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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공간 유저들을 위한 오픈베타서비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본 글은 미술세계 12월호 특집 '신생공간 그 너머/다음의 이야기'에 게재되었습니다.


WEAVER - SEOUL METRO, (http://weaverhub.blogspot.kr/)

 

신생공간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브하는 엮는자계정의 2015년 하반기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서울 각지에는 총 27곳의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가 존재했었다. 반드시 전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여타 독립서점, 이벤트 공간, 미팅 룸 등은 앞선 27개 목록의 하위에 따로 분류되어있다. 그러나 이 ‘27’이라는 숫자는 유동적이다. 가장 최근 집계된 결과(2016.10.12. 업데이트)에 따르면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는 총 24곳으로 감소했고, 그 사이 새로 개설된 공간 몇몇이 운영 종료된 공간들 대신 목록에 추가됐다. 무엇보다 애초에 신생공간이라는 범주 자체가 공인된 라이센스가 아니듯 엮는자의 시야에 미처 포착되지 못한 공간들도 다수 존재하며 기존에 분류된 목록들이 공간의 운영방식의 변화에 따라 재구성되기도 한다.

 

이를 지표 삼아 자연스레 상기하게 되는 의문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 신생공간이라는 명칭이 SNS상에서 거론되기 시작하고 각종 지면상에서 신생공간 자체를 담론 내지는 이슈로 소급하기 위한 성급한 시도들이 뒤이었을 때부터 제기된 다소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의 요점은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이 정작 공간 운영 주체들로부터 비롯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호명인가? 그렇다면 그 외부는 무엇인가? 이처럼 최초의 발화자를 물색하는 듯한 공허한 소요가 잠시나마 일었지만, 갈수록 명확해진 것은 신생이라는 미심쩍은 명칭과 별개로 개별 공간들이 공통의 플랫폼으로 체감된다는 사실이었다.

 

신생공간은 1세대 대안공간들의 파국 이후에 재차 대안을 가설하기 위해 조직한 사회정치적 매니페스토가 아니라, 애초에 00년대 초중반의 활황세에 빚진 적이 없거나 더 이상 제도의 부산물들을 가용할 수 없는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마련한 거점들의 총합이다. 그러나 총합이라는 단위는 과정상의 불균질함을 소급하지 못한다. 신생공간이라는 호명에 대한 반발 내지는 불편함은 개별 공간들이 생성된 구체적인 맥락과 운영의 방향성 및 정체성의 미묘한 차이들이 플랫폼, 담론, 혹은 호명 방식 자체에 의해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불안정한 현존성은 신생공간이 점유한 2015년이라는 특정적인 시공을 견인한 주요한 동력이기도 하다. 개별 공간들은 SNS상에 개설한 각자의 계정을 통해 각자의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유통시키며 스스로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그 결과 서로 혼선되는 정보량 자체가 일종의 공론으로 감지되며 플랫폼이라는 착시를 가속화했다.

 

조금 과도하게 말하자면 결국 각자의 특정성이 데이터 차원에서 희석되며 서로를 임의로 연결 짓는 통로를 열어젖혔다고 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줌아웃을 해보자. 당장 일별할 수 있는 것은 서울이라는 지정학적인 토대와 그 속에 다소 무작위하게 배열된 신생공간들의 좌표와 그 사이의 간극 혹은 여분으로서의 공간이다. 우리는 연결이라는 행위가 암시하는 것처럼 개별 공간들 사이를 실선으로 잇거나 몇 가지의 계열에 따라 그루핑하는 식으로 공간을 직접적으로 작도할 수 없다. 신생공간 혹은 그곳이 위치한 서울의 변두리를 찾아다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관객들의 GPS유닛은 조감된 화면 위에 어떠한 물리적인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줌아웃과 그로 인한 조감의 시점은 얼핏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이를 통해 신생공간 플랫폼을 시각적으로 재확인하려는 시도는 무용하며, 우리가 신생공간에 모종의 공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선 실선이 아니라 차라리 그 이면에서 유통시킨 데이터들의 얼개를 작도해야한다.

 

그러나 한때 공론으로 감지됐던 정보량 자체를 뒤늦게 개개의 발화들로 분별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미 형해화된 데이터에 실체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신생공간 플랫폼을 구성하는 와중에 발생한 일련의 변수들을 어떻게 정보량으로 희석했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실제로 SNS의 타임라인 상에서 상연된 것은 가상의 계정들 간에 이루어진 비평적인 피드백이 아니라, 신생공간에 대한 서로의 경험치를 공유하며 동시성의 감각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굳이 대항제도를 자처하며 깃발을 꽂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미술제도로부터 이탈한 채 전시공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생성을 도모하기 위해서 혹은 반드시 공간을 가설하지 않더라도 파편화된 개인으로서 미술을 지속하기 위해서 링크의 감각을 활성화한 셈이다. ‘반지하 B½F’가 표방하는 오픈베타공간이라는 정체성처럼 신생공간은 젊은 미술 생산자들이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모의실험의 장이었지만, 링크를 매개로 플랫폼이 한시적으로 확장된 이후 바로 그 모의실험을 언제까지 반복하거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재고할 수밖에 없다.

 

다른 한편 모의실험은 그 자체로 작업을 조형해나가는 특정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굿->에 참여한 총 15개의 신생공간과 80여명의 작가들이 현장에 부려놓은 굿즈형식의 작업들은 단순히 아트 마켓에서 판매되기 위한 상품이 아니라, 신생공간들이 동기화한 오픈베타의 상태를 경유하며 분절된 조형적인 단위들이다. 원본 작업의 스케일을 축소하거나, 일부를 절삭하거나, 카트리지 케이스에 압축하거나, 디지털 프린트하는 식으로 2차 창작을 거듭한 결과물들은 미처 완결되지 못한 작업으로서 그 이전의 전사와 이후의 전개를 암시한다. 이처럼 오픈베타 형식의 작업들은 신생공간에 속한 당사자들과 마찬가지로 링크의 감각을 지향하며 어떤 연결을 예비하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파편으로부터 정확히 어떤 독자적인 경험의 회로들을 개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말 그대로 오픈베타서비스는 계속 연장되고 있다. ‘굿즈에 백업된 각각의 작업을 어떻게 해금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는 개별 공간들이 동시성을 잃어버렸을 때 무엇으로 구실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와 유사하다.

 

지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막한 <서울 바벨>에서 총 17개의 신생공간이 이합집산한 장면은 개별 공간들이 문득 현실의 중력에 붙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별 공간들은 그간 자체적으로 진행한 전시나 레지던시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축적한 성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각각의 구간을 점유했지만, 정작 열거된 작업들은 공간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일정한 범주로 묶이지 못한 채 다소 산란하게 뒤섞여있다. 이는 단순히 신생공간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해온 컨텐츠들 간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간 공통의 플랫폼이라는 착시 속에서 이들이 어찌됐든 동질적인 대상으로 간주됐으며 그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각자가 잃어버린 접촉면을 암시하거나 노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는 <서울 바벨>이 마치 신생공간 플랫폼의 물리적인 잔해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시성의 감각은 정확히 무엇을 지향했는가? 우리는 이를 선뜻 캐묻지 못한다. 신생공간은 세대교체를 가속화하기 위한 유효한 방편이었을 뿐 그 이후의 대안까지 선취해낸 영구적인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바벨> 전시 전경 일부

 

앞선 <굿->를 통해 신생공간 자체의 동력이 완결됐다고 회자되는 이유는 그간 명시적인 교류가 없었던 개별 공간들이 연계된 채 굿즈라는 조형적인 단위를 공통의 언어로서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일련의 작업들을 재구성하며 자발적으로 플랫폼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신생공간은 여전히 잔존하며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의 목록은 앞으로도 갱신되겠지만 모두가 예감하듯 2015년 자체는 결코 재연될 수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신생공간으로 호명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반드시 세워야한다면, 시작점은 다소 모호하되 2015년이 마감된 바로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인가? 가소성의 압력을 견디며 반복한 모의실험의 잔여들은 신생공간을 가늠할 수 있는 징후인 동시에 이후의 시간을 전개해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지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앞선 정보량은 일종의 경험치로 누적된다. 지도상의 좌표들을 억지로 작도하는 대신 공간을 가상의 계정과 연동시킨 채 서로에게 접속하기를 반복하면서, 물리적인 토대와 중력은 점차 당연한 전제가 아닌 공간에 부속된 레이어로 변화한다. 결국 공통의 플랫폼이 걷힌 자리에서 헛돌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매한 공간의 위상 자체다.

