그에 따라 각자 다른 전제와 방법을 갖는다; 허나 이 구분은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에, 여러 차원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종종 뚜렷하게 분별되지 않는다. 엎지른 물》의 실험이 누군가에게 극적이라면, 그것은 작가가 회화적인 것안에 항상 포함되는 이 같은 혼란상을 어느 정도 의식한 결과다.

 

엎지른 물에서, 작가가 실험하는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에 따라 미적 실험의 표본처럼 보이는 어떤 파격적임이나 급진성과 같은 요소들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관찰에 기초해 문제를 인식한 뒤, 가설을 형성하고 검증한 다음 결과를 분석한다는 실험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에 따라 전시의 전제와 전제의 작동 방식, 또 작가가 최소한의 의도를 부여한 가시적/비가시적 관계들, 또 그중 무엇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이와 같은 대개의 구성이 이해가 가능하도록 열리게 된다. 이것은 마치 소형 동물의 인지 능력 실험을 위해 설계된 미로처럼, 뚜껑이 열려 조감이 가능한 형태를 갖는다. 전시를 바라보는 인간종은 어떤, 햄스터의 시점 같은 것을 통해 미로 구조를 탐구할 것인지 혹은 미로 전체를 위에서 바라볼 것인지, 선택하거나 오갈 수 있다.

 

허나 어떤 시점을 통하든 공통되는 이해가 있다면, 전시에서는 (회화의) 내용물과 물리적 기반이 관계 맺는 방법이 환유적 구조 안에서 틀지어지고, 이 과정에서 추상화된 정보 역시 일부분 해설된다는 점이다. 회화적 정보를 언어로 잠시 치환하여 그것이 갖는 다양한 벡터를 특정하는 설명은 작가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으로, 엎지른 물에서 물과 컵으로 설명된 회화 내부의 관계는 이전에 한번 포장지와 내용물의 관계를 통해 설명된 적 있다.[각주:4] 물과 컵의 관계에서, 내용물 이미지는 갈증에 시달리는 누군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편 포장지와 포장 안 내용의 비유에서, 이미지는 내용을 보려는 누군가의 관심을 왜곡하는 것이다. 다만 두 비유가 갖는 유사점이 있다면, 회화 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이미지의 시각적 힘이 대체로 강한 탓에 지지체 혹은 물리적 기반을 포함하는 이해가 실패한다는 평가다. 이미지의 힘이 이렇게 크다면, 이미지에 대한 단면적 감상을 넘어서는 이해를 위하여 작업에는 어떠한 공작이 수행될 필요가 있다. 이미지가 지지체라는 물리적 기반,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무대 위에서 지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나쁜 경우 새로운/다른 이해에 훼방을 놓는다면, 복잡하게 생각하기 전에 우선 강제력을 갖는 이미지의 대표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궁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 앞에 구멍 뚫린 컵을 가져다 놓는 회화적 스턴트를 시연한다. 사람들은 엎질러져 버리는 물과 함께 구멍 뚫린 텅 빈 컵을 손에 쥐게 된다. 아연함과 함께, 그 컵을 한 번 더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젤 회화는 여태 몇 차례나 미적인 효용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캔버스 전면을 몸체로 사용하는 표면 중심의 회화, 이미지 위주의 회화가 온전히 극복되어 새로운 종류의 예술로 승화된 역사가 존재한다면, 회화의 감상에 있어 이미지 중심적 이해가 선행한다는 전제 역시 당위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엎지른 물의 실험이 가리키는 방향 앞에는 어떤 방해물이 있는 셈이다. ‘특정한 사물(Specific Object)’의 논리가 미술을 새로운 범주로 확장하며 회화를 극복했다고 한다면, 이미지에 대한 엎지른 물의 전제는 다소 작위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때문이다. 허나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순수 시각적 평면으로서의 회화라는 영향을 재귀적 대상성(Recursive Objecthood)을 갖는 사물로 승화한 역사적 해석을 회화를 우회한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지영이 탐구하는 영역은 영생하는 이미지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에 의해 매개되려는 이미지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려는 회화가 표하는 어떤 끈질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끈질김은 사실 과거에 우회되었을 뿐이므로 여전히 존재하고, 그렇기에 극복을 위한 새로운 계기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계기는 보다 어려운 질문을 포함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회된회화는 아직도 흥미로운 형식일 수 있을까? 이처럼 조각내어 그 근본을 다시 보아야 할 만큼, 회화는 여전히 흥미로운 형식으로 존재하는가? 회화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와는 상관없이, 회화는 꾸준한 수요를 갖는 형식으로 언제나 나름의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이것은 회화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보통 회화가 확장하는 미술 시장 안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장식으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거쳐 해설된다. 허나 회화가 지니는 끈질김만큼은 급진주의 미학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매력적인 가치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점차 정형화되는 급진적 미술을 위해 회화의 이런 속성을 전유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대중 관객의 강한 신뢰를 재료 삼아 주기적으로 환기되는 회화는 관객의 기대를 확보하기 용이하므로 불편한가치를 삼투할 수 있는 위장 작전의 껍데기로서도 유용하리라는 것이다.[각주:5] 이 같은 전략과 함께 회화는 갱신의 계기를 얻는다. 갱신된 회화의 문제는 캔버스 전면에 어떤 재료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화가 어떤 네트워크로 어떻게 편입되는가에 대한 문제로 바뀐다. 회화는 이제 고정된 순환 구조 안에서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네트워크 안으로 외재화(Externalization)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 몸체는 추상화된다. 외재화 과정을 거쳐 개념적으로, 물질적으로 보다 넓은 공간으로 향하는 회화는 개체의 미학을 환경의 미학으로 확장하며 갱신된 가치를 확보한다.[각주:6]

 

