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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관 TasteView 趣味官》 포스터



2018 12 19일부터 2019 4 21일까지, 취미가는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을 다시 연다 – “132()의 특별한 에디션, 작업의 부산물, 작품과 굿즈, 소장품, 특별히 선별된 물품을 4개월간 선보인다.

 

첫번째 취미관이 열린 것은 2017년이었다. 2018년에 열려서 2019년까지 지속되는 두번째 취미관,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공간 취미가의 독립적 아트 페어 같은 게 되어서 어떤 연속성을 가지게 된 듯 하다. (물론 기금은 받는다.) 허나 올해의 취미관》과 2017년의 《취미관》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두 《취미관》은 지속성이 다르다. 2017년의 취미관이 단 4주의 시간에 불과했다면 18-19년의 취미관은 다섯 달 동안 유지된다. 시간적 여유가 늘어남에 따라, 참여하는 작가()의 수 역시 불어난다. 2017년의 취미관 35명의 작가()을 수용했다면 18-19년도의 취미관에서는 132()이 투명한 렌탈 케이스 안에 작품, 굿즈, 혹은 그 어떤 것을 납품한다.

 

취미가 공간에 렌탈 케이스가 놓이고 케이스 안에는 그 어떤 것이 놓인다는 포맷은 큰 틀에서 유지되지만, 세부 역시 2017년과는 조금 달라진다. 첫번째 취미관에서, 장식장 하나에는 하나의 작가()이 입점했고 이것은 꽤 명료한 방식이었다. 한 명의 작가()은 하나의 케이스라는 제한을 갖고 그 만큼의 ()자유를 구현한다. 허나 두번째 취미관에서 이 명료한 법칙은 사라진다. 작품은 흩어지고, 작가는 뒤섞이며, 중력은 산개한다. 2017년의 취미관에서 작가()이 중심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 2018-19의 취미관에서는 작품, 굿즈, ‘그 어떤 것이 중심이 된다.

 

2018-19년의 취미관을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팝업스토어일까, 독립적 형태의 아트 페어일까, 혹은 포스트-굿즈를 매개체 삼는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의 구현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냥 취미관일까? 취미관》은 여전히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애매한 영역에 놓인다. 이것은 《취미관》이 어디까지나 취미가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취미가라는 제한은 《취미관》으로 하여금 케이스를 만들도록 부추긴다. 케이스는 작품에게 알맞은 크기와 형태를 요구한다. 케이스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스케일을 재조정한 작품은 조금 다른 맥락을 획득한다. 이렇게 취미관》은 굿즈라는 ()형식의 짧은 역사와 어떻게든 연결되어버리는 플랫폼이 되어버리고, 그 때문에 단면적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픈베타공간인 반지하B½F의 사무실에서 장기 기생하는 프로젝트로 출발한 굿즈(g8ds)’, 반지하와 함께 취미가 공간의 전신이다. 나는 그때 굿즈에서 판매되던 어떤 작업을 기억한다. 그것은 이를테면 돈선필의 <BOX gHOST figure>(2014) 같은 작업인데, 작업이 유독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거의 농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엽서와 뱃지, 그리고 작은 책자들 사이에서, (비교적) 본격적인 조형인 <BOX gHOST figure>가 주는 황당함 같은 게 있었다. 작품이라기엔 너무 저렴하지만, 굿즈라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 역시 물음표였다. 그 탓인지 <BOX gHOST figure>은 꽤 오랫동안 판매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취미관과 같은 공간에서 <BOX gHOST figure>와 같은 조형은 흔하고, 황당한 기분을 만들지도 않는다. 반지하 시기의 어떤 비전은 여기서 부분적으로 성취된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무언가 성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데, 그것은 굿즈굿-》를 거쳐 포스트-굿즈가 되면서 복잡해진 사정과 관련이 있다.

 

  

BOX gHOST figure, FRP, 혼합재료 도색, 원목 베이스, 300 x 135 x 100(mm), 2014

(사진 출처: ‘굿즈텀블러 페이지 http://g8ds.tumblr.com/post/95093496998/%EB%8F%88%EC%84%A0%ED%95%84-box-ghost-figure-2014-sold-out-frp)

 

허나, 우선은 올해의 취미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한다. 132()에 달하는 숫자가 말해주듯, 작품의 수는 무척 많았고 볼 것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나는 먼저 김혜원의 작은 부조가 조금 재미있었는데, 문구 상자 안에 꽉 찬 입체는 어디로든 쉽게 갈 수 있고 어디로든 쉽게 수납될 수 있는 이동성을 확보한다. 김혜원은 과거 정물화, 혹은 풍경화와 같이 보편적인 형태의 그리기를 통해 산출된 이미지를 기반으로, 그림에 적용된 자신의 그리기방식을 역산한 뒤 언어로 정리, 체계화한 다음 그 체계를 뒤섞거나 제한하여 이미지를 제작하는 실험을 전개했는데, 취미관에서의 부조 역시 작업의 이런 차원과 관련이 있다. 김혜원이 그리는 그림이 3차원을 재료 삼는 2차원 이미지라면, 부조는 “2차원으로 완결된 3차원 세계를 다시 3차원으로 재현하는 작업[각주:1]으로, 부조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리기 체계의 일부인 양감/부피 만들기는 물감이 아니라 스컬피를 통해 구현되고 2차원적 물성이 3차원적으로 재현된다. 작가는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풍경화, 혹은 정물화 같은 그림을 종종 그리는데, 이 이미지는 작가가 몸에 익은 그리기 수법을 극복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거기에 자신을 맞춰나간 결과로, 실은 깊이가 무척 얕은 형상이다. 취미관에 전시된 부조 위에서도 풍경/정물화적 이미지는 등장하는데, 김혜원의 부조가 갖는 2.5차원의 부피감은 이미지의 얕음과 공모하면서, 평평하지만 평평하지 않은, 이미지-물체로 거듭난다. 또 김혜원은 ‘3dknittinger’라는 이름으로 뜨개 인형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이는 작가 한진의 드로잉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취미관 속 조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였다.

 

  

'3dknittinger'의 뜨개 조형, <bumpy>, <mao>, <hi>, 

(사진 출처: 취미가 트위터 페이지,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1077873158848372741)

 

한편 정희민은 과거의 작업을 확장한다. 정희민이 전시하는 아크릴 조형은 2018년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한 전시인 UTC-7:00 JUN 오 후 세 시의 테이블》로부터 튀어나온 것이다. 전시에서 정희민은 3D 모델링 소프트웨어로 만들어낸 가상 공간을 다양한 층위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캔버스 위로 옮겨냈는데, -파이한 3D 모델이 캔버스 위에서 거의 1:1로 재현되는 동안 불투명한 겔 미디엄은 캔버스 화면을 부분적으로 가리면서, 그러나 완벽하게 가리지는 못하면서, 노이즈 역할을 했다. 이 겔 미디엄은 이제 《취미관》에서 아크릴 조형으로 독립하는데, 이 입체 역시 주변 출품작들을 가리면서, 그러나 완벽하게 가리지는 못하면서, 흐릿한 채로 있는다.

 

회화를 위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취미관》렌탈 케이스속에서 어떻게 적응하는가 관찰하는 관람은 흥미롭다. 이를테면 유지영은 휴대 및 전시가 용이한 소형 회화 키트 같은 것을 판매했는데, 이것은 회화 매체를 《취미관》이라는 특정한 플랫폼에 출품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스케일이라는 문제와 디스플레이라는 문제에 맞춰 작업을 최적화한 결과다. 유지영이 《취미관》에 출품한 작은 회화에는 손잡이가 달린 나무 케이스가 부착돼있고, 케이스 뒤편에는 이케아 스타일의 사용자 매뉴얼 같은 게 동봉되어있는데, 케이스와 매뉴얼을 제공함으로써 유지영은 회화를 직접적으로 변형시키지 않고 굿즈를 수행, 문제를 해결한다.

 

 

Pre-product of Plate VIII, Acrylic paint and pencil on canvas, wooden frame with handle, printed instruction guide, screw, command tape, CoA, 31.5 x 21.4 x 2.5 cm (incl. the frame), 2018

(Special Edition for TasteView at Taste House)

(사진 출처: 작가 홈페이지, https://jiyoungyoo.com/Pre-Product-of-Plate-VIII)

 

또 그림에 대해서 말하자면, 호상근은 이번의 《취미관》에서 작은 그림도 팔고 또 작은 피규어도 파는데, 이 그림은 큰 작업을 하기 전에 하는 실물 미니어처로서, “그림이 정말 크다면 어떠할지, 그런 바람을 담아 만들어진 작품이다.[각주:2] 하지만 큰 작업은 《취미관》의 케이스 안에서는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그림이 커지는 대신, 작가 자신이 줄어든다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한다. 유사-화이트 큐브적 모형 속에 놓인 작은, 그러나 큰, 그림을 보는 일, 그리고 그 주변 귀퉁이에서 뻣뻣하게 서있는 작가 자신의 피규어를 보는 일은, 웃기고 슬픈 한편 웃기지도 않는데, 이처럼 호상근은 《취미관》이 강요하는 스케일의 문제를 이상한 멜랑코리아를 도입하는 것으로 빗겨나간다.

 

(사진 출처: 직접 촬영)

 

돌출 조각-1, (사진 출처: 취미가 트위터 페이지, https://twitter.com/tastehouse_info/status/1096750293033734144)

 

허나 2018-19년의 취미관에서, 주가 되는 매체를 꼽는다면 그것은 분명히 조각이었다. ‘그 어떤 것이라는 명명과 잘 어울리는 모습의 소박한 입체에서 보다 조각적인 형상을 갖는 것까지, 취미관의 케이스에서 입체성을 갖는 조형은 제일 활발한 모습이었다. 개 중 하나로 곽인탄의 작업이 있었는데, 작가가 조형한 <유니크 페이스-1>, <유니크 페이스-2>, 그리고 <->은 제작 과정에서 파생된 잔여물을 조형 안으로 포괄하면서 미완결된 상황을 완결하고, 도구를 재료화한 조각이었다. 위의 세 작업에서 진행되는 재료 실험이 과정을 결과로 포함하는 성격을 갖는다면, <돌출 조각-1>에서의 재료 실험은 성격이 조금 다른데, 이것은 하종현의 접합연작을 방법론 차원에서 참조한 것으로, 과거의 회화 실험에서 물감을 대상으로 실험된 재료의 물성 탐구를 조각적 방법으로 재연해 매체성을 혼합하고 나아가 시간을 뒤섞는다. 또 돈선필은 끽태점(喫態店, Kitsutaiten)’이라는 이름을 사용해서 참여했는데, 그것은 취미관》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기도 했다. 돈선필의 끽태점은 로고가 새겨진 컵이나 중고품을 출품하는 등, 작가처럼 행동하기보단 플랫폼처럼 행동했는데, 또 다른 참여자인 정홍식 또한 취미관》을 끽태점과 비슷하게 활용했다. 정홍식은 중고 게임보이와 건담 피규어 등을 출품했고, 이와 같은 참여는 만다라케라는, 취미관》의 레퍼런스에 가장 직설적으로 대응한 사례였다. 정홍식이 출품한 <origin>취미관》에서 존재하는 것 중 가장 고가의 물건이었는데, 이 피규어가 연출한 상황은 케이스 속 그 어떤 것들의 현재 상태와 그 미래에 대해 새삼 되새겨보도록 유도한다. 그러니까, 미술 애호가의 굿즈 사랑은 건담 오타쿠의 수집 충동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을까? 취미관》에 전시된 조형 중, 퍼스트 건담 디 오리진 버전 피규어의 가치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존재할까? 없다면 그것은 왜일까?

 

두번째 《취미관》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시각적으로 꽤 복잡했고, 층위 역시 다양했으며, 결과적으로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132()이 참여한 비엔날레 같은 게 있다고 했을 때, 거기 전시된 수많은 작업 중 몇 개의 작업이 기억에 남을 수 있을까? 《취미관》은 압축적 경험을 제공하는 행사고, ‘작품이 더 작을수록 단점 역시 작아질 수 있다는 스케일의 문제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에, 관람은 꽤 즐거워진다. 다만 여기서 마음 놓고 응원하기 힘든 어떤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취미관》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다시 굿즈에 대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장기 기생하는 프로젝트로서, (반지하의) ‘굿즈 (반지하가 그렇듯) 연습과 같은 걸 하는 듯 보였다. 그 연습의 시공간은 특별해서, ‘굿즈베타 테스트기간 동안 판매되는 굿즈의 수익을 작가들에게 100% 분배하기도 했었다.[각주:3] 그러나 연습은 반지하가 운영을 종료하면서 함께 종료됐고, 취미가의 분배율은, 자세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제 100%는 아닐 것이다. 연습이 끝난 뒤, ‘굿즈굿-가 되었고 반지하는 취미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서, 이제 공간은 제도의 게임안에서 씨름한다. “제도의 게임이라는 표현은 강정석이 제작한 MAGAZINE beta 1에 수록된 LOG 2 : 두 플레이어가 벌이는 최소극대화의 게임에서 등장한 것인데, 이 글에서 강정석은 신생공간-게임의 플레이어들이 시점을 개인의 것으로 전환해 “’미술계의 캐릭터’”가 되었을 때, 제도라는 전혀 다른 질감의 시간을 겪게 되는 상황에 대해 쓴다. 1년짜리 시간, 부족한 예산, 벗어날 수 없는 공간, 개인의 시간을 잡아먹는 갖은 잡무들, 그리고 이 안에서 작동하는 합리성. 포스트-신생공간의 몇몇 상황은 이것들에 의하여 재구성되고, 그 안에서의 최선을 찾는다.

