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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사용자 안내서'에 해당되는 글 20건

  1. 2016.05.23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2. 2016.03.02 포스트 인터넷, 디지털, 혹은 운석들 (1)


*더 북소사이어티에서 진행하고 있는 퍼블리싱 클래스 <기술적 이미지의 모험>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차후 진행하게 될 출판 관련 워크숍을 거치면서 일부 내용이 수정될 수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 : 사용자 안내서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2015년의 국내 미술계는 소위 가소성의 시기라 호명된다. 가소성의 사전적 어원은 대략 특정한 고체가 파손되지 않을 만큼의 압력을 받았을 때, 그것의 형태가 미시적 차원에서 영구히 변형되는 상태, 혹은 그러한 성질 자체라고 상술된다. 2008년을 전후로 세계화라는 전제 자체가 급속히 와해되며 미술 또한 동시대적 네트워크를 상실한 채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투적인 위기, 혹은 위기의 상투어가 되었다. 누군가는 이러한 현상을 통해 작업들의 패키지가 효과적인 투자처로써 구실했던 미술시장의 폭락을 점치거나, 컨템퍼러리 아트가 붕괴된 이후의 잔해들을 되짚으며 현재의 시간성 자체를 재고한다. 주요한 것은 2015년 발 신생공간 플랫폼의 자장 안에서 생산된 작업들이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방법론을 구사하며 부동의 현재를 주파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소성 이후에 영구히 변형된 면면은 무엇인가? 혹은 그것은 진정 국내의 미술계에 가해진 (물리적) 압력이었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유보하며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상황을 재고해보자. 신생공간의 동력으로 작용했던 큐브-SNS 연속체1)를 통해 변형된 것은 비단 작업 생산을 둘러싼 지형만이 아니다. 주지하듯 관객으로써 개별 신생공간을 방문하는 일은 주로 스마트폰에 내장된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GPS유닛과 동기화된 채 이루어진다. 대다수의 신생공간들은 저렴한 임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도심의 변두리, 혹은 그 사이의 숱한 틈새에 산개해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도시의 파노라마는 스마트폰 전지적 시점과 실시간으로 대조되며 때로는 납작한 인터페이스로부터 부조된 듯한 이질적인 3차원 객체로, 때로는 도착지에 다다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우회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대체된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관객들이 자연스레 체득하게 되는 것은 앞선 도시 경험과 연루된 유닛의 시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본질적으로 보편화한 스마트 환경으로부터 연원하지만, 신생공간 플랫폼은 각자의 공간적 한계를 앞선 유닛들의 상호교차를 통해 만회한다는 점에서 특정적이다. 관객이 은연중에 체득한 유닛이라는 정체성은 개인으로써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복잡한 도시 인프라를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수렴하고 경로 선택의 과정을 통해 그 중 일부를 가 가상 차원에서 제어할 수 있는 범위로 환원한다. 이때 우리의 1인칭 시점은 여전히 유효한가? 유닛으로써 마침내 도달한 신생공간에서 우리는 폐허의 현존성을 얼마만큼 체감하는가? 신생공간이 점유한 폐허, 혹은 관객-유닛이 일련의 경로를 거쳐 도달한 폐허 속의 미묘한 사각은 2010년 전후의 미술가들이 주목했던 그곳과는 전연 다른 층위에 존재한다. 전자의 사각은 폐허로 상징되는 구도심의 틈새에 유사 서비스업의 형식으로 개입함으로써 작가라는 정체성의 위상을 재고하거나 급변하는 도시의 일시적 공백을 마주하며 그 공백을 촉각적으로 가시화시킨 결과가 아니라2), 차라리 작업 자체를 제시하기 위한 최소한의 레이아웃에 가깝다.

 

이를테면 지난 2011년 페스티벌 봄에서 상연했던 서현석의 <헤테로토피아>에서 관객은 극적 장치로 삽입된 일련의 명령어와 지표를 따라 세운상가 일대를 활보함으로써 자연스레 현실 내의 능동적 관객이 된다. 당시 세운상가는 2006년 오세훈 시장이 취임한 이래 그 이전부터 거론됐던 철거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며 종내엔 모든 부지가 시민공원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본 작업이 천착하고 있는 도시의 쇠락한 (모더니즘적) 과거 혹은 새로운 외관 속에 매립될 처지에 놓인 공동의 기억은 작가에 의해 무대화된 세운상가 내부에서 관객이 주파해야 될 물리적 경로로써 표변한다. 그러나 2016년 현재 여타의 상가들이 철거된 자리에 남아있는 세운청계상가 건물의 층고에 자리한 신생공간(800/40, 300/20과 책방 200/20)의 시점에서 주변의 풍경은 과거의 침전물이 아니라 전시공간으로써 건사해야할 실제적인 제반환경의 문제다. 무엇보다 이들을 포함한 신생공간들은 SNS상에서의 계정과 괜찮은 로고만 만들어두면 얼마든지 신생공간이라는 레이어를 폐허의 구간에 투사할 수 있다는 점3)에서 오로지 도시의 표면과만 관계하며, 그 안에서 생산된 작업들은 바로 그러한 표면상에 드러난 요철들에 들어맞는 작업적 키트kit로 귀결된다. 이로써 과거형의 장소는 큐브-SNS연속체라는 또 다른 층위에서의 인터페이스 환경에 의해 차단된다.