이처럼 확장된 회화(Extended Painting)’, 이제 회화가 개별 미디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 작업 내부에서 다양화되는 미적 미디엄과 그 미디엄()이 물질적/비물질적으로 생성하는 관계 중 일부로 통합된다는 논리처럼 보인다. 회화가 관계하는 관습적 이해, 강한 신뢰, 나아가 회화적 언어 자체는 보다 넓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Post-medium Condition)’ 안으로 편입된다 - 매체가 갖는 특정성이 무력해진 동시대 미술의 짧은 역사 안에서, 회화는 이처럼 갱신된 모델로 변모한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회화 작업을 보며 내가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면, 그 작업들이 이와 같은 회화의 새로운, 확장된 모델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회화적인 것을 널리 확장하는 방식으로 미술을 재정의하려 들기보단, 회화라는 미디엄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미술에 대해 탐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그 전제는 얼마간 의아하다. 현대/동시대 미술의 다종다양한 매체 탐구의 역사에 대해 인지한 누군가가, 회화를 신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회화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 설명할 때, 관련되어 쉽게 상기되는 주체는 얼굴 없는 대중관객이지 비판적 성격의 작가가 아니다. 회화는 죽었고 죽은 회화가 한 번 더 죽었다가, 그게 한 번 더 돌아왔지만 그것조차 허무하게 잊힌 것이 아니었는지? 회화는 오로지 흥미롭게 극복되는 장면의 재료로 쓰일 때 의미 있고, 대충 그렇지 않나요? 허나 한국의 몇몇 회화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를 하나의 중심으로 파악한 뒤 주변적인 것을 뒤섞어 무게 중심을 재편한다는 아이디어는 전혀 흥미로운 것이 아닌 듯 하다. 《엎지른 물》에 설정된 주요 가설인 회화는 내용과 그 물리적 기반으로 나뉘어진다는 주장 역시, 회화를 극복/반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수정해야 하는 무엇으로 간주한 결과로, 유지영은 회화가 기타 주변 요소들과 관계되며 다양한 미학적 논의 속으로 펼쳐지기보단 기존에 관계하던 관습적 이해를 탐구하고 고장내어[각주:7] 새로운 이해를 촉발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편으로는 아주 시대착오적인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선은 이와 같은 이해를 유도하기 위해 설정된 각종 조형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정체되고, 혹은 해결되는지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이때 비로소 햄스터-시점이 유용하다.


전시에서는 유사한 문법이 반복되며 장치가 된다. 팜플렛을 통해 작가가 직접 밝히는 일종의 안내문, ‘구멍 뚫린 컵엎질러진 물이라는 비유는 여전히 비유이지만, 《엎지른 물》 안에서 예상보다 직설적이다. 이 구조는 작가가 회화를 어떻게 고장 낼 것인가 고심한 결과로, 구멍이 난 패널은 에 해당하는 물리적 기반의 형상물이며 바닥을 구르는 작은 패널이 바로 에 해당하는 이미지에 상응하는 결과다. 구멍 난 패널은 같은 모양의 백색 패널을 쌍으로 갖고, 예의 패널로부터 직접 탈각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패널은 전시 공간 바닥 혹은 거치대 위에 나름의 질서를 만들며 놓이는데, 이것들로 레인보우큐브의 작은 공간은 제법 빈틈없이 채워진다.


<좌절의 서식 Template of Frustration>(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1.5 x 2 cm), Pieces (in order by size): (16.1 x 50.6 / 16.1 x 50.6 / 23.8 x 22.5 / 23.8 x 22.5 / 26 x 18.6 / 26 x 23.4 / 26.2 x 47.5 / 66.6 x 24.5 / 73.3 x 51.4 / 20.9 x 20.9 / 20.9 x 20.9 / 20.9 x 20.9 / 20.9 x 20.9 / 43 x 43 cm)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작가가 설정한 비유의 구조는 언어 차원에서 마감되지 않고 작업에 슬며시 개입하여 몸통의 일부가 된다. 이 구조는 시각적 흥미를 돋우는 일에도 쓰이며 전시의 의제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권유하는 일에 쓰이기도 하지만, 비유를 따라 형성된 모종의 서사는 각 패널 간의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의 경우, 비유는 스티커의 형태를 인용하며 형성되는데, 이 인용은 자연스레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게 그러니까, 어째서 하필 스티커일까?


《엎지른 물》 전시 중 <좌절의 서식>(부분) (사진: 윤병주)


구멍이 뻥 뚫린 채 어려운 시간을 겪는 회화에게 예쁜 심상의 탈부착형 2차원 장식을 껍데기로 입혀버리는 것은 잔인한 선택처럼 보인다. 허나 여기에는 작품의 제목을 비롯,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좌절의 서식>, 그리고 <희망의 서식>이 전유한 레디메이드 사물인 스티커는 이미지를 엎지르는데최적화된 물건이다. 스티커에서, 이미지는 탈각되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미지가 빠져나간 뒤 스티커의 남은 몸체 부분은 대부분의 경우 버려질 터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보면 스티커는 작가가 설명한 회화의 내용과 그 물리적 기반 간에 생겨나는 관계, ‘지지체는 이미지에 의해 가려진다는 전제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두 작업의 경우, 제목은 전시명 《엎지른 물》과 마찬가지로 파이코 베커스의 퍼포먼스 <당신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좌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으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좌절희망도 특정한 감상적 정서와는 관계가 없고, 아이디어를 취한 작업의 인용이자 이미지에 의해 실패하는 지지체의 위치를 해설하는 단어로서 도구적이다: 비록 누군가는 좌절, 혹은 희망과 같은 정서를 이 구멍 난 패널 안에 대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 또 이들로부터 빠져나와 파편화된 이미지-패널을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해 재단할 부분을 설정한 다음, 공방의 도움을 받아 패널을 커팅했다. 이후 커팅된 단면을 사포질해서 매끄럽게 만든 다음에는 패널에 캔버스 천을 씌우고 젯소를 발라 바탕을 준비하는 등, 패널이 회화로 기능할 수 있게끔 매개하는 후반 작업이 요구됐다. ‘서식패널에서 탈각된 이미지-패널에도 역시 캔버스 천을 씌우는 등 바탕을 만드는 작업이 적용되는데, 이것은 파편화된 이미지 위에도 ‘oil on canvas’의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처리로, 작가가 회화의 기본적 구성 요소를 프레임, 표면, 안료로 (1차적으로) 정의함에 따라 대개의 작업에는 이 세 요소를 확보하기 위한 절차가 적용된다.

 

그렇다면 예의 두 작업이 회화를 스티커처럼 다루면서 이미지를 떼어냈을 때, 그 광경은 과연 전유한 물건의 경우처럼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까? 이미지들이 잘 떼어져 바닥으로 향한 것을 본다면, 스티커-환유를 통한 예의 고장은 제법 성실하게 진행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지와 지지체, 양자가 회화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관계는 여전히 서로 밀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장이 발생한 현장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바닥에 놓인 이미지-패널이 갖는 이미지는 원래의 형상을 추측하기 어렵게 블러(Blur) 처리되어있고, 몇몇 파편은 하얗게 탈색되어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지지체 위에 남겨진 이미지의 흔적은 훼손되지 않고 뚜렷하다. 이것은 분리된 파편이 지지체를 온전히 갖추면서 독립된 회화 개체로 전시되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하여 작가가 임의로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지체로부터 탈각되어 튀어나왔을 때 이미지가 처하게 되는 취약 상태를 표기하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이미지-파편은 탈각되어 형상이 흐려지고 벗겨지며, 지지체 위에는 구멍이 뚫려있지만, 아직 고장은 완전하지 않다.