 

오픈베타 형식의 전시는 단순히 미완성의 결과물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온전히 합성되지 못한 작업의 파편들을 그 자체로 유지함으로써 서로를 가리키는 링크의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공통의 플랫폼을 잃어버린 개별 공간들은 링크의 절단면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자신과 연결된 명시적인 대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잔존하는 링크의 관성에 따라 현실의 거점에 정주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한 번 정보량으로 희석된 뒤 내뱉어진 공간은 데이터 흐름 속에 휩쓸리며 어긋난 관계들을 일종의 외상으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랜더링이 덜 된공간은 스스로를 일종의 인터페이스로 환원한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링크의 방향성은 이제 공간의 내부로 수렴하며 기존의 공간성을 벡터의 관계로 재조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공간을 실제로 무너뜨리며 조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그 대신 재차 오픈베타를 가동하여 각각의 파편들을 필요에 따라 배치하고 때로는 어긋난 방향성을 유도하며 이전과는 다른 공간 경험을 연출해낼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한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주요한 문제는 모의실험의 과정을 거쳐 변화한 공간의 위상을 각자의 방식으로 최적화하는 데 있다. 더불어 각종 스마트 기기를 이용하여 데이터라는 불가해한 대상을 보다 편의적으로 운용하는 와중에 특정 공간을 포함한 일련의 사용자들이 체득하는, 갈수록 저하되거나 모호해지는 현실의 해상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정보 이미지들은 여전히 과잉 생산되는가? 혹은 이러한 과잉은 여전히 사용자 주체에게 과부하와 정신착란을 유발하는가? 지역 괌성유망을 이어붙이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월드 와이드 웹을 상상하던 90년대에 비해 데이터의 속도는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증가했지만, 어느덧 우리는 이를 따라잡기를 멈췄다. 더 이상 뉴미디어에서 상연되는 디지털 기반 이미지들의 산란한 풍경에 시각적으로 압도되지도 않고, 하이퍼링크를 매개로 펼쳐지는 페이지들의 관성에 일방적으로 휩쓸리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속도의 스펙터클 자체에 둔감하다. 과잉 생산은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매개되지 않는다. 데이터베이스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뒤섞고 무너뜨리지만 이는 인터페이스 배후의 사건일 뿐, 사용자는 단지 손끝으로 밀어서없애거나 선택적으로 크롭할 뿐이다.

 

결국 산란한 감각은 영점으로 하향되며, 영점의 상태는 바로 우리가 처한 현재를 규정 짓는다. 설사 특정한 레이아웃 상에서 이미지들을 편집하거나 작도하더라도, 그와 연동하는 행위는 오로지 인터페이스 상에서만 이루어질 뿐 정작 행위를 결정짓는 데이터 알고리즘, 이를테면 배후에 놓인 실재와의 관계는 부재한다. 그리고 이는 점차 굳이 현실을 뒤집어볼 필요도 여력도 없는 수동적인 인터페이스 감각으로 귀결된다. 정신착란이 없거나 과잉에 대한 체감을 잃어버린 세계.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스로를 재현하는가?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은 인터페이스의 뒷면과 달리 우리와 거리낌 없이 동기화되는가? 그것은 사실 영점에 대한 지속적인 재확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용자는 저하된 해상도에 몰입하기 위해 애꿎은 눈을 비비기보다 차라리 표면 위에 또 다른 경험들을 가설해나가는 편을 택한다. 이제 인터페이스는 무감각이 아닌 표면 자체를 응시하는 새로운 관점과 각도들을 요구하고 있다.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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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0) 노상호 개인전 <THE GREAT CHAPBOOK> 릴레이 텍스트 시작. 다소 이상한 청탁을 받은 관계로, 오늘 12일부터 본 전시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이나 그로부터 비롯한 두서없는 망상들을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1) 노상호의 삽화들은 개별성을 띄기보다, 단지 공간적으로 확장되기 위해 습관적으로 파생된다. 이러한 작업 환경을 과도하게 줌아웃해보면 개개의 삽화는 나름의 정보값을 지니지만 이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하지는 못한 채 망점의 일부로 수렴한다.

 

2) 그런 의미에서 삽화들은 각자 다른 이야기 배경을 지니지만, 이를 링크삼아 변별적인 서사들에 일일이 접속하고 재확인하는 일은 무용하다. 뒤이은 의문은, 애초에 삽화라는 형식은 그와 병행하는 이야기를 온전히 재현할 수 있는 구조인가?

 

3) 삽화는 이야기를 트레이싱하기보다 이미지를 통해 추상화한 불완전한 단면만을 제공한다. 이는 어쩌면 비유적 의미에서의 망점으로 삼기에 적합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거시적인 화면의 밀도를 구성하기 위한 재료로써 충분히 가볍기 때문이다.

 

4) 이처럼 줌/아웃을 넘나들며 서사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전제야말로, 이미지로 포화한 세계에서 굳이 이야기꾼을 자처한 이가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난점인 셈이다.

 

5) 전시 현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일련의 삽화들은 각종 진열대에 품번이 매겨진 채 정렬되어있다. 과연 모든 이미지를 수렴하여 노상호에 대한 명확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는 관객이 있을까? 그런 행동은 무의미할뿐더러 불가능하다.

 

6) 인간은 스캐너가 아니며, 애초에 스캐너 또한 이미지를 열화 저장할 뿐 독해 장치가 아니다. <THE GREAT CHAPBOOK>에 진열/집적된 무수한 삽화들은 단지 시각적으로 소비될 뿐이다. 소비가 거듭될수록, 망상의 폭은 일시적으로 확장된다.

 

7) 이때 망상의 폭은 마치 각자가 무작위로 일별한 이미지 재료를 나름대로 취합할 수 있는 일종의 레이아웃을 연상케 하지만, 그것이 망상인 한 레이아웃처럼 정교하게 작동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재료 이전에 거듭 형해화된다.

 

8) 노상호가 메르헨으로 호명하는 불특정한 이야기들에 반응하며 조건반사적으로 그려낸 삽화들은 특정 서사의 링크로 작용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미지 소비만을 유도하며 정작 링크를 무효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9) 서사와 매개된 링크의 절단면만이 남았을 때, 삽화는 자신의 출처 없음에 대한 외상을 일종의 자기반복성으로 벌충하려한다. 혹은 서사의 깊이감에 대한 소실점이 와해되며 단지 이미지들의 유한한 표면적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10) 삽화와 병행하는 일련의 텍스트(http://thegreatchapbook.com/)가 삽화의 오래된 전사인지, 이미 전사를 잃어버린 삽화에 사후적으로 덧붙인 사족인지 불분명해진다. 문제는 메르헨자체가 이미 사족들의 난무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11) 그러므로 노상호는 사실 이야기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출처 없음의 삽화들에 부합할 법한 픽션을 전개하기 위해 메르헨으로 총칭되는 각종 설화, 경험담, 풍문 등을 수집 나열한다는 역전된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다.

 

12) 삽화라는 형식은 이미지가 서사성과 맺은 일종의 협약이다. 마침내 그것이 무효한 시점에서 삽화의 잔여만을 토대로 삼는 픽션을 납득할 수 있을까? 이제껏 파생된 의사-삽화들이 구성하는 표면적을 픽션으로 수렴할 수 있을까?

 

13) <THE GREAT CHAPBOOK>에는 삽화와 (텍스트로 기술되는) 픽션이라는 두 개의 시공이 공존하며, 전자는 후자를 앞지르며 서사가 남긴 추상적인 자재들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단절된이미지들의 총량은 여전히 가볍다.

 

14) 1)에서의 망점의 비유는 유효한가? 노상호는 데이터베이스 기계가 아니므로 개별 이미지들을 망점으로 흐리는 정도의 방대한 표면적을 확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개별성은 여전히 전체상의 밀도 속에서 와해된다.

 

15) 노상호는 지난 <굿->에서 지형과 지물을 비롯한 삽화 속 객체들이 무분별하게 산개한 걸개그림의 일부를 잘라서 관객에게 판매했다. 이제 삽화는 서사의 반영에서 벗어나, 단지 무작위로 크롭됨으로써 하나의 장면으로 성립한다.

 

16) 5)에서 언급한 진열대의 풍경 한편에는, 시야를 압도하는 배율의 걸개그림들이 짧은 간격을 두고 순차적으로 나열돼있다. 그 중 하나는 <굿->에서 판매된 그것인 듯, 잘려나간 일부를 방치하거나 재차 드로잉으로 기운 모양새다.

 

17) 사잇공간에서 대면한 걸개그림은 결코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다. 관객은 단지 제한된 시선의 범위를 옮겨 다니며 삽화의 일부들을 마찬가지로 크롭해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이는 작가가 제 세계관을 오려 붙이며 2차 창작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18) 노상호는 삽화가 지니는 양가성이 분기하는 임의의 장소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미지와 픽션은 각자의 분기 속에서 파생한 객체들을 느슨하게 직조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삽화라는 분기점을 의식한 채 주저하며 자기완결성을 지니지 못한다.

 

19) 이는 열린 공간이라기보다 별다른 체계 없이 열거된 썸네일의 파편들 같다. 전시장의 이미지들은 때로 각기 다른 배율로 확대 축소된 채 종이의 질감에서 벗어나 디지털 프린트되거나 공간의 면면에 설치되지만, 결코 한 데 증척되지는 못한다.

 

20) 그 결과 주어진 것은 일종의 가설무대다. 그러나 무언가 상연되기를 예비하기보다, 아무런 서사도 되비치지 못하는 불투명한 삽화들의 항구적인 대기상태만이 남아있다. 관객은 그 사이를 거닐고, 일별하고, 무엇보다 크롭한다.