 

최선을 위한 이 탐색 안에서 공간은 어렵고 중요한 주제로 끝끝내 ()등장한다. 여전히 부동산을 이길 수 없는 신생공간-공간들은 최선을 찾아 최적화를 시도하는데, 개 중에선 특히 PACK의 경우가 극적이다. PACK의 완벽한 작은 케이스는 전시될 작품을 위해서 거의 가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뮤지엄 컨디션을 구현한다. PACK》의 케이스 안에서 신생공간-공간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열악함은 완화되고, 해소된다. 여전히 스케일이라는 문제가 있지 않냐고? 2018년에 열렸던 2번째 PACK의 부제는 팅커벨의 여정이었다. PACK은 완벽한 큐브 속에서 적절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작품의 스케일을 긍정하기 위해 시선의 주체를 줄여버린다. 그리고 거부 반응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디즈니적 껍데기를 권유한다. PACK에서 작은 작품을 들여다보고 관심 갖는 개인은 서울의가난한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요정이다. 팅커벨 스케일의 개인은 휴먼 스케일을 극복한다. 이렇게 가상적 시점은 탈출구 역할을 하는데, 이것은 취미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PACK2018:팅커벨의 여정》 트레일러, 윤태웅(NNK) 제작 

(https://pack2018.org/)

 

권시우는 2017년의 취미관을 다룬 글을 통해, ‘오픈베타공간인 반지하가 실재하지 않는 원본을 지지체 삼아 망상적 작업을 현실화하는 실험장이었듯, 굿즈 역시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글에서, 권시우는 굿즈로서의 작업미니어처로 제작됐을 뿐 굿즈는 아닌 작업을 구분한다. 나아가 그는 굿즈를 작가가 전개하는 작업적 세계관의 일부로 기능하는 형식적 단위라고 전제한 뒤, “팬시한 상품의 이미지로부터 굿즈를 구출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은 결국 개별 작업을 통하여 형식화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본작업에 비해 자원과 시간을 덜 소모할 수 있는 굿즈형 작업을 통해, 작가 개인은 스스로 구축한 형식 및 작업적 세계관을 분절하여 관리할 수 있고, ‘포스트-굿즈의 이와 같은 유연함을 적절히 활용하며 작가는 이후를 준비할 수 있다.[각주:4][각주:5]

 

이것은 포스트-신생공간의 가상적 상황을 물렁한 채로 내버려두지 말고, 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상적 상황이 단단해져야 하는 이유는, 강정석이 말한 것처럼, 이 물렁한 시/공간이 이제 제도적 게임과 연관됐기 때문이다. 제도는 상황을 자신에 맞춰 재구성한다. 제도의 이런 강제력이 부여하는 상황은 심지어 미적인 것이기까지 하다. 신생공간이 아직 가변적 시간”(강정석) 위에 있을 때, 그러니까 작가에게 수익을 무슨 100%를 줘버리는 말도 안 되는 아마추어적 시간이었을 때, 신생공간적 상황은 전염성을 가졌다. 지금에서야 사람들이 전부 신생공간 작업들 그때 봤어도 완전 다 허접하고 말도 안 됐다라고 얘기하지만, 기존의 미술과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 미술로서 신생공간이 지닌 특별함이 존재했고,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괜히 다들 어깨를 으쓱하긴 하지만 그러는 당신도 한진의 그림 같은 것을 아름답고 이상하고 특별하다고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생공간적 상황이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으로 전환된 이후, 이처럼 아름답고 이상하고 특별하다고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광경은 별로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제도는 이 전염성, 어떤 동질감을 휘발시킨다; 신생공간적 상황 역시 기존의 미술과 작동방식이 동일해진다. 응원도 후원도 없는 곳에서 가변적 시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권시우의 의견은 이런 상황을 의식한다. 물렁물렁한 시간이 끝나면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미술 안에 정착하는 게 맞는데, ‘기존의 미술뿐 아니라 그것이 아닌 미술을 관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로서 작업은 제도가 강제하는 재구성의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반자율적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렁한 상황이 단단하게 된 상황에 맞춰 자신과 그 주변을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가, 이에 대한 의견으로 작업을 하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지난 시간을 잘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후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 또한 가능하다. 신생공간이 활발하던 시기, 정리에 대한 강박은 이미 그 주변에 가득했다. 목적은 다양했다. 이 유동적인 상황을 흘려 보내지 않기 위해서,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혹은 그저 단순하게 이것이 싫어서 폄하하기 위해서, 또는 다음주까지 써야 하는 원고 마감을 위해서. 그렇지만 아직 그럴듯한 이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이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고, 최소 극대화의 게임에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도표를 제공한다.


도표에서, 신생공간은 포스트-굿즈를 바라보지만, 포스트-굿즈는 신생공간을 바라본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박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전이후의 시점은 어긋날 수 밖에 없다. 최소 극대화의 게임은 아래를 바라보는 이전의 시선을 다음과 같은 인용문으로 요약한다.

 

“90년대생이 준비한 것이 많을 텐데, 올해 사람들이 모여서 큰 행사를 하고 하니 가려진 부분도 있었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이 더 드러나게 되겠죠.”[각주:6]

 

그렇다면 90년대생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가 기입된 애매한 위상의 폐허를 다시 플레이보드로 활성화시킬 수 있을까? (…) 주지하듯 한번 유예된 시간은 지속할 수 없다.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각주:7]

 

권시우와 윤태웅(NNK)이 기획한 전시 호버링, 윤태웅이 우연히 전시를 하나 기획하게 되며 탄생했다. 윤태웅은 “90년대생 작업자를 소개하고, 전시하고, 연결하는 플랫폼인 90APT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때문에 자연히 전시는 “90년대생 작업자를 소개하고”, 연결하는 기획이 되었다. 전시를 구체화하면서 윤태웅은 권시우를 공동 기획으로 섭외했는데, 당시 권시우가 신생공간 이후에 가능한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또 전시를 하게 된 공간이 이전에 커먼센터였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흘러 흘러 기획은 ‘90년대생 작업자는 + 신생공간이라는 소유자 불명의 영토에서 =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과 마주치게 됐다. 전시 서문을 통해 권시우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를 호출하면서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여지를 끄집어내는데, 이것은 신생공간적 상황을 재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을 ()익명의 자본으로 전제하고 전유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신생공간을 전유하려던 호버링의 기획은 어떤 논의를 불러일으켰을까? 신생공간을 소유자 없는 땅으로 간주하고 강탈을 시도하려던 “90년대생 작업자들의 기획은 무엇으로 간주됐을까? 허나 놀랍(지 않)게도, 호버링에 대해서는 그 어떤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시가 끝나고 시간이 지난 뒤, 권시우는 트위터를 통해 “80년대생 미술계 종사자를 겨냥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은 이후 세대에게 당신들의 경험치를 배분해줄 의향이 있습니까? 신생공간이 씬이 아니었다고, 그건 단순히 외부의 필요에 의한 호명이었다고 거듭 부정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상생하고 있는 당신의 동료들은 무엇입니까? (…) 어차피 당신이 이후 세대에게 기여할 의향이 없다면, 90들이 판을 어떻게 깔든 무슨 상관인가?”[각주:8]

 

호버링》은 신생공간이라는 맥락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전시가 될 수는 없었다. 권시우와 윤태웅이 《호버링》을 통해 만들어내고 싶었던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긍정적인 형태의 순환이었을 것이다. 더 많은 논란과 더 많은 이야기들, 또 더 많은 관계들, 그리고 그것들이 꼬리를 물며 돌아갈 때 다시 풍부해질 미적 상황들. 허나 벌어져야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시점은 어긋났으며, 블랙박스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후는 정말 어디에도 없었던 것일까? 굿-가 막을 내린 뒤, 많은 일이 벌어졌다. 시간이 단번에 죽어버리지는 못했으므로, ‘이후가 존재했다. 그것은 (이하 무순) 소쇼룸(soshowroom)의 가변적인, 그러나 협업적인 공간에 존재했고, 기고자와 원룸에도 존재했다. 신생공간적 상황은 대개 가상적 공간성을 과장하여 현실화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으므로, 공간적 조건을 분할하여 분산하려 했던 이런 저런 시도 속에도 이후가 존재했다. 오페라 코스트나 웨스트웨어하우스, 또 행사를 세 개로 쪼개 각자 다른 세 공간에서 선보였던 첫번째 PACK》 등. 또한 이후 2번째 《PACK》에서 윤태웅이 협업 기획으로 참여, 참여 작가 중 “90년대생 작업자의 비율을 늘렸을 때, 그곳에도 있었을 것이다. 최하늘이 자신의 개인전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를 문주혜의 개인전 《Shuffle The Deck》 위로 겹쳐버렸을 때, 회화적 상황과 조각적 상황을 서로 독립된 상태로 중첩시켜, 하나의 덩어리로 조감할 수 없지만 동시에 (분산된 것이 아니라) 완결된 상태로 제시했을 때, 그것은 신생공간 미술의 공간성을 극복하려는 나름의 방법으로 보였다. 또 박보마와 송민정이, (어쩌면 장다해가) 빈곤을 미학화하려는 신생공간 미술의 어떤 기제를 초-장식적 경험으로 환원하려고 무언가 했을 때, 거기에도 이후는 존재했다. 서울 바벨》에서, 유령팔》에서, 또 《호버링》에서, ‘이후는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 이후에서 시도되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유동하던 가변적 시간이 지나간 뒤, 신생공간이라는 흐름에 대해 제도가 자원을 투자해 연구하고,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가 기획되며, 그 결과에 대부분이 만족하고, 그로부터 누군가는 배움을 얻고 또 누군가는 불만을 가지며, 그것이 미적으로 구현되고, 거기에 모두가 영감을 얻어 더욱 진보된 의제를 펼치며 제도는 이 선순환 구조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후원한다는 미래. 모르긴 몰라도 이 미래가 도착했다면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은 지금과 무척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미래에 도달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하면 되는 게 아닐까?

 

최소극대화의 게임에서, 강정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방안에 앉아 계속해서 상위 시점을 더듬어가면 한국 사회 전반이나, 그보다 상위 시점의 게임까지 막연히 상상하며 붕 떠버릴 수도 있다. 공중에서 천천히 내려오자. 전체 그림을 한 번에 잡을 필요는 없다. 되려 천천히 관찰해야 한다. 사회 속엔 다양한 캐릭터가 루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완벽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는다. 완벽한 상황에 대한 기대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 “제도의 게임에 참여한 개인은 제도의 속도에 사로잡히고, 제도가 제공하는 환경에 바쁘게 반응하는 동안 이후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여유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은 땅에 발을 붙이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사이즈로 해야 한다. 이것은 타당하지만, 그렇지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완전한 주변의 시간으로, 연습적 시간으로.

 

2017년의 취미관》을 다룬 글을 통해 나는 《취미관》이 전적으로 시간을 마련하는 플랫폼이라고 썼다.[각주:9] 시간을 선형적으로 거치며 생겨나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렇기에 《취미관》이 외연을 보다 넓히기 위해 《굿-》라는 자산을 변형하며 버티기 시작했을 때, 그 일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로부터 1년 남짓의 시간이 지나, 18-19취미관》은 보다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게 된 듯 하다. 참여 작가는 100여명()을 넘었고, 기간은 대폭 늘어났으며, 외연 역시 어느 정도 늘어났다. (IAB 스튜디오와 콜라보레이션한 후디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품절되었는지, 취미가의 SNS 계정을 팔로우해둔 사람은 보았을 것이다.) 2019년 현재, 드디어 작음을 긍정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취미관은 이제, “단지 너무 무겁지 않게 약간의 짐을 나누어 지는 자리가 되어, “작은 것은 작은 우회와 작은 교차의 기회를 제공한다.”[각주:10]

 

어쩌면 이것 역시 시간이라는 단순한 힘에 의한 결과다. 허나 시간의 선형적 힘은 공평해서, 그것은 취미가에만 선택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 힘은 굿즈에도 역시 똑같이 작용했다; 굿즈를 위한 시공간은 이제 너무나도 많아서, 취미관》이라는 맥락은 이제 볼 만한 아트샵 중 하나 정도로 단순해졌다. 굿즈는 나눌 만한 자원이자 괜찮은 아이템으로서 더 유연하고 더 광범위하게 변모를 거듭하고, 그 결과 급속도로 지루해졌다.

 

취미가에게는 비전이 존재한다. 그것은 사적 공간에서 작업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그를 통해 서울의 미술에서 가장 크게 비어있는 공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각주:11] 이 이야기는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에서 취미가가 찾은 답안 중 하나이고, 동시에 생존이라는 지긋지긋한 주제를 위한 미술의 고민이다. 이것은 중요한 목표라서, 취미가는 이 비전을 추진하기 위해서 시간을 더 견뎌야 할 필요가 있다. 허나 그러는 동안, 취미가라는 포스트-신생공간적 공간은 작은-기성적-공간이 된다. 대관료를 받고 전시를 유지하는 공간이 되었고, 아트샵도 페어도 아닌 것을 다섯 달 동안 회전시키는 무의미의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접혀버린 신생의 시간 위에서 취미가는 기성도, 신생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구축한 최선의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취미관》은 어떠한 형태를 갖추게 될까? 혹시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그것은 기금 마련을 위한 디너쇼 같은 것처럼 변해버리는 건 아닐까? 허나 아직 《취미관》은 끝나지 않았고, 케이스 속 출품작들은 꾸준히 변동될 예정이다. 나는 아직 《취미관》을 전부 본 것이 아니고, 그렇기에 부분적인 이야기만을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취미관》은 여전히 유예의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고, 여전히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 포스트-신생공간적 상황 안에서, 취미관》은 여전히 최선의 결과물인데, 이것은 답답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1. 『Painter by Painters』, 김혜원 인터뷰, 110p [본문으로]
  2. 《PACK2018:팅커벨의 여정》 웹페이지 작품 설명 참조. https://pack2018.org/W [본문으로]
  3. 굿-즈 트위터 페이지 참조, https://twitter.com/g8dsinfo/status/510673519617638400 [본문으로]
  4. 권시우, 「취미가와 취미관 이후의 ‘굿즈’」,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87?category=650941 [본문으로]
  5. 권시우, 「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미술세계』 2016년 12월호 제50권, 91-93p,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본문으로]
  6. 강정석, 「LOG 2 : 두 플레이어가 벌이는 최소극대화의 게임」, 『MAGAZINE beta 1』, 201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7. 권시우, 「《호버링Hovering》 전시 서문」, 2018, 페이지 표기 없음 [본문으로]
  8. 권시우 a.k.a. “흔들렸던 죠” 트위터.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https://twitter.com/shakingjoe/status/1003575837189238785 [본문으로]
  9. 황재민, 「미술은 취미가 되어야 하는가? "<취미관>이라는 4주의 시간"을 향한 에세이」,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88 [본문으로]
  10. 윤원화, 「캐비닛의 ‘작은 미술’: 굿즈, 생산-전시-소비를 말하다」, 『아트인컬처』 2019년 2월호, 126-129p. [본문으로]
  11. 권순우, “(…) 사적 공간에서 작업을 감상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돈을 지급해서 일정 부분 작가를 후원하게 되는··· 씬에 명확하게 포함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번 그걸 해본 것은 한 번도 안 해본 것이랑은 엄청난 차이죠.” 「대화: 굿-즈(GOODS) 2주기(週期)」, 『피아★방과후』, https://pia-after.com/?p=609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엎지른 물》 전시 전경 (사진: 윤병주)