 

《엎지른 물》 전시 전경,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부분) (사진: 윤병주)


<희망의 서식 Template of Hope>(2018), Oil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1.5 x 2 cm, Pieces (in order by size): 9.8 x 31.6 / 11.1 x 15.8 / 12.9 x 15.5 / 12.9 x 15.5 / 13.2 x 28.8 / 13.3 x 43.5 / 16.2 x 16.2 / 18.1 x 8.1 / 22.4 x 22.4 / 26.7 x 26.7 / 31 x 19.6 / 31.2 x 16 / 31.7 x 28.7 / 36.4 x 19.9 / 36.4 x 19.9 / 36.4 x 19.9 / 38.1 x 38.1 / 67 x 67cm)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의 구멍 뚫린 패널들, 그리고 거기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패널이 일정량의 훼손을 주고받으며 멀어져 있는 동안, 구멍 뚫린 패널을 위한 쌍이자 지지체 차원의 네거티브처럼 보이는 패널은 곁에서 온전한 모습을 지니며 여유롭다. 이것은 어쩌면 이미지-없는-순수-지지체형식으로서 이미지를 입고 고생 중인 템플릿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 형상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은 이 온전한 뼈대 역시 예의 구멍 난 패널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근거가 사라지는 형식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불완전한 형식이다. 1차원적으로 독해하자면, 이것은 순수-지지체의 이상 역시 온전한 형태를 갖출 때조차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좌절희망이 이와 같은 부침을 겪는 동안, 같은 공간에 전시된 다른 작업은 어떤 역경을 통과하고 있을까? 유사한 문법의 <Plate ⅩⅨⅩ.>, 그리고 <Plate Ⅷ.> 역시 나름의 고초에 시달린다. <좌절의 서식>에 설정된 비유적 구조가 스티커였다면, ‘Plate’의 경우는 도판을 껍데기로 갖는데, 그에 따라 작업의 질감 역시 달라진다. <좌절의 서식>에서 바탕을 만드는 초반 작업에 젯소가 사용된다면 ‘Plate’에선 아크릴 미디엄이 쓰였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패널에 도판의 질감과 같은 종이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각주:8]


<Plate XIXX.>(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200 x 120 x 2 cm (사진: 윤병주)


<PlateⅩⅨⅩ.> 부분 (확대) (사진: 윤병주)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 쌍과 ‘Plate’ 시리즈는 서로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흡사한 방법론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출된 이미지-패널을 살핀다면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좌절의 서식> 쌍의 경우 고장을 위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미지들은 흐려지고 표백되며 본래의 이미지를 잃지만, <플레이트>로부터 분리되는 이미지들은 원래의 형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허나 여전히 몇몇 이미지-패널은 공백이다.) 그뿐 아니라 독립된 작업으로 거듭나며 제목과 캡션 등을 얻는다. <좌절의 서식>의 경우에서 작가가 파편화된 이미지-패널을 분리된 개체로 제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선택은 그와 무척 대비된다.


<1-13 from Plate XIXX.>(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1 from Plate XIXX.: 8.7 x 15 cm

2 from Plate XIXX.: 9.3 x 16 cm

3 from Plate XIXX.: 13.3 x 14.5 cm

4 from Plate XIXX.: 14.4 x 16.8 cm

5 from Plate XIXX.: 17.3 x 19.9 cm

6 from Plate XIXX.: 21.1 x 19 cm

7 from Plate XIXX.: 21.1 x 23.5 cm

8 from Plate XIXX.: 18.4 x 22.5 cm

9 from Plate XIXX.: 19.8 x 25.2 cm

10 from Plate XIXX.: 25.3 x 22.7 cm

11 from Plate XIXX.: 25.4 x 23.7 cm

12 from Plate XIXX.: 24 x 26.6 cm

13 from Plate XIXX.: 29.2 x 35.7 cm

(사진: 윤병주)


이 선택은 어쩌면 도판이라는, ‘Plate’가 몸체 삼은 레디메이드 물건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스티커는 탈착을 위한 장식이지만 도판은 책의 일부로, 자립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설명적 기능을 지닌다. 스티커의 경우 우선되는 것은 항상 이미지이고, 몸체의 쓸모는 사소하다. 허나 도판에서, 이미지와 지지체 간 관계는 거의 불가분으로 동등하다. 스티커의 이미지는 그 몸체로부터 떼어졌을 때도 여전히 스티커로 존재할 수 있지만 도판의 이미지는 떼어지는 순간 맥락에서 이탈하며 기능을 잃는다. <좌절의 서식>의 이미지-파편들에겐 온전한 회화로 독립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이 스스로 섰을 때, 전시장에는 회화가 아니라, 크게 확장된 스티커 모형이 소환된다. 반면 도판은 이미지가 멀쩡한 채로 독립하더라도 상관 없다. 이미 특정한 책의 맥락으로부터 탈선한 이미지는 기능 자체가 변화한다. 유지영이 인용한 도판은 각각 History of North American birds(1874)Eggs of North American Birds(1890)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전자의 경우 미국의 조류학자이자 학예사였던 스펜서 풀러튼 베어드(Spencer Fullerton Baird, 1823-1887)가 로버트 리지웨이(Robert Ridgway, 1850-1929), 그리고 토마스 마요 브루어(Thomas Mayo Brewer, 1814-1880)과 함께 집필했으며, 후자는 마찬가지로 미국의 조류학자였던 찰스 존슨 메이너드(Charles Johnson Maynard, 1845-1929)가 집필했다.


<Plate VIII.>(2018), Acrylic paint and graphite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0 x 2 cm) (사진: 윤병주)


‘Plate’의 이미지-패널의 캔버스는 해당 이미지가 원래 갖는 모양을 반영하며 결정되고, 그 때문에 캔버스가 사각형 혹은 원형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이처럼 형태를 갖는 캔버스 역시 ‘Plate’의 이미지들이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사각/원형 캔버스가 역사적 형태의 회화를 상기시키며 일반화된다면, 도판 이미지에 조응하며 도출된 변형 캔버스는 해당 이미지와 특정적으로 결부되는 유일한 지지체 형식으로 승화된다. ‘Plate’에서 도판이라는 추상적 몸체는 이미지와 지지체가 형성하는 딜레마적 관계 안에 유화(乳化) 작용을 일으키며 예외적인 독립성을 만들어내는데, 《엎지른 물》의 실험에서 의외의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처럼 구멍 뚫린 패널 본체와 파편화된 이미지 패널이 필연적 과정을 거쳐 분절될 때 파생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회화 전면과 그 물리적 지지체가 특정적으로 대응하며 형성되는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 형식은 회화-조각이라 명명할 수 있을 법한 부류의 형식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회화-조각이 회화적 관습을 차용, 불분명한 입체적 영역과 연관되며 확장을 꾀한다면 변형 캔버스는 여전히 회화의 역사와 관련되어야만 이해가 수월한 형식 중 하나다. 유지영이 이미지-패널 위에도 캔버스 천을 붙이고 유화 물감을 올려 ‘oil on canvas’를 부여하며 수행적 관계를 설정할 때, 이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회화를 위한 실험이라는 전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엎지른 물>의 이와 같은 경위는 단일한 목적을 위해 명료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전시의 방법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 있고, 또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한 모종의 해설과 모종의 주석을 요구할 수도 있다. 패널 위에 존재하는 공백, 또 그 공백의 원인이자 결과인 파편들, 그들이 왜 그런 모양으로 엎질러졌는지’, 또 만약 그런 모양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어떤 실험이 가능했을지에 대해서.

