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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의 도입부를 제시하기 위한 몇 가지의 사례들


권시우


“기믹은 죽었다.” 김효재는 OS에서의 개인전 《디폴트Default》 이후, 앞선 문장을 작업 내외에서 거듭 주지한다. 이때의 ‘기믹’이란 서브컬처에서 파생된 용어로, 대개 특정한 캐릭터에게 부과된 인위적인 정체성을 의미한다. 즉 해당 캐릭터는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기보다, 작중에서 필요로 하는 어떤 클리셰로 제시된다.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클리셰에 섣불리 (과)몰입하지 않으며, 단지 관객/소비자와 (창작자가 구현한) 캐릭터 간의 합의된 관계를 토대로 ‘기믹’을 유희적으로 소비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철저한 메소드와는 거리가 먼 유희의 방식은,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한 지금의 상황에 충분히 부합한다. 이를테면 사용자는 자신과 연계된 가상의 계정들을 일상적으로 운영하지만, 그것들은 일종의 ‘기믹’에 불과하며, 사용자 본연의 자아를 온전히 재현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기믹’은 사용자와 가상 사이의 일정한 거리감을 전제한 채, 양자의 관계를 적절하게 중재한다. 혹은 ‘기믹’에 의지해 구현된 의사-캐릭터는 언제나 사용자라는 상위의 주체에 종속된 채, 그/그녀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반영하면서, 소위 계정 플레이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기믹은 죽었다.”로 서두를 뗀 작가의 세계관 내에서, 그러한 안정적인 상태는 점차 와해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SSUL〉(2019)의 화자인 김나라가 직접 토로하는 소위 ‘하라주쿠 썰’은 “자신의 이미지가 얼마든지 누군가에 의해 남용되어 데이터 차원에서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각주:1]하면서, ‘기믹’을 관리/통제하는 사용자-주체의 권한이 효력을 다했음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는 섣부른 비관주의로 귀결되지 않는다.”[각주:2] 오히려 “기믹은 죽었다.”라는 선언은, 그것을 기점 삼아 사용자라는 모델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하기를 바란다. 즉 작중의 김나라에게 투사된 각종 장식적인 효과들은 그녀의 콘텐츠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면서, 해당 콘텐츠가 이미지로 남용될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만약 작가가 고안해낸 ‘디폴트’라는 용어가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계”에 최적화한 사용자-주체의 모델을 의미한다면, 이때의 주체는 선천적으로 부여된 단일한 주어의 형식이 아니라, 사용자가 자신이 수집한 일련의 데이터들을 토대로 연출한 결과에 가깝다. 그러나 이때의 사용자는 ‘디폴트’에 점차 (과)몰입하기 시작한다. 즉 이제 소위 리얼리티는 가상 차원의 현존에 의해 좌우되며, 결국 사용자가 리얼리티를 거듭 자각하기 위해선, 자신의 ‘디폴트’를 보다 효과적으로 연출하는 데 천착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는 소셜 미디어 상에서 우파들이 재/생산하는 극단적인 콘텐츠들의 단초이기도 하지만, 그와 별개로 김효재는 《디폴트Default》의 전반에 등장하는 ‘Z’라는 인물을 통해, 사용자의 정체성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Z’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세대를 대변하는 한편, 3D랜더링된 아기의 형상을 한 채, 김나라라는 콘텐츠를 노골적으로 선망한다. 그에 부응하듯 <Z>(2019)에서 ‘Z’는 오디오 비주얼의 현란한 전개에 맞춰 춤을 추면서, 자신을 (현실과 무관한) 콘텐츠로 피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관객은 ‘Z’의 정체를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다. 주지하듯 ‘Z’는 “미래의 세대”를 대변한다고 추측될 뿐,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이 ‘Z’와 어떤 식으로든 상호 작용하는 순간은, 철저히 ‘디폴트’의 맥락에서 ‘Z’라는 콘텐츠를 소비할 때뿐이다. <SSUL>에서 김나라가 자신의 이미지가 남용됐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와중에 일시적인 위기감을 겪었던 것과 달리, ‘Z’에게는 쉽사리 포기할 수 없는 원본, 즉 “사용자 본연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의 리얼리티를 배가하는 행위에만 몰두할 수 있다. 반면 ‘기믹’은 언제나 그것을 관리/통제하는 사용자라는 상위의 주체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위계적이다. 앞서 언급한 “일시적인 위기감”은 단순히 한 개인에게 부과된 정체성의 혼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주체의 권한, 무엇보다 그것이 구축한 위계의 구조가 일순 와해되면서 발생한다. 기존의 사용자는 ‘기믹’을 관리/통제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에 우선권을 부여하지만, 주지하듯 ‘디폴트’는 오히려 현실을 일종의 데이터 소비재로 활용하면서, 사용자의 좌표를 재설정한다.


새로운 좌표 속에서 리얼리티라는 개념은 점차 모호해진다. 이를테면 “사용자 본연의 자아”가 부재하는 대신, 사용자는 “가상 차원의 현존”을 자각하기 위해, 콘텐츠를 위시한 모종의 정체성을 연출한다. 그러나 “가상 차원의 현존”이란 특정한 좌표에 정주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콘텐츠가 데이터 차원에서 계속 유통되는 상태에 의해 보장된다. 달리 말해 ‘기믹’ 이후의 리얼리티는 사용자가 일종의 교환가치를 부여 받은 채, 가상의 시장을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가까스로 체감될 뿐, 그것의 총체적인 의미는 끊임없이 유보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디폴트’에 근접한 사용자일수록, 그/그녀의 이미지는 일종의 오픈소스로 기능하면서, 여타 사용자들을 현혹하기 위한 장식성을 과시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장식성은 그저 의미론적 내용에만 천착하는 독해의 방식이 아닌, 타인의 직관에 호소할 수 있는 각종 감각적인 요소들을 통해 구현된다. 그리고 이는 <Z>라는 작업이 종내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으로 귀결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은 결코 장식성에만 천착하는 매체가 아니지만, 그것이 구현하는 사운드와 이미지의 협연은 기존의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들에 비해, 보다 다채로운 감각을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난 2020년 7월 9일에 아르코 미술관에서 개막한 단체전 《Follow, Flow, Feed 내가 사는 피드》의 부대 행사로 진행된 김효재의 퍼포먼스 <태교 : 도래할 Z에게>(2020)도 마찬가지로 오디오 비주얼 형식을 준수한다. 즉 작가는 ‘Z’라는 인물을 단순히 픽션 차원에서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고안해낸 ‘디폴트’에 근접하는 사용자를 자처하면서, 점차 감각의 층위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물론 해당 작업을 주도하는 영상의 경우, 실제로 작가의 부친이 꾸었다는 태몽에서 유래한 일련의 서사적인 자재들을 임의적으로 재구성한 결과지만, (작가 본인이 믹스한) 테크노 음악의 전개에 조응하는 현란한 비주얼은, 자연스레 ‘디폴트’가 과시하는 장식성을 연상하게끔 한다. 결과적으로 해당 작업의 (사운드와 이미지의 협연을 통해 구현된) 오디오 비주얼은 일단 의사-콘텐츠로서 관객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자극하면서, 은연중에 ‘디폴트’의 전략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주지하듯 여전히 잔존하는 서사는 더 이상 작업 전반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작중에서 유동적으로 조절/조율되는 각종 감각적인 요소들의 전개 속에서 의도적으로 모호해진다.


 <태교 : 도래할 Z에게>, 퍼포먼스, 2020     


반면 퍼포머로 참여한 작가가 반복해서 외치는 일련의 대사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Z’라는 인물에 대한 일종의 강력한 메타포로 작용한다. 즉 《디폴트Default》에서의 ‘Z’가 “가상 차원의 현존”을 체화한 존재로서 줄곧 익명을 자처했던 것과 달리, 이제 작가는 ‘Z’를 특정한 맥락 속에서 호명한다. 특히나 “Z, 괴물이 되거라.”라는 구절에서 언급된 “괴물”은 도나 해러웨이에 대한 인용으로, 서구적 자아의 구조에서 비롯한 적대적 이원론을 전복할 수 있는 경계선상의 존재를 암시한다. 물론 이는 개념적으로 더 이상 심화되지는 않지만, 그와 별개로 본래 ‘Z’가 고수하던 타자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이를테면 ‘Z’는 자신이 재/생산하는 콘텐츠의 이면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언제나 불가해한 타자로 귀결됐지만, 작가에 의해 “괴물”로 호명된 순간, ‘Z’가 점유하고 있는 타자의 위치는 결국 (무수한 컨텍스트를 함의하는) 전략적인 모호함의 상태로 전유된다. 달리 말해 ‘Z’는 “괴물”로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본 작업의 제목이 지시하는 태교는 그러한 가설을 축원하기 위한 방편인 동시에, 무엇보다 감각의 층위를 활성화하는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매체를 유도하면서, ‘Z’를 둘러싼 정황을 다시금 ‘디폴트’의 맥락으로 수렴한다.


물론 “괴물”의 출처는 명백하지만, 작가는 해당 개념의 총체적인 의미를 참조한다기보다, 단지 그것을 모티프 삼아, ‘디폴트’를 체현하는 ‘Z’를 “경계선상의 존재”로 합리화한다. 결국 ‘Z’가 “괴물”로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설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주지하듯 본 작업은 서사 차원에서 본격화되지 않은 일종의 도입부에 가까우며, ‘디폴트’와 대응되는 “괴물”이라는 개념은 아직 미결의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개는 김효재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난 마돌> 시리즈는 ‘난 마돌’이라는 가상의 유물을 경유해, 데이터베이스로 귀결된 세계를 나름대로 논증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상편과 하편으로 구성된 본 작업은 ‘난 마돌’로 대변되는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에 대한 유사한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마돌’은 작가가 웹상에서 임의대로 선별한 각종 이미지들을 재료 삼아 스크린 인터페이스를 유희하는 과정에 최소한의 얼개를 부여하기 위한 서사적인 단초에 불과하다. 이처럼 작가가 작업 차원에서 고안해낸 일련의 가설들은 대체로 작가 본인이 그 당시에 이입했던 사용자 모델을 반영하는 시/청각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계기로 작용한다. 그것들을 발단 삼은 작업의 서사는 모호할 수 밖에 없지만, 바로 그 모호한 서사야말로 마침내 ‘디폴트’로 귀결되는 사용자의 징후다.


물론 일련의 작업들은 대체로 현란한 비주얼을 과시하는 동시에, 화자가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은연중에 이야기를 구상하려고 시도한다. 이를테면 이한범은 <난 마돌> 시리즈에 대해 부연하면서, “더 엄밀히 말하자면 저작권이 만료되거나 곧 만료될 이미지라는 특정한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조건으로 인터넷 인터페이스에서 필터링된 결과로서의 이미지의 집합이 서사에 소요되기 위해서는 다른 장치를 요구한다. 여기서 이미지의 연쇄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보이게끔 지탱하는 것이 바로 ‘말’이다.”라고 언급한다.[각주:3] 결국 작가는 여전히 서사의 관성을 의식하면서, “이미지의 집합”만이 남겨진 현재의 조건에 나름대로 대처한 셈인데, 결과적으로 이미지와 ‘말’은 온전히 절충되지 못한 채, 다소 불안정한 상태로 귀결된다. 즉 이미지는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한 상황에서 사용자의 유력한 자기 표현 수단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집합은 무작위한 데이터베이스를 형성할 뿐, 결코 하나의 서사로 완결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은 “이미지의 집합”을 서사 차원에서 조절/조율하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이미지와는 무관한 별개의 트랙으로 진행된다. 그렇다면 데이터베이스에 부합하는 서사의 형식은 무엇인가? 이는 김효재를 포함한 동시대 무빙 이미지 작가들이 맞닥뜨리는 고질적인 문제다. 그러나 주지하듯 작가는 그에 대한 대답을 유보한 채, <태교 : 도래할 Z에게>를 기점 삼아, 자신의 방법론을 오디오 비주얼로 선회한다.       