 

21) 이로써 표면적을 배회하는 시선은 일시적인 공간 경험으로 구체화된다. 다른 한편에서 이야기꾼은 여전히 무용한 독백을 계속하고 있다. 그 사이의 간극이야말로 <THE GREAT CHAPBOOK>이 보유한 이미지들의 재단선이다.

 

22) 릴레이 텍스트는 여기까지입니다. 웨스트웨어하우스도 전시와 함께 오늘부로 막을 내리게 됐네요. 간혹 발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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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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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메이 어택: --캐스트>, 피규어의 피규어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민메이 어택: --캐스트>에서 전시된 영상의 일부


2d3d, 재차 3d를 현실에서의 오브제로 번역하는 시도가 전제하는 것은 과정상에서 손실되는 본래의 형태다. 앞선 과정에서 2d는 일종의 원본으로써 작용한다. 그것은 납작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점차 물적인 대상으로 구체화되지만, 그로 인한 최종적인 결과물은 ‘2d의 현전이 아니라 오브제의 면면에 다소 왜곡된 방식으로 투영된 2d의 잔해들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잔해 혹은 파본들을 가상적 차원에서 오려붙임으로써 2d3d 혹은 2d와 오브제 사이의 등가성을 나름대로 유추해낸다. 이는 일정 부분 피규어가 생산 소비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특히 2차 창작 차원에서 생산되는 피규어는 대부분 특정 아니메의 등장인물, 이를테면 돈선필 개인전 <민메이 어택: --캐스트>의 한편에서 상연하는 아야나미 레이와 같은 캐릭터를 지시한 채 현실에서의 다양한 모델들을 파생시킨다. 실제로 에반게리온에서 아야나미 레이의 신체 껍데기는 대량 복제된 채 LCL용액이 담긴 쇼윈도에 진열된다. 작중의 껍데기들은 말 그대로 복제되어 형태상으로 균일하지만, 아야나미 레이라는 2d캐릭터를 토대로 조형한 현실에서의 피규어들은 원본을 암시할 뿐 원본 자체는 아닌 불안정한 상태에 그친다.

 

돈선필은 몇 년 전 K에게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를 선물 받았다. 이후 상연되는 영상의 내용은 마치 <민메이 어택: --캐스트>의 부록처럼 피규어의 전사前事에 대해 두서없이, 그러나 나름대로 성실하게 읊조린다. 작가 본인이 자처한 화자는 어딘가 엉성하게 조형된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해당 모델 품번을 검색 엔진에 기입한 뒤 웹상에서 관련한 정보들을 수집 나열한다. 그것은 가이낙스에서 캐릭터 판권을 구입한 세가SEGA97년도에 제작한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 시리즈 중 하나이며, 신세기 에반게리온 TV26화에서 등교하는 레이의 모습을 크롭한 결과다, 기타 등등. 그러나 해당 영상은 특정 장면의 크롭 과정과 이를 재차 피규어로 만들기 위한 모델링 과정을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K로부터의 선물이라는 전제는 피규어가 화자의 일상에 우연하게 불시착한 결과일 뿐임을 암시한다. 더불어 모델 품번을 통해 이루어지는 웹상에서의 역추적은 명확한 도착지를 상정하기보다,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의 엉성한 조형 상태가 유발하는 모종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과정에 가깝게 전개된다. 그러나 실제로 불편함은 해소되기보다 또 다른 단서로 주어진다. 피규어 신체의 절단면, 단차, 혹은 관절의 움직임, 도색과 같은 구체적 요소들이 오작동하거나 미완의 상태일 때, 사용자/수집자는 은연중에 그것들이 2d작화에서의 (‘등교 중이라는) 동적인 상태가 일순 단일한 형상으로 굳어버리고 무엇보다 아야나미 레이라는 캐릭터를 현실상에 조형하는 와중에 의도적으로 포기하거나 손실됨으로써 주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직감한다. 달리 말해 피규어 제작은 본질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엉성한 모양새의 보급형 피규어는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방증하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돈선필이 앞선 역학을 (K를 매개로 한) 사적인 얼개 속에 수렴하고자 할 때, 그는 스스로를 피규어라는 대상의 질감을 순전히 인상 차원에서 대하는 다소 무미건조한 위치에 놓으며 오타쿠 스테레오 타입과 일정 부분 거리감을 둔다. 이를테면 웹 서핑을 통해 열거하는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의 정보들은 (서브컬쳐) 데이터베이스를 체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우연찮게 습득한 사물을 통해 이루어진 우연한 결과에 불과하다. 또한 앞선 역추적의 동력은 모에와 같은 흐뭇한 감정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불편함과 같은 위화감에서 비롯한다. 돈선필은 앞선 전제 속에서 피규어에 일순 집적된 데이터 객체들, 이를테면 그가 <피규어TEXT>에서 부연하듯 캐릭터의 특성을 사물화하여 갖가지 장식과 부가적인 신체 요소들로 분별해 저장한 캐라형식의 데이터베이스를 외면한 채 오로지 피규어로서의 표면과 형태만을 취하고자 한다. ‘캐라가 부재한 피규어는 2d의 파본 혹은 껍데기 그 자체다.

 

마찬가지로 <민메이 어택: --캐스트>에서 제시된 피규어 조각들은 특정 캐릭터와 연관된 지시 관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츠네 미쿠, 데빌맨, 인디아나 존스(...)와 같은 캐릭터 형상들은 대개 두서없이 쌓인 포장 스티로폼 박스나 골판지의 잔해들, 혹은 마우스, 게임패드와 같은 소도구들 사이에서 본래의 스케일을 유지한 채 놓여있을 뿐, 이는 해당 작품의 레퍼런스를 물리적으로 재현하는데 실패한 기념비 따위가 아니라 단지 앞선 사물들의 군집을 빌어 조각 비슷한 것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이때 피규어가 지닌 정보값은 그것이 특정 캐릭터를 표상한다는 사실 외에는 별다른 여지가 없으며 주변의 얽혀있는 잔해들 중에서 이를 보충할 만한 데이터 흔적을 찾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닫힌 링크를 자처한 피규어는 더 이상 내적 요소들로 분해되거나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개별적인 피규어 사물로 환원된 채 한데 쌓이거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린 민메이가 펼친 민메이 어택을 은유하기 위한 무대장치의 일부로써 어떤 가상의 장면을 축소 스케일로 연출하기 위해 기능할 뿐이다. 전자의 경우 피규어를 포함한 잔해들의 몸체는 단일한 색의 아크릴로 도색되어 후자와 엇비슷한 맥락에서 굳이 조각적 장면을 연출해내려 한다. 혹은 피규어와 사물 간의 불완전한 등가성이 별다른 합선을 이루지 못한 채 마감 처리되어 그 자체로 대상화된다. 그 속에서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지위를 잃은 채 오로지 외연만이 존재하는 텅 빈 피규어들은 수집된 대상으로써 본래의 형태와 스케일을 포기하지 않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이 되기 위해 일상적 소도구나 파편들을 딛고 오른다. 일련의 피규어 조각은 마치 사물화된 조각적 몸체를 탈환하는 데 실패하는 장면을 포착한 정지화상처럼 보인다.


<민메이 어택--캐스트> 전시 일부, 리캐스트recast된 '민메이 어택'


닫힌 링크는 피규어 신체의 절단면, 단차, 혹은 관절의 움직임, 도색과 같은 구체적 요소들의 총합을 굳어버린 단일 개체로 호명한다. 그러므로 피규어 조각 속 피규어는 본연의 물리적 속성을 유지한다는 대전제 하에 부분적으로 절단되거나 여타의 부품을 추가해 조립할 수는 있지만, 데이터로 환원된 채 가상의 그리드 상에서 유동적으로 재구성할 수 없다. 피규어는 오로지 피규어로서만 배열될 뿐이다. 그것은 여전히 캐릭터를 표상하며 특징적으로 감지되지만, 그와 별개로 연출된 장면의 일부로 기능하는 순간 주변의 소도구들 사이에서 극도로 배율이 낮아지며 2d적인 파본을 굳이 뜯어볼 필요가 없을 만큼 축소된 대상으로 환원된다. 이로써 순전히 인상 차원에서 수렴하고자 했던 피규어 자체의 형태와 질감은 사용자/수집자의 시점으로부터 점차 멀어지는 와중에 데이터와 사물 사이에서 고립된다. 달리 말해 피규어는 데이터로 연역될 수도 일상적인 사물로 온전히 중화될 수도 없는 상태로 몰가치해지는 것이다.