 

어쩌면 이미 지나친 전시장의 초입, 그 근처에 기대 서 있는 하나의 작업이 그런 주석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작업의 제목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Lumpy Frame and Canvas with a Half-Moon>(2017)인데, 제목에서 분명하듯 작업은 혹이 난 프레임과 구멍이 난 캔버스를 즉각적인 대조가 가능하도록 병치한 형태를 갖는다. 프레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프레임과 캔버스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캔버스의 모습은 간단한 고장을 실험한 결과물인데, (+)과 구멍(-)은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지만 프레임과 캔버스에게 각각의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지지체 대상의 고장을 성공시킨다.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Lumpy Frame and Canvas with a Half-Moon>(2017), Jesmonite and primed canvas, oil paint, Dimensions variable (each 40 x 30 x 2 cm) (사진: 윤병주)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좌절의 서식>과 그 쌍인 <희망의 서식>, 그리고 <Plate ⅩⅨⅩ.> <Plate Ⅷ.>의 양상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해석은 임의적이고 부분적이다. 허나 전시를 구경하는 방법은 언제나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더 뻔뻔하게 전시를 한 번 더 돌아보자면, <좌절/희망의 서식>, 그리고 ‘Plate’ 시리즈 등 엎지른 물의 작업들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에서 시도된 간단한 고장에 한 가지 명령어를 더해 복잡화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 명령어란 당연히 이미지일 텐데, 이처럼 이미지가 개입되자 상황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에서처럼 깔끔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작업에서 어느 정도 성취된 듯 보였던 구멍 내기를 통한 고장의 문법은 이렇기에 확장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의 힘은 여전히 다 소진되지 못해서, 이미 얼마간 완성된 방법론 안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

 

전시에서, (이미지에 대한) 고장-실험이 신경계를 교란하는 망막적 실험이 아니라 형식적 실험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재미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리기는 회화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굉장히 중립적인 태도로 다루어낸다. 유지영은 이미지를 꽤 섬세하게 조형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통해 어떤 것도 담아내지 않겠다는 목표를 위해서이다. 전시에 사용되는 회화적 이미지는 무척 다양하다; 어떤 화면은 구상적이며 어떤 화면은 비구상적이고, 어떤 화면은 백색 모노크롬처럼 보이지만 이 다양한 구성은 특정성을 매개하지 못하고 같은 차원으로 통합되어 버린다. 모종의 중립적 대표성을 부여 받는 이미지와, 그에 의해 창출되는 시각적 건조함은 구멍 내어 고장 낸다라는 목표에 단순성과 합리성을 실어준다.

 

그렇지만 회화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꽤 과격한 행위임이 틀림 없다. 구멍은 물리적인 공백을 만드는 일이지만 동시에 상징적인 공백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젤 회화의 캔버스 전면은 오랜 시간 동안 정신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면으로서 대표하는 것이 많았다. 회화에 구멍을 뚫는 일에 대해 상상할 때, 표현을 위한 과격한 정동을 실어 나르는 힘센 붓질 같은 것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것과 크게 거리를 두려는 합리적 단순성의 공백은 전시의 목적과 전개가 도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에 대해 알리는데, 이것은 스타일일 수도 있고 (작가적) 기질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각적으로 고요하며 상대적으로 단순한 방식의 개입으로도 망가뜨리는 일에 대해 다룰 수 있을 만큼, 회화 매체는 긴장된 상태다. 긴장의 원인은 촘촘하게 짜인 관습적 이해의 추상적 물리력으로, 회화가 이런 긴장을 유효하게 받아들일 때, <혹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망가뜨리는 단순한 조작 역시 잠시 유효해진다.

 

유지영이 수행하는 고장은 실험적 절차를 거치기에 논리성을 요구하지만, 한편 이 실험이 전제하는 주요 가설은 검증이 어려울 만큼 유동적인 영역에서 창안된다. 이를테면 이미지가 지지체와의 갈등에서 대개 승리한다는 전제, 프레임과 표면과 안료가 회화의 기본 구성 요소라는 전제, 또 회화적 이해가 이미지와 지지체로 양분된다는 전제 등이 그렇다. 들여다보면, 이 가설은 실험 대상의 근본적인 정의에 개입하는 급진적 가설로, ‘회화적인 것을 탐구하기 위해 회화적인 것이라는 추상적 미디엄의 몸체를 필연적으로 조작한다 - 원활한 고장을 위해, 원본을 고장에 적합한 상태로 개조한다.

 

회화의 유행이라는 아리송한 사태 앞에는 동시대 미술 문법의 붕괴가 선행한다. ‘동시대 미술은 특정적인 것을 상실하고, 그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것의 추상화 단계를 거쳤다라는 가설이 가능하다면, 회화를 하나의 사물로 파악하는 이해는 흥미롭다. 회화는 가장 추상적일 때조차 사물성을 구현하고 고착화된 물질적 문법을 통해 구성되므로, 재편되기 시작한 미술의 의제들에 대해 단단한 형태로 반응하기 수월하다. 예의 개조란 사실 이에 대한 각주가 된다. 회화는 관습적 이해의 구습에 의존하는 특정한 미학적 규칙이지만, 그 규칙을 담보하는 역사/미술사는 여전히 관습적 이해를 생산하되, 위계를 생성하지는 못한다. 역사는 이제 이미지 차원에서 블랙박스화되어 굉장히 평등한 방식으로 수집되는 것이므로, 이 평등/평면의 시간축 위에서 개인이 의도를 가지고 조형한 미시적 시점은 잘 정렬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축적된 관습의 그것에 상응하는 무게를 얻을 수 있다.