정동 인근의 갤러리, ‘레인보우 큐브 Rainbow Cube’는 가택을 고친 모양의 전시 공간이다. 이곳에선 작년 한 해 처음의 개인전이라는 작은 공모를 열었는데, 공모는 아직 개인전을 열어본 적 없는 이력의 작가에게 처음의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공간 및 기타 지원을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유지영은 2018, 이 시리즈의 마지막 순서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것은 작가가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한국으로 돌아와 관여한 첫 번째 전시였다. 개인전의 제목은 엎지른 물 Spilled Water이었는데, 전시 리플렛에 포함된 정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엎지른 물의 경위란 다음과 같다


물과 컵. 물은 컵이라는 물리적 기반에 담겨있음으로써 존재하고 컵은 물이라는 내용물을 통해 사용가치를 얻는다. 그렇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린 채 물이 가득 담긴 컵이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그 앞에 앉은 사용자가 목이 마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물은 사용자에 의해 들어 올려진 컵을 빠져나감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제약하는 것에서 벗어나지만 그와 동시에 지반을 잃고 금방 증발될 위기에 처한다. 유용성에 종속되는 투명한 사물이었던 컵은 구멍이라는 비효용성을 통해 내용물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하고 사용자를 좌절시킨다. 회화라는 컵에 담긴 이미지라는 물을 마시러 온 관객들에게, 전시 엎지른 물은 다음과 같은 예외적인 상황을 경험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두 요소 간의 딜레마적인 관계를 상기시킨다.”[각주:1]


이 경위에는 맥락이 있다. 유지영은 물과 컵에 관련된 비유를 다른 곳에서 빌려왔는데, 그것은 벨기에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 파이코 베커스(Feiko Beckers)가 영국의 갤러리 텐더픽셀(Tenderpixel)에서 개최했던 전시인 <당신은 실제로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You might actually learn something>(2017)에서 진행했던 퍼포먼스, 혹은 워크샵<당신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좌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 A thing you can't, but also don't want: A workshop on handling frustration>(2017)이라는 작업에서 비롯한다. 작업은 좌절감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해석을 담은 퍼포먼스, 해당 작업에서 파이코 베커스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컵과 거기 담긴 물을 앞에 두고 컵에 담긴 물을 마시고 싶은 욕망, 어떻게 해야 해당 욕망을 좌절시키는 구멍이라는 방해물을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읊조리다가 결국에는 구멍 난 컵(지지체)을 들어 올려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물(내용물)을 다 쏟고야 마는장면을 연출했다.[각주:2] 유지영은 좌절감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이 퍼포먼스에서 영향 받아 <좌절의 서식 Template of Frustration>(2018)이라는 작업을 제작했는데, 주제로부터 영향을 직접 받았다기보단 퍼포먼스에 사용된 물리적 매개물로부터 작업의 계기를 얻은 듯 보인다. 이 컵과 물이라는 비유는 작업 <좌절의 서식>과 그 쌍인 <희망의 서식 Template of Hope>(2018) 등의 작업을 통해 구체화되며 사용자와 내용물과 물리적 기반과의 관계, 회화와 이미지와 지지체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했고, 작가의 첫 개인전 엎지른 물은 그 필요가 쌓이며 만들어낸 결과다.


유지영은 회화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작업, “상수로 여겨졌던 회화의 조건들을 각각 조정해보면서 도출되는 작업이 회화와 비-회화의 경계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가늠하는 실험을 한다.[각주:3] 회화라는 이름으로 묶여 불리는 특정한 형태의 미적 미디엄에는 관습화된 문법이 존재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시작해 규칙을 임의로 분할하여 재배치하는 작업으로 나아가고, 또 문법적 규칙이 그렇게 바뀌었을 때 어떤 경우가 회화로 보이고 어떤 경우에는 회화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지 양상을 실험한다. 만약 이 실험에 목표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회화라고 불리는 특정 형식의 기반에 대해 고찰하는 일일 것이다.


이 고찰에는 개인적 계기와 미적 계기가 공존할 듯하다. 작가는 회화 작업을 하며, 작업의 절차와 선택되는 재료와 같은 필수 요소들이 어째서 유독 한정되어있는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것은 일반적인 형태의 그리기를 통해서는 성립되지 않는, 형식적 회화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는 방법으로 이어졌다. 작업의 절차를, 재료를, 나아가 기반을 바꾸기 위해 변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 이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는 (관찰 가능한 표본으로서) 주변에 대한 반발, 그리고 미적 차원에서는 (의심 없이 수용되는) 관습에 대한 반발이 개입하여 만들어진 탄력인데, 이 반발력은 회화라는 미디엄에 연루된 다양한 이야기들, 문법적 규칙과 역사적 강제력과 관습적 이해와 물질적 층위 같은 수많은 요소의 가능성과 미래를 간과하지 않는 작가가 도출한 결과로서 자연스럽게 보인다.

 

허나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 유지영의 실험은 충분히 의아한 실험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회화의 기반을 고찰하고 탐구하기 위하여, 이런 절차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그러니까, 지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그냥 그림을 그리는 행위일 수 있을까? 역시 회화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인식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냥 그림을 그린다는 것일 수 없고, 이와 같은 경우 그리는 행위 자체에 회의가 내재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엎지른 물의 경우처럼 회화에 대해 실험하는 미적 행위가 극적인 형태로 내보여져야 하는 필연성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를테면, 종종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회화를 매개하는 것은 손에 익은 기술과 그 기술을 위해 적합하게 생산된 각종 재료를 이용해 캔버스 전면((前面) 혹은 바깥 어딘가에 이미지를 생산하는 방법을 포함한다. 다만 이것은 회화적 매체/행위가 지니는 각종 속성을 개체화한 뒤 필연성을 지니도록 조작해서 재배열하는 행위 일체, 이와 같은 방식에서 회화적인 것을 탐구하는 행위 일체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만약 이것을 경향으로 특정할 수 있다면, ‘그리기로 매개되는 회화와 회화적인 것에 대한 탐구를 통해 매개되는 회화는 서로 구분된다; 그에 따라 각자 다른 전제와 방법을 갖는다; 허나 이 구분은 임의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에, 여러 차원에서 복잡하게 뒤섞여 종종 뚜렷하게 분별되지 않는다. 엎지른 물》의 실험이 누군가에게 극적이라면, 그것은 작가가 회화적인 것안에 항상 포함되는 이 같은 혼란상을 어느 정도 의식한 결과다.

 

엎지른 물에서, 작가가 실험하는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에 따라 미적 실험의 표본처럼 보이는 어떤 파격적임이나 급진성과 같은 요소들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관찰에 기초해 문제를 인식한 뒤, 가설을 형성하고 검증한 다음 결과를 분석한다는 실험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에 따라 전시의 전제와 전제의 작동 방식, 또 작가가 최소한의 의도를 부여한 가시적/비가시적 관계들, 또 그중 무엇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 이와 같은 대개의 구성이 이해가 가능하도록 열리게 된다. 이것은 마치 소형 동물의 인지 능력 실험을 위해 설계된 미로처럼, 뚜껑이 열려 조감이 가능한 형태를 갖는다. 전시를 바라보는 인간종은 어떤, 햄스터의 시점 같은 것을 통해 미로 구조를 탐구할 것인지 혹은 미로 전체를 위에서 바라볼 것인지, 선택하거나 오갈 수 있다.

 

허나 어떤 시점을 통하든 공통되는 이해가 있다면, 전시에서는 (회화의) 내용물과 물리적 기반이 관계 맺는 방법이 환유적 구조 안에서 틀지어지고, 이 과정에서 추상화된 정보 역시 일부분 해설된다는 점이다. 회화적 정보를 언어로 잠시 치환하여 그것이 갖는 다양한 벡터를 특정하는 설명은 작가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으로, 엎지른 물에서 물과 컵으로 설명된 회화 내부의 관계는 이전에 한번 포장지와 내용물의 관계를 통해 설명된 적 있다.[각주:4] 물과 컵의 관계에서, 내용물 이미지는 갈증에 시달리는 누군가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편 포장지와 포장 안 내용의 비유에서, 이미지는 내용을 보려는 누군가의 관심을 왜곡하는 것이다. 다만 두 비유가 갖는 유사점이 있다면, 회화 매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이미지의 시각적 힘이 대체로 강한 탓에 지지체 혹은 물리적 기반을 포함하는 이해가 실패한다는 평가다. 이미지의 힘이 이렇게 크다면, 이미지에 대한 단면적 감상을 넘어서는 이해를 위하여 작업에는 어떠한 공작이 수행될 필요가 있다. 이미지가 지지체라는 물리적 기반, 혹은 이렇게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무대 위에서 지내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나쁜 경우 새로운/다른 이해에 훼방을 놓는다면, 복잡하게 생각하기 전에 우선 강제력을 갖는 이미지의 대표성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궁리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작가는 물을 마시려는 사람들 앞에 구멍 뚫린 컵을 가져다 놓는 회화적 스턴트를 시연한다. 사람들은 엎질러져 버리는 물과 함께 구멍 뚫린 텅 빈 컵을 손에 쥐게 된다. 아연함과 함께, 그 컵을 한 번 더 쳐다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젤 회화는 여태 몇 차례나 미적인 효용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캔버스 전면을 몸체로 사용하는 표면 중심의 회화, 이미지 위주의 회화가 온전히 극복되어 새로운 종류의 예술로 승화된 역사가 존재한다면, 회화의 감상에 있어 이미지 중심적 이해가 선행한다는 전제 역시 당위가 없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엎지른 물의 실험이 가리키는 방향 앞에는 어떤 방해물이 있는 셈이다. ‘특정한 사물(Specific Object)’의 논리가 미술을 새로운 범주로 확장하며 회화를 극복했다고 한다면, 이미지에 대한 엎지른 물의 전제는 다소 작위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때문이다. 허나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순수 시각적 평면으로서의 회화라는 영향을 재귀적 대상성(Recursive Objecthood)을 갖는 사물로 승화한 역사적 해석을 회화를 우회한 결과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지영이 탐구하는 영역은 영생하는 이미지의 생명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회화에 의해 매개되려는 이미지와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려는 회화가 표하는 어떤 끈질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끈질김은 사실 과거에 우회되었을 뿐이므로 여전히 존재하고, 그렇기에 극복을 위한 새로운 계기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계기는 보다 어려운 질문을 포함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회된회화는 아직도 흥미로운 형식일 수 있을까? 이처럼 조각내어 그 근본을 다시 보아야 할 만큼, 회화는 여전히 흥미로운 형식으로 존재하는가? 회화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와는 상관없이, 회화는 꾸준한 수요를 갖는 형식으로 언제나 나름의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이것은 회화의 초월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보통 회화가 확장하는 미술 시장 안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장식으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거쳐 해설된다. 허나 회화가 지니는 끈질김만큼은 급진주의 미학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에도 매력적인 가치였기 때문에, 누군가는 점차 정형화되는 급진적 미술을 위해 회화의 이런 속성을 전유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대중 관객의 강한 신뢰를 재료 삼아 주기적으로 환기되는 회화는 관객의 기대를 확보하기 용이하므로 불편한가치를 삼투할 수 있는 위장 작전의 껍데기로서도 유용하리라는 것이다.[각주:5] 이 같은 전략과 함께 회화는 갱신의 계기를 얻는다. 갱신된 회화의 문제는 캔버스 전면에 어떤 재료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화가 어떤 네트워크로 어떻게 편입되는가에 대한 문제로 바뀐다. 회화는 이제 고정된 순환 구조 안에서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네트워크 안으로 외재화(Externalization)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그 몸체는 추상화된다. 외재화 과정을 거쳐 개념적으로, 물질적으로 보다 넓은 공간으로 향하는 회화는 개체의 미학을 환경의 미학으로 확장하며 갱신된 가치를 확보한다.[각주:6]

 

이처럼 확장된 회화(Extended Painting)’, 이제 회화가 개별 미디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 작업 내부에서 다양화되는 미적 미디엄과 그 미디엄()이 물질적/비물질적으로 생성하는 관계 중 일부로 통합된다는 논리처럼 보인다. 회화가 관계하는 관습적 이해, 강한 신뢰, 나아가 회화적 언어 자체는 보다 넓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Post-medium Condition)’ 안으로 편입된다 - 매체가 갖는 특정성이 무력해진 동시대 미술의 짧은 역사 안에서, 회화는 이처럼 갱신된 모델로 변모한다. 그러나 최근의 몇몇 회화 작업을 보며 내가 재미있다고 느꼈던 점이 있다면, 그 작업들이 이와 같은 회화의 새로운, 확장된 모델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회화적인 것을 널리 확장하는 방식으로 미술을 재정의하려 들기보단, 회화라는 미디엄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미술에 대해 탐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할 때, 그 전제는 얼마간 의아하다. 현대/동시대 미술의 다종다양한 매체 탐구의 역사에 대해 인지한 누군가가, 회화를 신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회화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 설명할 때, 관련되어 쉽게 상기되는 주체는 얼굴 없는 대중관객이지 비판적 성격의 작가가 아니다. 회화는 죽었고 죽은 회화가 한 번 더 죽었다가, 그게 한 번 더 돌아왔지만 그것조차 허무하게 잊힌 것이 아니었는지? 회화는 오로지 흥미롭게 극복되는 장면의 재료로 쓰일 때 의미 있고, 대충 그렇지 않나요? 허나 한국의 몇몇 회화 작가의 작업에서, 회화를 하나의 중심으로 파악한 뒤 주변적인 것을 뒤섞어 무게 중심을 재편한다는 아이디어는 전혀 흥미로운 것이 아닌 듯 하다. 《엎지른 물》에 설정된 주요 가설인 회화는 내용과 그 물리적 기반으로 나뉘어진다는 주장 역시, 회화를 극복/반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갱신/수정해야 하는 무엇으로 간주한 결과로, 유지영은 회화가 기타 주변 요소들과 관계되며 다양한 미학적 논의 속으로 펼쳐지기보단 기존에 관계하던 관습적 이해를 탐구하고 고장내어[각주:7] 새로운 이해를 촉발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있다. 이 모든 것은 한 편으로는 아주 시대착오적인 생각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선은 이와 같은 이해를 유도하기 위해 설정된 각종 조형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고, 정체되고, 혹은 해결되는지 직접 들여다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이때 비로소 햄스터-시점이 유용하다.