이제 “모호한 서사”는 이미지와 ‘말’이 서로 대치되는 과정에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결과가 아니라, 오디오 비주얼의 시/청각적인 장치들을 도구 삼아 기존의 서사를 재편함으로써 발생한다. 주지하듯 <태교 : 도래할 Z에게>에서 작가는 태몽을 해설하는 대신, 그로부터 유래한 일련의 서사적인 자재들을 이미지로 환원한 뒤, (이미지에 선행하는) 사운드 작업의 전개에 부합하게끔 제시한다. 즉 한때 ‘말’이 행사했던 주도권은 사운드에게 이양됐으며, “이미지의 집합”은 굳이 서사로 합리화되는 대신, 사운드와 공유하는 감각의 층위 속에서 유동적으로 재구성되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은 ‘디폴트’에 대응되는 “괴물”이라는 개념을 독해하기에 앞서, 작가가 연출한 오디오 비주얼의 무대에 일순 압도당한 채, ‘Z’가 “괴물”이 되기를 축원하는 광경을 기꺼이 감각 차원에서 수용한다. 이는 일종의 제의처럼 보이는데, 또 다른 퍼포머인 양진경은 무대의 중앙에서 사운드와 조응하는 창작 안무를 구사하면서, 그러한 분위기를 배가한다. 결국 ‘Z’는 “괴물”이 되기 위한 도입부에서, 자신의 존재를 설득하기 위한 화자의 역할을 도맡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무리없이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를테면 “괴물”이라는 강력한 메타포는 (오디오 비주얼을 발단 삼아) 활성화시킨 감각의 채널을 경유해, 그와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전파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본 작업이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서 실시간으로 중계됐다는 점이다. 이는 분명 코로나 팬대믹의 상황을 의식한 선택이지만, 사실 팬대믹 이전에도 버추얼 미술관을 비롯해 가상 환경에서 미술을 구현하고자 하는 시도는 빈번했다. 그러나 본 작업은 단순히 현장의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거나, 실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디폴트Default》에서 중요한 화자로 등장했던 김나라가 무대를 배회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장면을 송출한다. 즉 김나라는 본인을 패션 인플루언서로 정체화한 가상의 계정에서 벗어나, 마침내 현실에 위치한 실제 자신의 모습을 관객에게 드러냈으며, 이로써 자신이 이미지로 남용될 가능성을 유보한다. 달리 말해 이제 ‘디폴트’는 “사용자 본연의 자아”를 침해당하는 과정에서 막연하게 암시되는 대신, ‘기믹’ 이후의 리얼리티를 체화한 인물인 ‘Z’의 정체성으로 기능한다. ‘Z’는 미래에서 현재로 도착하는 중이고, 점차 명확해지는 미래는 더 이상 김나라와 같은 선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본 작업의 중계 영상은 ‘Z’가 괴물이 되기 위한 도입부를 김나라가 목격하고 있는 과정이다. 실제로 ‘Z’로 대변되는 특정한 세대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다. 그 이전 세대의 관점에서 ‘그들’은 아직 낯선 존재지만, 그와 별개로 ‘그들’의 존재감은 갈수록 명확해지고 있다.


반면 작가는 여전히 ‘Z’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인물로 상정하는데, 이는 밀레니얼 세대에 속하는 작가의 관점을 일정 부분 반영한다. 물론 Z는 더 이상 “불가해한 타자”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네이티브의 당사자가 아닌) 작가에 의해 “괴물”로 호명됐다는 점에서, 얼마간 대상화의 시선에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실제 Z세대가 “괴물”로 거듭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투명하며,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새삼스럽지만, 결국 모든 것은 작가의 가설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본 작업은 특정한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일종의 개념적인 프레임을 지향하지 않으며, 다만 ‘디폴트’에 근접한 사용자가 구사하는 감각 차원의 조형 언어를 탐색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용자 정체성을 급진적으로 재편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설사 ‘Z’가 한때 자신이 대변했던 특정한 세대와 점차 괴리된다고 하더라도, ‘Z’를 위한 축원은 충분히 지속될 수 있다. 달리 말해 ‘Z’는 실제 Z세대의 단순한 표본이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사용자라는 모델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로써 ‘Z’에게 부여된 대상화의 시선은, 그것을 부여한 당사자, 즉 사용자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20년 8월 10일에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온/오프라인 프로젝트 《Ghost Coming 2020 {X-ROOM}》에서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상연된 <태교 : 도래할 Z에게>는 이전 버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구성됐다. 이를테면 본 작업에 참여한 퍼포머는 오로지 작가 본인 뿐이며, 무엇보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에 ‘Z’의 페이스 필터를 적용한 채, 직접 제의에 걸맞는 일련의 동작들을 구사한다. 즉 이제 ‘Z’는 작가에 의해 대상화된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작가 자신에게 투사됨으로써 자연스레 사용자의 분신으로 귀결된다. 물론 ‘Z’가 점유하고 있는 미래의 해상도는 여전히 모호하지만, 그와 별개로 사용자는 아직 “괴물”로 거듭나지 않은 ‘Z’의 과도기적인 상태를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 결국 작중에서 되풀이되는 “Z, 괴물이 되거라.”라는 대사는 (대상화의 시선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언급한 화자의 자기 암시로 기능한다. 뿐만 아니라, ‘Z’의 페이스 필터는 라이브 퍼포먼스 이전에, 작가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오픈소스로 공개됐는데, 이는 모든 사용자가 별다른 제약 없이 ‘Z’를 자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태교 : 도래할 Z에게>, 퍼포먼스, 2020   


또한 작가는 프로젝트의 지침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일민미술관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점유한 채, 본 작업을 예고하는 분할 이미지들을 순차적으로 업로드하면서, 그것들을 인스타그램 그리드 레이아웃에 최적화한 상태로 조합했다. 최종 이미지는 사진 스튜디오 글래머샷과의 협업을 통해 제작했는데, 전면에서 제의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나, 그녀를 둘러싼 중세 풍의 아치형 구조물, 그리고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Z’의 석상과 같은 요소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일종의 신화적인 도상을 의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본 작업이 사용자 자신을 위한 제의를 보다 노골적으로 구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된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중세 풍의 아치형 구조물은 라이브 퍼포먼스에서 상연되는 영상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면서 거듭 주의를 환기시킨다. 무엇보다 해당 영상은 이전 버전을 총 네 개의 막으로 분할해 재구성했으며, 개별 단락은 비록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지만, 태몽에서 유래한 일련의 시각적인 모티프들을 보다 전면에 드러낸다. 이처럼 <태교 : 도래할 Z에게>는 애초에 정합적인 서사의 구조가 부재하므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다. 사실상 일민미술관에서 전개된 작업은 라이브 퍼포먼스,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한 이미지들, ‘Z’의 페이스 필터, 이 모든 형식들을 포괄하고 있다.


<태교 : 도래할 Z에게>, 도상 이미지, 2020 


주지하듯 앞서 나열한 형식들은 인스타그램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여타 사용자들의 이목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킨다. 즉 아르코 미술관에서 진행했던 인스타그램 라이브가 ‘디폴트’의 맥락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난 김나라의 관점을 대변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면, 본 작업은 애초부터 인스타그램에 최적화하게끔 고안됐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은 “팬데믹 시대의 유령”이라는 프로젝트의 컨셉을 거듭 상기할 수 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본 작업을 감상하는 방식은, 대체로 물리적인 환경에 의존했던 기존의 전시 형식에 대한 나름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이 현실의 가치를 폭락시키고 있고, 그에 따라 이제 전시장이라는 플랫폼의 유효성이 상실됐다는 섣부른 결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의 다양성은 어떻게든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을 수용하기 위해, 우리는 전시장을 무작정 격리하는 대신, 전시장과 병행해 소셜 미디어와 같은 가상의 플랫폼을 보다 능동적으로 운영해야만 한다. 실제로 현실의 가치는 폭락하고 있지만, 오로지 가상 차원에서 전개되는 작업만이 잔존할 것이란 예측을 할 만큼 상황이 마냥 극단적이지는 않다.


그러한 맥락에서 ‘디폴트’라는 가설을 다시금 재고했을 때, 이제 리얼리티는 분명 “가상 차원의 현존”에 의해 좌우되지만, 그와 별개로 사용자는 현실을 아직 완전히 망각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Z’와 마찬가지로 ‘디폴트’는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으며,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여전히 그것의 도입부에 머물러 있다. 이를테면 <태교 : 도래할 Z에게>라는 작업이 반복해서 ‘Z’를 축원하는 이유는, 작가가 고안해낸 ‘Z’에 부응하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는 김효재가 전망하듯, ‘디폴트’가 유도하는 사용자 모델로 귀결될 것인가?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섣불리 확언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일련의 작업들은 분명 사용자가 의지할 수 있는 특정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Z’를 발단 삼은 전개에 자연스럽게 편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래가 점차 명확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디폴트’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이제 ‘Z’를 위한 축원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우리에게는 ‘디폴트’의 도입부 이후의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행위의 방식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괴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혹은 “괴물”에 잠재된 무수한 컨텍스트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사용자가 반드시 “괴물”이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김효재의 작업에서 아직까지 그것은 유력한 선택지로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괴물”은 ‘Z’를 경유해 일종의 선언으로 제시됐을 뿐, 어떻게 이후의 작업을 본격적으로 주도할 수 있을지는 다소 묘연해 보인다. 다만 작가가 <태교 : 도래할 Z에게>를 기점으로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매체로 선회하면서, 더 이상 “괴물”의 맥락을 ‘말’로 해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오디오 비주얼의 시/청각적인 장치들이 형성한 모호한 서사의 구도 속에서 갈피를 잃은 채, 오로지 감각을 매개 삼아 작가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디폴트’의 도입부 이후의 상황을 온전히 체감하기 위한 나름의 채비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사용자로서 지향해야하는 새로운 행위의 방식은, 현실을 완전히 망각함으로써 맹목적으로 가상의 우위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이 “감각의 채널”을 활성화하는 과정에서 선취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모든 것이 데이터로 환원되는 세계”에서, 가상과 현실은 분명 감각 차원에서 혼재돼 있으며,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자각해야만, ‘디폴트’와 대응되는 “괴물”이라는 개념 또한 성립할 수 있다.


  1. 권시우, <‘디폴트’ 이후의 사용자-주체가 현존하기 위한 가능 세계>, 김효재의 개인전 《디폴트Default》의 도록, 2019 [본문으로]
  2. 권시우, <‘디폴트’ 이후의 사용자-주체가 현존하기 위한 가능 세계>, 김효재의 개인전 《디폴트Default》의 도록, 2019 [본문으로]
  3. 이한범, <신체 없는 목소리와 공간 없는 이야기>, 《호버링 텍스트》, 2018, 33p [본문으로]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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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비주얼에 대한 가설 (1) – 의사-지지체로 작동하는 이미지

 

권시우

 