 

회화를 단일한 중심으로 간주한 채 주변적인 것을 경유해 확장을 꾀하는 작업은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 끝을 선고받았던 그때부터, 쉽게 낙차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용했다. 허나 이제 역사/미술사는 위계를 생성하지 않고, 회화 역시 단일한 경향이라고 단순하게 특정할 수 없다. 이를테면, 회화는 모더니스트 매체의 상징으로 간주되며 급진성을 물신화하는 상품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에 자주 시달리지만, 시장을 관찰한다면 이 같은 비판이 거의 수사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까운 사례로, 김환기, 김창열, 이우환, 유영국이 오윤, 임옥상과 뒤섞이다가 요시토모 나라와까지 관련되어버리는 서울 옥션의 경매장[을 전경으로 둔다면, 한국의 젊은 회화 작가들의 작업이 모더니스트 매체가 물신화되는 현상에 대해 다른 많은 (역사적) 회화들과 같은 책임을 지닌다는 비판은 불공평하게 보인다.[각주:9]

 

이와 같이, 미술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됐던 이런저런 전제들은 현재 크게 유동하고 있다. 따라서 무언가 분명한 것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두고 낙차를 만들어내는 방법들 역시 유효함을 잃는다. ‘회화를 고장낸다는 목표가 회화적인 것이란 무엇인가궁리하는 방법을 필요로 하고, 나아가 회화적인 것을 자체적으로 재정의하여 사용하는 DIY식 형식주의로 귀결되는 상황 역시 이 같은 배경 앞에서 이상할 것이 없다. 만약 이것을 신화화된 모던의 형태를 근거리에서 찾아내는 탐색과 같은 것이라고 풀어낸다면, 그것은 극적 표현을 위한 자족에 불과하게 될까? 한 가지 비교적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필연성에 의지하며 창조되는 탐구적 조형의 사례가 나타내는 가치가 존재하며, 해당 가치가 시대착오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 큰 상관은 없다는 사실이다.

<310-756 from Plate V. and VIII.>(2018), Acrylic paint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428 from Plate V.: 9.1 x 14.6 cm

560 from Plate V.: 6 x 10.2 cm

756 from Plate VIII.: 13 x 20.7 cm

705 from Plate VIII.: 15 x 22.8 cm

510 from Plate VIII.: 15 x 23.2 cm

501 from Plate VIII.: 17.5 x 25.1 cm

513 from Plate VIII.: 16.4 x 27 cm

310 from Plate VIII.: 42.2 x 56.7 cm

(사진: 윤병주)



  1. 전시 서문, 「작가노트_구멍 난 컵과 엎질러진 물」. 페이지 표기 없음. [본문으로]
  2.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70p. 작업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설명을 참조했다. 링크: https://indd.adobe.com/view/005ec962-af77-414d-94de-0f089119fa90 [본문으로]
  3.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65p. 위 링크. [본문으로]
  4.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68p. “회화가 선물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이미지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와 같다면 그 표면 아래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가 내겐 더 중요하다.” 위 링크. [본문으로]
  5. Thomas Lawson, 「Last Exit: Painting」, 『Artform』(October 1981) [본문으로]
  6. 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130』(Fall 2009) [본문으로]
  7. 작가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발췌. 작가는 《엎지른 물》에 설정된 몇몇 장치들이 회화를 고장내기 위한 장치였음을 뚜렷이 한다. “(…) 도구로서의 투명성을 사물로서의 불투명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자가 회화에서 기대하는 ‘화면’이라는 유용성을 불능하도록 만드는 무언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화면의 물리적 공백은 회화를 고장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8. 이때 사용된 미디엄은 골든(Golden)사의 파스텔 그라운드(Pastel Ground)다. 작가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참조. [본문으로]
  9. 제 150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 목록 참조. 링크: https://www.seoulauction.com/saleDetail?view_id=RESULT_AUCTION&sale_no=452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댓글을 달아 주세요

전시의 바깥의 바깥의 바깥


황재민

 

* 이 글은 전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을 기획한 이양헌 기획자의 청탁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무대의 막이 걷힐 때 연극이 시작된다. 연극이 종료되면 막은 내려간다. 막이 내려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막과 무대는 극 속 환상과 극 바깥 현실을 구분한다. 극장은 꽤 많은 규칙을 지닌 공간이지만, 기본적인 규칙 중 몇 가지를 꼽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1990년 카트린 메스너Kathrin Messner와 요세프 오트너Josef Ortner에 의하여 결성된 비엔나의 예술 단체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 museum in progress’1998년부터 현재까지 방화막Safety Curtai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1] 제목이 암시하듯, 프로젝트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방화막을 사용하여 임시적인 전시 공간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를 위해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는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 다니엘 번바움Daniel Birnbaum, 낸시 스펙터Nancy Spector 등의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방화막을 장식할 예술가를 섭외하게끔 했다. 이들 큐레이터에 의해 섭외된 작가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방화막을 하나의 이미지로 전유하는데, 이 프로젝트에는 현재까지 카라 워커Kara Walker,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제프 쿤스Jeff Koons 등 총 22/팀의 예술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 편 2018년의 서울에서는 이양헌이 한 전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하 Exhibition)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기획을 맡은 이양헌이 연구를 위하여 구축한 영상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권혁규, 박재용, 안대웅, 장진택, 조은비, 최정윤 등의 큐레이터를 섭외, 전시화한 결과물이다. 결과적으로 총 48/팀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그 물량 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각 작가들이 제공한 영상을 단순 상영하기만 해도 약 1000여 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필요했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전시는 2018 1월 경영난으로 인하여 폐관되었다가 4월 재개관한 오래된 소극장인 세실 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전시에 참여한 큐레이터들은 각자 하루의 시간을 배정 받아 전시 혹은 셋리스트 같은 것을 펼쳐낼 수 있었다.

 

방화막은 공연의 사이 시간에 개입하며 임시적 구조의 전시-/공간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유연한 형태의 실천을 전시로 이름 짓고 정체화하는 것은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가 전개하는 활동의 주된 부분 중 하나인데, 이들은 신문, 뉴스, 잡지, 또 빌딩의 파사드나 TV, 인터넷 등의 공공적 미디어 공간을 활용하여 전시를 일상적 삶의 부분으로 겹쳐내고자 하고, 《방화막》 또한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작동한다.[2]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미술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한 이미지를 마주치게 되고, 해당 작품은 관객의 일상적 시간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입한다. 반면 《Exhibition》은 극장의 외부에 머무르는 대신 극장의 내부로 개입한다. 전시에 입장한 관객은 객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스크린에는 준비된 영상이 영사된다. Exhibition》은 이처럼 극장의 안쪽으로 진입할 뿐 아니라 극장의 논리와 구조 또한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그 과정에서 극장의 문법 역시 최대한 모방된다. 이 같은 방법 탓에 《Exhibition》은 관습적 의미의 전시가 아니라, 말하자면 스크리닝이나 상영회처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획자 이양헌은 이것을 전시로 적극 호명하고자 한다. 전시의 서문을 통해 밝힌 그의 의견에 따르면, Exhibition》이 굳이 전시로 불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전시와 비전시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미술관 안팎에서 수많은 전시가 생산되는 상황에서” “질문들의 연쇄를 소급할 전시의 특정성을 세우기 위해서다. 가능한 전시의 영역을 찾기 위하여 세실극장은 무대가 되어 등장하고, 그 위에서 미술 작업work과 큐레이팅curating은 서로 교차하며 보다 자유롭게 수행된다.[3]