 

앞선 화자가 K로부터 선물 받은 레이 피규어는 즉각적인 불편함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얼핏 이수경의 <F/W 16>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서울 도심 속의 혐오스런 남성-노인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이수경은 돈선필과 달리 남성-노인과 연계된 링크를 자의적으로 열어버림으로써 자신이 그간 인상 차원에서 수집 저장한 그들의 옷차림을 비롯한 외형적인 요소들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그 중 일부를 꿰매고 기워서 일련의 페브릭 조각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우연히 맞닥뜨린 특정 남성-노인은 불가해한 혐오 덩어리 자체로 응결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로 수렴되기 위해 스킨 차원에서 편의적으로 도축된다. 결과적으로 본체인 인물 자체는 휘발된 채 그에 부속된 소위 사물의 형상들만이 재조합되어 불균질하되 단일한 조각의 품을 이룬다. 페브릭 조각은 서브컬쳐와 무관하지만 그와 별개로 캐라의 방법론과 흡사하게 인물 자체에 대한 초점을 주변부로 확장하고 이를 혐오에 대한 은유체로 활용한다.1)

 

반면 리캐스트recast된 피규어는 자신의 특징적인 외연을 빌어 어떤 것도 반영하지 못한다. 물성화된 캐릭터 형상은 랜더링과 실제 조형 과정에서 포기하고 손실된 본연의 정보값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 점유하고 있는 현실 좌표 상에서만 크롭되고자 한다. 이를 방증하듯 또 다른 영상에서 다중창 형식으로 배열한 클립들의 일부는 원본의 2d캐릭터가 투사된 모니터의 전면에 특정 피규어를 배치하거나 유사한 방식으로 동일 피규어를 모니터 내외에서 대질시키며 피규어의 전사前事를 물리적 인터페이스 속에 가둔다. 달리 말해 (캐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사물화를 자처한 피규어를 역추적하고자 하는 시도는 모니터에 가로막힌 채 원본과 연계되지 못하거나 표면상의 가상적인 이미지로 어른거리는 자신의 현재 모습만을 재확인할 뿐이다. 이런 식으로 순수한 사물의 관점에서 데이터 반영성을 차단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에서의 피규어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작은 크기 속에 여러 이미지를 응축시켜놓은 집합체.2) 그러므로 결국 일상을 반영하는 사물로써도 거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2d를 피규어로, 피규어를 재차 사물로 리-리캐스트하려는 추동은 고립 그 자체에 있다. 이때 피규어는 이수경이 페브릭에 투영된 스킨들로 해체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던 바로 그 본래적 형태로 남고자 한다. 돈선필은 고립된 피규어 자체를 자신에게 우연히 주어진/불시착한 (그리고 제작자에 의해 평면상의 캐라가 물질로 구체화됨으로써 이미 완결된) 또 다른 원본으로 삼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변주할 수 있는 여지를 자연스레 포기한다. 이제 피규어는 독립적인 개체다. 그것을 조각으로 귀결시키기 위해선 내적으로 해체-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피규어와 무관한 사물들 혹은 피규어와 절단된 피규어 부품들을 한데 배열하는 식으로 특정 장면을 연출해낼 수밖에 없다. 이로써 2d와 달리 실제의 피규어가 전제하고 있는 360도 전방위의 뷰view<민메이 어택: --캐스트>에서 연출된 피규어 조각의 몫으로 이전된다. 그러나 이때 인식할 수 있는 형태와 질감이란 단지 일상에 불시착한 덩어리가 자신의 자기조형성을 거듭 유예하는 장면에 부여된 혹은 그 위에 끼얹어진 외연에 불과하다.

 

피규어 조각의 범주 안에 동원된 각각의 요소들이 나름대로 각축을 벌이는 동안 피규어가 사물을 의태하려는 관성은 역으로 사물이 피규어를 의태하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양자는 결코 동일한 가치를 매개로 합선되며 조각적 형상을 선취하지 못하지만 어찌됐든 이를 지향하는 정지화상 속에 함께 포착되고 그 자체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피규어 조각은 자신의 내적인 역학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한 채 형태와 질감만으로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피규어다. 피규어로 피규어를 재생산하고자 한다. 실제로 피규어 조각은 전시장 내에 배치된 각종 중고가구와 전자제품과 함께 임의의 가격표를 매단 채 진열되어있다. 이러한 풍경을 찬찬히 훑어보면 결국 조각의 외부에서도 엇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군가 피규어 조각 모델 중 일부를 구입한다면 왜 구입할까? 여타의 물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은 여러 사물들이 이미지를 대신해 응축됐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인과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민메이 어택: --캐스트>는 멎어있다. 결국 아야나미 레이 피규어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불편함은 어떤 식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출처가 명확해질수록 피규어는 단지 불편해지기 위해 조형된 대상이라는 사실만이 강조될 뿐이다. 끼얹어진 외연은 전방위로 굳어있고 그래서 선뜻 무효를 선언한다.

 

1)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F/W 16>, 혐오의 오브제 전시하기’, 집단오찬 (http://jipdanochan.com/74) 

2) 돈선필, <피규어 TEXT>, 유어마인드, 2016, 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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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W 16>, 혐오의 오브제 전시하기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이수경 개인전 <F/W 16>에서 전제하고 있는 혐오스러운 서울의 풍경에서 편집해낸 이미지들의 직관적인 꿰매기로 탄생한 시각적 혼합물1)은 일종의 덩어리들로 주어져있다. 서울에 거주하는 남성-노인의 옷차림으로부터 빌려온 각종 패브릭과 장식물들은 이수경의 직관에 따라 재구성된다. 작가는 결국 덩어리로 귀결되는일련의 조각들에 대한 재단법을 ‘LA갈비 도축법이라 명명하는데, 이로써 절단된 면들은 특정한 조형의 목적성에 부합하는 것이라기보다 효율적으로 생산/유통되기 위해 가동되는 조립라인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덩어리는 패브릭으로 상징되는 의복의 소재들로 조합된 결과다. 이때 조합의 과정은 엄연히 실재하는 혐오의 대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열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1) 기억형상

 

기억형상은 일전의 <던전(Dungeon)>프로젝트에 제시된 개별 작가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의 키워드다. 공간 내부를 뒤덮은 다소 산란한 이미지 연속체 속에서 포착되는 일본 아니메의 흔적들, 전투형의 미소녀나 도트 형식으로 깨져버린 레벨 디자인 등은 은연중에 90년대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파생된 오타쿠 취향을 암시한다.2) 그러나 앞선 연속체는 체계적인 서브컬쳐 데이터베이스의 나열이 아니라 특정 사용자/주체에 의해 편의적으로 사용/희석됨으로써 (특히나 이수경, 한진의 작업 구간에서) 2D미소녀라는 최소 단위만이 잔존하는, 실상 구체적인 출처가 부재한 어렴풋한 형상들로 구성될 뿐이다. 이수경이 반복적으로 드로잉한 다소 흐릿한 필치의 여성 캐릭터는 결코 전형화된 2D미소녀가 아니지만, <던전(Dungeon)>의 레벨 디자인과 상호작용하며 마치 2D미소녀에 의해 촉발된 것처럼 일시적으로 위장된다.

 

이수경의 인물 드로잉이 <던전(Dungeon)>이나 미소녀라는 범주로부터 벗어났을 때 남는 것은, 혹은 그것의 본체는 취향이 부재하므로 거듭 재사용할 수 있는 분신이다. <F/W 16>의 한편에 전시된 드로잉북(혹은 카탈로그)에서 그들은 이수경의 덩어리 조각들 일부를 신상품으로 걸치거나 휴대한 채 다소 무미건조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복붙이 가능한 인물은 일부분 미소녀 데이터의 작동 방식을 공유하지만, 그들은 단지 자신의 프로필 정보를 완전히 소거함으로써 획득한 자율성을 통해 그렇게 한다. 얄팍한 분신들은 현실에서 결코 생산/유통될 수 없는 신상품을 소화하기 위해 자율연상(복붙)되며, 실제로 남성-노인들은 가상의 카탈로그 속 인물들이 열거된 방식과 유사하게 열화된다. 순전히 인상 차원에서 수집 저장된 옷차림과 포즈는 남성-노인의 텍스처만을 드러낼 뿐, 특정 인물의 현존성은 몰가치해지는 것이다.

 

애초에 이수경이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드로잉의 과정을 통해 그것을 희석시키거나, 얄팍하게 만들거나, 자기 변주에 동원하기 위한 편의적인 대상으로 열화시킴으로써 성립한다. 반지하에서 진행했던 <Body Parts>와 같은 연작은 그러한 징후를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F/W 16>의 덩어리들과 엇비슷한 외형을 띈 유사 신체 조각들은 작가에 의해 드로잉 연상된 인물들을 부분으로 해체한 뒤 각각을 펠트와 천으로 기워내 질감을 부여한 결과다. 이때 각각의 신체 부분들의 합이 암시하는 것은 구체화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의 형상을 띈 무엇이다. ‘무엇은 구상 단계에서 팰트와 천으로 상징되는 현실에서의 텍스처와 부합하게끔 인물 내부에서 과장되게 변형되며, 그러는 와중에 신체의 윤곽은 드로잉의 무작위한 필치와 연동된다. 이로써 누적되는 출처 불명의 형상들은 텍스처 이전의, 혹은 텍스처를 예비한 미완의 재료들이다.