전시에서는 유사한 문법이 반복되며 장치가 된다. 팜플렛을 통해 작가가 직접 밝히는 일종의 안내문, ‘구멍 뚫린 컵엎질러진 물이라는 비유는 여전히 비유이지만, 《엎지른 물》 안에서 예상보다 직설적이다. 이 구조는 작가가 회화를 어떻게 고장 낼 것인가 고심한 결과로, 구멍이 난 패널은 에 해당하는 물리적 기반의 형상물이며 바닥을 구르는 작은 패널이 바로 에 해당하는 이미지에 상응하는 결과다. 구멍 난 패널은 같은 모양의 백색 패널을 쌍으로 갖고, 예의 패널로부터 직접 탈각된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패널은 전시 공간 바닥 혹은 거치대 위에 나름의 질서를 만들며 놓이는데, 이것들로 레인보우큐브의 작은 공간은 제법 빈틈없이 채워진다.


<좌절의 서식 Template of Frustration>(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1.5 x 2 cm), Pieces (in order by size): (16.1 x 50.6 / 16.1 x 50.6 / 23.8 x 22.5 / 23.8 x 22.5 / 26 x 18.6 / 26 x 23.4 / 26.2 x 47.5 / 66.6 x 24.5 / 73.3 x 51.4 / 20.9 x 20.9 / 20.9 x 20.9 / 20.9 x 20.9 / 20.9 x 20.9 / 43 x 43 cm)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작가가 설정한 비유의 구조는 언어 차원에서 마감되지 않고 작업에 슬며시 개입하여 몸통의 일부가 된다. 이 구조는 시각적 흥미를 돋우는 일에도 쓰이며 전시의 의제가 보다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권유하는 일에 쓰이기도 하지만, 비유를 따라 형성된 모종의 서사는 각 패널 간의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의 경우, 비유는 스티커의 형태를 인용하며 형성되는데, 이 인용은 자연스레 질문을 이끌어낸다. 그게 그러니까, 어째서 하필 스티커일까?


《엎지른 물》 전시 중 <좌절의 서식>(부분) (사진: 윤병주)


구멍이 뻥 뚫린 채 어려운 시간을 겪는 회화에게 예쁜 심상의 탈부착형 2차원 장식을 껍데기로 입혀버리는 것은 잔인한 선택처럼 보인다. 허나 여기에는 작품의 제목을 비롯, 이런저런 이유가 있다. <좌절의 서식>, 그리고 <희망의 서식>이 전유한 레디메이드 사물인 스티커는 이미지를 엎지르는데최적화된 물건이다. 스티커에서, 이미지는 탈각되기 위해 존재하므로, 이미지가 빠져나간 뒤 스티커의 남은 몸체 부분은 대부분의 경우 버려질 터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보면 스티커는 작가가 설명한 회화의 내용과 그 물리적 기반 간에 생겨나는 관계, ‘지지체는 이미지에 의해 가려진다는 전제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두 작업의 경우, 제목은 전시명 《엎지른 물》과 마찬가지로 파이코 베커스의 퍼포먼스 <당신이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것: 좌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워크샵>으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그러므로 좌절희망도 특정한 감상적 정서와는 관계가 없고, 아이디어를 취한 작업의 인용이자 이미지에 의해 실패하는 지지체의 위치를 해설하는 단어로서 도구적이다: 비록 누군가는 좌절, 혹은 희망과 같은 정서를 이 구멍 난 패널 안에 대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 또 이들로부터 빠져나와 파편화된 이미지-패널을 구현하기 위해 작가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를 이용해 재단할 부분을 설정한 다음, 공방의 도움을 받아 패널을 커팅했다. 이후 커팅된 단면을 사포질해서 매끄럽게 만든 다음에는 패널에 캔버스 천을 씌우고 젯소를 발라 바탕을 준비하는 등, 패널이 회화로 기능할 수 있게끔 매개하는 후반 작업이 요구됐다. ‘서식패널에서 탈각된 이미지-패널에도 역시 캔버스 천을 씌우는 등 바탕을 만드는 작업이 적용되는데, 이것은 파편화된 이미지 위에도 ‘oil on canvas’의 위치를 부여하기 위한 처리로, 작가가 회화의 기본적 구성 요소를 프레임, 표면, 안료로 (1차적으로) 정의함에 따라 대개의 작업에는 이 세 요소를 확보하기 위한 절차가 적용된다.

 

그렇다면 예의 두 작업이 회화를 스티커처럼 다루면서 이미지를 떼어냈을 때, 그 광경은 과연 전유한 물건의 경우처럼 자연스러울 수 있었을까? 이미지들이 잘 떼어져 바닥으로 향한 것을 본다면, 스티커-환유를 통한 예의 고장은 제법 성실하게 진행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지와 지지체, 양자가 회화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관계는 여전히 서로 밀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고장이 발생한 현장을 조금 더 자세히 관찰하면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바닥에 놓인 이미지-패널이 갖는 이미지는 원래의 형상을 추측하기 어렵게 블러(Blur) 처리되어있고, 몇몇 파편은 하얗게 탈색되어 불완전한 상태이지만, 지지체 위에 남겨진 이미지의 흔적은 훼손되지 않고 뚜렷하다. 이것은 분리된 파편이 지지체를 온전히 갖추면서 독립된 회화 개체로 전시되는 상황을 저지하기 위하여 작가가 임의로 개입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지지체로부터 탈각되어 튀어나왔을 때 이미지가 처하게 되는 취약 상태를 표기하기 위한 선택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이미지-파편은 탈각되어 형상이 흐려지고 벗겨지며, 지지체 위에는 구멍이 뚫려있지만, 아직 고장은 완전하지 않다.



 

《엎지른 물》 전시 전경,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부분) (사진: 윤병주)


<희망의 서식 Template of Hope>(2018), Oil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1.5 x 2 cm, Pieces (in order by size): 9.8 x 31.6 / 11.1 x 15.8 / 12.9 x 15.5 / 12.9 x 15.5 / 13.2 x 28.8 / 13.3 x 43.5 / 16.2 x 16.2 / 18.1 x 8.1 / 22.4 x 22.4 / 26.7 x 26.7 / 31 x 19.6 / 31.2 x 16 / 31.7 x 28.7 / 36.4 x 19.9 / 36.4 x 19.9 / 36.4 x 19.9 / 38.1 x 38.1 / 67 x 67cm)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의 구멍 뚫린 패널들, 그리고 거기서 떨어져 나온 이미지-패널이 일정량의 훼손을 주고받으며 멀어져 있는 동안, 구멍 뚫린 패널을 위한 쌍이자 지지체 차원의 네거티브처럼 보이는 패널은 곁에서 온전한 모습을 지니며 여유롭다. 이것은 어쩌면 이미지-없는-순수-지지체형식으로서 이미지를 입고 고생 중인 템플릿이 지향해야 할 모범적 형상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실은 이 온전한 뼈대 역시 예의 구멍 난 패널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근거가 사라지는 형식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는 불완전한 형식이다. 1차원적으로 독해하자면, 이것은 순수-지지체의 이상 역시 온전한 형태를 갖출 때조차 훼손될 수밖에 없다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좌절희망이 이와 같은 부침을 겪는 동안, 같은 공간에 전시된 다른 작업은 어떤 역경을 통과하고 있을까? 유사한 문법의 <Plate ⅩⅨⅩ.>, 그리고 <Plate Ⅷ.> 역시 나름의 고초에 시달린다. <좌절의 서식>에 설정된 비유적 구조가 스티커였다면, ‘Plate’의 경우는 도판을 껍데기로 갖는데, 그에 따라 작업의 질감 역시 달라진다. <좌절의 서식>에서 바탕을 만드는 초반 작업에 젯소가 사용된다면 ‘Plate’에선 아크릴 미디엄이 쓰였는데, 작가는 이에 대해 패널에 도판의 질감과 같은 종이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한다.[각주:8]


<Plate XIXX.>(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200 x 120 x 2 cm (사진: 윤병주)


<PlateⅩⅨⅩ.> 부분 (확대) (사진: 윤병주)


<좌절의 서식> <희망의 서식> 쌍과 ‘Plate’ 시리즈는 서로 시각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흡사한 방법론을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출된 이미지-패널을 살핀다면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좌절의 서식> 쌍의 경우 고장을 위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이미지들은 흐려지고 표백되며 본래의 이미지를 잃지만, <플레이트>로부터 분리되는 이미지들은 원래의 형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보존하고, (허나 여전히 몇몇 이미지-패널은 공백이다.) 그뿐 아니라 독립된 작업으로 거듭나며 제목과 캡션 등을 얻는다. <좌절의 서식>의 경우에서 작가가 파편화된 이미지-패널을 분리된 개체로 제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선택은 그와 무척 대비된다.


<1-13 from Plate XIXX.>(2018), Oil and acrylic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1 from Plate XIXX.: 8.7 x 15 cm

2 from Plate XIXX.: 9.3 x 16 cm

3 from Plate XIXX.: 13.3 x 14.5 cm

4 from Plate XIXX.: 14.4 x 16.8 cm

5 from Plate XIXX.: 17.3 x 19.9 cm

6 from Plate XIXX.: 21.1 x 19 cm

7 from Plate XIXX.: 21.1 x 23.5 cm

8 from Plate XIXX.: 18.4 x 22.5 cm

9 from Plate XIXX.: 19.8 x 25.2 cm

10 from Plate XIXX.: 25.3 x 22.7 cm

11 from Plate XIXX.: 25.4 x 23.7 cm

12 from Plate XIXX.: 24 x 26.6 cm

13 from Plate XIXX.: 29.2 x 35.7 cm

(사진: 윤병주)


이 선택은 어쩌면 도판이라는, ‘Plate’가 몸체 삼은 레디메이드 물건의 특성과도 연관된다. 스티커는 탈착을 위한 장식이지만 도판은 책의 일부로, 자립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설명적 기능을 지닌다. 스티커의 경우 우선되는 것은 항상 이미지이고, 몸체의 쓸모는 사소하다. 허나 도판에서, 이미지와 지지체 간 관계는 거의 불가분으로 동등하다. 스티커의 이미지는 그 몸체로부터 떼어졌을 때도 여전히 스티커로 존재할 수 있지만 도판의 이미지는 떼어지는 순간 맥락에서 이탈하며 기능을 잃는다. <좌절의 서식>의 이미지-파편들에겐 온전한 회화로 독립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들이 스스로 섰을 때, 전시장에는 회화가 아니라, 크게 확장된 스티커 모형이 소환된다. 반면 도판은 이미지가 멀쩡한 채로 독립하더라도 상관 없다. 이미 특정한 책의 맥락으로부터 탈선한 이미지는 기능 자체가 변화한다. 유지영이 인용한 도판은 각각 History of North American birds(1874)Eggs of North American Birds(1890)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전자의 경우 미국의 조류학자이자 학예사였던 스펜서 풀러튼 베어드(Spencer Fullerton Baird, 1823-1887)가 로버트 리지웨이(Robert Ridgway, 1850-1929), 그리고 토마스 마요 브루어(Thomas Mayo Brewer, 1814-1880)과 함께 집필했으며, 후자는 마찬가지로 미국의 조류학자였던 찰스 존슨 메이너드(Charles Johnson Maynard, 1845-1929)가 집필했다.


<Plate VIII.>(2018), Acrylic paint and graphite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Dimensions variable, (2 panels each 200 x 120 x 2 cm) (사진: 윤병주)


‘Plate’의 이미지-패널의 캔버스는 해당 이미지가 원래 갖는 모양을 반영하며 결정되고, 그 때문에 캔버스가 사각형 혹은 원형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이처럼 형태를 갖는 캔버스 역시 ‘Plate’의 이미지들이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사각/원형 캔버스가 역사적 형태의 회화를 상기시키며 일반화된다면, 도판 이미지에 조응하며 도출된 변형 캔버스는 해당 이미지와 특정적으로 결부되는 유일한 지지체 형식으로 승화된다. ‘Plate’에서 도판이라는 추상적 몸체는 이미지와 지지체가 형성하는 딜레마적 관계 안에 유화(乳化) 작용을 일으키며 예외적인 독립성을 만들어내는데, 《엎지른 물》의 실험에서 의외의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처럼 구멍 뚫린 패널 본체와 파편화된 이미지 패널이 필연적 과정을 거쳐 분절될 때 파생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회화 전면과 그 물리적 지지체가 특정적으로 대응하며 형성되는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 형식은 회화-조각이라 명명할 수 있을 법한 부류의 형식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회화-조각이 회화적 관습을 차용, 불분명한 입체적 영역과 연관되며 확장을 꾀한다면 변형 캔버스는 여전히 회화의 역사와 관련되어야만 이해가 수월한 형식 중 하나다. 유지영이 이미지-패널 위에도 캔버스 천을 붙이고 유화 물감을 올려 ‘oil on canvas’를 부여하며 수행적 관계를 설정할 때, 이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회화를 위한 실험이라는 전제는 보다 명확해진다.

 

<엎지른 물>의 이와 같은 경위는 단일한 목적을 위해 명료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전시의 방법에 대해 의문을 표할 수 있고, 또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한 모종의 해설과 모종의 주석을 요구할 수도 있다. 패널 위에 존재하는 공백, 또 그 공백의 원인이자 결과인 파편들, 그들이 왜 그런 모양으로 엎질러졌는지’, 또 만약 그런 모양으로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어떤 실험이 가능했을지에 대해서.

 

어쩌면 이미 지나친 전시장의 초입, 그 근처에 기대 서 있는 하나의 작업이 그런 주석의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작업의 제목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Lumpy Frame and Canvas with a Half-Moon>(2017)인데, 제목에서 분명하듯 작업은 혹이 난 프레임과 구멍이 난 캔버스를 즉각적인 대조가 가능하도록 병치한 형태를 갖는다. 프레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프레임과 캔버스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캔버스의 모습은 간단한 고장을 실험한 결과물인데, (+)과 구멍(-)은 물리적으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지만 프레임과 캔버스에게 각각의 방식으로 개입하면서 지지체 대상의 고장을 성공시킨다.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Lumpy Frame and Canvas with a Half-Moon>(2017), Jesmonite and primed canvas, oil paint, Dimensions variable (each 40 x 30 x 2 cm) (사진: 윤병주)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 <좌절의 서식>과 그 쌍인 <희망의 서식>, 그리고 <Plate ⅩⅨⅩ.> <Plate Ⅷ.>의 양상에 대한 주석으로 보는 해석은 임의적이고 부분적이다. 허나 전시를 구경하는 방법은 언제나 자의적일 수 밖에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더 뻔뻔하게 전시를 한 번 더 돌아보자면, <좌절/희망의 서식>, 그리고 ‘Plate’ 시리즈 등 엎지른 물의 작업들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에서 시도된 간단한 고장에 한 가지 명령어를 더해 복잡화한 결과처럼 보인다. 그 명령어란 당연히 이미지일 텐데, 이처럼 이미지가 개입되자 상황은 <혹 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에서처럼 깔끔하게 전개되지 않는다. 작업에서 어느 정도 성취된 듯 보였던 구멍 내기를 통한 고장의 문법은 이렇기에 확장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의 힘은 여전히 다 소진되지 못해서, 이미 얼마간 완성된 방법론 안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촉발할 수 있다.