 

《방화막》과 《Exhibition》은 서로 무척 다른 환경과 상황에 기반한다. 《방화막》이 비엔나 오페라 극장이라는 큰 공간의 잉여적/부수적 부분을 경유해 스틸 이미지를 설치한다면, Exhibition》은 세실 극장이라는 보다 작은 공간의 중심에 자리잡아 무빙 이미지를 영사한다. 허나 이 두 사례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극장과 전시 간의 교차로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전시라는 개념을 재-정체화하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두 전시는 모두 통상적인 전시의 바깥으로 뻗어나가고자 장소의 완전한 변형을 꾀하되, 그것이 미술의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몇 가지 관습을 간직한다. 여기에는 전시와 관련된 몇몇 담론과 의제들이 겹쳐 보이는데, 이 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의견은 어쩌면 이제 전시가 어디에든 기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전시가 어디에든 근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시가 화이트 큐브White Cube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쉽게 연결된다. 이런 생각엔 전시와 관련된 담론뿐 아니라, 미술 작업의 형태와 관련된 근거 역시 존재한다. 유명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자면, 1960년대 미술의 확장된 장Expanded Field’ 아래서 작업하던 작가들은 변화한 작업의 개념과 그에 수반되는 형태를 제한하는 장소를 벗어나고자 미술을 위한 임의의 장소성을 새로 개척했고, 이 과정에서 화이트 큐브가 강제했던 물리적 형태가 주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미술이 보다 급진화되며 물리적 장소라는 주제를 개념적 장소로 대체했을 때, 미술제도의 여러 관습과 주변 요소들, 나아가 미술과 관계된 여러 담론과 문화적 틀 따위가 점차 하나의 매체로 특정되기 시작했다.[4] 이 흐름을 경유하여 전시 역시 하나의 매체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했고, 이런 맥락 안에서 박물관Museum과 공공 공간Public Space , 화이트 큐브 이외의 공간이 미술을 위해 가능한 장소로 점차 보편화됐다. 조형에 있어 조각이 확장된 장으로 전환되던 시점과 고전적 형태의 영화가 확장된 영화Expanded Cinema’로 변환되는 시점 역시 여러 실천이 복잡하게 뒤얽히던 확장의 시기 안에서 서로 교차하는데, 확장된 조각이 조각적인 것을 해체/확장하는 과정에서 공간적 조건에 대해 자문했듯이, 확장된 영화 역시 영화적인 것의 이해를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비평적 논의와 관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자연히 미술 갤러리의 공간적 조건으로서 화이트 큐브와 극장의 공간적 조건으로서 블랙 박스는 모종의 교차점을 형성하고, Exhibition》이 미술을 위한 장소로 극장을 제시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변환기의 서사와 맞물리며 당위성을 얻는다.[5]

 

나아가, Exhibition》은 극장과 무빙 이미지 아카이브를 무대삼아 보다 진보한 형태의 큐레이팅과 전시를 유도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하고자 노력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이상적 시도와는 별개로, 이런 종류의 활동은 이제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어쩌면 《Exhibition》이 비평하는 미술제도의 관습 중 가장 명시적 차원의 요소, 화이트 큐브-조건을 비평하기 위한 비-화이트 큐브-조건을 형성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적 조건을 형성하는 일은 대개 화이트 큐브를 하나의 관습적인 상태로 상정하고, 그를 의식적으로 비평하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이트 큐브가 파국을 맞은 이상 그 외부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않게 되었다. 전시는 이제 어디에나 있지만, 전시가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 역시 어디에나 있고, 화이트 큐브 바깥을 가리키려는 노력은 이제 그만큼 무의미하다. 이제 전시는 극장으로, 혹은 거리로, 또는 일시적 시공간으로 향하는 대신 근대적 조건을 혁신했던 현대적 미술의 공간-모델로서의 화이트 큐브를 새로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Exhibition》는 일단 전시의 형태를 취한 다음,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가 무엇으로 규정되는지, 큐레이팅은 어떻게 활성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실천이 수행적 차원으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한지”, 적극적으로 묻고자 한다.[6] 기획자 이양헌이 설정한 이와 같은 질문에서, 전시라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큐레이터의 큐레이팅으로 파악된다. 허나 현재 새로운 종류의 전시는 어쩌면 큐레이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 작업을 통해, 그 내부로부터 실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의 동시대적Contemporary 조건이 붕괴한 이후의 상황에서 미술 작업은 다원화된 지지체Support를 통해 기존의 매체성을 갱신하고자 하고, 이 과정에서 전시, 또 화이트 큐브라는 특정한 요소는 이 지지체 내부로 종종 포섭된다. 전시는 더 이상 새로운 실험을 위한 장소나 새로운 작업을 위한 토대가 아니기에, 작업은 전시를 제도의 한 가지 단위, 또 단순한 규칙으로 파악한 뒤 전시를 비평적으로 매개하는 방법을 발전시킨다. 이때 개별 작업은 무풍지대로 전락한 미술제도의 관습적 조건들을 상대할 수 밖에 없고, 작업이 이처럼 전시를 매개할 때 큐레이팅은 비로소 이제는 불가능해진 몇 가지의 조건들과 마주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전시가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Exhibition》은 전시, 비전시nonexhibition, 또 반-전시anti-exhibition의 가능한 형태를 다각도로 중첩하여 전시의 고유한 영토를 탐색[7]하려 노력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미지의 영토가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무언가의 파산이다. Exhibition》은 전시와 관련된 여러 겹의 고민을 노출하고, 전시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 이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낸다. Exhibition》은 아무래도 실패한 사례에 가깝지만, ‘유효한 전시는 어떤 방식과 형태로 가능할 것인가?’라는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이후 누군가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마칠 것이고, 그때 보게 되는 전시의 모습은 익숙하게 공유되는 전시의 모습과는 무척 다를 것이다.



[1] museum in progress, <Safety Curatain>, https://www.mip.at/projects/eiserner-vorhang

[2] Museum in progress 웹페이지, About museum in progress, https://www.mip.at/about/

[3] 이양헌,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 전시 서문, 쪽수 표시 없음

[4] 권미원, 「장소 특정성의 계보」,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 우정아, 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2013

[5] Andrew V. Uroskie, Between the Black Box and the White Cube: Expanded Cinema and Postwar Ar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11p.

[6] 이양헌, 위의 글.

[7] 이양헌, 위의 글.