 

이처럼 관객-유닛이라는 유사 정체성과 큐브와 동기화된 레이아웃 사이에서 도시라는 물리적 구조체는 마치 커서의 방향성에 의해 미묘한 좌표 수정을 반복하는 모니터상의 공간 경험으로 재현된다. 물론 우리는 앞선 장면을 실제로 목격할 수도 단일한 프레임의 시야에서 온전히 포착해낼 수도 없다. 2010년 전후의 미술인들이 구도심의 임차인으로써 체감했던 스스로 부서지고 새롭게 태어나는 현실의 자기조형 능력4)은 최소한 폐허라는 물성을 통해 시각적으로 유추될 수 있었지만, 스마트 기기에 의해 인지적 차원에서 재설정된 현실의 자기조형 능력이란 유닛들이 주파한 경로 및 거리가 데이터로 환산되거나 자신의 고유한 1인칭 시점이 갤러리에 누적된 무수한 저화질의 jpg파일들로 분열되거나 이것들이 재차 SNS상에 적극적으로 유통되는 일련의 역학으로 귀결될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최종적으로 SNS의 타임라인에 산개한 이미지-정보들을 매트릭스로 꿰맞추는 과정 속에서 가 실제로 방문했던 신생공간을 재인식한다. 결국 유닛들은 수직적 시선으로 조감되는 지도 인터페이스에서 익명의 좌표로 명멸하는 와중에 이미지들의 가속도를 활용하여 공간을 부서뜨리고 재건하는 셈이다.

 

그러한 와중에 발생하는 이미지의 잔해를 우리는 폐허의 잔존물로 호명할 수 있을까? 혹은 이미지-정보들의 매트릭스로 재인식된 공간 경험은 사용자들 간의 공동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을까? 이러한 맥락들을 던져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는 아무래도 지난 201573일 일민미술관에서 개막했던 <뉴 스킨>전일 것이다. 특히나 우리는 본 전시에 제시된 영상 작업들을 통해 현실을 여전히 프레임 단위로 상대했을 때의 조형가능성을 일별해볼 수 있다. 폐허 자체가 인지적 차원에서 무화되었다는 앞선 전제 속에서 스킨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박민하의 <전략적 오퍼레이션하이퍼 리얼리스틱 Strategic OperationsHyper Realistic>(이하 <전략적 오퍼레이션>)에서 제시되는 이미지들은 반드시 그러한 스킨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외려 모하비 사막의 군사훈련장으로 상징되는 하이퍼 리얼리스틱한 물리적 세트를 플레이어-주체가 가로지를 때의 경험을 반영한다. 이를테면 <뉴 스킨>을 실제로 둘러싸고 있고 여타의 작업들이 천착하고자 하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점에서 박민하가 포착한 하이퍼 리얼리스틱은 너무도 이질적인 사각이다. 특정한 세트장이 UHD 환경을 물리적으로 투사했거나 촉각적으로 가시화시킨 결과라고 할 때, 유닛들의 현실 경험은 더 이상 그런 식의 배가된 해상도 차원에서 교란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전시에서 제시된 강정석의 <시뮬레이팅 서피스A/B> 연작을 겹쳐보면 상황은 보다 명징해진다. 지인의 출근 경로를 반복적으로 좇은 영상들을 나열한 A의 루프 구조는 스마트폰의 ‘1인칭 시점이 암시하는 몰입의 순간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UHD가 아닌 저화질의 MPG파일을 구성하는 개별 시퀀스들은 언제나 엇비슷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배웅의 장면에 다다르기 위한 일종의 버튼에 불과하다. 달리 말해 영상 속에서 강정석은 단지 반복적으로 버튼을 누르고 1인칭의 궤적은 그 이후에 임의적으로 포착된 잔상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어떠한 시각적 촉각성도 그에 기반한 몰입의 정서도 투사할 수 없다. 결국 디지털 차원에서 손실된 것은 단순히 저장에 용이한 화질과 용량만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스킨화된 이미지들과 동기화한 1인칭의 궤적 자체인 셈이다. 이를 방증하듯 강정석은 <시뮬레이팅 서피스A/B>를 포함한 여타의 작업들에서 이미 포착된 장면을 프레임 내부에서 다소 무성의하게 줌인-아웃시키거나 어슷한 각도로 배열하며 사실 이것은 풍경이 아니라 클립으로 운용되고 있는 표면일 뿐임을 거듭 주지시킨다(<나와의 약속 보기>, <생일 파티>). 그리고 A의 클립들은 B에 이르러 마침내 최소한의 시퀀스로부터 해금된 채 병신미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도트들과 함께 재편집되어 상연된다. 우리는 이런 식의 무가치한 타임라인 상에서 거주하는 또 다른 플레이어를 상정할 필요가 있다. 혹은 그가 물리적으로 상대할 만한 공간의 패러미터를 가늠해보거나.