 

전시에서, (이미지에 대한) 고장-실험이 신경계를 교란하는 망막적 실험이 아니라 형식적 실험으로 나타난다는 점은 재미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리기는 회화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굉장히 중립적인 태도로 다루어낸다. 유지영은 이미지를 꽤 섬세하게 조형하지만 그것은 이미지를 통해 어떤 것도 담아내지 않겠다는 목표를 위해서이다. 전시에 사용되는 회화적 이미지는 무척 다양하다; 어떤 화면은 구상적이며 어떤 화면은 비구상적이고, 어떤 화면은 백색 모노크롬처럼 보이지만 이 다양한 구성은 특정성을 매개하지 못하고 같은 차원으로 통합되어 버린다. 모종의 중립적 대표성을 부여 받는 이미지와, 그에 의해 창출되는 시각적 건조함은 구멍 내어 고장 낸다라는 목표에 단순성과 합리성을 실어준다.

 

그렇지만 회화에 구멍을 낸다는 것은 꽤 과격한 행위임이 틀림 없다. 구멍은 물리적인 공백을 만드는 일이지만 동시에 상징적인 공백을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젤 회화의 캔버스 전면은 오랜 시간 동안 정신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면으로서 대표하는 것이 많았다. 회화에 구멍을 뚫는 일에 대해 상상할 때, 표현을 위한 과격한 정동을 실어 나르는 힘센 붓질 같은 것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런 것과 크게 거리를 두려는 합리적 단순성의 공백은 전시의 목적과 전개가 도대체 어떤 성격을 지니는가에 대해 알리는데, 이것은 스타일일 수도 있고 (작가적) 기질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기도 한다: 시각적으로 고요하며 상대적으로 단순한 방식의 개입으로도 망가뜨리는 일에 대해 다룰 수 있을 만큼, 회화 매체는 긴장된 상태다. 긴장의 원인은 촘촘하게 짜인 관습적 이해의 추상적 물리력으로, 회화가 이런 긴장을 유효하게 받아들일 때, <혹난 왁구와 반달 뜬 캔버스>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망가뜨리는 단순한 조작 역시 잠시 유효해진다.

 

유지영이 수행하는 고장은 실험적 절차를 거치기에 논리성을 요구하지만, 한편 이 실험이 전제하는 주요 가설은 검증이 어려울 만큼 유동적인 영역에서 창안된다. 이를테면 이미지가 지지체와의 갈등에서 대개 승리한다는 전제, 프레임과 표면과 안료가 회화의 기본 구성 요소라는 전제, 또 회화적 이해가 이미지와 지지체로 양분된다는 전제 등이 그렇다. 들여다보면, 이 가설은 실험 대상의 근본적인 정의에 개입하는 급진적 가설로, ‘회화적인 것을 탐구하기 위해 회화적인 것이라는 추상적 미디엄의 몸체를 필연적으로 조작한다 - 원활한 고장을 위해, 원본을 고장에 적합한 상태로 개조한다.

 

회화의 유행이라는 아리송한 사태 앞에는 동시대 미술 문법의 붕괴가 선행한다. ‘동시대 미술은 특정적인 것을 상실하고, 그 변화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물질적인 것의 추상화 단계를 거쳤다라는 가설이 가능하다면, 회화를 하나의 사물로 파악하는 이해는 흥미롭다. 회화는 가장 추상적일 때조차 사물성을 구현하고 고착화된 물질적 문법을 통해 구성되므로, 재편되기 시작한 미술의 의제들에 대해 단단한 형태로 반응하기 수월하다. 예의 개조란 사실 이에 대한 각주가 된다. 회화는 관습적 이해의 구습에 의존하는 특정한 미학적 규칙이지만, 그 규칙을 담보하는 역사/미술사는 여전히 관습적 이해를 생산하되, 위계를 생성하지는 못한다. 역사는 이제 이미지 차원에서 블랙박스화되어 굉장히 평등한 방식으로 수집되는 것이므로, 이 평등/평면의 시간축 위에서 개인이 의도를 가지고 조형한 미시적 시점은 잘 정렬되었을 때 역사적으로 축적된 관습의 그것에 상응하는 무게를 얻을 수 있다.

 

회화를 단일한 중심으로 간주한 채 주변적인 것을 경유해 확장을 꾀하는 작업은 (미술에서의) 모더니즘이 끝을 선고받았던 그때부터, 쉽게 낙차를 생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용했다. 허나 이제 역사/미술사는 위계를 생성하지 않고, 회화 역시 단일한 경향이라고 단순하게 특정할 수 없다. 이를테면, 회화는 모더니스트 매체의 상징으로 간주되며 급진성을 물신화하는 상품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에 자주 시달리지만, 시장을 관찰한다면 이 같은 비판이 거의 수사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까운 사례로, 김환기, 김창열, 이우환, 유영국이 오윤, 임옥상과 뒤섞이다가 요시토모 나라와까지 관련되어버리는 서울 옥션의 경매장[을 전경으로 둔다면, 한국의 젊은 회화 작가들의 작업이 모더니스트 매체가 물신화되는 현상에 대해 다른 많은 (역사적) 회화들과 같은 책임을 지닌다는 비판은 불공평하게 보인다.[각주:9]

 

이와 같이, 미술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됐던 이런저런 전제들은 현재 크게 유동하고 있다. 따라서 무언가 분명한 것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두고 낙차를 만들어내는 방법들 역시 유효함을 잃는다. ‘회화를 고장낸다는 목표가 회화적인 것이란 무엇인가궁리하는 방법을 필요로 하고, 나아가 회화적인 것을 자체적으로 재정의하여 사용하는 DIY식 형식주의로 귀결되는 상황 역시 이 같은 배경 앞에서 이상할 것이 없다. 만약 이것을 신화화된 모던의 형태를 근거리에서 찾아내는 탐색과 같은 것이라고 풀어낸다면, 그것은 극적 표현을 위한 자족에 불과하게 될까? 한 가지 비교적 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필연성에 의지하며 창조되는 탐구적 조형의 사례가 나타내는 가치가 존재하며, 해당 가치가 시대착오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제 큰 상관은 없다는 사실이다.

<310-756 from Plate V. and VIII.>(2018), Acrylic paint on canvas, emulsion paint on wood,

428 from Plate V.: 9.1 x 14.6 cm

560 from Plate V.: 6 x 10.2 cm

756 from Plate VIII.: 13 x 20.7 cm

705 from Plate VIII.: 15 x 22.8 cm

510 from Plate VIII.: 15 x 23.2 cm

501 from Plate VIII.: 17.5 x 25.1 cm

513 from Plate VIII.: 16.4 x 27 cm

310 from Plate VIII.: 42.2 x 56.7 cm

(사진: 윤병주)



  1. 전시 서문, 「작가노트_구멍 난 컵과 엎질러진 물」. 페이지 표기 없음. [본문으로]
  2.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70p. 작업에 대한 묘사는 작가의 설명을 참조했다. 링크: https://indd.adobe.com/view/005ec962-af77-414d-94de-0f089119fa90 [본문으로]
  3.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65p. 위 링크. [본문으로]
  4. 『Painter by Painters』, 유지영 인터뷰, 68p. “회화가 선물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이미지가 그것을 감싸고 있는 포장지와 같다면 그 표면 아래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가 내겐 더 중요하다.” 위 링크. [본문으로]
  5. Thomas Lawson, 「Last Exit: Painting」, 『Artform』(October 1981) [본문으로]
  6. David Joselit, 「Painting Beside Itself」, 『October 130』(Fall 2009) [본문으로]
  7. 작가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발췌. 작가는 《엎지른 물》에 설정된 몇몇 장치들이 회화를 고장내기 위한 장치였음을 뚜렷이 한다. “(…) 도구로서의 투명성을 사물로서의 불투명성으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자가 회화에서 기대하는 ‘화면’이라는 유용성을 불능하도록 만드는 무언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에서 화면의 물리적 공백은 회화를 고장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8. 이때 사용된 미디엄은 골든(Golden)사의 파스텔 그라운드(Pastel Ground)다. 작가와의 메일 인터뷰에서 참조. [본문으로]
  9. 제 150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 목록 참조. 링크: https://www.seoulauction.com/saleDetail?view_id=RESULT_AUCTION&sale_no=452 [본문으로]
Posted by 황재민

전시의 바깥의 바깥의 바깥


황재민

 

* 이 글은 전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을 기획한 이양헌 기획자의 청탁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무대의 막이 걷힐 때 연극이 시작된다. 연극이 종료되면 막은 내려간다. 막이 내려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막과 무대는 극 속 환상과 극 바깥 현실을 구분한다. 극장은 꽤 많은 규칙을 지닌 공간이지만, 기본적인 규칙 중 몇 가지를 꼽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1990년 카트린 메스너Kathrin Messner와 요세프 오트너Josef Ortner에 의하여 결성된 비엔나의 예술 단체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 museum in progress’1998년부터 현재까지 방화막Safety Curtai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1] 제목이 암시하듯, 프로젝트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방화막을 사용하여 임시적인 전시 공간을 펼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이를 위해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는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 다니엘 번바움Daniel Birnbaum, 낸시 스펙터Nancy Spector 등의 큐레이터를 초청하여 방화막을 장식할 예술가를 섭외하게끔 했다. 이들 큐레이터에 의해 섭외된 작가는 비엔나 오페라 극장의 방화막을 하나의 이미지로 전유하는데, 이 프로젝트에는 현재까지 카라 워커Kara Walker,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스터Dominique Gonzalez-Foerster,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 제프 쿤스Jeff Koons 등 총 22/팀의 예술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한 편 2018년의 서울에서는 이양헌이 한 전시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이하 Exhibition)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기획을 맡은 이양헌이 연구를 위하여 구축한 영상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권혁규, 박재용, 안대웅, 장진택, 조은비, 최정윤 등의 큐레이터를 섭외, 전시화한 결과물이다. 결과적으로 총 48/팀의 작가가 참여한 이 전시는 그 물량 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각 작가들이 제공한 영상을 단순 상영하기만 해도 약 1000여 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이 필요했기 때문에 특히 그랬다. 전시는 2018 1월 경영난으로 인하여 폐관되었다가 4월 재개관한 오래된 소극장인 세실 극장에서 진행되었으며, 전시에 참여한 큐레이터들은 각자 하루의 시간을 배정 받아 전시 혹은 셋리스트 같은 것을 펼쳐낼 수 있었다.

 

방화막은 공연의 사이 시간에 개입하며 임시적 구조의 전시-/공간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유연한 형태의 실천을 전시로 이름 짓고 정체화하는 것은 뮤지엄 인 프로그레스가 전개하는 활동의 주된 부분 중 하나인데, 이들은 신문, 뉴스, 잡지, 또 빌딩의 파사드나 TV, 인터넷 등의 공공적 미디어 공간을 활용하여 전시를 일상적 삶의 부분으로 겹쳐내고자 하고, 《방화막》 또한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작동한다.[2] 오페라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여러 미술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연출한 이미지를 마주치게 되고, 해당 작품은 관객의 일상적 시간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입한다. 반면 《Exhibition》은 극장의 외부에 머무르는 대신 극장의 내부로 개입한다. 전시에 입장한 관객은 객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스크린에는 준비된 영상이 영사된다. Exhibition》은 이처럼 극장의 안쪽으로 진입할 뿐 아니라 극장의 논리와 구조 또한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그 과정에서 극장의 문법 역시 최대한 모방된다. 이 같은 방법 탓에 《Exhibition》은 관습적 의미의 전시가 아니라, 말하자면 스크리닝이나 상영회처럼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획자 이양헌은 이것을 전시로 적극 호명하고자 한다. 전시의 서문을 통해 밝힌 그의 의견에 따르면, Exhibition》이 굳이 전시로 불려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전시와 비전시의 경계가 점차 모호해지고 미술관 안팎에서 수많은 전시가 생산되는 상황에서” “질문들의 연쇄를 소급할 전시의 특정성을 세우기 위해서다. 가능한 전시의 영역을 찾기 위하여 세실극장은 무대가 되어 등장하고, 그 위에서 미술 작업work과 큐레이팅curating은 서로 교차하며 보다 자유롭게 수행된다.[3]

 

《방화막》과 《Exhibition》은 서로 무척 다른 환경과 상황에 기반한다. 《방화막》이 비엔나 오페라 극장이라는 큰 공간의 잉여적/부수적 부분을 경유해 스틸 이미지를 설치한다면, Exhibition》은 세실 극장이라는 보다 작은 공간의 중심에 자리잡아 무빙 이미지를 영사한다. 허나 이 두 사례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방식으로 극장과 전시 간의 교차로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전시라는 개념을 재-정체화하려 시도한다는 점에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두 전시는 모두 통상적인 전시의 바깥으로 뻗어나가고자 장소의 완전한 변형을 꾀하되, 그것이 미술의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도록 몇 가지 관습을 간직한다. 여기에는 전시와 관련된 몇몇 담론과 의제들이 겹쳐 보이는데, 이 중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는 의견은 어쩌면 이제 전시가 어디에든 기거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전시가 어디에든 근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시가 화이트 큐브White Cube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쉽게 연결된다. 이런 생각엔 전시와 관련된 담론뿐 아니라, 미술 작업의 형태와 관련된 근거 역시 존재한다. 유명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자면, 1960년대 미술의 확장된 장Expanded Field’ 아래서 작업하던 작가들은 변화한 작업의 개념과 그에 수반되는 형태를 제한하는 장소를 벗어나고자 미술을 위한 임의의 장소성을 새로 개척했고, 이 과정에서 화이트 큐브가 강제했던 물리적 형태가 주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미술이 보다 급진화되며 물리적 장소라는 주제를 개념적 장소로 대체했을 때, 미술제도의 여러 관습과 주변 요소들, 나아가 미술과 관계된 여러 담론과 문화적 틀 따위가 점차 하나의 매체로 특정되기 시작했다.[4] 이 흐름을 경유하여 전시 역시 하나의 매체로 전환되는 것이 가능했고, 이런 맥락 안에서 박물관Museum과 공공 공간Public Space , 화이트 큐브 이외의 공간이 미술을 위해 가능한 장소로 점차 보편화됐다. 조형에 있어 조각이 확장된 장으로 전환되던 시점과 고전적 형태의 영화가 확장된 영화Expanded Cinema’로 변환되는 시점 역시 여러 실천이 복잡하게 뒤얽히던 확장의 시기 안에서 서로 교차하는데, 확장된 조각이 조각적인 것을 해체/확장하는 과정에서 공간적 조건에 대해 자문했듯이, 확장된 영화 역시 영화적인 것의 이해를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공간에 대한 비평적 논의와 관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자연히 미술 갤러리의 공간적 조건으로서 화이트 큐브와 극장의 공간적 조건으로서 블랙 박스는 모종의 교차점을 형성하고, Exhibition》이 미술을 위한 장소로 극장을 제시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변환기의 서사와 맞물리며 당위성을 얻는다.[5]