오디오 비주얼이란 무엇인가? 오디오 비주얼은 본래 실황으로 진행되는 사운드 작업과 그것의 전개를 임의적으로 시각화하는 영상 작업의 협연을 의미한다. 협연이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 대다수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준수하며, 그런 의미에서 (특정한 작업에 내재된 개념적인 레이어들과 무관하게) 무엇보다 다채로운 감각을 실시간으로 구현한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편의적인 수사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의미는 점차 잊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지난 2016년에 발간된 영상 비평 전문지 <오큘로> 1호의 주제는 “오디오비주얼 리서치,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인데, 정작 해당 잡지에 게재된 글들 대다수는 아티스틱 리서치에 기반한 무빙 이미지 작업들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오큘로> 1호에 참여한 필진들은 무의식 중에 오디오 비주얼과 무빙 이미지를 혼용하고 있다. 혹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오디오비주얼”이란 “리서치”라는 행위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감각”적으로 변환하기 위한 (무빙 이미지를 구성하는) /청각적인 장치를 대변한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단어를 반드시 한 가지 의미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는 그것의 무분별한 용례들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을 결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먼저 상기할 점은 오디오 비주얼은 무빙 이미지와 동일하지 않으며, 단순히 무빙 이미지의 하위 장르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무래도 오디오 비주얼이 무빙 이미지와 자주 혼용되는 이유는, 그것이 말 그대로 오디오와 비주얼의 협업을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듯 일련의 작업들을 주도하는 것은 엄연히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이며, 이때의 ‘이미지’는 무빙 이미지에서와는 달리 일종의 지지체로 작동한다. 지지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한데, 엄연히 말해 그것은 포스트-미디엄post-medium의 문제와 연루된 기술적 지지체와는 변별되는 개념으로서, 오디오 비주얼의 작동 방식의 특정성을 반영한다. 즉 오디오 비주얼이 사운드에 의해 주도된다고 했을 때, 통상의 작업에서 이미지는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청취의 경험만으로 해소할 수 없는 감각의 차원을 벌충하는 역할을 한다. 작중의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설사 그것이 (순수 청각성의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됐을 때조차, /의식적으로 관객의 을 충족시킬 수 있을 만한 일종의 시각적인 대체재를 필요로 하며, 그러한 이해관계에 의해 이미지는 순전히 작업 내에서 서포터Supporter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오디오 비주얼을 독립적인 매체로 상정했을 때, ‘이미지사운드스케이프의 배후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의사-지지체로 작동하지만, 주지하듯 그것은 사운드 작업의 전개를 임의적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스크린을 매개로 장식적인 효과를 구현하기도 한다. 그러한 양가적인 조건은 이미지의 정체를 갈수록 묘연하게 만든다. 즉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는 분명 서포터로 동원되지만, ‘사운드스케이프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것은 사실상 불필요한 장식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사운드와 이미지의 협연은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소위 공연계의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라이브 퍼포먼스 형식으로 상연되는 작업 대다수에서 이미지는 사운드에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반응하거나, 때로는 사운드의 개요와 전혀 무관한 클립들로 구성되곤 한다. 만약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매체가 이미지를 지지체 삼아 작동하는 사운드라는 가설이 허용된다면, ‘이미지는 지지체가 되기 위해 사운드에 내재된 메커니즘을 보다 체계적으로 반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이 실시간으로 구현하는 다채로운 감각은 관객에게 그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유도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제 우리는 감각이라는 유동적인 지층의 이면에서 그것을 가능하게끔 하는 매체적 조건에 대해서 성찰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는 고정 불변의 비/물리적인 지지체가 아니라, 특정한 사운드 작업의 메커니즘을 수용하는 방식에 따라 매번 다르게 지지체로 가시화된다. 이때의 사운드 작업은 작가가 임의대로 취합한 각종 서사적인 모티프와 레퍼런스와 같은 지식을 순수 청각성의 문법으로 구사하면서 나름의 내러티브 구조를 형성한다. 결국 이미지가 지지체로 가시화된다는 것은 이미 청각으로 구현된 내러티브를 토대로 사운드 작업의 방법론을 복기해내고, 그것에 시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결과물이 스크린에 투사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사운드 작업에 대한 시각적인 재현으로 귀결되는 대신, 청취의 경험에서 비롯한 감각의 차원을 (사운드와 조형적으로 매개된) ‘이미지를 통해 재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감각이란 언제나 조형의 산물이며, ‘이미지는 사운드의 전개와 병행하면서 그러한 사실을 거듭 주지한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장식의 위상에서 벗어나, 지지체로서의 역할을 점유한다. 그 결과로서의 오디오 비주얼은 최근 국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과는 확실히 대조된다. 후자의 경우, 관객은 대체로 영상의 문법을 경유해 작업을 이미지로 경험하기보다, 자막이나 내레이션과 같은 텍스트에 기반한 장치를 통해서 서사의 개요를 납득하게 된다.

 

즉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에서 영상 매체의 조형성은 충분히 작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저 관객이 텍스트(혹은 스크립트)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게끔 유도하는 장식적인 삽화를 연출하는 데 그친다. 물론 간혹 파편적인 담화를 통해 작업의 서사를 변칙적으로 운용하려는 일련의 실험들이 존재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제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의 관점에서 텍스트라는 형식은 점차 고루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이미지는 각종 소셜 미디어에서 유력한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부상하면서, 우리에게 텍스트와 무관한 새로운 가독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때의 새로운 가독성이란 결국 이미지를 지각하는 방식과 연루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는 마침내 상징 수단으로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자신이 당면한 이미지그 자체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이미지를 단순히 감각적인 소비재로 환원할 여지가 있지만, 주지하듯 감각이 여전히 조형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무빙 이미지는 자신의 조형성을 감각적인 차원으로 변용함으로써, 충분히 이미지그 자체로 투사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추상 영화abstract film에서의 순수 형태의 지각으로 회귀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무빙 이미지 작업이 의도한 내러티브가 텍스트와 무관한 새로운 가독성에 기반해,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무빙 이미지가 반드시 디지털 네이티브의 감수성을 체화할 필요는 없지만, 최근의 작업들이 텍스트(혹은 스크립트)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정작 이미지를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한다면, 무빙 이미지의 정체성은 갈수록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앞서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가 의사-지지체로 작동한다고 했을 때, 중요한 것은 사운드 작업에 내재된 메커니즘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재고하기 위해, 그에 적합한 이미지의 방법론을 무/의식적으로 활성화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지는 사운드 작업이 순수 청각성의 문법을 통해 구현한 내러티브 구조를 조형적인 차원에서 수렴하고, 종내 그것을 가시화하면서, 라이브 퍼포먼스의 현장을 사운드스케이프에 국한되지 않는 공감각적인 무대로 변환한다. 이때의 내러티브는 텍스트를 매개로 독해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와 이미지가 공유하는 감각이라는 프로토콜을 통해 말 그대로 체험하는 것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때의 체험은 오디오 비주얼에서 통용되는 샘플링과 매시업과 같은 다양한 기술적 관습들에 의해 유동적으로 조절/조율되면서, 고전적인 서사의 형식에서 반복됐던 선형적인 전개를 의도적으로 위반한다.

 

그렇다면 오디오 비주얼은 기존의 서사 의존적인 무빙 이미지 작업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후자는 파편적인 담화에 기반한 실험을 보다 심화하면서 내러티브 구조의 변화를 모색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지와 텍스트가 효과적으로 재매개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묘연해 보인다. 반면 오디오 비주얼이 구현하는 의사-지지체라는 환영은 사운드 작업에 내재된 메커니즘에 의해 이미지의 방법론이 좌우되는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를 매체적 조건을 통해서 합의한다. 이는 지나치게 청각 중심적인 언사로 들리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지에 선행하는 사운드라는 전제는 오디오 비주얼의 본래적 의미를 환기하기 위한 가정일 뿐, 실제로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와 사운드는 조형적으로 매개된 채 서로의 방법론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일종의 폐쇄회로를 형성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의도에 따라 양자 모두가 서포터로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이며, 이를 통해 오디오 비주얼은 마침내 감각이라는 조형적인 산물을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을 지각하면서, 그것의 내러티브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새로운 가독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논의했던 오디오 비주얼은 대체로 라이브 퍼포먼스를 준수하지만, 만약 그것이 무빙 이미지와 상응하는 독립적인 매체라면, 얼마든지 전시의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 혹은 감각에 기반한 새로운 가독성으로 인해 내러티브라는 개념이 급진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제 현대미술은 오디오 비주얼이라는 매체를 충분히 재고해야만 한다. 그러나 최근 국내의 미술계는 일련의 작업들을 전시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이색적인 이벤트 정도로 취급할 뿐, 오디오 비주얼이 무빙 이미지 이후의 새로운 방법론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만약 무빙 이미지라는 형식 내에서 만연한 서사 의존적인 경향이 어떤 식으로든 해소되지 않는다면, ‘이미지는 종내 (기존의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에서처럼) “불필요한 장식으로 전락할 것이다. 반면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는 사운드 작업과 공유하는 내러티브 구조를 토대로 (스크린을 매개로 한) 감각적인 파사드Facade를 조형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과 같은 방식을 구사하면서, 무빙 이미지가 의존하는 스크린이라는 형식을 의도적으로 초과한다. 물론 오디오 비주얼에서 현장성은 중요한 전제이지만, 그와 별개로 오디오 비주얼 형식의 작업은 전시장이라는 플랫폼에서 자신이 의도한 감각의 층위를 보다 체계적으로 기획할 수 있다.

 

결국 의사-지지체라는 개념은 오디오 비주얼에서 이미지의 역할을 재정립하기 위한 임의적인 가설에 가깝다. 여전히 오디오 비주얼을 주도하는 것은 사운드 작업이지만, 그것은 이제 반드시 이미지에 선행하지 않으며, 다만 감각이라는 프로토콜을 통해 이미지와 연계될 뿐이다. 이로써 오디오 비주얼은 단순히 무빙 이미지와 혼용될 뿐인 애매한 단어가 아니라, “지식을 포괄하는 내러티브 구조를 감각의 차원에서 재구성하는 독립적인 매체로 거듭난다. 무엇보다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시/청각적인 장치들은 (현재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무빙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라이브 퍼포먼스의 여부와 무관하게, 오디오 비주얼은 자신에게 할당된 공간을 보다 다채로운 감각으로 점유하고, 그 안에서 전개되는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재/편집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그로 인해 활성화된 공감각적인 무대에서, 관객은 결국 작업 차원에서 잔존하는 서사를 체험하면서 일순 압도당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무의미한 혼란을 유발하기보다, 우리의 새로운 가독성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전시와 공연 사이에서 오디오 비주얼에 대한 실험을 지속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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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관> 코멘터리 - 장식화된 세계에서 장식-되기를 수행하며 비()장식이 되는 '굿즈'의 매체적 전환

 

권시우


취미관 TasteView 趣味官> 전경 (출처 : '취미가 趣味家' 트위터 공식 계정, @tastehouse_info)


올해로 2회 째인 <취미관>은 전시공간인 취미가의 주력 프로그램이다. ‘취미가는 현재 2층 공간을 전시장으로 활용해 일련의 전시들을 진행하고 있지만, 본래는 굿즈를 판매하기 위한 1층의 작은 상점으로 시작된 공간이다.1) 굿즈라는 형식은 (지금은 다소 모호해진) ‘취미가의 정체성을 대변하며, 그런 의미에서 <취미관>취미가의 운영진들의 기획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행사 혹은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성행한 만다라케와 렌탈 케이스의 형식을 참조해 제작한 유리 케이스, 굿즈들을 진열하기 위한 정방형의 좌대와 그것들의 배열에 의해 구획된 다소 이색적인 공간은, 확실히 <취미관>이 기존의 아트 페어와는 달리 관객에게 작업 소비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어떤 특정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기획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때의 특정적인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굿즈와 통상의 미술 시장에서 거래되는 작업과의 차이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하며, 이로써 굿즈는 상품이면서도 상품화의 방식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 특별한specific 대상이 되고, <취미관>은 그것들을 위한 유사 무대로 기능하면서 우리를 (소비자이기 이전에) 전시의 관객으로 호명하고, 또 초대한다.

 

그러나 <취미관>이 지향하는 전시경험은 다소 모호한데, 유리 케이스는 그것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을 일본 서브컬처의 맥락을 가시화하기엔 지나치게 중립적인 공간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때 <굿->에서의 굿즈가 다양한 경험들을 매개함으로써 신생공간의 시기에 돌출된 시간의 특이성을 재현한 데 반해, <취미관>의 배후에는 더 이상 신생공간과 연루된 공동의 경험이 부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굿즈는 더더욱 독립적인 대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제 굿즈는 방법론 차원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맥락을 필요로 하는데, <취미관>굿즈로 인해 발생하는 변수들, 즉 참여 작가들이 굿즈를 해석하는 방식의 다양성에 의존할 뿐, <굿-> 이후에 어떤 새로운 미적 경험을 연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이 결여돼있다. 즉 작업들은 분명 다양하게 재생산되지만, 그것들이 왜 굿즈라는 형식을 경유했는지에 대한 별다른 이유가 없다. 이로써 굿즈는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중립적인 공간 안에 진열된 채 상품의 카테고리로 대상화된다. 취미가라는 기획이 이제 얼마간 익숙해진 굿즈의 외형에 적당히 부합하는 작업을 수주하는 판매 플랫폼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선, 지금보다 능동적으로 작업적인 역량을 과시하며 관객-소비자와의 접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굿즈라는 방법론의 특정성을 재고해야한다. ‘굿즈는 단순히 판매에 용이한 미니어처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얼마간 장식이 될 수밖에 없는) ‘굿즈의 제약을 기꺼이 수렴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작업에 함축된 장식성이 다소 이질적으로 외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번 <취미관>에서 김혜원이 제시한 굿즈들은 작가가 그간 회화를 통해 묘사한 서울의 어떤 골목길이나 지하철 풍경이라거나, 화장실 구석이나 평소에 먹는 음식 등 도시 풍경 안에 포함된 것들2)의 이미지를 토대로 만든 작은 사이즈의 부조 작업들로 구성된다. ‘굿즈를 포함한 김혜원의 작업에서 중요한 전제는 결국 이미지인 셈인데, 이때의 이미지란 대개 작가에 의해 직접 촬영된 스냅snap샷을 의미하며, 그것을 원본 삼은 회화 작업들은 외관상의 특별한 변형을 가하지 않은 채 원본-이미지를 회화적으로 전사轉寫한 것처럼 보인다. 다소 단조롭게 느껴지는 방법론이지만, 그 결과물들이 회화의 일반적인 배치, 즉 수직적인 면에 부합하는 대상화된 위치에서 벗어나, 바닥과 벽면, 그 사이의 다양한 틈새들을 점유하고 있는 풍경(<Under the Circular>)은 마치 (데이터로 존재할 뿐인) 풍경의 스냅샷들이 회화를 매개로 미적 사물이 되어 현실상에 진열된 듯하다. 즉 김혜원은 회화적 효과가 사진의 픽셀값과는 다른 색채, 무엇보다 질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채, 원본-이미지를 굳이 회화로 만듦으로써 그것을 중력의 관계에 포함될 수 있는 물리적인 대상으로 환원하고, 때때로 공간의 구조와 조응할 수 있는 장식으로 스스럼없이 소비한다.