 

GPS유닛의 아이러니는 사용자가 스마트폰의 위치 기능을 활성화시키지 않는 이상 그저 다중위성이 송신하는 광범위한 GPS대역의 일부로써 잔존할 뿐이지만, 그와 별개로 사용자로서 플레이하는 데이터 세계에서의 다중적인 궤적들을 집약시킬 수 있는 가장 명시적인 객체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웹에 접속한 개인에게 수반되는 데이터 흐름은 GPS대역과는 달리 특정 장치를 활성화시킴으로써 인터페이스 상에 붙잡아둘 수 없다. 물론 인터넷 방문 기록이나 북마크, 혹은 유튜브의 재생 목록 등을 활용해 사후적으로 흔적을 열람할 수는 있지만, 바로 그 순간에도 사용자로써의 궤적은 데이터 차원에서 분절된 채 실시간으로 유동하거나 또 다른 종류의 데이터 흐름과 합류하며 임의적인 통계로써 카운트되기를 반복한다. 때때로 월드 와이드 웹은 일종의 네트워크 공간으로 호명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은유적인 표현일 뿐이다. 실제의 광섬유는 사용자들이 거주하는 물리적인 구조체가 아니라 앞선 흐름들을 가속화시키기 위해 무수한 링크들로 연계된 벡터의 세계인 것이다.

 

반면 GPS유닛은 우리의 궤적을 공간 속 이미지로써 표상한다. 달리 말해 위치 서비스와 연관된 각종 데이터들은 바로 그 유닛을 지시하기 위해 실시간으로 부연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역전된 상호관계로 인해 GPS유닛은 특정 데이터가 반드시 위치 서비스와 연관되지 않더라도, 이를테면 지도 인터페이스의 외연을 벗어나 좀 더 광범위한 차원에서의 데이터를 작업에서 다룰 때조차 이미지로써, 혹은 집약된 좌표로써 가시화시키기 위해 빈번히 동원된다. 이때의 GPS유닛은 결과적으로 데이터 자체를 망상하는 듯한 유사 주체가 된다. 김희천의 바벨 3부작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를 포함한 세계가 일시에 망해버린 이유는 명확히 상정할 수 없는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들이 데이터로 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점 설정의 모호함은 연작들에서 일관하는 유사 디스토피아 자체가 매우 추상적인 차원에서 체감되는 불길함 외에는 딱히 그 근거를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연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작업의 시발점은 부친의 죽음과 연루된 GPS유닛이다. (2008년의 대대적인 폭락은 그 사회경제적인 실제성과 무관하게 특정 세대 이후에게는 마치 세기말의 정서처럼 명시적으로 열람할 수 없는 과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여파는 자연스레 [데이터적] 망상으로 귀결되는가?)

 

앞서 언급했듯 강정석이 제시하는 이미지 연속체는 그 안에 포착된 일상의 풍경들을 무가치하게 열화시킨다. 심지어 <나와의 약속 보기>에서는 원본 구실을 하는 <나와의 약속>이라는 자기 고백적 서사의 영상이 유튜브로 재생되고 있는 모니터를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으며, 그러한 외부의 시선조차 모니터 표면에 반사된 잔상으로써 어른거릴 뿐이다. 지도 인터페이스와 스마트폰 내장형 카메라가 제공하는 GPS유닛의 정체성은 그와 엇비슷한 방식으로 대상의 텍스처를 무너뜨린다. 앞선 <전략적 오퍼레이션>의 하이퍼 리얼리스틱한 풍경이 지금 시점에서 결코 현실을 교란할 수 없는 이유는 GPS유닛과 동기화한 대다수의 사용자가 스크린 자체를 (해상도와 무관하게) 너무도 명백한 표면으로써 의식하고 있고 설사 으로 현장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터페이스 상의 좌표로써 유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하이퍼 리얼리스틱에 대한 반대항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수열성이 지배하는 데이터의 세계와 그것의 역학이 (2008년의 금융위기가 상징하듯) 점차 현실계로 유실되고 있다고 할 때, 바로 그러한 과도기적 지점에서 현재의 좌표를 파악하기 위한 추동이 지속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일련의 작업들은 GPS유닛을 빌어 그러한 좌표를 임의적으로나마 확보할 수 있다는 가설 속에서 세계를 포착하고 재구성하는 셈이다.

 