이수경, <Body Parts>, mixed media, 공간 반지하, 2013 (http://www.leesskk.com/)

 

2) 데이터 껍데기

 

<F/W 16>에서 그것들은 일종의 데이터로서 호명된다. 그러나 이때의 데이터는 체계적인 방식에 의해 연산 처리된 결과가 아니라 이수경 개인에 의해 재구성된 기억 형상들에 가깝다. 남성-노인을 향한 즉각적인 혐오의 감정적 차원은 오로지 그들의 외양만을 스킨으로 취함으로써 획득하게 되는 무미한 시선에 의해 일정 부분 해소된다. 남성-노인은 단순히 혐오를 유발하는 단일 개체로 그치지 않는다. 전현대적인 가치관을 공유하는 구세대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헐거운 옷의 품이나 낡은 재질, ‘믹스 매치로부터 어긋난 색의 패턴 등의 시각적 요소들로 은연중에 자신들의 집단적인 시대착오성을 재현한다. 문제는 앞선 혐오가 순전히 외양 차원으로 분류됐을 때, 달리 말해 외양 너머에서 작동하는 가부장의 습성이나 수동적인 무례함 등이 배제됐을 때 스킨으로 저장된 의사 데이터들은 어떤 정보값을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남성-노인들은 마치 한국인의 정서를 고스란히 백업한 채 도심을 활보하는 K-껍데기의 전형처럼 보인다. 혹은 그런 식으로 범주화된 껍데기들이 각각의 인물과 사물의 형상으로 외화한 채 서로 교차하거나 대립하는 풍경이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구성한다. “혐오스러운 서울의 풍경이란 개별적인 껍데기들이 자신에게 백업된 데이터를 실제로 유출함으로써 드러나기도 하지만, 껍데기 자체가 일정 부분 데이터의 반영인 이상 그것들이 놓여있는 장면 자체이기도 하다. 결국 이수경이 편집하고자 하는 대상은 후자에 가깝다. 남성-노인으로부터 비롯한 형상들은 서울이라는 껍데기를 지시하며 그 일부로써 구실한다. <F/W 16>의 유사 조각들이 지닌 기묘한 텍스처는 이처럼 오로지 반영으로써만 존재하는 스킨이 조각적인 부피감을 지님으로써 암시하는 내부가 사실상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실제 사용자인 인물은 소거됐고 패브릭은 단지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만 스스로를 부풀리거나 서로 접합된다. 그러나 <Body Parts> 연작과 달리 일련의 작업들은 어떻게든 현실과 매개된 채 텍스처 이전/이후라는 조립라인을 수행한다. 이수경이 인물의 텍스처를 다루는 방식은 3D모델링의 좌표 상에 임포트된 현실의 대상이 개별적인 레이어나 폴리곤으로 분화한 채 재구성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다만 <F/W 16>에서는 앞선 역학이 공간 차원으로 확장/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객체로써 집적된다. 서울과 유비된 남성-노인은 껍데기 조형물로 재구성되어 가상의 편집숍으로 연출된 전시 공간 내에 열거된다. 혐오의 대상은 자기조형적인 덩어리로써의 이질감을 고스란히 노출하며 관객이 그것을 소비/소유하게끔 추동하는 것이다. 더불어 절단된 페브릭의 면들이 (3D모델링의 관성에 따르되) 수공예적으로 기워짐으로써 발생하는 촉각적 시각성은 혐오에 대한 소유 감각을 보다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F/W 16> 전시 전경

 

3) 혐오 캐라

 

결국 중요한 것은 텍스처에 의해 유발되는 의사 사물의 현존성이다. 그것은 오로지 껍데기로써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적인 부재 자체를 동력삼아 물리적인 몸체를 구성해낸다. 앞선 과정을 통해 의도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실제 현실에서 원본의 옷차림과 행색을 한 채 도심을 활보하고 있는 남성-노인이다. 거듭 기억 형상이라는 전제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는 <F/W 16>이 일본 서브컬처 내의 캐릭터 재생산 방식을 은연중에 체득한 채 현실에서의 인물을 거듭 열화하기 때문이다. 돈선필은 이때의 캐릭터를 일본식 조어인 캐라라고 호명하며 일본의 캐라는 캐릭터로서 유지해야 할 특질이나 개성, 속성을 얼굴이 아닌, 신체의 주변부로 확장한다. 그리고 이 확장은 개념적인 차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시각적으로 사물화되는 특징이 있다.”라고 부연한다.3) 마찬가지로 이수경은 특정 인물이 현실에서 연원하건, 텍스처 이전의 재료들로 구성되건 인물 자체보다는 그것에 부속된 사물들의 형태를 크롭한 뒤 변주한다. 주지하듯 이 와중에 소외된 인물은 어렴풋한 형상이거나 무엇으로 잔존한다.

 

앞선 과정에서 사물화에 동원되는 재료들은 순전히 데이터로 위장한 기억들이다. 기억 형상은 일본 서브컬처를 나름의 방식으로 여과한 작가의 ()취향 혹은 그로부터 파생한 흐릿한 미소녀 이미지로부터 암시되기도 하지만, 보다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서울의 외양을 기억과 등가인 인상 차원에서 수렴한 뒤 덩어리로 조형해내는 방식에 있다. 이미 데이터 기억으로 처리된 남성-노인은 이수경의 드로잉 연상에서처럼 별다른 조형의 목적성을 염두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자율연상된다. 그에 대한 결과값인 일련의 덩어리들은 기억이라는 추상적인 영역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껍데기가 담보하고 있는 현실의 반영성에 의해 마침내 구체적인 사물이 된다. 이로써 작가는 자신이 상정한 혐오라는 감정을 물리적인 실체로써 재확인한다. 실상 혐오는 껍데기 이면의 오작동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거나 그에 대한 포기를 상정하는 순간 발생하며, 껍데기로 조형된 덩어리는 혐오의 발생 과정 자체를 전유한 오브제인 셈이다.

 

서울에 대한 편집의 가능성은 그 안의 객체들을 기억이라는 지극히 유동적인 좌표 상에 소환한다. 그러나 이때의 기억은 구체적 사건이 아니라 대상의 외양만으로 재편집된 채 모든 종류의 친밀한 관계를 차단하는 식으로 구성된다. 더불어 소거됐지만 여전히 의복의 품으로 암시되는 인물의 형상은 패브릭의 자기조형성에 따라 접히거나 왜곡된다. 이수경의 관점에서 서울은 데이터로 포화된 세계라기보다 오로지 껍데기들의 나열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직관적으로 포섭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와 동시에 서울의 부산물들은 기꺼이 포섭하기엔 너무도 불유쾌한 방식으로 일상을 침범한다. 어찌됐든 일상의 영역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을 묘사하는 대신 개개의 요소들을 꿰매버림으로써 가 불완전하게나마 통제할 수 있는 덩어리로 귀결시킨다.

 

이로써 파생된 결과물들을 다시금 상품의 형태로 진열함으로써, 이수경은 혐오스런 풍경을 오로지 텍스처 차원에서 감각하고 소비해버리는 새로운 주체 모델을 망상해낸다. 그들은 상품과 별개의 영역에서조차 서로를 텍스처로 인식하는 데 그친다. 달리 말해 대상의 특정성은 스킨 너머의 불가해한 영역이 부재하거나 그것을 노출하지 않은 채 단지 외연만이 인위적으로 부풀어있는 듯한 상태로 전환된다. 실제 대상은 없되, 대상의 오작동을 시각적으로 유추할 수는 있다. 외연의 속성들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는 앞선 부재를 형성하기 위해 효율적으로 생산/유통되고자 한다. 이처럼 덩어리에 재차 백업된 서울은 모두를 껍데기로 유도한다. 이곳에서 혐오는 그저 텍스처의 이질감으로 번역된 채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1) <F/W 16> 전시 서문에서 발췌

2) <던전(Dungeon)>에서 암시되는 오타쿠 취향은 사실 공간 내부를 일종의 이미지 통로로써 압축 상연하기 위해 참조/발췌된 웹 데이터베이스의 일부에 가깝다. 다만 일부를 구획하기 위한 선택의 과정에서 오타쿠 자의식이 일정 부분 반영됐고, 전시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의사 오타쿠 장식물들은 그로부터 연원한다.

3) 돈선필, <피규어 TEXT>, 유어마인드, 2016,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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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을 절개하는 법, <실키 네이비 스킨>;<곰염섬>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평면의 앞뒷면을 재고해보자. ‘그것이 단순히 낱장일리는 없다. 앞에는 말 그대로 평면 위에 투사된 이미지가 있다. 이때의 이미지는 무언가를 표상하고 있는가? 이를테면 누군가는 기하학적인 추상의 앞면을 목격하고는 모더니즘적인 숭고를 정초해 제 마음 속에 옮겨 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의 타임라인은 추상적인 요소들의 정교한 배치로부터 추출해낼 수 있는 숭고미를 갖추기엔 지나치게 허약하거나, 애초에 기하학적으로 재조합할 수 없는 텅 빈 객체들만을 수렴하고 있는 것 같다.

 

데이터 차원에서의 자기 분열은 이미지를 다수의 이미지들로 증식시키고 그럴수록 단일한 평면을 향한 시선의 초점은 흐려지고 있다. 숭고미는 연출할 수 있지만 도통 실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의 뒷면은? 숭고미와 더불어 이미지가(혹은 이미지들이) 평면상에 정주할 수 없다면, 평면을 뒤에서 지지하는 플랫폼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지난 514일 인사미술공간에서 폐막한 <실키 네이비 스킨>과 뒤이은 61일 두산갤러리에서 개막한 정지현 개인전 <곰염섬>은 마치 앞선 질문의 양면처럼 묘하게 포개져있다.