Posted by jipdanochan

댓글을 달아 주세요

호버링 Hovering스케치 - 폐허의 유령이 실은 오늘의 슬기로운 젊음


황재민

 

2009년 열렸던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세대적인 것The Generational'이었다. 로렌 코넬Lauren Cornell과 로라 홉트먼Laura Hoptman, 그리고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기획을 맡았던 이 트리엔날레의 이름은 예수보다 젊은Younger Than Jesus으로,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진 나이인 33세 아래의 나이로 한정된 작가들이 총 50명 참여했다. 이 전시에 설정된 유일한 조건이 단적으로 표현하듯,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젊음, 그리고 그 젊음을 바탕으로 한 범주로서의 세대였다. 현대적 미술을 인양해온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젊음은, 이 트리엔날레를 통하여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용되어 그것이 가능케 하리라 기대되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움을 구현한다.

 

젊음이 전시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축이었던 만큼, 전시에서 다루는 세대적인 것이란 세대라는 개념을 폭넓게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젊은) 세대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세대란 2009년 당시의 청년 세대, “밀레니얼Millennials"이라고 지칭된 세대를 말한다. 젊음이 현대적 미술이 갱신해온 현재를 지칭하는 하나의 요소라면, 그 젊음의 구체적인 내용인 밀레니얼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랜 선에 매개되어 세계화된 세상으로부터 나고 자란, 의인화된 새로움이 되어 나타난다. 전시의 콘셉트에 맞추어 보자면, 그들이 가지는 새로움은 세계화된 지구촌Global village’이 갖는 새로움과 동등한 셈이고, 이들을 조망하는 것은 결국 세계를 관찰하는 것 - 어떤 세계관이 아니라 정말로 지구촌을 관찰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누군가 꿈꾸고 믿었던 유토피아적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를 앞에 두고, 전시는 젊음을 채집하는 일로 하나의 세계상을 표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보다 젊은이 포섭한, 25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군은 미지의 새로움으로 이동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고 표현된다.1) 젊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세대를 빌어, 젊음과 새로움은 이렇게 연관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움이 내포하는 의미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확실히 밀레니얼은 전지구화와 디지털 기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첨단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밀레니얼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경제 위기와 기대감소의 시대에 따르는 시대적 정서이다. 밀레니얼은 축소된 욕망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나아가 축소된 경험에 대해서 익숙하다. 그러므로 밀레니얼은 더 이상 발 디딜 바깥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또한 익숙하다. 전지구적 젊음의 특징은 불행하게도 전지구적 경제 위기에 근원하는 전지구적 가난과, 전지구화된 공간 아래 통합된 지역성이 선사하는 마이너스-경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보다 젊다는 사실이 지칭하는 것 중 특정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로서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삭제되어야 한다. 젊음에게는 신성함이 없고, 가능성에게는 한계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이 이제 젊음은, 바깥은,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자인한다면, 그 모양은 무엇과 같을까? 한국의 서울의 영등포의 2/W에서 개최된 전시 호버링Hovering이 제시하는 화두는, 어떠한 측면에서 이런 문제들과 맞닿는다.

 

<호버링Hovering> 전시 포스터(http://www.90apt.com/hovering.html)

 

평론가 권시우와 90APTNNK(윤태웅)가 기획하고 김동용, 김효재, 류수연, 서민우, 오연진, 전예진, 정완호, 지호인 등 8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호버링은 기획자와 작가 뿐 아니라 전시 리플렛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이너부터 음향 테크니션에 이르기까지 전시의 모든 참여자가 90년대 출생자로 이루어진, 예외적인 구성의 전시였다. 그러나 호버링이 전시 경험으로써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 파릇파릇한 것,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 아니라 마이너스-경험으로부터 비롯하는 마이너스-세계상을 근간으로, 주어진 공간과 형태에서 적절히 작동하는 무엇을 어떻게 적절히 펼쳐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에는 청춘의 끓는 피가 자아내는 흥분이나 신선함이 거할 자리에 맥빠짐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이 자리를 잡는다. 나아가 호버링에서 제약은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전시에 따르면, 오늘의 젊음은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이 신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적 폐허라는 제약을 겪을 뿐 아니라 또한 (보통 80년생이 주도한 미적 경향이라고 통용되는) ‘신생 공간이 동일한 난관을 맞아 사용했던 폐허 대상의 전략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과거의 성취가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세대는 다르지만 상황은 여전히 같기 때문에, 호버링하는 90년생 미술가들과 신생 공간했던 80년생 미술가들의 관계는 묘연하다. 80년생이 맞닥뜨리고 고생했던 문제가 90년생에게도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때, 90년생 미술가들은 근과거와 강제로 단절된다. 비로소 이것은 맨 땅, 좀 더 고색창연하고 좀 더 어울리는 표현으로 대신하자면 폐허이다. 폐허를 기반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호버링, 좀 더 잘 움직이기 위하여 폐허에 어울릴 만한 존재 형태를 창작한다.

 

“(...)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재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 (...) (이들은) ‘이전의 플레이어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채 아직 정주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하기 시작한다.”2)

 