그러한 와중에 강정석과 김희천이 도달하게 되는 난점은 (전자는 표면으로써 차폐막을 내리고 후자는 소위 세카이계5)를 거듭 와해시키는 방식으로) 이미지의 위상을 재고하되, 각자가 데이터 형식을 빌어 파생시킨 바로 그 이미지 객체들에 하릴없이 몰입의 여지를 남긴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강정석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인물들은 전면에 부각된 동세대라는 전제로 인해 정서적 차원에서의 동질감을 유도한다. 달리 말하자면 몰입을 부정하는 1인칭의 궤적 속에서 정작 인물들은 여타의 풍경과 함께 고스란히 압착되지 못한 채 세대적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한 모종의 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강덕구는 이와 관련해 잉여 세대로 분류된 인물 군과 웹상에서 유통되는 정크 이미지를 대응시키지만6), 정작 후자는 사용자 주체의 구체적인 흔적이 부재하는 광범위한 웹 데이터베이스의 일부로써 열람되거나 무성의하게 샘플링될 뿐이다. 강정석의 1인칭은 분명 그러한 역학을 지향하지만 영상 속에서 인물들이 제아무리 루프의 구조를 빌어 무가치한 행동을 반복한들 내러티브 자체는 와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의 내러티브가 (열화된 장면으로부터) 컷아웃시킨 인물들의 어렴풋한 현존성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공동의 경험을 구축할 수 있는 토대라기보다 데이터에 의한 간섭을 의도적으로 지연시킨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가깝다. 강정석의 세계 속 인물들은 지금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공간이 결국 표면으로써 미끄러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채 작가에 의해 주지된 의미 없는 행동들을 별다른 위화감 없이 소화한다. 달리 말해 그들은 표면이라는 전제의 무가치함을 어찌됐든 영상의 단일 프레임 속에서 상연하기 위해, 혹은 지금 관객이 목격하고 있는 스크린조차 표면일 뿐임을 상기시키기 위해 반복적인 슬랩스틱을 구사하는 셈이다. 이것이 과연 잉여 세대의 미학인가? 역설적으로 세대라는 관성은 계속해서 스킨으로서의 무가치함을 방해한다. 동세대 안에 종속된 인물들을 마저 열화시킬 수 없는 강정석은 슬랩스틱의 와중에도 빈번히 그들에게 말을 건네면서 최소한 스마트폰 1인칭 시점에 의해 포착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표면 이전의 구체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복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일상의 잔해들이 정크 이미지로 귀결되는 것을 지향하는 동시에 그 속에 거주하기를 선뜻 자처한다. 결국 관객 혹은 사용자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자신이 은연중에 접촉하고 있던 동세대적인 네트워크를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현실에서는 와해된 동세대를 일종의 레이어로써 부여받은 세계 속에서 공회전을 하는 것만으로 서로가 동류의 존재임을 확인하는 듯한 인물들의 폐쇄회로를 엄연한 외부에서 목격할 뿐이다. 영상 속의 그들에 의해 동세대-레이어는 물신화되었다. 스마트폰의 1인칭 시점은 분명 현실의 타임라인과 동기화한 장면을 포착하지만 그와 별개로 현실 공간의 깊이감은 어차피 표면으로써 귀결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거주하는 유사 주체들은 이를 일상적 차원의 중력으로 체감한 채 다소 기괴한 속도감으로 움직인다. 데이터에 의해 열화된 세계에서 세대적인 내러티브를 유지한다는 모순적인 전제는 이처럼 정크를 먹어치우며 체한 듯한 다중현실을 재생산한다. 달리 말해 시뮬레이팅 서피스Simulating Surface는 단순히 A,B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정석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며 무수한(동시에 불필요한) 표면의 연속체를 양산하는 셈이다.

 

강정석의 작업들로 구성된 유튜브의 재생 목록은 사용자가 그 중 일부를 감상하는 순간부터 모니터 상에서 재생되는 일련의 영상 클립에 불과하지만, 그러한 사용자의 관점과는 별개로 그 안에서 개개의 인물들은 표면상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미끄러지며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거나 떠들면서 오작동한다. 이러한 역학을 일종의 표면 장력이라고 호명해보자. 인물로서 맺혀있기 위해 스스로 수축하는 그들은 표면에 종속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난 좌표를 점하기 위한 관성 혹은 의지에 의해 가까스로 유지되는 별개의 입자들이다. 결국 강정석이 선택한 분기에서 주요한 것은 이러한 유사주체들의 유사라이프스타일을 영상의 폐쇄회로 속에 진공포장한 채 개별적인 링크들로 유통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것들이 서로 연계되었을 때 시뮬레이팅 서피스라는 대체서사가 형성된다. 사회적 맥락에서의 동세대 모델은 여전히 선취할 수 없지만, 데이터 차원에서 열화된 동세대는 역으로 스마트폰의 1인칭 시점을 통해 현실에서 목격할 수 있는 동시에 스킨의 표면적으로 외연을 확장한다.

 

이처럼 우리의 시선은 번번이 표면에 의해 차단되지만 앞선 작업들은 기어코 그에 의해 난반사된 현실의 잔상으로부터 별도의 세계, 혹은 세계 내 주체를 망상해낸다. 지도 인터페이스 상에서 명멸하는 GPS유닛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광범위한 GPS대역 자체에 개인의 의지가 개입할 만한 여지는 없지만, 스마트폰의 위치 서비스가 활성화되며(혹은 대역의 일부가 유닛의 형태로 집적되며) 사용자와 동기화하는 순간 그것은 지도 인터페이스 내부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독립적인 단위체로 표변한다. 결국 그러한 유닛의 1인칭 시점으로 여과한 또 다른 세계를 망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강정석과 김희천의 연속체 이론을 재고했을 때 괄목할 만한 부분은 두 작가 모두 일상에서 포착한 논픽션 이미지를 재료로 삼고 있지만 이를 오로지 개인의 관점에서 소급하며 각자의 세카이계를 재현한다는 점이다.7) 자아와 세계를 동일시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사회학적인 대립을 만회하는 세카이계의 추동은 시뮬레이팅 서피스와 바벨 3부작에 이르러 사용자 경험에 최적화된 세계상의 조율로 번안된다.