 

1)

 

<실키 네이비 스킨>에 참여한 박보마, 신현정, 최고은이 상정하고 있는 평면상의 이미지란 손쉽게 언어화시킬 수 없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다. 본 전시에 제시된 작업들은 개별적으로 분별할 수 없게끔 유독 잔해들로써 널브러져 있거나 서로 얽혀있다. 간혹 출몰하는 속옷이나 마스크팩, 기타 여성용품들은 앞선 전제를 환기하는 단서들인 것 같지만 그러한 오브제들만을 끼워 맞춰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구축할 수는 없다. 다만 오브제들은 전시 자체를 텍스트로 간추렸을 때 여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특정한 명사처럼 곳곳에 삽입되어있다. 그러한 명사들 사이의 간극에서 일련의 작업들은 미완성의 문장을 재차 물리적으로 도해해놓은 결과처럼 보인다.

 

잔해들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실키 네이비 스킨>에만 종속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총 15개의 팀으로 선별한 신생공간들을 한데 모아 2015년의 타임라인을 기록/재연하고자 했던 <서울 바벨>의 장면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잔해들을 목격하게 된다. 뒤이은 질문은 과연 타임라인은 물리적으로 실존했거나 온전히 재연할 수 있는 대상인가, 라는 것이다. 이를 <실키 네이비 스킨>이라는 텍스트에 걸맞게 고쳐 쓰면, 참여 작가들이 상정한 여성은 반드시 구체적인 정체성 혹은 이를 반영한 이미지로 환원해야만 하는 것인가? 박보마, 신현정, 최고은에게 있어서 잔해로써의 작업이란 단순히 여성을 미완의 상태로 남겨두기 위한 시도가 아니다. 외려 그들은 본 전시에서 굳이 익명을 자처한 채 여성이라는 (텅 빈) 명사의 위치를 점유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각자의 작업들을 조건반사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서로를 연대자라 칭했다. , 전혀 불가해한 주장은 아니다.”1)

 

이로써 관객은 명사를 암시하는 오브제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실상 여성성이 구체적으로 코드화되어있지 않은 익명의 잔해들에 사후적으로 여성성을 투사하거나 견주며 각자의 문장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합해나간다. <실키 네이비 스킨>에서 여성을 언어화시킬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앞선 맥락에서 작동하는 일종의 낱말 맞추기 게임에서, 여성 명사의 전후에 조합할 수 있는 문장들이 전시가 진행되는 와중에 관객에 의해 거듭 변주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맥거핀인 동시에 바로 그 형식을 빌어 여성성을 단일한 평면상에 붙들지 않고 전시 전반의 암묵적인 룰로 작용하며 잔해들을 조형해나가는 동시에 별다른 미련 없이 헤친다.


<실키 네이비 스킨SILKY NAVY SKIN> B1

 

2)

 

명사를 여성대신 공란으로 남겨두는 순간, 앞선 형용사와 동사와 부사들은 문장이라는 최소한의 골격과 대응되는 평면을 수식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때의 평면은 연대체로써 열거된 각각의 작업 매체들에 의해 어렴풋이 암시될 뿐 별다른 출처와 의미가 부재한다. 이를테면 신현정이 가변적인 색을 다양한 배율의 캔버스에 스프레이로 분사한 회화 오브제와 빛을 판촉의 대상으로 재구성한 뒤 프린트한 박보마의 이미지는 각자의 지시대상으로부터 벗어나 불가해한평면에 부속된 미완의 결과물처럼 보인다. 분사된 색과 프린트의 낱장은 의미론적으로 얽히는 와중에 무의미한 평면, 이를테면 스킨skin을 도출해내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최고은이 절삭한 냉장고나 책장과 같은 일상의 가전제품들은 앞선 평면의 요소들을 미처 단일하게 통합하지 못하고 현실상에 뱉어낸 뒤 망가진 듯한 물리적인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이들의 평면은 부득이하게 무한히 확장된다. 문장이라는 관성 혹은 관계에 의해 잔해들은 특정한 의미를 지향하는 연대체로써 구실하지만, 실상 명사는 의미를 추론하기 위한 동력으로 작용할 뿐 의미 자체가 되지는 못한다. 결국 <실키 네이비 스킨>의 연대체에서는 연대라는 상태만이 존재하며, 더불어 일련의 작업들은 각자가 담보한 고유의 평면성을 포기하되 평면이라는 상태만을 유지한다. 이로써 현상학적인 평면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박보마와 신현정의 스킨화된 이미지는 앞선 관계를 방증하려 애쓰는 무의미의 표지이고 최고은의 오브제는 표지라는 골격 자체다. 이러한 방향성들이 본 전시에서 의미 너머의 평면 자체를 망상하게끔 유도한다. 여성이라는 명사는 여전히 이러한 망상을 지피는 명시적인 동력이지만, 그와 동시에 의미론적으로 평면성을 제약하며 꼬리를 무는 루프loop를 연출한다. 이것이 바로 <실키 네이비 스킨>이 제시하는 평면의 뒷면, 혹은 그 안에서 오작동하는 메커니즘인 셈이다.

 

반면 <곰염섬>의 뒷면은 한층 더 하드웨어적인 속성을 부각한다. 정지현은 본 전시에서 프레임의 배율을 말 그대로 공간 차원으로 확대시킨다. 전시장은 언뜻 철거 중인 무대처럼 보인다. 면면을 살펴보면 실제 벽의 구조물을 뜯어낸 잔해들과 철제 빔이나 각목, 철사 따위로 짠 격자의 형태들이 공간의 내부를 미묘하게 구획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조성된 어슷한 지형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상정했을 때, 조명의 채도에 따라 전시장은 분명 암묵적으로 프레임의 앞/뒤를 분별하고 있다. 특히나 전시장의 명시적인 뒷면이거나 휴지인 듯 별도로 마련된 틈새의 공간에서 맞닥뜨린 한 점의 회화(황량한 벌판에서 탁구를 치고 있는 두 인물의 모습이 담긴)와 주변의 오브제들(‘바깥의 잔해들 일부가 다소 정갈하게 비치된)은 은은한 채도 속에서 일순 경건해진다. 그러나 이곳을 돌아 나오면 다시 상황은 반전된다.

 

밝은 해상도의 앞면에 설치된 작업들의 복잡한 조합은 어두운 뒷면에 다다르며 완화되지만, 그러한 형태상의 차이와 무관하게 이들은 모두 철거된 격자 속으로 수렴되는 오작동의 기계들이다. 마치 격자로부터 연장된 듯한 각종 전선과 회로들은 소형 전구를 밝히거나 얇은 금속판을 건드리는 등의 무의미한 장치들을 곳곳에 삽입한다. 특정 구간의 천장에서는 일정한 시차를 두고 반복적으로 종이의 낱장들이 떨어지며 바닥을 어지럽힌다. 구조물 사이에 비치된 작은 규격의 모니터에서는 노이즈가 뒤섞인 탁구 경기 장면을 상연하고 있다. 이러한 장치들로부터 비롯된 미세한 움직임과 소음은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개개의 요소들로 분별할 수 없지만, 전시장 전반에 뒤섞이며 이미 철거된 공간 혹은 프레임에 얄팍한 시간성을 부여한다.


정지현 <곰염섬> 전시 전경

 

3)

 

<곰염섬>은 종료 이후에도 아직 여진이 남은 채 윙윙 거리는 본체처럼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무엇이 종료됐는가? 무한히 연장된 탁구의 랠리처럼 일련의 장치들은 반복적인 동작을 구사할 뿐 정작 게임의 룰 자체에 대해선 함구한다. 온통 여진만이 있는 공간. /뒤라는 구분은 프레임 자체가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이 부재하거나, 그것을 구체화시킬 수 없을 때 서로 등가의 위치를 공유하며 무의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전시에서는 여전히 앞/뒤의 골격이 지형과 지물의 형태로 잔존한다. 이는 마치 앞선 <실키 네이비 스킨>에서 상연한 최고은의 망가진 플랫폼이 보다 비대해지고 구체화된 결과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지현의 <곰염섬>은 불가해한 평면을 애써 묘사하기 위한 오작동의 게임이라기보다, 평면의 빈자리를 한때 그것을 지지했던 플랫폼의 변주된 형태들로 메우려는 시도에 가깝다.

 

일상에서 빌려온 사물들은 격자, 즉 프레임을 구성하지만 그 위에 어떠한 이미지도 투사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앙상한 내부를 노출하고 만다. 그와 동시에 앙상한 내부는 개개의 사물들로 조립됐기 때문에 그 자체로 레디메이드 형상을 암시한다. 이와 같은 구조는 스스로 자기완결적인 조형 이미지로써 기능하고자 하는 프레임-기계로 귀결된다. 그러나 정지현은 이 모두가 오작동의 과정일 뿐임을 인정하듯 굳이 틈새의 공간을 절개하고 그 안에 회화 작업을 안치한다. 레디메이드 형상은 반복적으로 프레임의 일부로 회귀할 뿐 이미지를 온전히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불시착한 추상이란 결국 단일한 차원의 평면을 포기함으로써 성립한다. 이미지는 추상적으로 도해되지만 결코 일시에 포착해낼 수는 없다. 포착한 결과값을 잃은 프레임은 기계로써 오작동하며 어떻게든 장면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연출하고 있다.