김혜원, <Under the Circular>, 전시 전경, 홍익대학교부속중학교, 2015 (출처 : 황재민(2/W), <Painters by Painters>, 111p)

 

그러나 김혜원이 주어진 공간을 회화-장식으로 점유해나가는 방식에 선행하는 것은, 일상의 풍경을 어떤 식으로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이다. 습관적으로 찍는 스냅샷은 풍경을 발췌해 의 데이터베이스 속에 포함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며, 그 중에 각별한 장면을 선별해 회화로 만드는일은, 그 결과물이 회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수렴함으로써 (단순히 평면상에 전사轉寫된 이미지가 아닌) 미적 사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온전히 작가 자신에게 귀속된 일상의 단면일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 승인된 고유한 소유물인 셈이다. 이는 인스타그램 사용자가 특정한 사진 이미지에 회화적 필터를 추가/삽입하는 것과 같은 가상 차원에서의 선택이 아니라, 어떤 수공예적인 감각에 기반해 사용자의 이미지를 물화시킨 시도이기도 하다. (작가의 손에 의해 구현된 회화적 효과는 회화적 필터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를 둘러싼 일상 풍경은 회화를 매개로 미적 사물을 구현하기 위한 재료들, 이를테면 장식적인 표면들의 총합으로 주어진다. 이는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와 동화된 사용자가 주변을 인식하는 감각과 유사한데, 김혜원은 그러한 감각에 얼마간 편승하는 한편, 원본-이미지의 가상성에 의해 유지되는 거리감을 해소하기 위해 선뜻 회화를 개입시킨다. 결국 작가에게는 회화가 미적 사물이 되는 데서 발생하는 특이성 자체보다, 원본-이미지가 (회화를 매개로) 미적 사물이 됨으로써 자신의 소유의 감각을 확증하고, 그 결과물들을 사적인 컬렉션의 목록에 추가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이번 <취미관>에서 제시한 굿즈연작들, 즉 원본-이미지를 재현한 회화의 프레임을 고스란히 복각한 듯한 일련의 부조 작업들은, 이미지에 촉각성을 더함으로써 장식적인 표면에 대한 소유의 감각을 보다 전면화한다. 그것들은 대개 작은 사이즈로 축약되어 반투명 케이스에 담긴 채 포장돼있으며, 이는 작가가 선별한 이미지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소유 가능한) 사물로 거듭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미적이라는 전제는 공란으로 남는데, 여전히 회화적 효과는 일련의 작업들에 일관되게 적용되지만, 그것은 원본-이미지와 변별되기 위한 어떤 미적인 가치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한갓 사물로 외화한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특이한 장식으로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다. 애초에 회화를 통한 미적 사물-되기란 작가가 일상의 풍경을 소유하기 위한 도구적 장치에 가까웠고, 그로 인해 기존의 회화 작업에 반영된 이미지는 앞선 과정에서 비롯한 잔여로서, 이미 (다소 공허한) 장식으로 존재했다. 달리 말해 회화적 이미지는 일종의 스킨skin에 불과하며, 그것은 얼마든지 작가의 편의에 따라 물리적으로 주조될 수 있는 셈이다. 김혜원은 그 결과물을 반투명 케이스로 포장해 하나의 소품으로 완성함으로써, 본래 작업에 내재돼있던 장식성을 한층 과장해 보인다. 이처럼 김혜원의 회화는 종내 장식적인 사물, 이를테면 미니어처-소품으로 거듭난 채 <취미관>의 유리 케이스 안에 비치되고,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이 체감하고 있는 소유의 감각을 일련의 소비자-관객과 공유하고자 한다.


김혜원, '들고 다닐 수 있는 부조' 시리즈 일부


이처럼 김혜원의 굿즈에서 극대화된 장식성은 기존의 작업에서 구현된 회화적 스킨skin의 배후에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사적 소유라는 범주 내외에서 변화하는 이미지의 현존성을 상기시킨다. 반면 최하늘의 굿즈는 그저 장식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해 보인다. 작가는 <취미관> 이전부터 장식의 문제에 천착했는데, 이를테면 이전의 개인전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는 전시장을 카페와 유사한 무대로 연출하며, 현실에서 무분별하게 재생산되는 대개 원본과 유사한 가짜이자 취향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무작위로 발췌한 장식들의 혼란상을 반영하고, 해당 공간이 과시하는 장식성과 자신의 병풍 연작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현실 내에서의 조각의 위상을 재고했다.3) 이를테면 병풍 연작은 실내에 배치되기 위한 물건으로서의 역할을 자임하지만, 그것들은 대개 작가가 망상 차원에서 랜더링한 이질적인 덩어리들의 집합으로서, (카페를 지향하는) 유사 무대의 카테고리에 수렴되기를 거부한다. 무엇보다 일련의 덩어리들은 대개 절삭된 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단면들을 드러내는데, 이를 통해 유사 무대를 구성하는 장식적인 표면과는 상반된 조각 오브제로서의 질량을 암시한다. 최하늘이 <취미가>에서 제시한 굿즈들은 분명 본 전시가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지만, 장식과 변별될 수 있는 여지를 모색하기보다, 오히려 조각이 장식을 연기하게끔 유도하고, 이를 굉장히 과장된 방식으로 수행하며 여타 굿즈들 사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최하늘,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 산수문화, 2018 (출처 : '산수문화' 공식 웹사이트, http://sansumunhwa.com/choi-haneyl/)

 

최하늘의 굿즈목록을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망가진) 아이폰과 다이슨을 위한 유골함, ‘Chasers Repackage Album’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CD의 모형, 로버트 고버Robert Gober를 패러디한 자신의 다리 일부, 메피스토펠레스의 틴더 프로필, 기타 등등. 그것들 사이에서 조형 차원에서의 일관된 맥락을 유추해내는 일은 무용할뿐더러, 의미론적으로 독해될 만한 여지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알레고리적 대상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각각의 작업들은 (아이폰/다이슨, CD, 로버트 고버,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은) 상징들을 내세워, 자신에게 어떤 의미 혹은 내러티브가 함축돼있다고 넌지시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관객-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한갓 제스처일 뿐이다. 일련의 상징들은 사실 아이폰/다이슨을 추모하는 것과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발생시키기 위해 동원된 가짜에 불과하며, 그러한 맥락에서 설사 로버트 고버와 같은 조각사의 한 챕터를 상기시킨다 하더라도, 해당 굿즈에서 역사적 진정성과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짜 상징들은 개별 작업들을 극화시키는 동시에, ‘굿즈에 의해 연출된 장면 이외에는 내러티브 차원에서의 어떤 지속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일련의 굿즈들은 가짜 상징이 자신의 무용함을 (부조리한 상황 내에서)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장치들이다. 이는 알레고리라는 형식이 이제 조각이라는 매체와 무관하다는 농담 섞인 응수일 뿐만 아니라, 알레고리적 대상이 되기를 실패하면서 결국 모든 것이 장식이 돼버리는 순간을 연출한 결과이기도 하다.


최하늘, <St. Shin's figure> (출처 : '취미가 趣味家트위터 공식 계정@tastehouse_info)


최하늘, <아이폰, 다이슨의 유골함> (출처 : '취미가 趣味家트위터 공식 계정@tastehouse_info)


결국 조각이 장식을 연기한다는 것은, 심지어 그것을 과장된 방식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조각에 내재된 모든 함의를 소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이때의 함의란 의미론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조각으로서의 자기 완결성 또한 포함한다. 최하늘의 굿즈에서 (가짜 상징을 둘러싸고) 연출된 극적인 순간이 단지 일시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면, 조각은 조각이 되기보다 소비자-관객에게 포착되기에 적합한 그럴듯한 이미지가 돼야한다. 그러므로 일련의 작업들은 존재하지 않는 내러티브를 함축한 채 기이한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우리가 더 이상 섣불리 의미론적 독해를 시도할 수 없는 한, 그것들은 단지 자신의 장식적인 표면만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 스포트라이트 안에서 전개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조각은 단지 망가진 알레고리적 대상으로서 (정지 혹은 중단된 채로) 자신을 스킨skin으로 소비하기를 유도한다. 앞서 김혜원이 사용자의 에 의지해 일상 풍경을 장식적인 표면의 총합으로 재구성한 것과 유사하게, 최하늘의 세계관에서 모든 것은 장식적인 표면으로 소비될 뿐 그것들 간에 별다른 인과관계는 없다. 그러므로 최하늘의 굿즈는 단순히 조각이기를 포기한 결과가 아니라, 조각이 온갖 장식들로 구성된 얄팍한 현실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의 장식적인 표면을 도출해내고, 더불어 장식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그러한 과정은 자연스럽게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의 전략과 공명하며, 장식성의 문제에 대처하는 조각에 대한 하나의 일화로 기능한다.


최하늘, <CHASER's repackage album Fluorescent(출처 : '취미가 趣味家트위터 공식 계정@tastehouse_info)


최하늘, <Tinder profile> (출처 : '취미가 趣味家트위터 공식 계정@tastehouse_info)

 

이처럼 김혜원과 최하늘, 두 작가가 굿즈를 통해 굳이 장식-되기를 적극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애초에 굿즈가 특정한 미적 형식으로 주어지기보다, 단지 장식으로서 디스플레이되고 소비될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굿즈의 장식성은 단순히 상품화의 논리적인 귀결로 그치는 대신, (작업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장식으로 인식/인지하는 사용자의 에 의해 극대화된다. 이를테면 사용자-주체는 자신이 대면하는 세계를 현상학적으로 경험하기보다, 스마트폰의 사진술을 체화한 으로 대상들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들을 실시간으로 재조합함으로써 자신만의 세계상을 구성하며, 그 과정에서 현실을 오로지 시각적인 컨텐츠로 소비하면서 장식 과잉의 세계를 추동한다. 미술 또한 그와 무관하지 않은데, 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적인 맥락을 ()합리적으로 시각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자-주체와의 관계에서 비롯한 장식성에 특정성을 부여해, 매체를 불문하고 스스로를 (장식적인 표면으로서의) 이미지로 재구성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굿즈는 장식화의 흐름에 저항하기보다, 스스로를 미술 상품인 동시에 엄연한 2차 창작의 산물로 제시하며, 1차적으로 형성된 작업의 고유한 맥락을 소비자-관객에게 피력할 수 있을 만한 장식으로 외화시킬 수 있는 여지들을 모색하게끔 유도한다. 이때의 2차 창작이란 원본으로서의 대상을 순전히 스킨 차원에서 도해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사용자-주체의 감각을 반영한다.

 

결국 모든 것이 이미지로 종합된다는 점에서, 이제 매체 간의 경계는 갈수록 모호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러한 경험적인 차원과 별개로, 각각의 미디엄은 서로 상반된 방식으로 장식적인 표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여전히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특정한 매체를 활용한다는 것은 그에 부합하는 스킨을 도출해내기 위해서 수반되는 문제들을 가시화하면서 매체의 특정성을 (사용자-주체의 관점에서) 재편하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호한 매체 간의 경계를 다시 구획하는 게 아니라, 동질화된 이미지 경제 내에서 각각의 매체들의 속성이 서로 교환되고 합선되는 과정을 가늠하는 것이다. ‘굿즈는 그러한 과정을 가속화하는 한편, 일련의 장식들 사이에서 어떻게 차이들을 재생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되묻는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작업의 외형 차원에서의 다양성의 문제로 해소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앞선 두 작가는 굿즈를 통해 기존에 활용하던 미디엄을 사용자의 에 노출시키며 의도적으로 대상화할 뿐더러, 각자의 작업 메소드를 토대로 장식성의 문제에 대응하면서 작업이 스킨 차원에서 인식/인지되는 상이한 국면들을 연출했다. 결국 굿즈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그것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장식으로 소비될 수 있게끔 조형된 대상이라는 사실, 즉 나름의 조형 원리에 따라 장식을 의태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주지하는 것이다.