 

나아가, Exhibition》은 극장과 무빙 이미지 아카이브를 무대삼아 보다 진보한 형태의 큐레이팅과 전시를 유도할 수 있는 일종의 장치로 기능하고자 노력한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이상적 시도와는 별개로, 이런 종류의 활동은 이제 그리 급진적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어쩌면 《Exhibition》이 비평하는 미술제도의 관습 중 가장 명시적 차원의 요소, 화이트 큐브-조건을 비평하기 위한 비-화이트 큐브-조건을 형성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 화이트 큐브가 아닌 공간적 조건을 형성하는 일은 대개 화이트 큐브를 하나의 관습적인 상태로 상정하고, 그를 의식적으로 비평하며 이루어졌기 때문에 화이트 큐브가 파국을 맞은 이상 그 외부 역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않게 되었다. 전시는 이제 어디에나 있지만, 전시가 어디에나 있다는 생각 역시 어디에나 있고, 화이트 큐브 바깥을 가리키려는 노력은 이제 그만큼 무의미하다. 이제 전시는 극장으로, 혹은 거리로, 또는 일시적 시공간으로 향하는 대신 근대적 조건을 혁신했던 현대적 미술의 공간-모델로서의 화이트 큐브를 새로이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Exhibition》는 일단 전시의 형태를 취한 다음, “동시대 미술에서 전시가 무엇으로 규정되는지, 큐레이팅은 어떻게 활성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실천이 수행적 차원으로 이행하는 것은 가능한지”, 적극적으로 묻고자 한다.[6] 기획자 이양헌이 설정한 이와 같은 질문에서, 전시라는 실천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큐레이터의 큐레이팅으로 파악된다. 허나 현재 새로운 종류의 전시는 어쩌면 큐레이팅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 작업을 통해, 그 내부로부터 실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의 동시대적Contemporary 조건이 붕괴한 이후의 상황에서 미술 작업은 다원화된 지지체Support를 통해 기존의 매체성을 갱신하고자 하고, 이 과정에서 전시, 또 화이트 큐브라는 특정한 요소는 이 지지체 내부로 종종 포섭된다. 전시는 더 이상 새로운 실험을 위한 장소나 새로운 작업을 위한 토대가 아니기에, 작업은 전시를 제도의 한 가지 단위, 또 단순한 규칙으로 파악한 뒤 전시를 비평적으로 매개하는 방법을 발전시킨다. 이때 개별 작업은 무풍지대로 전락한 미술제도의 관습적 조건들을 상대할 수 밖에 없고, 작업이 이처럼 전시를 매개할 때 큐레이팅은 비로소 이제는 불가능해진 몇 가지의 조건들과 마주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마침내전시가 이제는 유효하지 않은 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Exhibition》은 전시, 비전시nonexhibition, 또 반-전시anti-exhibition의 가능한 형태를 다각도로 중첩하여 전시의 고유한 영토를 탐색[7]하려 노력하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미지의 영토가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무언가의 파산이다. Exhibition》은 전시와 관련된 여러 겹의 고민을 노출하고, 전시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 이제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보여낸다. Exhibition》은 아무래도 실패한 사례에 가깝지만, ‘유효한 전시는 어떤 방식과 형태로 가능할 것인가?’라는 무시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이후 누군가는 이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마칠 것이고, 그때 보게 되는 전시의 모습은 익숙하게 공유되는 전시의 모습과는 무척 다를 것이다.



[1] museum in progress, <Safety Curatain>, https://www.mip.at/projects/eiserner-vorhang

[2] Museum in progress 웹페이지, About museum in progress, https://www.mip.at/about/

[3] 이양헌, Exhibition of Exhibition of Exhibition》 전시 서문, 쪽수 표시 없음

[4] 권미원, 「장소 특정성의 계보」, 『장소 특정적 미술』,, 김인규, 우정아, 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2013

[5] Andrew V. Uroskie, Between the Black Box and the White Cube: Expanded Cinema and Postwar Art,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11p.

[6] 이양헌, 위의 글.

[7] 이양헌, 위의 글.


Posted by jipdanochan

호버링 Hovering스케치 - 폐허의 유령이 실은 오늘의 슬기로운 젊음


황재민

 

2009년 열렸던 뉴 뮤지엄 트리엔날레의 주제는 세대적인 것The Generational'이었다. 로렌 코넬Lauren Cornell과 로라 홉트먼Laura Hoptman, 그리고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가 기획을 맡았던 이 트리엔날레의 이름은 예수보다 젊은Younger Than Jesus으로, 예수가 죽었다고 알려진 나이인 33세 아래의 나이로 한정된 작가들이 총 50명 참여했다. 이 전시에 설정된 유일한 조건이 단적으로 표현하듯,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젊음, 그리고 그 젊음을 바탕으로 한 범주로서의 세대였다. 현대적 미술을 인양해온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젊음은, 이 트리엔날레를 통하여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용되어 그것이 가능케 하리라 기대되는 어떠한 종류의 새로움을 구현한다.

 

젊음이 전시를 지탱하는 (거의 유일한) 축이었던 만큼, 전시에서 다루는 세대적인 것이란 세대라는 개념을 폭넓게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젊은) 세대를 지시하는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리고 그 세대란 2009년 당시의 청년 세대, “밀레니얼Millennials"이라고 지칭된 세대를 말한다. 젊음이 현대적 미술이 갱신해온 현재를 지칭하는 하나의 요소라면, 그 젊음의 구체적인 내용인 밀레니얼 세대는 디지털 기기와 랜 선에 매개되어 세계화된 세상으로부터 나고 자란, 의인화된 새로움이 되어 나타난다. 전시의 콘셉트에 맞추어 보자면, 그들이 가지는 새로움은 세계화된 지구촌Global village’이 갖는 새로움과 동등한 셈이고, 이들을 조망하는 것은 결국 세계를 관찰하는 것 - 어떤 세계관이 아니라 정말로 지구촌을 관찰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누군가 꿈꾸고 믿었던 유토피아적 의미를 잃어버린 사회를 앞에 두고, 전시는 젊음을 채집하는 일로 하나의 세계상을 표시하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보다 젊은이 포섭한, 25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군은 미지의 새로움으로 이동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고 표현된다.1) 젊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이기까지 한 새로운 세대를 빌어, 젊음과 새로움은 이렇게 연관 관계를 재설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움이 내포하는 의미는 역설적인 부분이 있다. 확실히 밀레니얼은 전지구화와 디지털 기기,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첨단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동시에 밀레니얼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경제 위기와 기대감소의 시대에 따르는 시대적 정서이다. 밀레니얼은 축소된 욕망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나아가 축소된 경험에 대해서 익숙하다. 그러므로 밀레니얼은 더 이상 발 디딜 바깥이 없다는 사실, 새로움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또한 익숙하다. 전지구적 젊음의 특징은 불행하게도 전지구적 경제 위기에 근원하는 전지구적 가난과, 전지구화된 공간 아래 통합된 지역성이 선사하는 마이너스-경험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보다 젊다는 사실이 지칭하는 것 중 특정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로서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삭제되어야 한다. 젊음에게는 신성함이 없고, 가능성에게는 한계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젊은) 청년이 이제 젊음은, 바깥은, 새로움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자인한다면, 그 모양은 무엇과 같을까? 한국의 서울의 영등포의 2/W에서 개최된 전시 호버링Hovering이 제시하는 화두는, 어떠한 측면에서 이런 문제들과 맞닿는다.

 

<호버링Hovering> 전시 포스터(http://www.90apt.com/hovering.html)

 

평론가 권시우와 90APTNNK(윤태웅)가 기획하고 김동용, 김효재, 류수연, 서민우, 오연진, 전예진, 정완호, 지호인 등 8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 호버링은 기획자와 작가 뿐 아니라 전시 리플렛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이너부터 음향 테크니션에 이르기까지 전시의 모든 참여자가 90년대 출생자로 이루어진, 예외적인 구성의 전시였다. 그러나 호버링이 전시 경험으로써 제시하고자 했던 것은 무언가 파릇파릇한 것, 새로운 형태의 무엇이 아니라 마이너스-경험으로부터 비롯하는 마이너스-세계상을 근간으로, 주어진 공간과 형태에서 적절히 작동하는 무엇을 어떻게 적절히 펼쳐낼 수 있을까에 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여기에는 청춘의 끓는 피가 자아내는 흥분이나 신선함이 거할 자리에 맥빠짐과 조심스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약이 자리를 잡는다. 나아가 호버링에서 제약은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데, 전시에 따르면, 오늘의 젊음은 (가난하기 때문에, 혹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청년관이 신설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적 폐허라는 제약을 겪을 뿐 아니라 또한 (보통 80년생이 주도한 미적 경향이라고 통용되는) ‘신생 공간이 동일한 난관을 맞아 사용했던 폐허 대상의 전략을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과거의 성취가 오히려 제약으로 작용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세대는 다르지만 상황은 여전히 같기 때문에, 호버링하는 90년생 미술가들과 신생 공간했던 80년생 미술가들의 관계는 묘연하다. 80년생이 맞닥뜨리고 고생했던 문제가 90년생에게도 여전히 같은 모양으로 나타날 때, 90년생 미술가들은 근과거와 강제로 단절된다. 비로소 이것은 맨 땅, 좀 더 고색창연하고 좀 더 어울리는 표현으로 대신하자면 폐허이다. 폐허를 기반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는 호버링, 좀 더 잘 움직이기 위하여 폐허에 어울릴 만한 존재 형태를 창작한다.

 

“(...) 그와 별개로 <호버링Hovering>이 가늠하고자 하는 것은, 유령 서버에 재접속했거나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채 남아있는 유령 플레이어들의 존재다. (...) (이들은) ‘이전의 플레이어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채 아직 정주할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하기 시작한다.”2)

 

젊음이 유령이 될 때, 젊음은 삶의 생동감을 포기하고 죽음의 고요한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셈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확보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저승의 존재로서, 유령은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며 놀래주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존재로서 포착을 비껴간다. 폐허와 잘 어울리는 유령 시점의 비유는 나아가 전시 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주제 혹은 방법론으로 확장 되는데, 이 비유와 얽혀 정당화되는 것은 레이어링Layering"이라는 기획의 형태이다. 호버링에서, 각각의 작업들은 2/W 건물의 1층과 4층을 오가며 뒤섞이고 층 내부적으로도 선형적 관람이 어렵도록 하나의 풍경으로 엮인 모습으로 연출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서문에서 유령 서버라 명명된 여러 겹의 폐허, 분별하자면 전시 공간으로서 2/W가 지니고 있는 외적 형태와 그에 얽혀있는 하나의 시간으로서 공간 커먼센터라는 폐허, 또 폐허에 가까운 비전형적 공간을 미술-전시-공간으로 설정하고 자조적으로 긍정함으로써 전 세대와는 차별되는, 유의미한 모양의 미학적 시공간을 펼쳐냈던 신생 공간의 전략, 또 이렇게 겹쳐지되 겹쳐지지 않는 근과거를 벗어날 수 없는 배경으로 두는 지금과 그 지금을 어떤 형태로든 활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새로운 플레이어의 오늘 - 어디로 가든지 폐허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 이 다층적으로 겹쳐지는, 폐허-폐허-폐허-폐허의 공간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전시 형태처럼 보인다. 이런 반응의 결과, 공간 전체를 아우르며 레이어링되는 전시 연출은 개별성과 총체성을 오가며 합선되는 한 편 작가 간 협업 구조를 활성화하며 유령 시점의 자유도라는 가설적 표현을 실제 공간 위로 구현해낸다. 더하여, 공간을 무대 삼아 작업을 레이어링하는 전략은 기획을 맡은 평론가 권시우의 비전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권시우는 계간 시청각의 지면을 통하여 압축과 팽창(CO/EX), 그리고 김동희의 작업을 엮어 해설하며 공간 인터페이스라는 임의적인 개념을 제시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권시우가 제시한 개념어인 공간 인터페이스란 애플의 매킨토시가 스크린 내부의 공간에 데스크톱 메타포를 설정하여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운용을 원활하게 했듯이, 몇몇 작가들이 디지털 환경과 연루될 수밖에 없는 기존의 작업 매체와 공간3)을 오늘의 시각성에 맞추어 소화하기 위하여 미술 작업이 놓이는 공간을 마치 데스크톱 위에 아이콘과 중첩 윈도우를 배열하듯 다루는 상황을 해설하기 위하여 동원한 개념이다. 호버링에서 78개에 달하는 작업들이 서로 겹쳐지고 멀어지며 공간을 빼곡하게 점유할 때, 전시의 공간 인터페이스는 클릭, 드래그, 나아가 터치에 이르는 사용자의 능동적 인터랙션이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도록 제어하며 관람을 굴절하는 효과를 낸다. 어쩌면 이것은 레이어링의 또 다른 쓸모가 되는데, 호버링이 작업을 이렇게 저렇게 서로 겹쳐내면서 전시를 볼만한 것으로 연출할 때, 그것은 또한 (‘볼만한 것이라는) 최소한의 성취를 위하여 작동하지만, 그와 함께 선형적인 관람을 망가뜨리면서 내부적으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블랙박스를 구축하는 역할 또한 선점한다. 그에 따라, 전시의 관람자 혹은 사용자는 전시를 자세히 살필수록 그것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전시를 보기 위해 2/W에 입장한 관객이 가장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것은 오연진의 그리드다. 48개의 액자와 그에 각각 담긴 이미지로 이루어진 오연진의 <Trade-off>는 서로 거의 유사하게 보이는 이미지를 노출값을 조정하며 반복한 뒤 그 변화된 양상을 늘어놓은 작업이다. <Trade-off>를 이루는 이미지들은 젤라틴 실버 프린트에 인화되어 있는데, 미디엄 자체가 아날로그 흑백 사진의 인쇄에 자주 쓰이는 만큼 관객은 작업을 첫 대면한 뒤 자연스럽게 이것을 사진으로 살펴보게끔 된다. 그러나 인화되어 있는 이미지는 명확하게 인식 가능한 형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패턴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화소값 이상으로 확대되어 불균질한 시각적 질감을 나타내므로 <Trade-off>는 디지털 이미지를 인화한 것인지, 혹은 디지털 이미지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연출한 사진인지 그 구분이 쉽지 않다. 만약 이 이미지가 디지털 이미지라면, 그 광경은 한때 아날로그 현실의 재현에 쓰였던 프린트를 디지털 이미지를 담는 데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디지털 테크놀로지 기반의 뉴 미디어가 올드 미디어를 포섭한다는, 관습적인 재매개 개념의 이해를 유희하는 셈이다. 작가가 (한정된 자원을 공유하는 대립적 관계의 요소들이 이루는 균형을 뜻하는) 트레이드-오프Trade-off라는 제목으로 작업에 비유적 관계를 설정할 때, 그것은 노출값과 (이미지의) 정보값 간의 균형, 노출값이 조정될수록 백색 혹은 흑색으로 희미해지는 형상의 정보값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이 비유는 또한 현실을 매개하는 두 가지 요소로서 뉴 미디어와 올드 미디어를 포괄한 채, 노출값과 정보값을 조정하는 것으로 두 매개체 간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작업적 구조를 짜 보여줌으로 디지털-리얼리티와 아날로그-리얼리티가 서로 충돌 혹은 절충하며 현실과 관계하는 새로운 조건을 표면을 통하여 시뮬레이션한다. <Trade-off>를 첫 번째 프린트부터 시작하여 선형적으로 읽는다면, 하나의 유사-형상적 추상 이미지가 기본값으로 반복되며 특정한 설정을 조정할 때, 흑색으로부터 출발한 이미지는 재현적 사진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해 포스트-디지털 조건 하에서 새로이 작동하는 혼합 현실의 시뮬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과다노출 되어 백색으로 희미해진다.