젊음이 유령이 될 때, 젊음은 삶의 생동감을 포기하고 죽음의 고요한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저승의 존재로서, 유령은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놀래주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로서 포착을 비껴간다. 폐허와 잘 어울리는 유령 시점의 비유는 나아가 전시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주제 혹은 방법론으로 확장 되는데, 이 비유와 얽혀 정당화되는 것은 레이어링Layering"이라는 기획의 형태이다. 호버링에서, 각각의 작업들은 2/W 건물의 1층과 4층을 오가며 뒤섞이고 층 내부적으로도 선형적 관람이 어렵도록 하나의 풍경으로 엮인 모습으로 연출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서문에서 유령 서버라 명명된 여러 겹의 폐허, 분별하자면 전시 공간으로서 2/W가 지니고 있는 외적 형태와 그에 얽혀있는 하나의 시간으로서 공간 커먼센터라는 폐허, 또 폐허에 가까운 비전형적 공간을 미술-전시-공간으로 설정하고 자조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전 세대와는 차별되는, 유의미한 모양의 미학적 시공간을 펼쳐냈던 신생 공간의 전략, 또 이렇게 겹쳐지되 겹쳐지지 않는 근과거를 벗어날 수 없는 배경으로 두는 지금과 그 지금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플레이어의 오늘 - 어디로 가든지 폐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 이 다층적으로 겹쳐지는, 폐허-폐허-폐허-폐허의 공간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전시 형태처럼 보인다. 이런 반응의 결과, 공간 전체를 아우르며 레이어링되는 전시 연출은 개별성과 총체성을 오가며 합선되는 한 편 작가 간 협업 구조를 활성화하며 유령 시점의 자유도라는 가설적 표현을 실제 공간 위로 구현해낸다. 더하여, 공간을 무대 삼아 작업을 레이어링하는 전략은 기획을 맡은 평론가 권시우의 비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권시우는 계간 시청각의 지면을 통하여 압축과 팽창(CO/EX), 그리고 김동희의 작업을 엮어 해설하며 공간 인터페이스라는 임의적인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권시우가 제시한 개념어인 공간 인터페이스란 애플의 매킨토시가 스크린 내부의 공간에 데스크톱 메타포를 설정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운용을 원활하게 했듯이, 몇몇 작가들이 디지털 환경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작업 매체와 공간3)을 오늘의 시각성에 맞추어 소화하기 위하여 미술 작업이 놓이는 공간을 마치 데스크톱 위에 아이콘과 중첩 윈도우를 배열하듯 다루는 상황을 해설하기 위하여 동원한 개념이다. 호버링에서 78개에 달하는 작업들이 서로 겹쳐지고 멀어지며 공간을 빼곡하게 점유할 때, 전시의 공간 인터페이스는 클릭, 드래그, 나아가 터치에 이르는 사용자의 능동적 인터랙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도록 제어하며 관람을 굴절하는 효과를 낸다. 어쩌면 이것은 레이어링의 또 다른 쓸모가 되는데, 호버링이 작업을 이렇게 저렇게 서로 겹쳐내면서 전시를 볼만한 것으로 연출할 때, 그것은 또한 (‘볼만한 것이라는) 최소한의 성취를 위하여 작동하지만, 그와 함께 선형적인 관람을 망가뜨리면서 내부적으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블랙박스를 구축하는 역할 또한 선점한다. 그에 따라, 전시의 관람자 혹은 사용자는 전시를 자세히 살필수록 그것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를 보기 위해 2/W에 입장한 관객이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오연진의 그리드다. 48개의 액자와 그에 각각 담긴 이미지로 이루어진 오연진의 <Trade-off>는 서로 거의 유사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노출값을 조정하며 반복한 뒤 그 변화된 양상을 늘어놓은 작업이다. <Trade-off>를 이루는 이미지들은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 인화되어 있는데, 미디엄 자체가 아날로그 흑백 사진의 인쇄에 자주 쓰이는 만큼 관객은 작업을 첫 대면한 뒤 자연스럽게 이것을 사진으로 살펴보게끔 된다. 그러나 인화되어 있는 이미지는 명확하게 인식 가능한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패턴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화소값 이상으로 확대되어 불균질한 시각적 질감을 나타내므로 <Trade-off>는 디지털 이미지를 인화한 것인지, 혹은 디지털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연출한 사진인지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만약 이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라면, 그 광경은 한때 아날로그 현실의 재현에 쓰였던 프린트를 디지털 이미지를 담는 데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포섭한다는, 관습적인 재매개 개념의 이해를 유희하는 셈이다. 작가가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는 대립적 관계의 요소들이 이루는 균형을 뜻하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는 제목으로 작업에 비유적 관계를 설정할 때, 그것은 노출값과 (이미지의) 정보값 간의 균형, 노출값이 조정될수록 백색 혹은 흑색으로 희미해지는 형상의 정보값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이 비유는 또한 현실을 매개하는 두 가지 요소로서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를 포괄한 채, 노출값과 정보값을 조정하는 것으로 두 매개체 간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작업적 구조를 짜 보여줌으로 디지털-리얼리티와 아날로그-리얼리티가 서로 충돌 혹은 절충하며 현실과 관계하는 새로운 조건을 표면을 통하여 시뮬레이션한다. <Trade-off>를 첫 번째 프린트부터 시작하여 선형적으로 읽는다면, 하나의 유사-형상적 추상 이미지가 기본값으로 반복되며 특정한 설정을 조정할 때, 흑색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재현적 사진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해 포스트-디지털 조건 하에서 새로이 작동하는 혼합 현실의 시뮬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과다노출 되어 백색으로 희미해진다.

 

그 뒤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객이 마주칠 만한 작업은 아마도 지호인의 회화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5>일 것이다.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은 보통 작은 체리 형상이 군데군데 반복되어 프린트된 데님을 캔버스 천 대신 삼은 뒤 표백제를 물감처럼 원단 위로 올려내고, 또 그 위에 붓질의 존재감이 드러나도록 희거나 검은 젯소를 몇 획에 걸쳐 수차례 바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이때 작업은 데님 서포트(표백제)-체리 프린트-젯소 순으로 구분되는 개별 재료의 서로 다른 층위를 침범하거나 배제하면서 레이어 구조를 형성한다. 이 레이어 구조에 있어 표백제의 사용은 흥미로운데, 재료는 서포트에 개입하지만 적층되는 바 없이 서포트로 직접 스며들지만, 붓질이라는 조형적 단위를 참조하므로 데님 서포트에 온전히 융합되지는 않는다. 지호인의 회화는 20cm 남짓의 작은 크기로 제한되고, 나아가 이모지Emoji 같은 체리 형상이 주요하게 쓰이므로 결과물은 대개 화사하고 귀염성 있다. 지호인은 2/W의 폐허-폐허-폐허-유령 서버의 공간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회화적 레이어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폐허라는 전시 공간의 물리적 배경을 포섭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에서는 회화 측면의 색채를 공간 배경의 색과 조응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연작에서는 작업 뒤편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PVC 비닐 캔버스를 이용, 폐허로 호명된 전시 공간을 서포트의 일종으로 적극 전용하는 방법으로 나타난다. 호버링은 전시 공간을 하나의 무대 장치 삼아 작업을 전시하고 포섭하는 이상한 전시이므로, 지호인의 이런 방법은 필연적으로 공간에 대하여 장식성을 띄게 된다. 그 때문에 만약 관객이 지호인의 회화를 신경 쓰지 않고자 결정한다면, 그의 회화는 이 전시 연출 내에서 가장 희미한 작업으로 남을 것이다. 허나 한 편으로 지호인의 이런 장식성은 또 다른 성질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회화를 2/W1층과 4, 나아가 두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 통로에까지 넓게 퍼뜨려 걸고 이때 장식성은 또한 편재성을 뜻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누군가가 지호인의 작업이 전부 삭제된 호버링을 관람한다면 누군가는 지호인의 작업이 전시 공간 전반에 넓게 걸쳐 기능하는 호버링을 관람할 테고,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존재하는 독립적인 채널을 레이어링-공간에 펼쳐냄으로써 호버링을 일종의 개인전으로 남용하는 셈이다.


지호인의 회화는 무척 의도적인 설치의 결과물이자 작업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론 또한 섬세한데, 이를테면 1층 군데군데 흩뜨려진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 중, 데님 서포트-젯소-체리 프린트 위로 백색 젯소를 붓질이 드러나는 올-오버 화면으로 칠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검정색 젯소를 같은 방식으로 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