 

주지하듯 굿즈는 명확한 상품 가치가 부여된 작업들의 범주가 아니므로, 일련의 소비자-관객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과정에서 그것의 다소 모호한 위상에 대한 질문들을 꾸준하게 제기한다. 그것은 분명 신생공간 당시에 고안된 작업의 형식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신생공간이라는 근과거를 의식한 채 굿즈를 소비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거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소비자-관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굿즈를 소비하는 것일까? 또한 <굿-> 이후에도 계속해서 굿즈를 생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취미관> 혹은 취미가라는 기획은 향후의 지속성을 위해서라도 앞선 질문들에 어떤 식으로든 응수해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굿즈는 신생공간의 맥락과 무관하게, 여전히 유효한 화두다. 무엇보다 그것의 존재는 장식들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미술을 경유해) 장식과 흡사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재고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일련의 굿즈들 사이에서 유독 사용자-주체의 이목을 끄는 특정한 굿즈는 그러한 의제를 보다 심화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포토제닉한 작업에 대한 수요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장식적인 표면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변형되는 작업/미디엄의 구조를 가시화하는 문제에 가깝다. 이처럼 굿즈의 발단과 무관하게, ‘굿즈는 방법론 차원에서 점차 확장되고 있으며, 그와 연루된 문제들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취미관>이 한편의 전시로서 전제하고 있는 미적 경험은, 사용자-주체가 내면화한 시각성을 활성화할 수 있는 장치로서 굿즈를 활용할 때 비로소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굿즈는 신생공간에 대한 기억을 애써 상기시키는 근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맥락을 구성하며 비로소 작업이 돼야한다. ‘취미가의 발단은 <굿->를 통해 확보했다고 상정된 가상의 소비자-관객 군에게 적절하게 (‘굿즈를 매개로 한) 미술을 판촉하기 위해 고안된 판매 플랫폼이고, ‘굿즈의 유통 판매를 보다 활성화함으로써 취미가라는 복합적인 공간의 토대를 확고하게 정립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굿즈에 대한 수동적인 생산/소비가 정착한다면, <취미관>을 포함한 취미가의 기획은 점차 (‘굿즈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건) 기존의 아트샵/아트 페어의 변종 정도로 소비될 것이다. 만약 그런 식으로 취미가가 제도와의 애매한 접경지대에서, 마찬가지로 애매하게 제도화된다고 했을 때, 혹은 그러한 의심의 여지들을 더 이상 신생에게 부과되는 열악함의 문제만으로 무마할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존의 미술 시장과 <취미관>을 비롯한 <PACK>과 같은 굿즈기반의 프로젝트와의 관계에 대해서 재고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얼핏 미술 시장과 관련된 제도의 불충분함을 대체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금에 의존하는 전시와 유사한 일시적인 이벤트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제도의 외부에서 독립적인 경제를 구축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므로 굿즈기반의 프로젝트는 미술 시장으로부터 소외된 젊은 미술가들의 실질적인 작업 판매를 굿즈라는 작은 물건들로 구성된 지엽적인 경제로 해소하며, 결과적으로 현상 유지에 기여하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결국 굿즈가 작업이 돼야한다는 것은, ‘굿즈에 대한 경험이 미술을 둘러싼 경제 논리에 의해 조성되는 불공정한 사각지대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가치를 재설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신생공간의 시기는 비록 만료됐지만, ‘굿즈를 비롯한 신생공간에서 비롯한 잔여들은 여전히 산개해있고, 우리는 그것들로 우리에게 최적화된 시간을 만들어야한다.

 

1) 피아방과후, <대화: 굿-(GOODS) 2주기(週期)>(https://pia-after.com/?p=609)에서 발췌. "(...) 젊은 작가의 작업, 전시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안심하고 작업을 관람하고, 마음에 들면 구매하여 자신의 공간에 향유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랬죠. 그래서 현재 운영진과 함께 취미가를 만들었어요. 처음에는 취미관 같은 행사를 만들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작은 상점을 가늘고 길게 이어갈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2) 황재민(2/W), <Painters by Painters>, 112p

3) 권시우, <무대화된 공간에서 장식 아닌 것들을 망상하는 방법>,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99?category=650941)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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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Default>, 사용자 모델을 재구성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전략들

 

권시우

 

포스트 인터넷 아트는 사용자의 보편적인 경험을 현실 내외에서 재현하는 데 천착했지만, 스마트폰 출시를 기점으로 미디어 환경은 급속도로 다변화했고 재현의 문법은 이를 수렴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므로 국내에서 디지털 기반의 작업들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어 세대적인 담론을 구성한 시점은 포스트 인터넷 아트의 전제가 무효화된 이후로 설정해야할 것이다. 이를 얼마만큼 자각하고 있었는지와 별개로, 신생공간이 활성화됐던 당시에 활동했던 몇몇 작가들은 자신이 체감하고 있는 사용자 경험을 동력 삼아 작업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앞선 재현의 문법과는 미묘하게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이를테면 분명 디지털 이미지에 착안해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원본과는 전혀 다른, 혹은 원본을 유추할 수 없는 형태로 제시됐다. 나는 그러한 작업들을 한때 운석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에게 디지털 환경이란 일상적으로 접속하고 휴대하는 편의적인 대상인 동시에 외계外界나 다름없는 불가해한 영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기 때문이다.1) 열화된 이미지들. 디지털의 파본들. 의도적으로 실패한 재현의 결과물들은 불시착한 운석들처럼 어딘지 모르게 엉성한 모양새로 전시장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현의 실패는 작업의 질적인 가치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실패는 오히려 작가가 의도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일련의 작업들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과 가상 간의 합리적인 상관관계를 형성하는 게 아니라, 열화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디지털 환경에 대한) ‘의 제한된 엑세스를 표명하는 것이다. 사용자-작가가 디지털 이미지를 열화, 즉 대상의 내적 구조를 비합리적으로 번안하거나 훼손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디지털 이미지가 현실상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실에서 작용하는 각종 물리적인 관성들을 상기시키는 한편, 디지털 환경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기능한다. 원본과 작업 사이에 존재하는 사용자-작가의 인터페이스는 사실 가상성 자체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현실상에서 그럴 듯한물성을 부여할 수 있는 자의적인 규칙들을 고안해낼 뿐이다. 열화는 사실 사용자-작가가 현실의 관점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편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선택한 일종의 차선인 셈이다. 그렇다면 앞선 맥락에서의 인터페이스가 부재했을 때, 사용자는 과연 어떤 식으로 디지털 환경을 경험하게 될까?

 

김효재의 전시 <디폴트Default>(2018.12.19-29, 원룸ONEROOM)는 별다른 매개 없이 현실을 가상의 영역으로 포섭하려한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나름의 답변으로 구실한다. 동명의 영상 작업 <디폴트Default>는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 김나라(@naras.)를 화자로 내세워 작가가 고안한 디폴트Default'라는 개념에 대해서 서술하는데, ’디폴트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서의 특정한 설정치를 뜻하는 기본값이라는 표현에서 착안했으며, 작가의 주장에 따르자면 디지털 환경 내외에서 한 개인이 최대한 현실 가까이에서 수집하는 정보값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가상의 계정은 그것과 동기화한 사용자의 현실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그/그녀의 정체성을 재구성할 뿐만 아니라, 현실 자체는 그러한 과정에 동원되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naras는 그에 대한 효과적인 사례인데, 해당 계정에 지속적으로 업로드되는 각종 패션 브랜드에서 협찬 받은 의류 및 아이템을 착장한 인증샷, 매번 다른 패션을 착붙으로 소화하며 다양한 포즈로 촬영한 스냅샷 등은 하나의 콘텐츠로서의 가상의 계정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동시에, 김나라의 일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본 전시에서뿐만 아니라, 회화 작가 지호인과 협업한 프로젝트 서울모범미감의 책 S, KR 美感에 기고한 <자라zara는 왜 마스크를 만들지 않는가?>라는 글에서도 디폴트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해당 개념의 중요한 전제는 이러하다.

 

더 이상 “~하는 척, 가상/가짜/허구의 ~인 것, 기믹(gimmick), 의사-(pseudo)”가 통용되는 시점은 지났다. 현실이 가상과 얼마나/어떻게 분리된 세계인가에 대한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현실과 가상이라는 구도는 얼마나 리얼(real)에 가까울 수 있을 것인가라는 다음의 숙제를 화면 바깥의 한 개인에게 내주고, 이를 수행하는 개인을 바라본다. 실체 없는 세계에서 현실로 빠져 나온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화면 안에 깜빡 두고 나온 기분을 느끼며, ‘나는 진실로 누구인가라고 질문하며 스스로의 역할(roll)을 직접 다시 정한다. 이를 통해 가상을 염두에 두고 현실에서 만들어지는 정체성을 경험, 획득하고, 화면 안으로 답을 제시한다. 이는 다시 화면 안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모델(model)로 비친다.2)

 

인용한 부분의 논지는 <디폴트>의 전시 리플렛에서 청탁 메일의 형식으로, <디폴트>라는 영상 작업에서는 자막을 통해서 반복해서 언급되는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디폴트는 대강의 정의만이 존재할 뿐 체계적으로 확립된 개념 혹은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가상과 얼마나/어떻게 분리된 세계인가에 대한 물음에 천착했던 이전의 고루한 방법론과 단절함으로써 소위 가상성에 대한 새로운 내러티브를 전개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폴트는 일종의 선언에 가깝다.) 그러나 디폴트를 발화함으로써 확보한 여지는 섣불리 서사 차원에서 확장되지 않는다. 작업 <디폴트>디폴트의 표본적인 인물(@naras.)(S, KR 美感의 독자라면 이미 숙지하고 있을) ‘디폴트에 대한 대강의 정의만을 전면에 내세우며 디폴트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판촉할 뿐이다. 이를 방증하듯 본 작업은 2분가량의 짧은 러닝타임 내에서 (이전작인 <난마돌> 시리즈에서의 사변적인 이야기 구조와 대비되는) 간결하고 확고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전시공간인 원룸ONEROOM에 설치된 와이파이(wifi : subscriber KU JI SU)를 경유해 관객 본인의 스마트폰을 통해서만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상에서 현실을 향해 발화되는 일종의 팝업으로 기능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김효재는 본 전시를 디폴트를 위한 일종의 프로모션으로 상정한 채 협업자들과 함께 주어진 공간에 개입하는데, 이를테면 공간 디자인을 맡은 지호인은 사이버펑크--한방이라는 컨셉으로 전시장을 새롭게 연출한다. 지호인의 공간 디자인은 컨셉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다소 이질적인데, 원룸ONEROOM에 비치된 화초에서 착안한 꽃무늬 스티커나 @naras.의 유튜브 구독자인 구지수의 글이 프린트된 족자와 같은 요소들을 통해 이전의 서울모범미감프로젝트에서 천착한 서울에서의 특정한 미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본 전시에서 구현된 서울 미감은 단순히 서울의 맥락 없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화면 안에서 구축된 자신의 정체성을 잠시 두고 현실로 빠져 나왔을 때 못생김이 의도치 않게 시야 내에 등장하는 서울이라는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미감은 죽어도 포기할 수 없다는 망상을 하는3) 특정한 사용자가 (서울이라는) 현실의 조건들을 나름대로 미화시킨 결과에 가깝다. 즉 서울의 못생긴풍경은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을 뿐더러, 자라zara를 포함한 각종 패션 브랜드의 웹사이트를 서핑하며 자신의 미감을 정체화한 사용자-개인들 간의 협업에 의해 적당히 취사선택되고 리믹스remix된 채 마침내 한 무대-공간으로 완성된다. 전시장 전반에 드리운 초록색이 감도는 조명이나 테이블을 덮고 있는 벨벳 천, 김동용이 작곡한 공간의 BGM4)과 같은 상대적으로 유려한 장식들은 그러한 을 보조하는 장치들인 셈이다.