 

그 뒤 전시장을 둘러보는 관객이 마주칠 만한 작업은 아마도 지호인의 회화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5>일 것이다.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은 보통 작은 체리 형상이 군데군데 반복되어 프린트된 데님을 캔버스 천 대신 삼은 뒤 표백제를 물감처럼 원단 위로 올려내고, 또 그 위에 붓질의 존재감이 드러나도록 희거나 검은 젯소를 몇 획에 걸쳐 수차례 바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데, 이때 작업은 데님 서포트(표백제)-체리 프린트-젯소 순으로 구분되는 개별 재료의 서로 다른 층위를 침범하거나 배제하면서 레이어 구조를 형성한다. 이 레이어 구조에 있어 표백제의 사용은 흥미로운데, 재료는 서포트에 개입하지만 적층되는 바 없이 서포트로 직접 스며들지만, 붓질이라는 조형적 단위를 참조하므로 데님 서포트에 온전히 융합되지는 않는다. 지호인의 회화는 20cm 남짓의 작은 크기로 제한되고, 나아가 이모지Emoji 같은 체리 형상이 주요하게 쓰이므로 결과물은 대개 화사하고 귀염성 있다. 지호인은 2/W의 폐허-폐허-폐허-유령 서버의 공간성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회화적 레이어 구조의 한 부분으로서 폐허라는 전시 공간의 물리적 배경을 포섭해버리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에서는 회화 측면의 색채를 공간 배경의 색과 조응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연작에서는 작업 뒤편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PVC 비닐 캔버스를 이용, 폐허로 호명된 전시 공간을 서포트의 일종으로 적극 전용하는 방법으로 나타난다. 호버링은 전시 공간을 하나의 무대 장치 삼아 작업을 전시하고 포섭하는 이상한 전시이므로, 지호인의 이런 방법은 필연적으로 공간에 대하여 장식성을 띄게 된다. 그 때문에 만약 관객이 지호인의 회화를 신경 쓰지 않고자 결정한다면, 그의 회화는 이 전시 연출 내에서 가장 희미한 작업으로 남을 것이다. 허나 한 편으로 지호인의 이런 장식성은 또 다른 성질을 의미하는데, 작가는 회화를 2/W1층과 4, 나아가 두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 통로에까지 넓게 퍼뜨려 걸고 이때 장식성은 또한 편재성을 뜻하기도 한다. 그에 따라 누군가가 지호인의 작업이 전부 삭제된 호버링을 관람한다면 누군가는 지호인의 작업이 전시 공간 전반에 넓게 걸쳐 기능하는 호버링을 관람할 테고,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존재하는 독립적인 채널을 레이어링-공간에 펼쳐냄으로써 호버링을 일종의 개인전으로 남용하는 셈이다.


지호인의 회화는 무척 의도적인 설치의 결과물이자 작업 간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법론 또한 섬세한데, 이를테면 1층 군데군데 흩뜨려진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 중, 데님 서포트-젯소-체리 프린트 위로 백색 젯소를 붓질이 드러나는 올-오버 화면으로 칠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검정색 젯소를 같은 방식으로 칠한 4층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과 짝을 이루는 작업으로, 작가는 이 두 작업을 1층과 4층에 떨어뜨려 거는 것으로 두 공간을 연결한다.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여타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이 20x20cm로 동일한 크기를 갖는 것에 비해 24.2x24.2cm의 크기로 비교적 큰데,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또 다른 연작 중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의 크기가 마침 24.2x24.2cm의 크기이므로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과 ‘(색이름)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을 연결하는 역할 또한 도맡는 셈이다. 보통 화면 구성이 조촐하되 난리법석인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연작의 성격과는 차별되는, 단일한 두 색의 올-오버 화면을 가장 바깥의 레이어로 배치함으로써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은 회화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역할을 담당하려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이 작업은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18개에 달하는 페인팅을 이리 저리 섞어 연결하는, 어떤 의미에서의 하이퍼링크 혹은 가교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한편 호버링에 전시된 지호인의 작업 중 가장 과시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업은 1층에 걸린 <비리디안, 네온 핑크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인데, 관객의 눈높이 윗 편으로 올라가도록 높게 놓인 이 작업은 전시된 작가의 작업 중 유일하게 측면의 길이가 표기되어 있기도 하고, 또 캡션이 캔버스가 아니라 혼합매체로 표기된 예외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스스로를 회화적 물체가 아닌, 어떤 다른 혼합된 것으로 공표하는 <비리디안, 네온 핑크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1층 공간 전반을 성상적 시점에서 조망하여 전시 전체를 장식 차원에서 매개하고자 하는 작가의 야심을 화사한 형광 핑크의 몸체로 표상한다. 지호인이 호버링에서 개인적 채널을 설치한 뒤 얻어내는 것은 화이트 큐브에 최적화된 매체라고 여겨지는 회화를 폐허의 조건에 얽어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인데, 작가는 이런 배치를 통하여 하나의 이미지-표면으로서의 회화가 현재 가질 수 있는 효과가 어떤 것인지, 폐허를 정면으로 마주본 상태에서 재검토한다.

 

이어지는 김효재의 <난 마돌 : (Nan madol : season 1,2017)>(이하 <난 마돌: >)은 진공관 형태의 유사 인큐베이터 속에서 끊임없이 회전 중인 세 점의 작은 '유물' 연작과 함께 배치되어 있는데,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포스트-시네마로서 <난 마돌: >은 디지털-‘평평한지금을 적도 부근 미크로네시아에 현존하는 난 마돌이라는 이름의 해상 유적에 비유하며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서사 속에서, 근과거의 문화적 생산물과 역사적 기록 따위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하여 고해상도로 복원되고, 오늘의 시점에 이국적 현상으로 재생산되고 재배치되어 오늘에 적합한 오늘의 창작력을 소진시킨다는 미학적 문제는 혼합적 시공간에 근거하며 종종 현재의 시간에 침투하는, 가상적 유물의 형태를 빌어 나타난다. 영상의 설명에 따르면, ‘난 마돌이라는 이름의 이 유물은 보통 납작하고 반짝이는 파일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손바닥 한 뼘 크기의 유물들은 스마트 기기의 등장으로 올드미디어화한, 뉴 미디어 디바이스에게 가장 잘 포착된다. 구세대 핸드폰, 전자사전, 영상 재생이 가능한 MP3, CRT 모니터와 오래된 노트북에 이르기까지 난 마돌연작에서 이 디바이스의 종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관객은 4층에 위치한 <난 마돌: (Nan madol : season 2, 2017)>(이하 <난 마돌: >)를 이 디바이스들을 통하여 관람할 수 있다. 호버링에 전시된 난 마돌연작의 경우, <난 마돌: >이 비교적 선형적이고 그래서 설정한 서사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서 상영된다면, 4층의 <난 마돌: >는 서사 진행을 파악할 수 없도록 조각조각 편집된 영상이 나열되는 방식으로 상영된다. 반면 난 마돌연작 중 가장 마지막에 관람이 가능한 <[JW J 후기] 난 마돌 다큐멘터리 시리즈 6분만에 보기>(이하 <난 마돌 후기>)는 개 중 서사 진행을 따라가기가 가장 수월한데, 이 영상을 통하여 김효재는 이전의 난 마돌연작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던 특정한 사실들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설하고, 그를 통하여 이전의 두 작업을 포괄하며 마무리 짓는 역할을 부여한다. ‘난 마돌연작의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각각의 영상이 각자 다른 형식으로 상영되며 서로 다른 형식적 벡터에 근거한다는 점인데, 김효재는 이 벡터를 <난 마돌: >-<난 마돌: >-<난 마돌 후기>로 이어지는 선형적 관계 안에 배치하며 서로 다른 작업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보증하고 보충할 수 있게끔 늘어놓는다. 이 중에서도 <난 마돌 후기>의 쓸모는 중요한데, 유튜브 리뷰 영상의 통상적인 형식을 본따 가져온 <난 마돌 후기>는 점차 한국인의 외재화된 정신으로 변모하고 있는 유튜브 플랫폼의 한 조각으로 변모하여 난 마돌연작을 새로운 층위에서 조망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어 유튜브 플랫폼은 가짜 뉴스와 연예인 가십 등 검증되지 않은 저해상도의 정보를 자막의 형태로 정리한 뒤 무의미한 배경음악, 그리고 짤방및 스크린 샷 이미지 등과 함께 송출하는 특징적 형태의 영상 정보가 마구 나도는, 이상한 포털로 변모하는 중인데, <난 마돌 후기>는 이 플랫폼의 일부로 숨어듦으로 이렇게 다중 생산되는 영상 형태의 허구적 리얼리티 혹은 리얼리티적 허구를 모방하고, ‘난 마돌연작에 지시성을 가설한다.

난 마돌연작을 통하여, 작가는 난 마돌이 물리적 형태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서사 내에서 난 마돌이라는 가상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미래라는 과거의 동력을 잃어버린 미술이 (근과거에 의하여 침범되는) 오늘날 의미를 갖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호버링에서 작가는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를 유물이라 명명하고 파편으로 잘라 소환해내는데, ‘유물연작으로 표기된 이 작업들은 증명사진 크기의 작은 사진이 되어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다. 이 모양은 우습기도 괴상하기도 불쌍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크기가 조촐하고 작아 진공관에 담겨있지 않는다면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한다. <난 마돌 후기>에서, 3자 시점의 화자는 난 마돌시리즈의 매력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꼽는다. 특정 이미지 및 영상을 인용하는 유튜브 영상은 보통 저작권 침해 사례로 판단되어 금방 삭제되곤 하지만, ‘난 마돌시리즈는 어떤 이유에선지 끝까지 유튜브에 잔존하고 있는 일이 신기하다는 것이다. 정보가 수없이 업로드 되었다가 수없이 사라지곤 하는 디지털 생태계의 임시적인 성격은 거기-있음이라는 현실의 근원적 속성을 매력적인 것으로 전치한다. 어쩌면 난 마돌연작이 꾸준히 거기-있을수 있는 이유는, ‘난 마돌이 오늘날 가능할 수 있는 오늘의 형태를 역방향에서부터 되짚어나가 재구축하고자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결과물로서 구축된 오늘은 이전의 오늘이 아닐 테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예외적 현상으로 표시되고 작가가 시뮬레이션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이 사라지지 않음은 관람의 중요한 동인으로 위치한다.

 

류수연의 작업은 손 드로잉에서 리소 프린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가 느슨하게 나열되어 있는데, 레이어링을 전시 구성의 방법론으로 채택함에 따라 공간 곳곳으로 산개하는 여타 작업들과 비하자면 류수연의 작업은 비교적 덩어리져있고, 선형적으로 읽힌다. 이처럼 전시의 큰 맥락이 되는 레이어링이 서로 다른 값을 지니는 층위를 합치고 포개는 방법론일 뿐 아니라 합치고 포개어 연결시키는 방법이라고 볼 때 류수연의 작업은 그 연결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편으로, 관계를 도형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작업은 주제를 소실점 삼아 다양한 인상으로 벌어지되 서로 비가시적인 연관 관계를 형성하며 겹쳐진다. 항시 혼란한 호버링의 전시장에서 한 가지 주제를 이끌어가는 것은 또한 독립적인 채널을 형성하고 운용하는 일이 되지만, 1층 전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매스가 있는 작업은 다른 입체들과 겹쳐지게 되어있으므로; 류수연의 작업 또한 겹침을 회피할 수는 없다. 이를테면 1층에 위치한 류수연의 작업 중 <첫인상>은 천장에서 시작해 바닥까지 늘어진 긴 천 위에 원 도형을 반복하여 프린트한 작업인데, <첫인상>이 구석을 장악하며 뒤편을 가려낼 때 그것은 김동용이 설치한 작은 앰프를 효과적으로 숨기는 역할을 하면서 전시 디스플레이 상에서의 또 다른 겹침을 형성한다. 이 작은 앰프는 참여 작가 김동용의 <Sender : 4th floor>(이하 <Sender>), 이 작업은 4층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신되는 소리를 1층의 전시 공간으로 송신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처럼 <Sender>를 통하여 김동용은 레이어링이라는 방법론에 가장 적극적으로 조응하는 작업을 선보이는데, 김동용은 1층과 4층을 아우르며, ‘레이어링이라는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다는 - 어딘지 엔지니어적인 시점을 선보이면서 호버링의 구석구석을 소리로서 점유하고 반응한다.