 

앞서 상술한 2010년 전후의 작업들이 폐허의 사각을 상황주의적 이벤트를 위한 유사 무대 공간으로 전유했다면, 재설정된 세카이계에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 사각이라는 물리적 범위 자체다. 미술가들이 폐허특정성으로 말미암아 도시 속에서 점유한 제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되묻고자 했던 자기학습 과정은 2015년을 기점으로 한 세대교체 이후 신생공간이라는 형식으로 폐허 속에 자발적인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마침내 유효성을 다했다. 이를 기반으로 2015년 한 해 동안 상연한 장면은 폐허의 내외부를 각종 인터페이스 상에 투사하며 작업 이미지에 최적화된 토대로써 무던히 열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이로써 점차 손실되는 것은 레이아웃으로 변모하는 폐허의 질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닛의 세계에서 공간 자체가 데이터를 표상하는 그래픽 이미지로서 실제의 두께감을 잃어버린 와중에도, 그와 별개의 영역에서 작용하는 현실의 중력은 여전히 주체를 지형지물 사이에 붙들고 있다. 우리는 양자를 분별할 수 있지만 혼종화된 세계를 결코 목격할 수는 없다. 결국 가소성 이후에 주어진 것은 일시정지의 버튼이다. 그것을 눌렀을 때 멈춰버린, 감속한, 불완전한 백업 파일이야말로 지금의 잉여세대가 처한 데이터베이스적인 일상인 것이다. 강정석의 작업을 포함한 1인칭 시점은 바로 그것을 쳐다보려 하고 그럴수록 표면들은 누적된다.

 

1) 큐브-SNS연속체란 신생공간의 동역학을 부연하기 위해 고안된 조어이다. 개별 신생공간들은 대부분 전시 목적과는 무관한 임대공간이나 유휴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반드시 단일한 입방체의 형태는 아니지만, 청년 세대가 점유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큐브라고 호명된다. 신생공간은 그런 의미에서의 큐브들이 서울 각지에 개별적으로 산포한 동시에 전시 관련 이미지-정보들을 트위터와 같은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관객들이 자발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큐브가 담보한 일련의 공간적인 한계를 만회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2) 윤원화, <도시 노후화와 뉴타운 사이에서 - 항산화제로서의 미술?>, 서울시립미술관 [리플레이: 4개의 플랫폼&17번의 이벤트] 도록에 수록

3) 강정석, <서울의 인스턴스 던전들 Instance Dungeons of Seoul>, 반지하B½F 텍스트

4) 윤원화, <도시 노후화와 뉴타운 사이에서 - 항산화제로서의 미술?>, 서울시립미술관 [리플레이: 4개의 플랫폼&17번의 이벤트] 도록에 수록

5) 세카이계는 일본 서브컬처에서 비롯한 용어로써 특정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자아 혹은 주인공과 히로인 간의 관계와 같은 지엽적인 요소를 세계의 흥망성쇠와 동기화시키는 내러티브 구조를 일컫는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있다. 강덕구는 <X의 눈 : 강정석=김희천 연속체 가설>에서 아즈마 히로키가 정식화한 세카이계 개념을 빌어 김희천이 주조한 세계는 사회와 무관한 주체의 시점 내부로 회귀하는 자폐적 세계다. (...) 이들은 정치/사회적 갈등을 자아와 세계의 투쟁으로 전치한 세계관을 공유한다.”라고 언급한다. 자세한 내용은 오큘로OKULO 001: 오디오비주얼 리서치,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66p 참고.

6) 강덕구, <X의 눈 : 강정석=김희천 연속체 가설>, 오큘로OKULO 001: 오디오비주얼 리서치, 지식과 감각 사이에서, 64p

7) 세카이계는 주체의 내면에서 공회전하는 유사 폐쇄회로이기도 하다. 이때의 주체를 데이터베이스 세계를 토대로 한 소비자 동물과는 별개로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현실을 감각하는 사용자로 치환했을 때, 김희천의 작업에서 제시되는 디스토피아는 데이터와 혼종화한 세계를 사용자 차원에서 재구성한 대체서사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권시우, <포스트 인터넷, 디지털, 혹은 운석들>, 집단오찬(http://jipdanochan.com/70) 참고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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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인터넷, 디지털, 혹은 운석들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현재라는 시점을 가까스로 설정해보자. 그것은 접속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아카이브에 축적된 무분별한 과거의 잔상들의 총합이 아니다. 현재에 나름의 윤곽을 부여하기 위해 그러한 정보량을 모조리 동원하는 순간 정작 포착될 수 있는 것은 개개의 정보값을 잃은 채 서로 중첩되거나 그럼으로써 파열되는 수열적인 이미지들의 불협화음 자체일 것이다. 엇비슷한 맥락에서 또 하나의 망상을 거듭해보면, 웹 데이터베이스 전체를 단번에 조감할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이란 걸 가상 차원에서나마 탑재한 채 우리가 목격할 수 있다고 짐작되는 풍경의 밑그림 또한 아마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일한 포맷을 전제하는 웹사이트들의 연속체에 온갖 어플리케이션들이 링크됨으로써 마침내 웹2.0이 도입되고, 국내 시점으로 2009년 말부터 아이폰3GS가 상용화됨으로써 이러한 링크들이 보다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 상에서 가속화되었다고 할 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느덧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수사를 앞지르며 그로부터 파생된 미디어 컨텐트들을 순전히 일상 차원에서 일별하는 동시에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또한 휴대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이제 관성이라기보다 습관에 가깝다. 결국 보다 직접적으로 상기할 수 있는 현재란 딱히 과거라는 특정 시기와 대질할 필요가 없는, 애초에 출처가 희석돼버린 정보-이미지들을 앞선 환경을 토대로 의 편의에 따라 동기화시킨 일시성의 감각에 근거한다.