중요한 것은 김효재, 지호인이 지향하는 소위 힙스러움(웹과 SNS상에서 생산/유통되는 패션 이미지를 비롯한 그럴싸한시청각적 정보들에 대한) 사용자 경험을 토대로 정체화한 미감의 정서이며, 이는 서울이라는 데이터베이스-현실로부터 발췌한 요소들을 번안한 결과물로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디폴트의 과정의 일부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즉 일련의 장식들은 순전히 가상의 관점에서 현실에 개입한 결과로써, ‘사이버펑크--한방이 의도한 이질성 내지 위화감은 못생김과 못생기지 않음, 촌스러움과 촌스럽지 않음의 미묘한 경계에서 비롯한 장식성을 통해 체감되는 것과 별개로, ‘디폴트를 운용하는 사용자라는 배후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전시 <디폴트>는 앞서 언급한 열화의 방식과 달리 현실과 가상 간의 극복할 수 없는 낙차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을 (‘디폴트라는 가설을 통해) 현실에 액세스access하고 그로 인한 변수들을 (서울 미감에 기반한) 장식을 통해 유희하듯 물리적인 공간상에 펼쳐 보인다. 이들은 공간 디자인을 포함해 자신의 사용자 경험을 투영한 결과물들을 (원본에 미치지 못하는) 실패한 성과로 단정하지 않고, ‘서울모범미감이라는 가상의 컨텐츠의 영역 내에서 조율/조절되는 미적 경험으로 환원한다. 결국 디폴트를 위한 프로모션 공간은 작업 <디폴트>에서의 판촉을 보다 활성화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화면 안으로되먹임되어 다양한 이미지로 제시될 수 있는, 모델model”이 되기 위해 연출된 유사 무대인 셈이다.


<디폴트Default>(2018.12.19-29, 원룸ONEROOM) 전시 전경

 

반면 작업 <디폴트>에서 재편집된, @naras.의 유튜브 계정에 공개되지 않은 소위 B컷 영상의 클립들은 리얼real”모델model”이 되기 위해 현실에서 수반되는 부산스런 과정을 보여준다. 구독자 구지수의 언급에 따르면, “기업체가 되어 움직이는 계정이 아닌 이상, 그러니까 구독자수가 1,000여 명 정도인 ‘NARAS'와 같은 크리에이터는 세트 정비, 카메라 설치, 촬영, 편집 등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한다.”5) 그 과정에서 재구성되는 것은 무엇보다 구독자의 피드백에 반응하며 대사와 목소리 톤, 그리고 제스처까지 미세조정하는 김나라라는 현실에서의 주체다. 디폴트의 맥락에서 사용자는 (필자의 표현대로 하자면) 유닛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가상과 일시적으로 동기화하는 대신, 가상의 관점에서 현실에서의 자신을 적극적으로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하며 자신과 유닛의 정체성을 일체화한다. 그 와중에 파생된, 리얼real"하게 조합되지 못한 디폴트의 부산물들은 대개 공개되지 않거나 언제든지 휴지통에 분류되어 삭제될 수 있는 무가치한 대상에 가깝다. 실제 @naras.를 화자로 내세워 사용자-유닛의 무결한 상태, 리얼real"함을 미처 훼손할 수 없는 작가는, 앞선 부산물들을 데이터의 구천으로부터 건져와 (작업 전반에서 부정했던) ’가짜를 연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가짜인 화자는 의미심장한 타자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단지 팝업의 요소로 소비되는 데 그치며, 영상 내에서 자신의 허위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를테면 동일한 클립에서 추출한 @naras.의 이미지들은 모핑Morphing 앱을 적용해 (자막의 내용과 대치되는 문장들을 되풀이해 말하는) 내레이션에 따라 인위적으로 입을 움직이며 영상 전반에 간섭하는데, 이는 자신이 작가에 의해 조작당한 채 번번이 오작동할 뿐이라는 사실을 과시하는 한편, (’디폴트를 대변할 수 있는) ’진정한화자는 이미 스스로를 재구성한 채 리얼real“한 영역으로 이전됐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처럼 본 작업은 사용자-유닛이라는 실체를 배후에 숨긴 채, 그것에 대한 복선으로 기능하는 말과 동작들을 적절히 배열하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한다.

 

작가가 영상 내에서 리얼real”하게 조합되지 못한 디폴트의 부산물만으로 어떤 서사를 구성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앞서 언급했듯 현실이 가상과 얼마나/어떻게 분리된 세계인가에 대한 물음에 천착했던 이전의 고루한 방법론과 의도적으로 단절했기 때문이다. 김지훈이 서술하듯 그간 통용됐던 유닛의 개념이 우선적으로는 포스트인터넷 조건이 구성하는 세계에 대면하거나 그 세계로 진입한 주체의 분열적 경험을 지시하고6), 그것이 에세이 영화의 관습을 빌어 사적 현실과 공적 현실, 기억과 관찰, 망상과 논증, 한 지리적 장소와 다른 장소를 넘나들고, 현재를 다층적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의 버전들이 집적되고 교차하는 다층적 레이어로 자아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귀결됐다면7), 전시 <디폴트>가 프로모션하고자 하는 디폴트라는 개념은 에세이적 자아가 형성될 수 있는 토대 자체를 부정한다. 이를테면 디폴트에 기반한 사용자 주체는 이미 가상을 리얼real"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가상의 객체인) 유닛에게 불능감을 느끼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전의 내러티브를 추동했던 (현실과 가상 간의) 사이 공간이 발생할 만한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주체의 분열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은유하는 탄력적인 몽타주 기법이라는 전략 또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작업 <디폴트>는 단지 디폴트라는 개념을 둘러싼 동어반복적 구조의 일부로, 즉 작가의 의견 내지는 선언을 주지시키기 위한 시청각적인 도구로 환원된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 자신의 실제 자아에 대해서 성찰하는 게 아니라, 유닛과 일체화된 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작인 <난마돌> 시리즈는 (‘디폴트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과도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본 작업은 구글, 셔터스톡, 유튜브 등의 가상 플랫폼으로 상징되는, 온갖 이미지와 클립들로 포화 상태인 타임라인을 작가가 상정한 임의의 시제들로 분류하며 (섣불리 분열적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사용자의 권한을 암시하지만, 이는 결국 난마돌이라는 픽션에 의해서만 성사될 뿐이다. 무엇보다 난마돌에 대해서 부연하는 내레이션은 영상 내에서 사용자가 각종 링크들을 넘나들며 이미지-정보를 수렴하는 복잡한 궤적을 온전히 통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와 동화된 채 기계음으로 변조된 다양한 목소리 트랙들을 넘나들며 점차 갈피를 잃어버린다. 결과적으로 <난마돌>의 화자는 (디지털 환경에 기반한) 서사를 불안정하게 운용하는 과정에서 재차 사용자 정체성의 근간을 뒤흔든다. 이는 누구든 포스트인터넷 조건이 구성하는 세계에 천착하는 순간 분열적 주체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재생산되는 시청각적 파편들의 혼란상은 이미 압도적인 클리셰가 된 채 사용자-작가에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 (열화의 방식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환경과 본질적으로 불화하는 내러티브에 종속돼야만 하는가? <난마돌> 이후의 김효재가 바라는 것은 그러한 폐쇄회로에서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는 것이고, 전시 <디폴트>는 그에 응수하듯 디폴트라는 가설을 통해 새로운 사용자 모델을 명시함으로써 서사 자체를 유예한다. 즉 작가는 불확실한 미래로 수렴되는 소위 유닛의 서사와 반목한 채, 사용자가 스스로 현실과 가상을 매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용자-유닛에 대한 내러티브의 전조를 구성할 뿐이다.


이로써 현실과 가상 간의 암묵적인 위계는 역전되었다. 기존의 사용자가 디지털 환경과의 동기화 여부와 무관하게 언제나 현실에 정주해있었다면, 그로 인해 가상을 대상화하는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면, ‘디폴트의 맥락에서 사용자는 이미 가상의 영역을 선점한 채 오히려 현실을 대상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서울을 포함한 현실이 거듭 남루하다고 말하고, 종내 자신이 점유한 현실의 일부, 즉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서울 미감의 전제에 따라) 나름대로 미화함으로써, 현실을 자신의 사용자 경험에 조응하게끔 변조하려한다. 결국 화면 너머의 모든 것은 사용자 정체성을 수식하기 위한 임의적인 재료들일 뿐이며, 작가의 관점에 따르자면 그것들은 대개 어떤 미감을 구현할 수 있는 장식으로 환원된다. 혹은 현실이 그럴싸한시청각적 정보들로 업로드되기 위해선 장식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내러티브는 무엇인가? 대상화된 현실로부터 모종의 장식성을 유추해내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연출하며 화면 내외에서의 자신을 정체화하는 사용자의 경험은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재현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차후의 작업에서의 관건은 본 전시에서 미처 관여하지 않은/못한 리얼real”함을 작업의 방법론 차원에서 재구성해 본격적으로 유닛과의 변별점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팝업 장치로 고안된 작업 <디폴트>는 얼핏 스스로를 가치 절하하며 가짜의 영역으로 숨는 듯하지만, 본 전시에서의 미적 경험을 재편하는 유력한 소실점으로 기능하며 디폴트를 반영하는 세계관에 대한 여지를 남겨둔다. 비록 디폴트에 의해 발생한 서사적 의문은 작업 차원에서 해소되지 않았지만,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동원된 전시 내의 제반 환경에 둘러싸인 채 관객은, 무엇보다 작가 본인은 거듭되는 질문들을 숙고하게 된다.

 

1) 권시우, <포스트 인터넷, 디지털, 혹은 운석들>, 집단오찬 (https://jipdanochan.com/70?category=650941)

2) 김효재, <자라zara는 왜 마스크를 만들지 않는가?>, S, KR 美感, 32p

3) 김효재, <자라zara는 왜 마스크를 만들지 않는가?>, S, KR 美感, 36p

4) 전시 <디폴트>에 사운드 디렉터로 참여한 김동용은 지호인의 사이버펑크--한방이라는 컨셉을 재해석한 트랩 비트 기반의 공간의 BGM을 작곡했고, 그와 별도로 영상이 상영되는 웹사이트(imademydefault.com)에 접속하면 (라디오 스트리밍을 통해) 자동 재생되는 음악의 트랙 리스트를 선별했다. 전자의 경우, 여타 장식들과 함께 전시장의 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한편, 초저음/고음의 사운드를 트랙 전반에 삽입하여 관객이 이어폰을 통해 작업 <디폴트>의 사운드를 청취하는 동안에도 공간의 BGM을 의식할 수 있게끔 작업했다. 그러므로 본 전시에서 사운드는 단순히 장식으로만 존재하기보다, /오프라인에서의 상이한 경험들을 미세하게 조정하고, 매개하는 등 전시 경험 전반에 관여한다.

5) 구지수, <태스크, ‘디폴트’, 구지수>, 전시 <디폴트Default>에 설치

6) 김지훈, <유닛을 매개하는 에세이적 관습 : 동시대 국내 포스트인터넷 무빙 이미지 아트의 어떤 경향(1)>, 계간 시청각 2, 22p

7) 김지훈, <유닛을 매개하는 에세이적 관습 : 동시대 국내 포스트인터넷 무빙 이미지 아트의 어떤 경향(1)>, 계간 시청각 2, 25p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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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화된 공간에서 장식 아닌 것들을 망상하는 방법

 

권시우


*본 글은 '산수문화'에서 개막한 최하늘 개인전 <카페 콘탁트호프 Cafe Kontakthof>의 전시 서문입니다.


(http://sansumunhwa.com/choi-haneyl/)  


1) 사용자 주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을 인식/인지하는데, 그 중 하나는 무엇이든 캡쳐하는 데 익숙한 사용자의 에 의지하는 것이다.

 

2) 당신은 특정한 공간을 경험하는 와중에,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인칭의 시야 속으로 수렴하는 공간을 바라보는 와중에 불시에 어떤 이미지를 캡쳐한다. 캡쳐의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순전히 조건반사적으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필기하는 대신 머릿속의 데이터 센터에 이미지를 저장해뒀을 수도, 말 그대로 인스타 각이었을 수도, 기타 등등, 의도는 종잡을 수 없다. 그 결과 주어진 이미지들은, 어떤 일관된 서사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로 삼거나 파노라마로 펼쳐놓기에는, 각각의 시점의 레벨이나 해상도 등이 지나치게 상이하다.

 

3) 물론 당신이 원한다면, 몇 가지 이미지들을 취사선택해 파노라마와 유사한 형태로 나열함으로써 불균질한 시각적인 얼개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굳이 일련의 이미지들을 특정한 규칙을 준수해가며 억지로 조합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의 과 그것이 구사하는 캡쳐술에 기반해 공간을 대하는 순간, 공간은 건축적으로 구조화된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로 포착되기를 예비하고 있는, 혹은 캡쳐의 순간을 위해 연출된 일종의 무대로 환원된다는 사실이다. 무대는 단지 관객이 수용할 수 있을만한 적절한 구도와 배치, 분위기 등을 조성하는 데 주력할 뿐, 그 자체로 합리적인 공간을 지향하지 않는다.