 

아무런 효용이 없는 기계의 메커니즘은 해묵은 소음을 되풀이하며 단지 평면의 부재를 재생산한다. <곰염섬>에서 은근하게 느껴지는 노스탤지아의 정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소형 전구의 미미한 불빛과 같은 장치들은 내심 평면의 부재를 애도하거나, 이제 더 이상 온전히 성립할 수 없는 평면성을 산업적인 키트kit를 빌어서라도 회생시키고 싶은 얄팍한 의지, 혹은 오래 전에 과거로 묶인 시간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어떻게든 작동하며 (사실은 이미지 조형과는 별개의 차원에서) 프레임-기계를 부연하고 있다.

 

4)

 

일련의 작업들이 평면을 포기함으로써 파생된 잔해는 갈수록 물리적 공간의 면면과 접속한 채, 실재하지 않는 추상성을 현상학적인 경험의 회로들로 조형해나가고 있다. 이때 암시되는 불가해한 평면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연대체로써의 이미지와 프레임-기계 사이에 접힌 채 삽입된 그것은 확실히 이전의 평면과는 다른 차원에 놓이며, 따라서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소비할 수도 없다.

 

점차 물리적 공간을 구획해나가는 평면은 새삼 현실과 가상 간의 인프라신(infrathin)한 관계를 재고하게끔 한다. 주지하듯 <실키 네이비 스킨><곰염섬>은 구체화된 대상으로써의 평면이 부재한다는 전제 하에 그 이후의 평면을 암시한다. 그것은 실체가 없되 현실에 대한 관성으로써 작용하며 실재계의 이미지를 뒤섞는다. 문제는 이미지가 뒤섞일 뿐인데, 공간의 지형과 지물들 혹은 그에 대한 감각의 질서가 이미지와 연동된 채 재조정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회화적 평면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리얼리즘의 주제는, 외려 현실이 평면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리얼리티로 재차 역전된다. 결국 앞선 사례들이 수렴하는 평면이란 이미지와 공간의 요소가 뒤엉킨 특정한 모듈들의 배열을 통해 양자의 인프라신한 차이를 재확인하게 되는 순간 발생하는 착시라고 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을 굳이 목격하고자 한다.

 

과연 인프라신을 형상화할 수 있을까? 최소한 오작동의 루프는 그것을 단일한 이미지가 아닌 공간 내부의 궤적으로 구현하는데 그친다. 이때 공간은 그 자체로 유사 프레임으로 작용하며 마치 인덱스 페이지 상에 나열된 다중적인 이미지들처럼 잔해들의 상호관계를 빌어 평면'에 대한 미묘한 투시도법을 형성한다. 우리는 평면을 절개함으로써, 선뜻 그 속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마침내 출구로 나왔을 때 여전히 초점이 흐린 채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1) <실키 네이비 스킨SILKY NAVY SKIN> 전시 서문에서 발췌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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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사이키델릭; 블루>, 폐허 (발명) 이후의 예술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지난 2016523일 아마도예술공간에서 <시대정신:-사이키델릭; 블루>가 개막했다. 참여 작가들(강정석, 김정태+팀 프로그래시브, 루양, 밈미우, 백경호, 안성석, 이희향, 최진석)시대정신이라는 기획에 부합하듯 인터넷 (발명) 이후의 예술혹은 포스트 인터넷 아트로 범주화된 채 해당 전시에서 작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때 괄목할 만한 지점은 포스트 인터넷 자체가 아니라, 그로부터 어긋나는 미묘한 방향성들에서 발생한다.

 

포스트 인터넷을 인터넷 (발명) 이후라고 직역했을 때 개념상의 외연은 불필요하게 확장된다. 기획자인 문선아가 전시의 서문에서 언급하듯 인터넷 보급 이후에 웹상에서 이미지 객체를 다루는 방식은 반드시 미술의 범주에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00년대를 경유하며 보편화한 사용자 감각이다. 그러한 와중에 촉발된 넷아트net-art, 이를테면 데이터베이스 형식으로 산개한 과거의 잔해들을 무맥락의 특정성 속에서 재구성하는 베이퍼웨이브와 같은 전략은 다시금 짤방으로 압착된 채 데이터베이스로 수렴된다. 앞선 수순은 웹상에서 통용되는 이미지의 가속도가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이미지, ‘시대라는 경향성, 혹은 그로부터 도출되는 시각화의 전략 등을 짤방과 인터넷 밈의 세계로 우회시키는지에 대한 하나의 사례다.

 

밈미우가 727now!에서 전개한 <#1-7>부터, 본 전시에서 퍼포먼스 <CATALOGUED>3채널 기록 영상으로 제시한 <CATALOGUED: MEMEC>에 이르기까지 줄곧 고수하는 평면의 입상은 흡사 베이퍼웨이브의 아류인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개별 작업으로써 분별되기보다 대개 무대장치의 일부로써 삽입된다. 그러나 밈미우의 입상은 앞서 언급했듯 다시금 짤방 혹은 인터넷 밈으로 기록된 베이퍼웨이브 이미지를 현실공간에 투사함으로써, 한때 베이퍼웨이브가 지향한 8,90년대 미국 대중문화를 비롯해 출처 무효한 레퍼런스들의 (이질적인) 조합 자체가 불과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단일한 객체로 굳어버렸음을 방증한다. 그 안에 더 이상 웨이브wave는 없다. 지난 커먼센터에서 진행한 <오토세이브: 끝난 것처럼 보일 때>에서 밈미우는 자신에게 할당된 방에서 아그리파 이미지의 입상과 주변의 폐허를 다각도의 프레임 속에 포착하게끔 유도하며 소위 ‘2.5D의 폐허를 연출한다. 달리 말해 베이퍼웨이브의 더미에서 크롭했을 뿐인 아그리파를 비롯한 이미지-객체들과 물리적 폐허가 등가로 무가치해지는 순간이다.


밈미우, <Acrobatic tetris>, installation, 2015. (http://miumeme.tumblr.com/)

 

이처럼 프레임 속에서 착시로서나마 연출되는 ‘2.5D의 폐허야말로 일련의 작업들이 지향하는 무맥락의 특정성이고 작가가 이중화된 공간, 이를테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자신의 무대공간으로써 인위적으로 뭉개는 방식이다. 혹은 이때 ‘2.5D의 폐허는 특정 인물은 부재하되, 물리적 공간 자체가 데이터라는 필터를 먹인 채 업로드한 셀카 사진처럼 보인다. 관객이 휴대한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가 정면성을 고수하면 폐허와 정확히 포개진 유사 베이퍼웨이브 이미지로, 어슷한 각도로 미끄러지는 순간 입상의 얄팍한 두께감을 노출함으로써 후경에 불과했던 폐허의 공간감이 부각되는 식으로 이미지, 무대, 공간 간의 위계가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CATALOGUED>와 같은 작업이 퍼포먼스를 자임하며 그 안에 의도적인 서사와 인물(혹은 캐릭터)을 개입시키는 순간, 관객의 프레임에 의해 다각도로 형성됐던 이미지-공간은 서사의 구심에 떠밀려 한낱 무대로 전락하고 참여형 퍼포먼스라는 얼개만이 남는다.

 

앞서 언급했듯 <CATALOGUED: MEMEC>는 이를 3채널 형식으로 분별한 채 미세한 시차를 두고 상연한다. 실제 <CATALOGUED>에서 관객에게 요구됐던 수행적인 캐릭터들과 거리를 둔 채 3채널을 재고하면, 밈미우가 연기하는 익명의 서비스업 종사자는 1) CCTV를 연상케하는 2층의 관객 시점과 2) 무대와 어느 정도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최적화된 관객(혹은 서비스 사용자) 시점과 3) 클로즈업 시점으로 포착된다. 이처럼 을 향한 시선들의 폭력에 기꺼이 노출되고자 하는 피사체의 나르시시즘적인 행위는 각각의 채널에 상응하는 LCD모니터 내부에서 개별 시점들 간의 거리감 차이와 무관하게 1)이 암시하는 CCTV 폐쇄회로의 패키지로 귀결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2.5D의 폐허라는 전제는 뉴미디어 판옵티콘의 시선을 통해 사회적인 권력 관계를 가늠하는 다소 뜬금없는 방법론과 대응되고 완전히 별개의 분기로 나뉜다. 이를 방증하듯 퍼포먼스에서 무대장치로써 구실했던 평면의 입상들은 <CATALOGUED: MEMEC>의 다채널 외부의 구석진 공간에 무성의하게 겹친 채로 방기되어있다. 이는 마치 퍼포먼스의 서사적인 구조체로써 온전히 구실하지 못한 이미지들이 LCD모니터 표면 외부로 튕겨져 나옴으로써 뒤늦게나마 폐허의 장력에 빌붙으려는 잔해들처럼 보인다.