 

최근 미술계에서 생산되는 일련의 작업들은 그런 맥락에서의 현재성을 공유한다. 이때의 현재성이란 주지하듯 구체적인 시간의 궤적이라기보다 지금의 시점에서 모종의 이미지들을 작업의 재료로써 취한다고 할 때 작가 이전에 사용자로써 자연스레 경험할 수밖에 없는 전제조건에서 비롯한다. 결국 관건은 이러한 경험 자체를 나름의 방식으로 가시화해내는 방식, 혹은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추동에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김정태가 반지하에서 진행한 현피프로젝트에서 하나의 벽면을 유사 프레임 삼아 그간 자신이 축적한 드로잉 기반의 작업들을 그 안에 무분별하게 배치했을 때 프레임 내부에서 분산되는 소실점은 단순히 패치워크의 눈금선 따위로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이미지를 어떻게든 현실 차원에서 재현시키기 위한 모종의 방향성으로 작용하게 된다(혹은 작가 본인이 그것을 의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김정태가 일시적으로 점유한 공간이 결코 OS가 아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프레임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실상 여러 개 유닛의 동시 실행이라는 하이퍼스레딩의 다소 피상적인 면모만을 빌려와 즉각적으로 대입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제목이 암시하듯, ‘현피는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구동되는 복합적인 명령어가 대뜸 가상이라는 레이어를 던져버린 채 별다른 매개 없이 현실에 저돌적으로 출몰했을 때 어떤 식으로 무효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다. 김정태는 현피이후에 지속적으로 이러한 프레임의 확장판을 모색하는 듯하다. 이제 개별 작업들은 <오토세이브>의 경우에서처럼 웹상에서 수집된 이미지 자체를 임포트하여 자율연상적인 필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한층 배가된 속도감을 선취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현실에 접속되는 순간 굳어버린다는 전제 하에 파본들의 물량으로 동기화된 채, 프레임 내부에 (물리적으로) 대거 동원된다.


김정태, <현피(現實+playerkill)>, 2014. (http://gimjeongtae.tumblr.com/)

 

박아람과 협업한 ‘100 1000 10000’1)에 이르면 파본은 마침내 이미지로써의 지위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기에 이른다. 박아람이 포토샵의 자석 올가미 툴을 이용해 디지털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측량한 단위체인 운석들의 형상은, 앞선 6분 남짓의 영상에 동원된 온갖 클립들과 지속적으로 중첩되고 또한 픽셀 단위로 일그러지기를 반복하며 하나의 유기체적인 루프를 구성한다. 애초에 운석들에 사용된 자석 올가미 툴은 특유의 자동화된 우연성으로 인해 크롭의 대상인 이미지의 본래적 속성으로부터 번번이 이탈하며 그러한 행위가 반복될수록 실상 출처라는 개념은 무용해진다. 결국 ‘100 1000 10000’은 이처럼 오로지 결과값만이 존재하는 일련의 형상들의 역추적할 수 없는 경로를 타임라인 상에서 재연하는 셈이다. 어찌됐든 동일한 타임라인 상에 위치한 클립들은 간혹 실사 이미지와 웹 페이지 링크 등의 면모를 노출하지만, 개별 운석과 마찬가지로 그저 루프를 이루는 불가해한 표면으로써만 존재할 뿐 어떠한 방식으로도 온전히 독해될 수 없다. 역으로 김정태의 시점에서 본 작업을 일별할 때 이는 결국 물량 자체가 무효한, 동시에 그럼으로써만 현실에서 재연되는 일종의 형해화된 하이퍼링크나 다름없다.


1) 박아람 x 김정태, <100 1000 10000>, 2015. https://vimeo.com/149115168에서 감상할 수 있다.


이처럼 포스트 인터넷세대라고 투박하게나마 호명할 수 있을 일군의 작가들은 각자가 체득한 웹상에서의 경험치 자체를 이미지로써 구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터페이스를 차용한다. 박아람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자석 올가미 툴을 사용한다고 할 때, 엄밀히 말해 그것은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측량의 도구라기보다 웹 이미지가 전제하는 수열성을 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수행할 수 있는 규칙들로 환원하기 위한 일종의 좌표 설정에 가깝다. 이를 방증하듯 자석 올가미 툴연작은 어찌됐든 측량된 결과인 출처 불명의 윤곽선을 템플레이트 삼아 그것을 반복적으로 드로잉하거나 운석들의 경우 윤곽 자체를 3d프린터로 부조해내는 식으로 다소 직접적인 매체 간 번역을 시도한다. 결과적으로 경험치 자체는 반드시 특정적인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포스트 인터넷의 자장 안에서 동기화된 각종 소프트웨어 미디엄을 활용하는 감각 자체에 대한 형상화 기제가 현실에서 번안된 이미지로 귀결될 뿐이다.