 

4) 어떤 공간은 그럴듯한무대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인테리어 양식, 샘플 이미지, 가구와 소품을 비롯한 각종 오브제 등은 대개 원본과 유사한 가짜이자 취향의 데이터베이스로부터 무작위로 발췌한 장식들에 불과하다. 설사 원본을 재료로 삼는다하더라도, 그것은 사용자의 에 의해 포착될 장식적인 표면만을 드러낸 채 공간상에 수렴될 뿐, 명확한 실체를 지닌 대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애초에 무대화된 공간은 관객 혹은 사용자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거나, 통상의 무대처럼 특정한 내러티브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식들을 공간상에서 별다른 맥락 없이 취합하는 것만으로, 무대화된 공간은 완성된다.

 

5) 최하늘은 그에 대한 한 가지 사례로서 카페를 선택하고, 기존의 전시장에 카페라는 공간을 구성할 법한 그럴듯한장식들을 동원해 노골적으로 카페와 유사한 무대를 연출한다. 달리 말해 그곳은 무대화된 공간을 무대 삼기 위해, 무대화된 공간의 프로세스를 적용해 만든 가설무대인 셈이다. 그러므로 앞서 동원한 장식들, 혹은 그것들이 취합된 공간 자체는 굳이 장식을 연기함으로써 자신의 장식적인 표면을 과시한다. 이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혹은 존재할 필요가 없었던 내러티브의 전조가 발생한다. 장식들이 수행하는 (장식이 되기 위한) 기묘한 상황극은, 그렇다면 이후에 무대에 개입할 작업들은 그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지를 묻는다. 작업은 결국 장식으로 수렴돼 동어반복의 연기를 할 것인가, 아니면 장식이 아닌 채로 무대 위에 등장해 새로운 역할을 자임함으로써 마침내 독자적인 대상이 될 것인가?

 

6)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최하늘과 문주혜, 두 작가는 동일한 무대를 공유하되 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전시 혹은 유사 연극의 내러티브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문주혜가 연출된 상황에 몰입해 카페(와 유사한 무대)를 고스란히 전시장으로 삼아 자신의 회화를 배치한 반면, 최하늘은 주어진 무대가 무대화된 공간의 표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채, 자신의 조각을 통해 일련의 장식들이 수행하는 상황극의 국면을 전환시키려 한다.

 

7) 최하늘의 입체병풍 연작은 어떤 대상을 잘라낸 형태를 병풍의 틀 안에 박제하거나, 절삭된 오브제 자체를 병풍의 일부로 제시하는 등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자르기 이전의 대상은 대개 망상 차원에서 랜더링된 불균질한 입체의 형상들인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잘라낸 결과 드러난 단면을 순전히 작가의 임의에 따라 조형해낼 수 있다. 작가의 이전 개인전인 <No Shadow Saber>가 검의 회전베기 동작인 물리네moulinet를 나름대로 전유해 대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잘라내며 조각적으로 도해했다면, 이번 입체병풍 연작에서 시도한 자르기는 검술이라기보다 단순한 절삭에 가까우며, 이는 대상의 단면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에 가깝다.

 

8) 어떤 입체병풍은 병풍의 틀을 고수한 채 제작됐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절삭된 오브제를 포함한 일련의 모형들을 장방형으로 늘어놓아 병풍과 유사한 구도를 형성한다. 어찌됐든 개별 작업들은 (평면 회화의 형식이 아닌, 실내에 배치되기 위한 물건으로서의) 병풍의 역할을 자임하며 무대에 개입하지만, 그것들은 애초에 카페와는 무관하게 조형된 생소한 대상이므로 무대화된 공간의 인테리어의 일부로 수렴하지 못한다. 오히려 입체병풍을 통해 제시된 대상의 단면들은 무대에서 자신의 장식적인 표면을 과시하는 장식들이 사실 잘라낼 수 있는 몸통을 가지고 있는 입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하며, 장식들이 수행하는 상황극과 대립한다.

 

9) 최하늘은 대상을 실제로 잘라내며 시범을 보이는 대신, 자르기라는 행위를 통해 연극적인 상황을 발생시키고 이를 병풍의 구도로 제시한다. 작가가 재료로 삼는 불균질한 입체의 형상은 망상으로부터 비롯하므로 얼마든지 다양한 단면들을 재생산할 수 있는데, 작업의 과정에서 단면은 대개 (작가의 임의에 따라) 이질적인 형태로 조형된다. 무엇보다 대상의 단면은 캡쳐만을 반복하는 사용자의 이 인식할 수 없는 불가해한 이미지로서, 그것은 대상의 외피와는 무관하게, 혹은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애초에 자신의 단면을 노출하고 있는 대상들은 합리적으로 구성된 오브제가 아니다. 작가는 그것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설치함으로써 무대화된 공간에서 포착할 수 없는 장면들을 연출하는데, 일련의 장면들은 병풍으로서 무대상에 산개하며, 장식들에 의해 조성된 내러티브를 구획한다.


10) 그 결과 무대에서 상연되는 장식들의 상황극은 불시에 등장하는 입체병풍에 의해 차단당하기를 반복하며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지 못한다. 당신은 여전히 사용자의 에 의지해서 공간을 경험하지만, 이곳에 동원된 장식들은 그저 장식을 연기하고 있을 뿐, 어떤 내러티브의 구간에 속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역할을 달리한다. 이를테면 장식은 당신이 예측할 수 없는 단면의 형태들이 잠재돼있는 입체의 형상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당신은 장식의 단면을 상상함으로써, 그것을 편의에 따라 잘라낼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할 수 있다. 연극이 막을 내린 이후,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될 공간의 형식을 결정짓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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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마돌><업로드 유어 데스티니> : ‘유닛의 뒤편은 어디에?(2)

 

권시우

 

유닛이란 어떤 주체가 소위 디지털계와 동기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계정이다. 이때의 계정은 한 가지 모델로 국한되지 않고, 사용자 주체의 편의에 따라 혹은 사용자 주체가 접속하고자 하는 영역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김희천이 <바벨>에서 스마트 워치에 저장된 위치 데이터를 매개로 죽은 아버지의 존재를 사후적으로 가늠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유추해낼 수 있는 유닛은 한때 아버지와 인터페이스 상에서 일시적으로 동기화됐던 GPS객체다. 다른 한편 강정석은 <GAME >에서 비디오게임의 플레이어가 게임 내 캐릭터 및 세계를 운용하기 위해 활용하는 주변기기에 대해서 언급하며, 게임 내 캐릭터가 독자적인 존재가 아닌 게임 외부의 플레이어와 불완전하게 매개된 유닛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 외에도 일상 차원에서 우리에게 부속된 무수한 유닛들의 목록을 나열할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중요한 전제는 디지털계에 구획된 어떤 영역에 접근하려하든 사용자는 유닛의 시점에 온전히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정석은 그 때문에 플레이어가 가상현실에 대해서 느끼는 불능감1)을 호소하고, 김희천은 그러한 불능감을 서울이라는 도시에 투사하며 제 나름의 유닛의 세계, 온갖 데이터 껍데기들이 현실의 파사드를 넘나들며 개인의 실존을 희석시키는 불길한 바벨을 구현해낸다.

 

일련의 작업들은 가상과 현실을 중첩하기보다 양자 간의 미세한 간극을 전경화하고 그 속에 처한 사용자의 과도기적인 상태를 주지한다. 강정석과 김희천은 각자의 상황/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유닛의 시점을 선택해 작업의 내러티브를 전개하지만, 설사 그러한 내러티브가 망상에 가깝게 비약할 때조차 차마 불능감이라는 전제를 무화시키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고안해낸 내러티브가 본질적으로 현실을 향해 투영된 디지털의 잔영으로부터 도출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종 주변기기를 비롯해 어떤 디바이스와 호환되든 유닛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유닛과의 접촉면을 통해 디지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바로 그 접촉면을 일종의 외상으로 간직한 채 세계를 가늠한다. 이로써 유닛은 디지털과 동기화하기 위한 애초의 목적, 즉 보편적인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계정의 지위에서 벗어나, 어떤 사용자 주체의 외상을 극화한 장면의 목격자가 된다. 강정석-김희천 연속체를 고려할 때 중요한 점은, 이들이 고안해낸 대체 세계/서사가 실시간으로 전개되는 데이터의 수열성, 특정 사용자의 동기화 여부와 무관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산개한 유닛이 체감하는 속도감을 재연한 결과가 아니라, 단지 그 모든 역학이 사용자 편의적으로 조율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버퍼링에 의해 운용된다는 점이다. 이때의 버퍼링은 현실과의 타협점이자 사용자 주체에게 각인된 외상의 징후이다.

 

여기까지가 불능감이 전면에 드러난 서사, 이를테면 유닛의 세계관이라면, 우리는 그 안에 속한 채 언제까지나 디지털계의 타자일 수밖에 없는가? 유닛의 세계관은 디지털계에 대한 지엽적인 권한, 그로부터 비롯한 외상을 지닌 사용자 주체가 외상의 요인들을 독자적인 규칙으로 환원해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나름의 자유도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다. 달리 말해 이때 사용자 주체는 자신에게 각인된 외상을 도저히 해소할 수 없으며, <GAME >에서 제시한 비디오게임 연대기에 따르면 특정 세대, 이를테면 80년대 태생의 개인이 스스로를 사용자(플레이어)로서 정체화하는 과정은 주변기기의 프로토타입이 부과한 불능감, 즉 일차적 외상을 주변기기의 발전 경로를 따라 지속적으로 재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가상 세계와의 관계를 조율해나가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타자로서의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선 불능감을 일차적 외상으로 경험한 적 없는, 애초에 정체화의 발단 및 계기가 상이한 사용자 주체의 모델을 상정해야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밀레니얼 세대에 속하는 일단의 사용자들을 재차 세대적으로 분할해 90년대 태생만의 독자적인 인터페이스 서사를 구축할 필요가 있지만, 본 글은 그에 앞서 최근의 몇몇 작업들을 단서 삼아 새로운 사용자 주체 모델에 대한 여지를 가늠해볼 것이다.

 

김효재의 <난 마돌Nan madol> 시리즈는 폰페이 섬에 위치한 실제 해상 유적지인 난마돌에 착안해 제작한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인데, 작업 내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이미지들은 작가가 직접 제작한 이미지가 아니라 구글, 셔터스톡 등에서 발췌한 일련의 푸티지로 구성돼있다. 본 작업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차용해 난마돌을 나름의 방식으로 탐사하되, 지금 상연되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난마돌이라는 대상마저 작가의 자의에 의해 재편집된 허구에 불과함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난 마돌 : ( Nan madol : Season 1, 2017)>2)은 실제 난마돌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그것이 현존하는 해상 유적지이자 유물들의 군집이며 현지 언어로 사이의 공간을 의미한다는 사실로 서두를 떼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실제 난마돌과 무관하게) 저작권이 만료된 채 웹상에 데이터베이스화된 이미지들을 과거 시제에 속하는 유물로 호명하고 그것이 현재에 휩쓸린 양상 자체를 난마돌로 유비하고 있을 뿐이다. 난마돌은 정확히 무엇인가? 앞선 질문은 무용한데, 애초에 탐사라는 행위는 난마돌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작권이 만료된 이미지로 표상되는 과거, 그것을 우연찮게 발견한 사용자가 속해있는 현재, 데이터베이스화된 과거를 무한히 연장함으로써만 가늠할 수 있는 미래라는 가상의 타임라인에 서사적 얼개를 부여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어떤 세계관인데, 이는 <난 마돌 : ( Nan madol : Season 2, 2018)>에서 작가가 확보하고 있는 두서없는 이미지 아카이브, 즉 일종의 유물들이 모니터 상에서 중첩되고 재배열되는 양상으로 재현될 뿐 서사 차원에서 더 이상 심화되지 않는다. 하편은 작업 내에서 유튜브 리액션 영상의 클립을 사용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단지 상편에서 제시된 난마돌에 대한 동일한 서사를 유튜브라는 미디어 플랫폼의 적극적인 사용자의 관점에서 소화/반응해본 결과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설사 하편의 내레이션이 상편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더라도, 최소한의 얼개만을 유지한 채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방식으로 일련의 이미지들을 운용하는 것만으로 어떤 서사가 전개되고 있는 듯한 착시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결국 상/하로 구성된 <난 마돌> 시리즈는 실상 공회전하는 과거-현재-미래로 요약할 수 있는 빈약한 텍스트를 유튜브 타임라인의 맥락 속에서 증폭시켜 유통 가능한 영상 클립들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방증하듯 ‘<난 마돌> /하 리뷰 영상3)은 유튜브 리뷰 영상 형식을 빌어 이전 작업들의 개요를 요약하는 척하면서 외려 그에 대한 사족들을 덧붙여나가는 식으로 서사의 공백을 부풀린다. 이처럼 일련의 클립들은 추상적인 문장들로 언급될 뿐 명료하게 실체화할 수 없는 어떤 세계관의 서사적 파편들로 기능함으로써, 선형적으로 이어붙일 수 없는 유튜브 타임라인, 파편적으로 산개한 무수한 클립들의 형태로 백업된 시간/서사를 암시한다.