 

이때의 폐허를 재고해보자. <시대정신:-사이키델릭; 블루>에서의 아마도예술공간은 유독 연출된폐허의 모습을 드러낸다. 3층 구조의 주택을 개조한 전시공간은 분명 통상적인 화이트큐브와는 거리가 멀지만, 철거된 들은 전시라는 행위의 목적성과 적절히 부합하게끔 구획되어있다. 문제는 본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이 간혹 공간에 드러나는 폐허의 속성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다이를테면 강정석은 <Rare rare 2-headed Leatherback Lizard>에서 게임보이 카트리지 케이스를 압축된 익명의 전시공간 혹은 전시의 매개물로 상정하고, 이는 타인(문선아 기획자)의 자율적인 의도 하에 케이스 외부의 물리적 공간으로 재현된다.1) 그 결과 카트리지 케이스는 투명한 박스 안에 담긴 채 일종의 실행버튼처럼 방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고, 그로부터 입력된 (텅 빈) 데이터를 물리적으로 소화한 듯한 블루 스크린이나 QR코드와 같은 장식적 요소들이 곳곳에 투사된다. 그러나 실상 관객이 그 사이에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일말의 개연성이 아니라 미처 위장되지 않거나 못한 폐허다.


강정석, <Rare rare 2-headed Leatherback Lizard>, 일부

 

강정석은 본 작업을 부연하는 텍스트에서 자신이 종종 작업하고 식사하는맥도날드에 비치된 전기 콘센트매장 내 free wifi” 혹은 주문과 계산을 할 수 있는 매장 내 터치식 모니터등을 열거하며, 프랜차이즈 매장을 포함한 도시 내의 각종 구간들이 편의적인 방식으로 데이터 세계와 연결되어있음을 주지한다. 결국 <Rare rare 2-headed Leatherback Lizard>가 지향하는 것은 양자 간에 가로놓인 비가시적인 통로이며, 이를 유추할 수 있는 여지들을 (타인의 의도를 빌어) 전시공간에 무작위로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의 여지들이 모두 구체화된 QR코드가 아닌 이상 관객은 방 혹은 공간 자체를 편의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카트리스 케이지 내부에 백업된 가상전시는 완전히 별개의 영역에 위치하거나 향후 업데이트될 것이다. 달리 말해 가상전시-카트리스 케이지-물리적 공간이라는 임의적인 연속체에서 유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구간뿐이다. 이로써 장식적 QR코드들은 물리적 공간의 표면에 나름의 방식으로 접촉했으나 그 이상의 통로로써 연장되지 못한 채 폐쇄된다. 이때의 끊어진 회로는 본의 아니게 피복이 벗겨진 전시공간의 회로, 즉 폐허의 단면과 대응된다.

 

앞선 맥락에서 이중적으로 교차하는, 혹은 그러기를 거듭 실패하는 회로는 본 전시에서 빈번하게 출몰한다. 특히나 최진석의 <Kakarot><Eyes on you>같은 작업들은 2D의 캐릭터를 현실계로 소환했을 때 조형물로써 미끄러지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상연한다. 카카로트는 이제 고전이 된 지 오래인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볼>의 주인공이고, 흙으로 만든 카카로트의 조상은 벽돌을 어슷하게 쌓아올린 좌대 위에서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분무되며 점차 무너져 내린다. 반면 <Eyes on you>는 각종 일본 만화에서 채집한 눈의 형상을 덧씌운 전구들을 천장으로부터 무작위로 늘어뜨리고 있다. 양자는 특정 캐릭터를 “2차원 모니터의 관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물리적으로 재현한 결과라기보다, 모니터 자체를 2차원과는 무관한 하드웨어로써 취급하고 일부를 뜯어낸 상해 부위를 조상의 잔해나 귤껍질, 늘어뜨린 전선 따위로 대체해버린 것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본 전시에 대한 가이드 역할을 하기 위해 번외로 설치된 듯한 <GIF>은 온갖 인터넷 밈과 짤방들을 CRT모니터 상에 상연함으로써, 최진석의 작업들의 역방향에서 2차원을 명시적인 하드웨어 속에 담아둔 채 재현의 시도 자체를 포기한다.


최진석, <Kakarot> / <My friend Dahmer> / <Eyes on you>, 전시 전경

 

김정태+팀 프로그래시브의 <NG>는 마찬가지로 2D에 천착하되, 그에 대한 물리적인 외압으로 작용하는 하드웨어를 방 혹은 큐브 자체로 설정한다. 이를테면 무녀복 코스튬과 피규어를 벽의 중앙에 안치하고 그 주위로 일본 서브컬처의 파본 격인 jpg이미지, 즉 지금껏 김정태가 반복 구사했던 픽셀 차원에서 열화되거나 파열된 미소녀 형상들을 배열함으로써 유사 제단을 연출하는 식이다. 이는 결국 2D를 경유한 일종의 레벨 디자인이다. 개별 작업의 미러 이미지는 jpg파일의 물리적인 표면을 상징하고 이는 필름지에 덧그린 아니메 장면과 그와 겹쳐 보이는 일본식 적등 조형물 같은 설치의 양태로 변주되지만, 전체상은 여전히 그들이 참여했던 <던전(Dungeon)> 프로젝트를 연상케한다. 그러나 인스턴스 던전이라는 개념을 빌어 구성했던 신생공간 연속체 모델과는 달리, <NG>의 큐브는 연결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부재하므로 철저히 닫힌 공간으로써 존재한다. 이로써 <던전(Dungeon)>복붙이 가능한 개별화된 모듈이 되었다. 본 전시에 해당 모듈이 이식됐을 때, <Rare rare 2-headed Leatherback Lizard>와 유사한 맥락에서 폐허의 단면은 하이퍼이미지와의 어긋난 회로로써 기능한다.


김정태 + 팀 프로그래시브, <덽NG> 일부 (Minor Image)


이처럼 잔해, 전선, 회로와 같은 요소들은 작업의 토대인 물리적 거점으로부터 굳이 포스트 인터넷의 사용자 경험과 접속하려고 했을 때 드러나는 공간의 외상이다. <시대정신:-사이키델릭; 블루>에서의 연출된 폐허란 결국 현실계의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와해되는 포스트의 무분별한 방향성이 폐허 아닌 공간을 폐허로써 가리킬 때 주지되는 남루한 표면인 것이다. 작업의 다수가 이와 같은 역학을 지향할 때, 백경호의 레이어 회화와 이희향의 변신소녀물 서사와 같은 모의실험은 철저히 여분으로 남는다. 루양의 <LuYang Delusional Mandaa>와 안성석의 <순찰자>, <CCTV> 연작은 3D모델링을 통해 각각 디지털 아바타의 생애주기와 광화문 일대의 대체역사를 시각화하지만 연출된 폐허 속에서 일련의 작업들은 포스트 인터넷 아트에 대한 간략한 주석에 그친다. 이처럼 포스트 인터넷 담론 자체는 특정 작가 군을 세대화시키거나 이로써 시대정신을 귀납해내는 시도에서 별다른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소위 스마트 환경에서의 경험치는 데이터 자체가 아니라, 데이터를 현실로 유출시키고자 했을 때 발생하는 간극 자체에서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의 간극은 언제나 물리적이다.

 

문선아는 전시 서문에서 세상은 매체화·프레이밍화 되고 디지털이미지는 현실이 되며, 이에 따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뒤죽박죽되어 때로는 현실과 가상, 주체와 객체가 혼동된다.”라고 언급한다. 우리는 앞선 문장을 읽으며, 혹은 스마트폰 디바이스를 통해 시대의 더미를 무분별하게 열람하며 실제로 현실과 가상, 주체와 객체가 얼마만큼 혼동됐는지 자문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안성석의 <순찰자>에서 관객이 서울의 재편집된 시퀀스 내부를 HMD를 쓴 채 배회하듯, 사용자는 현실의 어렴풋한 초점을 언제나 디지털의 환영으로 꿰맞추고 있는가? ‘2.5D의 폐허는 바로 그 0.5의 미세한 차이를 섣불리 더하지도 빼지도 못한 채, 혹은 그러한 셈을 의도적으로 유보하며 현실에 정주해있다. 실제로 현실은 증강되지 않았다. 밈미우의 유사 베이퍼웨이브와 김정태+팀 프로그래시브의 모듈화된 공간이 암시하듯, ‘포스트에 속한 작가들은 외려 공간을 물리적인 인터페이스로 환원한 채 그 안에서의 규칙들을 조형하고 있다. 디지털이미지는 점차 폐허의 해상도에 맞게끔 재조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폐허를 경유하며 체득한 경험치는 인터넷이라는 단어만을 전면에 내세울 때 쉽사리 휘발되고 만다.


1) <Rare rare 2-headed Leatherback Lizard>는 지난 <굿->에서 강정석이 판매한 35점의 <case>, 즉 게임보이 카트리지 케이스로 압축된 전시모듈 중 일부를 문선아 기획자가 구매한 뒤 이를 물리적인 형태로 재현할 것을 작가에게 제안함으로써 성사된 프로젝트이다. <시대정신:-사이키델릭; 블루>에서 케이스가 전시로 펼쳐진 모습은 앞선 프로젝트의 일부로써 문선아 기획자가 임의로 재현한 ‘Case #2016’이며, 향후 강정석은 동일원본의 카트리지 케이스를 <피아방과후>라는 별도의 전시로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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