 

김동용이 사운드를 형체 없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스피커를 숨긴다면, 서민우는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에서 하얗게 칠한 낮은 좌대 위에 스피커를 올리고, 미술 전시 공간 내의 하나의 입체로서 부각하여 소리가 근거하는 레디메이드 몸체를 노출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1층에 위치한 김동용의 <Sender>가 그 몸체만큼이나 작은 볼륨으로 조건적 청취 환경을 조성한다면,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1층 공간 전면에 나서서 일종의 배경음악처럼 행세한다. 서민우의 <Sound Sculpture Practice / bajawoo remix>는 제목에서 엿보이듯 하나의 리믹스, 작가가 리믹스의 대상으로 정한 원본은 참여 작가 정완호가 언젠가 진행했던 퍼포먼스의 기록 영상이다. 이 퍼포먼스는 호버링에서 관람할 수 없고, 다만 퍼포먼스에서 사용된 작가의 조각만이 1층 공간 중심에 군데군데 놓이는데, 근원을 잃어버린 파편으로서 정완호의 세 가지 조각은 서민우가 전시한 저음 지향의 노이즈 사운드와 얽혀 다소 공허한 모습으로 전시된다.

보이지 않는 층위를 전제하고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에 위치하도록 작업을 제시하는 일은, 작업의 진정한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도록 관람자의 경험을 제한하여 당장의 판단을 유보하는 블랙박스를 가설하는 일처럼 보인다. 여기서 스스로의 과거는 전시를 위한 발판이 되고, 협업은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알리바이가 된다. 호버링에서 정완호의 작업은 (이제는 익숙해진) 비기념비적 형태를 나타내며 급격하게 낡아 보이는데, 어쩌면 이것은 이처럼 당장의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임시성을 작업의 주요한 주제로 삼고 맥락화하는 방법론 자체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미술이 담론적 장소성개념을 통하여 합의했던 이해, 지금 눈앞에 현존하는 물체가 가시적이고 또한 비가시적인 여러 층위를 지시하는 물질 이상의 개념적 혹은 담론적 벡터라는 이해가 사라지고, 또 작업의 보이지 않는 과거와 층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고자 준비된 비평적 관객성 또한 끝을 맞았으므로, 작업은 이제 무언가 흥미로운 전사前事를 담지한 가상의 구조물이 아니라 미적 물체 그 자체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호버링에서 정완호의 파편이 나타내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런 종류의 성찰일 것이다.

 

호버링4층은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때문에 4층은 한 사람의 작가가 작업을 집약하여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그런 만큼, 1층 전반의 공간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 작업의 양상에 비하면 4층의 광경은 보다 선형적 관람이 가능하도록 연출되어있다. 류수연과 전예진은 이런 공간적 조건을 강하게 활용하는데, 4층에서 그들의 작업은 보다 내재적으로 레이어링 된다. 요컨대 전예진은 전시된 영상 <꺾인 손가락>을 재료 삼아, 영상에서 크롭한 스틸컷을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끌리도록 내려오는 출력물로 변주하고, 또 그 스틸컷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에 표면으로 덮여 공간적 배경에 직관적으로 조응하는 이미지-오브제의 형태를 빌어 장식적 효과를 수행하기도 한다.

 

그런 한 편 4층에서도 사운드는 공간을 포섭하고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4층 천장 곳곳에 숨겨진 김동용의 작업은 ‘Hovering공중 정지라는, 전시의 주제 이미지를 무언가 반동을 받아 튕겨 나오는 듯한, 스프링 혹은 트램폴린적 소리-질감을 구현하며 비평한다. 4분 간격의 차이를 두고 여기저기서 튕기듯 들리는 김동용의 <Receiver> 연작은 1층을 (청각 차원에서) 지배하는 서민우의 작업에 대응하는 4층의 배경음악으로, 1층에 설치된 서민우의 작업이 앰비언트-지향의 저음을 구현하며 비교적 넓게 트인 공간을 메워낸다면, 김동용의 <Receiver>는 분할된 4층의 이곳저곳을 누비면서 마치 유령처럼 뜬금없는 타이밍에 놀래주듯 등장하여 전시 관람에 재미를 준다. 호버링에서, 거의 용역 혹은 사이드 킥과 비슷한 김동용의 보조적인 쓸모는 무척 두드러지는데, 작가가 유령 시점의 자유도를 점차 확보한다거나 공간 내의 그리드를 새롭게 구획하거나 허물어 나간다는 둥 비유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전시의 목적을 1차원적인 해석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구현해낼 때, 작업은 직해주의적literalism 성격을 띄면서 유머러스하게 읽힌다.

 

호버링은 많은 작업이 산개하듯 펼쳐지는 전시고 앞뒤가 맞거나 선형적으로 정렬되는 것과는 맞지 않는 전시다. 참여한 작가 수에 비해 전시된 작업의 수도 많을 뿐더러, 1층과 4층이라는 공간의 구분은 전시를 전체적으로 훑어 인상을 형성해내는 것을 막아서기도 한다. 게다가 레이어링이라는 방법론을 통하여 전시가 연출되므로, 전시를 마주하는 관람자의 경험 또한 각자 다를 수 있다. 요컨대 누군가 전시장에 입장해 입장료를 지불하고 작업을 볼 때, 처음 마주하는 작업은 순서상 1번이라 명기된 오연진의 작업일 수도 있고 1층 공간 중간 지점을 점유하고 있는 정완호의 작업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는 가장 눈에 띄는 크기로 늘어진 류수연의 <첫인상>을 전시의 첫인상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호버링은 많은 입구와 다양한 샛길로 연결된 전시지만, 이 전시는 하나의 출구로 수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리고 그 출구는 아마 4층의 가장 안쪽, 서민우와 김동용, 김효재와 지호인의 작업이 걸린 방이 될 것이다.

 

이 방에 입장한 관객은 아마도 가장 먼저 벽에 걸린 지호인의 <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6><이름 없는 체리와 페인팅 00>을 관람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체리 연작을 관람한 관객은 일단 볼륨이 높은 서민우의 작업과 가까이 있어 크게 들리는 김동용의 작업을 뒤로 한 채 김효재의 <난 마돌: >를 관람하게 될 텐데, <난 마돌: >는 여러 기기에 담겨 전시되고 있지만 해당 영상을 시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어폰을 착용해야만 한다. 허나 이어폰을 끼고 <난 마돌: >를 관람할 때 관객은 집중이 쉽지 않은데, 이것은 <난 마돌: >가 이런 저런 영상 정보와 그래픽 파일을 화면 위로 복잡하게 레이어링하며 비선형적 전개를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곁에 위치한 스피커를 통하여 서민우의 작업이 <난 마돌: >가 담긴 기기가 제공하는 최대 음량 이상의 볼륨을 구현하며 청취 조건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아가 이 방에서 <난 마돌: >를 관람하는 일은 순전히 생리적으로 꽤 고통스러운 경험인데, 두 겹의 소리가 높은 볼륨으로 청각을 자극할 뿐 아니라 3분 간격으로 반복되는 김동용의 <Receiver: Over the window>가 예의 트램폴린-사운드를 한 겹 더 겹쳐내므로, 관객은 청각을 중심으로 과부하되는 감각 경험을 하게 되거나 혹은 단순히 귀가 아프게 된다. 이렇게, 호버링의 마침표 역할을 하는 이 방에서, 세 명의 작가들은 모의하듯 협업하며 전시를 어떻게든 잊기 힘든 경험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듯이 관람자의 시청각을 집요하고 세게 자극해낸다. 이토록 심란한 관람을 막 마친 관객이 방 건너편으로 넘어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관객은 아마도 지호인의 <코발트 터쿼즈 캔버스와 캔버스색 페인팅>을 마주치게 될 텐데, 폐허-전시 공간의 퀴퀴한 구석에 매달린 이 명도 높은 예쁜 색채는 관객이 방금 겪은 힘겨운 경험을 진정시켜주고, 나아가 전시 전반에 걸친 어떤 부정적 정서들, 이를테면 유령 시점의 우울함, 청년이 청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무력감 같은 것을 완화하거나, 혹은 내려다본다.

 

다시 호버링의 전제를 살펴보자. 호버링이 염두에 두는 미학적 전략으로서의 폐허가 신생공간이라면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폐허는 여전히 콘크리트가 다 드러낸 2/W라는 공간이다. 나아가 호버링의 서문에서, 기획을 맡은 권시우는 2/W의 과거, 커먼센터라는 전사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미술 공간 커먼센터는 서울에 산개한 여러 작은 전시 공간들이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하나의 미학적 경향으로 호명되기 직전의 시점에 처음 문을 열었는데, 이때 커먼센터는 통인동의 시청각과 함께 젊은 운영자가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대안-대안 공간처럼 비춰졌고, 실제로 커먼센터에서는 어떤 종류의 젊음을 총체화하여 제시하려는 경향의 전시가 다수 운영되기도 했다. 그것은 젊은 층의 회화 작가들을 69명 끌어 모아 전시를 꾸민 개관전 오늘의 살롱이나 스트레이트 포토를 위주로 작업하는 사진작가들이 참여한 스트레이트 - 한국의 사진가 19, 그리고 기대감소의 시대를 맞은 1인 가구의 생존법을 중심 주제 삼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창작자들을 그러모은 혼자 사는 법, 나아가 단체전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201610, 트위터를 통하여 전개된 미술계 내 성폭력 해쉬태그 운동을 통하여 커먼센터의 디렉터를 맡았던 함영준의 권력형 성범죄가 폭로되며, 그가 그간 관여했던 공간을 통하여 전개해온 활동 또한 폐기 처분되었다. 그렇다면, 호버링이 공간적, 또한 시간적 배경으로써 커먼센터를 지지대 삼는다고 말했을 때, 그건 어떤 목표를 노리는 것일까? 이미 무덤이 된 커먼센터를 공간의 전사로서 인용했을 때, 호버링이 설정한 과거의 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디렉터 함영준의 관여와는 비교적 거리가 먼 커먼센터의 전시 중, 서울에서 젊음을 내세워 새로운 영역을 잠시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시로는 이를테면 청춘과 잉여가 있었다. 유능사(최정윤, 안대웅)가 기획하고 김시습, 박희정, 윤율 리가 협력 기획으로 참여한 청춘과 잉여는 짝을 맞추어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를 제시하는 식으로 과거와 현재 한국의 미술을 각각 관통하는 특정한 주제와 경향을 가시화시키려고 하였다. 이것은 젊음-새로움을 과거와 엮어내어 하나의 역사적 관점을 제시하려는 시도로서, 청춘과 잉여는 기성 작가에게 불충분한 가능성을 젊은 작가로부터 찾고, 또한 젊은 작가에게 불충분한 역사적 알리바이를 기성 작가를 투입함으로 해결한다. 일이 잘 풀렸을 경우, 이것은 아주 매끄럽고 단단한 몸체를 가진 관점으로써 한국 현대 미술이라는 가상의 타임라인에 효과적으로 진입하여 하나의 이상적 새로움을 부각시켰을 것이다. 허나 청춘과 잉여에서 보였던 젊은 작가와 기성 작가의 구도는 당연 완벽할 수 없었고, 짝지어진 작가들은 종종 서로를 견제하고 불화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어쩌면 이런 마찰이야말로 청춘과 잉여가 염두에 둔 효과였을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세대는 합선될 수 없었고 젊음과 새로움이 관계 맺는 구도를 다시금 되살펴 젊음을 역사의 한 축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성립되지 않았다. 어쩌면 호버링이 겨냥하는 것은 이런 구도에 대한 필요성 자체로, 오늘과 젊음은 너무나도 많이 말해지고 가능할 듯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당사자의 시점을 취해, 그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가정하여보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이가 주체로 나서 스스로의 위치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현명함일 테다.

 

호버링이 연출하는 레이어링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인식한 채 전시를 관람할 때, 개별 작업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리적으로 작업이 뒤섞여있을뿐더러, 전시의 주제가 작업의 내적 논리와 전개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기 때문에 작업은 전시 자체와 여러 차원에서 합선되고 이 합선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때조차 전시와의 연관 관계 안에서 파악된다. 이에 따라 호버링은 작업을 중심으로 꼼꼼이 보더라도 하나의 상황 혹은 풍경으로 기억에 남는 전시가 된다. ‘현자 타임을 보내는 중에 있는 현명한 젊음의 전시이자 하나의 잘 연출된 상황으로서 호버링, 폐허를 보기 지루하지 않도록 메우고자 노심초사하는 웰메이드전시의 업적을 성취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모양은 어딘가 무척이나 따분하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 “유령 시점으로 끝맺음 될 수밖에 없는 슬기로움은, 호버링이 복잡한 레이어링을 통해 도달한 곳이 다름 아닌 웰메이드전시의 풍경이듯, 현재로선 최선의 방법이라 하더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인 방법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생각해보자. 젊은이가 유령이 되는 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효율적일까? 사람은 항상 죽지만, 늙은이에 비하여 젊은이는 어떤 통계를 통하여 보아도 항상 현저하게 덜 죽는다.4) 젊은이가 유령이 되어 도달한 저승에서 그는 아마도 수많은 늙은이들이 일종의 선배로서 적층된 광경을 보고 질려버릴 것이다. 자유로울 줄 알았던 유령 세상에서도 젊은이는 소수자로 남는 셈이고, 제약 안에서 자유롭고자 하더라도 새로운 제약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황을 뒤바꿔, 젊은이가 제약의 건설자가 된다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청춘과 잉여가 이런 저런 사정을 통해 단행본 메타 유니버스와 느슨하게 연결되면서 새로운 담론의 가능성을 엿보였듯이, 호버링이 선보인 것들이 이러저러하게 이런 저런 것들과 연결되어 이렇게 저렇게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양이 될까? 말이 좋아 유령이지 실상은 하위 주체적 정체성에 가까운 가상의 시점은 폐기되어야 하고, 미완성의 우발적 전시로서 호버링은 폐허를 벗어나야만 한다. 말하자면, 호버링에 복잡하게 걸쳐진 여러 겹의 과거와 상황은 동시에 호버링적 상황이 벗어나야만 하는 일련의 목록이다. 호버링에게는 그런 제약을 전시의 재료로 동원함으로써 구체적으로 가시화한 성과가 있고, 이제 이것은 다른 모습과 형태의 여러 프로젝트들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Lauren Cornell, New Age Thinking, http://mediaspace.newmuseum.org/ytjpressmaterials/PDFS/WHAT_THE_CURATOR_ARE_SAYING/03_Cornell_Essay.pdf

2) 권시우, 「《호버링Hovering전시 서문, http://www.90apt.com/hovering.html

3) 권시우, 공간 인터페이스, ‘압축과 팽창과 김동희의 사례, 계간 시청각, 1(겨울, 2017), 83.

4) 통계청의 2016년 사망원인통계 보도자료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 수 구성비 중 0-39세의 연령이 차지하는 비율은 3.6%에 지나지 않는다. 자세한 사항은 통계청 2016년 사망원인통계 보도자료참조.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6/2/index.board?bmode=read&bSeq=&aSeq=363268&pageNo=1&rowNum=10&navCount=10&currPg=&sTarget=title&sTxt=

Posted by jipdanoc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