박아람, <Magnetic Lasso Survey>, print and highlighter on drafting paper, each 56x99cm, 2012 (April). / 

박아람, <운석들>, 3d 프린트, 가변크기, 2015.

(http://rahmparc.tumblr.com/)


우리는 대략 이러한 파편적인 얼개의 이미지 서사 한 가운데에 있다. 혹은 그 근저에서 작동하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인터페이스 차원에서 다소 편의적으로 수렴하고 그러한 표층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점멸하는 가운데 때때로 상호 교차하며 우연찮은 궤적을 그린다. 이때 서사란 하부구조로부터 단단히 쌓아올린 공통의 역사적 블록들이 아니라 표층 이면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을 상정한 채 다소 조건반사적으로 구술되는 방언에 가깝다. 인터페이스는 일종의 유리벽인 동시에 바로 그러한 차단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직접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그것을 비로소 작동시킨다. 반드시 논리적인 추론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인터페이스로부터 난반사된 표층의 언어들은 그 자체로 운동성을 지니며 포스트 인터넷을 어렴풋이 체감한 작가들은 이제 그것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재차 유사 이미지를 가공해낸다. 그러나 여전히 유사라는 접두어는 착란적인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를테면 방언들의 우연적인 집합이 최소 단위의 서사를 이룬다면 우리는 다시 그것을 블록 삼아 현실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김정태와 박아람이 바로 그러한 질문 자체를 의도적으로 회피한 채, 서사 이전의 이미지 블록만으로 현실계에서 다소 자폐적인 방식의 규칙들을 조형해나간다면 그와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서사 자체에 주목하는 일련의 전략들이 존재한다. 김희천의 바벨 3부작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매우 사적인 내러티브를 빌어 현실을 극적으로 증강시키고 덕분에 일련의 영상들에서 묘사되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마치 데이터로 포화될 것만 같은 유사디스토피아로 표변한다. 이를테면 서두격인 바벨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익명의 개인은 하나의 유닛으로써 GPS의 경로에 따라 구글 맵상을 활보하고 그러는 와중에 점차 평면상에서 유실되는 데이터의 흔적들은 실상 그의 실존을 역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로써 주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은 점차 공간의 외연으로 확장되며 종내엔 서울이라는 도시 전체를 뒤덮는다. 달리 말해 웹 지도의 평면성으로부터 고스란히 3d로 복각된 서울은 GPS유닛의 시점에서 비롯한 뷰잉viewing이다.

 

영상 내내 라고 호명되는 누군가에게 파국의 심정을 무미건조하게 읊조리는 화자의 내레이션은 이 모든 텅 빈 장면들에 세기말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동시에 관객으로 하여금 랜더링된 서울 모형을 실제와 혼동할 수 있을 만한 이입의 시점을 부여한다. GPS유닛의 익명성은 그것이 상정하고 있는 데이터의 부호화와 별개로 바벨의 사적인 층위들과 연루되며 (적어도 러닝타임 내에서) 모두를 관통할 수 있는 극적 장치로써 기능하는 것이다. 그러한 서사적 흐름에 의해 탈각된 도시의 잔해들은 이어지는 ‘Soulseek/Pegging/Air-twerkging’에서 서사의 구심을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채 3D좌표 상에서 무작위로 재배치되거나 때로는 불필요한 덩어리로써 군집하며 철저히 도구화된 성격을 드러낸다. 결국 바벨이 유도하는 착시란 실제 도시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적 증언이 아니라 도시에 관한 인터페이스 경험이 개인에 의해 온전히 통제될 수 없을 때 어렴풋이 느껴지는 불길함을 시각적으로 재연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정작 도시의 인프라는 데이터의 침해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구글 맵과는 다른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실존한다. 3부작의 대단원인 랠리에서 김희천은 실제 도심을 가로지르며 재차 죽음과 연루된 파국의 정서를 유리 파사드에 투사하지만 그로부터 난반사되는 이미지들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구체적인 현실을 포착한 결과가 아니라, 스마트폰의 1인칭 시점 속으로 이입되는 방언에 가까운 내레이션들이 불러일으킨 주술적 효과에 가깝다. 달리 말해 랠리가 최종적으로 120층 남짓의 롯데월드 타워의 고점에 도달했을 때 체감되는 수직성은 그러한 텍스트-몽타주를 발판으로 삼는다. 그 외에 이미지를 지시하는 구체적인 패러미터는 부재한다. 즉 우리는 여전히 내레이션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어휘를 빌려야만 데이터로 포화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달리 말해 아직 미처 증강되지 못한 포스트 인터넷 환경에 상주하고 있는 셈이다. 바벨 3부작이 반복적으로 불시착하는 죽음의 무게감은 랠리에 이르러서 끝내 농담으로 얼버무린 모호한 눈금 선을 가리킨다. 데이터 세계에서의 죽음은 결코 표층을 꿰뚫지 못한다. 현실에서 미처 애도하기도 전에 다시 수열성의 흐름 속으로 통합될 뿐이다.