 

<난 마돌> 시리즈를 견인하는 유물이라는 존재는 웹상에 누적된 일단의 데이터 이미지일 뿐, 그것은 현실상에서 흐르는 시간과 무관하게 방부 처리된 채 사용자/화자의 의도에 따라 과거, 현재, 미래라고 명명된 시간의 하위 폴더들 중 어디로든 분류될 수 있다. 앞선 유튜브 타임라인이 무수한 클립들로 포화된, 전체를 맵핑할 수는 없지만 어찌됐든 잡다한 시간들이 웅성거리는 특정한 플랫폼 형식에서 비롯한다면, 유물들은 사용자가 발췌하고 분류할 수 있는 시간의 단락들로서 플랫폼 내의 포화 상태를 각각의 난마돌들로 군집시키고 정렬한다. 달리 말해 <난 마돌> 시리즈는 유튜브 타임라인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 감각을 증언하면서도, 얼마든지 주어진 플랫폼 내외를 넘나들며 각종 데이터 이미지를 유물로, 유물들의 군집으로, 시간이라는 상위 폴더로 범주화해 사용자의 권한 내에 종속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써 유튜브 클립의 관성에 따라 제작한 일련의 작업들은 외려 해당 플랫폼의 경제로부터 일정한 거리감을 둔 채, 즉 그 안에서의 유통 가능성을 배제한 채로 독자적인 클립들로 환원된다. 그리고 김효재는 마침내 소쇼룸에서의 스크리닝이나 <호버링Hovering>과 같은 전시에서 <난 마돌> 시리즈를 슬라이드 폰이나 CRT모니터와 같은 구형의 디바이스 상에 저장해 상연함으로써, 이번에는 디지털계에 접속해있는 상태에서 빠져나와 물리적인 차원에서의 유물을 생산해낸다.


<호버링Hovering> 전시 전경


<난 마돌> 시리즈에서의 유닛의 시점은 유튜브 타임라임의 혼란상에서 시작해 그 외의 디지털 플랫폼들을 경유한 뒤 종내 모니터/스크린 외부의 현실에 다다름으로써 무력화된다. 그 대신 사용자는 앞선 과정을 별다른 불능감 없이 소화하며(유닛의 존재를 미처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재빠른 속도로 각종 인터페이스 사이를 넘나들며, 혹은 개개의 유닛들에 몰입하지 않은 채 다양한 링크로 매개된 유닛들의 경로를 선택적으로 가로지르며) 서로 다른 형태의 유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랜더링한다. 애초에 유닛은 현실의 관점에서 대상화되지 않은 채 유튜브 타임라인 내에서 사용자와 충분히 동기화돼있고, 불능감은 작업의 발단이 아니라 역으로 사용자가 체화하고 있는 디지털계의 속도감을 점차 지연시킨 결과로서 최종적으로 관객들에게 가시화된다. 이를테면 <호버링Hovering>에서 <난 마돌 : >는 작업 외부에서 울려 퍼지는 서민우의 사운드 작업과 혼선된 채 의도적으로 몰입을 방해하며 물리적인 차원의 유물로서 동결된 클립들의 상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이때 연출된 불능감은 주어진 클립들을 <난 마돌>의 세계관에 따라 얼마든지 현실상에서도 또 다른 형태의 유물로서 사용자/작가에게 귀속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 사용자 주체에게 각인된 외상의 반영과는 거리가 멀다. 달리 말해 접속이 불가능한 유물의 상태는 사용자와 디지털계 간의 접촉이 불량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자/작가가 구형의 디바이스와 같은 올드 미디어, 근과거라는 폴더에 일련의 클립들을 일시적으로 분류해둔 결과에 가깝다.

 

이처럼 김효재가 유튜브 타임라인과 현실 간의 낙차를 발생시켜 전자에 속한 클립 형태의 서사적 파편들을 후자를 향해 투사한다면, 업체eobchae의 개인전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는 유튜브 타임라인에서 발췌한 형식/내용을 토대로 가설한 어떤 세계-공간에 안주하며 현실을 향한 모든 벡터들에 훼방을 놓거나 가상의 영역으로 우회시킨다. 업체는 작중에서 디지털계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뮤지션, 포스트 프로듀서인 프레카리-아티스트라는 직업군을 상정한 뒤, 그에 속하는 인물들을 자의로 선별해 최종 1인에게 토크쇼 참여나 뮤직비디오 제작과 같은 각종 혜택을 제공하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4)는 본 프로그램에서 최종 선택된 이괴롬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괴롬은 서바이벌의 수순을 거쳐 살아남자마자 외려 현실에서 자연발화돼 죽어버리고 실제로 작중에 등장하는 것은 이괴롬의 데이터를 토대로 형상화한 ()이괴롬이라는 아바타다. 프레카리-아티스트에게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는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이괴롬은 업체가 유튜브 타임라인, 무엇보다 그 안에 업로드된 다수의 클립들이 형성하는 소위 K-스러운 정서를 미감의 기준으로 삼는 독자적인 컨텐츠들을 구현 제시하기 위해 철저히 도구화된다. 이를테면 이괴롬의 죽음은 최종 선택의 순간과 동시에 어떠한 인과 관계도 없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단지 자아를 데이터 차원에서 백업시키기 위한, 즉 컨텐츠의 재료로 삼기 위한 의도적인 살해에 가깝다.

 

문제는 그러한 폭력적인 착취-피착취의 관계가 업체에 속한 실제 인물들 간에 이루어지는 일종의 역할극에서 비롯한다는 점이다. 고인이 되기 이전의 이괴롬을 연기하는 인물은 제3자가 아니라 업체의 일원인데, 이로써 착취의 대상은 모호해지고 실제 등장 여부와 무관하게 본 작업에 연루된 모든 인물들이 일군의 프레카리-아티스트로 환원된다. 달리 말해 본 작업의 내러티브는 특정한 프레카리-아티스트, 즉 업체가 대중/관객에게 가시화되기 위한 방편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빙자한 가상의 위계적인 플랫폼을 고안한 뒤 그 안에서 다름 아닌 스스로를 착취한 결과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고 이괴롬은 업체의 자기 살해를 통해 구현된 아바타인 셈이며, 전시장 한편에 VR로 구현된 부산스런 분향소 또한 단순히 피착취자의 죽음을 냉소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업체의 자기 애도를 위해 가설한 또 하나의 무대로 귀결된다. 이처럼 착취-피착취의 행위가 맞물린 자가 생산 구조를 전제한 상태에서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를 독해하면, 본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K-스러움은 오로지 디지털계만을 작업의 근거로 삼는 사용자/작가가 자신이 속해있는 유튜브 타임라인 내에서 번성하고 있는 한국발 스레드의 사용자들을 겨냥해 그 안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차용하고 과장한 틈새 공략의 결과로 귀결된다. 달리 말해 K-스러운 컨텐츠에 대한 과몰입 상태는 특정 개인에게 체화된 저질 미디어 정서의 발현이기 이전에, 국내의 웹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다. 자기 애도의 과정마저 무대화시키는 프로세스를 추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효과적인 유통인 것이다.


업체eobchae / 보너스 리워드: ()괴롬을추모 / VR 설치 / 가변크기 / 2017

 

우리는 여전히 유튜브 플랫폼 전체를 섣불리 맵핑할 수 없되, 그 속에서 업체와 같은 프레카리-아티스트가 속한 지정학적인 위치를 가늠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위치는 모든 사용자가 수용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업체가 유튜브 플랫폼에 대한 간략한 시장조사 끝에 선택한 특정한 소비층의 네트워크다. 디지털계의 특정 구간을 취사선택하고 이를 토대로 어떤 세계관을 망상해낸다는 점에서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는 일정 부분 유닛의 시점에 기반하고 있다. 이를테면 온갖 인터넷 밈, 짤방 등을 동원해 제작한 고 이괴롬의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일련의 컨텐츠들은 특정한 소비층과 매개된 유닛들과 동질화한 업체의 유닛이 체감하는 유튜브 타임라인을 상연한다. 주지하듯 이때 연출된 K-스러운 풍경은 실제 현실의 잔상들을 기워낸 조각보가 아니라, 이미 디지털에 의해 여과된 K-서사의 파편들, 특정한 생산자/소비자들이 방출한 일종의 데이터 폐기물들을 리믹스한 결과다. 다른 한편 업체는 본 전시에서 현실에서의 스트리밍을 명목으로 이괴롬이 제작했다고 상정한(실제로는 업체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해 연성한 재료들인) -음악, 일종의 데이터 폐기물들을 CD-ROM에 저장해 굿즈 형태로 무료 배포했는데, 이는 실제 유통처, 즉 디지털계에 속한 작업의 판촉 이외의 목적으로 현실의 재료를 취할 의사가 없음을 드러낸다.5) 비록 업체는 앞선 착취-피착취의 자가 생산 구조를 국내의 웹 생태계의 관성에 휩쓸려 수동적으로 선택했지만, 그에 앞서 디지털계는 이들에게 디폴트의 환경이고 그 안에서의 폐쇄적인 생산라인에 자족하고 있다.

 

김효재와 업체의 작업을 대질했을 때 괄목할만한 점은 이들에게 유닛이란 단지 사용자 주체에게 부속된, 얼마든지 편의에 따라 탈착 가능한 다수의 시점, 말 그대로의 계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사용자 주체는 특정한 유닛-시점을 일시적으로 운용할 뿐, 그 안에서의 몰입감을 미처 해소하지 못한 채 여타의 유닛들이나 현실에서의 경험으로까지 연장하면서 굳이 어떤 착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설사 단일 스크린 상에 다수의 유닛-시점들이 중첩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것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사용자의 권한, 혹은 사용자가 다시점을 전략적으로 선택했다는 전제 자체는 고스란히 유지된다. 이를테면 업체의 <업로드 유어 데스티니>나 김효재의 <난 마돌 : >에서 제시된 서로 다른 혼란상은 얼핏 유튜브 타임라인에 압도당한 사용자/유닛이 오작동하는 풍경처럼 보이지만, 전자는 작업 유통의 효율성 및 업체라는 브랜드 홍보를 위해 유튜브 타임라인의 특정 구간을 프로듀스한 결과일 뿐이고, 후자는 난마돌의 재료들을 캐내기 위해 데이터베이스의 면면을 가로지른 궤적의 기록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닛은 여전히 사용자와 동기화하되, 그 과정에는 더 이상 불능감이라는 외상이 개입할 만한 여지가 없다. 일련의 작업들에서 분란하게 움직이는 데이터 이미지들, 그로 인해 가중되는 속도감은 현실과 가상의 간극에서 교환되는 잔여 전류들이 합선된 결과가 아니라, 오로지 가상에 임포트된 데이터 재료들이 사용자의 레이아웃 내에서 재배열/재편집되는 과정을 암시할 뿐이다. 이들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유닛의 시점을 빌어 불능감의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유닛과 일시적으로 접촉한 순간들을 어떤 식으로든 중첩하거나 클립의 형태로 나열해 동류의 사용자들과 공유하고자 하는 유닛들의 조작감, 즉 사용자 경험 자체다.

 

1) 강정석, <특별공략, GAME 완전분석 매뉴얼>, 전시 텍스트 수록

2)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7RGpdODcPPKUehoQEW2TuZjtIR9aD0pH

3) https://www.youtube.com/watch?v=Rl2BufCB1Do

4) https://www.youtube.com/watch?v=jurwh4Z1fe8&feature=youtu.be

5) 업체는 전시 현장에서 무료 배포한 '()이괴롬'의 음반에 수록된 일련의 트랙들을 별도의 웹 사이트에 공개했다. 음원은 다음의 링크를 통해 청취할 수 있다. (leegwerom.com)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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