김희천, <랠리 Wall Rally Drill> , 2015, 싱글채널비디오, 32m.(http://heecheon-kim.tumblr.com/)

 

이러한 논의는 재차 프레임이라는 원형의 상태로 되돌아온다. 김정태가 현피<오토세이브>에서 하이퍼-이미지를 현실에 재연하기 위해 각각의 요소들을 격자 단위로 재배치함으로써 하나의 전체 화면을 구성했다면 김희천은 영상의 최소 단위로써의 프레임을 3d모델링의 세계에 투사하는 식으로 가상의 시점을 확보한다. 양자는 시간을 일종의 선형적인 연속체로써 전제한 채 이를테면 과거 사진이라는 매체가 그러했듯 대상을 향해 셔터를 누름으로써 인위적으로 정지시킨, 혹은 그럼으로써 시간으로부터 고립된 시각적 기호를 추출하는 식으로 디지털 세계를 대질한다. 그에 대한 결과란 바로 일련의 작업들에서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어딘지 모르게 불완전한 프레임으로써의 잔영이다. 그러나 앞서 설정한 현재 시제와 마찬가지로 포스트 인터넷 환경이란 본질적으로 표층 이면에 축적된 과거를 스킨의 양태로 포화시키고 종내엔 모더니즘적인 시간성 자체를 불협화음으로 꼬아버린다. 우리는 이러한 표층 이후의 시공간을 여전히 프레임으로 온전히 포착 내지는 호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때 발현되는 정지의 순간이란 결국 우리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혼종화된 이미지 덩어리거나 프레임이란 단위를 투과하며 원근법적으로 압축된, 실상 데이터와는 무관해 보이는 단출한 장면이다. 이때 우리는 다소 섣부르게 상정된 포스트 인터넷의 세계상과 마주친다. 그간 축적한 웹상에서의 경험치, 혹은 이를 기반으로 한 인터페이스 감각은 이처럼 미처 도달하지 못한 현실의 지점을 어떻게든 와 맞닿은 시계視界로 끌어당겨 중첩시키려 한다. 이러한 추동을 설명하기 위해 과연 어떤 사족들을 덧붙여야 할까. 앞선 경험치의 맥락에서, 이미지 요소들을 즉각적으로 변용하고 동시에 유통시키는 이른바 짤방의 속도감은 매번 사용자의 감각 차원을 헛돈다. 이러한 잔여의 전류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것을 현실에서 증폭시킬 마땅한 대체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의 괴리를 만회하기 위해 다소 인위적인 속도의 이미지를 가교로써 배열한다. ‘바벨의 언어를 빌자면 세계는 어쩐지 불길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의 실제 정체가 무엇이건, 이제는 에게 익숙한 방언들로 구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일군의 작가들은 더 이상 수열성이 지배하지 않는 현실계에서 물성을 지닌 채 굳어버린 디지털 화석을 작업의 재료삼아 순전히 의 감각에 기반한 유희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 이는 다중적인 소프트웨어 환경과 동기화된 일시성의 감각이라기보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무수한 분기들 중에서 다소 편의적으로 선택된 단 하나의 결과값일 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수사와 어느 정도의 근사치를 구성한다. 이미 추출된 디지털 화석들은 이면의 논리와 단절된 채 그 자리에 불시착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지극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달리 말해 사용자 친화적으로 규정된 채 앞으로의 궤적을 이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포스트 인터넷을 둘러싼 현재의 윤곽을 임의적으로 붙들고 있는 관성이다. 인터페이스 감각은 현실의 시점을 교란하며 은연중에 사잇공간을 열어놓지만, 우리는 그 너머에서 여전히 불시착한 운석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단지 데굴데굴구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이 프레임 내부에서 불완전하게 감속됐을 때, 바로 그러한 불안정함으로 말미암아 역으로 포스트 인터넷과 실제 현실이 서로를 간섭하는 이종의 전류를 엿보게 된다. 

Posted by jipdano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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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3.03 00:57 신고 jipdanochan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s) 본 글의 "단일한 포맷을 전제하는 웹사이트들의 연속체에 온갖 어플리케이션들이 링크됨으로써 마침내 웹2.0이 도입되고, 국내 시점으로 2008년 이후 아이폰이 상용화됨으로써 이러한 링크들이 보다 사용자 친화적인 인터페이스 상에서 가속화되었다고 할 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느덧 ‘사용자 친화적’이라는 수사를 앞지르며 그로부터 파생된 미디어 컨텐트들을 순전히 일상 차원에서 일별하는 동시에 나름의 방식으로 재배치하며 또한 휴대한다."라는 대목에서 언급된 국내에서의 아이폰3GS 출시 시기를 2008년으로 오기했던 것을, 2009년 말(2009.11.28)로 사후 정정했음을 밝힙니다.